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간증] 암 수술 ‘9전10기’ 새 삶 차인태 前아나운서

 

 

<죽음 문턱에서 하나님이 주신 퀴즈… 정답은, 기도>

 

 

1970∼80년대 한국의 대표 아나운서 차인태. 그가 진행했던 ‘장학퀴즈’라는 프로그램은 곧 그의 이미지이기도 했다. 투병 전 모습이다. 그는 암 병동에서 16개월을 보냈다. 체중이 11㎏이나 줄었다. 미각도 잃었다. 미각을 잃으니 배식 밥 차에서 나는 냄새에도 극히 예민해져 구토가 빈번해졌다. 가족과 간병인 도움 없이는 일어날 수 없었다. 약물이나 주사에 의지하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는 지난 6년간 아홉 차례 수술을 받으며 9전10기의 삶을 살았다. 그에게 죽음은 ‘무서움의 왕’(욥 18:14)이었다. 그러나 주께선 그에게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고 하였다. 무서움의 왕은 주님 앞에서 무력하다. 그는 평생 기도했고 평생 기도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주여,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의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나이다. 주여 받아주옵소서.”

 

지난 29일을 전후해 차인태(71·서울 영락교회 은퇴 장로) 전 아나운서와 전화 인터뷰를 했다. 차 장로는 수술조차 불가한 악성 종양을 신앙으로 이겨냈다. 그렇지만 아직은 관해(寬解) 상태이기 때문에 직접 대면이 쉽지 않았다.

 

-SNS를 통해 보내주신 사진을 보니 투병 전과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아홉 차례의 치료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예전 모습 그대로이신데요.

 

“중보기도 덕입니다. 무엇보다 서울 강남세브란스병원에서 4∼5차 항암치료를 받을 때 이름 모를 청년들의 찬송과 중보기도를 잊을 수 없어요. 저는 중환자실에 있었어요. 적게는 2∼3명, 많게는 7∼8명의 20대 젊은이들이 매주 토요일과 주일 새벽 사이 천사의 음성으로 저와 환우들을 찾아주었어요. 암 병동 끝에서 나지막이 들리는 찬송은 제게 예배시간이었습니다.

 

-발병 전까지 왕성하게 활동하셨지요. 늘 대한민국 대표 아나운서로서의 기품을 잃지 않았고요.

 

“과분합니다. 2009년 10월 1일이었죠. 경기대 예술대학에서 10여 년째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분주했던 날들이었어요. 한데 그날 밤 40도가 넘는 고열에 시달렸어요. 급성폐렴 증세였고요. 2주간의 진단 끝에 악성 림프종양이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심장과 폐 사이에 꽈리 모양의 악성 종양이 자리 잡고 있었어요. 수술도 불가능할 정도라고 하더군요.

 

-‘내일의 죽음’보다 ‘오늘의 고통’이 더 힘드셨겠습니다.

 

“완치 가능성 40%였습니다. 그마저도 롱 텀(long term)으로 가야 한다고…. 육신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요. 24시간 수시로 진행되는 혈압, 호흡, 맥박, 혈당 체크와 간호사들의 신발 끄는 소리가 제 육신의 오늘을 말해주고 있었어요. 내 자신에 대한 원망, 서글픔, 부끄러움, 허탈, 분노, 실망, 무기력이 짓눌렀지요.

 

-사투였겠습니다.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린다고 했는데…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항암주사 치료가 시작되면서 말씀으로 위로받기 시작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을 붙잡고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또한 피할 길을 내신다’고 했어요. 머리카락이 빠지고 숨쉬기조차 힘들었습니다. 돌아가신 부모님, 아이들, 손자손녀 생각하면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모태신앙이시죠. 부모님이 평북 선천 등 한국 기독교 발상지나 다름없는 지역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

 

“내 고향 평북 벽동군은 압록강을 사이에 둔 궁벽한 산골입니다. 크리스천인 증조할아버지가 평북 도의원을 지낸 지방 소지주여서 광복 후 북한 체제를 견디기 어려웠어요. 다행히 그때 할아버지가 경북 영천경찰서장으로 계셔서 월남하게 된 겁니다. 의사 면허가 있던 아버지가 경주에서 대한의원을 열었어요. 한데 1950년 6·25전쟁으로 아버지가 징집됐어요. 우리 4남매와 외가 쪽 식구들은 생계 수단이 없어 끼니 걱정을 해야 했어요. 외할머니가 부산 국제시장에서 물건을 떼어와 경주 시장바닥에서 팔아 생계를 유지했지요. 의사가 귀한 때라 아버지는 야전 공병단 군의관 등으로 7년을 근무했습니다. 어머니는 평북 선천 출신으로 신앙 깊은 가문이었습니다.

 

-4대째 신앙가문이고 손자·손녀까지 가면 6대째인데 깊은 신앙은 어디서 다져졌습니까.

 

“경주에서 올라와 서울 미동초교를 거쳐 대광고에 진학했어요. 제 실력에 비해 좀 실망스러운 진학이었어요. 하지만 미션스쿨 대광은 저를 붙들어주었습니다. 지금 이 나이에도 그 학교 출신 친구들과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으니까요. 또 연세대 성악과에 진학한 후에는 이화여대 후문 앞 다락방교회를 섬겼는데 거기서 크리스천으로서 역사와 사회를 보는 눈을 길렀어요. 다락방교회는 김활란 박사(여성운동가)가 막사이사이상 수상을 기념해 설립한 교회였어요. 김옥길 당시 이화여대 총장(전 문교부 장관)과 이화여대, 연세대 교수님 등이 많이 출석했었죠. 장상 전 이대 총장이 대학 선배이자 교회 선배였습니다.”

 

그는 연세대 졸업 후 1969년 아나운서가 됐다. 그리고 73년 ‘장학퀴즈’ 시작과 함께 스타 아나운서가 됐다. 90년 4월까지 그는 17년간 장학퀴즈 진행자였다. 그가 걸으면 사람들은 “아 저기 장학퀴즈가 간다”고 말했다. 장학퀴즈에 출전했던 배우 송승환, 정치인 김두관(전 행정자치부 장관) 등은 그와의 추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스타 아나운서에게는 쉴 시간이 없었다. 1주일에 14개 프로그램이 주어졌다. 게다가 동요제, 가요제, 기념식, 대통령 취임식 등 중요 행사 진행도 피할 수 없었다. 신혼 이튿날 제주에서 호출당해 서울 녹화현장으로 가는가 하면, 맹장 수술 이틀 만에 녹화에 나서기도 했다.

 

74년 8월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 영결식 중계, 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시해에 따른 국민장 중계도 맡았다. 72년 12월엔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MBC 10대가수 가요제’ 클로징 멘트 중 화재가 발생 60∼70명이 죽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삶과 죽음이 늘 가까이에 있었고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끌고 계셨다”고 회고했다.

 

-영락교회에서 많은 봉사를 하셨지요.

 

“제가 봉사를 한 것이 아니라 제 작은 달란트를 하나님이 귀하게 써주셨어요. 시온찬양대 대장을 오래했고요. 음악부장, 당회 서기, 홍보출판부장 등 제 삶과 교회는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타사 스카우트 제의나 선거 출마 제의가 들어오면 인간적 고민을 하기도 했어요. 그런 날이면 교회에 가서 조용히 묵상했고요. 중심을 잡게 하는 곳이 교회였습니다.”

 

-요즘 힘들게 하시는 하나님이 때문에 원망 안 드세요.

 

“그럴 리가요. 지난해 7월 12시간 동안 심장판막치환 재수술 등이 있었어요. 깨어난 후 아내의 기도문을 발견했어요. ‘나의 사랑하는 남편 차인태. 이제 그만 시험하시고 그의 낡은 죄를 깨끗하게 하셔서 진정 그에게 주신 달란트를 주를 증거 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시옵소서. 주님, 주님 다메섹에서 바울을 택하셨습니다. 이제 그만 건강한 몸을 허락하셔서 주님 사랑의 증거가 되게 하소서. 최후에 주님 앞에 설 때에 기쁘게 주님과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옵소서’하고 말이죠. 아내 기도처럼 주님과 최후에 기쁘게 마주해야지요. 그 전까지 주를 증거하는 삶을 살 겁니다. 그런 하나님이 왜 원망스럽겠어요.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이지요.”

 

-수술조차 불가했던 종양이 떨어져나갔다고 들었습니다. 가족의 헌신과 기도, 섭생과 운동도 큰 힘이 되셨지요. 병으로 애통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하고 싶은 얘기는.

 

“지금까지 내가 산 것, 누린 것, 대접 받았던 것이 본래 내 모습에 비해 얼마나 부풀려지고 과장된 것인지 깨달았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낍니다. 더 낮은 자세로 섬기며 봉사하는 삶이 예수의 정신입니다. 혈루병 여인이 주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병 고침을 받은 것처럼 치유의 은사, 능력의 은사를 믿습니다. 저보다 위중한 분들께 제가 조그마한 희망과 기도 제목이 되었으면 합니다.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마십시오.”

 

차인태 : 평북 벽동 출신으로 증조부 때부터 지켜온 신앙을 6대째 이어가고 있다. 서울 영락교회 은퇴 장로. 연세대 성악과를 나와 1969년 MBC 아나운서가 됐다. 70, 80년대 대한민국 대표 아나운서. 98년 제주MBC 대표이사, 2003년 평북지사, 98년 경기대 예술대 영상전공 교수 역임. 73∼90년 인기 프로그램 ‘장학퀴즈’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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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시편의 현대적 이해  / 황성일 교수


1. 서론: 문제 제기


구약 신앙을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다윗은 복수심에 불타서 나발을 죽이려 달려가며 (삼상25), 옛 원한을 잊지 못해 솔로몬에게 요압과 시므이를 죽여라고 유언한다 (왕상1:4-9). 나아가 다윗은 시를 통해서 적에 대한 강한 증오심을 나타내며 또 그를 저주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 신약의 정신이며, 구약의 정신도 동일하다 (잠20:22; 24:17; 레19:17-18).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복수심 혹은 저주와 관련된 구절들을 피하려 한다. 마치 그와 같은 구절들을 읽기만 해도, 내면 속에 가까스로 감추어 두었던 분노, 증오와 원한이 폭로될 것 같은 은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읽어서는 안되는 금서를 대하듯 넘어가 버린다.

저주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지만, 저주를 표현하고 있는 시편의 부분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5:8-10; 6:10; 7:12-16; 10:15; 12:3; 17:13; 18:43-48; 28:4-5; 31:17-18; 35:4-9, 26; 37:2, 9-10, 15, 20; 40:14-15; 41:10; 44:5-7; 54:5; 55:9, 15, 19, 23; 58:6-8; 59:12-14; 63:9-11; 64:7-9; 68:21-23; 69:22-28; 70:2-3; 71:13; 74:11; 79:6, 10-12; 83:9-17; 109:6-20, 29; 119:78; 120:3-4; 129:4-6; 137:7-9; 139:19; 140:8-10; 141:10; 143:12.


2. 형식

2.1 용어 설명

구약 성경에 나타나는 저주의 형태는 크게 둘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선언적 저주이며, 다른 하나는 기원적 저주다. 선언적 저주란 어떤 대상에 대하여 재앙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재앙이 임하게 되는 원리를 선포하면서 재앙을 경고하는 것이다. 열방에 대한 경고 역시 선언적 저주에 속한다 (사13-23). 이와 같은 선언적 저주가 선포되었을 때, 그 경고를 무시한 자에게는 저주가 자동적으로 임한다 (창27:13; 신28:15; 슥5:1-4; 대하34:24). 저주에서 피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슥5:3). 레26과 신28-20에서 27개의 저주가 선포되었고, 이는 6가지 형태로 간추릴 수 있다: 전쟁에서의 패배 (defeat), 질병 (disease), 땅의 황폐함 (desolation), 약탈 당함 (deprivation), 땅에서 추방 (deportation), 그리고 죽음 (death).

기원적 저주는 남에게 불행이나 재앙이 일어나도록 비는 것이다. 저주한 뒤, 회개를 요청할 수도 있다 (행8:20-24).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심판의 요청이 회개와 그로 인한 사죄의 가능성을 전혀 배제한 상태에서 어떤 대상을 향하여 주어질 때 그것을 기원적 저주라고 부를 수 있다. 이는 예언, 소원, 혹은 기도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여기에는 원수의 시기심을 일깨우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시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원수의 처참한 죽음을 소원하는 것, 더 나아가 원수의 어린 자녀가 비참하게 죽는 것을 소원하기까지 이른다 (137:9). 그러므로 저주에는 그리스도의 마음과 반대되는 복수심이 분명히 나타난다.


2.2 저주의 사회적 용례

저주는 앗수르 조약의 가장 핵심이며, 모든 조약에서 나타난다.

[에살핫돈의 계승 조약 414-420] 신들의 왕이며, 운명을 결정하는 신 앗수르가 네게 악하고 불쾌한 운명을 결정하기를 원하며, 네게 장수함을 허락하지 않기를 원하노라. 그의 사랑하는 아내 물리수가 그 입의 말들을 악하게 하며, 너를 위해 중재하지 않기를 원하노라. 신들의 왕인 아누가 네 모든 가족들에게 질병, 극한 피곤, 말라리아, 불면증, 근심, 허약함을 비처럼 내리기를 원하노라. 하늘과 땅의 광채인 신이 문둥병으로 네게 옷 입히고, 네가 신들과 왕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기를 원하노라.

복수심에 의하여 신들에게 호소하며 자기의 원수들을 저주한다.

[히타이트 정복 기사] 오 아린나(Arinna)의 태양 여신, 나의 여주인이시여, 나를 '어린애'라 부르고, 나를 모욕하였던 이웃의 원수 나라들이 당신의 영토를 침범해 왔습니다. 오 아린나의 태양 여신, 나의 여주인이시여, 내 옆에 서셔서, 앞서 말한 이웃의 원수 나라들을 내 앞에서 무찌르소서.

[아캇 신화] 마라랏투굴랄아, 영웅 아캇이 네 옆에서 살해되었으니, 네게 화가 있으리로다. 너의 뿌리가 땅에 싹을 내지 못할 것이며, 그가 너를 뽑아 낼 때, 네 머리가 떨어지리라. 지금부터 영원히, 지금부터 모든 세대에 이르기까지, 피난민이 되리라.

구약 시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저주는 보편적 현상이다. 흔히 보호를 위한 일종의 방책으로 저주를 사용한다. 하나님을 섬기고 (신28:47), 이웃에게 악을 범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백성들의 충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저주를 선포한다 (신27:15-26; 28:15-19, 20-36). 이스라엘 지파들이 베냐민 지파와 결혼하지 못하도록 규정한 조약을 보장하기 위해서 저주한다 (삿21:18). 사울이 그의 군대에게 식사를 금하게 하기 위해 저주한다 (삼상14:24, 28). 여리고성 재건을 막기 위해 여호수아가 저주했다 (수6:26). 자신의 주장 혹은 행위의 진실성을 보증하기 위해 저주하며 (시7:3-5; 의심의 소제, 민5:19-31), 보복과 응징의 수단으로서도 저주한다 (창4:11; 삿17:2). 보복할 수 없는 현실적인 무능력으로 인해, 저주를 통해 보복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삼하3:29).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비통함으로 인하여 구체적인 대상이 없이 저주하기도 한다 (욥3:1-10). 개인 혹은 국가의 원수들에 대해 저주한다 (시79:6-12). 모든 종류의 약속 혹은 계약에 있어서, 그것이 구속력이 있도록 만드는 보호수단으로 저주가 사용될 수 있다 (삿21:18; 왕상 9:6-9; 느10:29).


2.3 저주의 형식


3. 해석

3.1 잘못된 해석들

1) 저주는 나쁜 것이므로, 말시온처럼, 성경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주 역시 성경의 한 부분이므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에게 유익이 있다 (고전10:11; 딤후3:16). 예수와 사도들이 저주시편의 권위를 인용한다. 그러므로 저주시를 기록한 시인들은 틀렸으므로, 신약의 성도들이 그들의 저주를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말시온적인 이원론이다.

2) 시편의 저주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유익이 있으므로, 저주 부분들을 성경에서 제거해서는 안되지만, 동시에 저주하는 시인들의 영적 혹은 도덕적 수준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보다 낮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의 문제점은 다윗이나, 바울과 같은 영성이 뛰어난 사람들을 저주하기를 즐기는,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또한 성경에 기록된 저주에 관한 많은 내용들이 간접적인 유익만 주고, 그 자체로서는 좋지 않다고 본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가 손상될 수 있다는 것도 문제다.

3) 시인의 저주는 당대의 자기 원수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적에 관한 예언일 뿐이다고 말한다. 신약에서 흔히 저주시들을 그리스도와 관련된 예언적 시로서 인용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은 견해는 시인이 시를 기록하는 당시의 정황을 지나치게 무시하는 잘못이 있다.

4) 구약의 시인들은 내세에 대한 희망이 없었으므로 현세에의 정의를 원한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시인이 부활에 대한 혹은 내세에 대한 소망을 갖고 있었느냐 하는 것은 그가 저주를 할 수 있느냐 하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는 않는다. 만일 저주가 구약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금지되어야 한다면, 그가 혹시 내세에 대하여 불확실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의 저주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5) 복수를 요청하는 것은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롬12:17, 19) 라는 사도의 교훈과 일치한다. 그러나 바울은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하나님께 복수를 맡겨라고 권면하지만, 시편은 원수를 저주함으로써, 하나님께 복수를 맡기고 있다.

6) 이러한 저주들은 모두 집단적 성격이라고 간주하기도 한다. 원수 자신 뿐 아니라, 조상이나 후손에게까지도 저주가 임하길 바란다. 그러나 많은 시들에서 비록 개인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내 원수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는 것처럼 저주의 개인적 성격은 흔히 분명하게 나타난다.

7) 우리들 역시 아무런 제한 없이 시편과 같은 내용의 저주를 행해도 된다는 것도 잘못이다. 우리 개인을 핍박하는 자들, 혹은 교회와 인류에 큰 죄를 범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저주해도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다.


3.2 이해의 방법

복수를 요청하는 목적은 원수들이 하나님께 승복하고 자신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게 하는 것이다. 시인의 분노는 저속하고 잔인한 복수심이 아니라, 여호와께 대한 정열적인 사랑에 기인한다.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시인들의 열망이 표현되는 것이다. 이는 시인이 분노하고 저주를 요청하는 이유에서 나타난다. 시인은 개인적인 손실이나 상처로 인해 저주를 요청하지 않는다. 사회적 불의, 하나님께 대한 모욕, 불신과 불순종,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짐과 같은 것들이다. 악인은 사람에게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

        비록 시인이 개인적인 상처를 입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고통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다고 간주할 때만, 하나님의 편에 서서 저주한다. 이스라엘 백성과 여호와 사이의 특수한 관계, 즉 공동운명체 사상에 기초한다. 시인은 자기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의 원수에 관하여, 하나님의 원수를 향하여 저주한다. 그러므로 저주는 가장 영적인 행위다.

구약 시대는 영적인 것을 현세적인 것으로 표현하며, 인간 심성에 내재하는 복합성을 단순화시켜 흑과 백의 논리로 표현한다. 선인이 있고 악인이 있다. 그러나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한 사람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구약에서는 일반적으로 죄와 죄인을 구분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는 그 죄에 관한한 저주를 받고 심판 받아야만 한다는 것을 시인은 선언한다. 그의 나머지 부분이 의롭다는 것은 시인의 관심 밖에 있다. 이것은 시인의 도덕적 수준이 낮아서가 아니라, 구약 시대의 일반적 계시 방법에 따른 것이다.

        도덕수준이 낮아서 저주한 것이 아니라, 그의 영이 맑게 깨어있기 때문에 저주한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원수 사랑이라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실천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저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시인들만큼 혹은 신약의 바울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닮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저주하지 못한다.


3.3 올바른 사용법과 유익

시편의 저주 부분들을 사용하는 세 가지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1) 개인을 저주하는데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저주의 원칙을 선포함으로써 '나' 역시 같은 원칙 아래 있음을 인정하라 (7:3-5). 그리스도인은 구약의 저주를 사용하여 악한 영, 사탄을 저주할 수 있다. 사탄을 가장 잘 저주하는 방법은 전도다.

2) 조건적으로 사람을 저주할 수 있다. 우리가 사람을 저주하려 할 때,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 번째 조건은 이기심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개인의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를 향해 저주하라는 것이다. 칼빈은 이렇게 충고한다. 우리 자신에게 해를 입힌 사람들에게 이기심으로 인해 복수하려 하지 말라.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의 충동적 감정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대표하는 하나님의 대리인이라고 여겨질 때, 자기의 원수를 하나님의 원수라 여기고 저주할 수 있다.

두 번째 조건은 하나님의 마음에 자신의 마음이 완전히 일치했다고 여겨질 때 저주하라. 하나님이 저주하신다고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경우에 그를 저주할 수 있다. 사람을 판단하는 일에는 거듭 신중하라. 하나님의 판단과 일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이와 같은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을 때, 저주하지 말아야 한다.

3) 저주하려 하지말고, 시인의 저주하는 소리를 들어라. 자신의 억울한 고통에 분노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상처 받은 자녀가 지켜보는 것처럼, 시인이 분노하여 저주하는 목소리를 들어라.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그들을 대표하여, 원수들을 향해 분노하고 있다. 시인은 하나님의 분노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통 속에 있다면, 시인의 말을 빌어서 저주하려 하지 말고, 의로운 시인의 분노를 듣기만 하라. 그것은 하나님이 고통 당한 그리스도인의 편에 서 계시며, 그의 고통에 참여하고 계시며, 그를 위해 일어나셔서, 그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그의 억울함을 풀어주실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저주하기 위해 시편 시인의 저주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을 정결케 하고, 저주심을 극복하기 위해 저주를 이용한다.

4) 저주의 원인이 되는 인간의 정황을 깊이 살피게 한다. 옳고 그른 것을 날카롭게 구분할 수 있게 한다. 신약의 교훈에 익숙해진 우리는 죄인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죄조차 사랑해 버린다. 유대인이 이방인보다 더 심한 저주를 한다면 그것은 유대인이 옳고 그름에 대해 훨씬 더 심각하게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58: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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