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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원리들

Reformation Principles

John Murray(1898-1975) / 서문 강 역

이 내용은 1953년에 런던의 Evangelical Library의 연례 강좌에서 연설한 것이다.

  

머레이는 1898년 스코틀랜드 서덜랜드(Sutherland) 지방의 크레이크(Creich)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청교도 신앙의 가정에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통해 엄격한 신앙 교육을 받고 자랐다. 대학을 진학하기 위하여 스코틀랜드의 교육 도시인 글라스고우로 옮겨 가서 그곳에서 1919년부터 1923년까지 석사학위(M.A.)를 마쳤다. 그 이후 1924년에 프린스턴 신학교에 유학하여 당대의 유명한 워필드와 메이첸으로부터 개혁주의 신학의 깊은 영향을 받고, 고향인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다시 돌아와 계속 공부하던 중 1929년에 프린스턴 신학교의 부름을 받고 조직신학자 카스퍼 핫지 교수를 돕는 강사로서 신학교와 인연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가 프린스턴에 돌아온 그 이듬해에 프린스턴은 좌경화 문제로 인해 둘로 나뉘어지게 되었고, 그 역사의 현장에 서있던 머레이는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고 철저히 역사적 기독교를 옹호하는 존 그레샴 메이첸을 따라서, 1930년 오스왈드 앨리스(Oswald T. Allis) 그리고 R. D. 윌슨(R. D. Wilson),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 등과 함께 필라델피아에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설립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메이첸이 설립한 정통장로교회의 목사로 안수를 받고(1937넌), 1966년 은퇴하기까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고, 은퇴 이후에도 줄곧 웨스트민스터에서 강의를 하다가 1975년 사망을 하였다.

​머레이는 반틸과 더불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성경적 개혁주의 신학을 대변해주는 대표적 신학자로서, 철두철미하게 분명하고 확실한 언어로 신학을 표현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러한 신학적 입장은 그로 하여금 한번도 애매모호한 언어유희로 신학적 도전을 피해가는 비겁한 일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말하기를 “가장 합당한 신앙적 교훈은 인식적인 앎뿐만이 아니라 실천적 경건을 이루는 것이라”고 하여 기독교 교육의 원리를 강조하였다.


성경 주해에 있어서 머레이의 신학적 강조는 ‘로마서 주석’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듯이 그리스도를 중심한 ‘구속론’에 있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되는 양자됨을 구속적인 특권의 극치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신학과 사상을 그의 삶에 그대로 실천하였다. 주일을 철저히 거룩히 지켰으며, 말을 상당히 조심스럽게 하는 습관이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의를 주재하거나 젊은이들의 넘치는 기상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그 품위와 권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대단했다. 그의 설교는 ‘선명한 설교의 모델’이 되었고, 스코틀랜드 칼빈주의자의 주목할만한 ‘언어 사용’을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학문과 함께 경건을 겸비했던 존 머레이 교수는 구프린스턴과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찰스 핫지-워필드-메이첸으로 이어지는 미국 장로교의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의 맥을 잇는 탁월한 조직신학자로서 길이 남아 뒤를 따르는 후배들에게 좋은 귀감으로 자리잡고 있다. 머레이가 남긴 저술들은 그가 살았던 시대뿐만이 아니라 지금도 탁월한 신학서적으로 인정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기독교 윤리를 다룬 『그의 행동 원리(His Conduct of Condect)』, 『로마서 주석(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Romans(2 vols., 1959, 1965)』, 그리고 그의 독특한 구속관이 제시된 『구속론(Redemption-Accomplished and Applied, 1955)』은 지금도 신학생들에게 널리 사용되어지고 있다.

   

우리가 16세기와 17세기의 프로테스탄트 문헌을 읽어보면, 로마교회를 논쟁의 상대로 삼은 논박(論駁, polemic)의 구조가 매우 광범위하게 틀을 잡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 시기의 성경주해적인 문헌도 로마교회의 입장을 언급하는 진술들이 가득 배어 있습니다. 그런 쟁론을 담은 주해들의 경우에도 그런 프로테스탄트적 성경 해석자들의 사상과 관심에서 아주 멀리 벗어나는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시대가 지나고 난 후 세기들에 두드러진 변화가 보입니다. 그렇다고 로마교회의 주장을 반박하는 분위기가 완전하게 사라졌다는 것도 아니고 그런 로마교회를 상대한 쟁론이 전혀 쓸모없게 되었다는 말도 아닙니다. 다만 강조점의 변화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19세기와 20세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알아보려면 해답을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프로테스탄트 진영 안에 여러 세력들이 각축을 벌이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세력들은 본질상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대항하여 저항하였던 세력들로서 정통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잉글랜드에서 이신론(deism, 자연신론) 운동,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그와 동류라 할 수 있는 운동들이 일어났습니다.

 

이 이신론적 운동은 기독교를 본성적 이성(natural reason)의 수준으로 하락시킨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복음이 복음적인 열정을 결핍한 생명 없는 도덕주의로 보이는 경향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 관점이 프로테스탄트의 전체 운동에 광범한 영향을 미쳤고, 역사와 신학의 재구성과 가장 친밀한 논리적 함수관계를 가지고 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19세기에 절정에 이릅니다. 슐라이마허(Schleiermacher)와 릿츌(Ritschl)의 신학들은 바로 이러한 운동에서 파생되어 자란 것으로 밖에는 이해될 수 없습니다. 곧 이 신학들은 계몽주의(啓蒙主義, enlightenment)의, 합리주의(合理主義, rationalism)의 반작용, 또는 반감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니 보다 최근 세기의 논박들의 대상이 그에 비례하여 프로테스탄트 경내 안에서 칩거한 사상(思想) 운동들이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갈등은 항상 상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250년 전, 또는 100년 전, 또는 50년 전에 못지않게 이 갈등을 겪어야 합니다. 기독교 논박의 형태는 시대가 지날 때 마다 바뀔 것입니다. 그 형태는 역사와 전혀 무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상대할 원수(怨讐)가 시대마다 모양은 달리 취하겠지만 그 악의 본질은 항상 그대로일 것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논박의 국면에서 16, 17세기의 개혁자들이 가졌던 열정이 덜해진 이유를 이해하기란 아주 쉽습니다. 18세기 합리주의로 말미암아 야기된 갈등에서 어느 정도까지는, 로마교회 신학자들과 비평주의 신학자들이 진리를 위해 싸우는 프로테스탄트 논객들의 적수들이라기보다는 동맹자들로 보일 수도 있었고, 사실이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문해야 합니다. 우리 선조들로 하여금 서구 기독교국을 분열시킬 것을 요구하였던 사상체계와 삶의 방식에 대한 논박이 소실되어 간다 하고 그 열기가 식어지는 것이 정말 정당한 것인지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정통 기독교가 지금도 프로테스탄티즘 내에 작용하고 있는 불신앙적 세력을 상대하여 투쟁할 근거를 제공하였고, 그 유산(遺産)을 갖추어 주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이 그 유산을 위해서 로마교회를 대항하여 저항하였던 것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후회스런 두 가지의 결과를 초대하였습니다.

 

첫째로, 로마교회와 논박할 터전을 상실한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그 문서발행과 공세적 선전(宣傳)에 결코 수동적이지 않고 아주 적극적입니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들은 문서에 있어서도 무장되어 있지도 않고, 로마교회의 문서발행과 공세적인 능동성에 상응할 만한 공세적 활동을 보이지도 않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과 운명에 로마교회가 끼치는 불길한 영향을 대응할 것을 계산하고 대처하는 조처도 취하지 않고 있습니다.

 

둘째로, 로마교회의 위협에 대한 바른 경계심도 갖지 않아 정통 신앙과 삶을 위한 영적 전쟁의 전선(前線) 전체를 따라 우리를 유도할 전망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프로테스탄티즘 내에 있는 파괴적인 세력들을 대항하여 벌이는 논쟁은 근본적으로 다른 기본 이슈들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때의 기본적인 이슈들은 무엇이었습니까? 저는 여기서 두 가지 이슈만 다루어 보겠습니다.

   

1. 권위(權威, Authority)

이 권위의 문제가 16세기 종교개혁의 중추적인 문제였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믿음과 실제, 특히 믿음과 예배의 문제들에서 무엇이 권위인가?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어째서 우리가 그것을 믿어야 하는가? 어떻게 예배하여 하는가? 어째서 우리가 바로 그 특별한 방식으로 예배해야 하는가? 바로 그 문제를 두고 첨예한 전투가 벌어졌었습니다. 로마교회는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無誤性)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교회는 전통(傳統,혹은遺傳, tradition)과 교회의 권위도 함께 주장하였습니다. 바로 그 두 가지 사실은 다음과 같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전통의 권위와 교회의 권위는 사실상 하나입니다. 로마교회는 경건의 느낌을 존중하며 전통들을 경외합니다. 로마교회는 바로 그 전통과 경건의 느낌들은 다 그리스도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구전(口傳)으로(orally) 지시된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로마교회는 성경과 동등하게 이것들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이 전통들은 ‘기록이 없는’ 전통들입니다. 로마교회는 주장하기를, 그것들이 ‘보편교회’(Catholic Church)(로마교회는 자기 교회가 바로 ‘보편교회’라고 주장하고 있다. - 역자 주) 안에서만 보전되어 전수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교회는 이러한 전통들을 보유하고 지키는 관리인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계승자들로서의 교회의 공적 사역자들은 이 전통을 보유하고 있는 기관(器官)들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통은 교회가 각 세대 속에서 견지되어야 하며, 그것이 교회의 살아 있는 목소리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전통에 대한 이 관점이 얼마나 느슨하고 편리하게 변형될 수 있는지를 여기서 간파해야 합니다. 새로운 교의(敎義)와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새로운 규례가 ‘전통’이라고 주장되면서 권위 있게 선포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에 대한 좋은 예로 1854년에 반포된 마리아 무염시태설(無染始胎說, Immaculate Conception), 1870년의 교황 무오설, 1950년의 동정녀 마리아 몽소승천설((蒙召昇天設, Assumption of Virgin) 등입니다. 이런 모든 일들은 성직자단을 교회로 보고, 그 교회의 중심은 로마 감독이라고 보는 교회관에 입각하여 교회가 하나님의 살아있는 음성이라는 입장을 반영한 것입니다.


(2) 성경은 교회가 해석하여야 하며, 성경이 무엇을 의미하고 말하고 있는 것을 해석하는 권위는 교회에 있다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본질을 들여야 보면 로마교회의 최종적인 권위는 교회이며, 이는 로마교회의 성직자단의 꼭대기에 교황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870년에 교황 무오성의 교의가 반포된 일은 바로 이런 식으로 권위 사상을 발전시킨 결과였습니다.

 

이는 어떤 일을 함축하고 있습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이는 결국 인간들의 양심은 인간들의 지시와 인간들이 세운 법령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식입니다. 그것은 우리 종교의 근본적인 성격과 예배, 그리고 권위의 원리를 표현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 삶에 거의 어떤 차이도 가져 오지 못합니다. 만일 사상과 믿음과 양심과 삶과 행실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권위나 인간이 작성한 어떤 실체에 부복한다면, 그것은 상대적으로 이 권위를 주장하는 형태가 무엇이냐에 상관없이 아무런 차이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그것이 교황의 권위를 내세워 역설되든지 아니면 모든 교회 성직자단 전체가 하나가 되어 압력을 행하사여 나온 것이든지 간에, 아니면 신자들이 합동하여 나온 자기들의 소견(所見)들을 종합한 것이든지 간에, 아니면 사회(社會)가 원하는 뜻이라는 식으로 나온 것이든지 간에, 그것도 아니고 최대 다수의 최다 선(善)으로 추정된다는 식으로 주장된 것이든지 간에, 그것도 아니고 정치 지도자의 뜻이라는 형태로 주장되든, 개인의 양심이나 뜻의 차원으로 주장되든 간에, 결과는 항상 동일합니다. - ‘자기가 자기를 다스리는 정부’(self- government)의 속박과 노예와 폭군적 행태에 불과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양심의 자유를 정말 대단히 존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옳았습니다. 양심의 자유는 기독교의 자유, 곧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상관됩니다. 그러나 양심의 자유만 고집하게 되면 비열한 노예 제도처럼 사람을 속박하게 됩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Westminster Assembly)의 신실한 총대들이 양심의 문제에 관하여 정말 고상하고 정말 정확하고 진술한 여러 문장들 중 하나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제 20 장 2항을 들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 양심을 인간들의 교리들과 명령들에 매이지 않고 자유하게 해 놓으셨다(God ····· hath left it from the doctrines and commandments of men).” 정말 정미한 진술입니다. “인간들의 교리들과 명령들에 매이지 않고 자유하게 해 놓으셨다.” 그렇게만 진술하고 말았다면 그 양심의 문제를 충분하게 말한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거기에 어떤 ‘인간의 교리들과 명령들인지’를 규정하는 어구가 부연되어 있습니다. “어떤 일에서든지 하나님의 말씀과 위배되는, 또는 믿음이나 예배의 문제들에 있어서 말씀을 벗어난(which are, in any thing, contrary to His word; or beside it, if matters of faith, or worship).” 이는 정말 중요한 부연입니다. 특히 믿음이나 예배하는 문제들에 있어서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과 위배되는 것 뿐 아니라 말씀을 벗어난 것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그 신앙고백이 거기서만 멈추었다 해도 충분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만일 거기서만 멈추었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기독교적 자유와 양심의 자유에 대한 ‘대헌장’(magna charta)이 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만이 양심의 주(主)가 되신다. 하나님께서는 양심으로 하여금, 어떤 일에서든지 하나님의 말씀과 위배되거나 믿음과 예배의 문제들에 있어서 사람들의 교리들과 명령들에 매이지 않고 자유하게 해 놓으셨다.” 그것이 없으면 나머지 모두를 소극적인 부정문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을 주요한 요점은 “하나님께서만이 양심의 주가 되신다”는 적극적인 진술입니다. 양심의 자유는 본질적으로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가 아닙니다. 물론 당연한 결과와 귀추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양심의 자유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권위에 매이는 것이며, 하나님께만 속박을 당하는 것입니다. 루터(Martin Ruther)는 보름스 의회(Diet of Worms)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교황들과 공의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의 포로일 뿐입니다.”

 

종교개혁의 이슈가 그 선언 속에서 집약되었습니다. 프로테스탄티즘 자체 내에서 우리가 치러야 할 싸움에서 중심적인 이슈는 바로 그것입니다. 프로테스탄트 진영 밖에서나 안에서나 영적 전투의 전체 전선(前線)을 따라 오늘날 우리가 싸워 지켜내야 할 이슈가 바로 그것입니다. 로마교회와의 논쟁에서 그 권위의 이슈는 결코 의미를 조금도 상실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최근에 선포된 로마교회의 교의와 동정녀 마리아 몽소승천설 속에서 바로 그 이슈가 새롭게 부각된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성경의 최우위성, 충분성, 최종성의 문제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오직 유일한 주권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무엇 보다 먼저 종교개혁 시대에 그것을 주도한 영혼들의 활동 영역 속에서 추구되었고 승리를 거두었던 바로 위대한 이슈에 대한 이해와 평가로부터 우리가 끌어내는 전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 문제가 결코 학문적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루터는 그 이슈를 위하여 싸우느라고 거의 기진하여 절망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는 인간 권위의 속박에서 건짐을 받아서, 오직 성경의 굳건한 반석 위에서 해방된 자유인으로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것이 바로 새롭게 구축된 믿음의 주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칭의’의 조항만 절박한 위기를 만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칭의의 교리가 함축하는 것과 관련하여 더 광범위한 문제는, 내가 무엇 위에 서야 하느냐?의 문제였습니다.

 

보름스에서 루터의 저항적 선언,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의 포로일 뿐입니다.”라는 선언 속에 그 더 광범위하고 깊은 문제가 요약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지배하는 오직 유일한 권위이며, 우리를 지시하고 우리를 판단하는 척도의 규범이 됩니다. 여러 세기들에 걸쳐서 그 문제는 가장 단순한 대칭적 반명제들로 단순화되어 ‘하나님의 주권이냐’ ‘인간의 자율이냐’로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인간의 자율성의 문제는 다중적인 형태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시험자가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유혹을 하였을 때에 인간이 맞게 최초의 갈등 영역에서 처음 등장하였던 그 도발적인 형태를 항상 속에 두고 있습니다.

   

2.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Salvation by grace)

우리는 품삯과 은혜의 선물 사이, 공로와 은혜 사이의 구분에 대하여 익숙하여 있습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이 값을 요구하지 않는 은혜로 주어진다는 사실이 죄에서 구원받는 것을 보편적으로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게 할 수 있습니다. 선물을 받는 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그 은택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우리 편에서 수고하여야 할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특히 영생의 선물을 주신다하고 할 때에도 여전히 그러합니다. 그런데 복음이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놀랍고 이상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시고 값없이 은혜로 구원하여 주신다는 개념을 사람들이 고맙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구원은 인간 사고(思考)의 전체 성향과 배치되는 것입니다. 다만 사람들이 스스로 고안하여 낸 종교적인 체계들을 재고하기만 하면 금방 그 원인을 발견합니다. 사람들은 모종의 공로적인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 또는 신들의 은총을 확보한다는 개념 위에 자기들의 종교를 구축합니다. 기독교가 타락하고 왜곡되게 되면 역시 같은 노선을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 왜곡된 기독교는 항상 동일한 그러한 충동에 자리를 내 주기 마련입니다. - 사람들은 자기들의 의를 구축하기 위하여 방황하며, 하나님의 의(義)에 우리 자신을 복종시키지 않습니다. 보름스에서 루터는 말하였습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과 그 말씀에 저촉되는 문제입니다. 또한 영혼 구원의 문제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정말 의미 있게 서로 떨어지지 않게 조밀하게 하나로 짜여 져 있는 짝들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영혼의 구원’!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와 자기 영혼의 평안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자서전에서 뿐 아니라 종교개혁의 역사에서도 유명한 에피소드입니다. 금식하고 밤을 새워 기도해도 괴롭고 뒤틀린 영혼을 가진 루터의 마음과 생각은 얼마나 무서운 절망에 사로잡혔던지요! 그 일화는 아주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때로 충분하게 인식들을 하지 못하고 있는 한 가지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루터의 모든 갈등과 그 마음과 양심의 고통의 중추가 되는 것인데, 하나님의 엄위하심에 대한 깊은 이해가 그로 하여금 그런 고통에 처하게 만든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이해를 하고 나니 자기 양심의 가공스러운 가책을 이겨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로마교회가 사이비 복음적인 체계를 통해서 구체화시킨 바로 그 ‘공로 구원의 전체계’의 이면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다른 무엇보다도 한 가지의 요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위엄과 거룩에 대한 그릇된 이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죄의 극악성의 진상을 평가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의 의(義), 특히 인간이 고안하여낸 의(義)를 하나님께 제출하면 인간의 죄책을 무마시키고 상급을 받을 근거가 될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은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엄청난 모독입니다. 그 자체가 정말 깊고 극악한 불의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입니다. 왜냐하면 그 복음에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사실 만큼 하나님 앞에 총애를 받아내겠다는 구실로 제출한 인간적 의(義)의 거짓됨을 통째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칭의(稱義)의 복음이 선포하는 것이 바로 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 경우에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 고유하게 존재하는 공정을 의미하는 의가 아닙니다. 도리어 신의 성품이 배태(胚胎)된 의입니다. 그 의는 신적 속성으로서의 의가 아니라, 신적인 여러 속성들과 함께 하는 의입니다.

 

그 의는 믿음에 계시된 의입니다. 그러니 단순한 인간적인 불의와 대조되는 의(義)가 아니라 인간적 의와 대조되는 의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의와 대조되어 하나님의 의가 부각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의(義) 대신 그 자리에 인간의 의를 대체시켜 놓으면 그 자체가 가장 큰 불의가 되며, 진정 불의의 총체가 되는 셈입니다.

로마교회의 행위 종교는 복음 안에 있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중추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9)

 

만일 우리가 이러한 전망과 시각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의 복음을 분별하는 능력을 주신다면, 이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이슈를 위해서 이 시대에 다시 전투를 벌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로마교회의 체계는 하나님의 의를 대적하기 위해서 세워놓은 인간 자율성의 체계입니다. 권위의 문제에 있어서 로마교회가 하나님의 권위를 대항하여 인간의 권위를 세워 놓은 것 같이, 로마교회의 구원관은 하나님의 권위를 대항하여 자기의(自己義)의 형태로 나타난 ‘인간 자율성’의 체계입니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 속에는 두 성향이 깊이 뿌리 박혀 있습니다. 그 둘은 바로 율법주의와 제멋대로 하는 싶은 자율성의 성향입니다. 서로 상반되어 보이고 같은 인격 안에서 동시적으로 공존할 수 없어 보입니다. 만일 그 둘이 서로 충돌하는 것이라 인정한다 해도 그 둘이 공존할 수 없다는 논리가 형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가 풀어 낼 수 없이 엉켜있는 모순의 넝쿨로 그 둘을 감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직 진정한 의미의 모순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진리와 오류사이, 옳은 것과 그릇된 것 사이,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 사이, 하나님과 죄 사이의 모순입니다.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Antinomianism)은 둘 다 잘못되었습니다. 그 둘은 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의 진수를 표현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둘은 우리의 부패한 성품 속에 함께 고착되어 있습니다. 율법주의는 은혜를 충돌하고, 반율법주의는 율법을 충돌합니다. 전자는 우리로 하여금 구원하고 구속하는 은혜의 복음을 대적하고, 후자는 하나님의 주권과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대적합니다. 이 두 악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왜곡시키는 가장 악독한 폐해가 나옵니다. 로마교회는 이 둘을 교묘한 기술로 조합한 실례이며, 프로테스탄티즘은 자주 이러한 성향들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긴장을 가지고 싸워야하며, 동시에 16세기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주도적 그 원리를 고수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종교개혁 때의 쟁론(polemic)은 폐물이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영혼들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로 인하여 해방된 영혼들이 있는 한 그 쟁론은 계속 될 것입니다. 로마교회가 존재합니다. 그 로마교회가 사람들의 영혼을 속박하고 있습니다. 또한 흑암을 배경삼아 영혼을 속박하는 체계를 가지고 있는 종교가 사람들에게 생명의 소망을 주겠다고 덤비고 있습니다. 로마교회가 인간적인 의를 제출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한에서는 거룩한 의분(義憤)으로 잘 조직화하고 정교화 한 그 체계를 대항하여 일어설 필요가 있습니다. 그 체계는 수백만 영혼들의 충성을 받아 내고 있는데, 기독교란 이름을 달고 있는 다른 어떤 체계로는 어느 체계로도 극복되지 않을 인간 자율성의 원리 위에 서 있는 체계입니다. 우리는 사도가 다음의 말씀을 기록할 때 가졌던 그 거룩한 분노감으로 불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9).

 

- 진리의 깃발 116호

[출처] 종교개혁의 원리들 - 존 머레이(John Murray, 1898-1975)|작성자 바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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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과 통합의 차이점 
 

합동과 통합의 차이점에 대하여

보통 사람들은 WCC 때문에 나뉘어진 것만으로 아는데 이후에 신학적인 노선이 달라졌고

뿌리가 달라졌습니다.

이들의 차이점을 살펴보려면 일단 우선적으로 살펴봐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1) 신앙고백 (2) 미국 근대장로교회사

 

(1) 장로교회(영미)와 개혁교회(화란)의 신앙고백으로 벨직 신앙고백,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도르트 신경,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이중에서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을 주의깊게 살펴봐야 하는데 이 신앙고백이 변화를 겪기 때문입니다.

1647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작성될 당시에는 33항으로 3항과 10항에서 제한속죄론(즉 예정론)을 기반으로 하였는데 알미니안주의가 미국 뉴욕 유니언 신학교를 중심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1903년 미국 북장로교회는 신앙고백을 35항으로 개정하고, 3항. 10항에 대해서 보편구원론적으로 바꾸게 되었지요. 더군다나 34항은 성령에 관하여 35항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2) 1903년 신앙고백이 개정된 이후 북장로교회는 1906년 알미니안주의를 지지하며 탈퇴했던 컴버랜드 장로교회와 합동하면서 프린스턴 신학이라 불리던 정통 개혁주의가 도전을 받게 되고 벤자민 워필드 등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그 신학전통을 지켰으나 프린스턴 신학교 또한 신학에 대하여 포용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에 찬성한 자들이 있고 반대한 자들이 있는데 반대한 대표적인 사람이 세계적인 신약학자였던

그레셤 메이첸이었습니다. 메이첸은 계속해서 자유주의에 대해서 방어하고자 했으나

북장로교회는 이미 넘어가고 있던 상황이었고,

1929년 메이첸과 그의 제자 등은 필라델피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하고 독립선교부를 운영합니다.

하지만 북장로교회는 용납하지 않았고 그들을 제명시켰습니다.

그 결과 1936년 메이첸은 미국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in America)를 세웠지만

북장로교회의 (PCUSA)와 비슷하다 하여 여러 압박이 들어왔고

1939년 교단 이름을 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로 바꿉니다.

 

통합과 합동은 크게 3가지면에서 차이가 납니다.

 

첫째. 그들이 계승하는 신학이 다릅니다.

1959년 WCC를 이유로 교단이 분열했을 때만 해도 신학은 비교적 같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통합의 경우에는 에큐메니컬 신학에 근간한 보수 신앙을 추구하며

개혁주의 신학의 20세기 계승자로 칼 바르트를 뽑고 있으며 대체적으로 칼 바르트 신학을 따라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합동 측의 경우에는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를 따르며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신학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통합 측에서는 흔히 박형룡 박사와 메이첸 박사가 칼바르트에 대해 알지 못하고 비판한다고 주장하는데

정작 칼 바르트 비평의 영향을 준 것은 <변증학>의 권위자 반틸과 박윤선 박사였다는 것을 알기를 바랍니다.


둘째. 그들이 교류하는 교단이 다릅니다.

통합은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와 스코틀랜드 개혁교회, 프랑스 개혁교회 등과 교류하고 있지만

합동은 미국장로교회(PCA - 이 교단은 남장로교의 좌경화에 반발하여 세워진 교단임)와 정통장로교회(OPC)와 자매교단처럼 교류하고 있으며 미국의 기독교개혁교회(CRC)와도 교류하고 있지만

여성목사 안수와 칼 바르트 신학 등에 대한 포용적 자세로 인해 교류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많은 것도 사실이며

기독교개혁교회는 합동 측보다는 합동 비주류에서 시작한 백석 측과의 교류가 더 많은 편이다.

 

셋째. 사소한 면에서 차이가 난다.

통합 측의 경우에는 예배에 있어서도 성찬 중심, 예전 중심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합동 측의 경우에는 말씀 선포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강단의 구조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 증명한다. 통합 측 교회를 가면 대부분 강대상 뒤에 성찬상을 두고 있으며

목회자들의 경우에 스톨을 걸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합동 측 교회에서는 강대상 외에는 다른 것을 강단에서 찾아볼 수 없고

목회자들이 성의를 입지 않는 경우들도 많아졌지만 입는다 하더라도 스톨을 걸치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통합 측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있어 35항을 채택한 1903년 판을 따르고 있으며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 (1986) 과 21세기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 (2001)을 채택하고 있다.

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16C 신앙관을 다루고 있으므로 21C에 맞는 신앙고백이 필요하다는 시각에 따른 것이었다.

또한 통합은 대소요리문답의 경우 대요리문답은 채택하지 않고 소요리문답만을 채택하여 <요리문답>으로서 세례 시에 가르치고 있다.

반면 합동의 경우 1647년 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으며 대소요리문답을 그대로 채택하고 있다. (대요리문답은 목회자들을 훈련하는 등 성인들을 대상으로 두고 있는 것이며 소요리문답은 청소년들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통합은 여성 목사 안수를 허용하고 있으며 여성 장로 장립도 허용하지만

합동 측은 딤전 2:11 - 12과 고전 14 : 33 - 34를 근거로 여성 목사와 여성 장로를 거부하고 있다.

또 축도에서도 차이가 있는데 합동 목사는 고후 13 : 13를 근거로 끝부분에 "함께 계실지어다."로 마무리하지만

통합 목회자들은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로 끝내고 있다.

 

칼 바르트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에 대해서 더 알고싶으신 것이 있다면 개혁주의를 연구하는 단체(SDG 개혁신앙연구회) 등에서 배우시고 더 전문적인 것이 필요하시다면 <개혁신학회>에 들어가셔서 2012년 봄에 장로교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발표된 논문들이 게재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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