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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교단과 교파에 관한 이해
 

 

 기독교에는 많은 교단(denomination) 혹은 교파가 있습니다.
성결교, 감리교, 장로교, 구세군, 성공회, 루터교, 하나님의성회, 침례교 등이 그것입니다. 이들은 비록 서로 다른 교단들이지만 원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면에서 하나이며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며, 복음(신학에서는 케리그마 라고 합니다: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수난, 죽음, 부활, 재림)을 믿으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 등에서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교단들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예배의 형식이나, 성만찬에 대한 견해, 정치체제, 신조, 신학적 바탕 등에서 조금씩 다른 것이지요.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런 차이점은 마치 한 부모의 자식들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 생김새는 달라도 부모의 혈통을 이어 받은 자식임은 불변하듯이 말입니다.

  그럼 이제 이들의 차이점을 간략히 살펴 볼까요.

 

   1) 성결교회 :

 

성결교회는 성결교회 홈페이지인 본 싸이트의 외쪽 상단에 링크된 [헌법][역사]를 보시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편의상 몇가지만 언급하면 성결교회의 신학적 바탕은 요한 웨슬레이며, 정치제도는 초기에는 감리교처럼 감독제를 가지다가 후에 대의제도를 선택했습니다. 대의제도는 쉽게 말해 장로의회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결교회가 강조하는 것은 사중복음(중생(거듭남),성결,신유,재림)이며 성결교회의 시작은 일본 동경성서학원에서 공부한 정빈,김상준이란 분이 1907년에 한국으로 건너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데서 부터입니다. 일제시대에 재림사상 때문에 교단이 폐쇄되었다가 해방 후 재건 되었는데 이 폐쇄 기간 때문에 선교의 어려움이 있어 교회 성장에 어려움이 컸습니다. 다른 교단과는 달리 해방 후 다시 시작된 후발주자로서 오늘날 손꼽히는 유수의 교단이 된것 은 실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교단신학교는 부천에 있는 서울신학대학교입니다.  한국의 성결교회는 크게 본교단인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와 예수교대한성결교회가 있는데 이 둘은 한 뿌리이며 신학적 바탕 등 거의 모든 면에서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예성의 학교는 안양에 있는 성결대학교입니다. 기성과 예성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에 대한 입장차이로 분열된 후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기타 성결교회로는 나사렛성결회(아산,나사렛신학대학)가 있습니다.
  성결교회는 신학적으로 감리교와 같이 웨슬레안입니다.
  신학적인 입장을 정리하면 1)복음적 신-인 협동설을 따르는데 이는 하나님의 선행은총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중시한 것입니다. 2) 장로교의 예정론과 달리 모든 인류를 위한 구속의 은총 3) 구원의 순서(대략, 선행은총-의인-성화-영화)에 따른 강조  4)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기대하시는 하나님 이해 등이 특징입니다.

  웨슬레의 성만찬 이해 :  상징설(감리교와 성결교, 구세군 등이 이에 따릅니다.)


  (1)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의 표적과 인증
  웨슬레는 성례전을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의 표적(sign)과 인증(seal)으로 보았습니다. 이 점에서 웨슬레는 성례전을 주로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서 고백하는 믿음이나 행위의 표적으로 보려는 쯔빙글리의 "기념설"의 입장과 대조적입니다. 그래서 성만찬은 내적인 은혜의 외적인 표현인 동시에 은혜로 용서받은 인증으로서 성도에게 확신을 주고 그를 견고케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WorksⅦ, 148 ; SermonsⅠ, 242)
  이 성만찬은 주님의 십자가를 지시던 그 전날 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이 찢겨지고 피를 흘려야 하는 대속의 죽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시며 주신 교훈에서 유래된 것으로 주님께서 당하신 대속의 죽음의 의미를 성만찬은 그의 표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2) 현재은혜(present grace)의 표적과 인증
  웨슬레는 성만찬은 주님의 대속의 죽음을 나타내는 표적이면서 또 우리는 주님의 성육신과 고난이 의미하는 모든 은혜를 이 성만찬에서 기대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Letters Ⅰ, 118)]
  웨슬레는 유월절과 성만찬은 깊은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애급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표적으로서의 어린 양의 살이 이제는 그리스도이신 어린양 예수의 피와 살을 통해서 구원의 표적과 인증이 된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죽음과 희생의 표적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오늘 "여기에서 지금" 우리에게 은혜를 주며 이를 확증케 하는 인증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웨슬레의 입장은 단순히 기념설을 말하는 쯔빙글리나, 한편 성만찬을 통하여 기계적으로 은혜를 받는다(ex opere operato)고 말하는 로마 카톨릭의 견해와 다릅니다.
  웨슬레에 의하면 성만찬은 현재은혜를 전달하는 수단입니다. 따라서 웨슬레에게 있어서 성만찬은 "회심케 하는 은혜", "성결케 하는 은혜"를 전달하는 수단입니다. 다른 말로 바꿔서, 성만찬에서의 떡과 잔은 구원에 관한 전체적인 은혜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 보느느 것입니다.

 

  (3) 천국의 보증과 인증
  웨슬레는 더 나아가 성만찬을 천국의 보증(a pledge of heaven)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웨슬레는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강조하면서, 동시에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잔치를 미리 맛보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즉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과의 잔치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성만찬은 "마라나타" 곧 주님의 임재를 경험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웨슬레는 성만찬을 중요한 은혜의 수단으로 보았습니다.웨슬레에 의하면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의 표적이며,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음에 근거한 모든 은혜를 현재 여기에서 전달하는 은혜의 수단입니다. 이렇게 해서 웨슬레는 성만찬이 단순한 "기념"이라는 해석을 반대합니다. 따라서 합당한 수찬자가 믿음으로 받을 때 그는 자기의 필요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4) 성도의 교제의 인증
- 설명 생략 -
  정치 제도: 총회-지역총회-지방회-개 교회

 

   2) 감리교회http://kmc.sbr.net/  :

 

감리교회는 18세기 중반 영국에서 요한 웨슬레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올더스게잇이란 곳에서 회심을 체험하고 옥스포드 대학에서 동생과 몇몇의 동지들과 함께 Holy Club을 결성하였습니다. 이들은 영국국교회(성공회) 내에서의 교회 혁신 운동을 해 나갔으나 국교회의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 후 1740년 남26, 여48명이 론논 파운드리에서 모여 메도디스트 협회를 조직하였고 1784년 미국에 보낼 성직자 안수문제로 국교회와 결별하였습니다.
  감리교회는 1884년에 교육과 의료사업을 통해 한국에 선교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교리적, 신학적 특징은 위의 성결교회 부분(사중복음 강조를 제외)을 참고하십시오.
   감리교도 몇개의 교파가 있는데 기독교 대한 감리회(감리교신학대학), 예수교 대한 감리회, 기독교대한 자유감리교회 등이 있는데 이들의 신학적입장은 같습니다.
   감리교회는 감독제도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계급의식이 강한 측면이 있어 상명하복의 관계가 개신교 안에서는 짙은 편입니다.
    정치제도 : 감독회장-연회감독-감리사-목사

 

   3) 장로교회 :

 

현재 한국의 대표적인 장로교회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측 http://www.yejang.or.kr/, 개혁측 http://www.reformed.or.kr, 통합측 http://www.pck.or.kr/, 고신측 http://kpm.org/, 대신측, 고려 http://www.coramdeo.net, 재건 http://www.jaegun.or.kr/  등 이 대표적인 교파로 조사에 의하면 약 270여개의 파로 나눠져 있다합니다.)와 한국 기독교 장로회(기장 http://knp.or.kr/)가 있습니다.
    이들의 출발과 차이점 등은 99.11.19일자 국민일보 25면을 보시면 아주 상세히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글 후반부에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들의 신학적 바탕은 16세기 제네바의 개혁자 죤 칼빈에게서 시작됩니다. 이들은 또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이란 것을 교단의 신조로 받아들입니다. 장로교회는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예정론을 주장하며 정치적으로는 의회정치를 채택합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교회들에게 있는 장로제도는 여기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칼빈의 성만찬에 대한 견해는 : 영적임재설
   기념설을 주장한 쯔빙글리와 같이 그는 그리스도의 어떠한 육체적인 임재도 거부하면서도 믿음으로 실제적인 임재를, 비록 영적이긴 하지만 받는다고 분명하게 주장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의 영혼에 생명을 불어넣으실 뿐 아니라 비록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몸은 우리들에게 들어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퍼뜨리시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성찬은 실질적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하는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에 계시고, 장소적으로 제한을 받으신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의 몸이 성물 가운데 육신적이고 실제적인 방법으로 임재하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성찬에서 육신적 임재가 꼭 필요한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께서는 신실한 자들을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실 수가 있다고 믿습니다. 이는 성령이 제한적 존재가 아니시므로,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들을 한데 결합시키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실한 자들은 성령의 중재를 통하여 주님의 살과 피에 참여하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생명은 소생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We must beware of being led into a kindred error by the terms, somewhat too extravagant, which ancient Christian writers have employed in extolling the dignity of the sacraments. We must not suppose that there is some latent virtue inherent in the sacraments, by which they, in themselves confer the gifts of the Holy Spirit upon us, in the same way in which wine is drunk out of a cup, since the only office divinely assigned them is to attest and ratify the benevolence of the Lord towards us; and they avail no farther than accompanied by the Holy Spirit to open our minds and hearts, and make us capable of receiving this
testimony, in which various distinguished graces are clearly manifested. For the sacraments, as we lately observed, (chap. 13 sec. 6; and 14 sec. 6, 7,) are to us what messengers of good news are to men, or earnests in ratifying pactions. They do not of themselves bestow any grace, but they announce and manifest it, and, like earnests and badges, give a ratification of the gifts which the Divine liberality has bestowed upon us.]
   정치제도 : 총회-노회-교회
   이들의 학교는 총신대학교(합동), 총회신학교(개혁), 장로회신학대학(통합), 고려신학대학(고신) 안양대학교(대신) 고려신학교(고려) 한신대학교(기장)등이 있습니다. 이들 대다수 교단의 분열 또한 신학적 차이보다는 정치적인 면 때문입니다. 물론 합동측은 ncc에 가입하지 않고 통합측은 ncc에 가입했다든지, 기독교장로회는 다른 교파보다 진보적이라든지 하는 차이들이 있습니다.

 

    4) 침례교회http://kcm.co.kr/kbfmb/  :

 

침례교는 카톨릭 다음으로 미국에서 가장 큰 교파입니다.  침례교회가 하나의 교회로 설립된 것은 1608년입니다. 암스텔담으로 쫓겨온 영국 분리교도들이 본래 영국교회의 목사였던 죤 스미스의 지휘아래 설립하였습니다. 침례교의 특징은 침례(온 몸을 물에 잠그는 세례)를 유일한 세례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침례교회는 장로제도가 없습니다. 교회의 직분은 목사, 안수집사, 교사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침례교회는  독립적, 자율적인 면을 중요시 하여 총회나, 연회 등을 두지 않고 '친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침례교는 특별한 신조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몇가지 특징은 1) 개교회의 독립성 인정 2) 교회와 국가의 오나전 분리 3) 유아세례 반대 등입니다.
   침례교는 한국에서 일제시대에 동아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선교되다가 일제에 의해 교단이 폐쇄되었다가 해방후 재건되었습니다.

   5) 루터교회http://www.lck.or.kr : 16세기 종교개혁 당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카톨릭에 반대하여 마틴 루터의 신앙적, 신학적 입장을 따르는 사람들이 루터의 대소교리 문담(1529),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1530), 슈말칼트 신앙개조(1580), 콘코드의 신조(1580)를 신조로 삼았습니다. 루터교는 이들 신조들 외에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아타나시안 신조를 고백합니다.
    교리적 특징은 1) 이신득의 강조 2) 성찬은 은혜의 방도가 된다(공재설(Consubstantiation):성찬 참여자는 떡과 포도주 안에서(in), 떡과 포도주와 함께(with), 떡과 포도주 아래서(under)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피에 참여한다. 떡과 포도주의 물질요소 자체는 불변한 채 있지만, 성별의 기도를 마친 후에 여기에 참여하는 행위는 그리스도를 성찬 참여자에게 상징적으로 전한다.) 3) 세례에 의한 중생:세례는 성령께서 주시는 중생의 은사를 받게 하는 것 4)유아세례는 정당하며 합당하다 5) 그리스도의 신성은 인성에 부여된 것 6) 하나님의 은총에서 타락할 수 있지만 구원은 만민에게 보편적
    한국에서 루터 교회는 문서선교를 통해 확산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수학하고 들어온 지원상 목사를 중심으로 컨콜디아사를 통해 문서선교를 하고 방송(루터란 아워)을 통해 선교했습니다.  한국에서의 루터교회는 그리 큰 교단은 아니지만 베델성서교육을 통해 한국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학교는 용인에있는 루터신학대학입니다.
   오늘날 독일과 북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는 루터교를 국교로 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는 회중주의이며, 행정과 결의에 있어서는 대의정치를 추구합니다.

 

   6) 성공회http://anck.peacenet.or.kr/kindex.htm

   성공회는 아시다시피 영국에서 축발했습니다. 이 교회는 앵글리칸 처치, 성공회, 에피스코팔처치, 등으로도 불리웁니다.  1536년 로마감독의 교권을 폐지하고 1570년 교황 피오 5세가 영국왕 엘리자벳을 파문함으로써 로마교회와 완전히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교회는 신앙적 이유보다는 정치적 이유때문에 발생하였고 교회의 신학은 개혁파에 가깝지만 교회 및 예배의식 은 카톨릭에 가깝습니다. 조직은 주교, 신부, 부제라고 일컷는 종신직 신품이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영국 왕이 교회의 정점이고  국회가 교회법을 제정합니다. 그렇지만 켄터베리 대교구, 요크 대교구, 웨일스 대교구 로 나눠져 있으며 한국 성공회는 켄터베리 대교구에 속해 있습니다.
    영국교회의 교리의 표준은 39신앙개조와 기도문입니다.
    한국에 성공회가 전래 된 것은 1890년 코프감독에 의해서였습니다.
    학교는 역곡과 서울 사이에 있는 성공회대학입니다.
 

   7) 구세군http://soback.kornet21.net/~sally/


   구세군은 1858년 감리교 목사였던 윌리엄 뿌드에 의해 창설되었습니다. 구세군(salvation army)이란 명칭은 1878.5에 정식으로 명명되었고 1880년 처음 사관학교를 세웠습니다. 구세군의 특징은 사회봉사에 있습니다. 구세군의 정치는 개인의 자유와 기회균등의 인정하에 군대 조직을 차용합니다. 세계의 모든 구세군은 한 대장 아래 통솔을 받습니다. 구세군에서는 목사는 사관 평신도는 병사라고 지칭합니다.
  구세군이 한국에 들어온 것은 1908년 10.8 평동에서 영국인 호가드 정령에 의해 옥외집회를 한데서 출발합니다. 구세군의 사회사업은 선교의 가장 중요한 방법이며 남녀평등을 중요시 여겨 사관학교는 반드시 부부가 함께 입교토록하고 있습니다.

   8) 순복음, 하나님의교회(성회)http://www.ag.or.kr 등의 오순절 계열 : 이 계열의 교회들은 성령운동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이들을 오순절파 라고 부르기도합니다. 신학적 바탕은 뚜렷하게 어느 것이다 라고 할 수 없지만 대략 웨슬레안에 가깝다고 느껴집니다. 한국의 오순절 계통의 교회는 오중복음과 삼박자 축복이란 것을 중시합니다.  학교는 순신대학교(순복음), 한영신학대학 등이 있습니다.
 

   몇개의 참고서적을 소개합니다.

   세계 기독교회사 - 대한기독교서회
   한국 기독교회사 - 대한기독교출판사
   종파의 유래 - 대한기독교서회
   한국교회교단형성사 1,2 - (주) 임마누엘
   청교도신앙 - 생명의 말씀사
   청교도정신 - 기독교문서선교회
   한국성결교회사 - 기성출판부
   기독교대한 성결교회 헌법
   웨스트 민스터 소요리문답해설 - 한국복음문서연구회출판부. 1974
   한국감리교회사 - 기감 교육국
   감리교의 유래 - 생명의말씀사
   교리와 장정 - 기독교대한감리회
   죤 웨슬리의 신학 - 전망사
   요한 웨슬레의 신학 - 대한 기독교출판사  etc.

 


부록 : 99.11.19일자 국민일보 25면(믿음의 유산 - 분열과 극복, 이승한) :장로교회들의 배경과 분열원인 등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1885년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온지 1백14년,우리나라는 기독교 복음에 의해 엄청난 발전과 변화를 가져왔다.신교육으로 가치관과 인성이 변화됐으며 유교신분사회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설 수 있었다.유능한 인재들이 교회를 통해 배출되고,그들은 유학을 통해 대한민국의 수립과 발전에 공헌했다.

 교회는 또한 독재정권에 항거해 민주사회를 건설하는데 크게 기여했다.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신사참배와 독재정권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으나 교회는 그래도 사회의 소외계층과 억압된 자의 대변자 노릇을 했으며,정의의 칼날을 세워 공동체의 평화와 평등에 이바지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한몸인 교회가 분열됨으로써 교파주의와 이기주의,물신주의,성공주의,성장제일주의 등 세속화의 부정적인 길을 열어 놓은 것은 뼈아픈 상처로 남아 있다.분열의 아픔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90년대 들어와 급속히 확산됐으나 아직은 결실이 미미하며 21세기 한국교회가 반드시 극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로 남게됐다.
 ◆분열=해방이후 한국교회는 일제의 억압으로 무너진 교회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크게 네 갈래의 입장으로 갈라진다.하나는 교회의 정통이 일제의 강요에 따라 신사참배나 일본 기독교조선교단으로 편입됨으로써 패멸되었다고 보고 그 이전의 순수 정통성을 회복한다는 운동이다.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옥에 갇혔던 인사들이 해방후 출옥,교회재건에 나선다.바로 재건파교회이다.이들은 극우파로 기존교회를 거부하고 46년부터 별도의 교회를 설립하기 시작했으며 북한에서는 김린희전도사(선천),남한에서는 최덕지전도사가 중심인물이었다.재건교회는 곡간등에서 예배를 드렸다고 해 곡간교회라고도 불렸으며 평신도들이 많이 참여해 주상수 강상은 염애나 등이 평신도의 대표적인 인믈로 부상했다.
  다른 하나는 기성교회의 질서와 체제를 유지하면서 교회를 재건하려는 움직임이었다.당시 80%의 교회들이 바로 이 운동에 참여한다.또 다른 하나는 일제의 강요에 의해서지만 하나로 통합되었던 한국교회를 교파로 분열시키지 말고 그대로 지속하자는 운동이었다.그러나 일제하의 교회에 대한 윤리적 신앙적 자책과 회개의 심도가 있느냐는 비판이 일면서 감리교가 회의에서 퇴장하면서 무산됐다.

   마지막으로는 기성교회에 들어가 회개를 촉구하고 개혁을 해보자고 했던 중도우파의 운동이다.이 가운데 혁신복구파로는 이기선목사가 북한에서 활동했고 남한에서는 한상동 송양원 주남선목사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남한 인사들은 고려신학교를 만들어 경남노회를 통해 회개를  촉구했다.

   이처럼 네 갈래로 대립되었던 한국교회의 입장은 결국 교단의 분열로 나타나기 시작했다.기성교회의 질서에 들어가 회개를 촉구했던 장로교의 혁신복구파들은 수에서 밀려 추방당하는 형태로 1948년 장로교단에서 분열됐다.이들이 현재 예장고신과 예장고려교단이다.

   1940년 조선사람들에 의한 신학교육을 표방하며 승동교회에서 시작된 조선신학교는 1948년 김재준의 성서해석학 등 신학논쟁으로 갈등을 겪다가 1954년 대한예수교  장로회 대구총회에서 김재준 송창근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정죄를 당함으로 교단에서 탈퇴했다.이들은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의 김재준을 중심으로 교단을 창립했다.이 교단이 현재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이다.
  신사참배의 회개를 촉구하던 인사들을 축출하고 자유주의 신학을 지지자들을 쫓아낸 장로교단은
 1959년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 등 에큐메니컬 노선의 차이로 폭력이 난무하는 가운데 대전중앙교회에서 치러진 44회 총회에서 갈라선다.WCC가입을 지지했던 인사들은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구성했다.이 총회가 장로회신학대 출신의 인사로 구성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이다.WCC가입을 반대하고 복음동지회(NAE)운동에 찬성하는 인사들은 승동교회에서 총회를 구성했다.이 총회가 총신대학교 출신으로 구성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이다.

 50년대 세계 냉전체제의 구도속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는 공산주의의 종주국 러시아정교회가 가입되어 있는 WCC의 가입을 둘러싼 의견차이로 분열되어 결국 한반도의 분단과 함께 냉전체제의 피해자로 전락했다.

 신학적 차이로,또한 이념적 차이에 따라 3개교단으로 분열됐던 장로교는 1979년 교권과 지역갈등으로 예장합동교단에서 정규오목사를 중심으로 한 호남권 인사들이 탈퇴,개혁교단을 설립하면서 핵분열을 일으켜 한국교회 분열의 깊은 상처를 남기고 만다.

 교단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은 80년대 후반에 들어와 활발해지면서 한국장로교협의회가 결성됐으며 이는 한국장로교총연합회로 개칭되어 장로교의 일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또 13개교단의 목회자로 구성된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98년 결성됐으며,평신도들도 한국장로회총연합회를 만들어 교회 일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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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1884 - 1900)

 

1884년 들어서 한국선교를 위한 미국에서의 준비는 가속화 되었다. 감리교는 아편젤러와 스크렌톤을 한국 선교사로 내정하였고, 장로교는 언더우드를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고 중국에서 활동하던 알렌을을 한국 선교사로 전임시켰다. 그리하여 1884년 9월 20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 소속 호레이스 알렌이 가장 먼저 한국에 입국하였고, 이어 1885년 4월 5일 북장로교 선교회 언더우드와 미 감리교 선교회 아편젤러가, 5월 1일에는 미 감리교 선교회 스크랜톤이, 그리고 6월 21일에는 북장로교 선교회 헤론이 입국하여 북장로교 선교회와 미 감리교 선교회가 가장 먼저 한국선교를 개시했다.

 

그 후 ·1889년에 호주 장로교가, 1890년 성공회가, 1892년에는 남장로교가 1896년에는 남감리교와 침례교의 전신 동아 기독교가, 그리고 1898년에는 캐나다 장로교, 러시아 정교회, 플리머스 형제단이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1904년에는 안식교가, 1907년에는 성결교의 전신 동양선교회가, 그리고 그 이듬해 1908년에는 구세군이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이리하여 한국은 알렌이 입국하던 1884년부터 구세군이 한국선교를 개시하던 1908년까지 짧은 기간 동안 개신교을 대표하는 장,감,성을 비롯한 수많은 개신교 교단들이 한국선교를 동시에 착수하는 특별한 나라가 되었다.

 

1884년에 입국한 알렌이 첫 개신교 선교사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면 그 이듬해 입국한 언더우드는 감리교의 아펜젤러와 더불어 개신교를 대표할 수 있는 선교사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해리로즈가 표현한 것처럼, 언더우드는 “한국선교의 아버지이자 많은 개별 선교사들을 한국에 오개 한 지도자 ”였으며, 스피어 박사가 그를 가리켜 언급한 것처럼 “매번 그가 미국에 올 때 선교의 횃불을 드높이 불태웠고,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참을성 있는, 불굴의 사람이었다.” 그는 실로 한국선교를 위해 하나님이 특별히 예비하신 시대를 앞서 간 선각자 한국의 근대선교의 아버지였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아편젤러, 한국을 시찰하기 위해 입국한 일본 장로교 선교회의 스쿠터박사, 테일러 박사와 나란히 전선에 입국한 언더우드 선교사는 처음 얼마간은 알렌의 노력으로 개원된 제중원에서 화학을 가르치면서 한국선교를 조용히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하나님이 보내 주신 위대한 선교사였다. 한국선교 반세기를 정리하는 1934년, 희년기념식에서 사무엘 마펫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 “한국선교 초기 언더우드는 모든 면에서 끈기 있는 지도자였다.

 

1884년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 알렌이 입국하고 그 이금해 같은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미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입국한 후 세계 각국의 선교사들이 은둔의 나라 조선에 속속 입국했다. 언더우드가 입국한 얼마 후 1885년 6월 의하 헤론부처가 입국했고, 1887년 7월 4일에는 후에 벙커의 아내가 된 앨러스가 입국해 한국에 이북구한 북장로교 선교사는 7명으로 늘어났다. 1887년 앨러스가 입국할 때, 뉴욕 유니온 신학교 출신 세 사람, 헐버트, 벙커, 그리고 길모어도 입국했는데 이들은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미국 정부가 파송한 선교사들로 후에 한국선교에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개혁파 복음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맥코믹신학교, 프린스톤신학교, 리치몬드 유니온신학교, 토론토대학, 그리고 호주의 신학교 출신 장로교 선교사들은 물론이고 드루신학교를 비롯해 웨슬리안 복음주의 전통에서 카우만이나 길보른 모두 성경의 권위를 철저하게 확신하면서도 복음의 열정에 투철한 복음주의자들었다. 이들은 19세기 “복음주의 전통”속에서 교육을 받았고, 당시 영미를 지배했던 복음주의 이상을 공유했으며, 그리고 그런 방향에서 한국선교를 이끌었다. 1905년 복음주의 연합공의회를 조직 이들이 교파를 초월해 한국개신교 복음주의 연대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라고 할 수 있다.

 

선교사들의 선교 정책은 한국인에게 개인 구원의 영역을 넘어 사회, 문화전반에 영향을 미쳐 복음을 통한 문화 변혁의 한 모델을 보여 주었다. 매켄지가 한국의 독립운동에서 한국에서 선교사들은 “기독교 개척자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문명의 개척자들이었다.”고 말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일본은 한국 내의 개화파들을 자신들의 세력 확장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려고 하였고, 중국은 한국내의 보수주의자들을 지원하면서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하려고 했다. 오랫동안 은둔의 나라로 알려진 한국을 자신들의 소유로 삼으려는 열국에 의해 한반도는 전에 없이 동요되기 시작했다. 한반도가 강대국들 사이의 전략적인 위치에 있다는 것과 한반도가 스스로를 방어하기에는 너무도 작다는 것은 불행이었다. 그러므로 한국은 더 강력한 이웃 국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침략을 당했고 강대국의 국제적인 권력 투쟁에서 힘없이 볼모가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한국을 둘러싼 열국의 한국 쟁탈전은 19세기 중엽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고, 반강제적으로 체결된 강화도 조약은 그와 같은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이 열국에 의해 침략을 당하기 시작한 출발이었다. 제임스 게일이 전환기의 한국에서 언급한 대로 한국은 개항과 더불어 정치, 경제적으로 전환기를 맞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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