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한국인 무슬림이다”
경멸의 시선 속에서도 한국인 무슬림들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사진은 파키스탄 출신으로 한국에 귀화한 무함마드 아심(왼쪽)씨와 지난 3월 그와 결혼한 신미선(오른쪽)씨. 4월21일 인천 자택에서 인터뷰하던 중 신씨가 눈가를 만지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날, 하늘은 청명했다. 라틴계·아시아계가 많이 사는 미국 뉴욕 퀸스 거리에 초가을 햇볕이 내렸다. 오전 9시께 윤알리야(36)씨는 자취방에서 수업 준비에 바빴다. 오후엔 퀸스대학 미술학과 대학원 수업이 있었다. 얼핏 고무 타는 냄새를 맡았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오오, 나의 신이여. 또다른 비행기가 충돌했습니다.” 건성으로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누군가 외쳤다. ‘새 드라마를 시작했군.’ 윤씨는 생각했다. 지하철로 열 정거장 떨어진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윤씨는 알지 못했다. 유학 2년째를 맞은 2001년 9월11일 아침이었다.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무너진 뒤, 윤씨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거리를 걷는데, 어느 백인 아줌마가 윤씨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는 역겨워!” 지나던 사람들은 백인 여성과 아시아계 여성을 번갈아 쳐다봤다.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사진학 수업에서 윤씨는 C학점을 받았다. 과제물로 낸 뉴욕 무슬림(이슬람교도) 사진을 유대인 교수는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직업을 구하려 했으나 번번이 면접에서 떨어졌다. 어렵게 사립학교 상담교사 자리를 구했다. 윤씨를 채용한 미국인이 나중에 말했다. “우리 아버지도 무슬림이셨어.”
9·11 테러 직전인 2001년 여름, 윤씨는 무슬림이 되었다. 그것은 유일신 알라를 믿고, 무함마드가 하나님의 예언자임을 믿고, 하루 5번 ‘살라’(기도)를 드리며 살아가는 일이었다. 대학생 시절 윤씨는 성당 성가대에서 성가를 불렀다. 뉴욕에서 만난 모로코 출신 무슬림 친구가 그의 믿음을 흔들었다. 윤씨는 새 믿음을 택했다. 미사포 대신 ‘히잡’(이슬람식 두건)을 썼다. 어딜 가건 스카프로 머리와 어깨를 둘렀다. 인터넷 메신저로 한국의 아버지한테 고백했다. “저, 무슬림이 됐어요.” 1만1000㎞의 거리를 빛의 속도로 날아온 문자가 컴퓨터 화면에서 깜빡거렸다. “모든 종교에는 진리가 있지.” 아버지는 덧붙였다. “왜 하필이면 이슬람이니?”
매주 금요일 오후가 되면 ‘주마’(금요예배)에 참석하는 무슬림들이 한국 이슬람 서울 중앙성원에 모여든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2003년 여름 한국에 돌아온 윤씨는 금요일마다 서울 한남동 이슬람 서울중앙성원에 갔다. 그곳에서 ‘주마’(금요예배)에 참석했다. 오가는 길에 히잡을 쓰고 긴팔 옷과 긴 치마를 입고 지하철과 마을버스를 번갈아 탔다. 사람들은 윤씨를 쳐다보았다. “경멸의 눈빛이었죠.” 윤씨가 말했다. 뉴욕의 일은 서울에서 반복됐다. 동네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 어느 한국인 남자가 윤씨에게 외쳤다. “어이, 모하메드.” 한국인 남자는 한국인 여자를 향해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윤씨는 손가락을 쳐다봤다. 남자는 엄지 손가락을 천천히 아래로 돌렸다. “나를 모욕하려고 작정한 거죠.”
이제 윤씨는 무슬림 친구들만 만난다. 대부분 한국인 무슬림이다. 13만~14만명의 무슬림이 한국에 살고 있다. 이 가운데 적어도 4만5000여명은 한국인이다. 나머지는 결혼·취업·유학 등으로 체류중인 외국인이다. 일부는 장차 귀화할 것이다. 스스로 무슬림이 되는 한국인, 국제결혼을 거쳐 무슬림이 되는 한국인, 한국 국적을 얻은 외국 출신 무슬림,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까지 더해 한국인 무슬림은 조금씩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미국·유럽에서 무슬림은 집단적으로 발언한다. 때로 사회 쟁점의 한복판에 뛰어든다. 한국 무슬림들도 입을 열기 시작했다. 언제나 웃는 얼굴의 윤씨가 말했다. “같은 한국 사람인데… 경멸의 눈빛은 정말 견딜 수 없어요.” 그 말을 할 때 윤씨는 웃지 않았다.
히잡 두른 사랑 앗살라무 알라이쿰!
<*앗살라무 알라이쿰: 신의 가호가 있기를>
윤알리야(왼쪽), 장후세인(오른쪽) 부부는 5살 딸 젠나(아래), 5개월 아들 무빈(위)을 뒀다. 지난 4월26일, 가족들이 서울 이태원 한국이슬람중앙성원을 찾았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성혼 선언과 함께 부부는 꽃처럼 웃었다. 지난해 10월 여자는 눈이 크고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를 만났다. 눈이 큰 남자는 술과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다. 때로 서북서쪽을 향해 조용히 절했다. 카펫 무역을 하는 남자는 2003년 한국으로 귀화했다. 여자는 성실하고 정직한 귀화 한국인과 사랑에 빠졌다. 무슬림은 오직 무슬림과 결혼한다. 여자는 교회 출입을 끊고 무슬림으로 개종했다.
무함마드 아심(36)씨와 신미선(29)씨는 지난 3월6일 서울 이태원 한국 이슬람중앙성원에서 ‘알라의 이름으로’ 결혼했다. 신씨의 아버지는 사위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파키스탄 새끼”라고 불렀다. “파키스탄 새끼가 왜 한국에 와서 가만있는 사람을 건드리는 거야?” ‘히잡’(이슬람식 두건)을 쓴 딸도 타박했다. “다른 이슬람교도처럼 너도 테러로 빠질 거니?” 신씨의 부모는 결혼식장에 오지 않았다.
신씨는 무함마드씨의 두번째 부인이다. 1999년 한국에 온 무함마드씨는 한국인 여자와 결혼했다. 2남2녀의 자식을 낳았다. 아이들 모두 주민등록번호를 가진 한국인이다. 3년 전 아이들은 파키스탄으로 ‘무슬림 유학’을 떠났다. 첫 부인도 함께 갔다. 한국 학교에선 무슬림으로 키우기 어려웠다. 첫 부인과 4명의 자녀는 다시 한국에 돌아올 것이다.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신씨는 선택했다.
‘알라의 이름으로’ 결혼한 여자에게 아버지는 사위를 “파키스탄 새끼”라 말했다. 남편의 첫 부인과 자녀는 “나의 가족”이다. 한국은 일부다처 금지라 혼인신고도 못했다.
“가족이잖아요.” 신씨는 가만히 생각하다 말했다. “나도 사람인데, 질투심이 안 생기는 건 아니지만…” 신씨가 남편의 얼굴을 쳐다봤다. “아이들 생각하면 이혼하면 안 되겠죠.” 이슬람은 여성을 차별하는 게 아니라 보호한다고 신씨는 생각한다. 다른 부인이 아니라 새로운 가족이 생긴 거라고 신씨는 생각한다. “만약 나하고 이혼한대도…” 신씨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계속 무슬림으로 지낼 거예요.” 신씨가 기도하며 마주하는 벽에는 종이가 잔뜩 붙어 있다. 꾸란의 아랍어 구절을 한글로 옮겨 적었다.
이슬람의 율법은 네 명의 부인까지 허락한다. 이슬람의 율법에서 두 사람은 부부다. 한국의 법률에서 두 사람은 아직 부부가 아니다. 중동 국가와 달리 한국은 일부다처를 허락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아직 혼인 신고를 못했다. 방법을 찾고 있다. 신씨 부부는 한국의 상식·관습·법률의 경계를 시험하고 있다.
충남 아산에 사는 장동현씨는 하루 5차례 ‘살라’(기도)를 한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합동예배를 할 때는 참석자 모두 열을 맞춘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때론 스스로 시험에 빠진다. 지난 4월5일 경복궁을 거니는 사람들은 봄볕을 골고루 나눠 가졌다. 시비가 일기까지 부부의 봄나들이는 완벽했다. 상춘객 틈에서 어느 중년 남자가 외쳤다. “테러리스트가 어딜 나와?” 신씨는 히잡을 쓰고 있었다. 울컥하고 나서는 남편의 팔을 신씨는 단단히 붙잡았다. 부부는 말없이 집에 돌아왔다.
장동현(35)씨도 인내하는 일에 익숙해지고 있다. 올해로 결혼 4년차인데, 최근 2년 동안 ‘라마단’(금식)을 했다. 매년 8~9월 무렵, 해가 떠 있는 동안 일체의 음식을 먹지 않았다. 한달에 걸친 라마단을 끝내면 체중이 5~6㎏ 줄었다. “배고프고 가난한 사람의 처지가 되어보자는 뜻이거든요.” 그 처지가 되니 하루 종일 먹는 생각뿐이었다.
남들이 밥먹는 점심때가 되면 장씨는 공장 기숙사 좁은 방에서 메카가 있는 서북서 방향을 잡는다. 반절을 하고 무릎을 꿇고 오체투지를 두번 한다. 회식 자리가 생겨도 장씨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예전엔 목에 찰 때까지 마시던 그 술이다.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던 동료들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왜 안 먹어?” “그래야 마음이 편해.”
그것을 장씨는 ‘사랑’이라 부른다. “아내를 사랑하니까요.”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일하던 장씨는 자동차 부품을 조립하던 산업연수생 아리아나 따리(31)씨가 좋았다. 두 사람은 호수 주변을 함께 걷고, 닭 요리를 함께 먹었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여자는 한국말에 서툴렀다. 돼지고기를 안 먹기로 결심한 남자는 인도네시아말을 몰랐다. “‘애인이 되어 달라’는 말을 영어로 외워 갔지요.” 장씨의 고백에 여자는 웃었다. “말은 안 통했지만 눈이 맞은 거죠.” 그날을 떠올리며 장씨는 웃었다.
두 노동자에게 국가·종교·사랑의 경계는 얇디얇다. 간혹 생채기처럼 튀어나오는 긴장은 있다. “이슬람에 대해 안 좋은 말이 많은 것 같아.” 무슬림 테러리스트에 대한 방송 뉴스가 나왔다. 아내가 정색을 했다. “그런 말, 기분 나빠요. 진짜 무슬림, 테러 안 해요.” 장씨 부부가 평소 알고 지내는 한국인-인도네시아인 부부는 7쌍이다. 그들 모두 비슷한 말다툼을 알콩달콩 나누다 잠든다. 이제 한국말을 곧잘 하는 장씨의 아내 따리씨는 아직 귀화하지 않았다. 친정에 다녀오려면 인도네시아 국적이 편리하다. 친정 갈 일이 줄어드는 미래의 어느 날 따리씨도 한국 국적을 얻을 것이다.
이것은 드문 사랑이 아니다. 2004년 이후 매년 결혼하는 한국인의 10~14% 정도가 외국인 배우자를 선택한다. 2011년 3월 현재 한국인과 결혼해 국내에 머물고 있는 ‘국제결혼 비자 체류자’는 14만3000여명이다. 이 가운데 인도네시아·파키스탄·우즈베키스탄 등 주요 11개 이슬람 국가 출신 무슬림만 4150여명에 이른다고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안정국 교수는 분석한다.
인도네시아 여자와 결혼한 남자는 라마단을 지키고 돼지고기와 술을 끊었다. “아내를 사랑하니까요.” 무슬림에 대한 안좋은 말을 접할 때마다 맘에 생채기가 난다.
신미선씨의 남편 무함마드씨는 인천 집 근처에 ‘무살라’(소규모 예배당)를 만들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장씨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을 어떤 이는 ‘번식’이라 부른다. “꼴통 이슬람 외국인들 범죄 많이 저지르고, 광우병 사태 때 앞장선 외국인들 전부 이슬람들입니다. 대한민국 땅에 번식력 강한 이슬람이 들어오면 2030년쯤에는 서울 거리가 외국인 이슬람 천지가 될 겁니다.” 네이버 카페 ‘노노데모’에 지난 2월 올라온 글이다.
무슬림과 사랑하면 민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2010년 한해 동안 국민권익위원회는 “고용허가제 송출국가에서 이슬람 국가를 제외해 달라”는 178건의 민원·제안을 접수했다. 지난해 10월(69건), 12월(55건)에 집중됐다. 올해는 “이슬람 국가의 유학생을 받지 말라”, “이슬람 사원 첨탑 건설을 승인하지 말라” 등의 민원·제안이 늘었다. 무슬림이 발붙일 공간을 없애라는 이런 민원은 “이슬람 노동자가 한국 여자를 집단 강간했다”는 식의 글이 인터넷에 유포될 때마다 주기적으로 늘어난다.
대검찰청의 내·외국인 범죄자 통계(2010년)를 보면, 국내 범죄의 99.1%는 한국인이 저지른다. 그다음이 중국인(0.5%), 베트남인(0.1%), 몽골인(0.1%) 순이다. 파키스탄인은 0.012%만 차지한다. 법무부 외국인 체류자 통계(2011년 3월 현재)를 교차분석하면 인구 대비 범죄자 비율이 나온다. 한해 동안 전체 한국인 가운데 살인·절도·강간 등 형법상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2.2%다. 체류 외국인은 몽골(2.9%), 러시아(2.3%), 대만(1.6%), 중국(1.3%), 파키스탄(1.3%) 순이다. 통계적으로 보아 불교(라마교)·기독교(러시아정교)·유교 국가 출신이 이슬람 국가 출신보다 더 폭력적이다.
그런 한국에서 더 머물 수 없었다. 크르테미르 후세인(40)씨는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벤치에 앉아 말했다. “이제 터키로 가야겠어.” 터키 앙카라대 한국어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국문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에 유학한 무슬림은 고국에서 교수가 되고 싶었다. 윤알리야(36)씨는 명치 아래서 용기를 끄집어올렸다. “그럼, 오빠… 나랑 결혼할래?”
미국 유학 시절 무슬림이 된 윤씨는 ‘터키 오빠’를 인터넷 카페에서 만났다. 크르테미르씨는 한국인에게 이슬람을 소개하는 인터넷 카페를 운영했다. 윤씨는 카페지기에게 자주 질문을 보냈고, 터키 남자는 성실히 답변했다. 그리고 2006년 어느 여름밤, 터키 출신 카페지기는 일생일대의 질문에 답했다.
“이 여자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 거라 생각했죠.” 결혼 뒤 크르테미르씨는 한국에 귀화했다. 이름을 장후세인으로 바꿨다. 고려 중기, 원나라를 거쳐 한반도에 들어온 무슬림이 있었는데, 임금이 장씨 성을 내리고 덕수를 본관으로 하였다. 터키 남자는 자신의 두번째 성씨를 한국 역사책에서 따왔다.
매일 5번의 기도를 드리지만 한국 무슬림의 삶은 고되다.
장씨네 집에는 5살 딸과 5개월 아들이 있다. 부부는 딸을 터키계 국제유치원에 보냈다. 딸은 울면서 집에 왔다. 서양인 교사를 무서워했다. 한국 사람이 없다고 불안해했다. 눈이 크고 코가 오뚝한 덕수 장씨, 젠나는 천생 한국인이다. 엄마와 함께 ‘마스지드’(이슬람 사원)를 찾는 무슬림이기도 하다.
그리고 2년 뒤 젠나는 한국의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글 송경화 안수찬 기자 freehwa@hani.co.kr
사진 강재훈 류우종 신소영 기자 wjryu@hani.co.kr
출처: 한계래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