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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내전위기 뿌리는 1400년된 수니-시아 갈등

 

이슬람 양대 종파인 시아파와 수니파간의 뿌리깊은 종파 간 갈등이 이라크를 내전 직전의 위기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

 

두 종파의 갈등은 이슬람교 창시자인 무함마드가 632년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사망한 이후 누가 그의 자리를 승계할 것인가를 두고 시작됐다.

 

수니파는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 등 회의를 통해 선출된 4명의 칼리프를 합법적 후계자로 인정한 반면,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만을 유일한 후계자로 인정했다.

 

이후 제4대 칼리프인 알리가 661년 암살되고서 우마이야 왕조가 들어섰지만, 680년 알리의 차남 후세인마저 반란을 일으키다 참혹하게 살해당하면서 수니파에 대한 시아파의 원한은 더욱 커졌다.

 

두 종파는 코란을 경전으로 삼는 점은 같지만, 구체적인 교리와 종교의식은 구별된다고 AP통신과 종교전문통신사 RNS 등은 13(현지시간) 보도했다.

 

우선 수니파는 이슬람교 지도자는 자격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 선출될 수 있다고 믿지만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자손만이 후계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 이슬람 교단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이맘'에 대한 정의가 다르다. 이맘은 수니파에서 일반적으로 종교 집회를 인도하는 사람을 가리키지만, 시아파에서는 무함마드의 승계자이자 절대적 권위를 갖는 최고 성직자라는 의미까지 갖는다.

 

기도를 드리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다. 시아파는 손을 옆구리 옆에 두고 기도하지만, 수니파는 가슴이나 배에 손을 엇갈려 얹은 채 기도한다.

 

전세계 이슬람교도 가운데 수니파가 전체의 85%를 차지하는 다수파이고, 나머지 시아파는 수적 열세를 보이고 있다.

 

나라별로 수니파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시리아, 이집트, 예멘, 레바논,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대부분 국가에서 다수 종파지만, 시아파는 이란과 이라크 등에서만 다수 종파다.

 

시아파가 정국주도권을 잡아온 이란과는 달리, 이라크는 시아파가 다수 종파임에도 수니파가 줄곧 정권을 잡으면서 시아파가 박해를 받았다.

 

소수 수니파인 사담 후세인 정권이 2003년 미국의 침공으로 마침내 무너지면서 시아파가 득세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으나 기득권을 상실하게 된 수니파의 저항은 끊이지 않았다.

 

20062월 시아파 주요 사원인 이라크 북부 사마라의 알-아스카리야 사원의 황금 돔이 폭파되자 시아파는 이 공격을 수니파의 소행으로 확신해 보복공격을 감행했으며 양 종파간 유혈사태는 이듬해까지 수천명의 사상자를 낳았다.

 

최근 이라크에서는 급진 수니파 반군세력인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ISIL)가 시아파인 누리 알말리키 총리 정부군과 교전을 벌이며 주요 도시들을 빠르게 장악하고 있다.

 

시아파 맹주국 이란이 이라크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군을 파병한 것으로 알려지고 수니파 대국인 사우디아라비아도 개입할 가능성이 거론되면서 수니파와 시아파 간 갈등에서 촉발된 이라크 사태가 중동 전역으로 확산할 조짐마저 나타나고 있다.

 

출처 / (서울=연합뉴스) 이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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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확산

 

무람마드 사후 예언자의 지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무함마드는 예언자들의 '봉인'으로서 마지막 예언자였기 때문이다. 후계자 Caliph는 무함마드로부터 예배와 전쟁에서 공동체를 이끄는 일, 계시에 따라 판결하는 일을 집행한다.

 

아부 바크르와 아라비아의 통합

 

무함메드 사후 칼리프 선정 문제 논란이 있었다. 무함메드의 가까운 동료들인 Muhajirin(이주자) 또는 Ansar(돕는자)들은 자신들이 칼리프를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통주의자들은 계승의 세습 원칙 지지하며 파티마와, 사촌이며 사위인 Ali지지했고, Ummayads(무함메드 부족의 지도자들)는 자신들이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Ansar 들이 주도권 잡고 아부 바크르를 칼리프로 선출했다. 무함마드 사후 자유분방한 베두인들이 이슬람의 조세제도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아부 바크르가 진압했다. 아부 바크르(632-634 재임)2년간 칼리프로 있다가 사망했다.

 

그 후 전투를 통한 부족 통합이 이루어졌고, 통합을 기반으로 외부 세계 공격이 이루어져 시리아를 공격하고, 이라크와 팔레스틴 남부까지 진출했다.

 

우마르와 정복

두 번째 칼리프 우마르(634-644 재위, 이븐 알-하탑)Khalid ibn al-Walid를 보내 635년 시리아 다마스커스를 정복했다. 이 정복은 헬레니즘 지배체제에 불만 가졌던 지역민의 협력에 힘입었다. 638년에는 예루살렘을 정복했고, 640년에는 가이사리아를 정복했다. 639-641년에는 이집트를 정복했으며, 1세기 후에는 스페인까지 진주했다. 동쪽으로는 사산조의 페르시아까지 정복(640-649)했다.

 

승리의 원인은 우선 피정복지 거주자들이 전쟁을 싫어하고 내적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능수능한한 기마술과 재빠른 기동성을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전사들의 강한 열성과 종교적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리품의 5분의 4는 전사들의 몫이며, 전투에서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믿음이 있었다.

 

권력투쟁

정복으로 인한 아라비아의 무슬림들은 경제적 부를 누렸다. 이에 따라 권력 투쟁이 가열되었다. 우마르가 기독교인 포로에 의해 644년 살해된 후 정치적 분쟁이 시작된다. 무함메드의 동료이자 사위인 우스만 Uthman(우스만 이븐 아판)이 칼리프로 선정(644-656)된 후 대다수 고위직에 자기 부족원(우마이야 가 : 원래 우마이야가는 무함마드 탄압에 앞장섰던 가문) 임명으로 물의를 빚어 반대파 무슬림들에 의해 메디나에서 656년 쿠란 읽고 있던 중 살해된다. 이 우스만은 쿠란의 편집 완결지었다.

 

Ali(무함마드의 백부 아부 탈립의 아들이자 파티마의 남편)656년 다음 칼리프에 선출되었다. 그는 우미이야가의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와 대결에서 피동적 자세를 취하다 반대파들에 의해 살해 되었다. 시핀 전투에서 승리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무아위야가 제의한 평화협정을 수용해서 격분한 무슬림 일파(이들이 하와리즈파(이탈자들))가 분리하고, 661, 하와리즈파 무슬림이 알리 살해한 것이다.

 

개괄적 정치사 661-1900

알리 살해 후 우마이야 부족이 칼리프직 장악하고 무아위야가 자신을 알리의 계승자라고 선포(661)하고, 우마이야조 the Ummayad caliphate를 설립했다. 이것은 아랍적 통치술과 기사도 정신이 주도한 왕조였다. 우마이야조 통치자들은 시리아에 거주했으므로, 메디나는 독실한 신자들이 모이는 도시가 되었다. 691년 우마이야조 무슬림 군대는 대서양 해안까지 진출했고, 711년에는 지브랄타 해협을 건넜다. 그리고 같은 해 트란스옥시아나 지방(파키스탄 남부)과 인더스 계곡 하구 신드 지방을 정복했다.

 

680년 무아위야의 아들 야지드 즉위한다. 이에 알리의 아들 후세인이 패권에 도전했다가, 정월 10일 이라크 남부 카르발라 전투에서 살해 되었다. 쉬아파는 오늘날까지 그의 기일을 추모하고 있고, 이 전투에 대한 추모에서 마르티야(悲歌)가 생겨났다. 쉬아파는 자기 몸 채찍질하며 행진하는 추모행렬, 수난극 공연을 하고 있다.

 

한편 우마이야조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같은 시기 메카에서 칼리프 도전자 나타났는데, 무함마드의 동료 주바이르의 아들 압둘라(684 사망)가 우마이야조에 반기를 들었다. 알리의 당파(쉬아트 알리)가 강력한 정치세력 형성하고 있던 이라크에서는 새로운 교리가 나타났다. 알리 가문의 인물이 장차 돌아올 것이라는 사상이다. 아랍 정복자들과 마왈리(비아랍계 무슬림)들 사이의 갈등이 이라크에서 싹텄다. 쿠란이 보장한 신자들 사이의 평등을 요구했고, 이러한 흐름이 하나의 정치적 운동 형성하고, 칼리프 위는 무함마드 가문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라크, 이란 지방의 친 알리 정서를 이용한 혁명을 성사시킨 이 운동의 주도자들은 예언자의 삼폰인 압바스의 한 후손에게 넘김(749)으로써 압바스조 the Abbassids가 우마이야조를 스페인으로 몰아내고 바그다드 천도를 단행한다. 이에 알리 가문 추종자들은 다시 실망하게 된다.

 

스페인에서는 움마야드 후손들이 독자적 칼리프제를 확립했다. 우마이야 가의 마지막 생존자는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으로 도주하여 756년 그곳에 왕국을 세우고 아랍문명을 꽃피웠다. 스페인 우마이야 왕국은 압두르 라흐만 3세 재임시(921-961)에 전성기를 이룬다. 이 시기 무슬림, 그리스도인, 유대인 사이의 문화적 협력 이루어졌으나, 그 후 수많은 소왕국으로 분열된다. 북아프리카 베르베르족들이 이베리아 반도로 진출 이곳을 지배했다. 존속할 수 있었던 유일한 무슬림 왕국은 그라나다를 중심으로 한 바누 아흐마르 왕국뿐이었다.

 

압바스조는 종교적 율법에 충실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려 노력했다. 우마이야조가 아랍적었다면, 이들은 이슬람적 제국을 지향했다. 756년 바그다드 천도 이후 페르시아 문명의 영향이 침투했다. 9세기 말 칼리프 권력 쇠퇴하게 되자 중앙아시아에서 유입된 터키 출신 용병과 전쟁 노예(맘룩)이 정부를 보호하다 결국 각기 자신의 왕국을 세웠다. 바그다드의 전성기는 천일야화로 알려진 하룬 알 라쉬드(786-809) 재임시였다. 하룬의 아들 마문(813-833)은 그리스 철학서와 과학서적의 번역 사업을 장려했다. 후에 이 학문적 유산이 스페인 번역사들의 소개로 다시 유럽으로 역수출되었다.

 

압바스 제국 변방 영주들이 독립하여 각각 통치 지역을 차지했다. 이들은 술탄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처음 사용한 통치자는 페르시아계 쉬아파 왕조인 부이조를 건국한 무이즈 앗-다울라로 945년 바그다드의 실질적 통치권을 장악했다. 이로써 칼리프는 상징적 존재로만 명목을 유지했다.

 

이집트에서는 두 개의 터키계 왕조가 압바스가의 지지자가 되었다. 그러나 쉬아파 파티미조에 의해 969년 멸망했다. 동쪽에서는 터키계 술탄 가즈나의 마흐무드가 인도, 아대륙으로 확장되었다. 1026년 라호르는 인도 가즈나 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이로써 페르시아 문명이 벵갈, 데칸 지역까지 진출했다.

 

아랍어가 이슬람 세계의 신학 용어로서 지위를 유지했지만, 발칸반도에서 벵갈만에 이르기까지 주로 페르시아어가 의사소통 수단으로 통용되었다. 그후 무슬림 제국이 여러 자치지역으로 분열되며 쇠잔 시작했다. 팔레스틴과 이집트 인근에서는 무함메드의 딸 파티마에 연원을 둔 시아파 Shiite의 파티마조 Fatimid909에서 1171까지 통치했다. 11세기에 셀주크 터어키인들 Seljuk Turks가 페르시아, 이라크, 시리아 장악 후 이집트, 비잔티움 국경까지 진주했다. 1055년 셀주크족 영주 투그룰 벡은 쇠퇴한 압바스 칼리프의 수호자로 군림했다. 이들은 철저한 순니 무슬림으로 근동에서 가장 중요한 제국으로 성장했다. 1071년 비쟌틴군을 대파하여 아나톨리아 지방으로 진출할 길을 열었다.

 

비슷한 시기 십자군이 침입하여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무슬림의 반격이 이어졌다. 순니파 Sunnute 살라딘 Saladin이 이집트 파티마조를 멸망시키고, 예루살렘을 다시 점령(1187)했다.

 

1220년 몽골인들이 침입 이슬람 문명 파괴하고, 압바스 제국을 굴복시켰다. 마지막 칼리프는 1258년에 목숨을 잃고, 바그다드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몽골인들은 이집트의 맘룩조 the Mamelukes에 의해 추방되고, 이들은 1세기 남짓 이라크와 페르시아 등지에서 살다가 주로 수피즘을 통해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몽골 세력 쇠퇴 후 4개의 이슬람 제국이 출현했다. 옥서스 Oxus 강 분지의 우즈백조 Uzbek, 페르시아의 사파이조 Safawi, 인도의 무갈조 Mughal, 소아시아의 오토만조 Ottoman가 그것이다.

 

13세기 소아시아에서 흥기한 오토만 터어키인들은 1453년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 점력후 16세기에는 비엔나까지 진격하였다가 퇴각, 남쪽으로는 이집트까지 장악한 후 1차 세계대전까지 존속했다.

 

초기의 무슬림 사상

 

Hadith의 편찬

하디스는 무함메드 자신, 또는 동료들이 보고한 무함메드의 언행 수집한 것이다. 이 외에 여러 가지 전승들이 무함메드 생존시 확립된 관습, 관례, 선례들을 설명하고 있었다. 무함메드 사후 2세기가 지나면서 신빙성 있는 전승(순나) 편찬작업이 시작되었다. 그 기준은 전승의 전달자가 지닌 권위에 의해 순수성, 정당성, 빈약성 판단이 이루어진 것이어었다. 이스나드(연결고리)는 전승 자료 전하는 사람들의 연결고리가 무함마드나 그의 동료까지 연결되어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이를 통해 여섯 개의 전승집 편찬 후 보편성을 인정했다. 예언자의 전승은 그 자체로 일종의 쿠란 해설서가 되었다. 이중 가장 권위있는 것은 페르시아 무슬림 알-부크하리 al-Bukhari(870 사망)의 전승집이다. 7,300여 편을 선별했는데 실제 숫자는 약 3000편이었다. 부크하리와 동시대 인물 무슬림(875 사망)도 비슷한 작업을 했다. 이 두 학자가 작성한 하디스 모음은 사히흐(건전한, 흠없는) 하디스로 불리우며 쿠란 다음가는 권위를 누렸다. 이 외에도 귄위있는 전승집들이 다수 존재(Ahmad ibn Hanbal[무스나드]Musnad )했다.

 

하디스는 '일화', '이야기'의 뜻으로 다양한 하디스가 나왔다. 9세기에는 수만 편의 하디스가 유통되었다. 현대 무슬림 중 일부는 쿠란의 절대적 권위 강조하며 하디스를 부정하기도 한다. 순나에 반하는 것은 비다(혁신)로 불리우며 공동체의 안정을 해치는 위험한 것으로 사고되었다.

 

첫 번째 논쟁

확고한 정통의 기준이 없음으로 인해 생겨난 질문들이 있었다. 죄를 짓고도 여전히 무슬림일 수 있는가? 신앙과 행동 사이의 괴리는 허용될 수 있는가? 정치적 동기로 편법을 사용해도 괜찮은가? 이슬람의 원칙을 즉각적으로 행동에 옮겨야 하는가, 알라의 뜻에 맡기고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등이다.

 

분리자들, 암살자들 the Kharijite은 칼리프는 꼭 어떤 집단에서 나올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움마야드 부족은 극단적 청교도 운동을 탄압했다.

 

the Murjites는 추후의 판정을 옹호한다. 진정한 무슬림과 그렇지 않은 무슬림의 판단은 알라만이 할 수 있다. 이들의 입장이 더 많은 지지를 받았다.

 

SunnisSharia

 

이슬람의 확산으로 인해 주로 아라비아 이외의 지역에서 복잡한 상황에 자주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원칙을 수립하게 된다. 우선 메디나에서 무함메드가 했던 행동, 실천 sunna, 언행을 기록한 하디스에 의존하고, 이것이 불충분한 경우 무함메드 죽은 직후의 sunna와 메디나 공동체의 의견 ijma 참조하며, 그래도 결정이 안 날 경우 쿠란이나 하디스의 선례에 명시된 원칙에서 유추 qiyas해서 적용하거나, 인간의 이성에 기초한 사유(라이)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원칙 아래 행동하는 무슬름들을 순니파 Sunnis라고 부른다. 일반적 입장 결정시 순니파들은 알라의 가르침에 근거하는 한 법과 종교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법을 지칭하는 sharia는 종교의 진정한 길을 의미한다. 대신 일반적인 법 지칭은 fiqh 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ulama (학자들)는 법 준수를 감시한다. mufitis (법학자)는 재판관(qadis)의 법적 견해를 조정한다. 쿠란에 합당한 법적 결정 불가능할 경우 이성과 상식 ijtihad에 의해서 결정한다. 가장 안전한 방법은 계시와 전승을 연구하고 이것을 논리적으로 체계화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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