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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선교학교와 기독교교육

 

 

미션스쿨 활짝… 1909년 전국에 950여개

 

19세기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수행된 선교운동은 복음 전파만이 아니라 서구문화의 이기(利器)들, 곧 교육, 의료 혹은 서양 과학을 이용했다. 한국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에서의 선교는 기독교 복음 전파와 함께 서구문화 전파라는 성격을 띤 것이었다. 선교사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서구문화의 전파자로서 역할을 했다.


당시 한국사회의 현실적 필요와 요청 때문에 학교교육이나 의료활동은 각광을 받았고, 이를 통해 선교의 지평을 넓혀갈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개화와 계몽, 사회변화, 민주의식, 구습 타파, 여권 신장 등 다양한 영역에 있어서 변화와 개혁을 가져왔다. 말하자면 기독교는 한국사회 변화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이다.

선교지에서 최초로 선교학교, 곧 미션스쿨을 설립했던 인물은 스코틀랜드의 첫 해외선교사였던 알렉산더 더프(Alexander Duff·1806∼1878)였다. 1830년 23세의 나이로 인도 캘커타로 파송된 그는 선교 사역에 있어서 기독교 교육의 중요성을 입증해준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교육은 복음을 전하는 최상의 수단이었다. 19세기 말 우리나라에 입국한 이들도 의료활동과 함께 교육활동을 복음 전도를 위한 중요한 방편으로 인식했다. 이것은 ‘개화’(開化)라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당면과제와도 부합되는 일이다. 그러기에 조선 정부도 신교육 수용에 적극적이었다.

 

국내 최초의 기독교학교 배재학당

 

이런 상황에서 1884년 6월 24일부터 7월 4일까지 선교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 내한했던 일본 주재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Robert S Maclay)는 조선 정부와 접촉을 시도했고, 고종으로부터 미국 북감리회가 국내에서 교육과 의료사업을 실시해도 좋다는 최초의 윤허를 받았다. 그래서 입국한 선교사들은 학교 설립을 우선 과제로 여겼다.

그 결과

1885년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 학교인 배재학당이 아펜젤러에 의해 설립되었다.

1886년에는 언더우드에 의해 경신학교와 감리교의 스크랜턴 여사에 의해 최초의 여자 학교인 이화학당이 설립됐다.

이화학당은 1887년 2월 고종황제가 하사한 이름이었다. 경신학교는 예수교학당, 민로아학당, 구세학당 등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경신학교라는 이름으로 현존하고 있다.

1887년에는 여선교사 엘러스(A J Ellers)에 의해 정신여학교가, 캠벨(J P Campbell)에 의해

1898년에는 배화여학교가 각각 서울에 설립되었다.

1886년부터 시작된 세브란스에서의 의학 교육은 한국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899년 정식 의학교로 출범했고, 1901년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가 되었는데, 1908년에 최초로 7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들이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였다. 이 학교는 1915년 설립된 연희전문학교와 1957년 병합되어 연세대학교로 발전했다.

 

한반도 전역에 세워진 기독교학교

 

또 평양에서는 1897년 베어드(W Baird)에 의해 숭실학교가, 1894년에는 모펫(S Moffett)에 의해 숭인상업학교가, 1899년에는 감리교의 노블(W A Noble)에 의해 정의여학교가, 1903년에는 모펫에 의해 숭의여학교가 각각 설립되었다. 대구에서는 1903년 브루엔(H M Bruen)에 의해 신명여학교가, 1906년 아담스(J E Adams)에 의해 계성학교가 설립됐다. 그 외에도 선천, 강계, 재령 등지에 여러 기독교 학교가 설립되었다. 부산의 경우 1895년 멘지스에 의해 일신여학교가, 1906년에는 마산에 아담스와 이승규에 의해 창신학교가 세워졌다. 남장로교 선교부가 일한 호남 지방의 경우 전주에는 신흥학교(1900) 기전여학교(1902)가, 광주에는 숭일학교(1907) 수피아여학교(1908)가, 목포에서는 정명여학교(1902) 영흥학교(1903)가, 순천에는 매산학교(1913)가 각각 설립됐다. 캐나다선교부는 함흥에 영생여학교(1903) 영생남학교(1907)를, 간도에는 은진중학교 명신여자중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 외에 감리교회는 서울 외에도 인천 수원 공주 등지에 기독교 학교를 설립했다.

 

청일전쟁 후 한국에서의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그후 사립학교가 급증했는데 1909년에는 전국에 950여개의 기독교계 학교가 설립됐다. 그 가운데 장로교계가 605개교, 감리교계 학교는 200개교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설립된 선교학교는 한국에서의 사립학교 교육을 주도하게 된다. 통계의 차이가 있지만 1910년 일제가 조선을 병탄할 당시 조선총독부는 전국에 300여개 기독교 학교, 약 3만명을 헤아리는 학생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기독교 학교에 의해 변화된 사회상

한국에서 기독교 학교는 세 가지 점에서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첫째, 교육은 특수한 계층의 일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한 것임을 일깨워 주었다. 공교육(公敎育·public education) 개념을 심어준 것이다.

둘째, 교육은 남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성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선교부가 여자 학교를 설립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자에게 있어서 무식은 덕이니라”는 고루한 의식은 여자 학교 설립과 함께 불식되었다.

셋째, 서구적 개념의 교육과정의 다양화였다. 과거 우리의 교육은 생의 가치나 삶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과거(科擧)라는 국가고시를 위한 것으로서 관직에 나가는 방편에 불과했다.

그러나 선교학교를 통해 교육은 건실한 민주시민을 양성하고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교육임을, 그리고 다양한 교육과정을 통해 사회 여러 영역의 인재를 양성하는 것임을 일깨워 주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교육은 한국사회 변화를 주도했다.

(고신대 교수·이상규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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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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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 선교사들의 선교활동

 

1. 캐나다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

 

미국 북장로교, 호주 빅토리아장로교 그리고 미국 남장로교에 이어 1898년에는 캐나다 장로교회도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캐나다장로교회는 1897년 한국 선교에 동참키로 결의하고, 18989월 푸트(W R Foote, 富斗一) 목사 부부, 그리어손(Dr. Robert G Grierson, 具禮孫) 의사 부부, 그리고 맥래(D McRae, 馬具禮) 목사를 한국에 파송했다.

 

이들은 함경도와 간도 지방을 중심으로 선교를 시작했고 후에는 원산 함흥 용정 등에 선교지부를 설치하고 전도, 교육, 의료 등 세 분야에서 활동했다. 캐나다 장로교회는 1925년 감리교, 회중교회와 연합해 캐나다연합교회(United Church of Canada)를 구성했는데, 당시 주한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중 한 사람인 루터 영(Luther L Young, 榮在馨)을 제외하고는 다 이 연합에 찬성해 1925년 이후에는 캐나나 연합교회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 활동했다.

 

비록 장로교회 선교사는 아니었지만 캐나다인으 로 내한한 첫 선교사는 게일(James S Gale, 1863-1937) 이었다. 캐나다 토론토대학 출신인 그는 동 대학 기 독교청년연합회(YMCA)의 파송으로 188812월 내한했다. 게일은 서울, 황해도 송천(소래), 부산에서 활동했고 후에는 북장로교로 이적해 원산, 서울 등지에서 활동했다.

 

게일은 한국 역사와 문화, 풍습 등 한국학 연구와 저술로 큰 업적을 남겼다. 게일의 뒤를 이어 18909월 내한한 의사 하디(Robert A Hardie, 河鯉永)는 부산 원산 등지에서 의사로, 전도자로, 협성신학교 교수로 활동했다. 특히 그는 1907년 전후 한국 교회 부흥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189312월에는 캐나다인 매켄지(William J Mckenzie)가 독립선교사로 내한, 황해도 장연군 소래(松川)에 거주하면서 서경조의 도움을 받아 교회를 설립하는 등 헌신적으로 일했으나 1895623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캐나다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 동기가 됐다.

 

2. 미국 감리교회의 한국 선교

 

장로교와 함께 한국 선교를 주도한 교파는 감리교회다. 미국 북 감리회와 남 감리회가 선교사를 파송했다. 북 감리교회의 한국 선교는 1885년 입국한 아펜젤러로 시작되었음을 이미 언급한 바 있다. 프랭클린 마샬대학과 드루신학교에서 수학한 그는 188522일 북 감리교 파울러(Fowler) 감독에게 안수를 받았다. 이튿날 한국으로 향해 227일 요코하마를 거쳐 188545일 언더우드와 함께 내한했다. 그해 53일에는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1856-1922) 내외와 스크랜턴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Mary Fitch Scranton, 1832-1929)이 입국했다.

 

서울 정동에 정착한 아펜젤러는 영어학교를 시작으로 한국 선교에 나섰고, 정동감리교회와 배재학당 설립, 성경 번역, 신학교육, 문서 활동 등 다방면에서 한국 교회 형성에 기여했다. 1887년에는 존스(George Heber Jones)와 올링거(Franklin Ohlinger), 1889년에는 맥길(W B McGill)과 메타 하워드(Meta Howard)가 내한했다.

 

윤치호(1865-1945)

 

남 감리회는 1896년부터 한국 선교를 시작했 는데 윤치호의 역할이 컸다. 1888년 미국 밴더빌 트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그는 한국 근대인물 중 신학을 공부한 첫 인물로 알려져 있다. 윤치호는 남 감리회에 한국 선교를 요청했다. 그 결과 18951018일 중국 주재 선교사 헨드릭스(E. A. Hendrix) 감독과 리드(C. F. Reid, 李德)가 내한해 선교 가능성을 점검한 바 있다.

 

이듬해인 18965월 리드가 한국 선교사로 내한함으로써 남 감리교회의 한국 선교가 시작됐다. 1890년 내한했던 캐나다인 로버트 하디는 1898년에는 남 감리회로 이적해 목사 안수를 받고 의료활동보다는 복음 전도자로 활동했다.

 

3. 침례교, 성결교, 구세군의 한국 선교

 

장로교와 감리교 외에도 1890년에는 영국성공회가 콜페(C. J. Corfe, 高堯翰) 감독을 파송해 한국 선교에 동참했고, 미국 침례교 선교 단체인 엘라딩기념선교회는 폴링(E. C. Pauling), 가들라인(A. Gadelinre) 등을 한국에 파송했는데, 재정난으로 1900년 사역을 중단했다. 이들의 사업은 독립선교사였던 캐나다인 펜윅(Fenwick)에게 이양되고 후일 침례교회의 모체가 됐다.

 

성결교는 1907년 우리나라에 소개됐다. 감리교적 배경에서 생성된 성결교회의 모체는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인데 카우만(Charles E. Cowman)과 킬보른(Ernest A. Kilbourne)에 의해 창립됐다. 이들은 190511월 일본 도쿄에 성서학원을 설립했는데 한국인 김상준과 정 빈이 1907년 이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해 서울 종로 염곡에서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설립했는데 이것이 한국 성결교회의 시작이 됐다.

 

구세군은 1908년부터 한국 선교를 시작했는데 한국에 온 첫 선교사는 호가드(R. Hoggard, 許加斗)였다. 그는 1908101일 입국해 한국 선교를 시작했다.

 

4. 한국 기독교 여성교육의 선구자 스크랜턴

 

1884년 스크랜턴(Mary F. Scranton, 1832-1909)은 미 감리회 해외 여선교부의 한국 파견 첫 여선교 사로 임명됐다. 스크랜턴은 52세라는 나이 때문에 한국행을 쉽게 결정짓지 못했다. 그러나 신앙심이 그를 움직였다. 스크랜튼은 의료 사업을 담당할 한국 파송 선교사로 임명된 그의 외아들 윌리엄 스 크랜턴(William B. Scranton)과 함께 한국으로 향했다. 1885620일 서울에 도착한 스크랜턴은 한 달 먼저 서울에 자리 잡은 아들의 집에 거하면서 선교사업 준비를 했다.

 

그러나 양인들을 불신하고, 서양을 두려워하던 한국인들은 파란 눈의 이방인들을 환영하지 않았다. “우리가 부녀자가 있는 집에 가까이 가기라도 하면 그녀들은 창문을 닫고 커튼 뒤로 숨어 버렸고 어린이들은 울부짖으며 달아났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서양인들이 한국 아이를 살찌워 피를 빨아 먹는다는 등의 괴 소문이 횡행하고 있었다.

 

1886년 서울 정동에 여학교를 세웠지만 학생은 모으기 쉽지 않았다. 한국에는 여자는 교육할 필요가 없다.”라는 인식이 확고했고, 여성들의 외출은 밤에만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콜레라까지 퍼졌다. 학교 건물이 완공되기 전인 5, 스크랜턴은 아들 집에서 첫 학생을 만났다. “영어를 배워 황후의 통역관이 되겠다.”는 꿈을 가진 관료의 소실(小室, )이었다. 그러나 첫 학생은 병으로 석 달 만에 학업을 접는다.

1886531일 개교한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 이화학당

 

6, 두 번째 학생으로 꽃님이라는 열 살배기 소녀가 찾아왔다. 가난한 여인이 딸을 부양할 수 없어 맡긴 것이다. 그러나 주변에서 처음에는 좋은 음식과 옷을 주지만 나중엔 미국으로 데려갈 것이라며 겁을 주자 곧 여인은 아이를 도로 데려가겠다고 했다. 꽃님이를 미국으로 데려가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작성한 후에야 아이를 두 번째 입학생이자 이화학당 최초의 영구학생(permanent pupil)으로 삼을 수 있었다.

 

1886년 여름 서울에 만연한 콜레라로 서대문 근처에 버려진 별단이라는 아이를 아들 의사가 치료했다. 별단이는 두 번째 영구학생이 됐다. 네 번째로 이화학당을 찾은 학생은 훗날 조선 최초의 여의사가 된 박 에스터(김점동)였다. 하나 둘 학생들이 늘어,

한국 최초 여의사 김점동(왼쪽)과 이화학당 학생들(1887)

 

1887년에는 학생이 11명이 되었다. 18862월 고종 23년에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교명을 하사받았다. 이는 국가로부터 교육기관으로 인정됐다는 의미다.

 

스크랜턴은 교육이념을 가부장적 굴레 속에 고통 받는 여성들의 존엄성을 회복시켜 진정한 한국인으로 당당하게 서는 것을 제시했다. 이런 여성교육 목적은 파이크(L. G. Paik)의 저서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 in Korea’(1929)에서 볼 수 있다. “우리의 교육 목적은 한국 소녀들이 우리 외국 사람의 생활이나 의복, 환경에 적응하도록 변화시키는 데 있지 않다. 우리는 오로지 한국인을 보다 나은 한국 사람이 되게 하는 데 만족한다.”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있는 스크랜턴 비문에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오늘 이 땅에 자유, 사랑, 평화의 여성교육이 열매 맺으니, 이는 스크랜턴 여사가 이화의 동산에 씨 뿌렸기 때문이다.”(*) 글쓴 이 / 이상규(고신대 역사신학 교수)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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