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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한국기독교회사

 

1장 근대 이전의 기독교와의 접촉

   

 

대진경교유행비 : 781(당 건중 2) 중국 서안에 설립된 비로 중국에서의 경고 역사를 증명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탁본이 서울의 한국기독교박물 관(숭전)에 소장되어 있다.88.8*177.8cm.

 

 

 

돌십자가 : 경주 불국사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신라시대에 전래된 경교의 흔 적을 증명한다.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24.5*24*9cm.

 

 

몽천포구 : 임진왜란 중(1594) 한국에 온 최초의 서야 신부 세스페데스가 상륙한 곳으로 추정되는 경남 웅천

 

 

 

오다 쥴리아의 묘 : 임잰왜란 중 일본에 잡혀 간 조선인 포로 중에는 기리 시단으로 개종하여 순교한 이들이 상당히 많았다. 왕가의 딸로 고시니에 의 해 끌려 갔다가 신앙의 절개를 지킨 오다 쥴리아의 묘. 서울 절두산 순교성 지 소재.

 

 

1) 당나라를 통한 접촉 AD 431 에 에배소에서 기독론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있었는데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을 함께 공유하지만 점진적 동화 과정을 통해 이루어 진다고 했다 가 에배소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됨.

Netorius 퍼시아 에뎃사 AD635- 인도와 중국을 전파. 중국에서는 경교라함.

nestorian 당시 중국 황제는 당태종. 당태종: 아라곤의 설교 감명, 파사사라는 교회 세워줌. 중국말로 아브라함. 왕이 관심을 가지므로 크게 번창

* 그때 우리나라는 신라시대(삼국통일을 꿈꾸던때) 우리나라는 당나라 힘입어 통일 이루려함.(신라의 김춘추 여러번 방문)

 

* 불교의 고승들이 당나라 여러번 방문.

 

* 1635 - 중국 서안부(북경)에서 대진 경교 유행 중국비 같은수도 이 비문에는 중국어와 시리아어로 736(중국어, 시리아)로 기록되었음.

 

* 1917년에 대진 경교 유행 중국비의 모조품이 금강산의 절에서 발견됨.

 

* 1956년 불국사 경내에서 돌 십자가가 발견됨

 

* 1988년 경북 경산 지인면 일원리에서 어린양 안고 있는 것과 기도하는 석상이 발견됨.

 

* 마테오리치가 1595년에 어떤 서적을 대하게됨. 거기서 당나라에 경교 가 번창함을 알게됨.

 

* 이런 여러가지 종합결과 당대 어떤 영향을 받았음이 틀림없음.

 

2) 몽고를 통해 접촉 징기스칸이 몽고를 세우고 지중해 근처 모슬렘 격퇴 할때 기독교 국가들은 당시 큰 골치거리 였던 모슬렘을 대신 물리쳐 줘서 고맙게 생각함.

몽고는 세계 제국을 제패하는데 모슬렘이 큰 장벽이라는 것을 깨달음.

* 당시 징기스칸은 야만인 - 그래서 서부 교회의 Innocent 4세는 1차로 선교사(카로핀)1246년에 보냄.

 

* Rubruc1253년 콘스탄티 노플을 떠나 몽고 수도 화림에 와서 사둔 탁(징기스칸의 아들)을 만남. 사둔탁이 기독교인인줄 알았으나 아니였다.

 

* 루부룩은 징기스칸에게 개종을 권유하나 거절 당함.

당시 몽고는 우리나라 통해 일본까지 침략할 야욕.

 

* 루부룩이 최초로 한국(Caulei)을 서방에 서신으로 알림.

Coree - Korea

 

3) 일본을 통해 접촉 * 1517년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이 일어나서 루터교가 확장.

* Ignatiu Loyola / Francis Xavier

예수회 :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

Francis Xavier 를 동방의 선교사로 파송함.

그는 인도의 고아 - 필리핀(80%이상이 카톨릭) - 일본으로가 구주에 상륙 1549년에 활공총이 복음과 함께 들어감.(1592년 임진란에 있어 타격적 무기)

* 그러나 일본을 통해 기독교 접촉.

오다노 부나가(일본 지도자) - 종교 관용책.

관용 이유 : 당시 불교가 강했기 때문에 한 종교가 커지면 강대해 지므로 한쪽 약화를 위해 신학교 부지까지 마련해 줌.

(17세기 당시 일본에 30만의 신자가 있었다고 함.)

 

* 도요또미 히데요시 : 오사까 (한국인이 제일 많은곳)에서 예수회 신부들 을 모아 놓고 중국을 침공한 후 예수 믿겠다고 말함.

 

* 1592년 임진연에 전쟁 일으켜 우리나라 쳐들어옴. (20-25만의 군인을 이끌고 쳐 들어옴. 명나라 가는 길을 확보하려는 명목으로.)

 

* 이때 일본의 1군단장(고니까 유찌나가)- 세례명 어거스틴,이 선두로 쳐 들어 왔는데 그가 이끄는 많은 군인이 기독교인이 었다.

이들이 20일 만에 서울에 다다르고 이들이 평양성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명나라 군대가 내려와서 경남 웅천으로 일본군은 퇴각을 해야했다.

 

* 고니찌 유찌나가는 군인중 기독교인이 많으므로 교구장 피터 고메쯔에게 종군 신부를 보내 달라 부탁하니 세스 페데스 신부를 보내줌.

그는 우리나라에 오자 고메쯔에게 2편의 편지를 보냈다.

내용 : 1. 웅천에 도착한 일과 여정내역 2. 고니찌 유찌나가가 반갑게 맞 아주었 다는 내용과 일본 군인이 힘들게 있다는 말을 전함.

* 세스 페데스는 6개월 수 일본으로 돌아옴.

 

* 도꾸가와 이에야그(새통치자 출현함) - 기도교 엄청 박해 이때 많은 순교자를 발생. 일본 신자와 조선인으로 끌려가 믿은자도 순교함.

 

* 이 임진란 때문에 우리나라는 쇄국 정책을 고수함.(특히 일본에 대해)

결론 : 당나라, 몽고,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는 일찍 간접적으로 기독교 접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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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개신교 전래이전 서양종교와의 관계

 

한국이 서양문화와 언제 접촉하였으며 언제 서방에 알려졌는가는 많은 사람들의 지대한 관심사이다. 특히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세계 역사의 큰 흐름에 한국이 등장한 시기에 대한 고찰은 세계사뿐 아니라 오늘의 한국사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알고 바른 역사관을 갖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방 문화와의 접촉은 서양 종교와의 접촉과 결코 뗄 수 없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에 한국기독교회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16세기 후반 유럽 열국이 종교개혁으로 심각한 종교적 갈등을 겪고 있는 동안 성격은 다르지만 한반도는 전에 없는 도전을 만나고 있었다. 1592년에 발생한 임진왜란, 1627년과1653년 표류로 인한 박연과 하멜의 입국, 그리고 1826년 머리 맥스웰 대령과 바실 홀 대력의 서해안 탐사가 바로 그 대표적인 사건들이다. 이들 사건들은 종교사적으로만 아니라 문화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세스페데스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 종국 신부로 내한하고, 일본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들 가운데 상당수의 예수회 신자가 생겨나면서 지극히 세속적인 임진왜란은 단순한 전쟁을 넘어 기독교와의 접촉점을 제공하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박연과 하멜의 입국과 맥스웰과 바실 홀의 서해안 탐사 역시 은둔의 나라 조선이 서양문화, 종교와 접촉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갑작스런 배의 난파로 조선에 입국했다 돌아간 하멜이 출간한 표류기, 서해안 탐사를 위해 입국했다 돌아가 맥스웰과 훌이 출간한 조선 항해기는 은둔의 나라 조선을 서방 세계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것은 비록 공식적인 선교사 입국 이전에 있었던 이와 같은 복음의 접촉은 직접적인 선교의 결실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복음 전래의 길을 예비하는 준비였다. 한반도에 공식적으로 복음이 전래되기 오래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조선에 복음 전파를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동양의 모든 나라와 마찬가지로 조선 역시 서양종교를 본격적으로 접한 것은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천주교를 통해서였다. 일찍이 예수회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오래 전부터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중국에서도 예수회 선교사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그 중의 대표적인 인물이 1601년부터 중국 북경에 선교 거점을 마련하고 활동하며 중국 정부와 민중으로부터 상당한 존경을 받았던 이탈리아 귀족출신 마테오 리치 였다. 1582년 중국에 도착해 1601년 북경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8년 동안 중국 선교에 헌신했던 마테오 리치가 이와 같은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서양 과학에 대한 식견이 풍부한 데다 수학과 천문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 동양문화와 민족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의 문화를 깊이 연구하는 가운데 유교의 경전 시경과 서경에 있는 천제와 천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주와 동질의 개념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후 기독교와 유교는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였다.

 

명나라 정부와 북경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독차지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던 마테오 리치의 작품 다수가 중국에서 출판되었고, 이 중 일부가 중국북경에 파송된 조선국왕의 사절인 부연사를 통해 조선에 입수되었다. 서양 선교사들은 단순히 신앙만 전한 것이 아니라 서양의 과학도 함께 소개했기 때문에 북경주재 신부들로부터 부연사 일행은 천문, 지리, 역법 같은 서양의 새로운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후 세 번이나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지봉유설의 저자 이수광이 처음으로 서양 과학과 천주실의를 조선에 소개하고 1625년 인조 3년에 국왕에게 경제 개혁을 통한 국가 재건을 건의하였다. 그리고 이에 앞서 1575년에는 홍길동전의 저자인 교산 허균이 북경에서 세계지도와 게십이장을 가지고 돌아와 연구하고 실천에 옮긴 적이 있다. 1631년 부연사의 일행으로 명나라에 파송된 사절 중의 “한 사람인 정두원이 과학 서적, 서양의 화포, 천리경, 자명종 등을 비롯한 서양 풍속, 지리, 천문학에 관한 서적들과 함께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가지고 귀국했다.”

 

그 후, 한 세기 동안 서학은 주자학과 쌍벽을 이루는 하나의 학문으로 조선 지식인의 사상계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영조시대에 서학은 전성시대를 맞았다. 특히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학문을 연마하는 남인계 학자들에게 인기가 있었으며, 이들에 의해 서학은 조선에서 전성시대를 구가하게 되었다. 성호 이익과 그의 제자 순암 안정복은 서학을 대변하면서 주자학 주도의 조선 사상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서양사상은 동양의 유교 사상과 근본적으로 배치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또한 종교나 신앙의 대상이라기보다 학문의 대상이었다는 점에서 금기시하지 않았다. 이처럼 서학에 대한 관심은 공리공론만 일삼는 주자학과는 달리 근대지향적인 자의식을 불어넣어 주었고, 그것은 실학운동을 태동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박지원, 홍대용, 홍양호, 박제가, 이덕무로 대표되는 실학자들은 매년 3,4차례씩 파견되는 부연사의 일행에 끼여 북경를 방문하여 천주교 성당을 찾아 서양 신부와 교제하는 기회를 갖고 이들을 통해 서양 과학의 지식을 배우는 한편 천주교 교리에 대한 연구를 100년 이상이나 계속해왔다. 따라서 천주교는 이와 같은 남인계 실학자들을 토해 서학, 천주학, 천학, 양학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의 지식인 사이에 뚜렷한 한 부류의 사상을 지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북경을 통해 전래된 후부터 불란서와의 조약을 통해 종교의 자유를 허락받을 때까지의 조선천주교의 역사를 고찰하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분명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국내의 수용과정에서 조선천주교는 처음부터 종교로서 수용된 것이 아니라 서학이라는 학문의 한 조류로서 수용되어 오다 천주학을 거쳐 천주교로 정착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왜 천주교가 선교사가 한 명도 없는 가운데서도 조선에 소개되고 정착하고 성장할 수 있었는가를 자연스럽게 설명해 준다. 그것은 사회적 영향력이 강했던 조선의 양반계층에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소개되었기 때문에 보호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논리적인 비약이 있는지 모르지만 이것은 초대교회 때 기독교가 유대교의 보호를 받으며 저변 확대되었던 현상과도 유사하다.

 

둘째, 그러다 조선천주교는 천주의 신앙과 제사 제도가 배치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일대 위기를 만나게 되었다는 사리이다. 처음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그 저변 확대에 주도적인 역활을 했던 이들이 배교하고, 지도자의 공백 상태에서 조선천주교는 한편으로는 박해에 대처해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앙의 배도를 극복하여야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도전과 위협 속에서도 신앙적인 이유로 제사를 거부하며, 죽음으로 신앙을 지켰던 이들이 생겨나면서 비로서 조선천주교는 신앙 단체로서의 자리를 굳힐 수 있게 되었다.

 

셋째, 이와 같은 조선천주교의 제사 금지는 토착화 선교 정책을 택했던 예수회의 전통부다는 카톨릭 내 프란스스칸 및 도미니칸 선교회 전통을 따른 것으로, 1936년 5월 25일 신사참배 문제가 제기되면서 일본, 독일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는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은 교황청이 신사참배가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 국가적인 예의이기 때문에 신사에 참배해도 신앙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선언이 나올 때까지 조선천주교는 신사참배와 제사 제도를 수용하지 않는 것을 공식적인 입장으로 하였다.

 

넷째, 황사영이 전형적으로 보여 주듯이 조선천주교는 외세의 개입, 정치적인 압력, 심지어 전쟁을 통해서라도 종교적인 자유를 쟁취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해 정부로부터 반정부단체, 반미족단체라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은 천주교의 태도는 기왕에 갖고 있는 제사 제도 거부로 인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한층 강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초기에 천주교의 박해가 제사 제도 거부라는 순수한 신앙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면, 후기에 접어들면서 야기된 천주교의 박해는 종교적인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에서 발단되었다는 사시이다. 그리피스가 언급한 것처럼 황사영으로 대변되는 “로마 카톨릭의 조선 전도방식의 도덕적 약점”은 조선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닌 아시아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이는 분명히 개신교와 다른 선교 정책이었다. 천주교 선교사들은 조선 천주교인들이 교황의 권위에 순종할 뿐만 아니라 지상의 최고 권위에도 순종하도록 그들을 바르게 가르쳤어야 했다.

 

복음의 전래라는 측면에서 고찰 할 때 확실히 천주교는 개신교와 달랐다. 그것은 임진왜란 때 침략군을 지원하기 위해 입국했던 일본의 예수회 신부 세스페데스가 보여 준 것처럼 선교가 정치적 패권주의의 도구로 이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성격과 정도는 다르지만 이 점에서 조선의 천주교도 어느 정도 비판을 면할 수 없다. 벨로네가 1866년 7우러 13일 불란서 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어떤 귄세도 인정하지 않습니다.”라고 밝힌 것처럼 조선의 파송된 선교사들은 정부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조선 천주교의 패권주의적 선교 정책이 직, 간접적으로 1866년에 발생한 불란서 원정과 연계되었다는 비판을 받는 것이다. 순수복음에서 출발하기보다는 학문으로, 후에 예전과 제도로 출발한 조선 천주교가 정치적인 성향을 띠면서 이들을 보는 정부의 시각이 달라졌고, 그 결과 정부로부터 박해를 피할 수 없었다.

 

조선천주교 전래 과정에서 우리는 조선천주교가 얼마나 복음에 충실했는지를 평해야 할 것이다. 성경 번역은 고사하고 평신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지 않았고, 지나치게 정치적인 활동에 관여했으며, 제도적인 교회 조직을 지나치게 강조했다. 조선천주교 지도자들과 천주교 선교사들은 조선천주교 교세 확장과 세력 확장이라는 면에서는 생명을 아끼지 않았지만 복음을 충실하게 전달하려고 한 면에서는 너무도 미흡했다. 해리 로즈가 지적한 것처럼, “조선 개종자들에게 외국 세례명을 부여한 것, 서구로부터 외국의 간섭을 끌어들인 것, 비밀스럽고 때로는 거짓된 방법으로 선교 활동을 펼친 것, 신자들에게 성경을 배포하지 않은 것”등 초기 조선천주교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박해와 옥에 갇히는 것과 순교도 두려워하지 않는 조선천주교인들이 영웅적인 순교적 신앙에 찬사를 보내야 하지만 순교가 일종의 공로적인 수단으로 전락하고, 또한 그 결과 천주교 선교는 자연히 믿음으로 만의 구원이라는 성경과 개신교의 근본 이라는 물론 교회 복음 본래의 사명과 대 사회적 문화적 책임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때문에 성경적 신앙을 그 모토로 했던 개신교 선교와는 처음부터 차이가 있었다. 비록 당시의 사회적인 제약과 장벽으로 한계가 있었겠지만 조선천주교가 천주교의 순수 신앙을 체계적으로 교육시키고 복음에 충실했다면 조선에서의 천주교 선교는 아마도 달라졌을 것이다.

 

이것은 후에 개신교 선교사들과 지도자들에게 조선개신교 선교의 방향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남겨 주었다. 그것은 기독교가 복음 전파의 사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성향을 배제하면서 복음 본래의 순수성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거이었다. 후에 조선개신교는 정치적인 성향을 처음부터 자제하고 복음 전파, 교육, 의료사역, 그리고 자선사역과 함께 복음 본래의 사명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성경 번역 및 복음 전파라는 직접선교뿐만 아니라 교육 및 의료선교 등 간접 선교를 통한 문화 변혁을 동시에 추구하였다는 의미이다. 그 결과 조선개신교는 천주교와는 달리 성경 번역과 직, 간접 선교의 균형을 통해 왕실의 마음과 민중의 마음을 동시에 사로잡는 가운데 선교를 시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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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회사


제1장 : 근대 이전의 기독교와의 접촉


당나라를 통한 접촉

AD 431에 에배소에서 기독론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있었는데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을 함께 공유하지만 점진적 동화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했다가 에배소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됨.
Netorius 퍼시아 에뎃사 AD635년- 인도와 중국을 전파. 중국에서는 경교라함.
nestorian 당시 중국 황제는 당태종, 당태종: 아라곤의 설교 감명, 파사사라는 교회 세워줌. 중국말로 아브라함. 왕이 관심을 가지므로 크게 번창. 그때 우리나라는 신라시대(삼국통일을 꿈꾸던때) 우리나라는 당나라 힘입어 통일 이루려함.(신라의 김춘추 여러번 방문) 불교의 고승들이 당나라 여러 번 방문.

* 1635 - 중국 서안부(북경)에서 대진 경교 유행 중국비 같은 수도 이 비문에는 중국어와 시리아어로 736자(중국어, 시리아)로 기록되었음.
* 1917년에 대진 경교 유행 중국비의 모조품이 금강산의 절에서 발견됨.
* 1956년 불국사 경내에서 돌 십자가가 발견됨.
쪾 1988년 경북 경산 지인면 일원리에서 어린양 안고 있는 것과 기도하는 석상이 발견됨.
* 마테오리치가 1595년에 어떤 서적을 대하게 됨. 거기서 당나라에 경교가 번창함을 알게됨.
* 이런 여러 가지 종합결과 당대 어떤 영향을 받았음이 틀림없음.


몽고를 통해 접촉

징기스칸이 몽고를 세우고 지중해 근처 모슬렘 격퇴할 때 기독교 국가들은 당시 큰 골치거리였던 모슬렘을 대신 물리쳐 줘서 고맙게 생각함. 몽고는 세계 제국을 제패하는데 모슬렘이 큰 장벽이라는 것을 깨달음.

* 당시 징기스칸은 야만인 - 서부 교회의 Innocent 4세는 1차로 선교사(카로핀)을 1246년에 보냄.

* Rubruc은 1253년 콘스탄티 노플을 떠나 몽고 수도 화림에 와서 사둔 탁(징기스칸의 아들)을 만남. 사둔탁이 기독교인인줄 알았으나 아니였다.

* 루부룩은 징기스칸에게 개종을 권유하나 거절당함. 몽고는 우리 나라 통해 일본까지 침략할 야욕.

* 루부룩이 최초로 한국(Caulei)을 서방에 서신으로 알림. Coree - Korea


일본을 통해 접촉

* 1517년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이 일어나서 루터교가 확장.
* Ignatiu Loyola / Francis Xavier
* 예수회 :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
* Francis Xavier 를 동방의 선교사로 파송함.
* 그는 인도의 고아 - 필리핀(80%이상이 카톨릭) - 일본으로가 구주에 상륙 1549년에 활공총이 복음과 함께 들어감.(1592년 임진란에 있어 타격적 무기)
* 그러나 일본을 통해 기독교 접촉.
* 오다노 부나가(일본 지도자) - 종교 관용책.
* 관용 이유 : 당시 불교가 강했기 때문에 한 종교가 커지면 강대해지므로 한쪽 약화를 위해 신학교 부지까지 마련해 줌. (17세기 당시 일본에 30만의 신자가 있었다고 함.)
* 도요또미 히데요시 : 오사까 (한국인이 제일 많은 곳)에서 예수회 신부들 을 모아 놓고 중국을 침공한 후 예수 믿겠다고 말함.
1592년 임진연에 전쟁 일으켜 우리 나라 쳐들어옴. (20-25만의 군인을 이끌고 쳐 들어옴. 명나라 가는 길을 확보하려는 명목으로.) 이때 일본의 1군단장(고니까 유찌나가)- 세례명 어거스틴이 선두로 쳐 들어 왔는데 그가 이끄는 많은 군인이 기독교인이었다. 이들이 20일 만에 서울에 다다르고 이들이 평양성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명나라 군대가 내려와서 경남 웅천으로 일본군은 퇴각을 해야 했다.

* 고니찌 유찌나가는 군인중 기독교인이 많으므로 교구장 피터 고메쯔에게 종군 신부를 보내 달라 부탁하니 세스 페데스 신부를 보내줌. 그는 우리 나라에 오자 고메쯔에게 2편의 편지를 보냈다.

* 내용 : ①웅천에 도착한 일과 여정내역 ②고니찌 유찌나가가 반갑게 맞아주었다는 내용과 일본 군인이 힘들게 있다는 말을 전함. 세스 페데스는 6개월 후 일본으로 돌아옴.

* 도꾸가와 이에야그 - 기독교 엄청 박해 이때 많은 순교자를 발생. 일본 신자와 조선인으로 끌려가 믿은 자도 순교함. 임진란 때문에 우리 나라는 쇄국 정책을 고수함.

* 결론 : 당나라, 몽고, 일본을 통해 우리 나라는 일찍 간접적으로 기독교 접촉.

 


제2장 : 한국의 protestant church


시대적 상황

반만년 역사를 가졌으나 근래에 들어 종교적으로 심한 허탈감을 느낌.(고려조 : 불교, 조선조 :유교)
그러나 기독교가 전래되기 약간 이전은 종교적 공백기였다. 당시 멕킨지는 당시 서울에는 종교적 행사가 없었다고 보고한다. 1866년 전쟁이 일어나고 1871년 로져스 함대와 전투를 벌이고 운양호를 몰고 온 일본군이 무력시위하여 1876년 한일 강화조약을 맺으며 계속해서 미, 일, 러시아와 수호조약을 맺음으로 당시 조선이 운둔국(세계속에서 알려지지 않은 나라)으로 알려지기 시작함.

* 1884년 갑신 정변을 계기로 해서 망명 생활 후 돌아온 일본 수신사 박영효가 일본 요꼬하마에서 조선 선교사로온 스크렌톤 목사(감리교)를 만남. 박영효는 당시에 우리 나라에 선교사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선교사들이 와서 교육 등 문화적인 필요를 채워달라고 부탁함. 우리 재래 종교는 한물 갔다고 말함. 1886년 한블 수호 조약에서 조약문 속에는 교회라는 말이 들어갔다. (이단어 하나 때문에 미국 선교사들이 전도할 때 쉬웠다.)


유럽 christian들의 도래

* 벨트브레와 하멜 일행이 오게됨. 1627년 네델란드 사람 벨트브레 일행 3사람이 동해안에 상륙함으로 시작. 이들은 동양에서 무역하고자 네델란드에서 일본으로 가다가 파선하여 경주 앞 바다에 표류. 이들은 물을 얻기 위해 표류했다가 억류되게 되고 살아가던 도중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 났을 때 같이 상륙한 2사람은 참전했다가 전사했고 벨트브레만 남았는데 전공이 인정되어 한부대를 이끄는 지휘관이다. 벨트브레가 표류한지 이십 몇 년이 지나 1653년에 하멜 일행이 본국을 떠나 일본으로 오다가 또 표류해 제주도로 오게 되었다. 일행 64명중 36명만이 살아 남았고 제주도에서 14년간 억류되어 살다가 15명이 탈출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하멜의 기사에서 보면 그들이 프로테스탄트였음을 알 수 있다.


바실홀과 멕스웰의 내한

1816년 영국 정부가 중국에 파송하는 William이라는 군함이 있었는데 Amhert 사절단이 있었다. 함장은 Maxwell, Bashall 사절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중국에 도착하여 암 홀스트 사절을 내려놓고 본국에서는 한국 서해안을 탐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같은 해에 한국 해안에 와서 해도를 작성했다.
이들이 마량진 앞 갈곳에 들렸을 때 문정의 임무를 띤 첨사(조대복)가 가서 물어 볼 때 이 조대복에게 성경을 줌.(King James Version) - 최초로 한국에 전달된 성경. 바실홀은 돌아가서 책을 씀.


선교 개척자들의 한국인 접근

(1) 칼 큐츠라프(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독일의 할례대학에서 졸업. 화란 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일하기 시작함. 자바 수마트라(인도네시아)중심으로 중국인 상대로 선교함. 자바 수마트라에서 - 마카오로 선교지 옮김 - 네델란드 선교회를 떠나 프리렌쓰 미션네리로서 활동함. 1832년에 선교의 방향을 한국의 서해안으로 돌려 7월 17일에 황해도 - 백령도 - 원산도에 도착. 홍주 목사 이민회를 통해 왕에게 성경과 서적 보냄. 홍주 목사 서생 양씨의 도움을 얻어 최초로 성경번역(주기도문)


(2) 토마스 목사(정식적으로 안수 받아 오신 목사)의 내한
큐츠라프 목사가 아산만에 온지 33년만에 온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는 스코틀랜드 사람 토마스이다(런던 선교회에서 1863년 중국 상해 선교사로 파송되어 왔는데 1865년 중국 지프로 옮겼다. 이때 한국 선교를 자청했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가 한국을 간다는 소리를 듣고 통역관으로 자청. 관군이 화공을 맞고 대동강에서 죽음) 이때 배가 타던 때 한문 성경을 강 언덕에 던졌는데 관군 중 하나가 한 권을 가지고 있는데 조카가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이영태) 나중 이늘서 박사가 성경번역시 도와주었다. 토마스 목사를 배에서 끌어내 한강 근처에서 목을 쳐 죽임. 목을 친 사람은 박춘곤인데 나중에 회개하여 1899년 세례받아 평양 초대 교인이 됨. 그후 평양은 한국 개신교의 예루살렘이라 일컬어짐.

(3) 로쓰와 멕킨타이어의 고려문 전도(런던 선교회 소속)
중국 만주의 우장과 봉천(심양)에는 한국 교회 설립에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특별히 우장은 최초의 한인 수세자를 배출한 곳이다. 봉천은 최초의 한국 성서가 번역된 곳. 로쓰와 멕킨타이어는 처남 매부지간(중국 우장을 거점으로 한국 선교 연구함) 마침 조선의 의주 청년 4사람이, 한약 약장사를 위장하여 중국을 방문했다. 의주에서 강 건너 50킬로미터 떨어진 고려문에 갔는데 마침 1873년 봄 로쓰 목사가 중국인 서기를 대동하고 고려문 방문. 여기서 의주 청년들을 만남. 로쓰는 그들에게 후한 급료를 주는 대신 한국언어와 역사를 가르쳐 달라고 함.

 


제3장 : 한국 기독교인의 발생과 집회


백홍준과 서상륜의 수세와 전도 활동

우장으로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 4명이 따라감. 로쓰목사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고 목사님은 이들에게 보수와 문물을 줌. 처음에는 4명이 잘 안받아 들였다. 왜냐하면 그때 서학은 국법으로 사학이라 하여 핍박했기 때문이다. 로쓰목사는 1874년에 한영회화라는 책을 만들었고 1875년에는 예수 성교 문답을 만들고 1879년에는 한국지 그 역사, 생활, 습관이라는 책을 씀. 만난지 3년째 1876년에 이들 4청년이 수세를 받음(우장에서)-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세례자
이들이 세례 받은 후 로쓰와 4청년은 한국 성서 번역에 착수해서 1882년 봄에 요한, 누가복음을 번역 1883년에는 마태, 마가복음을 번역했다. 이때 의주청년 서상륜이 찾아옴. 서상륜은 일찍이 조실부모하고 친척을 따라 홍삼 장사하러 중국을 따라오가다 콜레라에 걸렸는데 맥킨타이어가 그를 살게해 줌. 그래서 이후에 성경번역을 로쓰와 4명과 함께 귀한 역할을 함. 그때 공관복음서를 번역 출판했는데 국내에 배포하기 힘든 상태였다. 서상륜이 이것을 짊어지고 여기저기 배포함. 이때 3000권 찍어낸 것을 로쓰역이라 한다. 이것이 관과에 알려져 위험해지자 서경조(서상륜삼춘)과 둘이서 황해도 송천으로 위험을 옮김. 여기서 송천 솔래 교회를 개척함(1884년- 조선 최초의 개신 교회) 1884년 또 다시 성경을 만들었는데 로쓰목사가 쪽복음 6천부를 제물포(인천)로 보냄(최초의 밀수품)
조선은 당시 독일사람인 멜렌 도르프라는 사람을 현재 관세청장이라는 자리를 줘서 이 사람으로 하여금 관세 업무를 맡게 함.(조선은 너무 외교를 못했기 때문) 이때 멜렌 도르프가 서상륜을 불렀다.(왜냐하면 제물포에 성경 6천권이 와 있어서) 로쓰는 백홍준과 이성하에게 편지를 써서 멜렌 도르프에게 잘봐 달라고 부탁. 폐지/노끈 성경 (성경을 안 들키기 위해 폐지처럼 하기 위해 제본 안하고 놔두고, 제본안하고 노끈처럼 꽈서 나둔 것)

일본을 통한 전도

이수정의 개종과 성서 번역 - 이수정은 한국에서 임오군란(군인들의 월급안에 모래석은 사건)후 일본에 사절단으로 파견 되는데 박영효, 이수정이 사절단으로 일본으로 가게 됨. 이수정은 현판이라는 자리에 있었는데 가서 안 돌아 오게 됨. 일본 동경 대학의 조선과 교수로 눌러 앉음. 쓰다 목사님을 만나게 되는데 그 집에 가서 마태복음 산상설교 벽화를 보고 감명 받고 영접함. 쓰다는 이수정을 야스까와 목사에게 소개한다. 1883년 4월에 마침내 야스까와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음.
일본 성서 공회 루미스 목사가 이 소식에 기뻐함. 이수정을 만나 도움을 받아 성서 번역을 시작해서 1883년 - 4복음서와 행전 번역이 나왔고 1885년 마가복음이 출간되었다.(이수정판) 일본의 감리교, 장로교 선교사들이 본국에다가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 달라고 부탁.
1885년 4월에 그래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오게 되는데(그들은 제물포 도착당시 이수정판 성경을 갖고 있었다) 오기 전에 일본에서 조선 성경을 보고 기뻐했다.

*참조 : 우리 나라가 장로교는 미국, 세계보다 더 크다.

 

제4장 : 한국 프로 테스탄트 형성과 부흥


개국과 미국 선교사들의 내한

중국에 의료 선교하던 알렌 박사가 1884년 9월 20일에 의료 선교사로 자청해서 우리나라에 옴. 같은해 1884년 10월 4일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 갑신정변 :우리 나라 최초의 우체국을 세워놓고 낙성식을 하는데 내노라 하는 우리 나라 인물들이 참석했는데 수구파와 개화당이 있었는데 개화당 사람 이 민영익을 칼로 찔렀음. 개화당이 3일 동안 천하를 이루다가 다시 흩어짐. 이때 알렌이 민영익을 고침. 이것 때문에 알렌의 인기는 치솟음. 알렌은 그래서 궁중 시의가 되어 모든 왕족, 고관을 치료함. 민영익은 알렌에게 고맙다는 표시로 10만냥을 사례함. 이 돈으로 알렌은 왕립 광혜원을 설립. 이 병원의 설립 2주 후 고종황제가 제중원이라는 이름을 줌.

* 제중원 - 나중 세브란스 병원으로 개명. 당시 의대가 파리 날렸는데 백정인 白哥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아들이 콜레라에 걸려 죽게 되었는데 세브란스 의사들이 살려 주었다. 의사들이 그 아들을 세브란스 의사로 만듬. 1885년 4월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선교사로 오는데 문을 열어주는 도움을 주게 되는 배경은 알렌이 병원으로 정부에 호의를 준 영향이 크다.

* 교육(멜렌 도르프) : 영어 강습소 생김. 우리 나라 조정에서 외교관, 통역관 양성 목적.

* 한국정부 : 미국 정부에게 현대 교육자를 보내 달라고 요청. 헐버트 1884년에 육영공원(영재를 교육하는 공적인 학원)- 최초의 미국식 학교인데 주로 정부의 고위 관리들이 다님. 후에 나라에서 이런 학원을 닫게하자 선교사들이 교육에 직접뜀.


선교 활동과 조직 교회의 출현

1885년 4월 5일(부활절). 알렌의 뒤를 이어 호레스 언더우드와 아펜 젤러가 우리 나라에 도착함.(그때는 당장 전도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1887년에 언더우드가 솔래 교회에 가서 7명의 신도에게 세례를 베품. 1887년 9 월 27일에 언드우드가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림.(14명과 같이)- 이 교회가 세문안 교회의 전신이다.

1887년 10월 9일에 아펜젤러는 또 언더우드처럼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렸다(정동 제일교회의 전신이다.) 1887년 아펜젤러는 정동 자택에서 교회만 아니라 학교를 세움(2명으로 시작)- 1주년이 되는 때에 고종황제께서 배재학당(인재를 배출하는)이라는 이름을 줌.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들어온 후 들어온 선교사) 스크렌턴(감리교 의료 선교사)의 어머니 미세스 스크렌턴이 자기 사랑방에서 정부 고관 부인 2사람을 데리고 학교 시작- 이화여대 전신(1885)
1886년에 고종 황비의 아내 민비가 이름을 줬는데 이화학당이라 했다. 이런 학교들에는 학생이 별로 없었는데 그 이유는 선교사들에 대한 오해가 많았다.
당시 선교사들은 모유보다 우유를 먹이는 등 자기들도 먹고(악성 우유통 루머 번짐) 광이문(서소문)밖에 콜레라 환자들을 버렸는데 스크렌턴의 모친이 그 중 1명의 소녀를 데리고 와서 아들이 고쳐서 이 학교 3회 졸업 소녀가 된다.
1886년 정동의 언더우드 사랑방에서 고아원 스타일의 학교를 시작했는데 1891년에 와서 예수교 학교로 바뀌고 1905년에 경신 중·고등학교로 바뀜. 나중에 정신 여자 중·고등학교로 바뀜. 북한에는 숭실 전문학교, 숭의 전문 학교, 광성 중고등학교. 1892년에는 미구 남 장로교에서 파송한 레이놀즈와 6명의 선교사가 입국해 전라도 쪽에서 선교활동을 했는데 “예수병원”을 설립했다.
1893년 카나다 연합교회에서 와서 함경도 선교함. 동년 동양 선교회가 들어와 성결교회를 시작. 동년은 영국 구세군이 들어와 선교 시작. 1903년에서 1905년 사이에 하와이로 이민가는 사람이 늘었다.(당시 7300명 정도였는데 이 중 윤은현, 손흥조가 일본에 들렸다가 안식교 전도사를 만나서 돌아와 한국에서 안식교가 시작된다.)


성서와 성례전

한국의 프로테스탄트 - 성서와 관련하여 출발했다고 얘기할 수 있다. 1885년 4월에 인천에 처음 도착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손에는 이미 한국어로 번역된 성서가 있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성서 공부에 관한 열정이 대단하였다. 한 선교사가 말하길 “이세상의 모든 성서가 불타 없어져도 한국인 5명만 모이면 성서를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란

* 루터 :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성례전이 올바르게 집행되어야 존재 가능하다고 힘.
* 칼빈 : 기독교 강요에서 제4부에 보면 루터와 마찬가지로 말씀과 성례전의 중요성을 얘기함.


선교지역의 분할과 선교 정책

한국에는 많은 선교회가 조직됨. 많은 교단에서 선교지 분할 정책을 쓰게 됨.
남장로교는 전라도와 충청도 선교. 이 외에 이미 선교가 시작된 곳은 북장로교가 맡음. 부산(경상도)은 호주 장로교, 함경도는 캐나다 장로교가 맡음. 1905년 을사보호 조약 체결. 장로교와 감리교 간에도 지역 조정이 있었다. 연변 중심의 지역은 북감리교, 평북 지역은 북장로교. 1908년 남감리교는 강원 북부 3분의 2와 경기도 서울 이북을 장로교로부터 모두 떠맡게 됨. 북장로교는 강원 남부 3분의 1, 서울 동부, 서울의 남감리교 지역을 다 떠 맡음.

* 선교 정책을 보면 -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신학 사상은 보수적, 경건주의자들 이었다.
이때 선교사들은 중국에 주재하던 선교사 John Nevius를 초청하여(1890년)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선교사업을 위한 원칙을 세웠다.

* 삼자(三自)정책
1)Self-propagation 자력전도 : 스스로 전도하게 한다.
2)Self-goverment 자치제도 : 스스로가 교회를 관리, 운영하게 한다. 자치제도 마련.
3)Self-suport 자치자립 : 자급목회를 하게 한다.


1907년대 부흥운동

1882년 임오군란(직업군의 군량미 부정 사건), 1884년 갑신정변(개혁파와 수구파간의 구테타)
1895년 청·일 전쟁. 1905년 러·일 전쟁
이러한 일로 해서 우리 나라 사람들은 소망이 없었고 의지할 것도 없었다. 정치, 경제, 도덕, 정신적으로 절망 가운데 빠짐. 그래서 평양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1895년 서울에 주재하던 선교사가 “한국의 실정을 변해가며 일반 백성들 사이에 각성의 기미가 보인다”고 보고함. 1895년 당시 우리 나라 기독교 인구가 530명 1896년에는 3276명, 1900년대 와서는 7690명으로 늘어났다.

* 교회성장 요인들 - 당시 황실 고위층과 선교사들 간에 친밀한 관계였다. 1895년 일본 자객에 의해서 민비가 살해되자 위협을 느낀 고종황제는 피신을 하였는데 그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하였지만 선교사들의 말만은 믿었다. 한국에는 미국인들이 250명이 있었는데 그 중 절반 정도가 선교사였다. 선교사들은 선교 사역 뿐 아니라 조선 독립운동에도 힘썼다. 그래서 일본인들에게는 선교사들이 눈에 가시였다.
당시 배제학당의 교사였던 이승만을 비롯, 서재필, 윤치호를 중심으로 해서 배제학당 안에 소위 ‘협성회’를 조직해서 애국운동을 벌였다. 이 협성회가 우리나라 최초의 청년 운동의 시발이었다. 그러나 좀더 체계적인 것은 1893년 10월 ‘황성 기독교 청년회’가 조직됨.(오늘날의 Y.M.C.A가 됨) 서울 종로 2가에 ‘황성 기독교 청년회’는 3층 양옥을 건립하고 황태자(순종)가 여기에 참석해 낙성식을 치뤘다. 황제를 비롯해 이또오 히로부미와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기부금을 내었다. 이 청년회는 종교의 차원을 넘어 체육, 공업 교육에도 영향을 끼쳤다. 1896년에 서재필은 독립 신문을 발간한다. 그는 그 신문을 통해 대중계몽에 성공을 하고 ‘독립협회’를 조직한다. 그리고 중국 사신이 오면 환영하던 모화관을 없애고 그곳에 독립문을 세워 독립사상을 고취시킨다.
또한 서재필, 윤치호, 홍정우 등은 주일마다 집회를 열어 자유사상과 민주주의를 고취시킴. 우국열사들이 정부의 부정부패를 공격하자 저들은 심한 불쾌감을 갖고 마침내 1898년 12월 독립협회를 해산시켰다. 선교사들은 감옥을 방문해 그들에게 전도를 해서 1901년 3월에 17명중에 12사람이 함께 세례를 받는다. 선교사들은 계속해서 문서 전도와 문예 활동을 통해 우리나라 사람들의 개화 운동에 힘쓰게 되는데 1899년 언더우드와 뜻있는 사람들이 ‘성교서회’를 건립(후에 기독교 서회로 바뀜)하여 正音(한글)으로 문서를 발행한다. 1903년에는 이 기독교서회를 통한 출판부수가 25만부나 되었다. 마침내 1907년 우리 나라에서 부흥회가 일어났다.
이 부흥회가 일어나기 전 1903년에 원산에서 감리교 선교사인 하디가 기도하던 중 영감을 받았다고 그 체험을 동료선교사들에게 간증을 했는데 이것이 평양선교사들에게도 퍼져 그 이후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가 함께 모여 합동 집회를 연다. 그래서 이들은 마침내 1907년 1월 6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집회를 연다. 이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은혜를 사모한다.
블레오 선교사가 고전 12:27의 말씀을 읽자 불이 붙어서 길선주 장로의 간증을 통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남. 이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양상을 바꿔 놓았다. 인격적, 소박한, 공동체적신앙으로 바뀌어 졌다. 1900년대 영국 웨일즈 지방의 탄광. 무기력함과 무희망적인 삶을 살던 광부들.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짐. 180도 달라지는 그들의 삶이 일이 미국을 통해 우리 나라에 들어와 1907년 부흥운동을 갖게 함.


교회 행정 기구의 설정

1907년 9월 평양에서 장로교 독노회 창설. 이때 평양 신학교에서 배출된 7인의 목사가 안수를 받는다. (서경조, 이기풍, 길선주, 한석진, 송인서, 방기창, 한승백) 1907년~1910년 사이에 한국 교회는 일본, 중국, 만주, 시베리아, 미국 등에 선교사를 파송한다. 그 후 100명 구령운동이 일어남.
감리교는 1901년 김창식과 김기방이 안수를 받는다. 감리교는 처음부터 남·북 감리교 선교사들에 의해서 선교가 시작되었는데 이들이 독자적인 노선을 걷다가 1907년에 합동해서 하나의 조선 감리교를 세우고 목회자 양성을 위해서 신학교를 세움. ‘협성 신학교’ 그 후에 와서 1930년대에 기독교 조선 감리회라 이름을 바꿈.

 

제5장 : 일제 치하에서의 교회


십자가를 걸머진 교회

우리 나라는 민족운동이나 독립운동은 교회의 움직임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기독교의 교리 유일신 사상과 또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귀하게 여겼다. 이러한 사상 때문에 일제는 기독교를 다른 종교보다 더 탄압했다. 그 당시 교회는 일본 침략에 항거하는 강력한 조직체가 되었고 이를 눈치챈 일제는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음모를 꾸밈.
쪾 기독교 말살 정책 - 1910년 12월 27일 일본의 데라우찌 총독이 압록강 철교를 놓고 그 준공식에 참석하러 갔다. 그 곳에 가던 기차는 선천역에 한 번 정지하게 된다. 이때 기독교 지도자들이 데라우찌를 암살한 음모를 꾸몄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려 많은 지도자들을 체포하였다. 그 당시 인구 2000만명 중 크리스챤이 18만명이 넘었다. 700명을 체포하고 그 가운데서 105인을 유죄 판결을 내렸다. 105인은 여러차례 감형으로 형기를 마치고 나오게 된다. 105인중 94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이것이 105인 사건이다. 저들이 평양역에 도착했을 때 9000명이 나와서 그들을 환영했다.


3.1운동을 통한 교회의 애국 운동.

1918년 파리에서 세계 평화 회의가 열렸을 때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 자결 주의’를 내세웠다.
이것으로 인해 우리 민족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왜 우리가 일제의 압력 하에 살아야 하는가?’ 라는 회의를 품게됨. 그후 1년이 지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33인중 16명이 크리스챤이었다.

대부분 기독교인이 앞장섰고 이 운동은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기독교 정신에 의해 진행되었다. 일본의 헌병과 경찰들은 기독교인들을 투옥시키고, 체포, 교회를 파괴시킴.
이 운동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4월 15일 12시경 수원 부근 제암리 교회에 일본헌병이 몰려와 교민들을 모이게 하고 창문에 못을 박고 교회 주변에 불을 지르고 나오려는 사람들은 칼로 찌르고 죽였다. 많은 교회가 이와 같은 일을 당함. 1919년 일본 보고에 의하면 파괴된 교회가 17개, 일부 파괴된 교회는 24개, 그 외에 교회에 큰 손해를 본 곳이 41개, 교회 재산 피해가 3만불이 었다.

장로교 보고에 의해 체포된 목사, 장로수가 134명 교인수가 3천 8백 4명, 사살된 신도수가 47명, 감리교 기타 다른 교회의 신도들을 합친수는 타종교의 신도 숫자를 합친 숫자보다 많았다. 이 일을 통해 교회는 많은 피해를 봤지만 또한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돌아오게 되었다.
선교사의 관여도
일제는 독립운동 배후에 선교사들이 관여하고, 조종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선교사들은 조선 독립운동의 열렬한 후원자였다. 평양 숭실학교에 모우리 모펫이라는 교수가 있었는데 일제가 그를 잡아갔다. 피신하는 학생들을 은둔시켜 준 죄였다. 호주에서 온 선교사들도 독립운동 시위에 동향을 미국 선교회에 보고하고 총독과 일제의 잔악상을 세계에 알렸다.

 

제6장 : 한국 교회의 수난사


신사참배의 강요와 박해

쪾 신사참배는 일본천왕과 전쟁 영웅들에 대한 경배이다.
쪾 1930년 만주사변 1936년 중국 본토 침략 전쟁 : 일본은 전쟁을 일으키고 ‘내선 일체’ 즉 일본과 조선이 하나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신사참배라고 생각하였다. 평양부터 점령해서 신사참배 시작 1935년 11월 평안남도 일본 지사 야스다께는 도내에 있는 각종학교장 회의를 소집하고 모든 학교는 신사참배를 해야 한다고 명령함. 이 회의에 참석했던 숭실전문학교 교장 Mccune은 한국인 목사, 장로를 소집하고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고 단호한 결의를 하게된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야스다께는 Muccne를 면직시키고 미국으로 추방시킴. 그 후에도 일제는 대대적인 신사참배를 강요함. 미션 스쿨에 대해 많은 간섭을 하고 교단 총회 소집도 경찰의 허락 없이는 소집 할 수 없었고 예배도 일본 국회에서 일본 종교 단체법이 통과하게 된다.

* 신사란 : 종교의 범위를 초월한 것.

* 신도란 : 절대의 도로써 모든 일본 국민은 반드시 신사 참배를 해야하는 것. 이에 순종치 않는 자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내용도 포함함.

* 감리교 : 지도자의 대부분이 신사 참배가 국가적 의식이라는 것에 동의함. 감리교 존속 가능케 함.

* 장로교 :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1938년 9월 9일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장로교 27회 총회에서 여기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에게 압력을 가해 신사참배를 합법화하게 함. 주기철, 이기선 등은 신사참배 반대. 일본 경찰은 총재를 만나 회유책을 쓰고 예배당 분위기는 일본 경찰이 안팎으로 감시하는 살벌한 분위기였다.
193명이 이 총회에 참석했는데 결론은 신사 참배를 하는 것으로 끝남. 그 후에도 일제는 계속 교활한 방법을 씀. 평양신학교 패쇄, 2천여 신도 투옥, 50여 명의 성직자 순교. 각 교단이 일제에 굴복한 다음 한국 교회 전체는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하는 양태를 보여줌.
전체 교회의 88%가 교회에다 일장기를 게양하는 탑을 세우고 일본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교회는 96%였고 동방 요배 실시 교회는 96%, 황국 시민 재창을 93%가 했고 예장은 애국 헌납 기성회를 조직해 그 기성회 이름으로 성금을 모아 일본 육군 비행기를 사주고, 총을 사주었으며, 교회의 종 1540개를 바쳤다.


일제의 단말마적 교회 탄압

1895년 청, 일 전쟁, 1905년 러,일 전쟁, 1930년 만주사변, 1936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 전쟁
일본은 여러차례 승리로 기세 등등해짐. 우리 나라는 지리적으로 ‘샌드위치’였기 때문에 많은 피해를 봄. 이러한 때 일제는 신사참배 강요, 저항하면 투옥. 구약의 모세 5경과 요한계시록을 그들의 국시사상에 어긋남을 알고 읽지도, 가르치지도 못하게 함.

사도신조 중에 ‘저리로써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를 뺌. 찬송가도 거슬리는 것 모두 빼버리고 예배 중에도 천왕에게 목례하고, 일장기를 달고, 목사에게 일본 군복을 입도록 함. 1943년에는 주일 오후 예배와 삼일 예배를 막음.
침례교는 재림사상이 강한데 1942년 전국 모든 침례교를 폐쇄시킴. 성결교도 마찬가지로 재림 사상 때문에 1943에 문을 닫게 함. 그래서 모두 뿔뿔히 흩어지고 다른 교단으로 옮김. 많은 성결교 침례교 성직자들이 체포, 구금됨. 일제는 그들의 욕구 충족을 위해 탄압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교회 분열의 징조

1930년대부터 분열의 징조가 생김.
쪾 징조는 지방적 요소와 신학적 요소
쪾 장로교 : 평양을 중심으로 관서지방이 장로교가 많았다. 이곳은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이었다.

1911년 연희전문학교 보조문제로 총회를 열었는데 평양 중심의 교회들은 이 학교가 남쪽 지방에 있다는 이유로 보조를 반대했다. 1934년에 와서는 북쪽에서 남쪽의 총재들에게 진보 또는 근대주의자들이라고 비난 이에 맞서 남쪽은 북쪽교회에게 교회 전제주의자들이라고 혹평하였다.

그 당시 미국과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은 신학의 깊이와 넓이가 달랐다. 이들은 너무나도 근본적인 한국신학에 대해 비판을 하기 시작. 그래서 평양 신학교는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을 싫어함. 평양신학교는 같은 교단의 사람이라도 유학생은 별과에 들어가 공부를 시킨 후 목사로 만들었다.

* 감리교 : 1930대에 제 1차 총회를 소집하고 여기서 채택한 것이 “기독교의 근본원리가 시대를 따라 다른 형식으로 표명되었고, 우리 교회의 회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교리적 체험을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의 중요한 요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그를 따르는 다짐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입회 조건은 신학적이기보다는 도덕적이요 신령적인 면을 강조한다.” 이러한 것을 볼 때 감리교는 좀 더 자유주의적이고 개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평양신학교의 당시 교장이었던 박형용 박사와 그리고 숭인 상업학교의 김재준 박사는 그 당시 신학논쟁의 거두들이었다. 박형용은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극 보수적인 신학교수의 영향을 받아 성서 무오설과 축자 영감설의 교육을 받았다. 김재준은 같은 곳에서 공부하였는데 박씨와는 달리 자유주의적이었다. 그는 한국교회 신학의 부재에 대해 비판하였다. 이 논쟁이 계속되다가 1934년과 1935년 장로교 총회의 문제로 대두함.

* 김영주 : 모세 5경 저작설 부인

* 김춘배 : 여권운동에 대한 자유주의적 해석을 함.(박씨는 이를 징계에 처함이 옳다고 했다) 1935년 Abingdon 주석이 나왔을 때 감리교의 류형기 감독이 그것을 편집, 번역하였다. 이 일을 채필근, 한경직, 송창근이 같이 했는데 이 책이 아주 자유주의적이어서 번역한 자들에게 공개사과를 요구하고 Abingdon주석을 교인들로 하여금 사지도 보지도 못하게 함. 점점 신학적으로 개방적이 되어갔다.


교회내의 난기류

1920년대부터 지적인 변화, 경제적 빈곤, 일제의 탄압심화등으로 목회자 양성이 쉽지 않았다.
그 당시 소설가 이광수 왈 “ 기독교는 이성을 경멸, 종교외의 과학, 모든 다른 사상을 경시하는 풍조를 낳아서 현세를 무시하고 죽어서 천당만 가려고 든다”라고 혹평. 그 때 사회는 소망이 없었으므로 목사들은 재림, 즉 이 세상 보다는 저 세상을 바라는 설교를 했다.
이러한 때 신비주의자들 등장 - 소망을 심어줌.

* 이용도 목사 : 협성신학교 졸업. 감리교 목사. 교파 초월 부흥사역. 각 교회를 돌아다니며 민족의 고난에 울었고 교회 형식주의를 비판. 전형적인 경건주의자의 모델. 진리는 말에 있지 않고 삶에 있다고 함. 종교는 설교가 아니라 곧 삶이다. 믿음보다 사랑에 진리가 있다. 요한 복음서를 제일로 생각. 그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표방했고 심지어는 사탄, 불경, 사회주의 책에도 진리가 있을 수 있다고 강조. 신학과 기독교 교리를 공격함으로서 신비주의 공통의 오류에 빠짐. 그의 절대적인 사랑은 나무랄 데가 없지만 사랑의 융합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혈관적 연관을 잇는다고 믿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 여김.
이때 한국교회는 이용도 목사에게 금종령을 내렸고 평양 장로교에서는 그를 부흥사로 초청하지 못하도록 함. 그리고 그가 속해있던 감리교는 1933년 그에게 휴직 처분함. 얼마후 결핵으로 사망.

* 길선주 목사 : 계시록 1만 2백번을 독파. 신구약 성서를 30독. 절망과 고통 가운데 헤매는 사람들에게 주예수의 강림에 대해 말하고 설교의 주제는 항상‘마라나타’였다. 그에 의해 세례 받은 자는 3천명 또한 그의 설교를 듣고 기독교로 돌아온 자가 7만을 헤아렸다.

 


제 7장 : 한국 교회 재건과 분열


민족 분열과 교회의 분열

공산당에 대항해 투쟁하던 목사들 순교. 6.25때 여순 반란사건시 두 아들을 잃은 손양원 목사, 김익두, 남궁혁, 송창근 목사, 그리고 많은 신학자들과 지도자들이 납북됨.
6.25를 거치면서 파괴되고 손실된 교회 수가 장로교 152개, 감리교 84개, 성결교 27개 구세군이 4개 교회였고 순교자도 많았다. 6.25때 서울은 북괴에 동조하는 교인들이 몇 있었다. 경동교회에 출석하는 김욱이라는 자는 기독교 민주 동맹을 Y.M.C.A 건물에 걸고 김일성이 서울에 왔을 때 환영식을 함. 6.25가 나기 전 기독교 사상범으로 투옥되었던 최근식 목사는 교도소에서 나와 목사들을 고발해 북괴군에 의해 끌려가도록 했다.
1950년 4월 경남 부산을 중심으로 해서 장로교에서 교회 재건 운동이 있었다. 6.25가 터져서 모든 지방이 공산화가 되었을 때 교회 지도자들이 모두 부산으로 모임. 1951년 5월 당시에 정기 총회를 소집했으나, 이 때 출옥성도들과 일제 때 영창에 들어가지 않았던 사람들간에 의견 대립이 생김.
비고려파와 고려파 간에 싸움이 일어나고 결국 비고려파가 장로교에서 갈라져 나감. 싸움이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같은해 7월 서로 무서운 공격을 하기 시작했고 고려파는 그 당시 국회의원 22명의 명의로 비고려파를 용공단체라고 비난함. 1953년 기장과 예장이 갈라짐. 조선신학교의 김재준목사의 신학이 신신학이라고 해서 그 문제를 총회에 제출했고 신학생 51명이 학교를 나가 장신대를 세움. 1953년 정기 총회에서 조선신학교를 나온 사람은 목사 안수를 예장에서 받을 수 없다고 해서 갈라짐. 1958년에 같은 예장에서 통합, 합동으로 나뉘게 됨. 학교 부지 관계 때문에, 부정이 있었음을 들고 일어나서 박형용 박사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자들로 각각 나뉘게 되었다. 그 후 합동에서 분열이 이어져 많은 교단이 생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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