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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전도를 위한 내부자


운동에 관하여


이슬람이 날로 폭력적으로 변함에 따라 선교사들이 무슬림들에게 접근하는 것이 갈수록 어렵게 되었고 선교의 열매를 얻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이제까지 행해왔던 평범한 방법으로는 이슬람권에서 더 이상 전도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나타난 것이 소위 내부자 운동(Insider Movements)으로서,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지만 그들에게 굳이 이슬람 사회를 떠나지 말고 계속 무슬림으로 남아서 예전과 똑같이 꾸란을 읽고, 샤하다(이슬람 신앙고백)를 고백하고, 모스크 활동에도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비밀로 간직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무슬림 공동체 안에서 동료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슬림들이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모든 것을 피하고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줌으로써 거부감 없이 무슬림들과 교제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내부자 운동을 옹호하는 자들은 이것이야말로 21세기에 마지막 남은 이슬람권 선교의 방법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현재 이슬람국가에서 사역하는 많은 선교사들이 실제로 내부자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상당수의 한국 교회 및 선교 단체들도 내부자 운동을 지지하거나 실천하고 있다고 한다.


위클리프/SIL의 성경번역에서 “아버지,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용어가 무슬림들에게 공격적으로 비쳐질 수 있다는 이유로 다른 용어로 대체되자 한 선교단체협의체가 사이트에서 반대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내부자 운동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성경책이 적당하지 않았는지 무슬림 전도를 위한 새로운 성경을 번역 출판하였다. 위클리프 언어학 연구원(SIL)은 수백만 달러를 모금하여 무슬림들을 위한 아랍어 성경을 “선지자들의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출간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지칭하는 부분에서 ‘아버지’라는 단어 대신 ‘주’라는 말로 바꿨으며, 하나님의 ‘아들’ 대신에 ‘메시야’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프론티어스가 제작하고 SIL이 배포한 마태복음 터키어 번역본에는 하나님 ‘아버지’ 대신에 ‘보호자’로, 하나님의 ‘아들’ 대신에 ‘대리인’으로 번역했다고 한다. 이것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신앙을 부정하며 삼위일체가 다신론을 섬기는 우상숭배요 신성모독이라고 여기는 무슬림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어떤 이들은 내부자 운동을 상황화의 한 형태로 이해하기도 한다.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상황화라는 방법은 매우 유익하다. 전도하려는 대상들 속에 들어가서 그들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같은 음식을 먹는 것은 매우 효과적이다. 영혼 구원이라는 대 전제를 위해서 문화의 옷은 얼마든지 갈아입어도 되는 것이다. 이것은 정상적인 상황화이며 복음 전파에 있어서 반드시 적용되어야 하고 그 효과 또한 매우 긍정적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상황화를 적용함에 있어서 반드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복음의 핵심만은 절대로 양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부자 운동은 어떤 점에서 복음의 핵심에서 벗어났는가? 첫째, 십계명의 첫번째 계명을 범하는 것이다. 내부자 운동을 하는 자들은 무슬림들의 마음을 얻고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자신도 알라를 믿는 무슬림이라고 말한다. 이들의 머릿속에는 알라=하나님, 무슬림=하나님께 복종하는 자, 라는 공식이 들어있다. 그래서 사실은 기독교인이지만 하나님께 복종하기 때문에 자칭 무슬림이라고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자기들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핍박을 면하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해도 된다는 이론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알라와 전혀 다른 신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알라는 메카 지역의 꾸라이시 종족이 섬기던 우상의 이름이었다. 그 우상은 아라비아의 최고신으로 불렸으며 라트(Lat), 우짜(Uzza), 마나트(Manat)라고 불리는 세 딸이 있던 신이었다. 무함마드는 알라와 세 딸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알라(Allah)를 기독교와 유대교인들이 섬기던 여호와 하나님과 같은 신이라고 주장했지만, 무함마드와 동시대에 살던 아랍인들과 그 조상들은 그들을 알라의 딸들이라고 불러왔었다는 사실을 꾸란에서 인정하고 있다.(꾸란53:19-23)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버리고 알라를 믿는 무슬림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에 대한 신앙고백 행위인 것이다.


두 번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대속을 부인하는 것과 다름 없다. 내부자 운동을 하는 자들은 무슬림들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이싸 알 마씨를 통해서 알라를 섬기는 무슬림’이라고 한다. 이싸는 예수라고 번역되고 알 마씨는 그리스도로 번역되고 있는 아랍어다. 즉,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라를 섬기는 무슬림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싸 알 마씨가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와 전혀 다른 인물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단지 무슬림들의 그럴듯한 설득에 속은 것이다. 아랍권의 크리스천들은 예수를 이싸(Isa)라고 부르지 않고 야슈아(Yashua)라고 부른다. 야슈아와 이싸는 다른 인물이다. 성경의 야슈아는 알라로부터 책을 받은 일이 없는데 꾸란의 이싸는 태어날 때 책을 받았다고 한다.(꾸란19:30) 야슈아는 유다 지파에 속한 마리아의 몸에서 났지만, 이싸는 레위 지파에 속한 모세와 아론의 누이 마리얌의 몸에서 났다.(꾸란19:28) 야슈아는 인류의 죄 값을 대신 치루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인류 구원을 완성하신 인류의 구세주이지만, 꾸란의 이싸는 십자가에 죽지도 않았고 부활하지도 않았다.(꾸란4:157-158) 다만 구약이 진리라는 것을 확증하고 장차 아흐마드(무함마드와 같은 뜻)가 올 것을 미리 알려주기 위해서 보내진 알라의 사도(꾸란61:6)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꾸란의 이싸는 알라의 종이며(꾸란19:30) 무슬림이었다. 무슬림들은 꾸란에 나타난 이싸를 근거로 기독교의 대속 신앙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정하고 공격한다. 그런데 내부자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꾸란의 이싸 알 마씨를 통해서 알라를 믿는 무슬림들이라고 소개한다고 하니, 그렇게 하면서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품은 알곡을 생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셋째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이다. 내부자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무슬림이라고 말할 때 무슬림의 정의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무슬림이란 세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그 첫째는 알라와 무함마드를 신앙의 대상으로 믿는 자, 둘째는 절대로 의심하지 않는 자, 셋째는 생명과 재산을 바쳐서 지하드(불신자들을 죽이는 전쟁)하는 자이다. 이런 자들만이 진정한 무슬림이라고 이슬람의 경전 꾸란에 정의하고 있다.(꾸란49:15)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스스로 무슬림이라고 하는 것은 영적 자살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무슬림들에게 신임을 얻기 위해서 예수의 신성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며 삼위일체까지 부인한다. 이들은 교회를 멀리해야 하고 교회 대신에 모스크에 나가야 한다. 구원의 도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모두 부인하는 꾸란을 거룩한 경전으로 인정하며,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하면서 그를 칭송할 때 함께 동조한다. 무슬림들이 모여서 하루에 다섯 번씩 메카를 향하여 기도할 때는 같이 줄서서 기도를 한다. 무슬림들의  기도의 내용은 오직 한 가지다. 알라의 진노를 받은 유대인들이나 방황하는 기독교인들이 가지 않는 옳은 길로 인도해 달라고 비는 것이다.(꾸란1:6-7) 자신이 기독교인이면서 무슬림처럼 엎드려 그들과 같이 기도하면서 기독교인들을 방황하는 무리라고 고백하고 있다는 것은 모순이다.

 
내부자 운동 요원들은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도바울과 예수님의 성육신을 예로 든다. 성경에 보면 사도바울이 모든 사람에게 모든 모양으로 복음을 전하자고 했는데 왜 우리는 무슬림을 얻기 위해서 무슬림의 모양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면 안 되느냐고 질문한다. 또는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하늘 보좌를 떠나서 육신을 입고 죄인처럼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복음을 전하셨는데, 우리는 왜 무슬림들 가운데로 들어가서 무슬림들처럼 살면서 복음을 전하면 안 되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무슬림들 속에 들어가 무슬림처럼 되는 내부자 운동은 성경적인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분들은 문화의 옷은 바꿔 입었지만 복음의 본질은 변질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고 돌에 맞기도 하고 태형을 맞기도 하고 옥에 갇히기도 했으며, 예수님은 당시의 유대 교권자들과 복음을 타협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부자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핍박을 피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양보한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삼위일체와 예수님의 신성, 대속죄물 되심을 부인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있는 꾸란을 거룩한 책으로 인정하고, 그렇게 가르친 무함마드도 거룩한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한다. 하루 다섯 번의 무슬림 기도와 모스크 출석을 한다. 무슬림들이 의심하지 않도록 완전한 무슬림처럼 의식주를 따라하면서 턱수염까지 기르고 여성은 차도르를 쓰고 살아간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자신을 무슬림으로 확신시키려는 자들이 어떻게 무슬림들을 기독교인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기독교로 개종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것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음을 설득하려고 한다. 복음을 위해 기꺼이 모든 고난과 핍박을 감수했던 사도바울과 얼마나 대조되는 모습인가!


개종한 기독교인들을 무슬림 사회 밖으로 빼오지 말고 그 안에 그대로 살도록 하는 것이 내부자 운동의 핵심이라면, 이것이야 말로 성경과는 정반대의 이론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왜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라고 하셨나? 그 땅이 우상숭배의 땅이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왜 출애굽해야 했나? 애굽이 타락했기 때문이었다. 이슬람권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은 거짓 진리가 지배하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야 하는가? 아니면 신앙적인 신념을 굽히고 타협하면서 머물러야 하는가?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할 때 이 동네에서 핍박하면 저 동네로 피하라고 하셨지(마10:23) 적당히 타협하고 그 땅에 머무르라고 하지 않으셨다.


최근에 여러 나라 무슬림 출신의 기독교인 학자들이 내부자운동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묶어『크리슬람(Chrislam)』이라는 책을 펴냈다. ‘크리슬람(Chrislam)’이란 기독교와 이슬람을 혼합하여 전도하는 선교전략을 의미한다. 그들은 소위 내부자 운동가들이 진리의 말씀을 기독교도 아니고 이슬람도 아닌 신종합성종교로 변조시키고 있는데 대해 분노한다. 내부자 운동은 결코 선교의 열매가 있을 수 없는 허구일 뿐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무슬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무슬림들 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극히 소수의 예외는 있겠지만 보통 무슬림들은 외국의 기독교인이 그들 가운데 사는 것에 대해서 전혀 거부감이 없다. 오히려 외국인이 무슬림이 되어서 자신들과 함께 살고 있다면 매우 신기하고 이상한 현상으로 생각한다. 무슬림 종교지도자들은 그런 사람들을 보면 “이슬람이 기독교보다 더 훌륭한 종교라는 증거”로 이용하고 싶어 한다. 성경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3:12)고 말씀하신다. 또한 저희가 무슬림 모양으로 억지로 무슬림 율법을 지키며 살라고 하는 이유는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갈6:12)

 

이만석/무슬림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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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이 이슬람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

 

무슬림은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

 

현재 전 세계 인구는 약 70억 명이다. 이 가운데 무슬림 인구는 약 16억으로 전 세계 인구의 22% 정도이다. 이슬람을 아랍 지역의 종교로만 여겨왔지만,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세계 어느 곳에서나 대도시에서는 모스크와 무슬림들을 만나는 상황이 되었다. 이미 지역과 국경을 넘어 만날 수 있는 이슬람, 이런 이슬람을 향한 기독교의 선교적인 접근은 아주 미미하였다. 현재까지도 기독교 선교는 미완성 사역이다.

 

전 세계 미전도 종족은 약 8,000~6,000개 이고, 그중 성경이 번역되지 않은 종족은 4천 개나 된다. 영국의 데이빗 바렛(David Barrett)이 미전도 종족에 대한 선교지도를 A, B, C로 구분하였다. A가 미복음화 된 지역이다. 30개 국가로 인구는 13억 정도이며 23.7%이다. B지역은 전도된 국가이면서도 기독교 신자가 적은 나라이다.

 

이들 나라가 76개국으로서 23억 정도이다. C국가는 기독교 국가로서 145개국이며 인구는 18억이다. 기독교인이 60% 이상인 나라들이다. 전 세계교회의 모든 수입 중에 99.8%가 이미 복음화 된 곳에서 사용되고 0.09% 만이 비기독교지역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0.01% 만이 A지역, 즉 미 복음화된 지역을 위해서 사용되어진다. 전 세계 기독교 선교사 가운데 3천 명만이 이곳에서 사역하고 있다. 전 세계선교사는 약 17만 명이다. 전체의 2% 만이 미전도 지역에서 사역하고 있는데 그곳의 대부분은 무슬림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다.

 

기독교에서 이슬람권을 향해 최초로 선교적 접근을 한 사람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1181-1226)였다. 그는 5차 십자군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에 이집트의 술탄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함으로 선교사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물론 가시적인 열매는 없었으나, 중요한 것은 이슬람 선교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수도사들은 순교를 각오하고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1219년 다섯 명의 수도사가 모로코로 갔다. 그러나 1년 후에 그들은 순교하였다.

 

실제로 최초로 무슬림을 위하여 조직적으로 사역한 선교사는 레이몬드 룰 Raymond Lull,(1235-1316)이다. 그는 이슬람권에 보낼 선교사의 훈련을 위하여 1290년 아랍어과와 신학부가 있는 몽펠리에 대학을 설립하였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유럽에 이슬람과 아랍에 관한 학문을 고취시켰다. 그는 82세의 노구로 튀니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베자야 해변에서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

핸리마틴 Henry Martyn(1781-1812)은 캠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영국 성공회 목사로서 인도로 가서 동인도회사의 전임 사목으로 있다가 힌두교성경을 번역했고, 이란으로 가서 이란성경을 번역했지만, 결핵으로 인해 겨우 31세의 나이에 터키 토카트에서 죽었다.

 

그 후에 이슬람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무엘 쯔머 Samuel Zwemer(1867-1952)이다. 학생신앙운동에 자극을 받고 헌신하여 아랍선교회를 세우고 그의 친구들과 아랍어를 배우기 위하여 레바논에 들어갔으며, 1900년대 초반에 이집트에서 사역을 하였고 40년 동안 20여명의 개종자를 얻었다. 이슬람권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미국에 알렸다. 그는 21년간 아라비아 반도에서 사역을 하였다.

 

이것이 19세기까지 이슬람권에 들어가서 사역한 사람들이다. 이슬람권을 향한 몇몇 선교사들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는 달리 서구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이슬람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반목과 갈등의 관계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항상 걸림돌이 되어왔다.

 

더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의 많은 기독교인들조차도 이슬람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 않으며

무슬림에 대해 배우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복음을 전해야 할 기독교인들이 무슬림에 대해 무관심함에 따라

결국 무슬림들은 복음을 듣고 진리를 알 수 있는 기회조차 없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무슬림들은 자연스럽게 서구교회로부터 냉대를 받았으며,

무슬림은 그들의 관심 밖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오늘날에도 이러한 서구의 자세가 지속되어 왔는데 이는 이슬람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 장벽과 함께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어려운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무관심으로 인하여 성경이 아랍어로 번역된 것은 무함마드에 의하여 이슬람이 시작된 지 227년이 지난 837년이었다. 아랍어로 성경이 번역되었다고 해도 정작 아랍어 성경이 출판된 것은 1516년이다.

기독교의 중심이었던 서구의 이슬람에 대한 심리적 원수관계로 인하여

전 세계 무슬림들의 80%는 복음을 들어보지 못하게 되었다.

 

무슬림들은 구교회로부터 무시당했다.

 

기독교회사에서 무슬림이 구교회로부터 학대를 받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1099년부터 8차에 걸쳐 일어났던 십자군 전쟁은 성지탈환이라는 구호아래 약 200년간 예루살렘을 다스렸는데, 무슬림 역사가들에 의하여 군인들은 말을 타고 모스크 안을 휘젓고 다닐 때 모스크 바닥에 피가 얼마나 흥건했던지 말의 굽이 잠길 정도였다고 한다.2) 그때 많은 무슬림들이 학살당함으로서 이슬람과 기독교사이에 큰 상처가 생겨난 것이다.

 

데이빗 바렛(David Barrett)<세계 그리스도인 백과사전>(The World Christian Encyclopedia)에서 AD 33년부터 AD 2000년까지 약 69,420,000명의 남녀 및 아이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고 밝혔다.

그 전체 인원 중에 9,101,000 명의 기독교인들이 무슬림들에 의해 순교를 당했다.3)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는 너무나 상반되는 이기적이고 잔인한 인종주의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의 복음의 진보와 역사 앞에 이 같은 엄청난 과오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기독교를 가장한 인종주의와 차별주의에 대해 분명한 분별력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인류를 편애하지 아니하시고

 전 세계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무슬림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이슬람은 과거 기독교 지역에서 성장하고 있다.

 

무함마드가 살던 시절에 중동은 기독교의 중심이었다. 북부아프리카는 가장 큰 교구를 자랑했었다.

초대교회 기독교는 5곳에 거점을 두고 있었다.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 로마였다.

그런데 이 5곳 중에 지역적으로 4개는 모두 이슬람 국가가 되었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수가 있었을까?

 

첫째, 당시 비잔틴 제국은 페르시아와 100년 넘게 지속된 전쟁으로 인해 많은 세금을 백성들에게 부과하였다.

특히 비잔틴 제국 아래에서 살아가는 기독교 이단들에게 더욱 가중되었다. 이집트의 경우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이단으로 판명된 이후에 가중한 세금을 견디기 힘들어 하던 중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이슬람을 해방자로 여기고 이에 협력하였다.

 

수백 년 동안 쌓아왔던 신학적인 공로와 업적들이 단지 몇 십 년의 역사밖에 없던 이슬람에게 넘어간 것이다.

기독교 안에 수세기에 걸친 이단 논쟁과 끊임없는 영토전쟁 등으로 인해서

기독교인들의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은 식어갔고,

믿음 또한 한계에 이르렀다.

그로 인해 이슬람의 협박에 맞서 싸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둘째, 기독교인들이 종교적 신념보다 정치적, 경제적 실리를 택했기 때문이다.

이슬람 정치가들은 기독교인들에게 지지야(Jizya)라는 약간의 종교세(인두세)만 내면 각자의 종교에 대하여 자유를 보장해 주었다. 이는 아주 관대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적 자유를 주기는 하였지만, 완전한 자유는 아니었다.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딤미가 되는 것이었다.

딤미는 2등 국민으로서 정치적, 사회적인 불평등을 받았다.

그러나 이슬람으로 개종 할 경우, 고위관리, 군 장성 등 사회 지도층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4)

 

셋째, 무슬림 남자들이 샤리아 법에 따라서 기독교여성들과 결혼을 하게 됨으로서 자연스럽게 기독교인은 감소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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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목사님의 무슬림 전도 이야기

 

우리는 무슬림들이 사는 한가운데서 사역하고있다. 1년에 네다섯번씩 학교앞공원에 대형 천막을 치고 집회를 한다. 성탄,부활절 행사와 문화공연 행사, 의료캠프 등이다. 이 모든 행사에는 적게는 700~800, 많게는 1300~1400명의 아이들과 동네 사람들이 모인다. 이렇게 사람들이 모일때 복음을 전할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행사는 오래전부터 시작했고 지금까지 스무번 정도 넘게 집회를 했다. 집회때마다 항상 같은 성경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해왔다.

 

그것은 요한복음 316절과 사도행전 412, 그리고 코란 수라를 인용하면서 같은 설교를 반복했다.

 

두 성경 구절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세상의 구세주로 주셨으며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과 또한 이 세상에 는 어느 누구도 구원 얻을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는 말씀이다.

 

코란 구절은 예수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구절로 몇 년 전부터 코란을 통한 복음 전도의 일환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는 아주 유용해 많은 무슬림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코란 내용에는 첫째 예수는 거룩하다는 것과

둘째 예수는 죽음을 이기는 능력이 있다는 것,

셋째 예수는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나는 이구절을 가지고 설교를 하면서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늘나라로 갈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강조한다.

 

2007년의 일이다. 성탄행사 시작전 무슬림들 앞에서 설교를 했다. 일단 그때는 별 일이 없었다,

그런데 집회가 끝난 다음날 우리 센터에 정통무슬림복장을 한 k씨가 찾아왔다,

나는 처음에 약간 두려웠다. 그는 센터에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나를 만나 자고 했고 나는 그 형제와 대화하기 시작했다.

 

매년 4~5차례 학교앞 공원서 집회 다짜고짜 찾아온 무슬림에 긴장 예수설명하자 "복음을 받아들이겠다

 

그는 집회에 한번도 참석해 본적이 없는 사람이 었다. 그런데 우리가 스피커를 크게 틀어놓고 집회를 해서 공원 근처 자기 집까지 들렸던 모양이다.

그는 나의 설교를 계속 들어왔다고 말하면서 자신 역시 코란을 읽은 사람으로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도대체 그런 내용이 어디에 나오는지 궁금했다고 찾아온 것이었다.

 

놀라웠다. 선교지에 와서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해 서 그랬는지 K씨의 등장에 순간 움찔했었다.

또 무슨 반대를 하려고 그러나 조마조마했었는데 그가 털어놓는 이야기는 신기할 정도였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이사람이 참 선지자와 하나님을 알게 하옵소서'

 

나는 본격적으로 K씨 앞에서 '인질'에 대해 그리고 예수가 누구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물론 성경말씀을 확인하면서 말이다.

 

그는 내말을 듣더니 몇가지 질문을 했다. '복음서는 변질된 책이 아니냐?' '하나님이 어떻게 아들이 있을수 있냐?'

 

는 질문 등이었다.

 

나는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찾아가면서 질문에 답했다. 그는 말씀을 확인하면서 차츰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마지막 설명을 하면서 그에게 복음에 반응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는 복음을 받아들이겠다고 고백햇고 예수를 믿겠다고 말했다.

 

나는 너무 감사해 그의 손을 잡고 기도햇다.

 

나는 이일로 하나님께서는 대중 집회를 통해서도 일하시고 집회에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소리만 듣고도 구원하시는 분임을 경험하게 됬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고 살아갔으면 좋겠다.

 

이 글을 읽고 / 앞으로 계속 잘 이끌어 주셔서 훌률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워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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