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관점1 / 소돔과 고모라
동성애와 동성결혼이 현대의 가장 핫한 이슈가 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동성애의 문제점을 네오 막시즘,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주의, 페미니즘과 성 정치, 퀴어이론 등의 이데올로기의 관점보다는 성경에서 말하는 순수한 시각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또한 환경문제, 심리적 요인, 유전자 변이와 호르몬의 이상으로 인한 성 정체성의 혼란 등은 다루지 않겠다.
소돔과 동성애
동성애하면 소돔과 고모라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소돔과 고모라는 아드마, 스보임, 소알과 더불어 사해(死海) 남단 싯딤 골짜기에 있던 다섯 도시 중 두 도시이다(창14:2, 3). 소돔에서 유래한 [소도미] 라는 의미는 동성애와 짐승과의 수간 등 성적문란을 뜻한다. 그래서 통상적으로 소돔의 죄악은 동성애라고 단정하곤 한다. 그리고 이러한 동성애로 인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소돔의 죄악은 무엇이었을까? 이미 창 13:13에는 소돔에 대한 평가가 악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럼 동성애나 성적문란이 소돔의 전부였을까?
창 13:13 소돔 사람은 악하여(라, 나쁜, 해로운 bad, 악한 evil) 여호와 앞에 큰 죄인(핫타, 죄 있는, 죄 많은, 죄인) 이었더라
소돔과 고모라
위 구절을 가지고는 소돔의 죄가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으로 가늠하기 어렵다. 그래서 소돔에 대한 다른 성경의 평가를 요약해보면, 성적인 타락뿐만 아니라 아래처럼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이로 보건데 소돔의 죄악은 근원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데 있었고, 그 결과로 수많은 악행들이 동반되었다. 동성애와 같은 성적문란은 그 결과물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소돔의 죄악을 동성애나 성적문란으로만 간주하는 관점은 매우 편협적인 시각이다.
[간음을 행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을 행하는 자]--렘 23:14 내가 예루살렘 선지자들 가운데도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그들은 간음을 행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을 행하는 자의 손을 강하게 하여 사람으로 그 악에서 돌이킴이 없게 하였은즉 그들은 다 내 앞에서 소돔과 다름이 없고 그 주민은 고모라와 다름이 없느니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지만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고 교만한 자]--겔 16:49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음란하고 육체의 쾌락을 추구하는 자]--유 1:7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고 주의 백성을 핍박하는 자]--계 11:8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특히 소돔과 고모라의 피지배계급이 억울하다고 울부짖는 소리가 크다고 한 점을 볼 때, 억울하게 고통당하는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으며, 억울한자들이 흘린 피가 하늘을 향해 호소하였을 정도로 통치자와 지배계급의 폭정이 심하지 않았나 추정해 볼 수 있다(창 4: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호소하느니라). 창 18:20의 표준새번역과 창 19:13의 현대어성경을 보라. 따라서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을 받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들의 폭정으로 인해 하늘을 향해 원통하게 부르짖는 자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지 동성애나 성적문란이 근본문제는 아니었다.
창 18:20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자아크, 부르짖음, 외치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 크고 그 죄악이( 핫타아, 죄, 유죄, 죄의 형벌, 속죄제) 심히 무거우니
[표준새번역] 주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려 오는 저 울부짖는 소리가 너무 크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엄청난 죄를 저지르고 있다.
창 19:13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이 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
[현대어성경]우리가 이 성을 모조리 쓸어 버릴 작정이오. 이 성 사람들이 어찌나 못된 짓만 일삼는지 이 성 사람들 때문에 억울해하여 한이 맺혀 울부짖는 사람이 너무나 많아 여호와께서도 그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이 소돔성을 쓸어 버리라고 우리를 보내셨소
소돔과 고모라의 본질-폭력성과 야만성
이들의 악행과 폭력성은 결국 롯이 영접한 천사들을 상관(강간)하기위해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모습에서 잘 나타난다. 힘을 가진 일단의 무리들이 힘이 없는 약자인 롯에게 위협을 가하면서, 롯이 영접한 자를 아무런 이유없이 성폭행(야다, 상관)하겠다는 장면을 통해 소돔과 고모라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도시였지만, 폭력성과 야만성이 가득한 살벌한 도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의 문제는 단순히 동성애나 성적문란이 아니라 폭력에 기반한 성폭력에 있다. 이들은 성폭력뿐만 아니라 롯을 해할려고 하였다. 이로 보건데 이들의 폭력성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겪은 많은 이들이 억울해하여 한이 맺혀 울부짖었고, 그 가운데 하나가 성폭력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창 19:4 그들이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창 19:5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야다, 알다, 이해하다, 성적 관계를 가지다)
창 19:9 그들이 이르되 너는 물러나라 또 이르되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가서 그 문을 부수려고 하는지라
하나님은 이러한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살펴보기 위해 직접 방문하신다. 이러한 모습은 바벨탑 사건과 매우 유사하다. 하나님은 바벨도시와 바벨탑을 쌓고 있는 인간들을 보시기 위해 내려오셨다. 그리고 결국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인간들을 흩으셨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방문을 받은 소돔과 고모라는 악행들과 폭정으로 인해 심판을 당한다.
창 18:21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창 11: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소돔과 의인
아브라함은 곧 소돔과 고모라에 심판이 있을 것을 알아챈다. 그래서 의인이 있다면 그 의인이 악인과 함께 멸망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나지 않느냐고 하소연한다. 아마도 조카 롯이 소돔에 살고 있었고, 적어도 롯만큼은 의인이니까, 심판에서 구원해 주십사하는 의향이 깔려 있는듯하다. 현대어성경을 보라.
창 18:23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창 18: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 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현대어성경] 저는 주께서 올바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이들을 못된 짓만 일삼는 것들과 함께 죽이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시면 안되지요. 절대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만일 저 성읍을 쓸어 버리신다면 그것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 올바로 살아가려고 하는 이들을 죽어 마땅한 못된 것들과 함께 죽이시는 셈이 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은 공정하셔야 할 줄 압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정의에 하소연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의인 50명이 있다면 멸하지 않겠다고 먼저 제안하신다(창 18:2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만약 의인 50명이 있어서 악인들이 전부 멸망당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정말 정의로운 일일까? 악인들이 의인들에게 감사해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채 악을 더해가는데도 의인 50명 때문에 심판을 받지 않는다면, 그리고 악이 지속적으로 득세한다면 과연 정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 적어도 요나가 악인이라 여겼던 니느웨는 심판의 메세지를 받자마자 굵은 베 옷을 입고 회개하여 12만명이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럼 정의란 무엇일까? 정의는 악인이 심판을 당하고 의인은 은혜와 보호를 입는데 있다. 만약 악인이 번영하고 의인이 고통을 당한다면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기대가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 수 많은 모순들을 경험한다. 전도서를 보라! 악인이 잘되고, 의인이 고통당하는 [헛되고 헛되도다] 하는 일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가? 지금도 여전히 악인들이 폭력을 동원하여 힘없는 자들을 억압하며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한다. 때문에 수많은 인간들은 하나님이 공의롭지 못하다고 원망하거나,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전 7:15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전 8:14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많은 이들이 평상시에는 하나님을 찾지 않다가 불미스런 사고와 사건이 터지면 왜 하나님이 막아주시지 않느냐고 항변한다. 이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동네북처럼 두들거야 살 맛이 나는 자들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정의는 인간의 상식과 고장관념을 뛰어넘어 활동한다. 결국 악인은 영원할 것 같지만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한순간에 모두 사라질 것이다(시 1: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때문에 이러한 불합리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끝까지 신뢰하는 믿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것이 바벨론의 악행을 보고 실족할 뻔한 하박국에게 하나님이 요구한 믿음이었다.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남유다의 징계도구인 바벨론을 결국에는 멸하겠다고 약속하였고, 하박국은 이 사실을 믿어야만 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우리는 아브라함의 탄원을 통해 소돔땅에 적어도 의인 열명도 없다는 사실과 아브라함의 조카 롯만이 유일한 의인이지 않았나 추정해 볼 수 있다. 벧후2장에서는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 이라는 표현을 쓴다. 결국 구원을 얻은 자는 롯의 가족뿐이었다. 물론 롯에게도 인간적인 한계가 엿보인다. 창19:8에서 자신의 두 딸을 대신 내놓을테니 알아서 하라고 하는 장면은 상식으로는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이다.
창 18:32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벧후 2:7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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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9:23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
창 19:24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창 19:25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결국 소돔과 고모라는 철처히 심판을 받고 후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는 주님이 언급하신 것처럼 앞으로 닥칠 종말론적 [심판 날]에 대한 중요한 예표가 된다.
마 11: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마 11: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은 근원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데 있었고, 그 결과로 수많은 악행과 폭력들이 동반되었다. 동성애와 같은 성적문란은 그 결과물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소돔의 죄악을 동성애나 성적문란으로만 간주하는 관점은 매우 편협적인 시각이다.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을 받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동성애가 아니라 그들의 악행과 폭정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하늘을 향해 원통하게 부르짖는 자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이로 보건데 소돔과 고모라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도시였지만, 폭력성과 야만성이 가득한 살벌한 도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의 문제는 단순히 동성애나 성적문란이 아니라 폭력에 기반한 성폭력에 있다. 이들의 폭력으로 말미암아 많은 이들이 억울해하여 한이 맺혀 울부짖었고, 그 가운데 하나가 성폭력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로마서의 동성애의 근원-불신앙과 우상숭배
그러면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동성애를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는가? 동성애가 발생하는 근본적 배경에는 [롬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라는 불신앙과 [롬 1:22-23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의 우상숭배 죄악이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교회 안의 많은 신자들이 동성애의 원인이 불신앙과 우상숭배에 있음을 보지 못하고 인권과 사랑의 관점에서 본다는 점에서 상당히 나이브하다. 특히 진보주의자들......
이러한 불신앙과 우상숭배의 결과는 [롬 1:24-27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에피뒤미아, 충동, 욕망, 갈망)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파라디도미, 포기하다, 넘겨주다)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아티마조, 모욕하다, 창피를 주다) 하셨으니,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파도스, 욕정, 정욕)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오렉시스, 욕망, 갈망, 육체적 욕망의 분투) 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안티미스디아, 형벌)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에 나타난 것처럼 동성애 라는 결과물이다.
불신앙과 우상숭배의 결과는 마음의 정욕(에피뒤미아, 충동, 욕망, 갈망), 몸의 욕됨(아티마조, 모욕하다, 창피를 주다), 부끄러운 욕심(파도스, 욕정, 정욕), 서로를 향한 음욕(오렉시스, 욕망, 갈망, 육체적 욕망의 분투), 남녀 간의 순리적인(퓌시켄) 성관계를 역리적으로(파라 퓌신) 바꾼 것으로 특징지워지고, 하나님이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아티마조, 모욕하다, 창피를 주다) 하시어, 그 결과가 동성애로 나타나고 그와 아울러 다양한 죄악의 현상들인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비방, 능욕, 교만, 자기 자랑, 악을 도모, 부모 거역, 우매, 배약, 무정, 무자비] 등을 양산한다는 점을 간파해야 한다.
롬 1:26,27의 현대어 성경을 보라! 불신앙과 우상숭배에 기인한 동성애는 자연스런 법을 어긴 변태적인 성적 범죄이며, 더러운 욕정이고, 수치스런 일이며, 동성애 행위 그 자체가 하나님의 형벌이었다.
하나님은 불신앙과 우상숭배에 빠진 인간들에게 모든 악한 일을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셨다(파라디도미, 포기하다, 넘겨주다). 이러한 하나님의 유기와 방치 그 자체가 형벌이었다.
[현대어성경]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모든 악한 일들을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러자 심지어는 여자들까지도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자연스러운 법을 어기고 변태적인 성적 범죄를 저지르며, 남자도 여자와의 정상적인 성관계를 버리고 동성끼리 더러운 욕정을 불태우며 수치스러운 일들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잘못에 대해서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롬 1: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가 죄의 뿌리와 근본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아도키모스,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가치 없는, 거절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파라디도미, 포기하다, 넘겨주다)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시어, 거기에서 파생된 롬1:29-30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비방, 능욕, 교만, 자기 자랑, 악을 도모, 부모 거역, 우매, 배약, 무정, 무자비 등의 수 많은 죄악의 가지와 결과들이 파생되었고, 그 가지들 가운데 하나가 동성애임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롬 1: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롬 1: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 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롬 1: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롬 1: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롬 1: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롬 1: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동성애에 대한 바른 시각
따라서 교회와 신자는 동성애를 바라볼 때 동성애의 근원인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과 우상숭배,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다양한 죄악의 결과들을 다각적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시각이 필요하다. 동성애는 근원적인 죄인 불신앙과 우상숭배의 파생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성애나 동성결혼 자체만을 맹렬하게 비판하기 보다는 전 사회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죄악의 틀 안에서 다각적 시각을 가지고 비판하되, 이성적으로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 타당한 건전한 사회윤리를 함께 제시해야 한다. 교회와 신자가 핏대를 올리며 구호를 외치듯 동성애자들을 정죄하거나 심판하는 자세에서 벗어나 건전한 사회와 국가를 이루기 위한 윤리적 리더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때문에 동성애만을 비판하기 보다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 만연해 있는 근원적인 죄악들,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부패 네트워크, 불의, 탐욕, 추악, 악독, 분쟁 등과 같이 이 사회에 나타나는 다양한 죄악의 현상들을 분석하며 비판하고, 이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 불신자들도 공감할 수 있는 보편 타당한 건강한 사회윤리를 함께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왜 교회는 세상에 만연해 있는 롬1:29-30의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비방, 능욕, 교만, 자기 자랑, 악을 도모, 부모 거역, 우매, 배약, 무정, 무자비 등의 다양한 죄악의 현상들에 대해서는 입다물고 있는가?
교회 안에서만 뜨겁게 신앙생활만 잘하면 전부라고 생각하고, 교회 밖에 나가서 세상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별로 관심이 없는 자들이, 세상에서 수없이 벌어지는 죄악들에 대해서는 입다물고 있으면서, 유독 동성애에 대해서만 핏대를 올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와 신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균형적인 시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외형적인 성장을 통해 종교권력을 추구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기 때문에 이 사회를 지배하는 죄악들에 대해서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모든 사람이 공감 할 수 있는 보편 타당한 건강한 윤리를 제시하는데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강단에서 헌금과 복, 출세와 성공만을 강조했지, 세상에 나가서 신자가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는 강조하지 않았다.
죽으면 내세-천당간다고만 강조했지, 정작 이 땅에 임재하고 있는 바실레이아(왕권, KINGDOM), 하나님의 나라와 통치, 주님의 주권과 LORDSHIP에 복종하여 이 땅에 실현되어지는 천국(바실레이아 톤 우라논)과 하나님나라(바실레이아 투 데우) 건설에 왕이며 제사장의 자격으로 동참해야 한다는 사명의식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들은 전도하고 교회가 숫적으로 많아지는게 하나님나라의 확장이라고 생각하여 전 우주와 전 지구에까지 향하는 주님의 왕권과 주권을 교회의 건물 안에만 가두는 치명적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교회와 세상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근본주의 교리가 교회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활을 해야 한다는 가장 근본적인 신앙의 원리를 놓치고 말았다. 온갖 사이비 신비주의적인 교리와 내세주의적 신앙관, 그리고 시한부 종말론들이 교회 안에 팽배하였기 때문에 이 세상을 바라보는 균형적인 시각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평화, 평등, 사랑, 박애, 인권을 외치는 진보주의(자유주의) 교회는 어떠한가?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정치적 억압과 압제에서의 해방이라고 보고, 구원을 경제적, 사회적 비인간화에서 인간성의 회복으로 보면서, 이데올로기 안에 갇혀 있는 인본주의자들이다.
그러면서 교회와 신자는 스스로 윤리적 부패와 죄악들에 연루되어 오히려 불신자들의 지탄을 받는 웃지 못할 지경에 까지 오게 되었다. 이 사회를 건강하게 이끌어가기 위해 도덕적 리더쉽을 가져야할 교회와 신자가 도리어 윤리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면서 동성애만을 핏대 올리며 저주를 퍼붓는, 모순된 상황을 연출하고 말았다.
때문에 교회는 동성애를 비판하면서 정치 권력이나 경제 권력에 아부하거나 타협하는 자세를 가져서는 안된다. 교회는 동성애를 비판하면서 맘몬숭배나 권력숭배에 치우쳐서는 안된다. 교회는 단순히 [예수천당, 불신지옥] 이나 [예수 믿으면 복을 받아 잘 먹고 잘 산다] 라고 말할게 아니라, 이 세상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죄악들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회개의 삶을 전파해야 하며, 건강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사회윤리를 제시해야 한다.
교회는 악해져가는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정의를 부르짖는 노아의 사명을 다시 찾아야 한다. 벧후 2:5 의 표준새번역을 보라 [그는 또 옛 세계를 아까워하지 않으시고, 경건하지 않은 자들의 세계를 홍수로 덮으셨습니다. 그 때에 그는 정의를 부르짖던 사람인 노아와 그 가족 일곱 사람만을 살려주셨습니다]
성도는 교회 안에서의 열정적인 신앙생활 못지 않게 교회 밖으로 나와,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세상 속의 죄악된 가치관과 문화들과 철저하게 싸워야 한다. 이러한 자세가 왕 같은 제사장의 사명이다. 교회 안에서는 뜨겁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복을 받아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면서, 교회를 떠나서 세상 속에서는 죄악들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면서, 동성애를 비판하는 자세는 어불성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