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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세기의 기독교 

 

 교회사에서 2 세기는 박해(PERSECUTION)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로마제국의 손으로부터 박해의 파도는 쉬지 않고 교회를 때렸다.

I. 2 세기의 박해들

주님의 교회는 대환란의 시대에서 2세기로 들어갔다. 수많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하여 성장했고 확장되었다. 이러한 현상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주요한 이유가 있다.

1. 끊임없는 전파

믿는이들은 복음 전파의 사명을 진지하게 수행했다. 그들은 참된 신념을 가졌다.

 

2. 복음의 배타성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그들만이 진리를 선포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기독교는 "단지 또다른 종교"라고 믿지 않았다.

 

3. 회중 생활(congregational life)

이들 성도들은 복음을 살아냈다. 곧 그들이 선포한 바를 그대로 실행했다.

박해의 다른 효과는 박해가 교회를 순수하게 지키게 했다는 것이다. 고문과 죽음의
위협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재고하기에 충분했다. 많은 이들이 주님을
"공식적으로 포기했다(renounce)". 이는 후에 교회에 몇 가지 문제점들을 야기시켰다.

98년부터 211년까지 Trajan, Hadrian, Antonius Pius, Marcus Aurelius, Commodus,
Septimus Severus 등의 6 황제에 의한 잔혹한 박해가 있었다.  

 

II. 2 세기의 타락들

사도들의 생애동안 심겨졌던 오류의 씨앗들이 이 기간동안 열매를 맺기 시작함

A. 교회 실행의 변화
주로 유대주의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교회내에 수많은 변화들이 일어났다.

 

1. 성직자주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계급화하는 것임 : 성직자 계급과 평신도 계급 ("kleros"는 '택한자들'을 의미함; "laos"는 '백성'을 의미함)신약은 감독의 직무가 교회내 지도권의 하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거만한 성직자들이 출현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경고가 베드로 전서 5:3에 주어졌다.

신약의 가르침을 넘어선 목양자들의 특권(prestige), 권능(power), 및 권위(authority)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카리스마(charisma), 강한 개성(strong personality), 또는 "영웅 숭배"를 통하여 두드러지지 않게 발생하였다. 이러한 특성들은 인간적 본성에 흥미를 끄는 것이다. 이유가 어떠 하든지, 신약의 가르침에서 이탈한 이러한 특성은 구약에 호소함으로 (구약의 레위 성직자제도와 이에 수반되는 권능 및 특권의 올가미)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백성의 몸(body)과는 별개의 특별한 성직자제도의 개념 및 제도는 수반되는 개념인 희생물과 희생단과 함께 유대교와 이교를 기억나게하는 유사한 것들로 기독교의 교회 안으로 알아챌 수 없게 귀속되어 갔다" (Schaff P.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 II. p. 60) 

이 변화는 2 세기에 발생하였으며, "믿는이의 성직자직분"이라는 신약 교리를 벗어난 것이다.
a. 이그나티우스 (117년) : 안티오크 교회의 감독. "감독과 장로와 집사와 상관없이 무엇이든 하는 자는 양심에서 순결하지 않다"
b. 로마의 클레멘트 (110년) : 그가 신약교회와 레위 성직자직분을 비교할 때, 처음으로 평신도(layman)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것 같다.

 

2. 비속화(卑俗化)(Sophistication)

이러한 진리들을 가르치는 방법으로 형상을 도입하기 시작하면서 복음의 단순성과 순결이 잊혀져 갔다. 더욱이 사람의 타락한 죄성인 상상력에 의해 이러한 보조 기구는 급격히 인간 고안품의 잡동사니로 타락해 갔다. 

"2세기 중간 또는 말기에 심각한 심볼의 형태가 그리스도인의 예술에서 시작되었음을
보게 된다...이러한 심볼의 근원은 종교적 진리의 상징을 가지려는 그리스도인의 본능적
욕망에서 발견되어짐에 틀림없다.." (Schaff P.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 II. p. 60)
           

십자가 성호가 2 세기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터튤리안은 "십자가 숭배"의 고소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방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기타 초기 기독교 심볼로는, 비둘기, 배, 닻, 등이 있다. "이들 심볼로부터는 단지
도상학적 표현의 측면에서 한 발자국의 진보가 있었을 뿐이다"고 샤프는 말한다
물고기 심볼은 2 세기 중반부터 유래되었는데, 그 근원지는 알렉산드리아로 여겨진다.

 

3. 성찬 중시주의(Sacramentalism)

2 세기 초에 중요성에서 주목할만한 변화가 보일 것이다. 실체(substance)와 상징(symbol) 간에 성경적 균형이 변하기 시작했다.  밥티스마의 규례가 크게 강조되었다.

 

a. 밥티스마의 부속물

먼저 규례에 의식(儀式)주의가 첨가되었다. 곧이어 다음 사항들이 뒤따랐다. 

(1) 도입부(Introduction)가 길어짐 - 교리문답
(2) 마귀 거절 설명서
(3) 신조(Creed)의 암송
(4) 삼중 잠김(Trine Immersion) - 간혹
(5) 형제의 입맞춤(Brotherly Kiss)
 

b. 밥트스마와 구원의 혼란
많은 교부들 가운데 켐벨주의와 유사한 견해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의식에서 마술적인 것을 보지 않았지만, 밥티스마를 믿음의 행위로, 그래서 하나님의 원하는 은혜(saving grace)의 전달자로 보기 시작했다

 

(1) 순교자 저스틴 (100-165년)

(2) 헤르마스(Hermas) (115-140 년)

 

B. 기독교 교리의 변화

일세기에서 두번째 주요 이단이었던 그노시스주의는 2 세기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그노시스주의는 창조의 하나님께서 피조물과 너무나 떨어져 있기 때문에, 얼마는 선하고 얼마는 악한 많은 중간 신들에 의해 우주를 다스린다고 가르쳤다.

III. 2 세기의 명사들

A. 저스틴(100-165 A.D.)
B. 이레니우스(115-200 A.D.)
C. 터튤리안(160-230 A.D.) 
       

IV. 2 세기의 발전

교회들에 의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짐으로 신약 정경이 형성됨. 2 세기 초에 발생하였다. 신약의 최종 저자는 사도 요한이다.
사도시대에도 신약이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졌다(골 4:16)(살전 5:27)
(벧후 1:15, 3:1,2) * 딤전 5:18 과 마 10:10을 비교할 것  성경기록을 수집하고 편집한 곳 (4 곳)

팔레스타인 - 마태, 야고보, 히브리서
소아시아 - 요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디모데전후서, 빌레몬서, 베드로전서부터 계시록까지

그리이스 - 고린도전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카전후서, 누가, 디도서
로마 - 마가, 사도행전, 로마서 

지리적인 분리 때문에 초기의 정경 수집은 완전하지 못했다.교부들의 글에서 신약성경의 정경화에 관한 많은 증거들이 제시되었다.

주로 전달과 유포의 어려움 때문에 몇 가지 책들에 대한 작은 논쟁이 있다. 412년 까지논쟁이 되었던 책으로는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유다서, 요한 일서, 요한 이서이다 -
대체로 이단들을 정죄한 책들이다. 

 

 

 

V. 2 세기의 저항자 - (Monatanists)

몬타누스파의 출현. 대부분의 교회역사에서 몬타니스트들은 이단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그들의 신조와 실행들을 주의깊게 연구하면 그들이 정통이였음이 밝혀진다.몬타니즘은 교회의 순결과 영성에서 조류를 거스리는 첫번째 일반 저항이다

 

A. 지도자
그들이 몬타니스트라 불리운 것은 몬타니우스라는 사람의 선포때문에 그러한 이름으로 불리웠다. 그는 Cybele의 이교도 사제였으며 약 150 년에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을 받았다.
 
B. 위치
몬타니즘은 소아시의 중앙 프리기아에 있는 Ardabau라 불리우는 도시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사상은 신속하게 유럽과 아프리카로 퍼져나갔다. 몬타니즘은 177년에 로마와 프랑스의 리용에서도 발견되었다.

 

 C. 시작

몬타니우스는 150년에 그의 관심사를 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두 명의 여자 명사인 맥시밀라와 브리스가를 포함한 많은 추종자들을 모았다.

 

D. 몬타니스트 운동의 이유들
사도시대이후 곧 많은 교회들 가운데서 눈에 띄일만한 변화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그들 중 몇 가지로는,
 

1. 의식주의(儀式主義)화 경향        
2. 성직자 계급의 등장
3. 영성의 부족
4. 기율과 교회회원의 기준이 헤이 해지기 시작함

 

E. 몬타니스트의 사명
몬타니즘은 실제에 있어서 교회를 그들의 영적 단순성으로 회복시키려는, 신약의 기초로 돌이키려는 개혁운동이였다.
몬타니우스는 믿는이들과 교회의 삶에서 성령의 역사를 크게 강조했다. 그리고 복음에는 성직자에게 아무런 특권이 없음을 표명했다. 그는 철학과 종교의 반대자였다.

 

F. 몬타니스트의 교리
성령의 사역을 강조한 것과는 별개로 몬타니스트들은 다음과 같은 신조와 실행들을 지켰다.

1. 교회의 회원으로 거듭남을 강조함
2. 믿는이의 밥티스마

그들은 교제의 순결을 실행했으며, 제도권 교회에서 온 자들을 다시 밥티스마를 주었다. 그들은 오직 물에 잠그는 밥티스마를 베풀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2 세기에는
이 밥티스마 외에는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이 없었다"

3. 삶의 거룩함

 "그들은 과학과 예술, 모든 세상적인 교육 또는 삶의 화려한 형태를 피하였는데 이는 그러한 것들이 이교주의에 속했기 때문이었다"(Christian Op. Cit. p. 42)그들은 재혼, 방종한 금식, 박해를 도피하는 것에 반대했다.

4. 교회 기강
"도덕적 죄에 대항하여 교회는 그 죄를 범한 자를 올바르게 배제함으로써 스스로를 지켜 나갔다. 왜냐하면 교회의 거룩함은 단순히 그 일원의 거룩함이기 때문이다(Christian Op. Cit. p. 43)"

5. 삼위일체 신학
6.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
몬타니스트들은 구약과 신약의 모든 성경기록들을 전수하였다. 

7. 전천년주의 종말론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속히 다시 오셔서 땅 위에 그분의 천년왕국을 세우시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이러한 전천년주의 견해는 또한 순교자 저스틴, 이레니우스, 터툴리안에 의해 지지를 받았다. 몬타니스트들이 인기가 없었던 것이 전천년주의의 소멸에 기여했던 것 같다.

 

G. 몬타니즘에 대항한 변화
몬타누스파 교회들은 제도권 교회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다. 그들에 관해 언급한 것들 중 많은 것들이 부당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최근의 역사가들은 몬타니즘의 대적자들 편을 들었으며, 그들에 대하여 몇 가지를 고소하였다.  

 

1. 가장 일반적인 고소
이는 몬타니스트들이 "고대의 Holy Roller (열광적인 종파의 신자)"라는 것이다.
몬타니우스가 위로자(Paraclete)이며, 그의 추종자들은 성경의 계시를 초월하여 주장하였다고 고소했다.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절대적인 증거가 없는 것 같다. 몬타니스트 교회의 영성과 삶은 제도권 교회들의 형식주의 및 무감각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a. 루터교 역사가 모헤임은 몬타니우스가 자신을 위로자라고 불렀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의 역사서 번역자 맥클린은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다. "몬타니우스가
자신을 스스로 성령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실수였다." (Church History. Mosheim, Volume I. p. 188) Armitage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몬타니우스는 자신을 성령과 동등시하였다고 고소를 당했는데, 이것은 단지 비방에 불과하였다"(Armitage, T. History of The Baptists. p. 175)

b. Jarrel은 "ecstasy"에 관한 터툴리안의 해설을 인용하면서 아마도 그가 다윗이 말한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것 이상의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렸다. 

c. 터툴리안은, 이상(vision)과 초성경적 계시를 언급하면서 말하기를, "참으로 성경을 읽거나, 시편을 노래하거나, 강연을 하거나, 기도를 드리는 것들은 이상에 의해 지지를 받는 것들이다"라고 했다. 어떠한 비성경적인 것도 없다!!
 

d. 몬타누스파 교회들이 제도권 교회의 교리들을 수용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바이다. - 그들의 차이는 강조와 실행에 있다. 

2. 몬타누스파의 지나친 점들
비록 단호하게 입증되지 않을 지라도, 일부 몬타누스파 교회들이 다음과 같은 확실한 비성경적 실행들을 지켰을 가능성이 있다.

a. 여자의 임명
몇몇 교회들은 성령의 선물들이 모든 조건과 성에 차이가 없이 분배되었다는 그들의 신조로 인해 여자들이 가르치는 것을 허용했다.

b. 삼중 밥티스마(Trine Immersion)일부 몇몇 몬타누스파 교회에서 실행되었다.
c. 목양자의 독신주의 - 아무런 규칙이나 또는 법을 발견할 수 없다. 이것은 박해의 때에 실제적인 예방조치였다. (예 고전 7:26,29 와 8,9 절)
d. 엄격한 금욕주의
e. 엄격한 교회 기강

 

 H. 몬타니즘의 결과
1. 터툴리안은 몬타니스트 사상으로의 전환자로 알려졌다. 그는 이 가르침들을 잘 정리하는 것을 도왔으며, 그 결과 북 아프리카 지역(터튤리안파)에 유증으로 남겼는데, 후에 도나티즘으로 나타났다.

 

2. 이 운동에 대하여 수차례 공의회가 소집되었으며, 공식적으로 그들을 정죄하였다.
3. 이 운동의 영향은 노바티안파, 도나티우스파, 아르메니아와의 점촉, Paluician의
출현 등을 통하여 볼 수 있다.   

역사가들 중에 몬타니스트를 옹호하는 역사가들이 있는데 그들 중 몇몇을 인용하면,

 

a. 초기 역사가인 W.R. 윌리암 박사는 "그들의 가르침에서 교리적 오류를 발견하기가
힘들다. 그들의 감정의 표현은, 훨씬 후 종교개혁시대에 많은 다른 교사들이 강조한
바와 같이, 은혜의 참된 경험은 믿는이의 삶에서 분명하다는 그들의 믿음에서 유래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b. 도너 박사는 그들의 운동에 대하여, 교회 지도자들을 교회 몸의 지배자로 세우려는
움직임(역자주:성직자계급주의)에 반대하는 민주적 반발이였다고 썼다.

c. Schaff-Herzog 종교 백과사전의 기고자인 몰러는 다음과 같이 썼다. "몬타니즘은
기독교의 새로운 형태가 아니며 몬타니스트는 새로운 종파가 아니다. 오히려 몬타니즘은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 가운데 안락하게 안주하려는 그 시대의 두드러진 경향에 대항한 단순히 고대 초기 교회의 반발이었다."  (Grimith, J. W. A Manual Of Church History: Vol. II. p.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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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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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에게 미친 사람, 복음에 자신의 삶을 드린 사람

 

신약의 역사를 일군 복음의 사람

 

 

두말할 나위 없이 바울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바울은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적어도 13권, 그러니까 권수로 보아 신약성경의 거의 절반을 기록했다. 사실상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이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위한 구원의 유일한 소식이 되도록 공헌했다. 만약 바울이 없었다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된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까지 전해질 수 없었다고 가정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을 놀라게 하고 감동시킨 것은 흐트러짐 없이 십자가의 복음에 집중한 그의 헌신적인 삶이었다. 바울을 통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로서 믿어야 할 신앙의 교리와 삶의 교훈을 배울 수 있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복음이 실제로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 교회가 만들어진 이 신약시대를 설명하려면 바울을 고려하지 않고는 도무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짧은 글에서 바울에 관한 모든 것을 다룬다는 것은 처음부터 범위를 넘어서는 작업이다. 때문에 범위를 좁혀 바울을 바울 되도록 한 결정적인 회심의 사건을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주는 도전을 적용해 보고자 한다.

 

주님 만나기 전에는 신앙도 길을 잃어

 

신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도 바울에 관한 기록은 대부분 사도행전 9장에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는 이른바 ‘다메섹 회심 사건’ 이후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을 탐구하면서 회심 이후의 모습을 찾아보고 정리하는 데 보다 많은 시간과 정성을 기울인다. 당연하기도 하고 필요한 방법이기도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의 바울을 보다 충분히 이해하고 또 우리가 올바른 배움을 얻으려면, 그의 회심 사건 이전의 모습을 최대한 고려해야 한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회심하기 이전에 바울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적대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단지 인간적인 선택이나 고집 같은 것이 아니었다.  회심 이전의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열정으로 예수를 대적했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것이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행 8:3).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행 22:4).

 

이처럼 다메섹 사건 이전 바울의 모습은 매우 살벌하다. 바울은 철저하게 예수를 대적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사람이었다. 바울이 이처럼 십자가의 원수(행 9:1, 참조 빌 3:18)로 행했던 이유는 그가 철저한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5~6).

 

바울이 유대인이요 바리새인이었다는 의미를 보다 선명하게 이해하려면 복음서를 떠올리면 된다. 즉,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갈등과 대립을 바울도 고스란히 공감한다는 뜻이다. 예컨대, 바리새인으로서 바울에게 나사렛 예수는 결코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과 같은 존재일 수 없었고, 이런 예수님의 주장은 그야말로 최고의 신성모독이었다(요 10:36). 게다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메시아라는 주장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신 21:23, 갈 3:13).

 

참된 새로움은 오직 그리스도로부터

 

그러던 그가 사도행전 13장 이후 후반부에서 보여 주듯이, 그리고 그의 서신서들에서 밝혀 놓았듯이 자신이 박해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고(롬 1:1), 십자가의 복음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었다(고전 1:18~31; 빌 1:18~28).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해산하는 수고를 기꺼이 하는 사람으로(고전 4:15; 갈 4:19) 바뀌었고, 마침내는 그 예수 때문에 이제는 자신이 박해받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행 20:24; 고후 1:3~11; 딤후 4:5~8).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

 

이처럼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박해하던 자리에서 복음을 위해 박해받는 자리에 기쁨으로 서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그 혁명적인 변화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남으로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바울이라는 인물을 단지 어떤 ‘변화’의 카테고리로 설명하기에는 아쉬움이 매우 크다. 바울은 사실상 그리스도에게 미친 사람이었고, 십자가의 복음에 삶을 온전히 드린 사람이 되었다(행 20:24, 21:13, 26:24; 고후 5:13 등).

 

 

그랬기 때문에 이른바 ‘고난 목록’이라고 하는 고린도후서 1장 8~10절과 11장 23~27절 등에 기록된 고난이 그의 복음 전도를 막지 못했다. 일찍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반대하고 그 따르는 무리와 교회를 박해하던 것에 정반대로 바울은 바로 그 십자가와 복음을 위해 위협받는 것을 오히려 기뻐했다. 마침내 신체적인 핍박과 위협 가운데서도 그것들이 바울을 어찌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빌 1:18, 2:17; 딤후 3:6~8). 

게다가 바울은 이렇게 십자가의 복음이 전파되는 일에 대한 전도자로서의 모습만이 아니라 우리의 눈시울을 붉히게 하는 참된 목사였다. 바울은 해산의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그리스도인들을 믿음으로 세우고자 힘을 다했다(갈 4:19; 살전 2:7). 목사로서 성도들과 교회를 향한 바울의 마음을 단적으로 느낄 수 있는 그의 고백이 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아니하더냐”(고후 11:28~29). 바울에게는 교회를 향한 자신의 염려가 그 모든 실제적인 고통보다도 오히려 더한 것이었다. 사도 바울의 모습이 역력하다.

 

폭행자에서 순교자로 만든 것은 말씀

 

 

마침내 사도 바울은 말 그대로 죽을 고생을 하며 다녔던 세 차례에 걸친 전도여행을 마감할 때 즈음, 주후 58년경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로마법 아래 재판을 받는 죄수의 몸이 된다(행 21:33, 25:11). 그로부터 3년 정도 시간이 흐른 후 로마 감옥에 투옥되고, 모진 박해와 위협의 시절을 거쳐, 주후 67년 순교해 그렇게도 그리워하고 고대하던 주님 품에 안겼다.

 

 

십자가 복음에 대해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바울은 그 복음을 위한 전도자요 고난 받는 자요 눈물의 목사로서 산 인물이다. 바울 탐구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날 때 진정한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또한 변화를 가져오는 주님과의 만남은 그분이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은혜로 되는 것임을 깨닫는다. 더 나아가 복음에 헌신하는 삶을 향한 도전을 받는다.

 

 

참 변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따라서 십자가의 복음을 만나는 것이 진정한 새로움의 출발이다. 성경 말씀을 통해 이미 우리 곁에 와 계신 주님을 만남으로써 비로소 참 변화를 향한 시작이 가능하다. 유의할 점이 있다. 바울은 그냥 독립적이고 독창적인 사상가가 아니었다. 또 추론을 거듭해 궁극적인 진리를 찾아가는 사색적인 사상가도 아니다. 그의 모든 사고는 성경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의 모든 사역과 가르침은 성경에서 계시로 받은 것에 굴복하고 순종했다. 이런 점에서 성경적 계시의 말씀은 바울이 생각하고 기도하는 도구였고, 그는 성경대로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다는 유진 피터슨의 관찰은 적절하다.

 

 

말씀과 함께 오는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변화가 아니라면 바울과 같은 변화는 불가능하다. 살아 역사하시는 말씀에 의한 변화가 아닌 변화는 참된 변화가 아니다. 매일 말씀을 제대로 만나는 은혜가 모든 독자에게 있기를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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