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 도전과 응전의 시대
한국교회협의회의 조직과 변천을 살펴보려면 1912년 한국개신교 복음주의연합공의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출발할 때에는 장감의 신앙은 어느 정도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연합할 수 있었던 것은 한반도에 개신교 전체를 대변하는 연합운동의 협의체 구성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또 선교의 목적이 같았던 블레어와 하디 선교사의 제의가 채택되었고 캐나다 장로교선교회의 윌리엄 스캇이 적극적인 추진으로 교회협의회(FCC)가 결성되었던 것이다. 이 협의회가 공헌 한 것은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를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복음운동에 한국의 각 교단의 교회들과 협력하는 일에 앞장섰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일본에 있는 40만의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일본연합공의회, 입본의 캐나다장로교회와 협력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1927년을 기점으로 북장로교선교회는 한국교회연합을 통한 장감의 연합운동에 깊은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고 결국 탈퇴하기로 결정하여 연합체는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렇게 하면서 한국의 교회는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어 나가기 시작한다. 1930년대에는 그동안 한국교회를 주도하는 중심세력이었던 장로교와 감리교에 이어서 성결교가 한국교회의 중심세력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이는 복음주의에 입각한 회개 운동과 부흥운동에 혼연일체가 되어 부흥운동에 전력투구하였기 때문이다. 성결교회의 복음전파 방식은 그들이 소중하게 간직하는 중생과 성결의 체험 교리인 그리스도의 보혈로 원죄의 씻음과 신유와 부활과 재림과 영생을 전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들이 중점을 둔 것은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은 놀라운 부흥운동을 경험한 한국교회 교인들에게 어렵지 않게 수용될 수 있는 가르침이었기 때문에 더욱 호소력이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내주하심과 죄에서의 자유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강조하는 성결교회의 가르침은 대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역동적인 신앙의 체험을 강조하는 이들에게 적지 않은 도전을 주었다.
이 시대 한국교회가 만나 또 하나의 움직임은 신학적 변천이다. 한국교회는 1930년에 접어들어 이단, 신흥종교, 자유주의, 신비주의 부흥운동, 그리고 무교회주의의 등장으로 그 동안 견지해 왔던 신학적 통일성이 깨지고 다양한 신학사상들이 발흥하기 시작했다. 1934년 한국 북장로교 선교 희년을 맞으면서 블레어가 신학적 변천에 깊은 우려를 표명했던 것처럼 수많은 이단들이 등장, 이 시대의 기독교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상적 변천은 리더십의 전환과 별도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상호 깊은 연계성을 지니고 진행되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 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장로교의 남궁혁, 백낙준, 박형룡, 이서휘, 송창근, 채필근, 김재준, 윤인구, 김치선과 감리교의 전영택, 임영빈, 변홍규, 정경옥, 류형기, 그리고 갈홍기는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1955년, 전성천 박사는 “한국개신교의 분열과 일치”라는 예일대학의 박사학위논문에서 한국에는 언더우드, 알렌, 헤론, 앨러스 등 4명의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있었으며, 이 4명의 선교사들 주에서 전통적인 장로교 신학에 동의했던 사람들은 언더우드 한 사람밖에 없었다고 했다. 언더우드 외에 다른 사람들은 신학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들이 북장로교 내의 주류 곧 구학파의 전통, 성경의 무오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들의 4명의 선교사들 가운데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은 선교사는 언더우드 밖에 없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의사나 간호사였기 때문에 좀 더 개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신학교육을 받은 이들이기는 하지만 다수의 개척 선교사들이 그 같은 입장을 가졌다는 것은 선교 초기 신학적 분위기를 꼭 보수적인 것 많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1889년 마포삼열을 비롯한 보수적인 맥코믹 출신 북장로교선교사들과 1892년 이눌서를 비롯한 남부의 보수주의를 대변하는 남장로교 출신 선교사들이 국내에 대거 입국하면서 1890년대에 접어들면서 전반적인 장로교 선교회의 신학적 성향은 보수적인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자유주의는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였고 한국교회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자유주의 도전이 주는 가장 큰 교훈은 1930년대 들어 지금까지 정통신학의 토대 위에 확고하게 서 있던 한국교회에 진보적인 신학이 하나의 세력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진보적인 세력은 얼마 후 신사참배문제로 평양신학교가 폐교되자 조선신학교 설립을 통해 한국교회에 깊숙이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까지 한 목소리를 내던 장로교와 감리교의 신학적 통일성이 서서히 깨어지고 다양한 신학이 역사에 부상하기 시작했다. 정경옥의 자유주의, 김재준의 진보주의, 박형룡의 정통주의,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그리고 이용도의 신비주의가 그것이다.
감리교 신학자 정경옥이 한국교회에 자유주의를 정착시킨 주인공라면 김재준은 한국교회에 진보주의를 정착시킨 인물이었다. 김양선의 말을 빌린다면 “그는 파괴적인 성경비판을 감행하는 극단의 자유주의 신학자”는 아니었으나 성경의 축자적 영감과 성경의 완전무오를 거부하고 그 같은 사상과 “대결하여 싸우려는 철저한 자유주의 신학자”였다. 그는 정경옥의 자유주의와 박형룡의 정통주의 사이에 진보주의라는 중도적 입장을 개척하는데 성공했다.
박형룡 박사는 신학적인 색깔뿐만 아니라 삶의 스타일이나 사고방식에 있어서 김재준 목사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김재준 목사가 개방적이었다면 박형룡 박사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절제하고 철저하게 칼빈주의 입장에서 정통주의를 변호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김재준에게 정통주의가 갖고 있는 문제점은 바로 신학을 사변적이고 객관적인 굴레 속에 가두어 두고 삶 속에 구체적으로 연계시키지 않는 데 있었다. 반면에 박형룡에게 진보주의는 성경의 권위를 파괴하고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성경과 기독교의 전통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결국 기독교 유일성마저 흔들어 놓는다는 점이었다.
1930년대 박형룡은 정통주의 대변자로 주로 교단 장로교회에서 만인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화려한 학력, 탁월한 근면성, 한국에서의 선교사 1세대와의 두터운 교분, 그리고 무엇보다도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강력한 의지는 그를 일약 한국교회 정통의 대변자로 부상시키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귀국 후 한국교회 안에 일고 있던 정경오류로 대변되는 자유주의 신학과 김재준으로 대변되는 진보주의 신학, 김교신의 무교회주의와 이용도의 신비주의 부흥운동의 발흥은 기왕에 한국교회에 바른 신앙과 바른 신학을 구축하는 일에 자신의 생애를 바치기로 다짐했던 박형룡의 신학적 방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신학 논쟁과 교회의 응전이 1930년부터 1935년까지 한국교회를 특징짓는 중요한 사건이었다면, 1935년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 한국교회를 특징짓는 사건은 신사참배 논쟁이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앞에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하느냐 반대하느냐라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처했다. 호주장로교선교회가 보고한 것처럼“신사참배문제는 한국의 교회가 직면하였던 가장 중대한 문제였다.”
신사참배는 1911년의 105인 사건이나 1919년의 3.1운동 탄압보다도 더 크고 직접적으로 기독교 신앙에 위협을 가했던 문제이다. 그것은 105인 사건이나 3·1운동으로 인한 탄압이 민족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일제의 탄압이었다면, 신사참배 강요는 “신앙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신앙 양심을 유린당하는 본격적인 종교박해였고, 교회 전체가 당한 대 박해였고, 전 민족이 당한 일대 수난”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신사참배 문제는 “세속권력을 절대화하고 인간을 신격화하는 일제의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것으로 저이, 종교, 교육, 문화 등 여러 부분에 걸친 복합적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 순응 또는 타협함으로 신앙의 본질을 왜곡하느냐 아니면 끝까지 신상참배의 강요에 맞서 신앙을 지키느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한국교회의 신사참배 문제는 신앙의 본질과 그 해석, 더 나아가 그 적용과 실천에 관한 문제와 깊숙이 연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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