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관점 / 불의한자-동성애
불의한자-동성애
신약에서는 특별히 동성애만을 콕 꼬집어서 비판하지는 않는다. 고전6:9-10에서 동성애의 원인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렇게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를 불의한 자(아디코스, 하나님의 법률을 위반하는, 불의한, 죄있는 자) 라고 칭하고, 동성애는 그 결과로 나타나는 음행, 우상숭배, 간음, 탐색, 남색, 도적질, 탐욕, 술취함(술고래), 중상모략, 사기질과 같은 죄악들 가운데 하나로 등장한다(고전6:9-10). 따라서 동성애만을 무조건적으로 맹비난 할 것이 아니라, 동성애가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사회적 현상을 면밀히 분석하고, 동성애와 함께 이 사회에 나타나는 다양한 죄악의 현상들에 관심을 가지고 다각적으로 접근하는 시각이 필요하다.
특히 동성애는 탐색(말라코스, 자기 몸을 변태적인 호색에 제공하는 남성)과 남색(아르세노코이테스, 여자와 동침하는 것과 같이 남자와 동침하는 사람) 이라는 단어로 묘사되는데, 성경에서 이처럼 동성애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는 변태적인 호색에 기인한 육체의 탐욕과 방탕과 쾌락을 추구하는 성적 탐닉이기 때문이다.
고전 6:9 불의한(아디코스, 불의한, 부정한 자, 법률 위반자, 죄있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클레로노메오, 상속하다 inherit)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포르노스, 불법적 성교에 탐닉하는 남자)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모이코스, adulterer) 자나 탐색하는(말라코스, 자기 몸을 변태적인 호색에 제공하는 남성) 자나 남색하는(아르세노코이테스, 여자와 동침하는 것과 같이 남자와 동침하는 사람) 자나
고전 6:10 도적이나 탐욕을(플레오네크테스,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을 더 많이 가지기를 원하는 자) 부리는 자나 술취하는 자나 모욕하는(로이도로스, 비난하는, 중상모략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하르팍스, 탐식하는, 약탈자, 강도,사기꾼)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동성애나 이성간의 간음, 성매매, 음행은 똑같다
그래서 동성애를 이성간의 성적 탐욕과 성적 문란인 간음, 음행(포르노스, 불법적 성교에 탐닉하는 남자) 등과 대등하게 본다. 때문에 이성간의 간음, 성매매, 음행은 동성애 못지 않은 심판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이성간의 성적 문란을 갈5:19에서는 육체의 일(사르크스, 죄의 본성)에서 비롯된 음행(포르네이아, 매음, 간음, 음탕한 행위)과 더러운 것(아카다르토스, 악한 행위로 인한 도덕적 타락에 까지 불결함의 전(全) 영역, 육체적, 제의적, 도덕적 불결) 과 호색(아셀게이아, 방탕, 성도착) 이란 단어로 묘사한다.
갈5:19-21에는 육체(사르크스, 죄의 본성)의 일에 해당하는 죄악들이 음행, 더러운 행위, 호색, 우상숭배, 마법, 원수맺음, 분쟁, 시기, 분냄, 당파, 투기, 술취함, 방탕 등으로 다각도로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와 신자는 동성애만을 비판하기 전에 사회를 피폐하게 만드는 이러한 여러가지 악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불신자들도 공감할 수 있는 다각적인 시도를 하는게 좋다.
육체의 쾌락을 추구하는 문란한 이성애와 동성애는 불의한 일이고 육체의 일이며 호색, 방탕, 더러운 행위, 음행이기 때문에 동일한 심판의 대상이 된다. 때문에 문란한 성생활을 하는 이성애자들이 동성애를 비판하는 것은 넌센스에 가깝다. 동성애자들에게 저주를 퍼부으면서 정작 자신들이 하는 이성간의 문란하고 더러운 성행위에 대해서는 너무 관대하게 보는 모순에 빠져 있다.
갈 5:19 육체(사르크스, 죄의 본성) 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포르네이아, 매음, 간음, 음탕한 행위)과 더러운 것(아카다르토스, 악한 행위로 인한 도덕적 타락에 까지 불결함의 전(全) 영역, 육체적, 제의적, 도덕적 불결) 과 호색(아셀게이아, 방종, 성도착) 과
갈 5:20 우상 숭배와 술수(파르마케이아, 마술 magic, 마법 sorcery) 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젤로스, 경쟁적 시기, 질투) 와 분냄과 당 짓는 것(에리데이아, 비열한 본성, 이기주의)과 분리함과 이단과
갈 5:21 투기(프도노스, 시기 envy) 와 술 취함과 방탕함(코모스, 술잔치, 방탕) 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늘날 이성간에 벌어지는 수 많은 간음, 성매매, 음행, 호색, 불륜 등의 성적인 문란들을 보라. 교회 청년들도 이성간의 성적 탐닉과 죄악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이성간의 성적인 죄악들을 보라! 이것들은 동성애와 동일한 죄악이다. 따라서 교회는 동성애와 함께 이러한 이성간에 일어나는 죄악들에 대해서도 함께 비판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이성간의 성적인 죄악들에 대해서는 관대하며 잠잠하고 침묵하면서 왜 유독 동성애만 저주를 퍼붓고 핏대를 올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안타까운 것은 교회와 신자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균형적인 시각을 상실하고 동성애에 대해서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유아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또한 교회는 동성애만을 비판하기 전에 고전6:9-10과 갈5:19-21 에 등장하는 탐욕, 술취함, 모욕, 속여 빼앗는 것, 우상숭배, 마법, 원수맺음, 분쟁, 시기, 분냄, 당파, 투기, 술취함, 방탕 등 모든 악독과 죄악들에 대해서도 심각한 윤리적인 위기 의식을 가지고 건강한 교회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세상을 향해 정의와 윤리를 외쳐야 할 사명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순수하고 고결한 동성애?
그렇다면 매우 순수하고 고결한 동성애란 존재할까? 파트너를 바꾸지 않고 평생 함께 하며 책임지는 순결한 동성애와 동성결혼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동성애가 성적인 탐닉과 쾌락추구를 버리고 상대방에 대해 책임의식을 가지는 보편 타당한 윤리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가? 만약 오늘날 동성애자들 가운데 일부가 [사랑에 기초한 순수한 동성애] 를 주장한다면 과연 그럴 수가 있는지는 논의 해 볼 대상이 되겠다. 성경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동성애에 대해 말하지 않기 때문에 상당히 어려운 부분일 수도 있다. 어쩌면 은밀히 이성간에 일어나는 성매매, 근친상간, 간음, 음행, 호색, 불륜보다 고결하고 순결한 동성애가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불신자들에게 성경의 성윤리를 강요할 이유와 필요가 있는가? 불신자들이 교회를 신뢰하지 못하는 현실속에서 그들에게 성경의 윤리를 강요하는 것은 어려울지는 몰라도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수순에서 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정도의 보편 타당한 건강한 윤리는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겠다.
여기까지는 불신자들의 관점이라면 다음에는 과연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아름답고 순수한 동성애를 할 수 있을까? 남녀간의 결혼을 통해 책임지는 정상적인 사랑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의한 것이기에, 성도가 예수님은 순결한 동성애를 비난하지 않으신다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신자에게 있어 동성애는 인권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평가하실가의 관점에서 냉철하게 분석해야 한다. 하여튼 성경에서 말하는 바 중요한 핵심은 동성애든 이성애든 육체(사르크스, 죄성, 죄의 주체, 죄의 욕망) 의 일이라 할 수 있는 탐욕과 방탕과 쾌락과 호색을 추구하는 성적 탐닉은 절대적 심판의 대상이다.
로마 제국과 동성애
왜 성경은 동성애에 대해 비판적일까? 신약성경이 기록된 시대적 배경이 로마 제국의 지배하의 상황이었고, 로마 제국이 다신교와 황제숭배를 하면서 아울러 성매매, 남색문화, 힘과 육체의 숭배, 남근숭배, 검투사와 같이 쾌락과 향락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로마군대 내에서는 동성애가 흥행하였고 이를 통해 전우애가 강해졌다고 한다. 그리스 시대부터 나이 어린남자를 동성애의 대상으로 여기면서 후견인 역활을 하는 문화가 있었다고 한다. 로마는 동성애를 비롯한 변태성욕에 대해 매우 관대한 나라였고 현세의 삶과 육체의 쾌락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보았다.
또한 다신교 종교체제 아래서 황제숭배를 했던 로마제국 지배하에서는 신전 제의식은 당시 이방 신전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행위로서 특히 성적 타락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당시 이방 신전들은 성적 타락의 본거지였기 때문이다. 특히 여사제들이 제사를 드리거나 드린 이후 참배객들과의 섹스를 통해 우상의 신들과 연합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성경의 시각에서는 우상숭배와 음행을 동일하게 보았다.
때문에 성경은 로마 제국의 종교, 문화와 가치관에 대해서는 결코 호의적이 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항상 로마에 대해 적대적일 수만은 없지 않은가? 이에 대해 로마서13장에서는 로마제국의 법과 제도를 잘 따르고 납세의무를 잘하여 정치적 혼란에 휩쓸리지 말라고 조언한다. 로마제국의 정치제도에 잘 적응하여 경제활동을 하면서 제국의 시민으로 살아가되, 거룩한 생활을 철저히 하여 로마의 쾌락과 향락의 문화에는 물들지 말라고 가르친다. 이것이 바울이 가르친 2WAY 전략이다. 이 땅의 신자는 각자가 속한 나라의 시민이기에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하고, 동시에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이 원하는 거룩한 삶의 방식을 추구해야 한다.
롬 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롬 13: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롬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동성애와 후견인 제도
신자가 지켜야 할 윤리
로마 제국하의 성도는 로마 시민들의 죄악과는 철저히 단절되어야 했으며, 도덕적으로 높은 수준의 윤리적인 삶을 요구받았다.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에게 믿음 안에서 자유롭게 하신 자유가 있기 때문에, 그 안에 공고히 서야 했다. 그러나 이 자유를 가지고 육체의 소욕을 만족시키는데 사용해서는 안되었다. 신자들이 믿음 안에서 누리는 자유는 방탕이 아니라 서로를 위해 서로 종으로 섬기는데 있었다. 믿음 안에서의 자유는 절제하는 가운데 빛을 발한다. 바울은 먹고 마시는 방탕에 빠지지 않았다. 바울은 신자들이 음행의 죄를 조장하도록 자유를 남용하기를 원치 않았다. 바울은 무절제함과 육욕을 채우는 일에 이 자유를 남용하기를 원치 않았다.
고전 6: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고전 6:13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바울은 먹는 것은 육체의 본능이기 때문에 앞의 구절과 같이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다는 뜻으로 이 말을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상에게 바친 음식이라 할지라도 몸을 위하여 또는 식욕의 본능을 채우기 위하여 믿음으로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고전 8:8;10:25). 그런데 당시 고린도 교인 들중에는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다] 라는 이 격언을 엉뚱한 곳에 적용시키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고린도 교인들은 식물을 먹는 것이 육체적 본능이듯이 성적 욕구를 채우는 것도 육체적 본능의 발로라고 주장하며 그들의 성적인 타락과 방종을 정당화시키려 하였다.
고전 6:16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고전 6:18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사도 바울이 보기에 그들이 육체의 기쁨을 채우기 위해 도가 지나치게 먹고 마시는 행위는 육체의 탐닉을 위해 음란을 행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태도와 주장을 단호히 거부한다. 왜냐하면 먹는 것과 성적인 욕구는 잠깐 있다가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모두 폐하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새롭게 태어난 몸은 오직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따라 행하며 거룩한 생활 가운데서 주를 영화롭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따라 남녀가 만나 정상적인 결혼을 통해 거룩하고 온전한 성생활을 할 것을 촉구받는다.
고전 7:2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당시 기독교 영지주의 이단의 영향을 받아 영과 육의 이원론을 주장하면서, [우리 영혼은 이미 구원받았다. 원래 부패하고 타락한 몸으로는 우상제물을 먹고 음행해도 상관이 없다. 육체에 죄를 지어도 구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는 이단적 가르침이 성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에 신앙의 자유를 남용하여 전혀 양심에 거리낌이 없었으며, 또한 성적인 탐닉을 추구하여 음행을 행하는 것에도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이것이 계2:20의 두아디라 교회에 나타난 이세벨의 행음사건의 본질이다. 버가모 교회의 발람의 교훈, 니골라당의 교훈과 내용은 이세벨의 행음과 같은 사건이었다.
계 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음행, 더러운 행위, 탐욕, 우상숭배
불신자는 동성애를 인권의 관점에서 본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는 자들에게 성경의 관점에서 동성애를 비판하면 당연히 씨알이 먹히지 않는다. 이처럼 불신자들에게 성경의 윤리를 강제적으로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상식적인 수준에서,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 타당한 수준에서 사회 전반적인 윤리적 문제를 포괄적으로 비판하며, 건강한 사회윤리를 제시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신자들은 성경에 비추어 부끄러움이 없는 정상적인 성생활을 하고 있는가? 겉으로는 거룩해 보이고 다정해 보이지만 서로 담을 쌓고 사는 쇼윈도우 부부는 없는가?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 거룩해 보이지만 정작 음행과 간음, 호색, 성매매를 하는 자는 없는가? 신자는 정상적인 결혼을 통해 거룩하고 청결한 성생활을 추구하고 있는가?
신자는 우상숭배를 눈으로 보이는 형상을 숭배하는 것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눈에 보이지 않는 우상숭배에 대해 경고한다. 엡5:5의 표준새번역을 보라.
[여러분은 이것을 확실히 알아두십시오. 음행하는 자나 행실이 더러운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는 우상 숭배자여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몫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우상이란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하나님보다 더 소중이 하는 마음이나 그 대상이며 그 본질은 탐욕이다. 지금까지 성적인 문란과 탐욕 범주 내에서 동성애와 이성애의 문제점을 짚어 왔지만 우상숭배의 핵심은 탐욕이며, 탐욕의 적용 범위는 넓다. 따라서 성에 대한 탐욕을 넘어서,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탐욕까지 확장될 수 있으며 이는 모두 우상숭배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 만연한 변질된 기복신앙은 탐욕을 축복이라 부르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조건적인 세상적 성공을 최고의 가치에 두기 때문에 탐욕의 죄악을 합리화함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우상숭배에 빠질 위험성이 농후해졌다. 눈에 보이는 우상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정작 교인들의 마음 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눈에 보이는 않는 우상숭배에는 무감각한 것 같다.
따라서 교회와 신자는 음행하는 자와 더러운 자와 탐욕에 빠진 자는 우상숭배자이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경고하는 말씀을 주의 깊게 새겨 들어야 한다. 오늘날 음행과 탐욕과 더러움에 빠지고 있는 교회와 교인들이 없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축복이라는 미명 아래 복을 받아 잘 먹고 잘 살아는게 제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음행과 탐욕과 더러움 가운데 사는 자는 우상숭배자인걸 알고는 있는가? 믿기만 하면 죽어서 천당간다고 믿으면서, 무한대로 죄를 지어도 회개만 하면 무한대로 용서받는 다고 믿는 타락한 자들이, 어떻게 사는 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인지 관심이 없는 자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엡 5:5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포르노스, 불법적 성교에 탐닉하는 남자) 자나 더러운자(아카다르토스, 악한 행위로 인한 도덕적 타락에 까지 불결함의 전(全) 영역, 육체적, 제의적, 도덕적 불결) 나 탐하는(플레오네크테스,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을 더 많이 가지기를 원하는 자, 탐욕스러운 자)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동성애는 미워하되 동성애자를 심판하고 정죄하지 말라
이제 교회와 신자는 동성애는 경계하고 미워하되 동성애자를 심판하고 정죄해서는 안된다. [마 7: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크리노, 심판, 정죄)하지 말라] 과연 그 누가 돌을 들어 동성애자를 내리칠 수 있단 말인가? 과연 돌을 들만큼 죄없이 떳떳한 신자들이 얼마나 있단 말인가? 자신들의 잘못들을 감추고서는 남의 잘못을 심판하고 정죄할 권리가 있을까? 자신들의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동성애자의 티를 빼려고 하는 자세는 모순이다.
그러나 동성애를 인권이나 성적취향의 관점으로 보려는 나이브한 자세는 버려야 한다. 죄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일체의 타협도 없어야 한다. 죄에 대해서는 경각심을 갖고 경고해야 한다. 죄는 누룩처럼 순식간에 퍼지기 때문에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 [갈 5: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신자는 모두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자이기 때문에 동성애자가 회개하면 용서해야 한다. [눅 17: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결론
성경에서 동성애를 비판하는 이유는 육체(사르크스, 죄성, 죄의 주체) 의 일이라 할 수 있는 탐욕과 방탕과 쾌락과 변태적인 호색을 추구하는 성적 탐닉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성애라 할지라도 간음, 음행, 더러운 행위, 호색, 성매매 또한 육체의 일이며 동일하게 비판의 대상이 된다.
동성애든 이성애든 성적 문란은 호색, 술취함, 방탕, 분쟁, 다툼, 탐욕, 사기와 같은 다양한 사회악을 동반한다. 따라서 교회는 동성애만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상식적인 수순에서,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수준에서,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음행, 간음, 탐색, 남색, 도적질, 탐욕, 호색, 향락문화, 중상모략, 사기질과 같은 죄악들을 (고전6:9-10) 함께 비판해야 하며 건강한 사회윤리를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
불신자는 동성애를 인권의 관점에서 본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는 자들에게 성경의 관점에서 동성애를 비판하면 당연히 씨알이 먹히지 않는다. 이처럼 불신자들에게 성경의 윤리를 강제적으로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상식적인 수순에서,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수준에서 사회 전반의 윤리적 문제를 포괄적으로 비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주의 할 것은 죄악의 양태에 대해서는 비판하되 사람 자체에 대해서는 정죄나 심판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이 좋다(요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그리고 고민해야 할 문제들이 존재한다.
과연 거룩하고 고결한 동성애란 존재할 수 있는가?
파트너와 평생 함께 하고 책임을 지는 윤리적이고 합리적인 동성결혼이 가능한가?
환경문제, 심리적 요인, 유전자 변이와 호르몬의 이상으로 인한 성 정체성의 혼란과 동성애적 경향을 어떻게 볼 것인가?
믿는 자가 동성애를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성적 탐닉과 성 문란에 근거한 동성애와 건강하고 윤리적인 동성애는 구별이 가능한가?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성경의 성윤리를 불신자들에게도 강요할 수 있는가?
교회는 세상의 다양한 죄악들에 대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 타당한 건강한 윤리를 어떻게 제시하여야만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