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역사
(1) 선사시대: 민족의 유래 (2) 힌두-불교시대 (BC 1-14세기) (3) 이슬람의 전래와 말라카왕국
(4) 포르투갈의 말라카 점령 (5) 네덜란드의 진출 (6) 영국의 진출과 식민화 과정
(7) 일본 점령기 (1942-1945) (8) 전후 영국의 복귀와 독립과정 (1945-1957)
(9) 말라야 공산당의 준동과 비상사태 선포 (10) 말레이시아 연방 (Federation of Malaysia)의 탄생
(11) 복합민족 사회의 형성과 1969년 인종폭동 사태
1. 선사시대: 민족의 유래
동남아는 현대의 중요한 4대 문명, 즉 중국, 인도, 이슬람 그리고 서구문명 등 모든 문화가 공존하는 지구상의 유일한 지역이다. 이러한 문화적 패턴은 동남아의 고유전통에 다양성을 더해 주었다. 정도는 다르지만 이러한 유입문화는 토착생활에 접목되어지거나 또는 흡수되어서 동남아시아 특유의 문화적 다양성을 연출하였다.
동남아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 가운데 하나이다. 이 지역에서는 BC 약 100만년전의 사람 두개골 (피테칸트로푸스)이 중부 자바지역에서 발견되었다. 동남아 지역에 가장 먼저 정착한 사람들은 기원전 약 2만년전 빙하기 말에 이 지역에서 살았던 구석기 시대인들로 오늘날 필리핀의 네그리토스(Negritos)인과, 사라와크의 뻬난 (Penan), 사바의 룽우스(Rungus)족, 말레이 반도의 산간부족인 오스트라로이드 베도이드 (Australoid Veddoid) 또는 오랑 아슬리인들의 조상들이다. 이들은 키가 작고 곱슬머리로 짐승을 사냥하거나 물고기를 잡아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최초의 말레이인들이 북으로부터 말레이 반도 지역으로 이주한 것은 기원전 약 2500-1000년 사이의 신석기시대로 추정되는데 Proto-Malays라 불리우는 이들은 오늘날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 태국, 그리고 버마인의 조상이 되었다. 이 당시의 민족이동은 수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이후 약 2-3세기에 걸쳐 또다른 일단의 말레이인들이 중국과 티벳으로부터 말레이 반도를 포함하여 동남아시아를 관통, 인도네시아 제도 등지로 퍼져나갔는데 이들 후기 말레이인(Deutro-Malays)은 이전의 이주민들보다 앞선 영농기술과 새로운 금속기술을 가져왔다. 이 청동기와 철기문화는 맨처음 청동기가 제조된 흔적이 발견된 베트남의 마을 이름을 따서 동선(Dongson) 문화라고 칭하게 되었다. 그 예술형태는 중국의 것과 연관된 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또한 동선문화기가 시작되면서 동남아시아에서는 중국과 인도문화의 특징이 현저하게 나타났다.
중국과 인도문화가 전래하기까지 토착적인 동남아의 문화적 특징은 이미 구체화되어 있었다. 기술면에서 이들 주민은 논에 물을 댈 줄 알았고, 짐승을 길들였으며, 야금술을 터득했고, 계절풍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항해술을 익혔다. 사회적인 면에서는 모계중심의 전통에 따라 자손의 혈통과 상속을 책임지는 여성이 사회에서 우월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촌락들을 이루었다. 오늘날의 말레이시아 원주민은 이들 프로토 말레이와 듀트로 말레이인의 후손, 오랑 아슬리 등을 통칭하여 부미뿌뜨라(Bumi Putera)라 칭하고 있다.
2. 힌두-불교시대 (BC 1 - 14세기)
말레이시아 지역에 있어서의 새로운 역사발전은 BC 1세기경 이 지역과 중국 및 인도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와의 정규적 교역활동이 개시되면서 시작되었다. 특히 말레이 반도를 중심으로 한 지역은 중국과 인도 사이에 위치하여 해상무역의 교차로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세력들이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관심을 기울여서 힌두교와 불교, 이슬람이 서로 경쟁하였다. 이때 이 지역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인도의 힌두교와 불교였다. 동서교역이 활발하던 이 시기에 말레이 반도와 보르네오 지역에서 일부 항구도시를 중심으로한 정치세력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지만 서기 7세기 이전까지는 이 지역에서 말레이족을 중심으로한 본격적인 정치세력은 나타나지 않았다.
(가) 불교왕국 스리비자야의 등장
말레이족에 의한 본격적인 정치세력이 등장한 것은 7세기부터로 중국의 역사기록과 이 지역에서 나오는 비문 등의 자료에 의하면, 수마트라 남부지역에서 말라카 해협을 통과하는 무역을 주요 기반으로 하는 스리비자야 (Srivijaya)가 7세기에 가장 영향력있는 고대국가로 등장하였다. 스리비자야 왕국은 7세기 말부터 약 600년 동안 말라카 해협을 중심으로 전 수마트라와 말레이 반도, 그리고 서부 쟈바와 서부 칼리만탄 일부에 걸쳐서 크게 발흥했던 불교왕국이었다. 전략요충인 순다와 말라카 해협을 지배한 스리비자야는 상업상의 우월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항구들을 건설하였으며 이곳을 지나는 무역선들로부터 통행세를 거두었다. 한편 스리비자야는 중국에 대해서는 조공을 바치면서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중국 문헌에 의하면 서기 670년 처음으로 당나라에 사절을 보냈으며 이같은 사절의 파견은 그후 76년간 계속되었다.
스리비자야는 대승불교 왕국이었다. 중국의 불교도 이칭 (Iching)이 672년 한 페르시아의 배를 타고 Palembang에 도착하였다. 그는 인도로 가기 전에 범어를 공부하기 위하여 6개월을 머무는 동안 스리비자야에 관한 기록을 남겼는데 그에 의하면 스리비자야에는 천명의 대승불교 승려들이 있었다고 한다. 말레이 반도 북부의 Ligor에 775년 범어로 세워진 비문에는 대승불교 사원을 세운 스리비자야 왕을 찬양하는 글이 새겨져 있어 스리비자야가 불교왕국이었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한편, 서기 750년경 대승불교는 자바에 나타난 사일렌드라 (Silendra) 왕조의 보호아래 한동안 중부 자바에 전파되었으나 곧 힌두교로 대체되고 말았다. 당시 열렬한 불교사찰 건설자인 사일렌드라 왕에 의해 772년 세워진 것이 Borobudur 사원이다. 보로부드르란 발음하기 힘든 부미삼바라부다하라 (Bhumisambarabhudhara)라는 말을 줄인 것으로 보살의 10계단 위에 선을 쌓은 산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이것은 산위에 만든 9단의 거대한 사리탑으로 둘레가 3마일이나 되는 원형 회랑과 4백개의 불상을 가지고 있다. 엷게 양각된 조각들은 신성한 대승불교의 경전내용과 세속 자바인들의 생활, 관습 등을 설명해주고 있다. 공격적 성향의 사일렌드라인들은 앙코르, 안남 등과 싸웠으며 850년경 결혼동맹을 통하여 스리비자야와 통합하였다.
(나) 스리비자야의 쇠퇴: 스리비자야는 11세기 초, 동남아시아 및 중국과의 무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남인도의 촐라(Chola)국으로부터 침략을 받게 되었다. 촐라국은 1011년 스리비자야 지배하에 있던 주요 무역항을 공격하였고 스리비자야의 가신국들도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이에 13세기 들어 스리비자야가 크게 쇠퇴하면서 당시까지 스리비자야의 영향권하에 있던 말레이 반도는 태국의 소승불교 왕국 영향권하로 편입되었으며 보르네오는 자바의 힌두왕국인 Majapahit에 의해 지배되었다. 스리비자야는 1377년 마자빠힛 왕국에 의해 멸망된다. 스리비자야는 끝까지 수마트라에 거점을 두었으며, 이때까지 말레이 반도에 거점을 둔 왕국은 없었다. 즉, 힌두-불교시대 (스리비자야 왕국부터 15세기 초 이슬람 왕국 설립전까지)의 대부분 기간동안 말레이 반도와 보르네오 거주민들은 자바나 수마트라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다) 힌두-불교문화의 마자빠힛(Majapahit) 왕조
자바국가들 가운데 가장 큰 고대왕국인 Majapahit 왕국은 1294년부터 포르투갈이 향료섬에 들어온 1520년까지 2세기 이상 존속되었다. 마자빠힛 왕국은 수마트라와 말레이 반도 전 지역, 칼리만탄의 거의 대부분과 동부 쟈바에 걸쳐 거대한 속국을 거느린 대왕국이었다. 이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는 1330-1364년 사이 재임했던 가자마다(Gaja Mada) 재상으로 인도네시아 최초의 제국건설자로 일컬어진다. 그는 당시 하얌 울룩(Hayam Wuluk) 왕과 함께 해양 동남아의 대부분에 대해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당시 마자빠힛의 영토는 말레이 반도와 1377년 멸망한 스리비자야를 포함한 수마트라를 포함하게 되었다. 그러나 왕이 죽은후 왕국이 분열하기 시작, 15세기에 이르러서는 서서히 영토가 줄고 국력이 약화되었다.
이때 새로운 정치와 종교세력들이 나타났다. 아유타야 (Ayuthia)는 남쪽으로 세력을 뻗어오고 중국인들은 교역권을 확대시키고 있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슬람의 출현이었다. 이후 오랜 기간동안에 걸쳐 인도네시아와 말레이 반도 지역은 이슬람 세력권으로 편입되었으며 마자빠힛 왕국은 힌두의 생활방식뿐만 아니라 교역권도 상실하게 되었다. 정치의 중심은 다시 말라카 해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수마트라쪽이 아니라 말레이 반도의 서쪽 해안지역으로 향하게 되었다.
3. 이슬람의 전래와 말라카 왕국
이슬람인들은 인도에서 북부 수마트라를 경유해서 말라야에 왔다. 1292년 중국에서 이탈리아로 돌아가던 마르코폴로는 북부 수마트라에서 2개의 이슬람 공동체를 발견했다고 한다. 말라야 지역에 대한 이슬람의 영향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트렝가누(Trengganu) 강의 동북쪽 해안에서 발견된 돌조각에서이다. 아랍어로 새겨져 있는 이 돌은 1326년-1386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자바섬 전체가 훗날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은 자바 지역에 광범한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말라카 왕국을 통해서였는데 말라카 왕국은 말레이 반도에 거주하는 말레이인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통일국가로서 15세기 중엽까지 말레이 반도의 대부분 소국가들과 수마트라 동부 연안의 전역을 그 세력권 하에 두었다.
(가) 말라카 왕국의 건설
스리비자야가 마자빠힛 왕국에 속국으로 전락한 후 스리비자야 왕국의 한 왕자였던 빠라메스와라 (Parameswara)가 빨렘방으로부터 말라카로 건너와서 1403년 이 지역을 근거지로 도시국가를 세웠다. 이를 계기로 말레이 반도에의 역사시대가 개시되는데 빠라메스와라의 이복동생인 무자파르 샤(Muzaffar Shah)는 이슬람을 국교화하여 서아시아 및 인도 방면의 부유한 이슬람 상인을 끌어들여 말라카 항의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다. 한편 빠라메스와라는 말라카 해협을 경유하는 모든 선박이 말라카를 거쳐갈 수 있도록 동 지역을 국제 항구도시로 육성해 나갔다. 말라카국은 동서 해상교통로의 요충인 말라카 해협 중심지를 독점지배하고 말라카 항을 적극 활용하여 인도와 페르시아, 시리아를 거쳐 동 아프리카 연안과 지중해까지에 이르는 광대한 통상범위를 확보하였으며 이 무역망을 통하여 각종 생산품들을 세계 전역으로 교역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말라카는 세계통상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스리비자야의 유산을 계승하게 되었다. 말라카 왕국은 15, 16세기에 번영기를 맞았으며 당시 인근 지역을 직할지, 속령, 조공국으로 나누어 지배하였다. 초기부터 말라카 왕국의 주요 위협세력은 씨얌(Siam)족이었다. 그러나 말라카는 1405년 이래로 명나라의 보호를 받았고, 자주 명군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건국이래 말라카 왕국은 계속해서 각종 사절단을 북경에 보냈다.
말라카 왕국의 번영은 현명한 통치자들이 천연의 지리적 이점을 극대화하여 국제무역의 공동체를 창출해냄으로써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말라카의 번영은 멀리 동방의 나라로부터 간접무역에 의해 수입되는 고급향료와 양질의 열대작물에 매료되어 있던 유럽열강들로 하여금 말라카와 직접 접촉에 나서도록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포르투갈의 식민통치자들은 이로써 말라카 왕국의 정복이 새로운 국제무역망을 창출해내는 것보다 훨씬 더 쉬울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15세기 초반부터 서구열강은 앞을 다투어 커피, 차, 담배, 사탕수수 등 양질의 열대작물의 보고인 말레이 반도와 인도네시아 제도를 정복대상으로 삼게 되었다. 이곳의 각종 향료와 열대작물은 말라카 왕국이 장악하고 있던 아시아 무역망을 통해 서구의 여러나라로 흘러들어갔다.
향료는 유럽인들에게 대단히 필요한 상품이었다. 유럽에서는 겨울 동안 많은 수의 가축을 생존시킬 대책이 없었다. 그래서 많은 가축이 도살되었고 그 고기의 선도를 유지할 방법을 찾게 되었다. 이를 위해서 소금과 향료가 이용되었고, 수입한 향료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동북 인도네시아에서 생산되는 정향과 후추였다. 오랫동안 맛없는 음식에 길들여져 온 유럽인들에게 말루꾸(Maluku) 군도에서 생산되는 정향과 육두구는 실로 훌륭한 향취와 음식의 맛을 일깨워 주었다. 더구나 정향과 육두구가 향료의 역할뿐만 아니라 탁월한 약재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은 유럽인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육두구는 특히 두뇌를 강화시키고 기억을 명료하게 하며 위장을 튼튼하게 하고 동시에 몸을 따뜻하게 보해주는 다용도의 신비한 향료였다.
각종 향료와 양질의 열대작물은 초기에 아랍의 무슬림 상인들에 의해서 서구로 운반되었다. 일찍이 카이로에서 말루꾸까지 해로를 개척했던 이들은 말루꾸에서 정향과 육두구를 구입하고, 쟈바 서북부의 반땀(Bantam)에서 후추를 샀으며, 기타의 열대작물은 주로 이방인인 중개상들로부터 구입하는 절차를 거쳤다. 아랍상인들은 향료제도에서 사들인 향료와 열대작물을 지중해를 거쳐 베네치아까지 운반하였다. 무슬림들이 지배하고 있던 아시아 무역망을 손에 넣음으로써 막대한 동양의 부를 한꺼번에 장악할 목적으로 무력을 앞세운 포르투갈이 서구 열강중 가장 먼저 인도네시아 군도로 내도하게 된다.
(나) 이슬람 시대의 개막과 말라카의 쇠망
말라카 왕국은 이 지역에서 힌두-불교 시대의 막을 내리고 이슬람 시대의 시작을 가져왔다. 이슬람은 아랍 및 인도상인과의 교역과정에서 전해졌다. 이 과정에서 말라카 왕국은 동남아시아에 이슬람을 전파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무역을 통해 말레이어를 상업용어로 각지에 전해 오늘날의 말레이어와 인도네시아어의 모태가 되도록 하였다. 이슬람교는 말라카로부터 말레이 반도와 수마트라, 말레이 소국가들로 전파되었고, 교역로를 따라 인도네시아 군도로까지 전해졌다. 이슬람교는 말레이인의 주요 종교로 자리잡으면서 그들의 생활양식과 사회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러나 말라카 왕국은 말레이 술탄 상속체계의 미확립, 식량 등 생필품의 대 자바의존, 지배계급과 민중사이를 연결하는 완충계급 부재 등의 문제로 갈등을 겪다가 1511년 포르투갈의 공격을 당함으로써 몰락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이 말라카를 침공하여 말라카시를 점령하면서 말라야는 포르투갈과, 그때까지 말라카 왕국의 지배하에 있던 아체왕국, 부기스, 미낭까바우족의 활동무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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