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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예배설교 - 대접을 받고자 한다면

 

 


제목 : 대접을 받고자 한다면...

말씀 : 마7:12

1.기독교의 황금율

오늘 말씀은 기독교의 황금율이라고 일컬어지는 너무나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말씀을 황금율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3세기의 로마 황제 알렉산더 세베루스라는 사람이 이 말씀에 감동을 받고 황금판에 새겨 서재에 걸어 놓고 늘 음미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사람은 예수님을 잘 믿어서 이 말씀을 황금판에 새겨 서재에 걸어 놓고 이 말씀을 묵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교도 곧 우상숭배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 말씀을 너무나 귀하게 여겨 황금판에 새겨서 걸어놓고 늘 묵상하며 대중 앞에서 연설할 때나 재판을 할 때 이 말씀을 종종 인용하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상숭배자가 이 말씀을 황금율로 여겼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해야 할까요? 안 그렇습니까? 물론 주님의 말씀이 다 황금보다 귀한 말씀이지만 이 말씀도 얼마나 지당하고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이 말씀대로 서로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아끼고 존중하며 서로 귀하게 대접하며 살아간다면 우리 모두의 삶이 얼마나 서로 귀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삶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이 말씀이 곧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이 말씀이 선지자가 말씀하고 율법에 기록된 말씀의 근간이요, 핵심이라는 말씀이지요. 이것도 당연하지요.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아래로 사람들 간에 서로 사랑하며 귀하게 대접하면서 그래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까 이게 말씀이 곧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22:37-40절에서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여러분, 이 말씀도 사실 같은 말씀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나 대접하는 것이나 같은 말씀이죠, 사랑하면 대접하고, 진실로 대접하면 사랑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이 말씀도 서로 대접하라는 말씀과 같이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물론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은 물론 이웃을 대접하는 것, 이것이 곧 율법이요,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두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안다며 위로 하나님은 물론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귀히 여기고 존중하고 섬기고 대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왜 그래야 합니까?

2.우리 모두가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남을 사랑하고 대접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우리가 함께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전에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무조건 이유없이 해야 되지요. 안 그래요? 우주만물의 주권자시오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명령인데 이유고 뭐고 따질 일이 뭐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아니라면 아닌 줄 알고 무조건 순종해야지요.

그러나 물론 주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셨을 때 왜 이유가 없겠습니까? 물론 많은 이유를 말할 수 있겠지만 우선은 서로 사랑하고 대접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 모두가 함께 생명의 기쁨과 사랑과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삶이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여러분, 이 말씀 제일 앞에 보면 ‘그러므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즉 앞에서 무슨 내용을 이야기하고 그런 이유로 어떻게어떻게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학생이다. 그러므로 공부해야한다. 나는 성도이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와 같이 앞에 있는 내용이 이유가 되어 뒤에 있는 행동을 꼭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그러므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하셨으니까 남을 대접해야 할 이유가 그 앞에 나와 있는 거예요. 그게 뭡니까? 앞의 말씀 1~11절 전체 말씀인데 특별히 2절과 11절에 잘 나타나 있는데 먼저 2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즉 네가 남을 비판하면 너도 비판을 받게 될 것이니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네가 남을 대접하지 않으면 남도 너를 대접하지 않을 것이니 네가 대접을 받고 싶다면 네가 먼저 남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대접이란 먹을 것을 사주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며 인격적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도 사랑받고 존중받고 귀히 여김받고 인격적인 대접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내가 남을 무시하는데 상대방이 나를 존중하겠습니까? 내가 욕하는데 상대방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오겠습니까? 내가 상대방을 미워하는데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겠습니까? 내가 남을 비방하고 깎아 내리는데 누가 나를 높여 주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높여주면 그 사람도 나를 그렇게 대해주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함께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려면 서로 대접하되 내가 먼저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11절에 보면 우리가 서로 대접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같이 보겠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으로 줄줄 안다면 선한 나는 너희에게 얼마나 좋은 것을 주겠느냐? 그리고 실제로 나는 너희를 사랑하고 귀히 여겨서 너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었다. 너희가 먹고 입고 잠자며 활동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거저 주었고, 나아가 독생자까지 주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귀하게 대접해 준 것처럼 너희도 서로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너무나 귀한 대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너무나 많은 것을 거저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비롯해서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삶의 터전을 삶고 있는 땅, 세상에 빛을 주고 따뜻하게 하여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게 하는 태양, 물, 공기, 각종 동물이며 식물들, 지혜와 능력과 이성, 게다가 하나님의 아들로 대접해주셔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까지 주셨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뭐 잘나고 똑똑하고 선하고 의롭고 거룩해서가 아니라 그냥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아들 대접을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아무 공로없이 귀한 대접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이웃을 귀하게 여기고 높여주고 대접해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올바른 인간이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한편으로는 서로 대접하는 것이 결국 우리 모두가 함께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는 길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그리고 오직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과분한 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정말 사랑하고 아끼고 귀히 여기며 서로 대접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서로가 서로에게 생명의 기쁨을 주며 주님의 영광 나타내는 복되고 아름다운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누구를 어떻게 대접해야 합니까?

3.하나님을 최선을 다해 대접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서로 대접해야 하는데 그 전에 먼저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해 드려야 합니다. 앞에서 보았던 마22:37,38절 말씀 다시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여러분, 보십시오. 첫째 계명이 뭡니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도 그냥 대충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께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이고 의무이며, 진정 영원하고 완전한 능력과 사랑과 지혜의 하나님, 완전한 선과 진리와 의이신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예우이며 바르게 대접해 드리는 일인 것입니다.

너무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생명을 위하여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거룩과 의로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주만물의 주권자이십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우주만물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분이십니다. 반면에 우리는 어떻습니까? 인간적으로 제법 똑똑하고 위대하고 선한 모습이 있을지라도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면 정말 한없이 작은 자입니다. 정말 무지하고 어리석고 미련하고 한계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인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주셔서 영원한 생명까지 주셨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 앞에 겸손히 엎드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 높고 위대하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놀라운 사랑을 받은 우리가 어찌 몸과 마음과 정성과 심지어 목숨을 바쳐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순종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경배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우리에게 주신 생명과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주님께 드리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정말 그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순종하며 경배와 찬양을 드리며 우리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 섬겨야 합니다. 이게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당연한 태도요, 이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르게 대접해 드리는 일인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하나님을 바르게 만나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해 드릴 때 우리 인생은 비로소 올바른 길,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온전하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며 동시에 사람을 귀히 여기며 서로 대접하며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구세주이시며, 생명의 주관자이시며,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 경배와 찬양을 드리고 마땅히 드릴 것을 드리면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올바르게 대접해 드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자기 생각 능력 지혜 경험대로 살아감으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완전한 주권자이시며 능력자이시며 생명과 진리와 지혜가 되시는 하나님을 따라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은혜의 길로 잘 달려가며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을 충만히 누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4.이웃을 사랑하며 대접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르게 대접해 드리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께서 너무나 사랑하시는 사람을 바르게 귀하게 대접해야 합니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그저 열심히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교회만 열심히 섬기는 것만이 거룩한 삶이 아닙니다. 물론 당연히 그러한 삶은 거룩한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일이지만 그렇게 예배드리고 말씀듣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알면 당연히 받은 은혜를 삶속에 적용시켜야 합니다. 위로 하나님을 섬길 뿐 아니라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며 의롭고 깨끗하고 선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위로 하나님을 대접해 드리고 아래로 사람을 대접해주어야 합니다. 그게 진정한 경건이요, 거룩한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드린 마22:39,40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보십시오.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요 두 번째는 이웃사랑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 말씀은 레19:18절을 인용하신 말씀인데 거기에 보면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씀을 있는 레19장의 말씀은 한마디로 성도의 거룩한 삶에 관한 말씀입니다. 즉 레19:2절에서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즉 나는 거룩한 하나님이고, 너희는 나의 자녀다. 그러므로 너희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다음에 그러면 거룩한 삶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신데 거기에 보면 ‘네 부모를 경외하라. 안식일을 지키라. 헛것을 섬기지 말라. 하나님께 올바른 제사를 드리라. 곡물을 거둘 때에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속이지 말라.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 이웃을 압제하지 말라.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두지 말라. 불의를 행하지 말라.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등등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위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고, 주일을 지키고, 예배를 드리고, 부모님을 공경하고, 거짓과 도적질과 불의를 버리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곧 거룩한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며 깨끗하게 진실하게 의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마땅한 태도이고 서로가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서로 사랑하고 귀하게 대접하며 살아야 하는데 특별히 여러분, 먼저 가족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며 서로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가족은 가장 가깝고 가장 사랑하고 가장 귀한 이웃이 아닙니까? 그러면 먼 이웃도 사랑하고 귀히 여겨야 한다면 가족은 얼마나 더 아끼고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대접하고 존중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물론 이웃도 사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가족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 가족을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존중하고 대접함으로 서로에게 정말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되고 힘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 가족 못지않게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대접해야 할 이웃이 있습니다. 그게 누구겠습니까? 물론 성도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성도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면 성도는 형제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똑같은 아버지를 섬기면 형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엡2:19절에서는 하나님의 권속 즉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권속이요, 형제이면 얼마나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존중하고 대접해야 하겠습니까? 그렇게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아끼고 존중하며 살아간다면 교회에서 얼마나 주님의 향기가 나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하겠으며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겠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또 얼마나 아름답게 이루어져가겠습니까?

그런데 근간에 보면 성도 간에 서로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높여주고 하지 못하고 도리어 시기하고 질투하고 심지어 싸우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건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미워하시는 일이므로 우리는 절대로 그러면 안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주변의 모든 이웃도 사랑해야 합니다. 귀하게 여기고 대접해 주어야 합니다. 그게 우리가 사는 길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빛을 비추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힘있게 이루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저와 여러분은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 묵상하며 섬기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르게 대접해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고 존중하며 귀하게 대접하시기 바랍니다. 누구보다도 가장 가까운 이웃인 가족을 정말 서로 귀히 여기고 아끼고 사랑하며 귀하게 대접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또한 믿음안에서 한 형제자매된 성도들간에 정말 서로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아끼고 존중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생명의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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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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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예배설교] 살아있는 교회

 

 

 


제목 : 살아있는 교회

말씀 : 행 2:1~4

1.혼이 담겨 있어야 가치가 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6, 70년대에 영국에 '비틀즈'라는 락그룹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Yesterday, Let it be, Love me do 등의 수많은 곳을 히트시켜 전 세계의 젊은이들을 열광시켰고, 수십억달러의 돈을 벌어들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1965년 이들의 외화획득의 공적을 인정하여 대영제국 훈장을 수여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비틀스가 이탈리아에서 공연을 할 때의 일입니다. 공연장에는 수만 명의 청중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는데 한참 공연이 무르익어 열창을 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갑자기 무대위로 뛰어올라서는 권총을 겨누면서 빨리 노래를 그만두고 돌아가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당장 그만두고 돌아가지 않으면 쏘아 죽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삽시간에 공연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는데 다행히 경찰의 침착한 대처로 이 사람은 잠시 후에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범인을 잡아놓고 보니까 이 사람은 괴한도 깡패도 아닌 유명한 음악대학의 교수였습니다. 경찰이 어이가 없어 왜 이런 무모한 짓을 저질렀느냐고 묻자 그 교수는 비틀즈를 보면서 흥분해서 말했습니다. ‘너희들 음악에는 혼이 배어 있질 않아. 그런 혼도 없는 속된 노래를 가지고 이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은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이다. 그러니 당장 그만두고 돌아가라.’

즉 이 음악교수는 노래에 자신의 진실과 마음과 혼까지 담아 음악과 자신이 하나가 되는 그런 순수한 음악, 그런 영혼이 담겨있는 음악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틀즈라는 락 그룹이 그러한 혼이 담겨져 있는 순수한 음악이 아니라 상업적이고 세속적인 노래로 사람들을 현혹하며 그래서 순수음악을 더럽힌다고 여겨 그런 과격한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사건속에서 한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우리가 하는 일에 혼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거기에 진실이 있고,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림을 아름답게 그려도 거기에 혼이 담겨져 있지 않고 그저 상업적으로 그린다면 그 그림은 가치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웅변술을 가지고 열변을 토해도 거기에 혼이 담겨있지 않고 진실성이 없다면 위선에 불과한 것입니다.

벌써 오래전 이야기입니다만 제가 회사에 다닐 때 한 2,3년동안 서예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서예도 마찬가집니다. 글씨에도 혼이 담겨져 있는 글씨가 있고, 그저 기교적으로 쓴 글씨가 있습니다. 혼이 담겨져 있는 글씨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감동이 전해져 오고, 힘이 있고, 거기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동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저 기교로만 쓴 글씨는 왠지 천박해보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거기에 혼을 담고, 진실을 담고, 정성을 담을 때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물론 신앙생활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니 신앙생활은 더더욱 혼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영혼을 담지 않는 신앙생활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아무리 귀한 직분을 가졌어도, 아무리 교회를 위해서 봉사해도 자신이 하는 일에 영혼이 담겨져 있지 않다면 껍데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무리 찬양을 잘해도 거기에 혼이 담겨져 있지 않으면 그것은 그냥 세상적인 노래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거기에 혼을 담지 못하면 그냥 시간을 때우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제가 말하는 영혼이란 내 자신만의 영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님이 주관하시고, 성령님께 붙들린바 된 그러한 영혼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근원이신 성령님이 함께하시는 그러한 살아있는 영혼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우리가 하는 일속에 그 살아있는 영혼을 담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진정 생명과 은혜가운데 거하며 참된 가치를 누리며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4:24절에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시146:1절에서는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진정 혼을 담아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님께 사로잡힌 바 된 그 영혼을 가지고 신앙생활하고, 가정 생활하고, 직장생활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온전히 진정성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영위함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사람을 감동시킴으로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고 존중받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삶에 진정 살아있는 영혼을 담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살아있는 영혼을 가지고 매사에 영혼을 담아 하려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사로잡힌 바된 진정 살아있는 영혼으로 무엇을 할 때 그게 진정한 혼으로 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냥 내 정성만 담는다고 되는게 아닙니다. 인격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자연적인 혼을 죄로 말미암아 죽어 있기 때문에 그 혼만을 담아서는 진정으로 나를 드리는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이시며 진리의 영이시며 거룩한 영이신 성령께 사로잡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 전체에 살아있는 영혼을 담아 영위함으로 진정 살아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인데 입니다. 성령강림주일이란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하기에 힘쓸때에 오순절날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일어난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기억하며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힘써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그것을 계기로 하여 본격적으로 우리 주님의 구원의 역사를 일으켜 나갔던 날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이 진정한 생명력을 가지고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때에 그러한 성령에 붙들린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던 그 일을 기억하며 오늘에 되살려보는 그러한 절기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날의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오늘 우리도 경험하며 생명가운데 은혜가운데 주님의 사명을 감당해보자는 그러한 취지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을 우리의 영혼속에 담고 그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에는 생명이 있고, 은혜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있는 신앙인이 되어질때에 우리는 복음의 큰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최권능목사님은 본래의 이름은 최봉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얼마나 권능이 많으신지 수많은 사람을 전도하여 많은 교회를 세우고, 신유의 은사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별명으로 최권능목사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분은 전도할 때 「예수 천당, 마귀 지옥」하면서 돌아다니신 분으로 유명했습니다. 무슨 교리나 말씀이나 원리나 이치 등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무조건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천당, 마귀 지옥」을 외치고 다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렇게 어떻게 보면 정말 무식하게 전도했는데 이분의 전도를 받으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이 목사님이 시냇물을 건너려는데 어떤 양반 하나가 담뱃대를 길게 물고 둑에 점잖게 앉아 있는 것입니다. 최권능 목사님은 이때도 예외없이 둑에 앉아 잠시 쉬고있는 영감님에게 귀에다 대고, 「예수 천당, 마귀 지옥」하면서 냅다 소리를 지르고는 징검다리를 건너 갔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점잖은 양반이 깜짝 놀라서 「저, 저 저런 고얀놈이 있나.」하면서 소리를 쳤지만 목사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징검다리를 건너갔습니다.

그래서 이 양반도 어쩔 수 없이 「괘씸한 놈 같으니라고」하고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이 양반이 집에 도착해서 지내고 있는데 자나깨나 자꾸만 귀에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앉아 쉬려고 하면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가 들리고, 잠을 자면 꿈속에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가 들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양반이 예수 귀신 붙었다고 하면서 그 지방에서는 제법 용하다고 하는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굿을 해도 계속 귀에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만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서양귀신은 서양귀신 들린 사람에게 가야된다고 해서 교회를 찾게 되었고 결국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누구냐 하면 그분이 바로 고당 조만식 선생님의 부친인 조을선씨였고, 이 한분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통해서 조만식 선생이 믿게 되고, 조만식 선생을 통해 수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천당, 마귀 지옥」이라는 말속에 무슨 철학이 있습니까? 무슨 논리가 있습니까? 거기에 무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그럴듯한 웅변이 있습니까? 거기에 무슨 사람들을 불러모을만한 재미있는 이야기거리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최 권능 목사님은 그 말 한마디로 수천명의 사람을 전도하였고 수십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천당이라는 말을 듣고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겠습니까?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때야, 세상은 참 어수룩 했으니까. 그때야 가난하고 못배워 사람들이 좀 단순하고 순진했으니까. 그때야 무슨 재미있는 일도 없었으니까 그냥 예수천당만 해도 믿었지 지금 세상은 그렇게 안됩니다.」라고 말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개연성은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만약 오늘 최권능 목사님이 이 안강땅에 오셔서, 저 시장 바닥과 저 일터를 다니면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라고 다니신다면 분명 이 안강지역에도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저 서울 바닥에 가서, 저 부산 바닥에 가서, 저 유흥가와 환락가에 가서 최권능목사님이 「예수 천당, 마귀 지옥」을 외쳐댄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품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그 단순한 말속에는 비록 철학도 이론도 교리도 없지만 그러나 거기에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살아있는 예수의 혼, 예수의 영, 성령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최권능 목사님 속에 주의 성령이 충만하였기 때문에 그래서 비록 단순하고 어떻게 보면 유치한 말이지만 그가 혼을 다해서, 영혼을 다바쳐 복음을 증거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셨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니 안 믿고는 배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령이 그 안에서 차 있을 때 그의 삶은 성령이 담겨져 있는, 성령이 역사하시는, 성령이 인도하는 그러한 삶이었던 것입니다. 성령이 가득차 있기에 그는 그야말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명력이 왕성한 삶을 살았고 동시에 그러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품으로 인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것이라야 역사를 이루어 갑니다. 살아 있어야 생육하고 번식을 하는 것입니다. 죽어있는 것은 자체로서도 별 의미가 없거니와 생육하고 번식하는 것은 더더구나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신앙인입니다. 생명의 영이신 성령으로 사로잡힌 사람은 살아있는 신앙인입니다. 이런 살아있는 신앙인만이 참된 생명의 가치를 누리게 되거니와 동시에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3.어떻게 성령충만함을 받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초대교회는 이처럼 살아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살아서 펄펄 뛰는 물고기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힘차게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그런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본문의 말씀에 잘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그들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순절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전혀 기도하기를 힘쓰다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생명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들속에서 역사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정녕 살아있는 신앙인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충만이 무엇입니까? 충만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철철 넘쳐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은 내 안에 성령이 넘쳐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는 더 이상 다른 것이 자리잡을 수가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리와 생명과 은혜의 영이신 성령께서 내 인격을 지배하고, 내 자아를 지배하고, 내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의 영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은혜와 사랑과 능력이 넘쳐흐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성령이 내 안에 가득하니 이제는 내 욕심, 내 못난 자아, 내 짧은 소견, 내 미련한 인생관 이러한 것들은 죽고 맙니다. 그 대신 성령님안에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과 은혜와 진리가 나를 이끌어 갑니다.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배하니 내 인생의 가치관, 내 성품의 기질이 바뀔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혼이 나를 지배하니 나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자랑들은 사라지고 이제는 저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이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우리를 살리겠습니까? 무엇이 우리 교회를 더욱 힘있게 하겠습니까? 무엇이 저와 여러분과 우리 교회속에 진정한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 나가겠습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영으로 신들릴 때 우리는 놀라운 생명력을 갖게 되고, 그렇게 생명력을 갖게 될 때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감당해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과 우리 교회가 성령에게 붙들릴 때, 속된 말일지 모르지만 거룩한 영이신 성신으로 신들릴 때 우리안에 우리 가정안에 우리 교회안에 이 지역사회안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기쁨과 사랑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신들려 살아갈 때, 우리는 진정 진리안에서 참된 가치와 의미와 보람을 찾게 되며, 진정한 평안과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세상에 모든 헛된 욕심들을 버리고 저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는 가운데 정녕 소망중에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혼에 충만할 때 봉사하며, 전도하며, 사랑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속에 진정으로 요청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날 한국교회속에 가장 시급하게 요청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신에 충만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영이요, 생명의 영이요, 은혜와 사람의 영이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과 우리의 모든 가정들과 모든 성도들 생명 속에 이 하나님의 혼이 살아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사랑하는 성도들속에 그리고 우리의 가정속에 교회속에, 그리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 속에 하나님의 혼이 살아서 역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가운데 생명이 역사합니다. 은혜와 사랑이 역사합니다. 모든 어둠의 세력이 물러가고, 모든 우고와 질환이 물러갑니다. 추하고 더럽던 것이 아름답고 깨끗하게 됩니다. 혼돈된 것이 질서를 찾게 되고, 죽어 가는 것들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얼어붙은 동토에도 생명의 싹이 트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녕 성령충만함을 받기를 힘써야 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는데는 다른 왕도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제자들이 보여 주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붙들고 늘어져야 합니다.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충만함을 받고, 성령충만함을 받으면 세상을 이기고, 죄와 사망과 어둠과 미움과 욕심과 저주의 권세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우리 가정안에서 우리 교회안에 생명의 역사가 은혜의 역사가 사랑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다시한번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누리기 위하여 더욱 말씀을 부여잡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진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덧입어 세상을 이기고, 죄와 사망을 이기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어둠의 세력을 이김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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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행복한 인생

 

 


제목 : 행복한 인생

말씀 : 골4:2~4

1.행복은 마음에 있습니다.

존 스타인벡의 ‘진주’라는 소설의 내용입니다. 멕시코의 어느 바닷가에 가난한 부부가 있었는데 어느 날 아들이 전갈에 물려 병원을 찾아갔지만 돈이 없다는 이유로 문전박대를 당합니다. 할 수 없이 엄마는 전갈에 물린 부위를 입으로 빨아 독을 빼내고 아버지는 아들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진주조개를 잡으러 갔다가 엄청나게 큰 진주가 들어 있는 조개를 잡게 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그야말로 로또복권에 당첨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돈이 없다는 이유로 전갈에 물린 아들을 문전박대하던 의사가 스스로 찾아와 치료해 주겠다고 하고, 그를 업신여기며 따돌리던 동네 사람들도 너나 할 것없이 찾아와서 친한 척을 하였습니다. 또 평소에는 왕래도 없던 먼 친척들이 찾아와 도와 달라고 하고, 사회복지 단체에서도 찾아 도움을 요청하고, 성당의 신부도 은근히 큰 헌금을 기대하여 부담을 주었고, 각지에서 장사꾼들이 몰려와 협작하여 진주를 헐값에 사려고 난리를 쳤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부부는 고민하다가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이사를 가게 되는데 거기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떻게 찾았는지 많은 사람들이 쫓아와 도움을 요청하고, 장사꾼들이 헐값에 진주를 차지하려고 달려들어 결국 그들이 손에 의하여 사랑하는 아들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자 아버지도 그들을 추적하여 원수를 죽이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 진주를 바다에 던져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존스타인 벡은 소설을 통하여 현대인들이 돈만 있으면 행복할 줄 알고 난리를 치지만 오히려 돈 때문에 도리어 서로 싸우고 속이고 심지어는 죽이며 그래서 결국 행복은커녕 불안과 두려움과 고통 속에 빠질 때가 많다는 것을 일깨워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행복은 조건이나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성적순도 아니고,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 순이 아닙니다. 행복은 마음순입니다. 그래서 “봄은 만물이 소생하니 좋고, 여름은 초목이 우거지니 좋고, 가을은 열매가 있어 좋고, 겨울에는 하얀 눈을 볼 수 있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시사철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봄은 건조해서 싫고, 여름은 더워서 싫고, 가을은 고독해서 싫고, 겨울은 추워서 싫다.”고 하는 사람은 사시사철 불행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잠4:23절에서는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하셨고, 예수님께서는 마15:18절에서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생명과 기쁨과 슬픔과 아름다움과 추함이 마음에서 나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마음을 믿음과 사랑과 은혜와 감사로 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을 그렇게 진정 복된 마음으로 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정말로 우리가 생명과 기쁨과 감사와 은혜가 넘치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심령 속에 들어있는 죄와 무지를 해결해야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는데 이것은 이것을 이기는 길은 말씀과 기도뿐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말씀과 기도로 우리의 심령 속에서 꿈틀거리는 죄와 무지를 물리칠 때만이 진정한 은혜와 사랑과 기쁨으로 우리의 심령이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2절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즉 꼭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되 계속해야 한다. 계속하는데 특히 감사의 기도를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행위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요, 영적인 호흡을 통해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들이는 일이요, 하나님의 뜻을 묻는 일이요,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 아뢰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요, 교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없이는 하나님과 올바른 교통이 이루어질 수 없고, 하나님과 올바르게 교통하지 않으면 진정한 생명과 은혜와 평강과 기쁨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반드시 해야 하는데 지속적으로 계속해야 합니다. 몇 번 해보고 때려치우거나 옛날에 많이 했다고 중단하거나 응답이 없다고 그만 두거나 하지 말고 천국에 갈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성이 풍성한 상태가 계속 유지되고 영성이 풍성한 상태가 계속 유지되어야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평강도 계속적으로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기도뿐만 아니라 삶 전체가 그렇습니다. 무엇이든 조금하다 말면 소용없습니다. 축구선수가 축구를 잘하려면 매일 꾸준히 공을 차야 합니다. 피아노를 잘 치려면 매일 계속해서 피아노를 쳐야 합니다. 공부도 꾸준히 하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 까먹는 것입니다. 기도도 계속 끈질기게 해야 합니다. 잘 안 들리는 것 같아도, 응답이 없는 것 같아도 계속 기도해야 주님과의 교통이 지속적으로 잘 이루어져 계속해서 주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주님과의 온전한 교통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주님과의 온전한 교통이 이루어지 않고는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온전히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꼭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되 중단하지 말고 계속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히 하나님과의 깊고 풍성한 교제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범사에 감사하는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모두가 그런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감사함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할 때에 끈질기게 하는 것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감사함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어떤 분이 실험을 했습니다. 빈민촌에 들어가 열집을 선택해서 현관에 매일 50불을 놓고 갔습니다. 그러자 첫 날은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멈칫멈칫하다가 돈을 집어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열흘 쯤 지나니까 사람들은 그를 기다렸다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돈을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한 20여일 지나니까 돈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돈이 오자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가지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한 달이 되어 돈을 갖다놓지 않으니까 ‘왜 오늘은 돈을 안 가져오는 거야. 뭐야 우릴 놀린 거야 뭐야. 주려면 계속주지 왜 주다 마는거야?’하면서 비난하고 불평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을 보자 ‘여보, 오늘은 왜 돈을 안 주는 거요?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는 건 당연한 일 아니요?’하면서 마치 빚쟁이처럼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이야기 입니까? 무언가 은혜를 끼쳤을 때 처음에는 감사하고 기뻐하지만 그것이 일상화되면 감사는커녕 도리어 무슨 빚쟁이처럼 내놓으라고 하고 안주면 난리를 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도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공짜로 주신 것인데 계속 너무 많이 주시니까 감사할 줄 모르게 된 것입니다. 감사는커녕 남보다 조금 덜 받았다고 생각하면 불평불만을 토하고 하나님께 내 놓으라고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얼마나 많은지를 알아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무너무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걸 모르고 마치 아무것도 가지지 못할 자처럼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정말 얼마든지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얼마전 신문에 보니까 어떤 분이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우리나라 꽤 괜찮은 나라라고 평가하고 있는데 우리만 모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모임에서 세계적인 명사들이 모였습니다. 거기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과 김용 세계은행 총재도 있었고 오바마 현 미국 대통령과 클링턴 전 미국 대통령도 참석하였습니다. 그때 클링턴 미국 전 대통령이 한국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농담아닌 농담을 던졌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유엔사무총장이 한국인이었고,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국제기구중 하나인 세계은행 총재도 한국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얼마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국제연합기구 중의 하나인 GCF(녹색기후기금)의 한국유치가 확정되었습니다. 세계경제10개대국의 반열에 올랐고, 한류가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에 확산 되어 문화강국도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안정되고 자유와 질서가 잘 잡힌 나라도 그닥 많지 않습니다. 이만하면 꽤 괜찮은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대선 레이스를 벌이고 있는 3인방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위상에 걸맞는 지도자가 못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국제적 위상이 높아진 대한민국을 정말 어떻게 하면 세계에서 리더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어갈 것인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서로 물고 뜯고 과거에만 집착하여 흠집내고 할퀴기에만 급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정말 놀라운 축복의 땅에서 너무나 많은 것들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은 감사해야 하고 다음에는 어떻게 우리의 다음세대에게 더욱 풍성하고 아름다운 땅을 물려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현재에 감사하며 더욱 나은 미래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하기 위해서는 정말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늘 헤아려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보았던 2절 말씀 다시 봅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계속 기도하라. 특별히 감사기도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것이 많지만 감사할 것만큼 많습니까? 우리가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먹고 입고 자고 생각하고 말하고 숨쉬고 걷고 뛰고 움직이고 생활하는 모든 것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알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감사할 때 은혜가 임하고 기쁨이 임하고 평안이 임합니다. 성령이 역사합니다. 그러나 불평불만하면 마귀가 역사하고 어두움이 임하고 미움과 시기가 찾아옵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이 최고의 부자이고, 최고의 신자입니다. 최고의 기도, 최고의 영성은 감사할 줄 아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늘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 가운데 살고 있는지를 기억하며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갈 때에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과 은혜가 가득한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려면 귀한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높은 자존감 가운데 만족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둔형 외톨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은둔형 외톨이는 밖에 잘 나오지 않고 방에 틀어 박혀서 TV를 보거나 인터넷에 빠져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원인은 주로 가정 파탄, 부모의 폭행, 집단에서의 왕따, 인터넷 게임 중독 등으로 보고 있으며, 이들은 많은 경우 우울증, 성격장애, 강박증, 공격성 등의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있어 이들로 인하여 큰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되는 근본적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가정 붕괴, 부모의 폭행, 왕따, 인터넷 게임 중독 등은 외적인 요인이고 내적인 요인은 그런 환경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자존감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학대받고 무시당하고 살아감으로 자신을 무가치하고 무능하게 여기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만나기 싫어지고 그래서 결국은 거기에 대한 반항으로 극단적인 행동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자존감은 자존심과는 다른 것입니다. 자존심은 남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높임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남보다 더 잘나고 더 높아지고 더 많이 가져야하기 때문에 남을 헐뜯고 무시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자존감은 남이나 환경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스스로를 귀하고 가치있는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남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남이 알아주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습니다. 남보다 높아지려고 애쓰지도 않습니다.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헐뜯지도 않습니다. 나 자체로 귀한 존재니까 그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과 남을 귀히 여기며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내가 너무나 귀한 존재니까 나 자신을 무가치하게 무의미하게 추하게 사용하지 않고 귀하게 아름답게 사용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정말 아름답고 복되며 만족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3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전도의 문이 열리도록 기도하라. 나는 이 일을 위하여 매임을 당하였다. 즉 사도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지 스스로 이 거룩한 사역을 위한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 거룩하고 귀한 사역에 쓰임받고 있다는 분명한 자긍심 가운데 자부심을 가지고 감사와 기쁨으로 주신 사명 감당하여 살아가는 행복한 인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도 이런 사역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고 동시에 우리 자신도 귀한 인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왜 아니겠습니까? 세상에서도 사람들이 보기에 귀한 일을 한다면 얼마나 스스로가 자랑스럽겠습니까? 자신이 자랑스러우면 그 삶에 또한 얼마나 만족과 기쁨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온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이 귀한 사역에 참여한다면 얼마나 굉장한 일이겠습니까? 이 귀한 생명을 살리는 일에 참여한다면 얼마나 귀하고 자랑스럽겠으며, 그러면 또 얼마나 감사와 기쁨과 만족함이 넘치는 삶이 되겠습니까?

저는 솔직히 시켜주지도 않겠지만 국회의원하라고 해도 안 할 겁니다. 저는 목사라는 이 신분이 가장 자랑스럽고 가장 좋고 가장 행복합니다. 그까짓 세계 권력과 명예와 부에 관심없습니다. 시찰회나 노회나 총회나 이런 기관에서의 무슨 감투 에도 관심 없습니다. 그저 목사라는 신분 하나에게 감사하고 감격하고 기뻐할 따름입니다.

얼마 전 신문사설에서 폴리페서 즉 정치교수들의 정치참여에 대하여 비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폴리페서는 정치를 뜻하는 폴리틱스(politics)와 교수를 의미하는 프로페서(professor)의 합성어로서 교수본연의 직업에 충실하지 않고 정치에 뛰어들어 명예를 얻으려는 교수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교수들이 그렇게 세상적인 명예를 좇으려고 한다면 대한민국은 노벨상을 받으려면 아직 멀었다고 개탄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적어도 대학교수라면 교수라는 신분에 자긍심과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까짓 세상 감투하나 씌워준다고 낼름 교수직을 포기하고 정치에 뛰어들고 한다면 결코 학문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학자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감사와 기쁨으로 학문에 열정을 쏟아야 학문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의 분야에 자긍심을 가지고 감사와 기쁨으로 열정을 쏟을 때에 본인도 행복하고 나라의 미래도 더욱 밝아지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목사 장로 권사 집사로서의 분명한 정체성과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영혼 구원의 이 귀한 사명을 가진 자로서 자존감을 가지고 이 생명의 역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더욱 큰 긍지와 자존감을 가지고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정말 늘 깨어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심령을 성령의 은총으로 가득 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고 살고 있는지를 기억하며 정말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도 적극 참여함으로 높은 자존감 속에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주님과 동행하는 행복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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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주일오전예배설교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봅시다 (August Sunday Sermon)

제목 :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봅시다

말씀 : 벧후3:8~13

 

1.인간은 주인이 아닙니다.

여러분,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야 야 야 내 나이가 어때서.... 세월아 비켜라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여기서 사랑이란 물론 하나님 사랑이나 이웃 사랑이 아니라 물론 남녀간의 사랑이겠죠. 물론 뭐 나이가 좀 있다고 너무 나이 타령만하지 말고 열심히 사랑도 하고, 활기차게 살아보자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전 솔직히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을 보면 좀 측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실은 그 내면 속에는 마음은 청춘인데 나이는 속일 수 없어 애석해하는 마음이 내포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억지로 내 나이가 어때서 노래를 하면서 나이를 이겨 보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다는 거죠. 물론 의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자신의 내면에서 자신에게 최면을 걸어 나이를 이겨 보려는 마음이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별 것 아닌 것에 미련을 두고 늙기 싫어서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아 애처롭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혹시 하나님 일 하기에 딱 좋은 나인데 그러면 몰라도.... 또 백세인생이라는 노래가 있더라고요.

육십 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라

칠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할 일이 아직 남아 못 간다고 전해라

팔십 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쓸만해서 못간다고 전해라

구십 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알아서 갈테니 재촉말라 전해라

백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좋은날 좋은 시에 간다고 전해라

여러분, 어떻습니까? 재밌습니까? 그런데 이건 올바른 기독교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재미있는 노래가 아닙니다. 안 그래요? 누구 맘대로 아직 못가고, 누구 맘대로 알아서 가고, 누구 맘대로 좋은 날 좋은 시에 갑니까? 여러분, 이건 완전히 뉴에이지 사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노래입니다. 뉴에이지는 새시대란 뜻인데 좋은 뜻으로 새시대가 아닙니다. 완전히 인본주의적인 새시대입니다. 옛날에는 인간이 무지해서 신의 지배를 받았는데 이제 신에게 속박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우주의 주인으로 인간의 이성과 능력과 지식으로 세상을 지배하며 얼마든지 좋은 세상 만들어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열심히 자기를 갈고 닦으면 고차원적인 세계를 누릴 있는데 그게 구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노래가 바로 이런 사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감히 누구한테 못간다고 전합니까? 한번 훅 불면 끝날 존재가 감히 누구맘대로 가고 싶으면 가고 안가고 싶으면 안갑니까? 물론 그냥 좋은 시절 오래살고 싶은 소망이 담겨져 있는 노래라고 가볍게 치부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이 노래의 가사를 보면 인간이 자기가 주인이 되어 제맘대로 오래오래 세상 것 실컷 즐기며 잘먹고 잘살고 싶은 마음을 노래하고 있는데 그게 바로 뉴에이지적 발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인생은 내 마음대로 왔다가 내 마음대로 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 와서 하나님의 뜻대로 주어진 시간 동안 살다가 언제라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가야할 존재입니다. 눅12:20절 보세요.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또 약4:14절을 보십시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그러니까 인간은 정상적인 수명을 누린다해도 극히 짧은 시간에 불과하고 게다가 지금이라도 부르면 꼼짝없이 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그저 자기 한몸 잘먹고 잘살기 위하여 제아무리 기를 쓰고 모아봤자 하나님이 데려가시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니 단순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심판의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저 자신의 무지하고 왜곡된 생각과 가치관 속에서 자기 육신의 안일함과 평안함과 부귀영화를 위하여 사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지 말고 오직 겸손하게 엎드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바르게 삶으로 여기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고 언제라도 부르시면 할렐루야 찬양하면서 영광의 나라로 가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는 정말 작은 존재요, 세상의 것은 금방 다 썩어지고 없어질 것이요 우리는 곧 하나님 앞에 가야할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과 사랑과 선과 의가운데 주님과 동행함으로 여기서도 진정한 소망과 기쁨가운데 살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주님은 반드시 재림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로 이러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요, 먼저 오늘 8,9절을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니까 세상의 많은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그 짧고 보잘것없는 지식과 생각을 가지고 ‘천국도 없고, 주의 재림도 없다.’ 그러는데 지극히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주님이 반드시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다시 오시는 것만이 아니라 다시 오셔서 모든 인류를 심판하시고 믿음 안에서 의를 따라 산 사람들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시고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진노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때를 바라보며 우리에게 주어진 기간들을 오직 믿음과 선과 진실로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맞을 준비하는 삶을 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다시 오시고, 다시 오실 때 우주의 종말이 옵니다. 그리고 세상을 심판하시고 믿음을 따라 산 사람들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십니다. 그렇지 못한 자들은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영벌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의 그 짧고 무지한 이성과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생각하고 판단하며 이걸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무슨 꾸며낸 이야기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건 순전히 인간이 죄와 무지 가운데 있어서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단순히 인간의 이성과 경험과 지식으로 본다면 천국이나 재림이나 지옥이나 이런 것들은 말도 안됩니다. 도무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게 바로 인간의 이성과 지식의 한계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인간의 이성과 지식과 경험과 과학과 논리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우주의 모든 물질과 경험과 지식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짧은 지식과 경험과 고학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이 말씀하신 천국과 지옥을 판단하려고 한다면 이건 벌레가 사람을 판단하려는 것보다도 더 어리석고 미련한 생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의 시기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예수님이 곧 오실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할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금방 오신다면 말씀을 기록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10년, 20년, 30년, 50년이 지나도 오시지 않자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주님의 말씀을 기록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지가 벌써 2,000년이 지났는데도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신다 오신다 그러더니 벌써 2,000년이 지났는데 봐라 아직도 안 오시지 않느냐? 그런데 재림은 무슨 재림이냐?’ 하면서 조롱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도 역시 인간의 무지몽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오늘 8절 보십시오.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하셨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길어봐야 100년 밖에 살지 못하는 우리로서는 천년이 엄청난 시간이지만 영원하신 하나님께는 순간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기준으로 빨리 오시니, 오시지 않느니 하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알지 못하고 떠들어대는 우매하기 짝이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눈으로 주님의 재림이 지연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상황에 대하여 우리가 또 한가지 생각할 것은 그것은 지연이 아니라 주님이 한 영혼이라도 더 기회를 주시기 위하여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9절 말씀에서 말씀하고 계신 것처럼 더딘 것이 아니라 한 영혼이라도 멸망의 길로 가지 않고 회개하고 구원받도록 기회를 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마냥 기다리고 계시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주님의 때에 주님이 정한 수가 차면 천군천사를 대동하고 큰 나팔소리와 함께 영광 중에 강림하셔서 심판할 자를 심판하고 구원할 자를 구원하십니다. 그날 결국 우주의 종말이 오고 기존의 질서는 완전히 사라지고 신천신지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우리는 모든 고통과 아픔과 슬픔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24:30절에 보면 주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함께 보겠습니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그 짧고 무지하고 한계속에 있는 생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말씀과 은혜와 시간에 초점을 맞추고 주님의 때를 기다리면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 다시 오실 때에 할렐루야 찬앙하며 영광을 돌려 드리고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이 반드시 있을 것을 알고 믿고 살아야 하고 그렇게 주님의 재림과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을 것을 믿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경건한 삶이 있어야 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일단은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당연히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거룩한 나라이기 때문에 그곳에 들어가려면 거룩한 삶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거룩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예수님 믿고 옛 자아가 죽고 거듭나 천국백성이 되면 마땅히 천국백성의 삶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들인데 거듭났다고 하면서 옛 모습 그대로 살아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 믿고 거듭나 생각과 가치관과 목적과 방향이 다른 사람들이 아닙니까? 목적과 방향이 다른데 세상 사람들과 같이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 11절에서 말씀하시 ㄴ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즉 예수님이 오실 것이고 그러면 새 하늘과 새 땅이 건설될 터인데 이것을 알고 믿는다면 거룩하고 경건함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가지 못하면 하나님이 욕을 먹게 되고, 교회가 조롱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우리가 도리어 하나님 나라의 문을 막고 있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거룩하게 아름답게 진실하게 의롭게 살아가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도 세상에서 인정받고 귀히 여김 받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도 저절로 이루어 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12:1절에서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올바른 예배생활 가운데 진실하게 성실하게 의롭게 선을 행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 자신이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귀하게 쓰임 받으며, 주께 영광을 돌려 드리며, 사람들에게도 감동감화를 줌으로 그들을 주님 품으로 인도하는 삶을 살다가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잘했다 칭찬받고 상급 받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동시에 새 하늘과 새 땅에 소망을 두고 사모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사모합니까? 좋은 것을 사모하지 않습니까? 세상에 좋지 않을 것을 바라고 사모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정말로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그야말로 오직 영광과 기쁨과 은혜만이 가득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야말로 지상낙원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거기에 소망을 두고 감사와 기쁨과 희망으로 주님과 동행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12,13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여러분, 정말 당연하지 않습니까? 오직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의 진정하고 완전하고 영원한 소망이요 기쁨이요 행복이 아닙니까? 정말 도대체 세상의 무엇이 우리에게 참되고 영원하고 온전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주겠습니까? 물론 세상에도 그런대로 상대적으로 좋은 것도 있고 사모할 것도 있고 바라볼 것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 행복과 기쁨을 주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정말 별거 아닙니다. 온전한 생명의 기쁨을 주지도 못하고 그나마 잠시잠깐후면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니 그런 걸 바라보며 산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게다가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진정한 소망과 위로와 기쁨과 평안을 주는 곳은 천국을 바라보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말할 것도 없이 그저 세상의 것에 소망이 있고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는 줄 알고 죽자 사자 그것만을 따라가게 됩니다. 그 썩어 없어질 세상의 것들에게 인생을 바치게 되고 세상의 것들의 노예가 되어 참된 행복과 안식도 누리지 못하고 그러다가 결국 영원한 형벌가운데 처하는 불쌍한 인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 그 나라를 향하여 하게 되고, 그러면 자연히 거룩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삶을 향하여 나아가게 됩니다.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어도 얼마든지 이기게 됩니다. 세상 풍조에 휩쓸리지도 않고, 모든 욕심과 욕망과 원망 불평 미움 근심 걱정에서도 벗어나게 됩니다. 물질과 사람과 세상 영광과 명예와 죄로부터 자유하게 되고, 설령 나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조차도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이 땅에서도 천국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다가 진정하고 영원하고 완전한 새 하늘과 새 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자기가 주인공이고 자기가 다 아는 것처럼 자기 생각과 지식과 경험을 따라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댄다고 해도, 자기 마음대로 고집대로 물질주의 이기주의에 빠져 그저 먹고 마시고 즐기며 산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현혹되지 말고 오직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머잖아 오시든지 아니면 내가 먼저 주님 품으로 가든지 이제 곧 우리는 주님 앞에 서게 되고, 그 때에 행한대로 심판받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며 거룩하게 의롭게 진실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혹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세상의 모든 것들은 머잖아 종말을 고하고 완전하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인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진다는 것을 기억하며 그것을 바라보고 소망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소망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그 소망으로 세상의 것에 얽매이지도 말고 진정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를 얻으므로 여기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껏 누리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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