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적인 틀을 다지는 한국교회

 

1907년 평양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나던 그 해 최초의 독노회가 결성됨으로써 한국장로교회는 명실상부하게 민족교회로서 발돋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29년 남북감리교회가 하나로 합동하여 협성신학교와 별도로 운영해오던 여자신학교를 합해 감리교 신학교를 태동시키게 되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의 조직은 1905년 3월 처음으로 개강하게 된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설립과 신학교로서의 견실한 틀을 갖추어 가면서 구체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처음 평양신학교를 주도한 선교사들은 마펫(마포삼열), 언더우드, 클락(곽안련) 등이었다. 이들은 1907년 6월에 길선주, 양전백, 서경조, 한석진, 송이서, 방기창, 이기풍 등 7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해서 그해 독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게 했다.

 

평양신학교는 네비우스 선교정책과 관련하여 설립되고 육성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난 것은 바로 성경공부와 사경회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평양신학교가 명실상부한 신학교로서의 자리를 잡아가면서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으로 한국교회가 놀랍게 성장하면서 1907년 가을 독노회를 조직하기로 결정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독노회가 결성되면서 한국교회는 소위 12신조로 알려진 장로교신앙에 기초한 신앙고백을 채택한다.

 

초기 한국교회 해외선교는 살펴보면 대한예수교장로교는 1907년 첫 졸업생인 이기풍을 선교사로 제주에 파송함으로 시작된다. 평양에 복음을 들고 온 선교사들에게 돌을 던지며 복음을 방해했던 이기풍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복음의 불모지인 제주도에 선교사로 떠나리라는 것을 누구도 상상도 못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러한 선교의 역사는 한국교회로 하여금 해외선교 열을 강하게 불어넣는 전기가 되었고 그 결과 일본으로 확대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열정이 멀리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선교까지 이어졌고 만주와 중국선교에까지 선교사를 파송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간도까지도 복음의 열정이 전해지게 되었는데 그곳은 중국인보다 더 많은 한국인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사실 간도는 존 로스와 존 맥킨타이어의 선교활동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한국교회가 이곳으로 사역자를 파송하여 복음을 삶 속에서 실천하며 신앙의 모델을 보여 준 곳이다. 그리고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상당수의 한국인들이 중국 시민으로 귀화하거나 혹은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여 동족만이 아니라 중국인 선교에도 유익하게 작용하여 만주선교는 곧 이어 진행된 중국선교를 위한 초석이 되도록 했던 곳이었다.

 

한국 장로교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선교에 힘쓰는 것이다. 선교사들이 흘린 복음의 선혈이 이런 선교의 열정이라는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다. 바울이 말한 복음에 빚진 자.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복음에 빚진 자이지만 한국의 기독교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복음에 빚진 자이다. 그리고 지형학적인 위치에 있어서도 유라시아로 출발하는 전초 기지의 역할을 감당하기에 더할 나위없는 좋은 곳이다. 21세기 한국 교회의 사명은 바로 선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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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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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로교 총회 100년 역사, 역사적 개관/ 박용규 교수

 


이것은 이미 총회 설립 이전부터 예고된 일이었다. 미국 북장로교 내지 선교사 총무 아더 브라운(Arthur J. Brown)이 한국장로교 총회 설립 2년 전, 1910년에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로체스터 대회(Rochester Convention)에서 보고한 “가난하고 천대받으며 보잘것없는 이 나라가 이제 비기독교 국가들 중에서 복음화 되어 더 거대한 사역을 위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최초의 국가가 될 것처럼 보인다”는 예상은 1세기가 지난 오늘 사실로 입증되었다.

 한국교회의 성장은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드문 일이다. 특히 장로교회는 한국교회의 성장을 주도하는 중심 세력으로 처음부터 그 위치를 톡톡히 감당해왔다. 비록 ‘한국장로교가 한국이라는 사회적 역사적 상황 속에서 교회로서의 사명을 다하여 왔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할 때 항상 긍정적인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난 100년 동안 장로교는 하나님이 베푸신 놀라운 은혜에 힘입어 장족의 발전을 이룩하였다. 새로운 세기로 접어들면서 틀을 다지기 시작한 한국장로교회는 그간의 수많은 대 사건들과 역사의 질곡 속에서도 한국교회를 주도하는 중심세력으로 흔들리지 않고 역사를 이어왔다. 1904년 러일전쟁, 1905년 을사조약과 1910년 한일합방의 치욕, 이어 진행된 일제의 36년의 식민 통치 그리고 1945년 해방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굴곡 많은 민족사 속에서도 교회는 여전히 생명력을 지니며 오늘에 이르렀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가운데서도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920년대 김익두 부흥운동, 6.25 직후 회개운동 그리고 1970년대 대중전도운동과 민족복음화 운동을 통해 한국교회의 영적 생명력을 지켜주셨고, 해외 선교열을 불어 넣어 주셔서 한국교회로 하여금 세계 선교를 주도하는 교회로 성장시켜 주셨다. 그리고 이 일에 예장총회를 그 중심에 세워주셨던 것이다. 때로는 신사참배에 굴복하고 일제의 식민통치의 시녀로 전락했던 암울한 시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한국장로교회는 민족과 사회의 선도 기관으로서의 면모를 지켜올 수 있었다.

 

 지난 역사를 회고할 때 그동안 한국장로교회는 크게 선교사 입국과 장로교 설립(1884-1900), 대부흥운동과 노회 및 총회의 조직(1901-1910), 해외선교 및 사회 변혁과 한국장로교 성장(1910-1930), 도전과 응전의 시대(1930-1945), 대립과 분열의 시대 (1945-1960) 그리고 개혁과 재편의 시대(1960-2000)로 대별될 수 있다. 이런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어떻게 한국장로교회 총회가 지금까지 이어져 왔는가를 고찰하려고 한 것이 본서의 목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장로교 총회는 물론 교회가 처한 시대적 역사적 환경도 충실히 반영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한국 최초의 소래교회  
 
 1884년 9월 20일 중국에서 활동하던 북장로교 소속 의료선교사 알렌이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한국에 입국하면서 개신교 선교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다음해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그리고 스크랜톤이 입국하여 한국의 선교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889년에 헨리 데이비스와 그의 누이동생 메리 데이비스가 내한함으로써, 호주 장로교 선교가 시작되었고, 1892년에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노력의 결실로 남장로교 선교사인 레이놀즈, 전킨, 테이테 선교사가 파송되어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남장로교 선교가 시작된 이후 6년 후인 1898년에는 캐나다 장로회가 공식적으로 한국선교를 시작하였다.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회는 1893년 장로교 공의회를 일찍이 형성하여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협력선교를 자신들의 선교의 모토로 삼았다. 4개의 장로교 선교회는 한국선교를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설정,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장로교 공의회는 네비우스 선교정책, 성경번역, 자립, 자치, 자전을 통한 한국인에 의한 복음전도 그리고 효율적인 복음의 확산을 위해서 선교지 분할 협정을 채택하였던 것이다. 선교사들의 이런 선교정책이 대단한 효과를 거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성경중심의 선교에 기초한 선교정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1890년 중국 산동성에서 활동하던 존 리빙스톤 네비우스 선교사의 조언을 받아들여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한국 장로교 선교정책으로 채택했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성공을 거둔 것도 저변에 뿌리내린 성경공부 때문이며 성경번역이 조기에 완성된 것도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의 성경에 대한 사랑 때문이며 자립, 자전, 자치가 성공한 것도 성경공부를 통한 개혁주의, 복음주의 신앙에 기초하였기 때문이다. 감리교와는 달리 장로교는 성경중심의 선교가 상당한 결실을 맺었으며 초기의 한국교회를 성경중심의 교회로 형성하는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던 것이다. 일부 진보주의 한국의 신학자들과 교회사가들은 한국의 초기 선교사들이 1930년대 길선주 목사나 박형룡 박사와는 달리 상당히 개방적인 성경관을 소유하였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근거 없는 주장이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 특별히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지역 주재 선교사들과 평양신학교 신학 교육을 맡았던 선교사들은 구학파 출신으로 상당히 보수적인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초기 선교가 성공한 것은 균형 잡힌 선교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순히 복음만 전하지 않았다. 복음전파와 함께 의료선교 및 교육선교를 중요한 선교정책으로 삼고 추진하였다. 선교초기에 의료와 교육은 상당히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학교와 병원의 설립은 천주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쇄신하고 개신교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1914년까지 선교사들은 14개의 병원을 설립하였고 1910년대까지 37개의 학교를 설립하였다. 더불어 1900년에 신약성경 시험역본을, 1906년에 신약성경 공인역을, 그리고 1911년에 구약성경의 번역을 완성하여 출간하였다.

 

 이북지역의 교회는 평양의 마포삼열을 비롯하여 맥코믹신학교 출신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원산과 함경도 지역에서는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중부지역에는 언더우드와 그의 매서인들을 중심으로, 부산과 경남은 호주 빅토리안 장로교 선교사들과 베어드를 중심으로, 경상도 지역에서는 게일, 베어드, 아담스 그리고 그 후에 입국한 호주 장로교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전라도 지역은 레이놀즈, 전킨, 테이트를 비롯한 남장로교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이들 장로교회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이 전국적으로 놀랍게 확산되었고, 자연스럽게 장로교회는 한국선교를 주도하는 중심 세력으로 굳게 자리를 잡아갔다. 이즈음에 서상륜, 김흥경, 박태선, 유흥렬이 경성에서, 신화순, 도정의, 이춘경 등이 고향 김포에서 전도를 하여 교회를 개척하여 갔다.

 

 1883년에 소래교회, 의주교회가 설립되었고, 서울 경성지역에는 새문안교회(1887), 남대문교회(1887), 승동교회(1893)가 세워지고, 연동교회 전신 연못골 교회(1894), 행주교회 그리고 김포읍교회가 각각 1894년에 설립되었다. 감리교 선교구였던 강원도에는 1901년에 와서야 양양군의 양양교회(1901)를 시작으로 춘천중앙교회(1902)등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강원도 지역에서는 장로교의 웰본 선교사와 감리교의 하디선교사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역시 감리교 선교구였던 충청지방은 경성지방이나 북한지역보다 교회설립이 늦었다. 1901년에 와서야 청주 강서에 신대교회가 그리고 2년 후인 1903년에 괴산에 괴산읍교회가 설립되어 교회의 틀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영남권의 선교는 상당히 일찍 진행되었다. 1893년에 한위량, 소안론, 호주 빅토리안 선교회 선교사의 노력의 결실로 설립된 초량교회와 부산진교회를 시작으로 부산지역에 교회들이 세워지기 시작했고, 1895년 대구에 처음으로 베어드와 아담스가 이 지역 선교에 헌신한 결과 수많은 교회들이 설립되고 놀라운 복음전파가 이 지역에서 나타났다. 대구 제일교회의 전신인 대구의 남성정교회(1894), 울산의 병영교회(1895), 밀양의 춘화교회(1897), 함안의 신혼교회(1897), 김해읍교회(1898), 합안군 이령교회(1899), 군위군 매성교회(1900) 그리고 영천군 조곡리교회(1900)가 1900년 이전에 영남권에 설립된 교회들이다. 특히 평양대부흥운동을 거치면서 대구는 남부지역 교회 성장을 견인할 만큼 놀라운 성장을 이룩했다.

 1893년부터 전라도 지역에도 테이트, 레이놀즈, 전킨 등의 헌신적인 선교 노력에 힘입어 박해 가운데서도 놀랍게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 전주서문교회를 시작으로 군산, 김제, 목포, 광주, 순천에 교회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평양신학교 
  
 이 기간 동안은 한국교회가 가장 놀라운 성장을 이룩하고, 교회로서의 틀을 다진 기간이기도 했다. 1895년의 청일전쟁, 1904년의 러일 전쟁, 1905년의 을사조약, 1910년의 한일합방은 이 민족에게 위기를 가져다 준 참으로 불행한 사건들이었지만, 동시에 이 민족이 소망을 하나님께만 두도록 하는 자극제가 되기도 하였다. 당시는 러시아와 중국, 일본과 미국 등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주변의 강대국들이 한반도에서 기득권을 차지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러시아는 태평양으로 이어지는 아시아 발판기지로, 중국은 한국에 대한 전통적인 기득권으로, 패권주의 일본은 대륙의 발판기지로 그리고 미국은 동아시아의 전초기지로 한반도를 노리고 있었다. 미국의 외교 전문가 포스터가 말한 대로 당시 한반도는 강대국들이 노리고 있는 ‘나봇의 포도원’이었다. 이러한 시대에 영적각성운동이 한국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1903년의 원산부흥운동,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 그리고 1909년의 백만인 구령운동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들 한국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성장과 틀을 다져준 한국교회사상 가장 중요한 축복의 사건이었다.

 

 사경회 운동은 한국교회 부흥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발흥했던 것은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진행된 사경회 기간 동안이었다. 1890년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채택하고 바로 그 해부터 언더우드 집에서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일환으로 사경회가 시작된 후 사경회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한국장로교 선교의 중요한 근간을 형성했다. 일 년에 한차례 혹은 두 차례씩 일주일에서 한 달 동안 열리는 사경회에서 전국의 거의 모든 교우들이 오전에는 말씀을 공부하고 정오에는 기도하고 오후에는 전도를 나가고 저녁에는 이들을 대상으로 전도 집회를 열었다. 이 전도 집회는 기성 신자들에게는 영적각성의 기회가 되었고, 새 신자들에게는 주님을 영접하는 계기가 되었다. 함께 모여 말씀을 체계 있게 연구하고 개인과 교회와 민족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말씀과 더불어 놀랍게 역사하셨다. 한국교회의 대부흥운동은 이러한 사경회 운동과 매우 밀접하게 연계되어 진행되었다. 1903년의 원산부흥운동도 하디를 주강사로 한 1903년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열린 원산 기도회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 기도회는 말씀을 공부하고 함께 기도하는 일종의 선교사 사경회였다. 역사적인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도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평안남도 도 사경회에서 일어났다. 1890년부터 1910년까지 한국장로교회는 말 그대로 폭발적인 성장을 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세례교인 수는 매년 30%씩 증가하였다. 이처럼 부흥운동이 성경공부를 중심으로 하는 사경회에서 기원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하여서는 안 된다.

 

 이들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성장을 가속화시킨 중요한 요인이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발흥하던 그 해 한국의 장로교 독노회가 조직되어 장로교회가 민족교회로서 발돋음 할 수 있게 되었고, 1909년 백만인 구령운동이 일어나 민족복음화가 진행된 후 1912년 총회가 조직되었다. 러일전쟁부터 한일합방 그리고 이듬해 105인 사건에 이르기까지 한반도는 위기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민족의 위기 속에서 일련의 부흥운동이 발흥하고, 교회가 틀을 다짐으로써 한국교회가 양적, 질적으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런 일련의 주변 환경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진정한 이 민족의 미래를 인도하실 분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그 분만이 참된 소망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이 시대 시대적 환경은 정치적 독립 소망에서 기독교의 영적 소망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돌이켜 볼 때 한국교회의 성장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역사에 개입하고 계셨던 것이다.

 

이런 한국교회의 급성장은 한국장로교회의 제도적인 틀을 촉진시켜 1907년 독노회 설립에 이어 1912년 총회의 설립으로 이어지는 자연스런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드디어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평북, 평남, 황해, 함경, 경충, 경상, 전라대리회가 모여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를 구성하고 그로부터 5년 후인 1912년 9월 1일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총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총회의 결성은 한국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지 28년만의 일이며 노회가 결성된 지 5년만의 일이다. 미국의 장로교가 1706년에 노회가 결성된 지 83년만인 1789년에 가서야 총회가 결성된 것에 비하면 한국의 장로교총회는 상당히 조기에 형성되었던 것이다. 총회의 결성을 통하여 한국장로교회는 한국민족의 교회로서 공식 출범하게 된 셈이며 장로교 성장의 도약을 위한 틀을 마련한 셈이다.
1884년부터 1912년까지 한국장로교회의 성장을 주도한 것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 이북 지역이었지만 어느 정도 지역적인 균형을 맞추면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다음은 1910년의 한국 장로교회의 지역별 세례 교인 수이다.
 
 총회가 설립되던 1912년부터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 한국장로교회는 3?1운동, 자유주의 도전, 신사참배문제 등 일련의 위협적인 사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양신학교를 중심으로 상당히 안정된 성장을 계속하고 있었으며 한국개신교를 주도하는 교단으로 손색이 없을 만큼 괄목할 만한 성장을 계속하였다. 부흥운동을 통해 한국교회가 놀랍게 성장하자 일제는 교회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한국장로교회는 많은 어려움을 만났다. 1911년 105인 사건, 1919년 3·1운동, 1935년부터 1945년까지 신사참배 강요와 일제의 신민화 정책으로 인한 직 간접적인 교회의 탄압은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1911년에 발생한 소위 105인 사건은 일제가 기독교를 탄압하고 궁극적으로 선교사들을 한국에서 추방하려는 전혀 근거 없는 음모였다. 이후 선교사들은 일제의 한국 통치를 긍정적으로 보던 이전의 견해에서 돌아서 일제의 한국 통치에 대해 내심으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 종교와 지역과 신분과 연령을 초월하여 이 민족이 결집하여 민족의 독립을 전 세계에 선포했던 1919년 3?1운동은 기독교의 힘이 하나로 모여 태동된 자랑스런 민족의 독립운동이었다. 이로 인해 교회가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1919년 삼일운동이라는 민족적 위기 속에서도 한국장로교회는 흔들리지 않고 전국적인 교회 성장을 주도했고, 일련의 사회개혁운동도 전개했다. 금연, 금주를 비롯, 절제운동, 농촌운동, 청소년운동, 의료, 고안원운동 등을 통해 일제의 수탈로 인한 농어촌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길선주와 김익두는 부흥운동을 통해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에게 우리의 참된 소망이 어디에 있는가를 선명하게 제시하였다. 이런 가운데서도 총회는 국내외 선교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한국교회는 선교하는 교회였다.

 제주도에 이기풍 선교사를 파송한 이후 일본, 간도, 중국, 시베리아 선교를 총회적인 차원에서 전개하여 처음부터 한국장로교회는 선교하는 교회로서의 진면을 보여주었다. 당시 일본의 식민지 수탈로 인한 피폐된 경제 상황 속에서도 교회는 복음의 빚진 자의 사명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1930년대 일기 시작한 자유주의 도전 앞에서도 교회는 결연하게 대처, 전통적인 신앙을 재확인하고 처음 선교사들로부터 전해 받은 정통개혁주의 신앙을 계승하려고 하였다. 그 후 찾아온 신사참배 요구로 한국교회가 너무도 쉽게 배도의 길을 택했을 때에도 한국장로교회는 결연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1938년 한국장로교 총회 역시 집요하고 줄기찬 일제의 신사참배의 강요 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 후 한국장로회는 여느 교단처럼 그 정통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만약 이 시대 주기철, 손양원, 박관준, 한상동을 비롯 신사참배 강요 앞에 끝까지 굴하지 않았던 양심의 소리가 없었다면 한국교회는 일제에 의해 도태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참으로 한국장로교회의 자랑일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영광이었다.

 

1936년 5월 교황청이 신사는 종교적인 예식이 아니라 국민의례일 뿐이라는 교황청의 발표가 있은 후 한국천주교는 신사참배를 수용하고 제사제도도 수용하면서 배도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이듬해 1937년 한국감리교회가 무너졌고, 다시 1938년 제 27회 총회에서 총회장 홍택기 목사와 총대들이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이런 가운데 외롭게 생명을 내걸고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이들은 한국교회의 신앙의 자존심을 지켜준 이 시대 폴리갑이었고, 존 낙스였다. 1938년 이후 한국장로교회가 정통성을 상실하고 일제의 신민화 정책의 시녀 역할을 자처하고 있을 때 이들은 다니엘과 사드락 메삭 마벳느고 친구의 신앙으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섰던 것이다. 기실, 이들 외에 얼마나 많은 양심의 소리들이 일선 현장에서 신사참배문제와 고투했었는가? 해방 후 무너진 제단을 다시 재건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생명을 무릅쓰고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앞에 당당히 맞섰던 순교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터툴리안이 말한바 “순교는 교회의 씨”라는 진리는 여전히 한국교회, 특별히 한국장로교회 안에 그대로 적용될 역사적 진실이었다.

 획일화시킬 수는 없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킨 이들 대부분이 처음 전해 받은 성경적인 신앙을 그대로 간직하려고 했던 이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바른 신앙이 바른 행동을 태동시킨 것이다. 참된 신앙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지도록 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신사참배는 한국교회의 시금석이었고, 이 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끝까지 신앙을 지킨 이들이야말로 이 시대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준 주인공들이었다.

 이 시대 한국교회는 생존을 위해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본래 가졌던 직접선교와 간접선교의 균형, 곧 복음전파와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구현해야 한다는 역사적 소명에 충실할 수 없었다.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정착, 종말론 중심의 타세적인 신앙의 강조, 사경회의 확산, 신사참배문제 등 시대적인 요인과 선교정책의 변천으로 말미암아 전기(1884년에서 1912년까지)에 찾아 볼 수 있었던 복음의 균형 잡힌 발전이 상당히 줄어들면서 교회의 사회적인 책임을 간과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특별히 1930년대 총회가 일련의 자유주의의 도전과 신사참배의 문제로 갈등을 겪던 그 시대에 두드러졌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라는 민족적 위기 앞에 교회는 대 사회적인 문제에 귀를 기울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민족적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친히 이끄시고 성장시키셨다. 이 기간 동안 한국장로교를 주도한 곳은 평양신학교가 자리 잡고 있던 평양을 비롯하여 서북지역이었다. 특히 이 기간 동안에 평양은 한국장로교의 센터 역할을 톡톡히 감당했다. 총회설립 후 1942년까지 31회의 총회 중에서 22회가 북한에서 개최되었으며 총회장 31명중에서 거의 70%인 20명이 이북 출신이었다. 선교사 출신 4명의 총회장을 제외한다면 단지 7명만이 남한 출신이었던 것이다. 총회의 개최지나 총회장의 연고지만을 가지고 평가하는 것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만큼 북한지역이 한국장로교회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노회의 수에 있어서도 북한지역이 단연히 앞서고 있었다. 북한에 14개의 노회가 있었으며 남한에 10개 그리고 만주에 4개의 노회가 있었다. 교역자 수에서도 분명히 차이가 있다. 1940년을 기준으로 할 때 장로교 전체 925명의 교역자 중에서 북한에 551명 남한에 374명이 있었다. 이것은 북한의 교세가 단연 남한의 교세를 압도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북한의 장대현교회, 서문밖교회, 창동교회, 산정현교회가 교세에서 서울의 새문안교회, 승동교회, 연동교회, 남대문교회를 압도하고 있었다. 이 기간에 지역별 교세는 다음과 같다.
   

 위의 통계가 보여주듯이 1912년부터 1945년 해방되기까지 한국장로교회의 세례인 수 110,002명중 북한 지역에 약 67%에 해당하는 74,528명이 있었다. 그러나 경기. 충청, 경상도, 전라도 지역도 성장속도에 있어서는 북한 지역의 교회성장에 크게 뒤지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쪽지역에서 두드러지게 급성장한 곳은 경상도 지역이다. 1912년 총회 설립 시에 7,817명이던 세례교인수가 1938년에는 무려 22,697명에 이르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신사참배문제 등으로 1942년에 16,284명으로 줄어들었다.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체로 1945년 해방 이전까지는 북한의 교회가 한국장로교회를 주도하고 있었다는 것은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해방이후 이 상황은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았다.
  

 해방 이후 한국장로교회는 정치적인 분단에 의하여 불가피하게 남쪽과 남쪽으로 나뉘어졌다. 해방 이후 한국장로교회는 자신들의 문제를 정립하기도 전에 신사참배와 자유주의 문제로 일련의 대립과 논쟁의 시기를 맞이하여야 하였다. 1946년에 남쪽 총회에 의하여 조선신학교가 공식적으로 총회의 인준을 받았고 이에 반대하던 출옥한 신사참배 반대자들이 중심이 되어 진해에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947년에 조선신학교의 자유주의 교육을 우려한 51명의 복음주의 학생들은 조선신학교의 진보주의 신학 문제를 총회에 건의하게 되었고 총회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해 만주에서 박형룡 박사가 귀국하면서 한국의 장로교회는 전통적인 신앙을 고수하려는 보수주의 세력과 세계적인 학문의 조류를 과감하게 수용하려는 진보주의자들 사이에 일련의 신학적인 논쟁이 발생하였다. 진보주의 노선에서는 김재준 박사가, 보수주의 노선에서는 박형룡 박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신학적인 논쟁은 신학교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총회의 지도자들과 교회들이 중립을 지키기에는 이 신학적 논쟁이 너무도 심각하였다. 계속된 논쟁 후 한국장로교회는 세 차례의 대 분열의 아픔을 겪어야 하였다. 신사참배문제로 인한 1952년의 고신총회의 분열, 조선신학교 문제로 인한 1953년 기장의 분열은 한국교회의 뼈아픈 사건이었다. 그러다 1959년에 W.C.C.문제로 인하여 또다시 W.C.C.를 옹호하는 통합측이 분열 한국장로교회는 세 번 째 분열을 경험했다.

  1950년대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을 두고 한국교회사가들은 평가를 달리하고 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자기 교단이나 교파 중심적으로 분열의 원인을 분석하고 교파주의적이고 교단사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자신이 서 있는 교단과 교파를 넘어설 수 없겠지만 이제 한국교회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를 내려야 할 역사적 시점에 와 있다. 분명 1952년의 분열의 원인은 신사참배 문제였고, 1953년 기장의 분열은 조선신학교와 신학적 변천, 그리고 1959년 통합의 분열은 WCC와 에큐메니칼이 분열의 일차적인 요인들이었다. 그 외 다른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들은 부차적인 요인들이었다.

 이제 한국장로교회는 과연 자신이 서 있는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서도 한국교회와 사회 앞에 자성의 기회를 찾아야 할 것이다. 확실히 세 차례의 분열을 맞은 후 한국장로교회는 서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반세기가 흐른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고신, 기장, 통합, 그리고 본 교단은 신학적 방향을 달리하며 교회를 이끌어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다만 본 교단과 고신의 경우 큰 신학적 차이 없이 서로 유대를 가지며 지내오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각기 가는 방향이 다르다.

 1950년대 한국장로교회가 경험한 일련의 분열의 경험을 통해 한국장로교회는 해방 이전에 가졌던 통일성을 잃어버리고 문화적으로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심화시키고 말았다. 그리하여 한국교회는 사회적인 주도력을 점점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실수를 통해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셨다. 1945년부터 1960년까지 한국장로교회는 꾸준하게 성장하여 한국개신교의 주도적인 위치를 지켜갔다. 물론 이 기간 동안에 한국 장로교회는 북부를 제외하고는 고른 성장을 하였다. 1953년에 예수교장로교 세례인 수는 250,000명이고 기장 세례인 수는 16,944명이었다. 고려파를 합친다면 장로교회의 세례교인 수는 10년 동안에 약 3배가 증가한 셈이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내외적으로 6.25전쟁, 교회분열, 신학적 논쟁, 이단의 등장 등 일련의 어려운 문제들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성장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개입이라는 사실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총신대학교 100주년 기념관 

 

 이 기간 본 교단은 한국교회 성장을 견인하는 중심축이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광활한 양지캠퍼스 조정, 강남 대치동의 총회회관 건립, 한국 전체를 하나로 만든 통일찬송가 발간 등을 통해 한국교회 안에 중요한 리더쉽을 구축하며 성장을 거듭했다. 1960년 이후 새로운 환경 속에서 신앙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국내외 선교를 통해 한국교회 성장을 견인했던 것이다.

 분명 1960년대 이후 한국교회는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1950년대에 일련의 분열을 겪은 한국장로교회는 신학적 색깔을 분명히 표방하면서 자신들의 독자적인 길을 걸어왔다. 자신들의 정체성에 따라 한국장로교회는 토착화신학, 신정통주의 그리고 정통주의로 대별되기 시작하였다. 일찍이 진보주의를 표방하던 기장은 1960년 이후 기독교 사상 등 일련의 신학지를 통해 자신들의 개방적인 신학적 입장을 뚜렷이 표방하면서 진보주의 신학을 추구하였다. 1960년대 이후에 발흥한 토착화 논쟁, 민중신학 등 일련의 신학적인 작업을 통하여 전통적인 장로교 신학을 수정하고 한국적 장로교라는 기치 아래 토착화신학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이점에 있어서는 감리교와 맥락을 같이하였다.

 한편 통합측은 에큐메니컬이라는 세계적인 교회 연합운동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파악하고 W.C.C.가 추구하는 신정통주의를 자신들이 걸어갈 새로운 장로교 신학의 방향으로 정립하기 시작하였다. 획일화 시킬 수는 없지만 상당수의 교수들이 신정통주의야말로 현대 한국 장로교의 신학적 방향이라고 생각하였다. 통합의 일부의 교수들과 목회자들은 민중신학 등 토착화 신학에 매력을 느끼기도 하였다. 1960년 이후 한국장로교회는 더 이상 신학적인 통일성을 찾아 볼 수 없다. 일련의 장로교 분열을 통하여 이전에 갖고 있던 신학적 통일성을 상실하고 만 것이다. 한철하 박사, 마삼락 선교사 등 이런 신학적인 입장에 반대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아세아연합신학원을 설립하여 좀더 복음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입장에서 자신들의 신학을 표방하기 시작하였다.

 1960년 이후에도 본 총회는 여전히 성경이 오류 없는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정통 개혁신학에 기초하여 신학교와 교단이 운영되어 왔다. 본 교단은 장로교의 전통적인 입장을 고수하기 위하여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본 교단은 평양신학교의 사상을 전수하려는 충실한 장로교 교단이라는 자의식을 갖고 초대 선교사들이 전수한 성경중심의 신앙을 고수하면서 현대의 변천하는 한국의 상황에 복음을 능동적이고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의 신학적 입장은 “수정되지 않은 칼빈주의”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구 프린스턴 신학자들이 자신들의 신학적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마다 자신들은 구 칼빈주의를 계승한다고 고백하였던 것처럼, 본 교단은 수정되지 않은 정통 칼빈주의를 교단의 신학적 입장임을 천명하고 있다. 이것은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존중하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포함되어 있는 역사적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계승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한국의 장로교회의 남아있는 과업은 옛 프린스턴의 찰스 핫지가 성공적으로 했던 것처럼 신학교와 총회를 긴밀하게 연결하여 한국장로교회를 위한 신학교, 신학교를 구심점으로 하는 한국장로교회를 형성하는 것이다. 신학교가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신학교는 신학교로서의 생명을 다한 것이다. 신학교는 한국교회에 도움이 되어야 하며 또한 그런 방향에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지난 100년간의 총회의 역사는 우리에게 훌륭한 교훈을 제시한다.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로부터 성경 중심의 신앙을 전수받은 한국장로교회는 성경의 근본신앙을 파괴하는 현대주의를 관용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복음전파와 교회의 대 사회적, 민족적, 문화적 책임을 동시에 완수하여야 할 사명을 부여받았다. 지난 총회 100년의 역사를 돌아볼 때 한국장로교회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 1920년 김익두 부흥운동, 1950년대와 1970년대 대중전도운동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의 놀라운 부흥운동을 공유하였다. 부흥운동을 통해 한국교회 성장을 견인하는 구심점의 역할을 톡톡히 감당한 셈이다. 특별히 통합측이 분열되어 나간 후 본 교단은 1만 교회운동과 국내외 선교에 전념하여 놀라운 교세의 신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한국교회가 침체를 맞고 있는 이 시기에 본 교단은 그 옛날의 복음의 생명력과 구령의 열정을 회복하여 다시 한번 복음전도에 매진하여야 할 때가 되었다.

 복음전파 노력 못지않게 교회가 소홀할 수 없는 것이 복음의 대 사회적 문화적 민족적 책임 구현이다. 근래 교단 일각에서 여기에 대한 자성이 일면서 이 일에 자의식을 가지고 동참하는 교회들이 상당히 늘고 있음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예를 들어 오랫동안 반포사회복지관을 운영해온 옥한흠 목사의 사랑의 교회(현 오정현 목사)나 안산동산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기독교학교의 새로운 장을 열어간 안산동산교회(김인중 목사), 그리고 근래 국가적인 태풍과 재난이 있을 때마다 헌신적으로 앞장서는 광염교회(조현삼 목사)는 이 일에 있어서 본 교단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중요한 모델 역할을 충실히 감당해왔다. 이들 외에도 우리 교단의 수많은 교회들이 복음전파와 더불어 대사회적 책임 구현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은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에 만족하지 말고 앞으로 본 교단은 이 일에 있어서 사회와 민족을 선도하는 구심점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해야 할 것이다. 성경적인 신앙이 삶의 실존 속에서 표출되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얼마가지 않아 생명을 상실한 것이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한국장로교회는 개혁주의의 균형 잡힌 실천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교회가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다. 미국의 개혁파 복음주의 역사가 나단 해취(Nathan Hatch)가 지적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은 단순히 교회의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고 사회를 포용하며 개인의 경건만 아니라 사회의 거룩함까지 포함하여야 된다.” 기독교인의 신앙을 표방하면서도 교회의 사회적인 책임을 외면하는 이런 이중적인 태도는 청교도들의 신앙관과는 차이가 있다. 청교도들은 경제, 직업, 사회, 정부 등 삶의 모든 분야를 성경적인 규범 아래로 가져가려는 일에 헌신적이었다. 한국장로교회도 세상 속에서 교회의 책임을 총체적으로 완수하여야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총회 100년사를 점검하면서 한국장로교회사가 반성하며 얻어야 할 중요한 교훈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로교의 역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역사가 없는 교회, 역사를 도외시한 교회는 성장할 수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 한국장로교회는 한국장로교회의 역사를 정리하여야 할 중요한 시점에 와 있다. 정확한 역사사료에 근거한 한국장로교 역사의 정립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총회적인 차원에서 역사사료를 수집, 정리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장로교회의 역사 정리를 위해서는 지역을 초월하여 총회 산하 전국교회들이 총체적으로 협력해야 할 것이다.

 총회 100년을 마무리하면서 우리가 발견하는 분명한 사실은 선교 초창기나 1959년 통합이 분립된 후 너무도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본 교단이 짧은 기간 동안 그토록 놀라운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성경관을 비롯한 역사적 청교도 개혁신앙을 견실하게 견지해왔기 때문이다. 성경 중심의 네비우스 선교정책과 초기선교사들의 개혁파 복음주의 신앙이 한국장로교회의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자립, 자치, 자전의 실현도 성경중심의 신학교육이 그 저변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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