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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 100年 역사 / 장. 감. 침.(선교,활동,분열 ... ) 

 

   서 론
한국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된지도 많은 세월이 지났으며,  개신교의  역사도 이제 100여년의 역사를 갖게 되었다. 복음의 불모지였던 이 땅에 많은 선조들의 복음 에 대한 열정으로 그들이 당한 핍박과 순교의 공로들로 한국 교회는 짧은 세월속에서 도 급속한 성장과 발전을 보게 되었다. 한국의 개신교는 기존의 천주교 보다는 늦게 복음의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 선교 사역이  외국 선교사들의 교단적

교세활동으로 인하여 각기 다른 모습으로 선교 의 활동을 하게 되어 발전의 모습 이외의 문제점들을 한국교회에 안겨 주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이러한 문제외에도  성장속에서 갈등 들을 스스로 해결 하지 못하 여 많은 분열과 아픔을 가져오게 되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교단인 장로교와 감리교를 비롯하여 침례교,성결교,하나님의성회등 많은 군소 교단의 모습  속에서 한국 교회는 초창기의 핍박 이후에 우리 스스로가 핍박하여 갈라진 모습의 교회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분열된 한국교회의 모습속에서도 얼마전 하나님의 성회의 통합은  우 리에게 큰 의미를 안겨 주며, 우리에게 새로운 모습의 활력을 열어주는 계기가  된것 임은 확신할수가 있다. 본문에서는 한국의 개신교단중 대표적인 장로교와 감리교, 침례교의 종파운동과  활동, 분열원인에 대하여 기술하고 결과에 대하여 생각 해보기로 한다.  

  

  한국 장로교회의 선교의 시작

한국 개신교회의 첫 사역은 바로 장로교회의 의하여 이루어 졌다.먼저 한국인과 직접적으로 최초의  연관을 맺은 개신교의 선교사들인 로스와 매킨타이어는 스코틀랜 드 연합장로교회의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은 1875년에 이미 성서의 한글번역에 착수하 였고 함께 성서번역에 참여하였던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김진기등이 한국  최초의 장로교인이 되었고 곧 매서인이 되어 국내에 잠입함으로 한국교회의 초석이 된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일본에 머물던 한국인 이 수정은 재일 장로교 선교사 녹스등과 교분을 맺고 이수정역 성서를 발간하는 한편 미국의 여러 선교잡지에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는 등 장로교회의 한국 진출의 성숙한 분위기를 조성한 바 있다. 한편 1884년에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인 북장로회의 한국 선교사인 알렌 의사가 내한하였다.  비록 선교사라는 신분을 공식적으로 밝히지는 않고 미국 공사관의 공의 신분으로 입국하였으나 그의 목적은 선교사역이었고 마침내 왕실의 신임을 받아 그해 세브란스병원의 전신인 광혜원을 설립함으로 그의책무를 수행하였다.  뒤이어 1885년 부활절에는 본격적인 장로교 복음선교사인 언더우드가 내한하여 활동을 개시했다. 이렇듯 한국 개신교회는 나라밖에서 이룩된 스코틀랜드 장로 교회의 한국 선교 접촉 그리고 최초의 선교사로 입국한 미 북장로회 선교사들에 의해 비롯된것임을 살필수  있다. 그후 북 장로회는 한국 선교회를 조직 하는 한편 서울, 평양, 대구, 신천, 강계, 청주, 안동 등지에 선교부를 설치하고 복음선교는 물론 교육, 의료사업등을 대대적으 로 폈다. 언더우드 목사는 부임한후 얼마 안되어서 한국의 요단강세례라 불리우는 압록강에서의 33인에 대한 세례식을 베푸는 장거도 이룩하였다.초기에 설립된 장로교회 들은 장연의 소래 교회와 서울의 세문안,연동,승동,안동 교회, 평양의 장대현교회 등 이다. 이후 이들 교회는 대교회로 발전, 인근 교회의 모교회가 된 유서  깊은 교회들 이 되었다.1882년에는 북장로교회에 이어 미국 남 장로교회가 한국선교를 시작하였으며  테이트, 데이비스, 레이놀즈, 선교사등이 주축이 되어 한국의 호남지역에서 선교 하여 놀라운 선교 성과를 올렸으며,  교회와 교육,의료기관을 설립을 추진하며, 북장로회와의 협력으로 한국 장로교회의 발전에 기여 하였다. 또한 1889년 호주가 한국선교를 희망 데이비스 남매가 필두로 여러 선교사가 내한하여 경남지역에서 경건과보수 성에 입각한 장로교 교리를 심었는데 이후 서북지역 못지않은 한국장로교회의 중심지 로 발전하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편 캐나다인 독립선교사 메켄지의 한국선교 착 수와 순직에 자극되어 1898년 캐나다 장로교회는 그리어슨 의사와 푸트, 맥레 목사를 필두로 함경북도와 간도 지역을 할당받아 원산,함흥,성진,회령 등을 선교부로 정하고 선교에 임한바 성과를 거두었다.  이렇듯 제각기 진출한 4개의 장로교 선교회는 한국 장로 교회의 창설을 위해 서로 긴밀한 협력을 취하였다.  우선 그 선교 지역의  분할 협정으로 서로간의 선교 권한을 보장 하였고 신학교육, 성서와 각종 문서 사업등에서 연합, 협력을 도모하였다. 이들은 장로교공의회를 조직하여 협력방안을 구체화하고 1901년에는 4개의 장로 교회가 협동으로 연합 장로교 신학교 (평양신학교)를 설립하여 한국인 교역자양성에 들어갔다.이로써 장로교회의 창설이 가능해졌고 선교부 조직이 아닌 한국교회 자체의 치리기구의 구현이 추진되기에 이르렀다.

 

장로 교회의 활동

한국의 장로교회는 1907년 평양의 장로회 신학교의 제1회 졸업생  7명을  배출 하고 그해 9월 17일 36명의 한국인 장로들이  평양 장대현 교회에 모여  한국 장로교 첫 노회를 창설하고 그 자리에서 신학교 졸업생 7명에게 목사안수를 베풀었다.  이로써 한국 장로 교회는  자체 치리 조직이 구형되었고  4개의 각기 다른 장로교파가 분할 선교한 한국 장로교회가 하나의 교회로 성립되는 쾌거를 이룩한것이다. 그리고 1907년의 한국교회에 몰아닥친 대 부흥운동은 장로교회가 그 중심체가 되었고  그 신앙의 구형과 교세성장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일제의 국권찬탈이 눈앞에 놓인 절망의 시점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한국 애국교회는 심오한 기독교적 섭리에  인도되어 불붙은  내면 신앙으로 현실적 절망을 극복하고 있었다. 사회적 관심과 현실적 기복, 국가적 안위에 목표를 둔듯한 교회신앙의 생리가 개인의  죄를 절실히 통회 하고  영혼의 구원에 이르며 나아가 하나님의 심묘한 섭리가 박동 치는 역사에의 개안을 맞으면서 뜨거운 부흥신앙으로 줄달음쳤다. 평양의 장대현교회와 한국인 길선주목사는 이 부흥의 한 핵이 되었고 평양을 진원지로 전국의 장로 교회로 나아가 여타의 개신  교
파에 까지 섬광처럼 번져 나갔다. 교회의 현실적 무력감에 발을 돌리던 민중 들이 되 돌아 오고 신앙의 열정에 목마른 많은 한국인들이 교회로 몰려들어 장로교회의  교세 는 크게 성장되었고 특히 서북지역의 교회는 세계 선교 사상 경의적인  일대  기록을 수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국의 중심교파인 장로교회가 현실적으로 비민 족파의 궤도로 돌아서며 현실도피적인 종교적 침잠에만 관심을 기울인다는 비판도 일 었다. 그러나 전 민족과 교회의 봉기로 민족적 의지를 고창한 1919년 3월 1일 운동에 이르러서는 장로교회의 혁혁한 공헌이 가늠 되고 있다. 그 지도자와 민중적 통로로서 확고한 이념의 제공처로서 교회의 역활은 이루 다 형언키 어려우며 이에 따른 일제의 보복과 억압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수많은 교회당이 초토화되고 무죄한  교인들이 학살되었으며 대부분의 성직자들이 연행,투옥, 고문당하는 격동을 치렀다. 1920년 대에 접어든 한국 장로교회는 그 성숙의 모습은 드러내었으나 이미 역동의 기능이 현저히 줄었고 급변하는 사회적 변화 에 어두었으며 일제의 가공할 경제적 탄압에 기인한 곤궁, 유물사관에 입각한 사회주의의 도전등으로 하나의 위기를 맞았다.그러나 총 회 조직 이전 부터 왕성히 추진 되어 왔던 해외 선교와 국내 전도 활동 등은 계속 추진 되었고, 사회적 변화에 적응 하려는 광범위한 모든 노력,  농촌의  황폐와 농민의 좌절을 막아 보려는 농촌운동 등을 펴면서 지속적인 성장을 도모했다. 한편 장로교회는 점차 장로교 밖에 인물들의 종파운동과 성서 연구의 물결이 장로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고 장감 연합공의회를 기처로 한 연합운동에 대한 서북계 장로교회의 반발, 적극 신앙단문제등 성숙에 따른 여러 부산물적 문제가 끊이지 않았고 그 이후  점차적으로 장로교 내의 신학적 인 갈등이 심화되어 가고 있었다.그러나 장로교회는 새로운 신학 도전에 제압을 가했고 표면적 으로는 보수주의 신학 을 고수 하고 있다.

 

장로교회의 분열

장로 교회의 분열은 가장 큰 교단으로 큰 교단인 만큼 많은 분열의 아픔이  있 었다.  분열의 큰 원인 들을 살펴 보면 첫째로 신사참배 문제로 인한 분열이  있었으며, 둘째로는 자유주의 신학사상 대두로 인한 분열과  N.A.E.와 W.C.C의 대립으로 인한 분열의 세가지 큰 사건으로 나눌수 있다. 1945년 해방을 맞았을때 한국 교회는 해방 이전의 교회가 내포 했던 문제들을  극복 하면서 부흥 재건 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 하나는 주체성을 상실하고 교회로서의 정체를 상실 하였던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본래의 한국 교회의 모습으로 재건 하는일 이 었다. 그중 하나가 교회의 정통이 일제하의 강요에 따라서 신사참배나 일본 기독교조 선교단으로서의 통합 때문에 패멸되었다고 보고, 그 이전의 순수 정통에로  회기한다 는 운동이었다. 그 이후 소위 고신파의 분립이 1950년 4월에 표면화되기 시작 하였고 이 즈음에 조신파 (현재의기독교 장로회) 역시 신학적 사상에 대한 성서의 소위 고등 비평과 역사적 비판등을 이유로 예장과 분립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조신파의 방법론 들은 보수주의나 근본주의 일색으로 목회자양성을 실시해온 장로교에 충격을 주었다. 김재준 목사와 박형용목사 두 거목의 사상은 대립하게 되었고 박목사는 김 교수가 한 국교회를 능욕한다고 까지 힐책 하였다. 이러한 문제로 장로교회는 총회에서  새로운 장로회 신학교를 개교하고 기존의 조선 신학교와(한국신학대학) 두개의 신학적  대립의 신학교가 탄생된것이다.이렇게 해서 예장총회는 "대한민국에는 예장 총회는  하나 밖에 없다"고 성명서를 제출하게 되었고 조선신학교 측은 새로운 대한 기독교 장로회 라는 교단을 조직하게 되었다.(1954) 그 이후 기장은 1957년 10월에 한국 기독교교회 연합회(NCC)에 가입하였고 같은해  한국 세계기독교봉사회에가입하였으며,1959년에는 동남아시아 기독교협의회(EACC,CCA의 전신) 그리고 세계교회협의회(WCC)에  가입하여 교단으로써 신학적 입장을 분명히 하고 독립된 교회의 기구로서의 출발을 다짐하였다. 그런데 1959년 예장은 다시 합동파와 통합파로 분립 하게 되었다. 합동파에서는 1960년 12월 비상 사태속에서 고신파와 합동해서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 총회"를  조직하게 된것이다. NAE계의 목사들은 WCC가 용공적이라고 공격하고, 한국교회의 반공이념과 신앙의 순수성보존을 위해 WCC에서 탈퇴할것을 그동안 주장해 왔다.그런데 1959년 대전총회에서 경기노회의 총대 명단의 조작성 여부의 문제로 양쪽의 주장이 충돌하여 마침내 분립까지 치닫게 되었던것이다.통합파는 곧 서울 연동 교회에서 속회를 가지 고 비상사태를 선언하면서, WCC에서의 잠정적 탈퇴를 하면서 합동파와의 재결합을 모색 한다고 하였으나 그것이 그 시기에 제출된 제안은 아니었다.  반대로 합동파 에서는 서울 승동 교회 에서 속회하여 당장 WCC에서 영구 탈퇴 하고 어떠한 형태의  에큐 메니칼 운동도 반대하며, 한국NCC와도 관계를 단절한다고 선언 하였던것이다. 그런데 합동파의 역사도 그이후 기복이 많았다. 1962년에는 ICCC탈퇴 문제로 박병훈계가  호헌파로 분열되고 1963년 9월 고려파가 옛 고려파 총회로 그산하 노회들이 환원 되었다
그리고 같은해에 개혁파교회 세계대회에 가입하였다가 1972년 9원  57회 총회에서 이 곳으로 부터 탈퇴를 결의하였다. 합동파 교회가 다시 사당동파 와 방배동파로 다시 분열된 것은 1979년 9월 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파들의 분립과 조직 과정을 정확 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계보상 뚜렷한 파생 경로 없이 단독 생성된 장로교 교파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한국 감리교회의 선교의 시작 

한국 감리교회의 시작 역시 한국 개신교회의 시작과 더불어 이루어 졌다.  한국 개신교는 천주교회와는 달리 그 시작부터 한국의 주권자 (고종황제) 의 선교  허락을 받고 시작되었다. 1882년에 한미 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한국정부가 미국에 보빙사절 을 파견하였다.

이 사절단은 워싱턴으로 행하던 차중에서 미국 감리교 목사이며 교육가였던 가우쳐 박사를 만나게 된다. 가우쳐는 이들로 부터 한국의 국내 사정을  알고 곧 한국에 대한 선교를 미국 감리교 선교부에 호소 하였다. 동시에 그는 이미 일본에 서 에서 선교 하고 있던 감리교의 맥클레이 박사에게 연락 하여 새 선교지가 될 한국에 대한 현지답사를 받고  부탁하게 되고 맥클레이는 이 부탁을 받고 1884년 6월24일 에 서울에 와서 김옥균을 통해 고종 황제에게  한국에서의 선교 사역에  대한 요청을 윤허 하였다. 이렇게하여 감리 교회는  한국 황제로부터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에 대한 허락을 받은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 감리교 선교부는 한국선교사를 모집하였고 이 부름에 두 가정이 응하였다. 이들이 곧 아펜젤러가와 스크랜톤가 였는데  후자는  모자 선교사이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아펜젤러 목사 부부는 교육선교사로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함께 1885년4월5일 부활절에 제물포에 상륙함으로써 한국에서의  감리교 선교 활동이 시작되었다. 서울에는 그해 5월3일 의료선교사인 스크렌톤 목사가 먼저  들어와서 정동에 자리를 잡으면서 후에 들어올 아펜젤러와  모친 스크렌토 대부인의 처소를 마련하였다. 아펜젤러는 정동의 자리 잡으며 자기집에서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한국의 신교육의 효시가 되는 배재 학당이 탄생하게 되었다.  한편 스크렌톤의 모친인 스크렌톤 대부인은 한명의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이화학당의 시발점이 되었다. 1895년에는 미국 남 감리교회가 한국선교를 시작하였으며 20세기 접어들면서 선교지 역은 확대되고 교세도 늘어나서 선교구역을 분할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지금까지는 전국이 한 구역으로 되어 있었으나 1901년 11월 이후부터는 전국을 세지방으로  분할 하였다. 즉 서울과 그 이남은 남부지방으로 인천,강화,황해도는 서부지방, 그리고 평 안도일대는 북부지방으로 편입 시켰다. 특히 1901년은 감리교회 뿐만 아니라 바로 한국최초의 목사가 탄생되었다. 이해 5월 새로 봉헌된 상동교회에서  김창식  김기범이 역사상 처음으로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들은 평양과 인천,원산에서 각기 사역하며,한국인 목사를 배출하여 인력이 부족한 선교사를 대신하여 이들이 복음 전파의 일선 에서 헌신적인 노력을 하였다. 그후 교세도 급성장하여 1904년에는 한국선교연회가  조직되고 1908년에는 한국연회가 정식으로 조직되면서 일본연회나  중국연회와  독립된 독자적 연회를 가지게 되었다. 좀 늦게 들어온 남 감리교회 에서는 1911년 10월에 와 서야 김홍순을 비롯한 세명의 목사를 배출하였다.

 

감리 교회의 활동

감리 교회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그 기구와 활동 분야가 확대되고 교회조직도 전국적인 것이 됨으로 민족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이 커졌다.특히 서재필이  귀국하여 조지한 독립협회가 강재로 해산되고 이승만, 이상재, 정 교 등이 조직한  협회간부들이 투옥되었을때  이들 양반출신 독립지사들이 감옥에서 대거 그리스도교로 개종  하였다. 이들은 출감한후에도 계속 교회내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하여 교회는 당시  애국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중에서도 서울의 상동교회가 가장 대표적인 교회이었다. 이 교회의 전 덕기 목사는 소년 시절에 스크렌톤의 감화를 받고 기독교로 입교한 이후로 목회와 애국 독립운동을 하나로 결합시키면서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을  전후하여 상동교회를 중심한 민족독립운동을 과감하게 전개하여 나갔다.따라서 그의 주위 에는 이필주,최성모 목사를 비롯한 김구, 이준, 이갑, 양기탁, 안창호, 이동휘, 이동녕, 이희영, 이승훈 등이 모여들어 활발한 독립운동을 펴나감으로 상동 교회는  한국 민족운동의 요람지가 되었다. 특히 전덕기가 상동교회내에 세운 상동청년학원에서 주 시경 최남선이 주동한 한글운동과 국사운동은 감리교회의 교육을 통한 민족 운동전개 의 대표적인 예의 하나이다.이후에도 감리교회는 어려웠던 시대의 정신적인 모체이며 애국 하고 선교하는 교회의 모습으로  큰 역활을 하였다. 한국 민족에게는 교회는 국가적 위기를 당할때에 자기 민족을 저버리지 않는 애국 애족의 집단임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으므로 불신사회의 존경을 받아왔고 교회의 권위가 크게 신장되어 교세도 상승 일로에 있었다.이러한 감리교회의 민족운동은 이교회의 심오한 영적체험신앙 및 감리 교회의 독특한 심령 부흥 운동과 평행 하면서 진행된 사실은 주목 할만 하다. 이러한 감리 교회의 성격은 3.1운동과 6.25사변을 겪는 우리 민족 가운데 같은 공감대를  형성 하였으나, 감리교회에서도 3.1운동 이후 사회주의사상이  침투되면서 당시의 세속 적인 유물론적 풍토와 합세하여 교회의 큰 위험세력으로 나타 나게 되는 갈등을 안겨주었다. 더우기 일제의 교회에 대한 가중된 압박은 위에 언급한 사상들과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교회의 성장과 민족운동을 질식시키기에는 충분하였다. 이런 그리스도교의 공동 적을 앞에 두고 더 효과적인 민족복음화가 이루어져야만 했는데 같은  웨슬레의 후예인 남북감리교회가 한국 에서 언제 까지나 갈라 져서 선교할 타당성을 채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두 감리교회가 갈라져서 처음부터 활동하였다 하더라도 한국 이 라는 특수한 상황속에서는 합해서 일해야 하는것이 지상명령을 받아 들여 졌다. 더우기 1907년 부터 두 감리 교회가 합동 하여 신학교를 세우고 경영한 이후부터  협력의 기운이 더욱 촉진 되었다. 계속하여 두 교회는 합동 계획을 연구하며 일하다가  미국 의 두교회가 한국에서의 합동을 서로 승인하고 합동 전권 위원 까지 5명씩 선출 하였다. 1930년 12월2일 에 서대문의 냉천동의 협성신학교 강당에서 1백명의 두교회 대표들이 모여 역사적인 기독교 조선 감리 교회의 창립 총회를 열고 최초로 한국인감독을 선출하게 되었다.처음에 총리사로 불리우는 이감독의 자리에는 양주삼 목사가 선출되 었다. 이제부터 명실공히 한국인을 위한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의 하나의 감리 교회가 탄생 되었고 이렇게 단결된후에는 국내선교는 물론이고 만주선교 연회까지  조직하여 만주에 흩어져 있는 교포들을 위한 선교에도 많은 힘을 기울이게 되는 감리교회의 새 로운 선교의 사역이 시작되었다.

 

감리 교회의 분열

감리 교회는 일제시대를 겨우 면하게 되는 기쁨을 잠시 느끼고 공산주의자들의 북의 점령으로로 북한의 감리교회 지도자와 교인들이 대거 남으로 피하여 남에서 감리교회의 재건에 힘썼다. 한편 남한에의 감리교회도 그리 평탄하지는 않았다. 일제 말기의 교회 탄압의 후유증은 해방된 조국의 교회에 그대로 물려줄수 밖에 없었다.일제  말기의 교권을 장악한 측은 그때의 교회 체제를 그대로 유지해 나가려고 하였고 이에 반하여 탄압을 받고 투옥되었거나 교직에서 물러난 측은 다시옛날의 감리교회의 체재와 조직으로 돌아가서 감리 교회를 재건하자며 1946년 1월에 동대문교회에서 모여서 감리교 재건측의 연합연회를 가졌다. 이에 맞서 같은해 9월에는 감리교 부흥측은 특별 총회를 소집하여 감독까지 선출하였다. 이렇게 되니 재 건측도 이듬해 1월에 총회를  열어 감 독을 선출하니 두명의 감독이 생긴것이다. 한국 감리 교회의 최초의 분열 이었다. 하지만 그 분열은 오래 가지 않았으며 뜻있는 목사들에 의해 1949년 4월에 합동  총회로 통합된 감리교회의 감독을 선출함으로 통합되었다.하지만 6.25로  인해 감리교회는 다시한번 어려움에 처해 있었고  감리교회는 피난처인 부산에서  복구사업에 힘쓰며재건을 서둘렀다. 부산에서 1951년 다시 총회 열어 유형기 목사를  감독으로 선출하고미국 감리교회와의 협조를 취하며 잿더미 상태인 감리교회의 재건과  복구에 힘썼다.그리고 1954년 3월 대전총회에서 유감독을 재선시키고 개정전의 헌법에는  감독의 자격은연회 정회원으로 6년 계속 시무해야 하는데 유감독이 일제 말기에 친미분자로  몰리어 투옥 되고 파면당하여서 6년 연속 시무 조항에 저촉된것이다.  이것이문제되어  이듬해 제2 분열이 있었다. 그러나 1958년 유감독이 은퇴하면서 분열된 감리 교단은 다시  합동을 호소하였고 드디어 호헌측과 합동이 그해 총회 에서 이뤄짐 으로써 3 년만에 감리교의 분열은 끝을 맺게 되어 다른 교단의 좋은 본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4.19가 1960년에 일어나면서 소장파 목사들에 의한 교회혁신을 부르짖게되며 교단내의 갈등은 심화되어 가고 있었다. 특히 1967년에는 감독선출에 135회의 투표끝에 감독이  선출되는등 사회 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1970년 10월의 11회 총회에서는 역사상 처음으 로 1차 투표에 감독을 선출함으로써 단함된힘을 과시했으나 이에 불만을 품은  일부인 사들에 의해 감리교회는 제4의분열을 초래 하고 말았다. 이 분열도 4년후인 1978년 10 월 13차 총회에서 합동이 이루어지면서 감리교분열은 다른 교파와는 달리 4년 이상 지 속되지 않는다는 전통을 고수 하였다.

 

  한국 침례교회의 선교의 시작

한국의 침례교의 역사는 1889년에 한국에 온 캐나다의 독립선교사인 펜윅과  더 불어 시작된다. 펜윅 선교사가 처음에 한국에 왔을때는 침례교란 명칭을 쓰지 않았다 펜윅은 10개월간 한국어를 공부하고 황해도 소래에 가서 일하다  1893년에  캐나다로 귀국하여 3년간 체류하였다. 이때 북침례교의 목사인 고든목사와 긴밀한 교분을 갖게 되었고, 그가 경영 하는 선교 학교에 참석한 후 침례교 신앙을 갖게된 것이  이 시기 였다.1894년에 그는 한국 순회 선교회를 조직하고 1896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원산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원산에서 사역중  자금난으로  돌아가버린 고든 목사의 교회의 집사인 딩을 비롯한 한국의 파송된 선교사들이  자금난으로  1900년이 전에 스테드만 선교사를 제외하고는 모든 선교사가 귀국하였다. 1902년에는 스테드만 선교사도 일본에 옮겨 가자 그들의 에라딩 선교회를 펜윅에게 이양 하고 말았다.  펜윅은  자신의 선교회와 엘라딩선교회를 병합하자 효과적인 사업을 위한 조직의  필요에 직면했다. 그는 다시 이 조직을 "대한기독교회"를 조직하고 선교하게 된것이다. 1890년에 한국의 장로교와 감리교가 교계예양 협정에 따라 선교지역을 분할하자, 펜윅 선교사는 기왕에 다른 교단에 손에 미치지 않는 만주,간도,시베리아,몽고지역으로 설정하고 그지역에 산제한 한국동포에게 주력했다. 그후 미국 침례교 한국선교회는  펜윅과 관계를 맺고 한국의 선교사역에 힘쓰기 시작하였다. 그후에 계속 에버내티 선교 사를 필두로 많은 선교사들이 6,25로 전후하여 한국의 선교사역에 힘썼다.  남침례교 한국선교부는 1954년에 공식적으로 조직되었고 초대 회장은 애버내티 선교사 였으며, 선교사 주재지는 부산, 대전, 서울에 설치 되었다. 선교 사역의 초창기는 피난민 가운데의 전도 사역과 난민 구호사역이었으며, 그들의 조직이 정식적으로 조직되자 복음전도와 신학교 사업 및 의료 사역에 국한하여  사역하였다.  

 

침례교회의 활동

침례교회는 펜휙이 조직한 대한기독교회는 1890년 기존의 장.감의 교단의  선교 지역이 아닌 만주,간도 시베리아, 몽고 지역에서의 개척 선교사업은 한국교회사에 있 어서 실로 불멸의 큰 업적 이었다. 이 당시 개척순회선교사들은 모두 자비량으로  이 선교사업에 헌신했다. 그들은 펜윅으로부터 한짐의 복음 책자를 공급 받아서  이것을 판매한 돈으로 선교비에 충당하면서 개척선교의 고난을 이겨 나갔다. 1940년에  이르러서는선교활동의 결과로 국내에 약100여개의 교회, 만주.간도 지역에 100여개  교회 시베리아에 40여개 교회 그리고 몽고에 수개의 개척전도소를 설립하는 교세확장을 이 루었다.그러나 일제 말기 교회에 대한 박해가 강화되었는데 신사참배와  황궁 요배를 강력히 반대하였던 대한기독교회는 보안법위반이라는 죄목으로 32명의 교단의 지도자 가 투옥당했다. 그러나 이들이 압제에 굴복 하지 않자 1944년에는  강압적으로  교단 해제 명령을 내리고 교회건물을 철폐 시키며 재산을 압류하여 국방 헌금으로 강제 헌납 시키고 말았다. 1945년 조국광복은 한민족은 물론 한국의 기독교계에 새로운 삶의 소망과 빛을 주었다. 그러나 1948년 북한정권의 수립 으로 본 교단의 근거지 였던 이 북 지역의 모든 교회를 일시에 상실 하고 말았다.  남한에 남은 교단 지도자들은  충남 칠산에서 모임을 갖고 충남 강경의 총회에서 교단 명칭을  "대한 기독교침례회"로 바꾸고  1950년 최초의 남침례회 선교사로 에버내티 박사 부처가 파송됨으로 한국 침 례회 선교사업의 서막이 열었다. 그러나 6.25 사변은 침례교회를 큰혼란을  빠뜨리게 하였고 6.25사변중 파송된 선교사들은 전화로 고통 받는 한국민의 구호사업에 치중하 면서 선교의 막을 열었다. 아직도 남 침례교회의 신앙원리와 신앙 행습에  생소한 한 국에 구호사업으로 시작된 선교사업은 그 이후에 배태하게 된 여러가지 비  침례교적 신앙의 씨앗을 처음부터 뿌려가고 있었다. 구호물자로 교인을 모으며 선교  보조금으로 교회가 세워지고 목회자의 사례금이 지급되었을때 침례교인의 숫자와 교회는 놀랍 도록 자라났다.그러나 질적향상을 병행하지 못한 단순한 양적 발전은 신앙 행습과 원리면에 있어서 침례교정체를 위협하는 숫자 결과를 빚었을뿐 아니라 이 시기에 타 교 단에서 유입된 교역자들의 비 침례교적인 교회의 행습은 그 이후 침례교 신앙 정립에 많은 대가를 치르게 하였다.

 

침례교회의 분열

1960 년대의 한국 침례 교단은 발전을 위한 여러가지 시련을 거쳐야 했다.  한국 지도자들간의 불목이 정치적으로  더욱 복잡성을 띠게 되고 한국 총회와 선교회  간의 협동 문제가 마침내 결여 되자 총회는 안타깝게도  두개로 분열 되고 말았다.1959년 3월 17일에 대전 대흥 교회 에서 개최된 실행 위원회는 총회 장소 결정을 둘 러싸고 양분 되었으며 3월18일의 한미 연석 회의에서는 선교부측에서 총회의 전도부장을 불신임 결의함으로써  총회와 선교부간의 대립이 격화 되었다. 그런 와중에서 두개의 분열 총 회가 충남 대전과 경북 포항 에서 각각 개최 되었다. 1959년 4월 28일 대전 대흥 교회 에서 개최된 이른바 대전 총회는 선교부의 지원을 받는 장일수 목사를 비롯한 몇몇 지도자와  타 교단 에서 들어온 전입 교역자 들이 주측을 이루고 있었다. 1959년 5월 25일  경북 포항 교회에서 개최된 포항 총회에서는 지금까지 총회를 주도해온 교단의 지 도자들이 주동이 되었다. 이 지도자들은 대개가 남침례회와 교단이 제휴 되기전에  펜 윅 선교사 밑에서 훈련을 받고 자라온  동아 기독교의  교역자들로서 교단의 주도권을 강조하며 선교부와는 흔히 대립적입장을 가졌었다. 결국 선교부가 대전 총회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대전총회와 협동하게 되자 포항총회측은 대전 총회와 선교부의 주 동 인물을 불신임 결의함으로 교단은 두개로 분열되고 말았다. 향후 9년간은 교단  분열은 한국침례교회 발전을 위해서는 지극히 불행한 일이었으나 한편 한국침례교가  침례교 가 침례교 본연의 신앙 원리와 이상에 투철한 교회 발전과 신앙 정신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했던 역사의 한 변천 과정 이라 하지 않을수 없었다. 분열 이후  대전 총회는 선교부 주도로 미국 남침례교총회를 모본으로한 여러기관을 조직하고 그  기관 들을 통하여 교단 사업을 수행해 나갔다. 그러나 분열 이후 선교부의 재정 지원이  중 단된 포항 총회는 많은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했다. 초 교단  적인 선교 단체들로 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게된 포항 총회는 침례교의 정체를 간직하며  침례교의  신앙 정신과 원리에  입각한 교회로 발전해 나가는데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교단 분열은 양 총회에 서로의 반성과 자구책을 마련하고 자립 정신을 함양 시키는 자극제가 되었다. 1960년대부터 성령의 은사 운동이 교회의 교역자들 에게 영적 으로나 재정적 으 로나 활기를 띠게 하였다. 60년대의 영적 부흥은 온 교회의 영적 각성과  형제간의 이해와 사랑을 알게 하였고 교단 통합의 불씨가 되었다.  1968년 4월16일 한국 침례회는 포항총회측과  대전총회측의 합동총회로 9년간 갈라졌었던 교단이 통합되었다. 갈라졌던 양측의 교역자들이 악수를 나누면서  김용해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 하였다. 이날은 침례회의 역사적인 날이며 한 세대가 물러가면서 세대 교체의  전환을 맞이한 화합의 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이후 침례 교단은 교단안에 신학대학에서 배출된 젊은 사역자들을 배출하였고 침례회의 신앙원리와 정신으로 한국에서의 복음 사역에 전력을 다하게 되었다.

  

   결 론  

위와 같이 세 교단의 선교 과정과 분열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 한국에 있어서 교회의 역사는 정말로 어렵고 힘든 역사였으며, 수 많은 과정 속에서 아픔 또한 크다고 생각한다. 성격이 다른 세 교단의 역사 속에서 한국 교인들은  민족의 수난들로 인하여 너무나 많은 시련을 안게 되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 속에서 교단들은  자신의 의지를 끝까지 지키려는 마음이 자리 잡게 되고, 민족의 울분과 불만들이 해방후  한국 교회의 분열된 모습으로 표출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하게 된다. 어째든  한국 교회는 짧은 역사에 비하여 놀라운 성장과  많은 사연들이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분열은 우리에게 진정한 교훈과 역사의 증거로 남게 되었으며  오히려 분열로 한국교회는 큰 부흥을 이루어 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로교단은 한국 교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만큼 분열이 많았던것을 기억한다. 1980년대 탁명환 교수가 조사한 결과를 보면 49개교단의 장로교가 나누어져 있으며 현재는  거의 60여개의  분열되어 있다고 한다. 교단 만큼 신학교가 있고 서로 상반된 사상들이 신앙인들로 하여금  혼란케 하는 분열의 모습은 그리 좋은 모습 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반면 침례회의 분열속에서 통합을 이뤄 가는  모습은 진정한 그리스도의 용기를 알게 했음을  높이 평가 한다. 얼마전 하나님의 성회도 통합을 하게 되었다. 매우 고무적인 일이며, 하나님께 영광 돌릴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것은 그 통합 속에서 진정한 의미의 통합이 있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감리 교회는 통합후 다시 분열 하는  사건들을 여러번 겪지 않았는가 통합은 되었으나 여전히 내적 갈등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진정 한 의미의 통합이 아닌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하나님의 성회는 분열된 교회가 남아있으며 함께 통합 된다는것이 얼마나 힘들다는것을 알게 해준다. 하지만 지금 우리  교단의 통합은 화합의 시작 단계라 생각 하며 우리가 진정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한국교회의 사명들을 실천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주님의 계획안에서 속히 이뤄지리라 생각된다.

자료출처 : 안디옥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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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로교회 역사와 정체성

 

서론

 

올해는 종교개혁기념 487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종교개혁의 후손으로서 종교개혁의 중요한 정신을 이해하고 계승해 가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우리의 신앙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올해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계승한 한국장로교회의 역사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장로교회의 신앙적 역사와 정체성을 다시 한번 발견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이런 역사적 정체성을 찾을 때 가장 성경적인 원리의 장로교회가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을 계속해서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본론

 

1. 한국의 기독교 역사

 

한국장로교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반적인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장로교보다 먼저 들어온 로마 카톨릭의 전파를 통해서 이 땅에 기독교의 역사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살펴보면 한국장로교회의 초기 선교를 좀더 깊이 있게 이해게 될 것입니다.

 

1) 중국과 일본의 로마 카톨릭 전파

 

16세기 이후로 로마 카톨릭은 선교의 영역을 동양으로 확대하여 한반도 주변의 중국과 일본에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인도를 거점으로 하여 1549년에 일본 선교가 시작되었고, 1583년에 중국 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선교는 단순히 기독교만을 전파한 것이 아니라 서양의 발전된 과학문명을 통한 정치적인 힘과 함께 선교활동을 했기 때문에 일찍부터 중국과 일본은 로마 카톨릭을 받아들이면서 서양의 과학문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문명의 발전과 함께 각국의 정치적인 형편이 혼란하게 됨으로 인해서 중국과 일본은 이 정치적 혼란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조선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일본은 오랜 전국시대를 끝내고 강력한 막부 통치시대가 열리면서 지배층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조선 정벌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1592-1598년 동안 이루어진 임진왜란이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은 만주족을 배경으로 한 후금(後金/여진족이며 후에 청나라)이 중국 본토의 󰡐명󰡑을 위협하기 시작했으며, 후금은 명을 치기 전에 명과 우호적 외교를 갖고 있는 조선을 먼지 공격했는데 이것이 󰡒병자호란󰡓입니다.

 

임진왜란의 선봉장 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세례명이 󰡐아우구스티노󰡑라고 불리는 천주교인이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장수들의 사기을 일으키기 위해서 예수회 일본 부관구장인 󰡐고메스󰡑 신부를 동행시켜서 미사를 행하기도 했을 정도로 일본은 천주교의 영향이 컸습니다. 이 전쟁으로 조선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선교사가 조선 땅에 들어오기도하고 전쟁 중에 군인들을 통해서 기독교가 소개되기도 하며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 중 천주교인으로 개종하는 등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가 있기도 했습니다. 또한 중국은 1627년 여진족의 조선 침략인 󰡒정묘호란󰡓을 일으켰으며, 이 전쟁은 1637에 󰡒병자호란󰡓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전쟁으로 승리한 청나라는 조선에 막대한 전쟁물자를 요구하고 볼모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잡아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소현세자가 중국에 머물면서 예수회 신부인 󰡒아담 샬󰡓과 사귀게 되었습니다. 소현세자는 기독교에 대해서 많은 흥미를 갖게 되었고 조선으로 돌아갈 때 중국인 궁녀 감독관으로 교인 5명을 동행해서 데리고 가게 되어서 이들을 통해서 기독교가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일본과 중국을 통해서 들어온 천주교는 조선의 유교적 전통과 불교로 인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조금씩 성장하기 시작하여 1777년 천주교 교리연구회 모임이 시작되고, 1784년에는 이승훈의 세례를 통하여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되기도 했습니다. 1794년에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입국하였으며, 정약용이 천주교 성경을 번역사업을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발전을 통해서 1831년 정식으로 로마 교황청에 의한 조선교구가 창설되기도 합니다. 1845년에는 한국인 최초 사제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가 세워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발전의 역사 뒤에는 수많은 핍박과 피흘림이 있었습니다. 조선의 유교적 전통인 제사문제로 인해서 많은 반대에 부딪쳤고, 천주교가 서양의 정치적인 힘을 빌어서 선교를 했기 때문에 조선과 정치적인 마찰이 일어날 때마다 수많은 신부들과 교인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특히 천주교인을 색출하기 위한 방법으로 󰡒오가작통법(1801)󰡓을 실시하기도 했으며, 신유박해로 300명 이상이 순교하기도 했고, 경신박해, 병인박해, 신미양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핍박을 통해서 많은 순교자가 발생되었습니다.

 

2. 한국장로교회의 초기 선교

 

1) 19세기 말의 정치적인 상황

 

17세기 이후로 천주교가 조선에 정착을 했지만 많은 박해로 인해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침체기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19세기의 어려운 정치적 혼란을 통해서 이 땅에 복음이 흘러들어 올 수 있는 길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19세기의 혼란한 정치적 어려움 가운데 조선은 강제적으로 서구문명을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이런 정치적 상황을 통해서 장로교 선교사들이 들어올 수 있는 길이 마련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정신적인 면에서 전쟁과 정치의 혼란으로 유교와 불교에 대한 신앙에 회의를 느끼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로운 신앙적 내용을 소망하게 되는 마음의 변화도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을 16세기 이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도했습니다.임진왜란 이후 침체되었던 정치적 형편이 회복되자 1876년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고자 하는 무력을 시도했고 급기야는 󰡒강화도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일본은 계속해서 조선의 모든 영역의 통치권을 얻기 위해서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4)을 조선 땅에서 일으켰습니다. 전쟁에 승리한 이후 영국과 미국의 동의를 얻어 일본은 을사조약(1905)을 체결하고 결국에는 1910년에 󰡐한일합방조약󰡑을 통해서 조선을 완전히 식민지 국가로 만듭니다. 이와 같은 격변기에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복음이 흘러들어올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정치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모든 희망을 빼앗긴 민족에서 참된

소망의 빛을 제시해 주신 것입니다.

 

2) 중국과 일본을 통한 성경 유입

 

한국장로교회의 독특한 역사는 1885년 본격적인 선교사의 입국 이전에 성경이 먼저 유입되고

그 성경을 통해서 자체적으로 교회가 형성되는 놀라운 일입니다.

성경번역과 소개는 중국과 일본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중국에는 천주교와 다른 나라의 기독교 선교회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 중에 특히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와 성서공회를 통하여 성경번역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중국주재 책임자인 알렉산더 윌리암슨과 그 제자들인 로스(John Ross)와 매킨타이어를 통해서 한국선교의 문이 시작되는데 그 중 로스를 통하여 성경번역이 이루어집니다.

1878년 로스는 이응찬의 도움으로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을 번역하였고, 1887년 번역이 완성되어 󰡒예수셩교젼셔󰡓가 출판되었습니다. 성경번역이 이루어진 후에는 각양의 방식을 통해서 조선으로 성경이 보급되었으며

그 중 서상륜을 통해서 언더우드에게 찾아가서 세례를 받고 소래교회(1887)가 세워지기도 합니다.

 

일본을 통해서는 이수정이 성경번역의 일을 완성하는데,

그는 온건개화파에 속한 인물로서 임오군란 때 명성왕후를 구하고 신임을 얻어 일본수신사 박영효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다가

1882년에 토교 축지교회의 예배에 참석하는 계기를 통해서 미국 장로교회 선교사 녹스에 의해서 세례를 받게 됩니다. 이후 김옥균의 인솔로 일본에 갔던 유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고 이들을 중심으로

1883년말에 토교에 한인교회를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이수정은 1883년 5월부터 성경번역을 시작했으며,

1885년 신약성경을 출판하게 됩니다. 바로 이 시기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일본을 거쳐서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을 들고 1885년에 한국에 입국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한국기독교는 중국과 일본에서 일어났던 장로교회의 선교활동을 통해서 성경이 번역되고

이 성경을 배포하면서 많은 회심자들을 얻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장로교회의 선교초기 활동은 이 땅에 기독교를 정착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를 감당했던 것입니다.

 

3) 초기 선교사들의 입국과 활동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것을 계기로 미국의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게 됩니다. 1884년 알렌은 의사의 신분으로 한국 땅에 들어옵니다. 그는 1884년에 일어났던 갑신정변으로 부상을 당한 명성왕후의 가족인 민영익을 치료해줌으로 고종으로부터 신임을 얻어 광혜원(제중원)이라는 병원을 세우게 됩니다. 이 병원은 후에 미국인 실업가 세브란스에 의해서 새롭게 운영되면서 세브란스 병원으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선교사의 직함을 가지고 입국한 사람은 1885년 감리교의 아펜젤러와 함께 입국한 언더우드 목사입니다. 언더우드는 북장로교회 선교부의 소속을 둔 장로교 선교사입니다. 그가 선교사업으로서 가장 우선적으로 행한 일은 다른 여러 가지 일도 있지만 1893년 시작된 성경번역 사업과 성경교육을 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장로교는 처음부터 철저한 성경관에 입각한 정신을 기초로 성경을 제시하고 가르치는 사역을 통하여 교회가 세워져 간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07년에는 장로교회의 역사 중에서 아주 중요한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북장로교회, 남장로교회, 호주장로교회, 카나다장로교회를 중심으로 장로교회 질서체계의 핵심이 되는 󰡒노회󰡓를 조직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독노회󰡓라고 합니다. 이처럼 장로교회는 선교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면서 우선적으로 장로정치제도를 확립하여 성경적인 정치제도를 통한 성경적 교회 확립을 하기 위해서 힘쓴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독노회에서는 성경적인 장로정치제도를 체계화한 것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장로교회의 정치에 있어서 근본적인 원리가 되는 신조를 본격적으로 확립해 줬다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요약본으로 인도에서 사용되던 신조를 정리해서 󰡒12신조󰡓를 채택한 것입니다. 이 신조의 전문에는 다음과 같은 정통장로교회의 중요한 정신이 고백되고 있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목사와 장로와 집사들이 동의해야 할 자체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함에 있어서, 이로써 대한예수교장로회를 설립한 모(母)교회의 교리적인 표준을 거부하지 않으며, 반대로 그러한 교리적 표준들 특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값진 해석으로, 그리고 우리의 교회와 신학교에서 가르쳐야 할 교리체계로 기리는 바이다. 그리고 본 교단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자체의 요리문답으로 채용하는 바이다.

 

4) 평양신학교와 네비우스 선교정책

 

장로교회는 교회를 세우는 것도 중요한 목표로 생각했지만 이 교회를 바르게 세워가기 위해서 철저한 개혁신앙으로 훈련된 지도자들을 길러내는 사역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1901년에 한국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이 학교는 평양에 있다고 해서 󰡐평양신학교󰡑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이 학교의 교수진은 미국의 북장로교회 소속의 선교사들이 주축을 이루었으며, 특히 구 프린스톤에서 신학수업을 마친 선교사들도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서는 마포삼열, 곽안력, 이길함, 블레어, 무어, 로스, 버히슬, 아담스, 이눌서, 어도만, 구레인, 함일돈, 소안론 목사 등이 있습니다. 특히 함일돈 목사와 같은 사람은 1920년대의 미국 장로교회의 신.구학파 분리 때 메이첸을 따라서 메이첸이 주도하던 󰡒독립선교회󰡓로 자리를 옮겨서 선교사역을 할 정도로 개혁신앙에 철저했던 분이셨습니다. 그는 구프린스턴 시절 메이첸과 워필드에게서 신학수업을 받으면서 개혁신앙을 정립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마포삼열 목사는 자유주의자들이 󰡐어빙돈성경주석󰡑을 출판한 것에 대해서 반대하고 개혁신앙의 입장에서 󰡐표준성경주석󰡑을 발간하고 그 서문에 개혁신앙의 중요한 정신을 다음과 같이 제시해 주기도 했습니다.

 

본 주석의 집필자들은 성경 전부가 만서 지중에 최대서요, 신의 참된 말씀임을 믿을 뿐 아니라, 또한 성경에 계시된 진리의 체계가 장로교회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에 선히 개괄되어 있다고 믿는다. 웨스트민스터 교리적 표준은 한국장로교회의 신조를 구성하는바, 본 주석의 집필자들이 이 신조를 믿음은 이것이 신의 말씀에 교훈되었음을 믿는 때문이다. 집팔자들은 성경이 이 신조의 제개조를 완전히 지지한다고 믿는다.

 

초기 선교사들의 중요한 선교사역들 중에서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장로교회의 기초를 확립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합니다. 이 선교정책은 󰡒자립, 자치, 자전󰡓이라고 하는 표어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내용은 이런 표어들이 나오게 된 신학적 기반을 들 수 있습니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가장 중요한 선교정책은 성경중심의 신앙과 성경중심의 교회통치와 전도를 들 수 있습니다. 감리교나 로마 카톨릭은 주로 사회사업을 통해서 교회활동을 넓혀갔지만 장로교회는 철저하게 성경중심의 신앙, 교육, 교회정치확립, 전도를 세워갔던 것입니다. 주요한 내용들을 보면 요리문답 교육을 위한 주일학교, 일주일 동안의 온종일 사경회, 지교회에서의 학습교인반, 가정예배, 성경통신과정, 주일학교 연장, 기독교 면려운동(구제), 여름성경학교, 성경클럽, 상품을 내건 조직적인 암송 공부 등이다. 전체적인 내용은 교회 안에서 철저하게 성도들이 성경을 공부하고 신조를 배우는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게됩니다.

 

이와 같은 장로교회의 중요한 신학적 입장과 또한 장로정치의 확립을 통해서 초기한국장로교회는 미국의 구프린스턴의 개혁신앙적 입장을 계승한 철저한 보수주의, 칼빈주의 역사적 개혁파 교회의 특징을 세우게 되는 것을 봅니다. 장로교회의 철저한 보수주의적 신앙모습에 대한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우선 입교를 위한 학습세례의 과정이 매우 엄격하고 어려웠던 것을 봅니다. 대상자가 성경에 대한 이해와 삶의 변화된 모습을 제시하지 못하면 세례를 보류했으며, 입교한 성도들도 철저하게 권징을 받기도 했습니다. 1900년에 행해졌던 입교문답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은 주일을 성수합니까?, 당신은 음주를 합니까?, 나는 한 대 술고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몸은 내 것이 아닙니다. 만일 내가 내 몸을 잘못 사용한다면 나는 영벌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들이 당신을 유혹하지 않던가요? 웬걸요. 물론 유혹하지요. 만일 내가 계속하여 성경을 읽지 않는다면 나는 끊임없이 노름, 간음죄 등에 유혹 받았을 것입니다.

 

위의 입교문답을 통해서 한국장로교회가 초창기부터 얼마나 경건하고 엄격한 신앙과 교회의 질서를 요구했지는 알 수 있습니다. 장로교회는 매춘과 흡연을 퇴치하는 일에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웰본은 1904년 선교보고서에서 󰡒금주, 주일성수 파기, 그리고 다른 죄 때문에 세 명의 교인에게 교인자격을 정지시켜야만 했다󰡓고 보고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청교도적인 경건정신의 신앙과 삶을 계승한 한국장로교회는 초기부터 입교의 조건으로 음주, 흡연, 노름의 금지와 주일성수, 십일조 헌금 등의 생활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3. 한국장로교회의 발전과 분열

 

1) 자유주의의 도전과 1934년, 1935년 장로교 총회 결정

 

한국장로교회가 선교를 시작하는 시점부터 한국교회에는 자유주의신앙을 가지고 그 신앙을 전파하는 자유주의 목사들과 교회들도 세워졌습니다. 이들은 세력을 확장해 가면서 점점 더 보수주의적 입장을 세워가고 있는 개혁교회를 위협했습니다. 자유주의 목사들은 일본과 미국, 카나다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오면서 서구의 자유주의 사상을 많이 배워와서 한국교회에 급속히 퍼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자유주의의 입장은 성경의 권위을 부정하고 신조교육의 필요성을 제외시켜버리기도 했습니다. 일본에서 신학공부를 한 목사들은 일본이 당시 바르트라고 하는 신학자를 가장 중요한 신학자로 인정하던 시대에 공부를 했기 때문에 이런 사상을 자연히 받아들이기 되었으며, 미국에서 신학공부를 한 사람들도 미국이 구 프린스턴과 신 프린스턴이 나누어지면서 신파를 중심으로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고 예수님의 탄생, 부활, 재림, 기적 등을 부정하는 󰡒오번 선언서󰡓에 서명한 신학자들에게서 공부를 하면서 이들의 입장을 한국에 적극적으로 소개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람은 일본에서 바르트 신학을 공부한 김재준 목사입니다. 이 사람은 후에 정통장로교의 성경관과 신조관을 부정하고 자유주의적 입장을 확립하기 위해서 󰡒한국신학대학󰡓을 설립하여 대한기독교장로회를 세운 사람이기도 합니다. 김재준 목사는 바르트의 사상처럼 성경의 영감과 무오설을 부정하고 성경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도 있고 인간의 말도 있으며, 그 안에는 잘못된 부분도 많다고 언급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증거정도라고 권위를 낮추기도 했으며, 자유주의자들의 성경비평과 진화론 등을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이 외에도 김춘배 목사는 자유주의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와서 교회내의 여권문제를 심각하게 도전했습니다. 즉, 그는 장로회 총회에 올리는 글이라는 제목으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바울의 말은 2000년 전의 일 지방 교회의 교훈과 풍습이요,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니다라고 비판하면서 교회내서 여성목사를 주장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장로교 안에서 자유주의 사상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총회는 1934, 1935년에 거쳐서 중요한 결정들을 내립니다. 박형룡 목사를 연구위원으로 세워서 제시된 문제점들을 파악하고 난 후에 김재준 목사의 창세기 저자 문제나 김춘배 목사의 여권문제, 기독공보, 적극신앙단, 아빙돈 주석에 대한 입장을 모두 거부하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창세기 저자 문제에 대해서는 󰡒창세기가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고 하는 반대는 근대의 파괴적 성경 비평가들의 주장하는 이론인 바 그들은 과연 창세기의 모세 저작을 부인하는데 머물지 않고 오경 전부를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모세 시대로부터 여러 세기 후대 어떤 인물들이 기록한 위조문서로 돌립니다. 또 그들은 오경뿐만 아니라 구약 다른 여러 책과 신약 여러 책을 후대인의 위조문서로 인정하며 그 기록의 내용에 신화와, 고담(古談), 미신 등 각종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여 냄으로 성경 대부분의 파괴를 모색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신조 제1조를 위반하는 자이므로 우리 교회의 교역자됨을 거절함이 가합니다.󰡓라고 결정했다. 또한 여성권리와 관련해서는 󰡒성경은 여자의 교권을 불허한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여권운동이 대두하는 현 시대 사조에 영합하기 위하여 성경을 자유롭게 해석하는 것은 그 정신 태도가 파괴적 성경비평의 정신태도와 다름이 없습니다.---그런 교훈을 하거든 노회가 그 교역자를 권징조례 제6장 제 42조와 43조에 의하여 처리케 할 것입니다.󰡓라고 결정했습니다.

 

2) 장로교의 분열

 

한국장로교회는 일제식민지라고 하는 혼란 속에서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성경적인 원리를 따라서 점차 자라왔습니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팽배하면서 장로교회는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일본의 신사참배 요구를 거절하게됨으로 인해서 평양신학교는 1938년에 폐교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유주의 목사와 교회들은 신사참배를 인정하고, 더 적극적으로 정치적인 협력을 통해서 1940년 󰡐조선신학교󰡑라고 하는 새로운 학교를 설립하게 됩니다. 이 학교는 김재준 목사와 더불어 자유주의적 신앙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학교입니다. 이 학교는 해방이후에 더욱 적극적으로 자유주의 사상을 전파하면서 한국장로교회에 심각한 위기를 갖게 했습니다. 그래서 장로교회는 1951년 이 학교와 속해 있는 목사들을 제명하게 됩니다. 이 일로 인해서 장로교회는 1차분열을 갖게 됩니다. 김재준 목사는 이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독립적으로 학교를 세웁니다. 이것이 󰡐한국신학대학󰡑이며, 기독교장로회의 출발인 것입니다.

 

2차 분열은 신사참배의 문제로 갈라지게 됩니다. 신사참배를 총회차원에서 허락한 것은 한국장로교회의 가장 큰 죄이며, 아픔이었습니다. 해방 후 신사참배를 인정한 목사와 거부한 목사들 사이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대해서 많은 논쟁이 있었고 결국에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1952년에 고려신학교를 설립하고 교단은 대한예수교 장로회(고신측)이라는 형태로 새로운 교단을 형성하게 됩니다.

 

3차 분열은 WCC에 대한 입장이 갈라짐으로 인해서 장로교회 안에서 심각한 논쟁을 거친 후에 분열하게 됩니다. 종교다원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WCC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그룹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따라서 1960년에 대한예수교 장로회(통합측)이라는 교단을 새롭게 형성합니다. 이 학교는 후에 바르트의 신학사상을 자신들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드러내기도 합니다. 이처럼 철저하게 자유주의적인 신학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어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머지 교회들은 󰡒합동측󰡓이라는 형태로 기존의 보수주의적 입장을 계속해서 유지하게 됩니다.

 

결론

 

한국장로교회는 어려운 사회형편 속에서 시작하여 점차 뿌리를 내리며 발전해 왔습니다. 자유주의의 많은 도전을 받으면서 교회는 분열이라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이 분열은 순수한 성경적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분열한 것이지 어떤 정치적인 목적 때문이 아니였던 것입니다. 그만큼 한국장로교회는 역사적 개혁파교회가 지켜왔던 성경적 교리를 지키기 위해서 끊임없는 고민과 아픔을 겪어왔던 것입니다. 교파가 단순히 하나로 있는 것 자체가 외형적으로 보면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주의적인 신앙을 인정하면서까지 연합을 지켜가기 보다는 분열의 아픔이 있을지라도 진리의 순수성을 지켜가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이 정신을 짧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한국장로교회는 그대로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1960년 이후로 한국장로회는 다양한 자유주의적 신앙과 신비주의적인 신앙의 도전으로 많은 위기를 겪게 됩니다. 또한 장로교회 안에서도 역사적 개혁파 교회가 지켜왔던 성경적 교리를 소홀히 여기면서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심각한 위기를 맡게 됩니다. 이제는 장로교회안에 더 이상 선조들이 목숨처럼 지켜왔던 보수주의적 신앙관을 찾아볼 수 없고 여러 가지 혼합된 신앙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이와 같이 혼탁한 시대에 우리는 장로교회의 역사를 다시한번 살펴보면서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이것을 회복하여 성경적인 신앙과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힘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출처 : 신원균 목사(한마음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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