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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 발흥과 기독교 사회개혁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부상한 일본은 “한국을 중국과 러시아의 지배로부터 분리시키고 영국과 미국의 양해 하에” 보호조약과 합병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세우며 조선을 자신들의 속국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한일합방 이후 1945년 해방되기까지 “36년 간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 황국신민화정책으로 그 통치방법이 변화되어 왔지만 식민지 지배와 수탈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추호도 변함이 없었다.

 

어용사가 유세비우스가 콘스탄틴 대제의 통치에 아부했던 것처럼 일본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일본의 한국 합병을 예찬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양심의 소리는 있었다. “조선합병”이라는 글에서 우찌무라 간조는 이렇게 말했다. “불쌍한 한국 사람들은 그들의 나라를 잃었습니다. 아무도 그들의 손실을 위로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 일은 곧 또 하나의 폴란드를 합병한 일이며, 결국 이 먹이를 완전히 소화할 수 있으리라고는 바랄 수 없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한일합방과 국권의 상실로 한국기독교는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어려움 가운데도 항일운동을 주도하고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역할을 활발하게 전개해 나간다. 이런 기독교의 활동은 일본 정부로 하여금 한국 개신교인들과 개신교 선교사들에게 차가운 눈총을 보내기 시작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그러나 안, 밖으로 저항을 하면서 한국 기독교는 한국근대화와 민족계몽을 통한 민족주의 사상의 고취에 크게 기여한다.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일본 정부는 통감부를 통해 새로운 학교령을 공포하고 신민지 교육시책을 강요함은 물로 관공립 보통학교에 일본인 교사를 폐지시키고 사립학교 설립을 인가제로 전환시켜 일제의 관할 하에 두면서 학교 설립을 규제했다. 이에 대해서 한국에 파송 된 선교회는 내용적으로는 비정치화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나 실제적으로는 적지 않은 선교사들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예찬하는 경우가 많았다. 외국 선교사들은 일본의 한국 통치를 정당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짙었다. 그러나 일제의 기독교 탄압의 가속화로 한국기독교와 선교사들의 입장은 저항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갑신정변,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청과 일본의 무력에 의해 수난 당하는 현장을 목도하던 국내의 외국 선교사들 중에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무단정치를 우려하며 그것을 노골적으로 폭로하는 이들도 있었다. 미 감리회 소속 케이블 선교사는 1908년에 일제의 무단정치를 폭로하는 한 보고서를 미국 선교본부에 보냈다. 일제가 한국기독교에 대해 가했던 폭행과 살해 사건은 일제가 교회를 어떻게 보았으며, 그들이 얼마나 반기독교적 탄압정책을 썼는지를 말해 준다. 일제는 선교사들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못하고 그들의 선교구에 있는 한인교회들에게 박해를 가함으로써 자신들의 의지를 전달했고 이와 같은 기독교 박해는 통감부가 설치된 후 더 구체적이고 노골적으로 진행되었다.

 

105인 사건은 대부흥 운동을 거치면서 거대한 규모로 성장한 한국기독교가 일본 식민 정권에 대항할 수 있는 잠재적 반정부 단체라는 일제의 인식에서 기인되었다. 한국 선교의 개척자 제임스 게일이 전환기의 한국에서 말한 것처럼 “한국은 정치적 존재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선교사들의 세계에서는 제일류의 세력”으로 인정받을 만큼 세계 기독교계로부터 주목 받는 대상이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그리고 1909년 백만인 구령 운동을 통해 세계 선교지에서 유래를 찾기 힘들 만큼 놀랍게 성장한 데다 신학교 설립, 노회와 총회의 설립 등으로 하나의 전국적인 조직을 갖춘 큰 세력으로 발전했기 때문이었다. 1884년 알렌에 의해 시작된 한국선교가 과거 “지배권 쟁탈을 다투는 강대국들의 포성이 두 번이나 진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선교 25주년이 지난 후 “1910년대의 기독교는 정립된 종교요, 기독교회는 큰 능력을 내포한 민족적 기관으로” 발돋음한 것이다.

 

3·1운동 당시 마침 극동을 방문, 현장을 확인한 블랜드가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에서 지적한 것처럼 3·1운동은 일본의 무단정치에 대한 국민의 분노, 러시아 혁명으로 인한 민족국가의 출현,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의 선언에 자극 받아 일어난 한국 민족의 비폭력 독립운동이었다. 그리고 그 위대한 결집력은 “민족 종교와 같은 특징을 지닌, 민족의 자유, 독립의 원동력”이었던 기독교에서 나왔다.

 

3·1운동 이후, 제임스 부컬크가 말한 “반기독교 운동”이 거세게 일기 시작하여 1922년에 정점에 달했던 것이다. 특히 반 기독교적 성격을 지닌 휴머니즘,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발흥으로 젊은이들 사이에는 반기독교적 움직임이 강하게 일고 있었고, 가치관의 차이로 인한 젊은이들과 기성세대의 충돌, 자유결혼, 여권운동, 교회의 사회참여 문제가 중요한 시재적 현안으로 부사했다. 또한 경제 공항으로 젊은이들의 심리상태는 극도로 불안했고, 이로 인한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어 교회의 영적침체가 더욱 심화 되었다. 더구나 진화론과 고등비평의 유입으로 전통적인 창조론과 성경관이 일대 도전을 맞기 시작했다. 볼셰비키혁명 이후 조직된 조선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운동, 춘원 이광수의 기독교 비판, 김장호의 자유주의 사건은 그 전형적인 예다. 3년간의 미국 연구를 마치고 1912년에 돌아온 연희전문학교의 벡커가 지적한 것처럼 한국 청년들 사이에는 “격세의 감”을 느낄 정도로 커다란 사상적 변화가 일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사조들의 유입과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되는 일본의 한국 식민정책 속에서 교회는 이러한 대내외적인 문제들에 대처해야 했고, 동시에 변천하는 사회의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적응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중적인 사명을 부여받았다.

한일합방 이후 조국이 일제에 의해 강점되자 한국 기독교인들이 정치적인 소망 대신 종교적인 소망으로 방향을 선회하면서 한국교회에는 사회적인 책임과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신앙을 내향화시키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 결과 한국교회에는 세대주의 종말론이 놀랍게 확산되기 시작했고, 성경 중심의 기독교가 더욱 강조되었다.

 

세대주의 종말론의 발흥은 한국의 개신교, 특히 선교를 주도했던 장로교, 성경교, 대한기독교, 동양선교회 등의 신앙을 타세적인 신앙으로 만들어 주었으며, 보의 아니게 하회적인 책임을 간과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3·1운동의 전후로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와 춘원 이광수의 기독교 비판처럼 교회 밖으로부터의 기독교 비판이 강하게 일어나던 그 즈음, 교회 내부에서도 전통적인 신앙에 대한 강한 도전이 일어났다. 그것은 자유주의 도전과 이단의 발흥이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의 사회 경제적 혼란, 3.1운동의 실패,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의 발흥, 일제의 통치에 편승하는 어용 교단의 출현 등 끊임없이 계속된 사회적 혼란을 틈타 자유주의와 반선교사의 기치를 내걸고 주류에서 벗어난 수많은 종파들이 태동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등장한 이단들은 해방이 될 때까지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마치 예일 대학의 교회사가 시드니 알스트롬이 그의 저서 미국의 종교사에서 미국 제 2차 대각성운동 이후 수많은 이단들이 등장하는 그 시대를 가리켜 “이단의 전성시대라고 명명했던 것과 같은 시대상이 출현한 것이다. ”

 

1919년, 브라운은 자신의 극동의 정복에서 한국교회가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성경을 사랑하고 구령의 열정에 불타고 있으며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는 교회라고 인정하면서도 한국기독교의 사회적 관심의 결여에 대해서는 강도 높게 비판했다. 한국교회는 “복음의 사회적 적용에 비교적 무관심”하고, “교회의 사상이 내세에 고정”되어 있으며, “현 세상은 너무도 완전히 상실되어 이 세대에서는 구원받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브라운이 한국에서 활동하는 한 선교사에게 “사회 개혁의 방식에 대해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고 질문하자 그는 “전혀 못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에 너무 바쁩니다.” 라고 답변했다. 브라운은 한국의 사회적 관심의 결여가 선교사들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확실히 191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교회는 사회적 관심이 줄어들고 있었다. 원산부흥운동과 평양 대부흥 운동, 그리고 이어 진행된 백만인 구령 운동을 전후하여 한국 사회를 주도했던 교회의 모습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1917년 춘원이 한국교회의 사회적 관심을 촉구했고, 1922년 이후 동아일보가 사설을 통해 이 문제를 끊임없이 환기시켰으며, 1928년 예루살렘 국제 선교협의회에서는 교회의 사회적 관심을 중요한 주제로 다루었다. 이와 같은 노력에 힘입어 1918년 남감리교가 사회신경장정을 편입시켰고, 1920년 장감연합공의회는 사회봉사실현 프로그램을 확정했으며, 1912년에는 만주와 조선 주재 장로교 선교사 100명이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서 5일 간 회합을 갖고 조선인 교역자의 미국 유학 프로그램을 논의했고, 1925년에는 조선야소교 연합공의회에 사회부를 상설했고, 1·932년에는 사회신경을 채택했다. 그 시대 속에서 이와 같은 교회의 대 사회적 책임의식은 교회의 기독교문화 사업과 사회복지사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전기가 되었다. 이것은 새로운 운동이 아니라 한국교회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간접선교와 직접선교의 균형의 필요성을 재인식한 것이다.

 

이렇듯 한국장로교회가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의 도전, 교회 밖으로부터의 비판, 교회내부로부터 이단의 도전을 받고 있는 동안 한국에 파송 된 선교사들 가운데 특히 평양 주재 선교사들과 서울 주재 선교사들 사이에 뚜렷한 대립과 갈등이 표출되고 있었다. 이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곳에 학교를 옮기는 문제와 교단의 색이 반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교회와 사회의 계몽운동, 절제운동, 농촌운동, 진흥운동에 많은 기여를 하게 된다.

 

그리고 1920년에 이르러 길선주 목사와 김익두 목사로부터 시작된 영적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으로 한국교회는 엄청난 양적인 성장을 가져왔다. 이와 함께 청소년운동과 주일학교운동에 관심을 갖기에 이른다. 이는 젊은이들을 깊은 영적 잠에서 깨워서 교회와 사회에 위대한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복음 본래의 성격들을 고취시키기 위해서이다. 이 운동은 YMCA, YWCA등이 주도해 나갔다. 한편 주일학교도 활성화 하여 아이들 신앙교육에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방학 중에 수련회를 통해서 이들을 교육하였다. 이밖에도 출판문화운동, 대 사회사업운동을 전개해 나갔을 뿐만 아니라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고아들을 위한 고아원 운영을 하였고 나환자들과 폐결핵 한자들을 위한 수용소와 병원의 설립 운영과 같은 사회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는 한국교회가 사회 속에서 단순히 복음만 전한 단체가 아니라 복음을 통한 개인 구원의 영역을 넘어 사회적 책임의 실천을 통해 사회와 문화 속에 기독교 정신을 실천하는 하나의 장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대 대사회적인 책임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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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 신사참배와 한국교회


1. 서론

 


   일본은 식민통치 초기부터 한국 민족의 특성을 말살하여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왜냐하면 경찰과 군사력만으로는 한국을 안정적으로 지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그들은 식민지 민족의 특수성을 말살하여 ‘일본화’(日本化) 함으로써 식민지를 영구적으로 지배하려고 했다. 이러한 ‘동화정책’(同化政策)은 일본의 식민통치의 기본이었다. 1930년대에는 이 정책이 더욱 강화되어 ‘황국신민화정책’(皇國臣民化政策)으로 나타났다.

   이 정책은 1930년대에 ‘군국주의’(軍國主義)로 전환한 일본이 침략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것은 ‘정신교화운동’(精神敎化運動) 에서 나온 정책이었다. 그 목표는 ‘천황 신앙’을 중심축으로 하여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는 것이다. 일본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국인에게 ‘신사참배(神社參拜)’,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의 제창, ‘창씨개명’(創氏改名)과 일본어 사용 등을 강요했다.

   이 황국신민화정책 중에서 한국교회와 관련이 있는 것은 신사참배이다. 본고는 신사참배가 한국교회에 어떤 영향력을 미쳤는지 조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필자는 신사참배의 본질을 밝히고 그것이 1930년대의 한국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 볼 것이다. 그 후에 신사참배에 대한 필자의 의견을 제시하겠다.


2. 신사참배의 본질

 
   고대 일본인들은 자연의 모든 것과 그들의 조상을 ‘신’(神, 가미)으로 숭배했고 인간과 자연을 구별하지 않았다. 이러한 신앙은 고대 일본의 천황(天皇)의 권력 강화와 더불어 천황가의 조상신으로 여겨졌던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미가미)을 중심으로 한 신화적 인물이나 영웅들을 신사에 봉하여 함께 숭배하는 신앙의 형태로 굳어졌다. 이것이 고대 신도(神道, 신토)인데 황실과 정치권력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발달했다.

  하지만 고대 신도는 관습적 의례에 치중했기 때문에 근대 이전에는 불교에 눌려 있었다. 하지만 17, 18세기에 들어와 일본의 유학자들에 의해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복고신도’(復古神道, 훗코신토)를 발전시켰고, 이들의 문하에서 신도사상에 입각한 국수주의와 왕정복고를 주창하는 학자들이 많이 나왔다. 이들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1866~67)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

   메이지유신을 전후하여 신도는 천황을 절대신으로 하는 천황제 국가의 지도정신으로 이데올로기와 되었고 통치 원리로 채택되었다. 이때부터 신도는 일본 정부의 보호와 육성하에 급속히 발달하여 국교적 지위를 확립해갔다. 1871년 일본 정부는 일본의 모든 신도 사당, 즉 ‘신사’(神社)를 국가의 사당으로 하고, ‘사격제도’(社格制度)를 마련하여 신사를 체계화했다.

   그러나 이러한 ‘신도국교화정책’이 국내외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이에 일본 정부는 1882년에 신도를 ‘국가의 제사’로서 일반 종교와 법적으로 분리시켰고, ‘국가의 제사인 신도’가 종교가 아닌 하나의 국가예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강변했다. 그리고 동시에 천황의 충실한 백성과 신하로서 천황가의 조상들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국가의식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이러한 일본의 전통 신앙인 신도에 입각하여 천황가의 조상신이나 신화적 인물과 영웅 등을 안치해 놓은 ‘신사’나 ‘신궁’등을 참배하는 행위가 신사참배이다. 이것은 국가 종교의 경향이 강한 신도를 천황이 다스리는 국가의 지배 원리로 확립시키려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다.

  
3. 신사참배 강요

 

   일본의 신사참배 요구는 1910년에 한국을 강제로 병합한 직후부터 있었다. 1876년 개항 이후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대상으로 하는 신사가 걸립되었다가 강제 병합 후에는 한국인을 일본화하기 위해 신사참배를 요구했다. 그러던 중에 1930년대에 들어와서 침략전쟁의 사상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병력을 효과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정책의 하나로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당시 강요된 신사참배의 핵심은 천황가의 신적 기원에 대한 경배, 천황가와 전쟁영웅들에 대한 경배였다.

   이러한 신사참배 강요가 가장 먼저 발생한 곳은 교육계였다. 일본는 1932년 1월에 전라남도 광주(光州)에서 ‘만주사변에 대한 기원제’를 개최하고 학생들을 참석하도록 했으나 기독교계 학교가 이를 거부하여 문제가 되었다. 또한 같은 해 9월 평양에서 있었던 ‘만주사변 1주년 기념 전몰자 위령제’를 개최하고 기독교계 학교도 참석하도록 공식문서를 보냈지만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를 포함한 10개의 학교가 불참했다. 또한1933년 9월 원산의 캐나다 장로회 소속 진성여자보통학교(進誠女子普通學校)도 ‘만주사변 2주년 기념 순란자(殉亂者) 위령제’의 참가를 거부하여 경고를 받았다.

   일본이 기독교계 학교에 대하여 신사참배 거부를 이류로 직접적인 제재를 가한 것은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장 신사참배 거부사건’이었다. 1935년 11월 14일 평안남도 도청에서 개최된 도내 공 ․ 사립 중등학교 교장회의에 참석한 교장들에게 도지사 야스다케(安武)는 개회에 앞서 평양신사(平壤神社)에 참배할 것을 요구했다. 이때 숭실학교 교장 맥큔(G. S. McCune), 숭의여학교(崇義女學校) 교장 대리 정익성(鄭益成), 순안(順安) 의명학교(義明學校) 교장 리(H. M. Lee)는 신사참배가 기독교 교리에 반대되고 양심상 이에 응할 수 없다고 했다. 이를 계기로 평안남도 도당국과 조선총독부는 이전의 유화책을 버리고 강경책을 쓰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후부터 학교장과 학생들의 참배 여부를 명확히 서면으로 답하도록 요구했다. 이에 따라 학교장의 파면과 학교를 폐교할 수 있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러한 총독부에 강경책에 대해 의명학교 교장은 신사참배를 하기로 했으나 숭실전문학교 교장 맥큔과 숭의여학교 교장 스눅(V. L. Snook)은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1936년 1월에 교장직에서 파면되었다.

   1938년부터 조선총독부는 한국교회에 대해 직접적으로 일본적 전향을 요구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같은 해 2월 총독부는 ‘기독교에 대한 지도 대책’을 세워 기독교인의 신사참배를 지도하고 강화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경찰력을 동원하여 개 교회에서부터 시작하여 노회와 총회에까지 압력을 가해 신사참배를 가결하도록 강요했다. 당시 총독부가 제시했던 신사참배 강요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1.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이며, 예배행위가 아니고 조상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것일 뿐이다.

2. 교육의 목적은 학생들의 지적인 육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로 하여금 천황의 신민(臣民)이 되게 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교사와 학생들이 모두 함께 신사참배를 통하여 천황에 대한 경의를 표하여야 한다. 그러나 일반인들의 신사참배는 자유에 맡길 뿐이고 강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는 기만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종교적인 입장에서나 민족적인 입장에서든 신사참배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4. 기독교의 대응

 

   그렇지만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 교회의 반응은 일치하지 않았다. 먼저 외국 선교부의 입장을 살펴보자.

   미국 북장교회 선교부는 신사참배에 대해 대체로 거부하는 입장에 있었다. 하지만 이 안에서도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이니 기독교 교리와 교육목적에 위배되고 신앙양심에 반하는 것이므로 교육에서 물러나더라도 절대로 응할 수 없다는 입장과, 신사참배에 비록 종교적 요소가 있다고 하더라도 일본 당국에서는 이것이 국민교육상 요구하는 애국적 행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므로 학교를 살리고 기독교교육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이에 순응해야 한다는 입장이 대립했다.

   선교부는 홀드크로프트(J. G. Holdcroft)와 솔타우(T. S. Soltau)등 실행위원들을 중심으로 총독부와 교섭을 진행했으나 여의치 않자, 신사참배를 끝까지 강요할 경우 학교를 폐쇄하고 교육에서 인퇴(引退)할 수밖에 없다는 강경론이 우세했다. 결국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는 1938년 5월 교육 인퇴를 결의하였다. 그리고 이에 따라 평양 3숭(三崇 : 崇實中學, 崇實專門, 崇義學校), 대구의 계성(啓聖) ․ 신명(信明), 재령의 명신(明信), 선천의 보성(保聖) ․ 신성(信聖), 강계의 영실(英實), 서울의 경신(儆新) ․ 정신(貞信)등의 학교를 폐교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는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 가장 강경한 반대입장을 표명했다. 총독부가 남장로교 산하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신사에 참배하기 보다는 학교를 폐교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선교본부에 연락하여 실행위원회 풀턴(C. Darby Fulton)의 내한을 요청하였다. 1937년 2월에 내한한 풀턴은 이 문제를 검토하고 “한국 학교에 대한 정책.”을 발표했다. 그 주제는 “기독교 교리를 수정하지 않고는 교육사업을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학교를 폐쇄하고 교육에서 인퇴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얼마 후 중일전쟁이 일어났고 총독부가 기독교계 학교에 본격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남장로교 산하의 학교들은 이제 저항하여 폐교 당하거나 자진 폐교했다. 이때 폐교당하거나 자진 폐교한 학교는 광주의 숭일(崇一) ․ 수피아(須彼亞), 목포의 영흥(永興) ․ 정명(貞明), 순천의 매산(梅山), 전주의 신흥(新興) 기전(紀全), 군산의 영명(永明)학교 등이었다.

   경상남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빅토리아장로교(오스트레일리아) 선교부도 1936년 2월에 있었던 위원회 특별회합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신사참배 강요가 계속되자 1939년 1월에 위원회 특별회합에서 “교회와 학교에서 신사참배에 응하지 않는다.” 고 결의했고, 이해에 부산의 일신(日新), 마신의 창신(昌信) ․ 의신(義信), 진주의 시원여학교(柴園女學校)등이 폐교했다.

   하지만 감리교계 선교사들과 캐나다선교부에서 운영하는 학교들은 1930년대 초반에는 어느 정도 저항했지만, 중반이 지나면서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총독부와 별 다른 마찰이 없었다.

 

한국교회도 교파에 따라 신사참배에 대해 입장을 달리했다. 감리교를 포함한 대부분의 교파는 일본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인정했다. 장로교만이 반대하다가 1938년 9월에 있었던 27회 총회에서 결국 일본의 강요와 압력으로 인해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이미 이 문제는 장로교 내에서 1915년부터 공식적으로 거론되었다. 그러다가 총회에서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1931년부터 장로교 총회에서는 이 문제를 매년 다루었다.

한편 일본은 거의 모든 교파들이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고, 기독교계 학교에 대한 신사참배 문제도 마무리 되어가자 1938년 초부터 그때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장로교를 굴복시키기 위해 경찰력을 동원하여 핍박했다.

결국 장로교도 1938년 봄부터 노회별로 신사참배를 가결했고, 1938년 9월 평양의 서문외(西門外)교회에서 열린 27회 총회에서 일본 경찰의 삼엄한 감시와 통제 속에서 미리 짜놓은 각본에 따라 다음과 같은 신사참배 가결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성명서

 

   아등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 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또 이에 신사 참배를 솔선 여행하고 추히 국민정신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하에서 총후(銃後) 황국신민으로써 적성을 다하기로 기함.

 
소화 13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이렇게 한국교회의 모든 교파들이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였다. 이는 동시에 한국교회의 변질의 시작이기도 했다.

 
5. 한국교회의 변질 - 장로교를 중심으로


   마지막으로 신사참배강요에 굴복한 장로교는 이제 일본의 전쟁을 위한 협력단체 중 하나로 전락하였다. 1938년 10월 17일 서울에서 개최된 ‘시국대응기독교장로회 신도대회’에는 경기 ․ 경성노회 소속 신자들과 학생 3,000명이 모여 총독부 광장에서 미나미 지로(南次郞)의 연설을 듣고 행렬을 지어 남산에 있는 조선신궁을 참배하는 등의 행사를 치렀다. 같은 해 12월 12일에는 장로회 총회장 홍택기와 부총회장 김길창이 감리교 총리사 김종우와 전 총리사 양주삼(梁株三), 성결교 이사장 이명직과 함께 일본의 이세신궁, 메이지신궁(明治神宮), 가시하라신궁(橿原神宮), 아쓰다신궁(熱田神宮),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등을 참배하려고 일본으로 떠났다.

   1939년 9월 제28회 총회에서 장로교회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을 결성했다. 9월 28일 결성된 황동노회 지맹(支盟)을 시작으로 각 노회별로 지맹이 결성되어 총회연맹의 지시사항을 수행하고 보고했다.

1940년 9월 제29회 총회에서는 총독부의 지도에 순응하여 헌법을 개정하고 중앙상치위원회의 설치 등을 결의했다. 그 목적은 총독부의 명령과 지시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함이었다. 10월 3일 총독부 관계자들은 간담회를 열어 장로교 상치위원 7명을 지도했다. 그 후 총회장 곽진근 목사는 일본을 다녀온 후 총회 임원들과 함께 “조선예수교 장로회 혁신요강”을 작성하여 상치위원의 의견을 구한 다음 11월 10일 총회장의 담화와 함께 발표했다. 그 중 ‘지도원리’에 따르면 장로교는 일본의 정책을 충실히 수행하는 ‘일본적 기독교’가 되도록 할 것이며 일본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 동아시아에 일본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를 따라 장로교의 헌법이 일본기독교단의 헌법을 참조하여 1943년 5월에 ‘일본지독교 조선장로교단 헌법’으로 개정되었고, 찬송가의 가사 개정과 삭제 작업은 1942년 초에 완료되어 같은 해 1월 20일부로 그대로 사용했다. 한편 외국 선교사들은 1941년 11월에 대부분 철수했고, 몇몇 남아있던 선교사들도 1942년 6월경에 강제 송환되었다. 이로써 외국선교사와 장로교회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1940년 12월 6일부터 8일까지 서울의 부민관 중강당과 신문내 예배당에서는 ‘황기 2천 6백년 봉축 조선예수교 장로회 신도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 첫날에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연맹’이 결성되었고, 결성식 후에는 일동이 조선신궁에 참배했다. 신도대회 기간 중에는 시국 강연이 이어졌다. 이러한 신도대회는 서울을 시작으로 하여 노회조직을 따라 지역단위로 개최되었다. 각 지역의 신도대회는 서울과 마찬가지로 ‘노회연맹’의 결성식도 겸했다. 장로교의 ‘총회연맹과 노회연맹’은 ‘국민총력 조선연맹’의 충성스러운 산하기구였다. 왜냐하면 이들 연맹들이 ‘조선연맹’의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홍보하기 때문이었다.

   1941년 8월 14일 총회 산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중앙상치위원회’는 서울의 총회사무실에서 위원회로 모여 “전시체제 실천성명서”를 결의하고 발표했다. 그리고 상치위원회가 실제적으로 총회를 대행하는 기관이 되게 했다. 그리고 9월 20일에 예정된 총회를 “시국정세”를 이유로 무기 연기했다.

   또한 이 성명서는 시국봉사의 실천으로 ‘애국기 헌납’, ‘금속품 공출’, ‘폐품 회수’를 제시했다. 그 가운데 ‘애국기 헌납’을 실행하기 위해 ‘조선장로교도애국기헌납기성회’를 8월 20일에 조직했다. 총독부로부터 기부금모금 허가를 얻어 10월부터 본격적인 모금운동에 들어갔다. 노회조직을 이용한 모금은 순조롭게 이루어져 1942년 2월 10일에 육해군에 애국기 1대와 육전기관총 7정의 대금인 15만 317원 50전을 헌납했다. 6월 19일에는 기성회 위원대표단이 조선군사령부를 방문하여 육군용 자동차 2대의 기금으로 2만 3천 221원 28전을 헌납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제31회 총회는 1942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신사참배를 가결했던 평양 서문외교회당에서 모였다. 회의록에 따르면 교회 총수는 전년도 3,624개 교회에서 2,543개 교회로 30%가 줄었고, 신자총수도 전년도 355,754명에서 249,666명으로 30%줄었다. 교회와 신자의 수가 급격히 줄어든 데에는 일본의 압력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지도자들이 일본에 야합하는 것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회장이 된 김응순 목사는 “기독교의 일본화”에 힘쓰겠다고 말했다.

   이 말대로 일본화에 힘쓴 ‘조선예수교장로회’는 결국 1943년 5월 4일부터 7일까지 있었던 상치위원회에서 김응순에 의해 해체되었고 새롭게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이 조직되었다. 그리고 미리 준비했던 ‘실천요목’을 그대로 채택하여 발표하고 각 교회에 공문을 보냈다. 이 ‘실천요목’은 교단의 교회가 일본에 협력하는 지침이 되었다. 이 교단의 통리자로 후(後)평양신학교교장인 채필근 목사를 선임했다. 5월 7일에는 통리 취임식이 있었다. 곧이어 포교규칙에 따라 교파명칭 변경 및 포교자 변경계를 총독부에 제출하여 같은 해 6월 25일자 관보에 실림으로써 공식적인 신고 ․ 등록 절차를 마쳤다.

   1944년 7월 24일부로 아베(阿部信行)가 조선총독으로, 엔토(遠藤柳作)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으로 임명되었다. 엔토는 9월 7일 기독교와 천주교 대표를 초청하여 교파간의 합동을 제시했다. 그럼에도 진척이 없자 엔토는 1945년 6월 25일에 장로교, 감리교, 구세군 지도자 55명을 초대하여 기독교계를 통합할 것을 촉구했다. 이에 그날 저녁에 통합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들은 다음날인 26일부터 29일까지 회의를 계속하여 교단 규칙을 만들고 통합총회 일정을 포함하여 상세한 계획을 작성했다. 그리고 통합된 교단의 이름을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하기로 했다. 이 교단은 임원과 직원을 세우는 등의 행정절차를 마무리 한 후에 1945년 8월 1일부터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38년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한 후 장로교회는 겉으로만 복음을 전하는 교회였다. 그 내면의 중심에는 신사참배라는 우상종교의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더 이상 교회에서는 참된 복음을 들을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장로교는 그 본질을 잃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우상종교와 완전히 혼합되었다. 다른 교파도 장로교와 거의 비슷한 순서를 따라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합되었다.

 
6. 신사참배 반대운동


   신사참배 강요는 교육기관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따라서 신사참배 반대도 기독교계 학교의 학생들과 교사와 학부형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 후 일본이 신사참배를 교회에까지 강요하자 목회자와 일반 교인들의 반대가 일어나게 되고, 그들이 서로 연합하여 대처하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까지 발전했다.

   한편, 1938년 9월 28일에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한 조선예수교장로회를 탈퇴하기로 결의했고, 이어서 10월 5일에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도 탈퇴를 결의했다. 미국 남장로교와 북장로교 선교부는 빅토리아 장로교 선교부와 함께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노회에서 제명당한 목사들을 지지하고 후원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크게 ‘신사참배 강요 금지 청원운동’과 ‘신사참배 거부 권유운동’이라는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신사참배 강요가 기독교계 학교에서 해마다 문제가 되자 1934년 장로회 총회는 두 차례에 걸쳐 총독에게 청원서를 제출하려 했으나 총독부 당국에 의해 저지당했었다. 1935년에 있었던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장 신사참배 거부사건’이후 총독부는 신사참배에 대한 공식적인 토의를 금지시켰다. 따라서 청원운동은 개인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박관준(朴寬俊) 장로는 1935년부터 수차에 걸쳐 총독에게 청원서와 경고문을 보내 신사참배 강요의 부당성을 경고하다가 여러 차례 경찰서에 끌려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청원과 경고가 효력이 없자 1939년 일본 정계와 제국의회에 청원하기 위하여 선천 보성여학교 음악교사를 사퇴하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던 안이숙(安利淑) 선생과 함께 일본에 건너갔다. 박관준 장로는 아들 박영창(朴英昌)과 함께 일본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군의 지도자들과 전(前) 조선총독 등을 방문하고, 정치지도자들과의 면담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이들은 순교할 각오를 하고 제74회 일본제국회의 중의원 회의장에 방청객으로 들어가 일본의 종교정책을 반대하는 내용이 담긴 경고서를 단상에 던졌다. 두 사람은 현장에서 바로 체포되었고, 경시청에 구금되었다가 평양감옥으로 이송되었다. 박관준 장로는 6년간의 감옥생활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기 직전에도 이러한 청원운동이 있었다. 장로교 총회장을 지냈었던 김선두(金善斗) 목사는 신사참배 문제로 평양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일본에서 공부하다가 사경회 강사로 일시 귀국한 김두영(金斗英)과 함께 1938년 8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신사참배 강요 금지를 일본 정계에 청원하려 했다. 정계와 군부의 지도자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돌아온 김 목사는 총독부의 지시와 강압에 의한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가결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이 사실이 탄로나 김 목사는 종로경찰서에 구속되었고 총회는 총독부의 뜻대로 진행되어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한국교회가 신사참배에 굴복한 후에 이에 반대하는 교역자와 성도들이 서로 연대를 맺고 조직적인 집단적 저항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본과 신사참배에 굴복한 한국교회를 비판하는 동시에 성도들을 대상으로 신사참배 거부를 권유하고 반대자들 사이의 결속을 강화했다.

   그 중심인물은 평안남도의 주기철(朱基徹), 평안북도의 이기선(李基善), 경상남도의 한상동(韓尙東) ․ 이인재(李仁宰) ․ 주남선(朱南善), 전라남도의 손양원(孫良源)등으로 전국에 분포되어 있었다. 만주지역에서는 박의흠(朴義欽), 헌트(Bruce F. Hunt, 韓富善)등이 활동하였다. 초기에는 교회와 인적 관계에 따라 연대가 이루어졌으나 점차 지역 간의 연대가 이루어져 경남, 서북, 만주 봉천지역사이에 교류가 이루어졌다

   의주에서 목회를 하던 이기선은 1938년 7월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교회를 사면하고 각지를 순회하며 신사참배 거부를 권유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하다가 1940년 6월경 일본 경찰에게 체포당했다.

   마산에서 목회를 하던 한상동은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교회를 사면하고 이인재와 함께 경상도 지역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주도했다. 이들은 빅토리아 장로교 소속 선교사인 호킹(D. Hocking, 許大是)와 트루딩거(M. Trudinger, 秋瑪田) 등과 협력하면서 서북지역의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연대하여 조직적인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단지 종교운동으로만 그치면 그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우므로 조속히 정치운동으로 전환시킬 필요가 있음을 인식하고 1939년 12월에 다음과 같은 방안을 정했다.

 

첫째, 신사참배를 긍정하는 노회를 파괴하도록 할 것.

둘째, 신사에 참배하지 않는 성도들로 새로운 노회를 조직할 것.

셋째, 신사참배를 긍정하는 목사에게 세례를 받지 못하게 할 것.

넷째, 신사에 참배하지 않는 동지들의 상호 원조를 도모할 것.

다섯째, 가정 예배 및 가정 기도회를 힘써 개최하는 한편 개인전도 등의 수단으로 동지들을 획득할 것.

 
   이들은 1940년 4월 20일 주기철이 잠시 옥에서 풀려 나왔을 때 평양으로 가서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주기철을 비롯한 서북지역의 신사참대 반대운동 지지자들과 회합을 갖고 그 방안을 논의하고 돌아왔다. 한상동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려는 노력을 하다가 1940년 7월 부산경찰서에 검속되었다.

   3 ․ 1운동 직후 독립군 군자금 모금과 지원병 모집운동을 벌이다가 감옥에 들어갔었던 주남선도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1938년 말 그는 거창읍교회를 사임하고 한상동과 이인재 등과 함께 조직적인 거부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경남 각 지역의 교회를 순회하며 신사참배를 거부할 것을 권유했다. 주남선은 이 일로 1940년 7월 16일에 검속되었다.

   평양에서는 주기철이 시무하던 산정현교회를 중심으로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는 공개적으로 신사참배를 반대했기 때문에 일본의 주목을 받았다. 1938년부터 4차에 걸쳐 7년간의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4월 21일 순교했다. 산정현교회도 1940년 5월 이후에 폐교(廢敎) 되었다.

   만주에서는 미국 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ch of America, OPC)의 헌트 선교사가 중심이 되어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이끌었다. 1938년 그는 조선예수교장로회 봉천노회의 총대 자격으로 27회 총회에 참석했다. 그때 총회의 불법적인 결의에 대해 저항했으나 일본 경찰에 의해 저지당했다. 이후 그는 신사참배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노회에서 면직 당한다. 하지만 봉천노회의 23개 교회의 성도들 중에 일부는 이러한 노회의 결정을 부당하게 여기고 헌트를 지지하면서 그와 함께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참여했다.

   그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신사참배를 실시하는 학교에 보내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가장 강력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시도했으며, 이로 인해 세 명의 성도가 감옥에서 순교했다. 1941년 가을, 만주에서 70명의 성도들이 체포되었고 헌트도 같은 해 10월 22일에 체포되었다. 그는 다른 성도들과 함께 감옥에서 고난을 당할 결심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미국과 일본의 포로교환 협정에 의해서 그의 가족들과 함께 1942년 7월 4일에 미국으로 추방당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기 위해 신사참배에 반대했다. 이근삼은 이들의 신사참배 반대 동기를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제시한다.

 
1.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복종과 교회에 대한 사랑

2. 종말론적인 기대와 그리스도 왕권에 대한 개인적 언약

3. 신적 진리에 대한 비타협적인 증언과 교회와 국가에 대한 기독교적 책임성

4. 순교에 대한 높은 평가와 하나님의 영광

 
   이와 같이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본질적으로 우상숭배를 거부하며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고 당시 교회의 변질을 경고하는 신앙운동이었다. 왜냐하면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수하게 유지하고 보존하고자 하는 의식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7. 결론


   1930년대 말에 있었던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한 한국교회는 그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거룩한 공동체인 교회에서 인간인 천황과 그의 조상신을 섬기는 사상으로 무장된 일본의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단체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때 한국교회의 생명은 이미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한국교회의 생명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통해 끊어지지 않고 여전히 유지되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한국교회가 복음의 진리를 완전히 버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일본의 끊임없는 탄압으로 인해 이 운동도 완전히 사라지는 듯 보였지만, 결코 그러하지 않았다.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수감된 감옥에서, 깊은 산속에 숨어서 참된 신앙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 가운데서 여전히 남아있었다.

   한국교회의 지난날의 역사는 우리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지금도 말해주고 있다. 이에 우리는 신사참배에 참여했던 분명한 사실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하며 동시에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정신을 기억하고 보존하며 계승해야 한다. 왜냐하면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처럼 크게 부흥한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고 어찌하든지 성경대로 살려고 했던 신앙의 선배들이 신사참배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를 지켜내었기 때문이다. 이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시대적 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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