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동성애 입법 반드시 막아야 한다

 

 

 

 

영국에서 미국인 홀즈 목사가 전도집회 중, 동성애자로부터 “동성애는 죄냐”는 질문에 “동성애는 죄”라고 답한 후 경찰에 체포되어 1500 달러의 벌금형에 처해졌고 추방되었다. (2010년 4월)

 


스웨덴에서는 동성애에 대해 부정적인 설교를 한 아케 그린 목사에게 징역 1개월의 실행을 선고했다(2004년 8월). 동성애가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고 설교한 것을 동성애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드러낸 불법행위로 규정하였기 때문이

다.

 


동성애인권 법안에 대한 스웨덴 의회 내 심사가 진행 중이던 지난 2002년 7월 스웨덴 법무장관은 이 법안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우려에 대해 “위험스런 나치 캠페인을 고려한 법이지 기독교를 겨냥한 것이 아니다”라고 ‘크리스처니티 투데이’에 말했다.

 


이에 대해 스웨덴 복음주의 연맹 구스타프슨 회장은 “이 법안이 성경을 믿는 교회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법무부 장관이나 다른 사람들의 구두 선언들을 순진하게 믿어서는 안 된다. 법정은 정치적 발언이 아니라 명시된 법률로 판결한다”고 경고했으며, “앞으로는 목사들은 동성애에 대한 설교를 하자면 법정에 서야할 것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이 경고를 받고도 동성애 관련 법안의 통과 앞에서 침묵했던 스웨덴 교회는 설교자의 구속 앞에서도 아무런 힘을 쓸 수 없었다. ‘후회해도 이제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올무에 걸리고 만 것이다. 스웨덴 교회의 후회가 한국 교회의 후회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일어나서 담대하게 ‘동성애차별금지법 반대’를 외쳐야 한다.

 


동성애법이 통과된 미국의 메사추세츠 주의 경우, 중고등학교에서 성교육 시간에 ‘동성간 성행위’가 교육되었다는 말을 자기 자녀들로부터 들은 한인 학부모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캐나다에서는 심지어 초등학교에서 ‘동성애 성교육’을 시켜도 이를 학부모나 교사가 막을 도리가 없는 웃지 못할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2007년 입법 예고되었던 차별금지법안이 만약 통과되었다면,

△교회가 목사를 청빙, 직원 채용 시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거절하는 경우

△교회나 기독교 학교에서 ‘동성애는 죄’라고 가르치는 경우 최고 2년의 징역, 1000만 원의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었다.

 


이로부터 3년이 지난 2010년 4월부터 법무부 인권국에서는 ‘차별금지법 특별분과위원회’를 출범시켰고 동성애차별금지법안 입안도 재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민노당과 진보신당에도 이 법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자 하는 의원들이 있다. 3년 만에 돌아온 동성애와의 영적 전쟁, 이제는 더 이상 늦출 수도 물러설 수도 없다.

 


지금 막아서지 않는다면 한국에 거세게 밀려오는 동성애의 물결을 다시는 저지할 수 없을 것이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히 12:4)

 


얼마 전 국가기도회가 끝난 뒤, 한 청년이 내게 찾아와 본인은 동성애가 죄라고 하는 말을 오늘에서야 처음 들었다고 얘기했다. 한 선교 단체에서 일할 때에도 동성애가 죄라는 가르침을 받고서 커밍아웃한 자매들이 있었다. 두 명이 같은 방에서 살고 있었는데 상담하고 기도해 주며 각 방을 쓰라고 권했고, 지금은 두 사람 모두 온전하게 회복되었다.

 


한국교회는 동성애가 죄임을 분명히 선포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외치지 않는다면, 동성애로 인하여 죽어가는 영혼들에 대한 피 값을 하나님은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의 손에서 찾으실 것이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겔 3:18) 한국교회가 침묵하면 ‘동성애차별금지법’이 통과된다.

 


우리나라가 동성애로 진통을 앓고 있는 서구사회를 모델링할 필요는 전혀 없다. 동성애가 합법화되지 않은 건강하고 밝은 나라가 되어 전 세계를 선도하는 선진한국, 선교한국, 기도한국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30년 전 선교대회, 규모는 작았지만 열정은 더 뜨거웠죠”

 

 

 

‘선교한국’ 1회 대회 참가자 OMF선교회 손창남 선교사

 

▲1988년 8월 8일 선교한국 첫 번째 대회에 참가했던 손창남 선교사가 정확히 30년 뒤인 8일 서울
광진구 세종대에서 열린 선교한국 2018 대회를 찾아 지난 역사를 회고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그때 제 나이가 서른넷이었어요. 부천에 있는 서울신학대에서 했나 그럴 거예요.”

한국 OMF선교회에서 동원담당 사역을 하고 있는 손창남(64) 선교사는 30년 전 기억을 어렵지 않게 꺼냈다. 손 선교사는 올해로 30주년을 맞이한 선교한국의 1회 대회(1988년) 참가자였다. 조직위원회도 사무국도 없던 시절이었다. 참여 선교단체는 단 두 곳이었고, 참가자 수 역시 600여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열정만큼은 지금 못지않게 뜨거웠다고 했다.

국립세무대 교수였던 손 선교사는 1988년 8월 8일 제자 2명과 함께 선교한국을 찾았다. 돌이켜보면 이 또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이었다고 한다. 교수가 되기 전부터 인도네시아 선교사를 꿈꿨던 그에게 당시 조이선교회 이경철 목사가 선교한국 얘기를 처음 들려줬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선교 대회를 하려고 하니 와 보라는 얘기였다.

4박 5일간의 대회는 손 선교사에게 “선교 그냥 나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심어줬다. 그는 “선교는 내 헌신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교는 내가 그리던 그림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교가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손 선교사는 대회가 끝나자마자 한 선교단체에 등록해 실질적 선교훈련을 받았다. 그는 “선교한국을 통해 막연하던 선교의 실상을 보게 됐다”며 “나의 부족함이 보였고, 이를 채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2회 대회가 열린 1990년, 인도네시아로 파송받았다. 이후 선교지에 있으면서도 꾸준히 선교한국을 찾았다. 1회 대회에 함께 참가했던 제자 2명 중 1명이 하나님께 서원하고 선교사가 되는 역사도 지켜볼 수 있었다. 선교를 마치고 돌아와서도 조직위로, 감사로 선교한국을 섬겼다.

8일 대회 주 집회장을 찾은 손 선교사의 눈이 살짝 떨렸다. 수없이 보고, 또 섰던 자리지만 느낌이 달랐다. 손 선교사는 이날 주최 측으로 초청받은 VIP 신분이었다. 주최 측은 선교한국 30주년을 기념해 그간 1회부터 15회까지 회차별 참가자 2명씩을 초청했다.


소감을 묻자 손 선교사는 과거 대신 미래를 얘기했다. 그는 “선교한국이 지난 30년간 외적 성장에 주목했다면 이제는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선교에 눈뜨기 시작했던 시절 ‘몇 명을 (선교지로) 보냈다’고 얘기했다면 이제는 ‘정말 필요한 곳에 가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출처] 국민일보
[원본링크]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991133&code=23111212&sid1=mis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