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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

십자군 운동의 두가지 주제 십자군 운동의 성쇠는 중세 전성기 교황 군주국가의 운명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제1차 십자군은 교황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그 운동의 성공은 교황군주국가의 커다란 승리였다. 그러나 그후 이어진 십자군 운동의 쇠퇴는 교황의 세속적 권위를 약화시키는데 기여했다. 그러므로 십자군은 교회사 및 종교사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십자군은 서유럽 식민주의 역사의 첫장을 여는 것이었다.

제1차 십자군의 직접적 원인

제1차 십자군의 직접적 원인은 1095년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콤네누스가 지원을 호소한 데 있었다. 알렉시우스는 얼마 전 투르크족에게 빼앗긴 소아시아의 비잔틴 영토를 되찾고자 했다. 그는 서유럽의 용병을 원군으로 사용하는데 이미 익숙해 있었던 터라 서유럽으로부터 얼마간 군사적 지원을 얻기 위해 교황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단순한 지원군 정도를 넘어선 십자군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그로서는 경악할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소아시아에서 싸워줄 용병군 대신 서유럽의 예루살렘을 이슬람의 수중에서 탈환할 목적으로 대규모의 자원군을 파견한 것이다. 알렉시우스의 지원 요청을 십자군 파병으로 전환시킨 것은 어디까지나 교황의 결단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교황의 동기가 과연 무엇이었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레고리우스의 성전 사상

1095년 당시의 로마 교황은 우르바누스2세로서 그는 그레고리우스7세의 수제자였다. 따라서 우르바누스 역시 그레고리우스의 정책을 구현하고자 제1차 십자군을 제창했다. 기독교적 전쟁 행위에 대한 우르바누스의 생각은 그레고리우스의 사상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초대 기독교는 평화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예를 들면 4세기의 존경받는 기독교 성인인 성 마르탱은 군인었지만, 개종과 함께 이런 말을 남기고는 군대를 떠났다. "나는 그리스도의 병사이므로 전쟁을 할 수 없다." 라틴 교부인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그레고리우스는 기독교인의 전쟁 행위를 정당화하는 이론을 수립했다. 그러나 그것이 실천에 옮겨진 것은 11세기에 이르러 그레고리우스의 개혁운동에 힘입어서였다. 그레고리우스7세는 교황이 되기 전에도 노르만 정복에 대한 교황권의 지원을 주선했다. 그리고 그와 그의 영향하에 있던 교황들은 에스파니아의 이슬람교도에 대한, 이탈리아의 그리스인에 대한, 그리고 독일 동부의 슬라브족에 대한 기독교인의 전쟁에 축복을 내린 바도 있었다. 그레고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러한 모든 전쟁을 "세상의 올바른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조치로 간주했다.

우르바누스의 동기

그레고리우스7세의 정책을 답습한 우르바누스2세의 성지 십자군 운동에는 적어도 네 가지 목적이 있었다. 그 하나는 그리스 정교회를 로마 교회로 통합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막강한 자원군을 동방에 파견함으로써 우르바누스는 비잔틴으로 하여금 서유럽의 위력에 압도당하도록 하고, 나아가 그들로 하여금 로마 교회의 우위를 다시금 받아들이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만일 이 계획이 성공한다면 그는 그레고리우스가 추구한 교황 군주국가 정책에 커다란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다.

두번째 동기는 교황 최대의 적인 독일 황제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것이었다. 1095년에 이르러 하인리히4세는 군사적으로 지극히 강대해져서 우르바누스는 그에게 쫓겨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로 도망을 가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그러므로 교황은 독일인을 제외한 모든 서유럽인에게 십자군을 호소함으로써 황제가 편협하고도 비기독교적인 박해자임을 알리고, 아울러 서유럽의 영적 지도자로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십자군의 지휘관은 모두 프랑스 귀족들이었다)

셋째로 우르바누스는 대규모 병력을 외부로 방출시킴으로써 유럽의 대내적 평화를 이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미 10세기 말부터 프랑스 교회는 봉건기사들의 전투를 줄이기 위해 "평화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즉 "신의 평화"라 하여 비전투원에 대한 공격을 금지했고, "신의 휴전"이라 하여 특정한 축일에 전투행위를 금지했던 것이다. 우르바누스는 제1차 십자군 소집 직전에 이 평화운동을 교황령에 의해 승인한다고 처음으로 발표했고 이를 확대시킬 것을 공표했다. 분명히 십자군은 평화운동과 연관되어 있었다. 사실 우르바누스는 거칠기 짝이 없는 전사들에게, 정말로 싸우기를 원한다면 해외로 나가 기독교의 대의를 위해 십자군으로서 정당하게 싸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끝으로 예루살렘 성지의 회복이라는 목표 그 자체가 우르바누스에게 중요한 동기가 되었음이 틀림없다. 예루살렘은 지구의 중심이자 기독교의 가장 거룩한 성지였다. 예루살렘 순례는 결코 방해받아서는 아니 되었고, 예루살렘에 대한 지배권은 기독교인이 직접 가져야만 했다. "세상의 올바른 질서"는 바로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제1차 십자군의 경제·정치적 원인

비잔틴 황제의 요청을 받으지 8개월 후인 1095년 11월에 우르바누스가 프랑스의 클레르몽시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하고 십자군을 요청했을 때, 그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열렬한 반응을 얻게 되었다. 많은 군중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니건만 "신께서 원하신다"며 너무 열렬히 외쳐되는 바람에 교황이 연설을 중단할 수 밖에 없을 정도였다. 그러고는 바로 수많은 사람들이 동방으로 향했다. 대략 10만 명의 인원이 십자군 주력부대에 가담했는데, 그것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숫자였다. 그러므로 우르바누스의 호소가 어떻게 그토록 성공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여기에는 경제·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십자군에 가담한 빈민중 많은 사람들은 1095년 당시 인구가 과밀했던 지역의 출신자들이었다. 이들 십자군은 인구가 조밀한 유럽보다는 동방에서 더 나은 생활을 누릴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마찬가지로 상당수 귀족들은 정치가 점차 안정되고 장자 상속제가 널리 수용되면서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까지 차남 이하의 귀족 자제는 서유럽 내에서의 국지전쟁을 통해 재산을 모으거나, 최소한 작은 땅이나마 상속받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 형제들의 수가 늘어났고, 수명도길어졌으며, 전쟁은 점차 줄어들었고, 장자만이 부친의 토지를 상속받게 되었다. 분명 동방으로 떠난다는 것은 고향에서 따분하게 지내던 귀족들에게 매혹적인 일이었다.

종교적 원인 :

무장 순례단 그러나 제1차 십자군의 가장 중요한 동기는 역시 종교적인 것이었다. 아무도 순수한 이해타산에 의해 십자군에 가담할 수는 없었다. 당시로서는 누구도 새로운 땅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확실하게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아무리 합리적으로 따져보아도 십자군 참여는 잘해야 소득없는 귀환이요, 대개는 무슬림의 손에 죽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자군 참여는 기독교인의 영혼에 커다란 위안을 주었다.

여러 세기에 걸쳐 순례는 기독교인들 사이에 가장 널리 행해지던 고해방식이었다. 특히 예루살렘 순례는 순례 가운데서도 가장 성스럽고 효과있는 것으로 손꼽히고 있었다. 하물며 기독교 최고의 성지를 이교도의 수중에서 되찾기 위한 예루살렘 무장 순례는 단연 최대의 영적보상을 가져다주는 일이었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클레르몽에서 우르바누스2세는 십자군 참가자 전원에게 교회에서 부과하는 다른 모든 고해를 면제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교황의 약속이 있은 후로 십자군 설교자들은 우르바누스의 재가도 받지 않은 채 더욱 큰 약속을 하고 말았다. 대사(大赦)를 약속했던 것이다. 이것은 십자군 참가자 전원에게는 내세에서 연옥의 형벌이 완전히 면제되며, 십자군 참가 도중 사망한 자의 영혼은 곧장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약속이었다. 대사는 실로 파격적인 은사였으며 그것을 얻고자 군중이 쇄도했다. 일단 군중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자, 그들은 설교자의 언변에 고부되어 종교적 열광에 빠진 채 집단적 히스테리 증상까지 보이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불신자들의 세상을 일소하기 위해 선택받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로 말미암은 가공할 결과로서 그들은 동방으로 원정을 떠나기도 전에 유럽의 유대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서유럽 반유대주의의 효시였다.

십자군의 만행

크나큰 역경에도 불구하고 제1차 십자군은 완벽한 성공이었다. 1098년에 십자군은 안티오크를 함락했고, 그와 더불어 시리아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1099년에 그들은 예루살렘을 탈환했다. 그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때마침 무슬림 세력이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던데다가, 무슬림들이 기괴하고 야만적인 서유럽인의 모습을 처음 대하고는 크게 놀랐기 때문이다. 성지에서 십자군은 처음부터 제국주의자처럼 행동했다. 새로운 영토를 정복하자마자 그들은 이를 자기네의 소유로 삼고 4개의 공국으로 분할했다. 그들은 또한 난폭한 행동을 자행했다. 안티오크를 점령했을 때 그들은 사로잡은투르크인들을 포로로 삼지 않고 닥치는대로 학살했다. 예루살렘을 정복했을 때에도 그들은 그리스도의 평화주의적인 가르침을 묵살하고, 이 도시에 거주하던 모든 무스림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했다. 몇몇 십자군들은 그들의 고향에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자랑을 늘어 놓았다. "솔로몬 궁의 회랑과 성전에서 우리 군대는 말을 타고 달렸는데, 말의 무릎까지 사라센인의 피로 젖었다." 성지에 머무른 십자군들은 점차 유순해지고 관대해졌다. 그러나 서유럽으로부터 새롭게 밀어닥치는 무장 순례단은 계속해서 야만스런 행동을 자행했다. 더욱이 정착한 십자군들은 지방 주민들과 완전히 융합하지 못한채 이슬람 세계의 한 복판에서 별개의 착취적인 외국인으로 남아 있었다.

그 후의 십자군 운동 실패 :

프리드리히2세의 외교정책 성공 십자군이 건설한 기독교 국가들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해안선에 위치한 인구가 희박하고 좁다란 지역이었으므로 그 지역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 탈환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 1144년에 이르러 최북단에 위치한 공국이 함락되었다. 그러자 프랑스 왕과 독일 황제의 지휘하에 동방으로 온 제2차 십자군의 기독교 전사들은 실지를 회복하고자 했으나, 그들은 내부적으로 너무나 분열되어 있어서 도저히 승리를 거둘 수 없었다. 그후 얼마 되지 않아 그 지역의 이슬람 영토는 술탄 살라딘에 의해 통합되었으며, 그는 1187년 예루살렘을 함락했다. 다시 한번 서유럽은 손실을 복구하고자 했으니 제3차 십자군이 그것이다. 제3차 십자군은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프랑스의 존엄왕 필립, 잉글랜드의 사자왕 리차드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군을 거느리고도 승리를 거둘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경쟁관계에 있던 국왕들 사이에 다시 내분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노켄티우스가 교황이 되었을 때 그의 야심은 예루살렘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위해 제4차 십자군을 소집했다. 그러나 그 십자군은 통합된 기독교 세계의 관점에서 본다면 미증유의 재난이었다. 교황은 십자군의 진로를 통제할 수 없었고, 십자군은 1204년 성지로 진군하는 대신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행동은 결과적으로 비잔틴 제국의 멸망을 재촉했으며, 오스만투르크족에게 동유럽으로의 진입로를 열어주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이노켄티우스가 1215년 제4차 라테란 종교회의를 소집한 것은 부분적으로 교황이 직접 지휘할 또 한 차례의 십자군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제5차 십자군은 무슬림 세력의 본거지를 무찌르기 위해 이집트를 향해 바다로부터 출발했다. 그러나 위풍당당한 출진에도 불구하고 이 역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오직 1228년에서 1229년까지 황제 프리드리히2세에 의해 지휘된 제6차 십자군만이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 성공은 군사적 원정에 힘입은 것이 아니었다. 아랍어를 구사할 줄 알아 이집트의 술탄과 쉽사리 교신할 수 있었던 프리드리히는 무력으로 싸우는 대신 교묘한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 및 예루살렘으로 가는 좁은 접근 통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전쟁으로 실패한 것을 외교로써 이루어낸 셈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획득한 것을 지켜내지 못했고, 결국 예루살렘은 1244년 다시 함락되어 1917년에 이르도록 유럽인에 의해 탈한되지 못했다. 오늘날에는 팔레스타인 에커시 부근의 작은 영토만이 기독교 국가로 남아잇을 뿐이다.

정치적 이익을 위해 십자군의 이상을 희생시킨 교황들 프리드리히2세가 예루살렘을 얻기 위해 협상을 벌이고 있을 당시 그는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해 있는 상태였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에도 그는 성묘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er)에서 자기 손으로 직접 예루살렘 왕의 왕관을 써야만 했다. 이것은 당시의 교황이 성지 회복보다는 유럽에서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는데 더욱 골몰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제1차 십자군의 승리는 교황 군주국가의 위신과 세력을 크게 증대시켰다. 그러나 그후의 잇따른 실패로 말미암아 대규모 사업을 위해 서유럽을 결속시킬 수 있는 교황의 능력에 점차 의문이 제기되었다. 1208년 이노켄티우스에 의해 소집된 알비주아 십자군은 신자가 유럽 내의 십자군에 참여하기만 해도 훨씬 더 멀고 위험한 동방에서의 십자군 참여와 동일한 영적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중대한 선례를 확립했다. 그러나 알비주아 십자군은 교황의 종교적 이미지에 손상을 주지는 않았다. 알비주아 이단은 교회에 대한 명백한 위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황이 프리드리히2세와 그의 후계자들에 대한 십자군에 착수하게 되면서 십자군의 이상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철저히 희생되고 말았다.

십자군의 쇠퇴와 교황권의 쇠퇴

십자운 운동의 쇠퇴와 교황권의 쇠퇴가 가장 밀접하게 상호 연관된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프리드리히와 그 후계자들에 대한 십자군에서, 그리고 그 후에는 아라곤 왕에 대한 십자군에서, 교황은 그때까지 이슬람에 맞서 싸운 모든 십자군에게 공식적으로 제공했던 것과 동일한 대사(大赦)를 허용했다.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던 것은, 교황은 원정을 떠나는 십자군을 무장시키기 위해 많은 돈을 기부한 사람에게도 똑같은 사면을 허용했다. 결국 이것은 사면의 남발을 초래했다. 1291년 성지에 남은 기독교인의 마지막 전초 기지가 서유럽으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함락되고 말았다. 그때 교황은 아라곤에서 실패한 십자군을 구출하려던 중이었다. 1300년에 보니파키우스 8세가 주재한 성년(聖年) 행사는 로마를 순례하는 모든 이에게 대사를 허용했는데, 그것은 향후 성지가 아닌 영원의 도시가 기독교 순례의 가장 중요한 목적지가 되어야 할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보니파키우스는 1년 후 권좌에서 밀려났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즉 십자군의 남용과 실패로 말미암아 교황의 위신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실추되었던 것이다.

십자군의 긍정적 결과

십자군의 이상은 한편으로는 교황 군주 국가의 건설에 기여한 바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파멸에도 기여했다. 그러면 그때에 십자군의 실질적인 의의는 무었이었는가? 긍정적인 측면에서 볼 때, 제1차 십자군의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놀라운 성공은 중세 서유럽인의 자신감을 고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수백 년 동안 서유럽은 이슬람 세력에 밀려 수세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서유럽 군대가 이슬람 세력의 핵심 지역으로 진군해 들어가 마음대로 약탈·유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극적인 승리로 말미암아 12세기의 유럽인 사이에는 낙관주의가 팽배해졌다. 서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신이 그들의 편이라 믿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십자군은 또한 서유럽인의 시야를 넓혀 주었다. 성지의 유럽인들 가운데 아랍어를 배우거나 이슬람 사상, 또는 제도로부터 무언가 얻어내기 위해 힘쓴 사람은 거의 없었다. 기독교인과 무슬림 사이의 문화교류가 가장 활발히 이루어졌던 곳은 에스파니아와 시칠리아였다. 그러나 이슬람국을 통과하여 먼 지역을 여행한 십자군들은 어딘가 좀더 세련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십자군 운동은 특히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사치품에 대한 관심을 자극했으며, 문학과 우화의 풍부한 소재를 제공했던 것이다.

무역과 세금,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제1차 십자군의 성공은 서유럽인에게 지중해를 새로운 무역 활동의 무대로 제공했다. 특히 베네치아 및 제노바 등 이탈리아 도시들이 이 해역의 상권을 제패하기 시작했고, 그로써 서유럽 경제의 번영에도 기여했다. 원격지로 대금을 송금할 필요성으로 인해 초보적 금융 기법의 발달 또한 자극했다. 정치적으로 서유럽 군주 국가들은 십자군에 필요한 자금 조달 명목으로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한 선례로 말미암아 직접적인 혜택을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에 의한 세금징수를 다양한 형태로 발달시켰다. 더욱이 자금과 식량 조달에 의해 국왕의 십자군을 돕고자 국가를 조직화하다 보니, 신흥 국민 국가들의 효율적 행정 제도 발달에도 중요한 자극제가 되었다.

부정적 결과

그러나 십자군에는 부정적 측면 또한 있었다. 유럽 내에서 유대인을, 그리고 유럽 밖에서 무슬림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십자군의 만행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십자군은 서유럽과 비잔틴의 관계 단절을 더욱 가속화했고, 비잔틴 제국의 멸망과 잇따른 재난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쳤다. 아울러 성지에서의 서유럽인들의 식민주의는 그후 근대에까지 이어지게 된 서유럽 식민주의의 기나긴 역사의 출발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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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바라본 꾸란의 오류와 모순들

 
꾸란(Quran)은 이슬람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는 경전이다. 무슬림들은 꾸란을 알라가 인간에게 주는 마지막 계시라고 믿는다. 알라가 천사 ‘지브릴’(Gabriel)을 통해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23년 동안(A.D. 610-632) 한 구절 한 구절씩 계시해 준 내용이라는 것이다.

 

꾸란은 모두 114장으로 이루어졌으며, 무함마드가 처음 이슬람을 시작했던 메카(Mecca)에서 받은 계시(A.D. 610-622)와 메디나(Medina)로 이주한 이후에 받은 메디나 계시(A.D. 622-632)로 나뉜다. 꾸란에 사용된 언어는 아랍어다. 따라서 이슬람에서는 반드시 아랍어로 기록된 것만을 꾸란이라고 한다. 다른 언어로 된 꾸란은 아무리 완벽한 번역이라도 계시 언어인 아랍어가 아니기 때문에 ‘꾸란 해설서’라고 한다. 이러한 꾸란의 내용 가운데 기독교 입장에서 역사적인 오류와 성경이 변형된 내용들과 모순이 발견된다. 여기서 그 내용들 가운데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역사적인 오류들

 

1) 파라오 궁전에 있던 하만: 꾸란에는 하만(Haman)이 모세가 있을 당시 파라오의 친구로서 이집트에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때 파라오가 말하길 족장들이여 나 외에는 너희를 위한 어떤 신도 내가 아는 바 없나니 하만아 진흙으로 벽돌을 구워 내가 모세의 신을 볼 수 있도록 높은 궁전을 짓도록 하라 실로 나(파라오)는 그(모세)가 거짓말하는 자라 생각하니라”(꾸란 28:38) 모세와 하만이 함께 있는 모습은 꾸란의 다른 구절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 때 파라오가 말하였더라 하만이여! 내게 높은 궁전을 지어다오 내가 길과 방법을 얻고자 함이라”(꾸란 40:36) 그러나 성경에서 하만은 메데(Media)와 파사(Persia)의 아하수에로 왕의 대신이다(에 3:1-2). 꾸란은 그를 천 년이나 앞서 이집트의 파라오의 대신으로 만들어서, 출애굽의 이야기와 에스더의 이야기를 혼합시켰다.

 

2) 모세 때의 사마리아인들이 있었는가?: 꾸란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에 있을 때 사마리아인들의 제안으로 황금 송아지를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사마리아인이 그들에게 송아지 한 마리를 형상화하니 소의 울음소리 같더라 그리고 말하길 이것이 너희들의 신이며 모세의 신이었으나 그(모세)가 잊었도다”(꾸란 20:88)라며 두 번(꾸란 20:95)이나 모세와 사마리아 사람들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송아지를 만든 것은 아론이다(출 34:1-6). 또한 사마리아인들은 모세 때 존재하지 않았다. 사마리아인은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의 침공(B.C. 722)을 받아서 많은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갔을 때, 이스라엘에 남아서 아시리아인(Assyria)들과의 통혼함으로써 생겨난 자손들이다. 즉 사마리아인들은 모세가 죽고 5-7세기 이후에나 이스라엘에 등장했다. 참고로 사마리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였다.

 

3) 메카에 대한 아부라하(Abraha)의 공격은 어떻게 중단되었나?: 무함마드가 태어난 A.D. 570년을 이슬람에서는 ‘코끼리의 해’라고 부른다. 아브라하(Abraha) 장군이 메카를 침공하여 카바를 파괴하려고 결단한 해이기도 하다. 이 내용은 6세기 초 예멘의 힘야르트 왕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자, 홍해 건너 아비시니아(Abyssinia, 현재 에티오피아) 기독교 왕국에서 아브라하(Abraha) 장군을 보내서 예멘을 정복한다. 그는 또한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메카를 침공했다가, 알라가 카바신전을 지키기 위하여 수천 마리의 새들로 하여금 그의 군대 머리 위에 구운 진흙으로 된 돌을 떨어뜨리게 해서 많은 군인들이 죽었다고 한다. 그 내용이 꾸란에 기록되어 있다. “그대 주님께서 코끼리의 무리를 어떻게 하셨는지 그 소식이 이르지 아니했느뇨? 그들의 음모를 파멸시켜 버리지 아니했는가? 알라는 그들에게 새 떼를 보내어 모레와 흙으로 된 돌멩이를 던지셨나니 그들을 다 갉아먹어 버린 마른 잎과도 같았더라”(꾸란 105:1-5) 그러나 역사적인 자료들에 따르면, 아브라하 군대는 천연두로 추정되는 전염병으로 인해 후퇴한 것이었다.

 

4) 무함마드 때에 있었던 알악사(Al-Aqsa) 모스크: 무함마드는 “밤하늘의 여행”(Night Journey)에서 지브릴 천사가 자신을 예루살렘에 있던 알악사(Al-Aqsa) 모스크로 데려갔고, 그곳을 본 후에 승천하여 칠층천을 방문하고 돌아 왔다고 한다 “그분(알라)의 종을 밤에 하람 모스크에서 알악사 모스크로 여행케 한 그분께 영광이 있으소서”(꾸란 17:1). 그러나 알악사 모스크는 무함마드 당시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알악사 모스크는 십자군에 의해 교회로 처음 지어졌으며, A.D. 1187년 무슬림 지도자 살라딘(Saladin, 1137-1193)이 예루살렘 수복 후 모스크로 바꾼 건물이었다. 또 무함마드가 승천한 곳이라는 황금돔 모스크는 A.D. 691년이 되어서야 지어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A.D. 632년 무함마드가 죽고 나서 59년 후다.

/유해석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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