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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낮 예배 설교 ] 복된 만남을 위하여

 

 

 

 

말씀 : 눅10:30-37

제목 : 복된 만남을 위하여

1.내가 먼저 좋은 사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태어나서 어떤 사람과 만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구를 만나느냐에 의하여 우리의 삶의 모습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모도 잘 만나면 좋습니다. 돈과 명예와 사회적 지위와 게다가 인품까지 좋은 부모를 만나면 자식의 삶이 평안하고 부요하고 복될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술주정뱅이에다가 인품까지 고약한 부모를 만난다면 자식의 삶이 험난할 것입니다.

물론 배우자도 그렇죠. 그런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경제적 능력과 사회적 지위와 출중한 외모와 훌륭한 인품을 가진 배우자를 만난다면 당연히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쥐뿔도 없는데다 성품까지 고약한 배우자를 만난다면 당연히 삶이 힘들고 고달플 것입니다. 물론 친구나 이웃도 마찬가집니다.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을 만나면 많은 유익과 기쁨을 누리게 되지만 고약한 사람을 만나면 정말 피곤하고 힘든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러므로 물론 다 기왕이면 좋은 부모, 좋은 배우자,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을 만나야 되겠지만 그러나 내가 그렇게 좋은 사람을 만나려면 먼저 내가 좋은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좋은 사람이 못되면서 좋은 사람을 만나려고 한다면 속된 말로 도둑놈 심보가 아니겠습니까? 소위 황금율이라 불리는 마7:1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당연하잖아요? 나는 남을 대접해주지 않으면서 나는 남에게 대접받으려고 한다면 얼마나 모순된 일입니까? 내가 좋은 이웃, 좋은 친구가 되어 주지 않는데 누가 나를 좋은 이웃, 좋은 친구로 대하겠습니까? 나는 좋은 남편, 좋은 아내가 되지 못하면서 어떻게 배우자에게 좋은 아내, 좋은 남편이 되어 주기를 바라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삶에 있어서 정말 만남이 중요하므로 여러분도 좋은 분을 만나되 그러나 그 전에 여러분이 먼저 좋은 사람이 되기를 힘씀으로 결국은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되고, 좋은 만남이 되어 서로가 함께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2.남에게 끔찍한 불행을 준 사람

그런데 여러분, 안타깝게도 오늘 말씀에 보면 자기는 좋은 것을 누리려고 하면서 남에게 너무나 끔찍한 아픔과 고통과 슬픔을 주는 아주 나쁜 사람을 보게 됩니다. 오늘 30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여러분, 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고 안타깝고 비극적인 일입니까? 서로 생명을 살려주고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주어도 시원찮을 판에 이 무지 몽매한 강도는 돈 몇푼 얻으려고 다른 사람의 옷을 벗기고 때리고 심지어 다 죽어가는 사람을 버리고 도망을 간 것입니다.

여러분, 이 강도는 잘먹고 잘살려고 이런 몹쓸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정말 행복과 기쁨과 가치를 가져다주겠습니까? 뭐 빼앗은 것을 사용할 때에 잠시 자신의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켜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그 심령이 평안할 리도 없고 성령 평생 그 짓을 해서 잘 먹고 잘 산다고 할지라도 평생 동안 온갖 비난과 욕을 얻어먹고 손가락질 당하며 살아가는 더럽고 추하고 무가치한 인생에 불과한 것이요, 결국 영원한 지옥불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너무나 불쌍하고 불행한 인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또 이 강도를 당한 사람의 고통과 아픔과 상처는 어떻겠습니까? 물건을 빼앗겨 물질적으로 많은 손해를 본 것은 고사하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습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엄청난 아픔과 상처를 받았고, 극도의 공포와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후의 삶도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들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즉 이 미련한 강도의 짓은 결국 자기도 죽고 남도 죽게 만드는 심히 어리석고 무지하고 바보 같은 짓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결코 이런 우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또 크든 작든 또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나 절대 남에게 상처와 아픔과 고통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결국 자기도 죽고 남도 죽이는 하나님께도 책망듣고, 사람들에게 욕먹고 멸시당하고 손가락질 당하고 무시당하는 어리석고 무지하고 더럽고 추하고 볼품없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더 생각 해야 할 것은 내가 남에게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주지 말아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동시에 나 스스로가 그런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론 때론 불가항력적인 불행이 있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사실 따지고보면 스스로 자초한 불행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정말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그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구하며 그 말씀을 따라 선과 진리와 의 가운데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살아야 하는데 기도도 하지 않고 말씀도 마음에 새기지 않고 그래서 주님의 뜻과는 어긋나게 자기 마음대로 왜곡된 길로 잘못된 길로 다니다가 마귀의 밥이 되어 봉변을 당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강도를 만난 사람도 사실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이 사람에께 끔찍한 고통을 준 강도는 엄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 중의 죄인임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강도를 당한 사람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닥 봉변을 당했는데 그 길은 본래 매우 험한 길이라서 강도가 자주 출몰하는 우범지역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그 길을 가기를 꺼렸고 부득불 가야 할 때는 여럿이 함께 다니는 것이 상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대책도 없이 혼자 그 길을 가다가 그만 봉변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우리 인생길 전체에서나 혹은 인생길의 어떤 한 과정에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든 나혼자 내 마음대로 하다가는 그런 불행한 일을 만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즉 기도하며 말씀 안에서 오직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인생길을 걸어가며 무엇인가를 추진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그냥 내 마음대로 자신만 믿고 자기 생각대로 주님께서 동행하지 않는 길로, 심지어 주님께서 싫어하시는 길로 가면 자칫하면 이런 봉변을 당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가 캄캄한 밤길, 으슥한 길에 숨어 있는 강도처럼 숨어 있다가 우리 영혼과 정신과 물질과 육신을 덮침으로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당하기 십상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과거에 우리가 경험했던 실패나 아픈 기억들이 엎드려 기도하며 주님과 동행하며 온전히 주님의 뜻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삶을 영위했더라면 대부분은 경험하지 않아도 될 아픔이 아니었을까요? 그냥 내 경험과 지식과 이성을 따라서 내 마음대로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길로 자기 마음대로 갔기 때문에 당했던 그래서 결국 스스로 자초한 불행과 아픔과 상처는 아니었을까요? 마치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불행을 자초했던 것러첨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내 경험과 이성과 지식을 따라 내 마음대로 혼자 돌아다니지 말고 우리의 완전하고 유일한 보호자이시며 인도자이신 예수님과 온전히 동행해야 합니다.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시는 길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 길이 안전하고 그 길이 복되고 그 길이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절대로 자신의 생각과 능력과 경험만을 의지하며 자기 마음대로 다니지 말고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인도하심과 그 뜻을 따라 겸손히 주님과 동행할 때에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 사람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가 또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너무나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지나쳐간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31절, 32절을 보겠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여러분,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지금 강도를 만난 사람은 절체절명의 상황으로 누군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때 제사장이 그 길로 지나가면서 어찌된 영문인지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을 외면하고 그냥 지나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레위인이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도 역시 이 사람을 못 본척하고 지나쳐 버렸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었을까요? 물론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 강도 만난 사람이 이미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당시 시체는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걸 접촉하면 자신도 부정하게 됨으로 피해서 갔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금방 사고를 당한 것으로 보아 아직 강도들이 근처에 있을 것으로 보고 서둘러 도망갔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무언가 급한 일이 있어 이런 일에 끼어들었다가 시간이 지체되거나 성가신 일이 생길까봐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떤 경우든 그들의 행동은 생명을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상황이나 안위나 평안함만을 구하는 무지하고도 어리석은 행동이었습니다. 어떤 경우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단은 이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과 레위인은 안타깝게도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그래서 강도만난 사람은 생명을 구함 받음으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고, 반대로 제사장과 레위인은 죽어가며 고통 받는 생명을 살림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귀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복된 기회를 날려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니 복된 기회를 그냥 날려버린 정도가 아니라 이건 제사장과 레위인으로서 아니 굳이 제사장과 레위인이 아니더라도 인간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저버림으로 주님의 책망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에서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주는 것만 악이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않는 것도 죄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사람을 직접 해치거나 고통을 주지는 않았지만 마땅히 돌봄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함으로서 간접적으로 아픔과 고통을 당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주님의 준엄한 경고를 받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적극적인 악만이 죄가 아니라 소극적 악, 즉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 마땅히 선을 행해야 하는데 하지 않는 것도 악입니다. 그래서 약4:17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여러분, 보세요.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하지 않으면 죄라고 하지 않습니까? 당연하잖아요. 선을 행함으로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주는 것이 사람의 책임과 의무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내가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결국 다른 사람이 손해를 보거나 아픔을 겪지 않습니까? 그러니 당연히 죄가 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에게 적극적으로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남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유익을 주어야 할 때에 수수방관함으로 결국 죄를 짓는 어리석은 삶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도리어 적극적으로 선과 진리와 의를 행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가져다주며 결국은 자신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생명의 기쁨을 가져다 준 사람

앞에서는 여러 가지 안타까운 모습들이 있었는데 다행히 우리는 마지막 부분에서 정말 아름다운 장면을 보게 됩니다. 33~35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강도 만나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드디어 구세주와 같은 사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여행을 하던 중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지체 없이 그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신속히 응급조치를 취한 다음에 주막으로 데려다가 주고는 치료비까지 내어 주며 돌보아 달라고 부탁을 하고는 자기의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아름답고 귀하고 멋있는 사람입니까? 이 귀한 사람으로 인하여 강도 만나 다 죽어가던 사람은 새 생명을 얻음은 물론 비록 한편으로는 이 아픈 기억으로 말미암아 힘들 때도 있겠지만 이 귀한 사람으로 인하여 감사와 기쁨의 마음도 갖게 되고 새로운 희망과 소망 가운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사람은 육체의 생명을 살릴 뿐 아니라 영적 정신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주는 복되고 아름답고 귀한 일을 한 것입니다. 또 사실 그 자신도 하나님께서 천하보다도 귀히 여기는 생명을 사랑하여 자신의 물질과 시간과 정성을 드려 살려 줌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입게 되고 그래서 그 자신도 더욱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으며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도 이와같이 하라고 하시면서 그래서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 좋은 만남의 관계 속에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삶을 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님이 주신 말씀을 상고해 보면서 우리 삶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어렵고 힘든 상황을 만났던 적이 있다면 환경이나 상황이나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기 전에 먼저 스스로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나고,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들어갔었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구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인데 내 생각과 경험과 의지와 왜곡된 가치관을 따라 내 코가 석잔데 남에게 도움을 줄 여유가 어디있느냐며 합리화시키고 변명하면서 하지 못할 때가 많았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정말 이제 후로는 먼저 정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빛이신 예수님과 온전히 만나 교제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와 상황과 환경을 가까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밀접한 만남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어 주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과 주님의 주시는 힘과 능력과 지혜로서 우리의 육신과 영혼과 마음을 공격하는 마귀사탄의 공격을 물리침으로 절대로 강도 만난 인생이 되지 않고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축복이 넘쳐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러한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과 은총으로 영적 육체적 물질적으로 강도를 만나 고통을 당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주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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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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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진정한 행복

 

 

 

제목 : 감사하는 자의 복

말씀 : 시107:1~7

1.감사는 현재를 행복하게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가 누굽니까?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굽니까? 그것은 권세나 지식이나 재물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키가 크고, 인물이 훤칠하고, 능력이 많은 사람도 아닙니다. 정말로 행복하고 부유한 사람은 감사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이요, 모든 것을 누리는 사람이요, 그래서 진정한 행복을 아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100여세대가 살고 있는 15평짜리 낡은 아파트 단지가 있다고 칩시다. 여기에 모여사는 사람들은 물론 특별한 경우도 있겠지만 아마도 대부분은 기본 재산도 별로 많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월급도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재산도 월급도 많지 않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천차만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연속극에 나오는 넓고 호화스러운 집과 멋진 청춘남녀들과 그들이 다니는 멋진 직장을 보면서 저 사람들은 무슨 복이 많아서 저렇게 좋은 집에서 좋은 직장을 다니며 너무나 멋지게 생긴 사람들과 사는데 내 꼴은 이게 뭐냐고 탄식하며 원망하며 불만이 가득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집에 들어갈 때마다 감사할 것입니다. 비록 작지만 열심히 일하고 돌아와 안식할 수 있는 이 귀한 보금자리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나를 기다리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음을 감사합니다. 비록 많은 월급은 아니지만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일터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비록 넉넉지는 않지만 우리 가족 먹을 것, 입을 것, 편히 누워 쉴 수 있는 보금자리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엿새동안 힘써 일하고 주일 하루 쉬면서 예배드리고 가족과 함께 하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떻습니까? 똑같이 기본 재산이나 월급도 많지 않고 15평짜리 낡은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전자의 사람은 그나마 그 작은 아파트도 진정으로 소유하지도 누리지도 못하는 그야말로 가난뱅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후자의 사람은 비록 가진 것이 많지는 않지만 모든 것을 소유하고 모든 것을 누릴 줄 아는 부유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 개를 가지고도 백가지를 누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백개를 가지고도 한가지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면 누가 부자입니까?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물론 한 개를 가졌어도 백가지 천가지를 누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백개 천개를 가졌어도 한가지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만가지를 주어도 한가지도 누리지 못하는 가난뱅이인 것입니다.

인터넷의 어떤 사이트에서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내 손에 펜 한 자루 쥘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그 펜으로 그림도 그릴 수 있고, 사랑의 편지도 쓸 수 있으니까요. 내 입으로 말 한마디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그 입으로 사랑의 말을 할 수 있고, 주님을 찬양할 수 있으니까요. 내 발에 신발 한 켤레가 신을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그 신을 신고 집으로도 일터로도 갈 수 있고, 산책도 할 수 있으니까요.

내 귀로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아름다운 음악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위로의 말을 들을 수 있으니까요. 내 코로 향기를 맡을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은은한 꽃향기와 맛있는 음식 냄새와 사랑하는 이의 체취를 느낄 수 있으니까요. 내 곁에 부모형제와 친구가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서로 의지하고 기대고 마음을 털어놓으며 따뜻한 위로의 말도 전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못해도 손에 펜만 한 자루 쥘 수 있어도, 말만 할 수 있어도, 들을 수만 있어도, 걸을 수만 있어도, 냄새만 맡을 수 있어도, 내 곁에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그것만으로 감사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뭔가 가치와 의미와 보람과 기쁨을 찾는데는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이라도 가진 것을 진정으로 누릴 줄 아는 사람의 것입니다. 지식이나 권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 하나라도 감사할 줄 아는 자의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 격언에는 천국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로 가득한 곳이고, 지옥은 불평하는 자들로 가득한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특별히 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없는 거, 모자라 거, 약한 것, 부족한 것 생각하며 원망 불평 낙심 절망하지 말고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살전5:18절에서는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정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이 풍성한 계절을 주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멀쩡한 사지를 주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 자유와 평화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더 많은 것을 달라고 하기전에 먼저 감사함으로 행복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저와 여러분은 감사와 은혜가 충만한 심령으로 기쁨이 충만한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감사는 행복한 미래를 보장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감사는 오늘을 행복하게 할 뿐 아니라 내일의 복을 보장해 주는 가장 확실한 보증수표이기도 합니다. 감사할 때에 지금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지만 감사할 때에 힘도 생기고 지혜도 생기고 용기가 생깁니다. 긍정적 적극적 에너지 넘치게 됩니다.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여유가 생깁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게 됩니다. 그래서 앞길이 열리고 그래서 더 많은 것들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체불만족의 저자 오토다케 히로타다는 태어나면서부터 사지가 없이 머리와 몸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좌절과 원망이 아니라 이런 아들을 주신 것을 감사하며 긍정적으로 열심히 키웠습니다. 그에게 없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을 생각하며 그것을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특수학교에 보내지 않고 일반학교에 보내 정상적인 아이들과 함께 교육을 받게 하고 그들과 함께 농구도 하고 축구도 했습니다. 대학에 가서는 정상적인 학생들보다 더 많은 동아리 활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당히 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선생으로, 잡지사 기자로, 방송사 캐스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이 오토다케의 부모나 오토다케 본인이 없는 것을 생각하며 원망과 불평 속에 있었다면 이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전생에 내가 무슨 죄가 많아서 이런 아들을 주셨습니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왜 이런 꼴로 나를 태어나게 했습니까? 이런 모습으로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왜 남들 다 가지고 있는 팔다리도 내게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원망하고 불평하였다면 이 사람의 삶의 모습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보나마나 저 길거리 한 모퉁이에서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얻어먹는 거지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토다케의 부모나 그 자신이나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불리한 여건보다는 그들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그것을 최대한 활용했을 때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보다도 오히려 더 감사하며 위대한 일을 감당하며 복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가장 강력한 에너지원입니다. 감사는 자신과 가족과 이웃과 하나님께 대하여 만족감을 느끼게 합니다. 자신과 가족과 이웃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름답게 만듭니다. 긍정의 에너지가 넘치게 만듭니다. 사랑과 기쁨과 용기와 자신감을 가져다줍니다. 갈등과 미움과 저주와 불평과 원망 등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없애버립니다. 또한 감사는 정신적, 육체적 긴장을 완화시켜 줍니다. 면역력을 높이고 활력을 주어 육체의 건강을 지켜줍니다. 질병에 잘 걸리지 않게 하고 설령 질병이 와도 감사와 긍정속에 사는 사람은 치료가 잘 됩니다. 마음이 편해지고, 혈압이 떨어지고, 소화를 잘되게 만듭니다.

여러분, 그래서 이런 사람은 잘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잘 되지요, 힘과 의욕이 생기지요, 마음이 편해지고, 육체의 신진대사도 잘 되지요, 옆에 있는 사람도 기쁘게 하지요, 어려움이 와도 낙심절망하지 않고 용기를 가지고 헤쳐 나가지요, 모든 일에 긍정과 적극성과 성실성을 가지고 임하게 되지요, 그러니 어떻게 잘 안되겠습니까?

그래서 유명한 스펄전 목사님은 “별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 하는 사람에게는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해와 달이 필요 없는 영원한 빛을 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시50:23에서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삶을 통하여 자신과 이웃에게 힘과 의욕과 활력과 기쁨을 주고, 매사에 적극성과 긍정과 열심을 가지고, 그래서 하나님과 이웃을 감동시키고 그래서 오늘이 행복하게 하고 내일의 축복이 보장된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감사가 곧 믿음의 척도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감사는 곧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감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말씀 1-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하며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동서남북 사방에서 모아서 구속하여 주신 은혜를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한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심을 믿는다면 마땅히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창조하심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는다면 감사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이렇게 아름다운 존재로, 이렇게 신비한 존재로 창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셔서 우리에게 맡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셔서 우리의 죄과를 죄대로 갚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걸 알고 믿는다면 어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창조, 인도, 거룩, 의, 선, 구원을 믿는데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감사 곧 믿음이요, 믿음이 곧 감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죄는 감사하지 않는 죄이다.”라고 했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자식이 부모의 은혜를 모른다면 어찌 죄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먹고 입고 잠자고 게다가 천국의 은총까지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는다면 이 어찌 죄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감사가 곧 믿음이고, 믿음이 곧 감사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감사할 수 밖에 없고, 믿음이 있는 자도 감사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미 주신 것이 하나님의 은총임을 고백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주실 것에 대한 믿음으로 감사하며 사심으로 더욱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주님과 동행할때에 더욱 은혜와 기쁨이 충만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구원의 은총에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감사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감사할 수 밖에 없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요건들이 있지만 설령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감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을 비롯한 모든 어둠의 권세에서 해방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2절부터 다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무슨 말씀입니까? 한마디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적들 즉 죄와 마귀와 어둠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속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을 때, 우리가 주리고 목마름으로 피곤할 때 우리를 부르셔서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 돌리고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진정 갈 바를 알지 못하던 인생이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가 생명의 길인지, 어디고 천국길인지 천지도 모르고 제멋대로 살던 인생이었습니다. 죄와 무지와 어둠의 세력에 붙잡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치닫던 인생이었습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커녕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을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건져 주신 것입니다. 다만 건져주실 뿐 아니라 우리가 영원히 거할 저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새 예루살렘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는 더 이상 죄와 무지와 마귀와 죽음의 권세에 억눌려 있는 자가 아니라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시민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찌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큰 은혜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요, 나아가 저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된 것은 더할 나위없이 감사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이 은혜를 아는 자는 감사할 수 밖에 없고, 그래서 감사가 곧 믿음입니다. 또한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는 오늘과 내일의 행복을 보장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은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으로 채워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늘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더 많은 것이 있으면 감사하겠다하지 말고 지금 이미 주어진 것에서 감사거리를 찾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행복해지면 감사하겠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행복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혹시 조금 힘든 일이 있어도 거기에 함몰되지 말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놀라우신 은총가운데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충만한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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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윤택한 영혼을 위하여

 

 

 

 

말씀 : 갈2:19~21

제목 : 영혼을 윤택함을 위하여

 

1.진리 안에서의 갈등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때로 마음이 무겁고 갈등과 고민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초신자들은 공연히 교회에 나와서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차라리 아예 하나님도 모르고 말씀도 듣지 않았더라면 부담없이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텐데 공연히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 말씀 듣고 보니까 부담만 되고, 걱정이 되고, 갈등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일을 잘 하지 못하는 것도 부담이 되고, 이웃을 섬기지 못해서 마음이 무겁고, 때로는 주일날도 가족들하고 어디 나들이나 다녀오고 싶은데 그것도 맘대로 못하고, 헌금생활 제대로 못하는 것도 마음이 무겁고 그렇다고 또 하자니 돈이 아깝고 그래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갈등과 고민이 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만약 여러분에게 이런 고민과 갈등이 있다면 그것은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혼의 감각이 살아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런 고민과 갈등이 없다면 그 영혼은 완전히 죽어서 감각이 없는 영혼인 것입니다. 영혼이 죽은 사람은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육신이 시키는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놀고 싶으면 놀고, 아무거나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등도 고민도 없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도덕적 감각이 완전히 죽어 있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도적질을 하고도 오늘 한건 했다며 먹고 마시고 즐깁니다. 사기꾼들은 사기 쳐서 돈을 빼앗고는 기분이 좋아서 낄낄 거립니다. 마약에 취한 사람은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좋다고 희희낙락합니다. 술에 취하면 죄를 짓는데 용감해 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도덕성이 마비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양심이 죽어서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때리고 차고 꼬집고 별짓을 다해도 아픈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영혼이 죽은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고 죄짓고 제멋대로 살아가면서도 고민이 없습니다. 희희낙락합니다. 제 마음대로 살아가면서 나는 자유하다, 평안하다며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것은 아픔이 있습니다.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은 죄를 지으면 아픕니다. 조그마한 죄에도 통증을 느낍니다. 그러나 죽은 것은 아픔이 없습니다. 죄를 짓고도 뻔뻔합니다. 그래서 영혼과 정신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저 육의 욕구를 따라 살면 되었지만 예수님 믿고 영혼이 살아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한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직도 옛 자아가 남아서 자꾸만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도록 충동질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주인이었기 때문에 내 맘대로 살면서 아무 갈등과 고민 없이 마음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새주인이신 예수님을 모셔들이고 예수님이 이끄시는대로 살아가려고 하는데 아직까지도 내가 주인 노릇하던 그 행세가 남아 있어서 자꾸만 육의 욕망을 따라 가려고 할 때가 많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진리 때문에 겪는 고민과 갈등이 있다면 그것은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영혼이 살아나고 있다는 증거요, 진리에 대한 갈증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갈등과 고민이 우리를 더욱 하나님 앞에 세움으로 성화의 길을 가게 하고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좀 더 풍성하게 누리게 하는 긍정적인 에너지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후7:10절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였지만 그 죄인중에 괴수라는 인식이 자신을 더욱 하나님 앞에 가까이 세우게 함으로써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사를 이루었던 신앙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신앙생활하면서 진리 때문에 겪는 갈등과 고민이 있을 때, 내가 정말 너무 부족하고 미련하고 죄많은 인생이라고 생각될 때, 하나님께 너무 죄송스럽고 마음에 부담이 되고 갈등이 생길 때 너무 낙심하고 탄식하고 자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책하고 탄식하고 낙심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를 더 주저앉힐 뿐입니다. 힘을 빼놓고 무기력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법은 하납니다. 주님 앞에 엎드려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러한 연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래서 갈등과 고민이 있을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주님 앞에 엎드려 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좋으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께서 힘주시고 은혜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점점 성화되어가고 그러면 점차 그런 갈등과 고민도 최소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고민과 갈등보다는 성령께서 주시는 자유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훨씬 크기 때문에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소망과 참 자유가운데 할렐루야 찬양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하면 좀 더 성화되어 주님과의 갈등을 최소화시켜 주님의 은혜들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을까요?

2.속사람을 강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갈등과 고민을 이기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우리를 그렇게 고민과 갈등과 죄속으로 몰아가는 옛자아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옛자아를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님께서 주시는 속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자아보다 새 자아가 힘이 훨씬 세면 우리는 옛자아에게 질질 끌려다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자아보다 옛자아가 힘이 세면 옛자아에게 질질 끌려다니니까 우리의 삶이 엉망이 되는 것입니다.

한 인디언 노인이 손자에게 말했었습니다. “얘야, 사람의 마음속에는 늘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우고 있단다. 한 마리는 악마 같은 놈으로 늘 거짓과 미움과 도적질과 향락과 음란과 분노와 질투와 탐욕과 교만 등의 악한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를 나쁜 길로 내몰려고 하고, 다른 한 마리는 착한 늑대로써 믿음과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희망과 친절과 선함과 겸손과 진실과 용서 쪽으로 우리를 끌고 가려고 하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와 같이 나쁜 늑대와 좋은 늑대가 들어 있어서 끊임없이 싸우고 있단다.”

그러자 손자가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그러면 좋은 늑대와 나쁜 늑대가 싸우면 누가 이기나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그야 사람이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기지!” 그러니까 나쁜 늑대에게 먹이를 주면 나쁜 늑대가 힘이 세져서 이기고, 좋은 늑대에게 먹이를 주면 좋은 늑대가 힘을 얻어서 나쁜 늑대를 굴복시킨다는 것이지요. 힘이 센 놈이 이기는 것은 당연한 거지요.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 믿고 예수님을 새 주인으로 모셔들이더라도 지금까지 우리를 완전히 지배해왔던 이 나쁜 늑대인 옛자아가 완전히 물러가지 않아서 자꾸만 새자아에게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나쁜 늑대인 옛자아를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 나쁜 옛자아를 이기려면 새자아를 강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3:16절에서는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속 사람을 강건케 하라. 그래야 너희가 세상의 모든 죄와 유혹과 왜곡된 사상들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나쁜 늑대의 힘을 약하게 만들고, 좋은 늑대를 힘이 강하게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육체를 강건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육신에 필요한 영양분을 듬뿍 공급하고 열심히 운동을 하면 됩니다.

영혼의 강건함도 동일합니다. 영적인 좋은 양식을 충분히 섭취하고 영적으로 열심히 훈련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쁜 늑대인 옛 자아에게는 먹이를 주지 말고, 좋은 늑대에게만 먹이를 주고 그 좋은 늑대가 열심히 움직이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쁜 늑대는 점점 힘을 못쓰게 되고, 완전히 먹이를 끊어 버리면 굶어 죽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좋은 늑대인 새자아에게는 영양가 있는 풍성한 양식을 충분하게 공급해 주면 살이찌고 생명력이 풍성해지고 힘이 세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양식만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영양가 있는 양식을 듬뿍주고 열심히 운동을 시켜야 근육이 튼튼해져 힘이 세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자아에게 영양가 있는 음식을 듬뿍 공급하고 열심히 운동을 시키면 힘이 세져 바짝 말라서 힘없는 옛자아 따위는 단숨에 때려 눕힐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쁜 늑대에게 주는 먹이는 무엇이고, 좋은 늑대에게 주는 먹이는 무엇입니까? 물론 영적, 정신적 양식입니다. 나쁜 늑대에게 주는 먹이는 이런 것들입니다. 맨날 싸우고 죽이고 빼앗는 폭력적인 오락을 즐기거나 그런 폭력적이고 음란한 영화를 보고, 술집이나 도박장을 기웃거리고, 거짓되고 속되고 우상숭배와 저속하고 더러운 말을 일삼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등이 모두 못된 늑대가 좋아하는 먹이인 것입니다.

반대로 책을 읽어도 건전한 교양도서를 읽고, 아름다운 사랑과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줄수 있는 영화를 보고, 믿음의 사람들, 선한 사람들, 진실한 사람들을 가까이 하는 것은 좋은 늑대에게 먹이를 주는 것입니다. 물론 가장 확실한 영혼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는 것은 우리 영혼을 살리는 확실한 양식입니다. 기도하며 찬양하며 믿음 안에서 아름답게 교제하는 것도 우리 영혼을 살찌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생명력이 넘치게 하는 귀한 양식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기고 전도를 하고 이웃을 돕고 선을 행하는 것은 좋은 늑대를 열심히 운동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의 양식을 먹고, 세상에서도 아름답고 선한 것들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참여하며 선을 행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좋은 늑대에 양식을 풍성하게 공급하고 열심히 운동을 시키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은 100% 확실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자아가 옛자아를 이겨 거룩하고 아름답고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꾸만 옛자아에게 먹이를 주고 새자아는 거의 굶다시피 한다면 보나마나 옛자아가 새자아보다 힘이 세니까 옛자아에게 져서 질질 끌려다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6:55절에서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양식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생수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우리 심령에 모셔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끊임없이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걸 잘 안하니까 영양실조에 걸려 새자아가 맥을 못추는 것입니다. 자꾸만 세상의 헛된 양식만을 사모하며 그것만을 쫓아다니니까 옛자아는 기세등등하고, 새자아는 빈약하기 짝이 없어 옛자아 앞에서 기도 못펴고 초라한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시편1:1-3절에서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양식을 잡수시기 바랍니다. 억지로라도 잡수시기 바랍니다. 살기 위해서 잡수시기 바랍니다. 밥맛이 없을 때 살기 위해서라도, 힘을 내기 위해서라도 억지로 먹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억지로라도 먹고 영적인 운동을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몸을 안 움직이면 몸이 자꾸 약해집니다. 아예 안 움직이면 온 몸이 굳어서 꼼짝도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움직이기 싫어도 자꾸 움직여야 합니다. 운동하기 힘들고 귀찮아도 자꾸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몸이 힘을 쓰는 것입니다.

새 자아도 그렇습니다. 억지로라도 먹어야 합니다. 귀찮아도 먹어야 합니다. 힘들어도 영적인 활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새자아가 강해집니다. 힘이 세집니다. 그래서 옛자아를 이깁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양식, 생명의 양식을 열심히 먹고, 열심히 영적인 활동을 함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속에 있는 새 자아, 영혼, 좋은 늑대가 토실토실 살이찌고 강건해지고 생명력이 넘침으로 끊임없이 우리에게 도전해오는 옛자아를 단숨에 눕혀 버리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예수님을 완전한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속사람을 강건케하여 옛자아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듣고 선하고 좋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열심히 참여해야 하는데 그러면 우리 가운데 나타나는 변화가 무엇입니까? 바로 그런 과정에서 예수님이 내안에 온전히 들어오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그런 지혜와 능력과 은혜를 달라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세울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드디어 예수님이 완전히 우리 가운데 들어오시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시고, 볼 수 있는 눈을 주시고,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진리가운데 살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옛자아란 놈이 감히 준동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악바리 같은 옛자아가 대들긴 하겠지만 그러나 한방에 K.O. 시켜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옛자아가 우리 가운데 온갖 유혹과 정욕과 탐심을 불러 일으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고 협박도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셔서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면 옛자아는 이빨도 빠지고 발톱도 빠지고 힘도 다 빠져버린 호랑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빨도 발톱고 힘도 다 빠져 버린 호랑이는 무늬만 호랑이지 실상은 호랑이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이런 나쁜 늑대, 나쁜 호랑이에게 끌려다니지 않고 그런 것들을 물리쳐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런 삶을 살았기에 승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을 온전히 그의 심령속에 모셔 들여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았을 때에 모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도전과 유혹과 핍박과 환난과 고난을 이기고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0절에서 그는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는 죽었다.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내가 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있는 것은 오직 믿음 안에서 즉 믿음을 따라서, 말씀을 따라서,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인이 되셔서 완전히 그를 사로 잡았기 때문에 주인이신 주님만을 위해서 살 수 밖에 없는 인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에게는 옛자아가 더 이상 준동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모든 역경속에서도 주님의 은혜가 내게 족하다고 하면서 항상 기뻐하며 감사하며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에게 신앙적 갈등과 고민이 있습니까? 마음이 무거울 때가 있습니까? 희망적 징조입니다. 무언가 영혼이 살아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거기에 안주하지도 마십시오. 주님 앞에 엎드리십시오. 조금 더 힘을 내어 여러분의 거듭난 자아에게 양식을 듬뿍 공급하십시오. 영적인 활동을 조금 더 활발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이 여러분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힘 주시고 은혜 주시고 능력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새자아가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생명력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새자아가 옛자아를 확실히 제압하고 예수님 안에 있는 진정한 자유와 기쁨과 평안과 은혜를 온전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삶이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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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주일낮설교/행복한 새해를 위하여 (February,Sunday Sermon)

 

 

제목 : 행복한 새해를 위하여  

본문 : 50:23

1.감사로 주님과 동행합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에도 정말 믿음안에서 기도하며 말씀을 향하여 한발자국 한발자국 앞을 향해 나아갈 때에 주님의 인도하심과 축복하심이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와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사랑과 풍족함이 넘치는 복된 한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서로 한번 축복의 말씀을 합시다. 마음껏 서로를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주님과 기쁨으로 동행하는 한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정말이지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 벌써 2018년입니다. 1900년대를 보내고 2000년대를 맞으며 뉴밀레니엄이니 어쩌니 하면서 전 세계가 떠들썩하게 떠들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이 지났습니다. 2017년 송구영신 예배를 드린다고 준비를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또 1년이 지나 2018년도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지난 1년을 돌아보며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됩니까? 물론 많은 것들이 생각나겠지만 우리가 이 시점에서 가장 먼저 가져야 할 마음은 감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 부족하고 연약하고 허물도 많아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할 노릇 제대로 못한 것도 있고 또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일, 고달픈 일, 실패한 일들도 있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그 모든 것을 덮어 버려서 우리가 이렇게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지나간 한해도 생각해 보세요. 솔직히 너무 부족한 것도 많고, 하나님과 사람앞에 송구스러운 일도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정으로 어려운 일도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정치인들도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실망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까? 물질적으로도 이만하면 풍족하고, 자유와 평화와 질서를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아름답고 풍요로운 땅, 해마다 풍년이 되어 쌀이 남아도는 땅, 이 얼마나 복된 나라며 복된 민족입니까? 전쟁이나 기근이나 테러가 없고, 이렇게 자유스럽게 마음껏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드리고 영광드리며 살 수 있는 것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물론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지역적으로, 국가적으로 어렵고 힘든 일, 때로는 억울하고 원망스럽고 낙심이 되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덮어버리고도 남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수학이 뭔지 아세요?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리는 수학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가히 천문학적인 것입니다. 아니 천문학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값으로 돈으로 수량으로 그 어떤 것으로 계수할 수 없을 만큼 무한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의 가치는 얼마나 되겠어요? 우리가 발딛고 있는 이 지구의 가치는 얼마나 되겠어요? 태양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요? 산소의 가치는? 물의 가치는? 게다가 천국의 가치는? 이걸 돈으로 환산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을 숫자로 나타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말그대로 무한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그냥 공짜로 거저로 주신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만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부모, 형제, 친척, 친구, 이웃, 온 인류 정말 너무나 감사한 존재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서로 돕는 관계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서 되는 것입니다. 독신으로 혼자서 편히 살겠다? 정말 그럴 수 있어요? 없습니다. 독신으로 생활하면서 사용하는 모든 것들을 보세요. 자기 혼자 가능한 게 몇가지나 있겠어요.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의 거의 대부분이 다른 사람에 의하여 만들어진 거예요. 뭐 혼자 잘 먹고 잘살아? 말도 안되는 생각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는 부모형제는 물론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뿐만 아니라 우리는 자연에게도 감사해야 하고, 나라에 대하여도 감사해야 되고, 직장에 대하여도 감사해야 하고 여하튼 다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자연의 가치가 얼마나 되겠어요? 이것도 무한한 것입니다. 그 자연으로 인하여 우리가 누리는 은혜는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수백 억 원짜리 그림보다 더 귀하고 가치 있는 것입니다. 또 그 자연들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들은 얼마나 큰 것입니까? 그런데 이것을 주신 하나님께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고, 그 자연을 어찌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있습니까?

 

교회나 학교나 직장이나 병원이나 무슨 문화시설이나 체육시설이나 상점이나 마을 공동체나 나라나 하여튼 모든 개인에게나 공동체나 기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 것들이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교회도 없고 학교도 없고 직장도 없고 병원도 없고 마을도 기관도 없고 상점도 없고 문화시설도 없고 나라도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럼 그 인생이 어떻게 되겠어요? 거기서 우리가 무엇을 누릴 수가 있겠어요? 우리의 생명을 어떻게 보장받겠어요?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그런데 서로 감사하지 못하고 그저 어떻게든지 서로 속이고 빼앗고 하려고 하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예요.

 

여러분, 감사할 줄 아는 모르는 사람은 동물과 다를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영어로 ThinkThank는 어원이 같은 말입니다. Think 즉 생각이라는 말과 Thank 곧 감사라는 말이 어원이 같다는 것입니다. 즉 생각할 줄알면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감사를 모르면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안그래요? 조금만 생각해보면 어찌 하나님의 은혜나 부모님의 은혜나 다른 사람의 은혜나 자연의 은혜를 모르겠어요? 알면 어찌 감사가 안 나오겠어요?

 

여러분, 오늘 말씀보세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까?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 그냥 형식적으로 의식적으로 기계적으로 무감각하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며 기뻐하며 감격하며 예배를 드릴 때 그것이 정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사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이고, 감사할 때 우리의 삶에도 은혜와 기쁨이 있고, 감사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고, 감사할 때 우리 모두의 삶이 햇빛처럼 밝아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2017년도를 보내고 2018년 새해를 맞으며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새롭게 밝아온 2018년도에도 변함없이 베풀어주실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예배드리며 자유와 평화와 소망가운데 새해를 맞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모든 이웃에도 감사하고, 이 아름다운 대자연에게도 감사하고 그래서 소중히 여기는 가운데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기쁨을 주고 여러분도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합시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새해를 맞으며 우리가 두 번째로 가져야할 마음의 자세는 말씀으로 주님과 동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7절을 보세요.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려는 역사의 전환점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가장 중요한 시점에 이스라엘의 정신적, 영적 지주로서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인도해왔던 모세가 죽은 것입니다. 물론 여호수아가 지도가가 되긴 했지만 솔직히 인간적으로는 여호수아는 모세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애굽에 열가지 재앙을 행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고, 홍해바다를 갈라 애굽의 군대에서 건져주고, 반석을 쳐서 물을 내어 먹여주고, 메추라기 떼를 모아 고기를 먹여주던 사람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하신 일이지만 이 모든 일들을 모세를 통해서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 모세의 수종자로서 심부름 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여호수아에 대하여 신뢰를 갖기가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이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순간이 눈앞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가 강하고 강한 가나안 족속들과 일전을 벌려야만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정말 힘든 상황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걱정하며 불안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백성들의 마음을 안심시키고, 여호수아에게 힘을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약속의 땅을 향하여 두려움없이 가서 그 땅을 차지하여 약속된 축복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걱정하지 말라. 두려워 말라. 마음을 강하게 하라. 가나안은 내가 너희에게 준땅이니 너희가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마음을 강하고 담대히 들어가라. 너희들이 할 일은 하나, 그저 나를 믿고 내 말을 따라서 들어가는 것이다. 오직 내 말을 의지하고 내 말을 신뢰하고 그 말씀만을 따라 살라. 그러면 너희들의 하는 일이 분명코 형통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인간적으로는 우리가 가는 길이 불확실합니다. 내일 무슨 일이 있을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한치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것이 인생길입니다. 염려가 되고 불안하고 걱정되는 일들도 있습니다. 올해 2013년도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로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승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약속과 그의 말씀은 너무나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변개치 않으시고 신실하시기 때문에 결코 부도수표가 없습니다. 분명코 하나님의 약속안에 천국이 있습니다. 생명과 기쁨과 은혜가 있습니다. 세월이 어떻게 전개되든 지구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든 상관없습니다. 혹 고난과 비극적인 역사가 온다해도 상관없습니다. 믿음안에 사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소망이 있습니다. 반드시 천국의 기쁨과 은혜와 자유와 평화가 주어집니다.

 

우리는 그저 신실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을 따라만 가면 됩니다. 아니 내힘으로는 따라 갈 수조차 없습니다. 그냥 말씀 앞에 엎드릴 따름입니다. 그냥 마음에 주님을 모셔들일 뿐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알아서 해 주십니다. 성령님이 인도해 주십니다. 말씀을 따라 가도록 도와 주십니다. 그러면 반드시 영원한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으로도 불가능합니다. 돈과 지식과 명예와 과학과 권세와 그 어떤 것으로도 불가능합니다. 오직 말씀으로만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왜 아니겠어요? 무엇으로 가능하겠어요? 무엇이 영원한 미래를 알겠어요? 세상에는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그 어떤 우리를 온전히 지켜 줄 수도, 온전히 인도해 줄 수도,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완전한 등대이고 인도자이고 천국으로 안내해 주는 유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지나간 한해 여기까지 인도하심을 감사하세요. 이 한해도 감사하며 사세요. 공연히 헛된 것 잡고 발버둥치지 말고 주님의 말씀을 부여 잡고 그거 따라 가세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말씀을 따라 여러분의 인생의 발걸음을 한발자국 한발자국 옮겨 놓으세요. 그러면 결코 실족하지 않습니다. 생명의 기쁨이 있습니다. 은혜가 있습니다. 승리가 있습니다. 천국의 은총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새로 밝아온 이 2018, 아니 여러분의 남은 모든 생애가 바로 그런 날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조학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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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주일낮설교 /복된 새해를 위하여 (February,Sunday Sermon)

 

 

말씀 : 3:1~10

제목 : 축복받는 새해

지하철에서 어떤 아저씨가 칫솔을 팔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안녕 하십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너무 좋은 물건 하나 소개해 드리려고 여러분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물건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게 뭡니까? 칫솔입니다. 왜 가지고 나왔습니까? 물론 팔려고 가지고 나왔습니다.

 

, 칫솔이 이렇게 다섯 개가 한 묶음으로 되어있습니다. 얼마일 것 같습니까? 단돈 천원입니다. 뒤에 보면 made in korea라고 쓰여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수출품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수출이 잘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망했습니다. 잘 되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요.

 

, 어쨌든 백문이 불여일견, 하나씩 드릴테니 찬찬히 구경해 보시고 마음에 드시면 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몇 분이나 사실까요? 저도 모릅니다. 잠시 후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 . 점잖은 신사 분 한분이 구입하셨습니다. 더 구입하실 분 안 계십니까? , 많은 분들이 저를 믿지 못하고 망설이고 계시군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만 팔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제가 몇 개를 팔았습니까? , 한 개입니다. 그럼 제가 얼마를 벌었습니까? 1,000원입니다. 아니 원가를 빼면 300원 벌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제가 실망했을까요? , 아주 많이 실망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제가 여기서 포기할까요? 아닙니다. 저는 다음 칸으로 갑니다. 남은 하루도 즐거운 시간 되시고 안녕히 가십시오.” 그는 이렇게 말하고 다음 칸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멋있는 아저씨입니까? 비록 지하철에서 칫솔을 팔고 있지만, 비록 수입은 많지 않지만 얼마나 여유가 있고, 얼마나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입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혹시 실망할 일이 있을지는 몰라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언제나 다음 칸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새롭게 밝아온 새해에는 혹시 좀 실망스럽고 힘든 일이 있다해도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희망과 긍정 속에 한 해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저 주님 말씀따라 한걸음 한걸음 앞을 향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분명히 생명의 기쁨이 넘치는 한해가 될 줄로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복된 한해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 한해를 정말 은혜가 충만한 시간들로 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은혜가운데 살려면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그러나 긍정의 생각이라고 내 마음대로, 세상 가치관대로의 긍정은 안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긍정하는 것이 올바른 긍정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죄와 어둠 가운데 있고 하나님은 빛이시오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긍정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을 긍정하는 것이 뭐냐,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1:8절을 보십시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보십시오. 말씀을 묵상하라. 지키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할 것이라. 형통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모든 생명과 축복과 평강과 위로와 기쁨의 근원자이십니다. 모든 우주만물과 그 질서와 규칙과 규범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우주만물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모든 우주와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당연히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따라가면 그 인생이 생명과 진리와 은혜로 충만해 질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빛이신 하나님, 생명이신 하나님을 따라가면 빛의 은혜, 생명의 은혜를 누릴 것이요, 어둠과 사망에 속한 마귀 사탄을 따라가면 어둠과 사망의 그늘 속에 살 것은 당연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죄와 어둠속에 있는 너무나 많은 인생들이 자기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마귀 사탄의 달콤한 유혹에 끌려 다니고 있습니다. 인생의 참된 생명의 양식이요,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가져다주는 유일한 규범이며, 규칙이며, 가이드라인이며, 사용설명서인 성경을 무시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도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룰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해서 인간이 스스로 만든 룰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통하지 않습니다. 오직 길이시며 진리이시며 생명이시며 빛이신 예수님이 정해주신 룰만이 하나님께 통하는 길이며 그것만이 인간의 생명을 보장하고 풍성케 하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기억해야 할 것은 오직 성경만이 인간의 삶에 유일하게 완전한 생명을 주고 기쁨을 주고 평안을 주고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유일한 규칙이요, 규범이요, 가이드라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생의 영과 육과 정신에 관한 유일하고 완전한 규범은 오직 성경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천지창조 때부터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알고 인간 존재에 대하여, 인간이 살아가야 할 올바른 길에 대하여 규칙을 정할 수 있는 분은 누구입니까? 우주와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올바른 정보를 가지고 모든 인생은 이러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실 수 있는 분은 누구입니까? 우주안의 그 어떤 존재도 우주와 인간과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다 알지도 못하고 권한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무도 우리에게 진정한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제시할 수 없고, 모든 우주의 질서를 정할 수도 없고, 규범을 만들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룰을 바르게 알고 그 가이드라인을 따라, 그 설명서를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이드라인으로 삼아 육신을 사용하고 시간을 사용하고 물질을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4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 그리하면 그것이 네가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새롭게 밝아온 이 새해에는 오직 우리 인생의 유일하고 완전한 규범이며 등불이이며 가이드라인이며 사용설명서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한해 동안도 말씀이 여러분을 지키고 인도함으로 말미암아 말씀 안에 있는 생명과 기쁨과 평강과 은혜와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주님의 은총이 풍성한 삶을 살려면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을 따라 살게 되고, 그러면 당연히 그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6절 말씀 보십시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여러분, 이 말씀에서 특별히 범사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범사, 즉 모든 일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에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드릴 때만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밥 먹을 때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직장에서 일을 할 때로 인정하고, 장사를 할 때도 인정하고, 공부할 때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잘되고, 건강하고, 형통하고, 축복받을 때도 인정하고, 잘 안되고, 건강하지 못하고, 불통해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억울한 일을 만나도, 불만스러운 일이 있어도, 이해 못할 일이 벌어져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시간과 장소와 환경과 상황을 불문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의 생명과 지혜와 능력과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해야 합니다. 나나 내게 주어진 시간이나 물질이나 재능이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렇게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면 마땅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되고 그러면 반드시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인정하면 어찌 예배와 찬송과 기도에 열심을 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 어찌 내게 주어진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배와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쓰며, 나아가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하나님과 나 자신과 이웃을 위하여 바르게 사용하며 살아갈 때에 어찌 그 인생이 별처럼 빛나지 않겠습니까? 그 인생이 어찌 아름답고 복되지 않겠습니까?

 

또한 여러분,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면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져도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음을 믿고 그저 하나님께 맡기고 최선을 다 할뿐입니다.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도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내 할 일을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와같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정말 성실하고 진실하게 살아갈 때에 그 인생이 어찌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그 영광스러움과 은혜를 인정하고 예배드리고 찬송드리고 기도하는 일에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우리의 육신이나 정신이나 물질이나 시간이나 모든 것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사용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어렵고 힘들고 이해가 안되고 억울한 일을 만나도 그저 하나님께 맡기며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살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존중히 여김을 받으며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가득한 이 한해가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하나님의 지혜를 따라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서 그 은혜를 누리려면 하나님의 지혜는 나보다 천배 만배 억배 더 크다는 것을 잊지 말고 자신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오늘 7절 말씀 보십시오. “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

 

어다.” 자기가 똑똑한 것처럼 생각하며 제 고집대로 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솔직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혜롭다고 내 놓을만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비록 피조물들 중에서는 제법 지혜롭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우리 인생이 아는 게 얼마나 됩니까? 우리가 경험한 것이 얼마나 됩니까? 배웠으면 얼마나 배웠습니까? 알면 얼마나 압니까?

 

욥이 고난을 당했을 때 욥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너무 답답해서 따져 묻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차라리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 했습니다. 나는 정말 나름대로 선하고 의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왜 나에게 이런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오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훨씬 악한데도 잘 먹고 잘 사는데 난 정말 억울하다고 하소연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내게 대답하라. 네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거기 있었느냐, 바닷물이 넘치게 하였느냐, 네가 아침이 오게 하였느냐, 네가 별들을 매어 묶을 수 있느냐, 네가 눈과 비를 내리었느냐, 네가 하늘의 법도를 아느냐, 네 가슴속의 지혜는 누가 주었느냐, 네가 염소의 새끼를 낳을 때를 아느냐,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러자 욥은 한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백합니다. 42:3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렸고,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욥을 고난에서 건져주시고 다시금 복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제아무리 똑똑하고 인품이 좋고 선하고 잘나도 하나님 앞에서 지혜를 자랑하고,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것처럼 여기고, 하나님앞에서 의로운 것처럼 여기는 인생은 가장 미련하고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마귀사탄에게 철저히 속고 있는 사람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솔직히 아무리 지식이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전 우주 공간속에서, 천지가 창조되고 영원한 세계로 나아가는 길까지, 영원한 세상이 지속되는 그 모든 일에 대하여 아는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자신의 한계와 무지와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자신과 세상의 지혜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지혜와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에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더욱 풍성히 누리는 이 복된 새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4.하나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려면 진실로 하나님을 공경할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9절 말씀 보세요.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보십시오. 네 재물과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며 제일 먼저, 제일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나아가서 십일조를 비롯한 모든 감사예물을 드릴 줄 아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여호와를 인정하는 일이요, 바르게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게다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는데, 게다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야말로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가장 중요한 일에 사용되는 것인데, 하나님께 드리는 것만이 유일하게 하늘 곳간에 쌓는 일인데 하나님을 믿고 인정하고 공경한다면 어찌 하나님께 먼저 드리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이 무엇인가 힘써 노력해서 얻었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향하여 야, 말합니다. ‘, 정말 수고 많았다. 너 정말 대단하다. 이제는 좀 쉬면서 먹고 마시고 놀자.’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이 부모님이 날 낳아 주시고 열심히 키워 주신 덕분이라며 부모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곁에서 자신을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었던 친구나 선배나 기타 다른 사람에게 공을 돌리며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도 이런 범주에 속한다면 우리도 여전히 인본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육신으로 물질로 시간으로 하나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열심히 노력해서 얻었다해도 근본적으로나 실제적으로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터전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생명과 육체과 지혜와 능력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무엇인가를 만들 수 있는 재료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햇빛과 비와 공기와 토지를 주셔서 그 안에서 활동하며 살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제일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제일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시간도 물질도 재능도 다른 모든 것도 가장 중요한 부분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진정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공경할 때 그 믿음과 신실함을 보시고 더욱 크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0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오늘 이 귀한 말씀들을 기억하며 올 한해 동안도 정말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결코 자신이나 세상의 지혜를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의 유일한 규범이며 잣대이며 안내자인 하나님의 말씀의 안내를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과 물질과 육신을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창고가 가득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은총과 귀중이 여김을 받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조학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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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 설교 (Sunday sermon)

 

 

 

 

제목:마음의 눈을 밝히소서.

성경:엡1:17-19

 


1.천국을 확실히 보아야 합니다.

 

부산의 한 변두리 달동네에 신실한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권사님은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시장 한 모퉁이 좌판에서 장사를 하며 오직 하나님과 두 아들에게 희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가난하고 육체적으로 고달픈 삶을 살았지만 그는 감사하며 자녀들을 말씀과 기도로 양육하였습니다. 이런 권사님의 신실한 믿음을 보셨는지 하나님께서 이 가정을 복을 주셔서 자녀들이 훌륭하게 성장하여 큰 아들은 중소기업 대표가 되었고, 둘째 아들은 대기업 이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아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그렇게 희생하신 어머니를 편히 모시기 위하여 커다란 아파트를 드리려고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어머니는 그 달동네의 낡고 작은 집을 고집하며 한사코 만류했습니다.

그러자 두 아들은 정 다른 데로 이사 가시는 게 싫으면 어머니께서 사시던 이 동네에다 새집을 지어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권사님은 웬일인지 쉽게 허락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단 몇가지 조건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들들이 뭐든 말씀만 하시면 그대로 해드리겠다고 하자 권사님이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내 집을 지어주고 싶으면 이렇게 해라. 먼저 주춧돌은 열 두개를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우고 집을 짓되 주춧돌은 모두 다른 보석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기둥은 다이아몬드로 하고 벽은 황금으로 하라. 마루에는 자수정으로 깔고, 담장도 황금으로 할 것이며, 대문도 열두개로 하되 모두 진주로 해야 하고, 담장 밖에는 유리알 같은 시냇물이 흐르고, 그 강가에는 다달이 실과가 맻히게 할 것이며, 집으로 들어오는 도로도 모두 황금으로 포장을 하거라.”

그러자 두 아들은 깜짝 놀라며 ‘에이 어머님,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십니까? 그런 집을 어떻게 짓습니까?’ 그랬더니 권사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래, 너희들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지.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그런 집을 준비해 두셨단다. 나는 머잖아 그곳으로 이사를 갈 것이다. 그러니 그런 집을 지어주지 못할 바에야 그만 두고 그 돈으로 정말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나 더 도와 주거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크리스천이라면 적어도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이루어질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누구도 해 줄 수 없는 이런 영광스러운 저택을 준비해 두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장차 반드시 이런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런 영광을 누릴 사람들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그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능력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까짓 세상 것 때문에 염려 근심 질투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 얽매어 아등바등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보십시오. 마음의 눈을 밝히 떠서 무엇을 보라고 하였습니까? 부르심의 소망,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입니다. 부르심의 소망은 무엇이고,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입니까? 물론 영원한 영광의 나라 곧 천국입니다.

부르심의 소망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이런 영광의 나라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여기서도 소망가운데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한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은 우리가 장차 누리게 될 저 천국의 한량없이 풍성한 영광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그런 영광의 기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영광의 기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영광은 한량이 없습니다. 영원무궁합니다. 조금치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는 더더구나 없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도 이 영광의 기업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소망가운데 살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천국의 그 아름다움과 영광을 알지 못해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무슨 철학적 신학적 과학적 이성적하면서 쩍쩍하면 유식한 줄 알고, 천국이나 지옥 이야기를 하면 유치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공자가 어떻고 맹자가 어떻고 소크라테스가 어떻고 하면 그럴듯하게 여기면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하면 시큰둥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거 큰일 날 징조입니다. 세상이 그만큼 인본주의에 흠뻑 빠져 들어있다는 증거입니다. 눈이 어두워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철학이나 과학이나 정치나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심지어는 신학조차도 관심을 갖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심오한 철학을 가르치려고 오신 것도 아니고, 그저 윤리적 도덕적으로 조금 고상한 삶을 살게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구원하여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눅19:10절에서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이상향이 아니라 실재의 장소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주고라도 반드시 사 들여야할 가장 소중한 보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이 사실을 기억하며 정말 천국에 대한 확실한 소망가운데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덧입어 영의 눈을 활짝뜨고 우리를 위하여 예비된 저 영광스러운 천국을 확실히 보는 가운데 세상의 작은 것들에게 얽매이지도 말고, 그것 때문에 낙심이나 좌절이나 원망이나 불평도 말고 오직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과 소망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영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확실히 선명하게 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영적인 밝고 환하고 아름답고 깨끗한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가 밝히 보이고 천국이 뚜렷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어떤 길거리에 매일 더럽고 해어진 옷을 입고 다 낡아빠진 검은 안경을 쓰고 지팡이를 더듬거리면서 나와서 깡통을 앞에 놓고 앉아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구걸을 하며 먹고사는 맹인 거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불쌍하고 초라한 행색으로 길거리에 앉아 구걸을 하는데 그날따라 많은 사람들이 동정을 베풀어 제법 많은 천원짜리 지폐들이 깡통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한 소년이 걸인의 곁에서 서성거리더니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서 걸인 앞에 놓여 있는 깡통을 들고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맹인 거지가 벌떡 일어나더니만 소년을 향해 날쌔게 쫓아가더니 금방 붙잡고는 숨을 헐떡이며 ‘이런 고얀 녀석 같으니라구, 앞길이 창창한 녀석이 어디가서 일을 도와주고 살든지 할 것이지 할 짓이 없어 남의 것을 훔쳐 먹고 사느냐 이 놈아,’하면서 발길로 막 차고 두들겨 패고는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걸인은 맹인 행세를 하고는 있었지만 실제로는 두 눈이 멀쩡한데 일하기가 싫어서 맹인 행세를 하며 빌어먹고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사람이 진짜 맹인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육신의 눈은 뜨고 있지만 인생의 참된 가치와 의미와 보람과 목적을 알지 못하는 불쌍한 마음의 맹인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육신의 눈을 뜨고 있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닙니다. 눈은 떴으나 진짜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엉뚱한 것을 보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저 돈만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도 있고 세상의 나쁜 것만 보면서 원망과 불평과 투기와 향락과 죄악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해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보지 못하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밝은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육체적으로도 눈이 밝아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욱 마음의 눈, 영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인간과 이 아름다운 세상과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보며 주님의 뜻대로 살아감으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은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18절을 다시 보십시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우리가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마음의 눈, 영혼의 눈이 밝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보고 천국을 보고 영광의 나라를 보며 감사와 기쁨과 소망으로 빛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마6:22,23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하겠느냐? 네 눈이 감겨져 진리를 보지 못하고, 생명의 길을 찾지 못한다면 네 인생이 얼마나 어두운 인생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밝은 눈, 아름다운 눈, 깨끗한 눈, 믿음의 눈을 가지고 진리의 빛, 생명의 빛, 은혜의 빛을 듬뿍 받아들이면 우리 인생이 해와 같이 빛나는 인생이 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물론 육신의 눈도 밝아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욱 마음의 눈, 영적인 눈을 크게 뜨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지식이나 물질에도 밝아야 하겠지만 하나님 나라에 더 밝은 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지식의 눈, 과학의 눈도 밝아야 하겠지만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지혜의 눈이 더 밝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진장으로 제공해 주시는 생명의 빛을 듬뿍 받아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3.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올바른 눈을 가지려면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때만이 우리 마음의 눈, 영혼의 눈이 밝아져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달려가 그 안에 있는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진리이신데, 생명이신데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어떻게 진리를 알겠으며, 생명을 알겠습니까?

오늘 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보십시오.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 뭡니까? 물론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지혜를 얻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눈이 활짝 열려 그 나라를 바라보며 누리는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복되고 더 시급한 일은 없습니다. 물론 세상에서 대통령을 아는 것도 좋고, 국회의원을 아는 것도 좋습니다. 과학을 알고, 문화를 알고, 윤리도덕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하고 더 시급한 문제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우리가 진정한 인생의 목적과 의미와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선과 진리와 거룩을 알게 되고 그래서 세상에서도 평안을 누리고 결국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는 진정 복있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17:3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을 때에 영생복락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박근혜대통령이 18대 대한민국대통령에 취임하며 취임사에서 경제 민주화를 이루고 제2의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국민 행복시대를 열겠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대통령으로서 정말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헌신함으로 어느 정도 국민 행복시대를 열어 갈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한 사실은 그 어느 누구도 우리를 책임질 수도 없고,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고, 우리의 생명을 보장해 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지도자가 나오고, 아무리 과학이나 문화가 눈부시게 발달해도 참된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알지 못하고, 인생의 진정한 목적과 가치와 의미를 알지 못해서 그래서 죄와 무지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내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하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래서 진정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국민행복시대는 요원한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위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며 성실하게 진실하게 열심히 살아갈 때에 거기에 행복이 있고 나아가서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주의 은혜를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그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방법과 목적을 바르게 아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참된 목적과 방법과 방향을 바르게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사람을 사랑하는 가운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실하게 열심히 진실하게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죄를 바르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면 죄에 대해서도 밝은 눈을 갖게 됩니다. 죄가 무엇인지,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걸 바르게 알고 그래서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을 살 때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이 사회는 죄에 대하여 점점 눈이 어두워져 가고 있습니다. 죄 가운데 머물면서도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가 만연되어 있어서 죄에 대한 경계심도 두려움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죄가 양심을 마비시켜 더욱 죄악 속에 빠져 들어가게 하고 그래서 죄에 대한 양심은 더욱 마비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13:14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전해도 알지 못하고, 죄를 깨우쳐 주어도 도무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 무지속에서 자행자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는 입에 담기도 그렇지만 요즘 뉴스에 보면 이 땅에 성적인 타락이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모릅니다. 성폭행 문제 너무 자주 나오고, 나아가 불륜의 관계도 너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강제성이 없으면 다시 말해 서로 좋아서 하면 뭔 짓을 해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몸과 마음과 영혼이 아름답게 하나 되어 아름답고 복되고 경건한 가정을 이루어 생육하고 번성하며 그 안에서 사랑과 기쁨과 은혜를 누리고 서로 돕고 의지하고 존중하며 귀히 여기며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서로 좋아서 엉뚱한 짓을 하면 결혼을 했건 안했건 법적으로 문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 얼마나 왜곡된 가치관이 팽배해져 있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유혹들이 도사리고 있는지 그래서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얼마나 죄와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예민한 감각으로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세속주의, 물질주의, 개인주의, 인본주의, 이기주의, 외모지상주의, 편의주의, 향락주의, 종교다원주의 등 온갖 왜곡된 풍조가 만연되어 있는 세상 속에서 정말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무엇이 진정 우리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가치있게 하고 진정한 평안과 행복을 누리게 하는지 바르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더욱 주님 앞에 엎드려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깨어 기도하며 영적인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정말 영적인 눈이 밝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분별력과 판단력을 갖게 됩니다. 그래야 그런 것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나아가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기에 세상의 것들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들 때문에 원망 불평 좌절 분노하지 않게 됩니다. 죄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주님의 능력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밝고 깨끗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소망가운데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어 하나님과 천국과 세상에 대하여 활짝 열려진 밟은 눈을 가지고 사랑과 기쁨과 은혜와 소망과 평강과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조학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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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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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주일낮예배설교 / 강을 건넌 사람들 (October,Sunday Sermon)
 
제목 : 강을 건넌 사람들

말씀:수3:14-17


1.현실의 강을 넘어서야 합니다.

어떤 인터넷 매체에 보니까 박명수 어록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거기에 보면 이런 말들이 있었습니다. ‘성공은 1%의 재능과 99%의 빽이다.’ ‘일찍 일어난 새가 피곤하다.’ ‘고생 끝에 골병난다.’ ‘가는 말이 고우면 얕 본다.’ ‘늦었다고 생각할때는 늦은 거다.’ ‘참을 인이 세 번이며 호구된다.’ 그리고 이런 말들에 대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했고, 이런 말들을 주옥같은 명언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신지요? 공감이 가는 말들인가요? 물론 어떤 면에서는 오늘 우리의 실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서 공감이 되는 부분들이 없지 않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설령 그런 말들이 오늘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는 말이라고 할지라도 그게 진리는 아닙니다. 아니 도리어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었다면 그것은 현실이 그만큼 왜곡되고 썩어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 사고 방식은 결코 인간의 삶을 가치있고 의미있게 하며, 기쁨과 평안과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갈등과 탈법과 술수와 상처와 아픔과 시기와 질투와 무질서를 초래하여 인간의 삶을 불행하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더구나 그걸 진짜로 알고 그렇게 살아간다면 결국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고 말 뿐입니다.

여러분, 세월이 어떻게 변하고, 가짜가 어떻게 그럴듯하게 가장해도 거짓은 거짓에 불과합니다. 세월이 변한다고 진리가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진리가 가짜가 되는 일이 있다면 그건 처음부터 진리가 아니었을 뿐이지 진리가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너무나 왜곡된 가치관이 마치 진리처럼 가장하고 판을 치고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와 인본주의와 개인이기주의와 무사안일주의와 쾌락주의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드린 무슨 박명수 어록이니 뭐니 하는 이런 허접스런 말들이 나오고 그걸 또 무슨 주옥같은 명언이니 어쩌니하며 떠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열심히 말씀과 기도로 훈련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나 당당하게 큰소리를 치며 흘러가고 있는 이 왜곡된 가치관들 속에 끌려가기 십상입니다. 우리가 맨날 보고 듣고 이야기하고 교제하며 살아가는 세상이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없이 자신이 죄와 무지속에 있는 줄은 모르고 그저 자기중심, 자기 소견, 자기 의지, 자기 경험대로 물질주의, 이성주의, 이기주의 물결속에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정말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지 않으면 십중팔구 거기에 휩쓸려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롬12:2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세대의 왜곡되고 거짓된 것을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 영혼이 변화되고, 마음이 변화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바르게 분별하고 그 뜻을 좇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여 온전한 분별력을 가지고 모든 거짓되고 왜곡된 가치를 바르게 분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다수라는 이름으로 진짜를 가장하고 있는 가짜를 바르게 분별하고 배격함으로 그런 것들에 결코 농락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오염되고 추하고 왜곡된 현실을 이기고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잘 달려감으로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현실의 강을 건넌 사람들

여러분, 그래서 성경에서는 그런 왜곡된 현실의 강을 건너 살 것을 계속 말씀하셨고, 또 그런 말씀을 따라 삶으로써 성공했던 많은 사람들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노아 할아버지도 그 중 한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 죄가 세상에 관영하여 하나님께서는 땅을 홍수로 멸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나 노아 할아버지 가정은 그런 현실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고 그 현실의 강을 건너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가정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가시려고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어 홍수를 피라하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노아는 즉각 순종하여 배를 만들기 시작하여 무려 120년 동안에 걸쳐 방주를 지었습니다.

여러분, 노아의 방주는 길이가 137m, 넓이가 23m, 높이가 14m의 3층짜리 배로 용적량이 3만톤이 넘는 거대한 배입니다. 물론 지금의 조선기술로는 이런 규모의 배 정도야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노아의 가족 여덟식구가 순전히 손으로 이 정도의 배를 만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120년동안 그 엄청난 일을 하면서 얼마나 힘이 들었겠으며, 또한 얼마나 많은 유혹들이 있었겠습니까? 이 배를 정말 우리가 완성이나 할 수 있을까? 정말 120년 후에 인류가 멸망할 비가 오기는 오는 걸까? 또 10년 30년 50년 70년 100년이 지나면서 내가 정말 말씀을 바로 듣기는 들은 걸까 등등 많은 생각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사람들은 전 세계의 홍수심판이라는 말도 안되는 말을 믿고 배를 만드는 노아의 가족을 미치광이 취급을 하면서 노아의 가족을 비웃으며 먹고 마시고 즐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런 모든 현실을 뿌리치고 배를 만들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 오직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였습니다. 너무나 힘들고 고된 작업이었지만 중단하지 않고 열심히 성실하게 배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120년이 지났을 때 정말로 하늘에 구멍이 뚫려 밤낮 40일 동안을 양동이로 물을 퍼붓듯이 비가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온 세상이 물에 다 잠겼고, 노아를 비웃으며 먹고 마시고 즐기던 사람들은 하나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뭐라 그러거나 말거나, 심지어는 자신의 내부 속에서 어떤 생각들이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120년간 방주를 만들었던 노아의 가족 8식구만이 방주 안에서 안전하게 대홍수의 강을 건너 새로운 인류의 시조가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창12:1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밑도 끝고 없이 무작정 가라는 것입니다. 떠나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 왜곡되고 죄된 문화가 판을 치는 이 땅과 이 사람들과 이 문화를 떠나라는 것입니다. 이들을 떠나 내가 새롭게 시작할 그 땅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아버지와 고향산천과 그 모든 환경과 문화의 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구원하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애굽의 우상숭배의 문화의 땅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홍해 바다를 건너 멀리 가나안 땅까지 가게 하셔서 거기서 새역사를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이 모든 말씀들이 뜻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죄와 무지와 왜곡과 어둠의 현실들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딛고 일어서든지 아니면 그곳을 떠나든지 여하튼 왜곡된 현실의 강을 건너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승리가 있고, 거기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본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에덴의 모습들을 너무나 많이 잃어버렸고, 너무나 많이 변질되어 있어서 우리가 넘어야 산과 건너야 할 강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때로는 환경과 상황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산입니다. 때로는 이성과 경험이 우리가 건너야 할 강입니다. 불신과 의심과 욕심과 욕망과 돈과 권력도 넘어서야 할 강입니다. 사람과 문화와 과학도 우리가 넘어서야 할 산 중의 하나입니다. 술과 담배와 향락과 무사안일은 말할 것도 없이 반드시 건너가야 할 강입니다. 물질주의와 인본주의과 종교다원주의와 개인이기주의도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요, 건너야 할 강입니다. 이러한 산을 넘고 강을 건너야 비로소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 모두가 원하는 진정한 기쁨과 자유와 평화와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정말 내가 지금 시급하게 넘어서야 할 산이 무엇인지, 빨리 건너야 할 강이 무엇인지 되새겨보면서 그것이 무엇이든 주님의 인도하심과 능력 주심을 따라 그 산을 넘고 그 강을 건너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산과 강의 저너머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 에덴의 축복을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약속의 말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산과 강을 넉넉히 건너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다시말씀드리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든, 어떻게 왜곡되고 오염된 가치관과 문화가 판을 쳐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푯대로 삼고 천성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바로 그러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오매불망 기다리던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요단강을 건너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중요한 시점에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그때가 우기라서 요단강이 넘칠만큼 싯뻘건 물이 넘실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는 도무지 요단강을 건널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이런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갔습니까? 오늘 14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이것은 6절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내용으로 거기에 보면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앞장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단강에 도착하면 무조건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요단강이 갈라질 것이다. 그러면 백성들은 제사장들이 멘 언약궤를 보고 건너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무슨 뜻입니까? 한마디로 세상 물결이 어떻게 넘실 거려도 말씀을 따라 저 가나안복지를 향해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약궤가 뭡니까? 말그대로 약속의 말씀이 들어있는 상자입니다. 그 안에는 십계명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만나 항아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약궤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의 생명의 떡이요,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궤를 따라가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따라 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음을 기억하고 그 생명의 말씀을 따라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요단강물이 아무리 사납게 덤벼들어도 두려워 말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약속을 바라보며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요단강을 가나안복지로 인도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그 때 그 사람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갈때에 사나운 강물이 넘실대며 그들을 방해하고 위협하고 낙심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우리가 저 가나안복지를 향해 갈때에 우리를 실망시키고 낙담케하는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환난과 풍파가 닥칠때도 있고, 때로는 환경과 상황 때문에, 때로는 물질과 건강 때문에, 때로는 사람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말고 흔들리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부여잡고 가나안복지를 향해 달려가라는 것입니다. 누가 어떻게 위협하고 유혹해도 그런 왜곡되고 죄되고 혼잡한 것들에게 눈길도 주지말고, 흔들리거나 낙심하지도 말고,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오직 유일한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부여잡고 저 가나안복지를 향해 달려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능하신 하나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장애물을 제거해 주시든지, 상황과 환경을 변화시켜 주시든지 아니면 상황과 환경을 그대로 두고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서 이기게 하시든지 여하튼 어떤 방법으로든 승리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 약속의 말씀을 바라보며 가나안 복지를 향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히 주님이 인도하십니다. 힘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지혜를 주셔서 이기게 하십니다. 환경과 상황을 변화시켜 주셔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그러실만한 능력과 권한과 사랑과 인자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정말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주님의 방법과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때에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를 위협하고 유혹하고 넘어뜨리려는 모든 세력들을 이기고 에덴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또 하나 기억할 것은 에덴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려면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15,16절 말씀 보겠습니다.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자 보십시오, 요단강물의 흐름이 언제 그쳤습니까?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물속에 들어섰을 때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이스라엘을 집어삼키기라도 할 듯이 덤벼들던 요단강의 흐름을 끊고 강바닥을 드러내어 무사히 요단강을 건너게 하셨는데 그런 기적이 일어난 시점이 언제냐?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언약궤를 메고 사납게 요동치며 흐르는 요단강속으로 들어갔을 때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기적을 일으켜 놓고 건너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순종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대부분의 경우 기적을 만들어 놓고 누리게 하시기 보다는 믿음으로 행동할 때 기적의 은총을 누리게 하십니다. 노아에게도 하나님께서 방주를 만들어놓고 타라고 하지 않으시고 네가 만들어서 타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하실때도 먼저 그냥 무조건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동안 반석에서 물을 내실 때도 모세에게 반석을 향하여 명령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포도주를 만들어 놓고 갖다 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물을 떠서 갖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나사로를 부활시킬때도 마르다에게 무덤 입구의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때는 제자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실로암 못가에 있던 맹인에게는 흙을 눈에 바르고 실로암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말씀에 순종했을 때 결국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즉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에게 갓난아기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 믿음과 순진한 마음을 보시고 은헤를 베풀어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무슨 일이 있어도 세월이 어떻게 변해도 열심히 성실하게 진리를 따라 살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든지, 상황과 환경이 어떠하든지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따르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따라가도 하나님이 아니라 하신 것,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왜곡되고 거짓된 것을 버리고 넘어가고 떠나 갈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유는 두말할나위도 없이 거기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 사랑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이 땅에서 누려야 에덴 동산이 있고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로 이어지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 앞에 높게 서 있는 왜곡된 현실의 산들을 넘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너무나 도도하게 흐르는 왜곡의 가치관의 강을 건너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유일한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푯대로 삼고 저 가나안복지를 향해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넉넉하게 건너가게 하십니다. 승리하게 하십니다. 이 땅에서도 진정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다가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주십니다. 이런 진정하고 영원한 승리를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우리 온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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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네째주일낮설교 / 버림과 얻음 (September,Sunday Sermon)

 

제목 : 버림과 얻음

 

말씀:5:1-3

 

1.심령이 가난해 져야 합니다.

 

여러분,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한 선행조건이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지만 먼저 버리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뭔가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서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가치관이나 습관이나 이런 것들을 과감히 버리고 그래서 뭔가가 새롭게 들어갈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오물이 잔뜩 들어있는 컵에는 깨끗한 물을 따라 마실 수가 없이 않습니까? 주먹에 돌을 쥐고 있으면 금덩어리를 집어 들 수가 없지 않습니까? 마음속에 미움이 가득 들어 있으면 어떻게 사랑의 마음을 담겠습니까? 마음에 거짓이 가득차 있으면 어떻게 진실을 담겠으며, 원망과 불평이 가득하다면 어떻게 감사의 마음을 담겠습니까?

 

여러분, 성경에서 자꾸만 낮아지고 버리고 비워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이유가 뭡니까? 바로 이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먼저 버려야 새것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16:25절을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여기서 목숨이란 물론 그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을 말합니다. 즉 목숨을 버리라는 것은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생명도 바쳐야 하겠지만 꼭 생명을 바치라는 뜻이라기 보다는 예수님 안에 진정 생명의 은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작고 보잘 것 없고 한계속에 있고 죄와 무지속에 있는 우리 생각과 뜻과 그밖에 우리가 소중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심령 가운데 온전히 자리잡게 되고 그러면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게 된다는 말씀이지요.

 

여러분, 그렇습니다. 정말로 무엇인가를 얻으려면 일단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내가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강제로 빼앗아 갈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눅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어떤 부잣집 아들이 부모에게 유산을 미리 달라고 떼를 써서 결국 자신의 몫을 가지고 집을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 미련한 아들은 돈좀 있다고 진탕 먹고 마시고 세상 연락을 즐기며 허랑방탕하여 있는 돈 다 날려 버리고 그야말로 알거지가 됩니다. 그래서 남의 집에 돼지치기로 들어갔는데 하필 그해 따라 너무 큰 흉년이 들어서 먹을 것이 없어서 주인집도 먹을 것이 제대로 없어서 돼지밥을 먹으면서 돼지를 치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로 이때부터 반전의 드라마가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그는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 즉 그가 자발적으로 그랬든 강제적으로 그렇게 되었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몽땅 잃어버렸을 때 비로소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많은데, 내 아버지 집에는 품꾼도 좋은 것을 먹는데 나는 여기서 굶주려 죽게 되었구나 하면서 내가 한 짓이 있으니 아들로 맞아 달라고는 못할 거고 품꿈으로라도 써달라고 하자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갔을 때 아버지의 환대를 받고 아들로서의 지위가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비유의 핵심은 아무리 죄와 무지가운데 살던 인생이라도 하나님품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그 크신 사랑과 은혜로 큰 잔치를 베풀며 환영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부가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게 이 탕자가 지위가 회복되는 그 반전 드라마가 언제 펼쳐졌느냐? 그가 어떻게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느냐? 하면 굶어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뭔가 자신이 가지고 있을 때, 그래서 뭔가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여길 때, 돈이 있어서 흥청망청 쓸 때, 술 친구들과 기생들이 아첨을 하면서 같이 놀아주니까 세상이 제 세상 같았을 때 그는 아버지집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돈 떨어지고, 술떨어지고, 친구떨어지고, 쾌락도 다 떠나고 그래서 철저하게 낮아지고 버림받고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이나 돈이나 세상 즐거움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 뼈저리게 느끼고 두손두발 다 들고 아버지 품으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자꾸 우리에게 비워라 낮아져라 죽어라는 하는 것은 우리가 다 알거지라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알거지를 만들기를 바라시겠습니까? 비우고 죽이고 낮아지라는 것은 우리의 지혜와 능력과 경험과 이성이 얼마나 작은 것인지를 인정하고 그것을 의지말고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이 내 삶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고, 삶의 우선순위가 되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 내뜻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뜻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자신을 바르게 알고 겸손하게 낮아져서 가난한 심령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천국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입니다. 말씀 그대로 심령 곧 마음 혹은 영혼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란 자신의 죄와 무지와 연약함과 부족함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과 공급해 주시는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며 그 뜻대로 힘써 살아가는 그 겸손한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가 이루어져 하나님 안에 있는 온갖 좋은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게 됨으로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정말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과 무지함을 인정하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무릎꿇어야 합니다. 내 생각과 경험와 이성과 능력과 지혜가 얼마나 작은 것인지를 인정하고 그런 것들을 앞세우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고 그 원리와 그 방법과 그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생각은 나보다 천배만배억배 더 큽니다. 더 지혜롭습니다. 더 선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따를 때에 내가 생각하고 바라고 원하던 것들보다 천배만배억배 더 수지맞는 일이 생깁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고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평강과 위로와 자유를 맛보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꼭 이런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심령이 부유하면 진노의 대상이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분명히 주님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심령이 부유하면 교만한 자가 되어 주님의 은총은커녕 도리어 주님의 책망과 진노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심령이 부유하면 그냥 주님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분명한 책임추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눅12장에 보면 이런 어리석은 자들에게 주시는 경고의 비유가 있습니다. 소위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거기에 보면 어떤 마을에 큰 부자가 있었는데 어느 핸가 엄청난 풍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곡식을 쌓아 둘 창고가 모자라 곡간을 하나 더 짓고, 곡간마다 곡식을 잔뜩 쌓아놓았습니다. 그렇게 여러개의 곡간에 곡식이 잔뜩 쌓인 것을 보자 마음이 너무 든든하였습니다. 이제는 아무 걱정이 없었습니다.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말합니다. 12:19절입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그러자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12:20절을 계속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그러니까 부자는 곡식을 잔뜩 쌓아 놓고 내 영혼아 이제 부러울 것이 무엇이냐, 걱정할 일이 무엇이냐, 이제는 남은 인생 실컷 먹고 마시며 멋지게 즐겨보자꾸나 그런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 미련한 인사야, 네가 그렇게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다만 만일 오늘 밤에 내가 네 영혼을 거두어 간다면 너의 쌓아둔 곡식이 다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오늘밤 그 양식을 내가 다 가져간다면 너는 무엇으로 평안을 누리겠느냐, 오늘 밤 너의 건강을 빼앗아 간다면 너는 정말 실컷먹고 마시며 즐거워할 수가 있겠느냐? 너는 너의 생명이 내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이 미련한 인생아, 그랬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자는 마치 자기가 쌓아둔 양식이 순전히 자기 힘으로 농사지어 얻어서 순전히 자기의 것으로 알았습니다. 먹을 것을 잔뜩 쌓아 두었으니 이제는 먹고 마시며 즐기며 살기만 하면 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그 많은 곡식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땅을 주시고 비를 주고 생명을 주셔서 자라나고 싹이트고 열매를 맺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서 지금이라도 가져가시면 그만입니다. 생명도 권력도 명예도 건강도 지식도 물질도 하나님이 도로 가져가시면 그것은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집니다. 결코 내 영혼을 지켜주지 못합니다.

 

그런데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인생은 그만 어둠으로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무엇인가 좀 있으면 마치 자신이 다 얻은 줄로 여기고, 자신이 다 마음대로 할 수 있을 줄로 여기고 교만하고 미련하게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힘만 믿고 살아갑니다. 자기 지식이나 돈이나 권력이나 건강만 믿고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고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18:12에서는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가진 생명도, 먹고 입고 자고 하는 모든 생명의 활동들도,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 우리가 발딛고 살아가는 모든 삶의 터전들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과 보호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면 단 한시도 살 수 없는 연약하고 무지하고 곤고하고 어리석은 인생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정말 가난한 심령으로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렇게 정말 피조물로서의 자기 분수를 알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는 삶을 살 때 정말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속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꼭 이런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버릴 때 가장 좋은 것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버리라, 낮아지라, 심지어 죽으라 하심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버리라 하심은 가짜를 버리고 진짜배기로 채워주려 하심입니다. 낮아지라 하심은 우리를 진정한 의미에서 높아지게 하려 하심입니다. 우리에게 죽으라하심은 진짜 생명을 주시려 함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을 입었을 때가 언제입니까? 그것은 그가 철저하게 낮아지고 자신의 것을 송두리째 다 버렸을 때입니다. 그는 애굽의 궁궐에서 왕자로 40년을 살았습니다. 애굽의 왕자로서 모세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명예도 권세도 부귀도 지식도 영광도 있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의 모세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도 필요없었습니다.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그는 뒤늦게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동족들이 애굽의 노예가 되어 학대받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자기 동족을 괴롭히는 애굽 사람을 보고 분노하여 그 애굽 사람을 죽이고 말지요. 그리고 결국 이 일이 탄로나서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가는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하루아침에 왕자의 자리에서 가진 것이라곤 알몸둥이 하나밖에 없는 거지로 전락한 것입니다.

 

거기서 그는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철저히 버려야 했습니다. 왕자의 자리도 버려야 했습니다. 권세도 물질도 평안함도 호화스러움도 그곳에서 배웠던 학문도 기술도 모두 포기해야 했습니다.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이집트의 왕자의 신분에서 이제는 더 이상 내려 갈래야 내려 갈곳이 없을 만큼 인생의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그야말로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곧 기회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기회였던 것입니다. 모세가 이집트 왕자에서 하나님의 왕자로 새롭게 시작하는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빼앗기고 잃어버리고 낮아졌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즉 그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게 하시고 그래서 그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그를 이집트 왕장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왕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인간의 모든 것을 완전히 잃어버린 다음에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세상적인 것을 완전히 제거하신 다음에 하나님의 권능으로 대신 채워 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시킵니다.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천하를 호령하는 바로왕 앞에 당당히 서서 대결을 펼쳐 애굽에 열가지 재앙을 이스라엘을 구원해 냅니다. 홍해바다의 넘실거리는 파도를 물리칩니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오고, 메추라기 떼가 몰려오고, 쓴 물이 단물이 되고, 반석에서 샘물이 터지고, 대적자들을 물리쳤습니다. 작은 것을 잃고 어마어마한 것을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보다 천배만배억배 더 지혜롭고 능력이 있고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여러분, 55:8,9절을 보십시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뭐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와 비교가 되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영광의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 그 안에 모든 생명과 부귀와 영광과 지혜와 축복과 평강과 위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작은 것들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따를 때 우리는 놀라운 은혜 가운데 살게 됩니다. 얼마든지 능력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어떤 적들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환경이나 상황의 적도 물리칩니다. 사탄의 궤계를 물리치고 능력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까짓 죄의 세력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고난과 핍박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더럽고 추한 것들로부터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세상 욕심과 향락과 명예와 권세로부터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넉넉히 천성을 향하여 달려 갈 수 있습니다. 마귀가 어떻게 교묘하게 유혹하게 당장에 간파해 낼 수 있습니다. 사탄이 유혹할 때 사탄아 물러가라고 큰 소리 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내 능력과 재물과 이성과 지식과 경험과 과학으로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마귀 사탄의 권세, 죄의 권세, 지옥의 권세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런 것들 의지하다가는 맨날 그런 것들에게 끌려다니며 노예 생활을 할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과 권능을 의지할 때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는 위대한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지혜를 덧입으려면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자신 안에 있는 모든 추하고 더럽고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인본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악하고 추하고 왜곡된 것을 비워내야 합니다. 성령의 불길로 태워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과 은혜가 내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내 심령이 거룩하고 아름답고 의롭고 올바른 가치관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그러면 그 은혜와 능력로 지혜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정말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 우리 자신의 작음과 나약함과 한계와 죄됨과 무지함을 인정하고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 그것이 환경이든 상황이든 고난이든 핍박이든 유혹이든 죄이든 그 어떤 것이든 모든 어둠의 세력들을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 이기고 왕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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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설교 / 십자가의 승리 (September,Sunday Sermon)

 

제목 : 성령 세례를 받읍시다.

 

말씀 : 1:4,5

 

1.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먹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보고 싶은 것도 많고 얻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재물도 얻고 싶고, 건강도 얻고 싶습니다. 기왕이면 권세도 얻고 싶습니다. 기왕이면 예쁜 부인이나 백마 탄 왕자같은 남편도 얻고 싶습니다. 평안도 자유도 즐거움도 기쁨도 사랑도 존중도 받고 싶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 좋은 것을 누리며 사랑과 축복과 기쁨 속에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당연한 일입니다. 또 그렇게 뭔가 좋은 것들을 누리고 싶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게 됨으로 좀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동기가 됨으로 이러한 것들에 대한 건전한 추구는 도리어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도 열심히 노력해서 얻고 누려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정말로 이러한 것들보다 더 우선해서 받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도 우리 인생에게 보템과 유익과 기쁨이 되지만 그보다 더욱 보템과 유익과 은혜와 기쁨을 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을 받아야 우리는 인생의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연인으로서의 인간 영혼은 죄와 무지속에 있어서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축복의 길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 인간 영혼이 하나님의 고귀한 형상으로서 누릴 수 있는 그 엄청난 축복들을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영, 생명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우리 심령속에 들어오셔서 우리 심령속의 굳어지고 무지한 것들을 깨트려 버리고, 죄된 것들을 씻어 버려야 비로소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알게 되면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게 되고 예수님 믿고 정말로 그 안에 있는 그 놀라운 생명 은혜 기쁨 자유 평안을 마음껏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세상에서 천만금을 얻을 것보다도, 천하제일의 권세를 얻은 것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생명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인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무엇을 기다리라? 아버지께서 약속한 것. 그게 뭡니까? 성령입니다. 14:16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바로 이 약속하신 성령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성령을 받아야 너희들이 나를 바르게 알고 사명을 힘있게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약속하 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야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진 심령이 깨끗해져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이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리고, 천국이 보이게 됩니다. 그래야 자신을 알고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알게 됩니다. 성령을 받아야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래서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생명과 기쁨과 평강과 위로 속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어떤 상황이나 환경이나 위협이나 유혹도 넉넉히 이기고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다 도망던 제자들, 심지어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며 부인했던 베드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믿지를 못했던 제자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한곳에 모여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던 제자들도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다가 성령 충만함을 받은 다음에는 완전히 180도 달라겼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자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지고 하늘나라가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참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두려워서 걸어 잠갔던 문을 열어젖히고 밖으로 뛰어나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 그러나 부활하셨다. 이 분이 그리스도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힘차게 외쳤습니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게 옳으냐 너희들 말 듣는 게 옳으냐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하루에 삼천명 오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가 세워졌고, 계속해서 성령의 능력을 받은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헌신을 통하여 또 다른 교회가 세워지고 오늘날 저와 여러분에게 까지 이 복음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성령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20:22절을 보겠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지식을 얻는 것도 좋지만 그러나 그보다 먼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 받아야 죄사함 받습니다. 그래야 심령이 깨끗해 집니다. 그래야 눈이 밝아집니다. 천국이 밝게 보입니다. 선과 악을 바르게 분별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똑똑하게 들립니다. 지혜와 능력과 분별력을 갖게 됩니다. 상황과 환경을 이깁니다. 죄와 유혹을 이깁니다. 능력있게 생명있게 담대하게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생명의 은혜가 풍성한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을 구하기 전에 먼저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생명의 영이요, 진리의 영이요, 지혜의 영이요, 능력의 영이신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따라 생명과 진리와 능력이 충만한 복된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됩니까?

 

2.교회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려면 교회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가 뭡니까?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1:23절이지요.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교회는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만물을 충만케하시는 이 곧 예수 그리스도 곧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은혜,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지혜, 예수님의 능력으로 가득한 곳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지상교회는 온전치 못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교회 안에 만이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예배가 있습니다. 주님의 삶과 주님의 가르침과 주님의 뜻을 가르쳐 주는 곳은 오직 교회 뿐입니다. 그러니 이런 주님의 몸된 교회를 가까이해야 성령 충만 받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앞에서 보았던 4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예루살렘은 어떤 곳입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모리아 산입니다.(22:2) 다윗이 장막을 치고 언약궤를 모셔두었던 곳입니다.(대상15:1)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곳입니다.(대하3: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인류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곳입니다. 즉 예루살렘은 인류구원의 역사의 중심에 서 있는 거룩한 성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이 있는 곳, 말씀이 있는 곳, 하나님의 특별하신 임재가 있는 곳,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안에 머물며 더욱 말씀 위에 서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지금까지는 너희 연약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제자의 사명을 감당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의 예루살렘은 어디 입니까? 교회밖에 더 있겠습니까. 주님의 피값으로 세우신 곳,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 예배와 기도와 말씀과 찬양과 전도와 섬김과 봉사가 있는 곳입니다. 이런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봉사와 섬김 등으로 주님과 교제하고 성도와 교제할 때 성령을 받지 못한 자는 성령을 받게 되고, 이미 받은 자는 더욱 충만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충만하게 받은 사람은 생명의 은총이 있고 기쁨이 있고 사랑과 은혜가 충만한 가운데 주님의 능력으로 승리하며 주의 사역 힘있게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몸된 교회,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섬김이 있는 교회, 그래서 이 땅에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유일한 기관인 교회를 가까이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곳을 가까이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보다도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섬기고 교제하는 일을 기뻐하고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말씀과 사랑과 은혜와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교제할 때에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어 정말로 생명과 기쁨과 자유와 평강과 위로와 소망이 넘쳐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를 가까이 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는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제자들이 언제 참 제자가 되었습니까? 앞서 말씀드린대로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나서부터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습니까? 기도에 힘쓸 때였습니다.

 

1:14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제자들이 예수님의 분부를 따라 예수님을 따르는 다른 많은 분들과 더불어 마가의 다락방에서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흘이 지났을 때 드디어 오순절 날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후 제자들은 능력있는 제자들이 되어 놀라운 복음의 역사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즉 기도할때에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았고, 기도로 성령의 능력을 받은 이후 능력있는 제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 9:29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어느 날 예수님은 산에 기도하러 가시고 제자들만 남았는데 어떤 아버지가 귀신 들린 소년을 데리고 와서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하였지만 못고쳐 주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오셔서 귀신아 나가가 한마디 하니까 귀신이 줄행랑을 쳤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우리는 왜 못쫓았습니까, 그러니까 기도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너희 믿음의 기도를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기도할 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이런 모든 잡류들, 더러운 것들, 추한 것들, 유혹들, 마귀의 장난들 다 물리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기도하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수요기도회, 새벽기도회에 열심히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영적인 호흡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말씀을 듣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시간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성도들과 신령한 교제를 나눌 때 성령의 능력을 덧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감히 더럽고 추하고 악한 것들이 대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깨어 기도하며 주님과 온전한 교제를 이룰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모든 더럽고 추하고 악한 것들을 물리쳐 버리고 더욱 큰 감사과 기쁨과 은혜와 능력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겸손히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를 가까이 한다는 것은 또한 말씀을 듣고 받기 위함입니다. 그럴 때 성령의 능력을 덧입게 되는 것입니다. 10:44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이 말씀은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의 가정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 사실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넬료는 환상 중에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온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까지 불러 모아놓고 베드로를 모셔옵니다. 베드로가 도착하자 밖으로 나가 발 앞에 절하고 모셔 들이고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자 그 말씀을 들을 때에 말씀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이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정말 사모하는 마음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고넬료는 베드로가 오자 그 발아래 엎드려서 절했습니다. 가족은 물론 친척, 친구들까지 모아놓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만큼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 앞에 엎드렸다는 것입니다. 그 때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사모하는 마음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내 생각과 가치관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기시기 바랍니다. 생명의 말씀, 은혜의 말씀, 능력의 말씀 앞에 조용히 무릅꿇고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곳에 은혜가 있습니다. 능력이 나타납니다. 다윗은 얼마나 말씀을 사모했는지 말씀이 송이꿀보다도 더 달다고 하였습니다.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위대한 신앙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저와 여러분은 더욱 말씀 앞에 겸손히 엎드리고, 말씀에 귀를 기울여 말씀의 은혜로 내 심령이 밝아지고 희망과 은혜가 넘치고 능력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성령의 지배 속에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할 이유는 기본적으로 그래야 믿음을 갖게 되고 나아가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운데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뿐이 아닙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온전히 성령의 지배속에서 살면서 능력있는 신앙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진정한 능력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세상에서는 돈이 힘이고 권력이 힘이고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지만 그게 진짜 힘이 아닙니다. 진짜 힘은 죄를 이기는 힘입니다. 사탄의 권세를 이기는 힘입니다. 상황과 환경과 유혹과 핍박과 죽음을 이기는 힘입니다. 그런 힘이 어디서 나옵니까? 성령의 충만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며 세상의 모든 것, 심지어는 죽음도 마귀사탄의 권세도 모두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하면 아무리 돈과 명예와 권세가 있어도 결국 지는 자가 됩니다. 심지어 아무리 고상하게 종교생활해도, 교회가 아무리 웅장해도 성령의 능력을 받지 못하면 힘이 없습니다. 환난풍파 몰아치면 무너집니다. 세상의 유혹앞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그래서 엡5:18절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술 취하지 말라. 술의 지배를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술은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혼란스럽게 만들고 분별력을 희미하게 만듭니다. 영적 도덕적 윤리적 감각을 무디게 만듭니다. 술 뿐아니라 세상의 것들이 다 그렇습니다. 향락과 오락은 말할 것도 없고 물질과 명예와 지식과 권세와 이런 것들도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에 취하면 마침내 감각이 무디어지고 영혼이 황폐해지고 그러다 마침내 죽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에 취하지 말고 성령으로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성령은 살리는 영이니까. 지혜의 영이니까, 생명의 영이니까, 사랑의 영이니까, 은혜의 영이니까, 화평과 위로와 소망과 자비의 영이니까, 이런 영으로 충만해야 비로소 올바른 분별력이 생기고 기쁨과 은혜와 사랑과 능력이 충만해 지니까, 그러므로 성령 충만함을 받아서 성령의 역사하심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세상의 다른 것으로 취하지 말고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능력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정말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물밀 듯 쏟아져 내려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완전한 생명의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세상의 돈이나 명예나 권세나 지식이나 그까짓 술이나 향락이나 오락이나 이런 것들이 주는 기쁨과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이 기쁨은 영원한 기쁨입니다. 모든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이기는 기쁨입니다. 모든 더러운 것과 추한 것들과 죄와 유혹과 핍박을 이기는 고상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기쁨입니다. 그러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되는 퍼펙트한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을 구하기에 앞서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위하여 교회를 가까이 하고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정말 한분도 빠짐없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세상의 모든 죄와 추한 것들과 환난과 환경과 상황과 조건을 이기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영원한 생명과 기쁨과 감사와 평강과 위로 소망이 충만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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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은혜받은 믿음

 

말씀 : 20:1~16

 

1.포도원품 꾼의 비유의 의미

 

오늘 본문은 유명한 포도원 품꾼의 비유입니다. 어느 날 포도원 주인이 포도를 한창 수확할 시기에 일손이 너무 부족하여 장터로 품꾼을 데리러 나갔습니다. 처음에는 아침 일찍 즉 0(오전 6)나가 몇 명을 불러 포도원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일손이 부족하여 3(오전9)에 장터에 가서 사람들을 불러 가서 일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계속 일손이 부족하여 육시, 구시, 심지어 십일시 즉 오후5시에도 가서 일꾼을 불러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하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십이시 즉 오후 6시가 되어 일을 마치고 품삯을 주는데 먼저 제일 늦게 온 사람 즉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에게 하루 품삯인 1데나리온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아침부터 일찍 와서 열심히 일한 다른 품꾼들이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으면 우리는 훨씬 더 받겠구나.’하고 은근히 기대를 하며 품삯을 받으러 갔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한 데나리온 밖에 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주인에게 따집니다. ‘아니, 이 사람은 다 저녁때 와서 겨우 한시간 밖에 일하지 않았고 우리는 하루종일 12시간 동안이나 뙤약볕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일했는데 어떻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 밖에 안 줍니까?’ 그러자 주인이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냐? 애시당초 너희와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일하지 않았느냐? 나중에 온 저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은 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선을 행한 것이어늘 너는 너는 내가 저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준 것을 악하게 보느냐? 너는 네가 받아야 할 것을 정당하게 받은 것이니 네 것이나 가지고 가거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비유의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1절을 보겠습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여러분, ‘천국은 마치하시면서 이 비유의 말씀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는 무엇에 대하여 우리에게 가르쳐주려고 하신 것입니까? 그렇죠. 천국에 대해서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의미입니다. 천국이 있다. 천국을 믿어라. 천국을 믿고 천국시민으로 살아라 그런 이야기죠.

 

그 다음에는 포도원주인이 새벽6, 아침9, 정오, 오후3, 오후5시에 계속 품꾼을 찾으러 나갔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포도원 주인은 물론 하나님이시오, 품꾼은 우리들입니다. 포도원주인이 계속 품꾼을 찾으러 갔다는 것은 우선은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천국으로 보내시기 위하여 계속해서 우리를 찾아와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의미로 하나님은 우리를 천국으로 보내시기 위하여 계속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천국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몰라도 천국은 반드시 소유하야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시려고 끊임없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 의미는 우리를 그렇게 계속 찾아오시는 것은 우선은 우리를 천국백성으로 삼기 위해서 이지만 단순히 그것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꾼으로 세우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품꾼이 일꾼 아닙니까? 우리를 하늘나라 일꾼으로 세우셔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참여시키려고 부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의미는 저녁때가 되어 품삯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녁때란 우리에게 활동할 수 있도록 주어진 시간이 다 지나고 하나님품으로 갈때를 말합니다. 그때에는 우리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그 삯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포도원 품꾼의 비유의 말씀의 교훈인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며 첫째는 천국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이요, 두 번째는 천국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이요, 셋째, 그렇게 천국백성이 되었으면 그 너무나 소중한 하늘나라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이며, 네 번째는 그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하나님 뜻안에서 살아갈 때에 천국은 물론 큰 상급까지 주신다는 것입니다.

 

2.예수님은 천국을 가장 강조하셨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하여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천국은 반드시 존재한다. 천국은 예수님이 다른 어떤 것보다고 강조해서 말씀하신 가장 중요한 명제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약성경에 보면 천국 혹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씀이 60여차례 나오는데 대부분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4:17절에서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 제일 먼저 하셨던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습니다. 4:23절에서는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고 하셨습니다. 5장의 팔복에서는 계속해서 어떻게 어떻게 하면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6:19절에서는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2:2절에서는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25:1절에서는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고 하시는 등 수없이 천국에 대하여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계속해서 천국에 대하여 강조하고 계십니까? 두말할나위도 없이 천국이 반드시 존재하고, 천국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수 없는 가장 중차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천국을 주시려고 오셨고 그것에 대하여 계속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조차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꾸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13:44절을 보십시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한마디로 천국은 우리의 전 재산을 다 팔아서라도, 아니 우리의 육체의 생명을 팔아서라도 반드시 사들여야 할 가장 중요한 재산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정말로 천국을 바르게 알고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천국이 신앙생활의 목적입니다. 물론 지금 여기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느냐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원한 천국입니다. 천국이 궁극의 목적이고, 궁극적 종착점이며, 우리가 마침내 들어가 살아야 할 영원하고 완전한 복락의 본향집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천국 천국 그러면 아주 유치한 것으로 알고 뭐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철학적으로 고상하고 선하면 대단한 것으로 압니다. 성경을 요리조리 분해하고 쪼개고 뭐 그럴듯한 말을 하면 대단한 것으로 알고 천국을 이야기하면 시원치 않게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닙니다. 무슨 대단한 미사여구를 사용하고 무슨 아주 심오한 철학적인 이치를 말하고 요리조리 분석해보고 쪼개보고 무슨 심오한 철학적 이론을 대입해봐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합니다. 간단명료합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내가 세상의 빛이다. 나를 믿으라.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 나는 다시 온다. 믿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 그러므로 나를 믿고 나를 따르라. 보화를 땅에 쌓지 말라. 하늘에 쌓으라. 그냥 단순명료한 화법을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냥 그 단순명료한 명제를 그대로 믿고 따르면 되는 것이지 거기에 무슨 다른 해석이나 주석이나 조건을 붙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그토록 강조하신 천국을 확실히 믿고 공연히 이것 저것 갖다 붙이지 말고 그냥 단순무식하게 천국의 법과 원리와 규범과 목적과 가치를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누리는 것은 물론 지금 여기서도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찬양하며 모든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초월하여 현재적 천국와 영원한 천국을 마음껏 맛보며 감사와 기쁨과 소망과 위로를 마음껏 맛보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하나님은 열심히 우리를 찾고 게십니다.

 

그렇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와같이 천국은 우리에게 있어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명제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천국에 가기를 간절히 원하셔서 열심히 우리를 찾아오셔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계십니다.

 

오늘 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보십시오.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에 직접 집을 나가 품꾼을 찾았습니다. 여기서 포도원의 의미는 이중적입니다. 하나는 이 땅에 이루어진 현재적인 천국이요, 다른 하나는 영원한 천국입니다. 다시 말해 일단 하나님을 믿으면 현재적 천국을 누리다가 마침내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천국의 놀라우신 은총을 주시기 위하여 이른 아침부터 저녁 해가 저물 때까지 일꾼을 찾고 계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른 아침에 집을 나가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삼시 육시 구시 열한시까지 계속 일꾼을 부르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도원 들여보내시려고 새벽부터 저녁까지 계속 찾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포도원 들어가기만 하면 우리는 그 놀라운 천국의 은총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끊임없이 찾아오셔서 우리를 만나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죄와 무지 속에 신음하고 있는 인생을 찾아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 먹고 죄에 빠져 두려움 속에 숨어있는 아담을 찾아와 만나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찾아와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를 보내어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주셔서 우리를 찾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도 제가 비록 부족하지만 제 입술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되게 함으로 여러분을 찾아가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그 놀라우신 사랑과 열정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정말 너무 약하고 추하고 때로는 정말 악하기까지 한 우리들이지만 이렇게 찾아오셔서 불러주시고 은혜주셔서 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운데 살게 된 것입니다. 내가 무슨 큰 능력이 있어서, 무슨 구원받을 만한 선행이나 공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오직 우리를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살게 되었고 구원받고 천국시민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저와 여러분은 이 놀라우신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 앞에 겸손히 엎드려 절하며 그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를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살아숨쉬고 천국백성되어 영광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게 된 것은 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며 오로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며 겸손히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큰 은혜를 채워주시는 그 은총을 덧입어 정말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찬양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은혜 받았으면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포도원으로 부르시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포도원에 들어와 풍성한 것을 누리게 하려 함임과 동시에 우리를 포도원 품꾼으로 쓰시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오늘 1절 말씀을 또 보십시오. 오늘 비유의 말씀의 핵심을 모두 1절에 다 들어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무엇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낸다? 품꾼입니다. 품꾼이 뭐하는 사람입니까? 일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일만 시키려는 것은 아닙니다. 포도원에서 주인의 보호와 인도와 사랑을 받으며 살게 됩니다. 그리고 일한 연후에는 삯도 받습니다. 그런데 그런 은혜를 받았으면 그리고 그러한 삯을 받으려면 마땅히 자신이 있는 그곳에서 열심히 일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포도원에 살게 하신 것은 첫 번째는 하나님의 동산의 은총을 누리게 하려 하심이, 두 번째는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동산에서 일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동산을 가꿈으로 또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동산의 은총을 주기 위해서 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의 동산에 서 수고하다가 일을 그칠 때가 오는데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한대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새벽 6시에 온 사람이나 오후5시에 온 사람이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셨다고 말씀함으로 마치 1시간 일한 사람이나 12시간 일한 사람이나 무조건 똑같이 주는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많이 했다고 자랑하지도 말고 적게 했다고 낙심하지도 말고 그저 주어진 시간 동안 부름 받은 그 시간와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이지 무조건 똑같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22:12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은혜를 받은 자로서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 은혜를 누리며 그 은혜의 역사를 위하여 수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내려놓아야 할 짐이 있고, 반면에 새롭게 짊어져야 할 짐이 생깁니다. 11:28~30절을 보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여러분, 보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즉 인생의 모든 수고와 무거운 짐을 맡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저 먹고 마시고 입고 잠자고 육신의 것만을 위해서 사생결단하며 살아가는 무거운 짐을 벗겨 주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죄와 근심과 걱정과 염려의 무거운 짐도 벗겨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쉼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면에 나의 멍에를 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멍에는 뭡니까? 생명의 역사를 위한 멍에, 사랑의 멍에, 헌신의 멍에입니다. 생명과 진리와 평안과 참된 기쁨을 위한 멍에입니다. 그러면 왜 어떤 짐은 벗으라 하시고 어떤 짐은 지라고 하십니까? 물론 이유는 간단합니다. 세상의 짐과 죄의 짐은 우리를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생명을 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주시는 짐은 생명을 살리고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희망과 소망과 위로를 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그렇습니다. 우리를 죽이는 짐이 있고 살리는 짐이 있습니다. 죽이는 짐은 뭡니까? 죄의 짐입니다. 그저 육신의 영광만을 위하여 수고하는 짐입니다, 육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하여 지는 짐입니다. 그러면 살리는 짐은 어떤 짐입니까? 사랑의 짐입니다. 진리를 위한 짐입니다. 생명의 역사를 위한 짐입니다. 이런 짐들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기쁨을 주고 은혜를 주고 참된 가치를 가져다 줍니다. 긍지와 자부심과 자존감과 뿌듯함을 가져다 줍니다. 나를 행복하게 하고 남을 행복하고 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부모는 자녀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를 위하여 짐을 지면서 행복해 합니다. 남녀가 서로 사랑하면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를 위해서 짐을 지면서 행복해 합니다. 자신이나 남에게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행복을 주는 짐을 지고 나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만을 위한 짐, 심지어는 죄를 행하며 지는 짐은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도리어 결국 자신과 남을 죽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런 세상의 모든 짐은 내게 맡기고 내가 너에게 주는 생명의 짐, 사랑의 짐, 진리를 위한 짐을 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럴 때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누림은 물론 지금 여기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충만하게 이루어져 사랑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과 행복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천국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천국이 우리의 삶의 중심에 있게 하시기 바랍니다. 아직 천국을 확실히 알지 못하는 분들을 위하여 더욱 사랑과 말씀과 기도로 관심을 쏟음으로 온 가족과 모든 교우들이 한분도 빠짐없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선해서 하늘나라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되었으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을 이라는 점을 잊지 말고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각자 주어진 자리에서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포도원을 가꾸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힘있게 이루어가는 가운데 주님의 거룩한 생명의 역사에 참여하는 자로서 누릴 수 있는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은혜와 보람과 가치와 의미와 행복을 누리며 현재적인 천국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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