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초기 한국교회의 찬송가

 

 

 

 

·英語로 부르다가한글 찬송가 1892햇빛

 

기독교가 처음 한국에 소개되고 예배가 드려졌을 때 어떤 찬송을 불렀을까? 이번에는 이런 질문에 답하면서 한국교회 초기 찬송가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기독교가 소개되던 초기에는 우리말 찬송이 없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한문으로 된 중국어 찬송가를 이용했다. 1887년 백홍준, 서상륜을 중심으로 시작된 새문안교회도 처음에는 중국어 찬송을 불렀다. 백홍준의 딸 백성관은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어렸을 때 나의 아버지는 만주로부터 돌아오셔서 매일 새벽이면 기도하시고는 나지막한 소리로 쥬 예쑤 아이워(主耶蘇愛我)’를 부르시던 기억이 난다.” 아펜젤러는 자신이 편집한 찬송가 서문에서 조선말로 찬미를 쓰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나니 조선교회에서 처음에는 지나(支那)찬미가에서 얼마를 써 보았으나 가사의 뜻을 잘 알 수 없었으며라고 하여 한글 찬송이 보급되기 전에는 중국어 찬송이 사용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화학당이나 배재학당의 채플에서는 영어 찬송을 불렀다고 한다. 한국어 찬송이 없던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한글 찬송가 편찬은 시급한 과제였다.

 

국내 최초의 찬송가

 

처음에는 지역이나 선교부에 따라 각기 다른 찬송을 지어 불렀는데,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찬송가가 편찬된 때는 선교사가 입국한 지 8년이 지난 1892년이었다. 그것이 감리교의 존스(G A Jones)와 로드와일러(L C Rothweiler)가 편집한 찬미가였다. 27편이 수록된 악보 없는 수형본(手形本) 찬송가였다. 2년 후인 1894년에는 장로교의 언더우드에 의해 117곡으로 편집된 찬양가가 출판되었는데, 이 찬송가 상단부에는 사성부(四聲部) 악보가 그려져 있고 하단부에는 가사를 기록한 형태였다. 이것이 한국에서 서양식 악보가 인쇄된 최초의 음악책이었다. 이 찬양가는 주로 서울지방에서 사용되었다. 선교 초기에는 지역적으로 다른 노래가 불리기도 했고, 편집된 찬송가가 널리 보급되지도 못했다. 말하자면 첫 10여년 동안 통일된 찬송가가 없이 예배를 드렸음을 알 수 있다. 1895년에는 장로교 선교사 그래함 리(Graham Lee)와 기포드(Gifford) 부인이 편집한 찬셩시가 출판되었는데 54편의 곡을 수록하고 있었다. 이 책은 서북지역에서 주로 사용되었는데, 계속 증보되어 1902년에는 장로교공의회에 의해 공식 찬송가로 채택되었고, 이후 개정 증보되어 1905년에는 이를 기초로 마펫이 곡보찬셩시를 간행했다. 137곡을 수록한 이 찬송가가 장·(장로교·감리교)의 합동 찬송가가 출판되기까지 장로교의 공식찬송가로 자리 잡았다.

 

감리교의 존스와 로드와일러의 찬미가도 계속 증보되어 1902년에는 207곡으로 늘어나 감리교회의 찬송가로 자리 잡았다. 흥미로운 점은 선교사와 무관하게 15편의 노래를 수록한 찬미가1905년 간행되었다는 점이다. 윤치호가 역술한 무악보의 이 찬미가의 제1장이 황제폐하송이었고, 14장은 애국가였다. 이 노래는 지금의 애국가와 거의 동일한데, 곡은 스코틀랜드의 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에 맞추어 부르도록 표시되어 있었다. 후에는 찬송가에서 삭제되고 곡도 안익태 곡으로 바뀌었다. 이 찬미가가 교회의 공적인 찬송가로 채택되지는 않았으나 1908년 재판까지 발행되었다. 국운이 기울던 당시의 충군애국적인 신앙을 보여주고 있다.

 

·감 연합 찬숑가

 

한국에서의 찬송가 편찬에 기여한 인물은 침례교선교사 펜윅(M C Fenwick)이었다. 그는 14장의 찬송을 편집한 복음찬미1899년 독자적으로 발행한 바 있다. 이 찬송도 계속 증보되어 1939년 판에는 274곡을 수록하였다. 이 찬송이 동아기독교(침례교)의 공식 찬송가가 되었다.

 

한국에서의 주도적 두 교회인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는 연합과 일치를 위해 통일된 찬송가를 불러야 한다는 인식이 열매를 맺어 1908년에는 장·감 연합의 찬숑가가 발행되었다. 262곡을 수록한 이 찬송가는 이전에 번역을 다듬고 세련된 가사로 개작했다. 6곡은 한국 고유의 곡조로 부르도록 배려했다. 편집위원은 베어드부인(Annie Baird), 밀러 (F S Miller), 벙커(D A Bunker)였다. 1908년 초판은 6만부, 1910년까지 225000, 1911년 한 해 동안 5만부가 발행되었다. 이 찬송이 오늘까지 불리는 찬송가의 모태가 되었다.

 

찬송가는 한국음악에도 영향을 끼쳤고 교회는 서양 음악인을 키워낸 온상이었다. 최초의 피아니스트 김영환, 최초의 서양음악교사 김인식, 현제명, 박태준, 안익태 등도 교회가 배출한 음악가들이다.

 

(고신대 이상규교수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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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적으로 세워지는 교회들

 

1884년 매서인 서상륜에 의해 순수하게 한국인에 의한 한국 최초로 세워진 교회로 알려진 황해도 소래교회, 후에 한옥으로 신축되었다.

 

 

  화란의 칼뱅주의 신학자인 보에티우스(Gisbertus Voetius, 1588-1676)교회의 정치’(Politica Ecclesiastica)에서 선교의 목적을 이방인의 회심(conversio gentium)과 교회의 설립(plantatio ecclesiae) 그리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확증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고 했다. 그가 말하는 선교 개념은 오늘 우리가 이해하는 것보다 광범위한 것이었다. 선교란 기독교 복음운동 전반을 의미했다. 결국 선교란 구도자를 회심하게 하고 교회를 설립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보에티우스가 말하는 선교의 목적은 고전적인 가르침으로 인식돼 왔다.

 

1. 한국 최초교회, 황해도 소래교회

 

한국에서도 한국인의 구도적 활동과 함께 선교사의 내한으로 복음이 전파되자 차츰 회심자가 생겨나게 되었고, 여러 지역에 교회가 설립되기

 

1887년 세워진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 서울 새문안교회

 

   

시작했다. 이미 만주의 한인촌에서 회심자가 생겨나고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주장이 없지 않으나, 한국에서 최초의 교회는 1884년에 설립된 소래교회였다.

 

만주에서 존 로스에게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개신교 신자가 된 서상륜(徐相崙, 1848-1926)은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의 성경 번역 작업에 깊이 관여하였고, 1882년에 역간된 예수셩교 누가복음 젼셔예수셩교 요안 복음젼셔를 가지고 압록강변에서 전도활동을 전개한 바 있다. 1883년에는 이 복음서를 가지고 의주(義州)로 돌아왔으나, 위험을 느낀 그는 동생 서경조(徐景祚, 1852-1938)와 함께 외가가 있는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으로 이주해 복음서를 반포하였다. 그 결과 이곳에 한국에서의 최초 교회인 송천교회(松川敎會) 곧 소래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이 교회 설립연도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지 않으나 한국의 최초 교회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서상륜과 동생 서경조는 소래교회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소래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었을 때 언더우드는 선교부에서 건축기금을 후원하고자 했으나 소래교회 신자들은 우리가 우리의 예배당을 세우면서 외국인의 원조를 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후세에도 떳떳하지 못하다.”고 정중히 사양했다. 언더우드는 그 뜻을 존중하면서 서양의 등인 램프 5개를 교회에 기증하였는데, 그 불빛이 얼마나 밝았는지 온 동리를 밝혔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소래교회가 설립된 후 의주, 정주, 강계 등 북한 지역으로도 기독교가 전파되고 교회가 설립되기 시작했다.

소래 교회의 서상륜 장로와 가족들 , 동생인 서경조 목사( 한국 최초의 목사 중 1)

 

 

 

2. 한국 교회 최초의 세례, 장로 피택, 성찬식

 

서울에서도 회심자들이 생겨났다. 1886711일 알렌의 어학선생이었던 노춘경(盧春京)은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이것이 국내에서의 첫 세례였다. 그로부터 6개월 후인 1887123일에는 서경조, 정공빈, 최명오 등 세 사람이 서울에서 세례를 받았다. 또 송천에 있던 서상륜이 서울로 옮겨와 전도한 결과로 신자들이 생겨나게 되자 1887927일 서울에서 첫 교회가 설립됐다. 이것이 한국에서의 두 번째 개신교회인 새문안교회였다. 당시 신자는 14명이었는데, 다수가 서상륜의 전도로 신자가 된 이들이었다. 그 다음 주일 서상륜과 백홍준은 한국 최초로 장로로 피택되었다.

 

그해 1223일에는 7명의 세례교인이 참석한 가운데 성찬식이 거행됐는데, 이것이 첫 장로교 성찬식이었다. 곧이어 남대문교회(1887), 승동교회(1893), 연동교회(1894) 등 장로교회가 설립됐다.

1887년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 서울 정동제일교회

   

 

 

3. 기도처로 시작한 정동제일교회

 

서울 정동에 정주한 아펜젤러는 1887724일 배재학당의 박중상에게, 102일에는 배재학당의 한용경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처럼 회심자들이 생겨나게 되자 공식적으로 교회를 설립하게 됐다. 그 이전에 이미 자신의 집에서 집회를 해왔으나 성경공부에 참여하는 인원이 증가하자 1887109베델 기도소로 개칭하였는데, 이것이 정동제일교회의 시작이었다. 이것은 한국에서의 세 번째 개신교회이자 첫 감리교회였다.

 

아펜젤러는 1016일에는 만주에서 온 매서(賣書) 전도자 최성균(崔成均)의 아내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 여성은 한국에서의 첫 여성 수세자로 알려져 있다. 1023일에는 성명 미상의 강씨, 장점화, 한용경, 그리고 최성균 내외가 참석한 가운데 감리교 첫 성찬식이 거행됐다. 정동교회에 이어 아현교회의 전신인 서문 밖 애오개교회와 상동교회(1888. 12), 동대문교회와 중앙교회(1890) 등의 감리교회가 서울에 설립됐다.

1893년에 세워진 북한의 모 교회 장대현교회(널다리골교회)

   

 

4. 북한의 모()교회, 장대현교회

 

평양에는 18936월 장대현교회가 설립됐다. 북장로교 선교부에서 평양지부 개척자로 임명된 마펫(Samuel Moffett)은 한석진, 최치량 등 7명의 신자들과 평양 널다리골의 한옥에서 첫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널다리골교회로 불렸다. 1896년에는 300여명의 교인으로 증가했고, 19006월에는 새 예배당을 건축하고 장대현교회로 개명했다. 이 교회를 선교사들은 평양중앙교회라고 불렀다. 평양과 평안도지방 첫 교회였다.

 

이 교회를 모체로 평양의 남문밖교회(1903), 창동 교회(1905), 산정현교회(1906), 서문밖교회(1909) 그 리고 외성교회(1911)가 설립되었다. 그 후 부산에서 는 부산진교회(1892), 초량교회(1893), 제일영도교회 (1894)가 세워졌고, 대구에서는 대구제일교회(1893) 가 설립됐다. 이렇게 전국적으로 우후죽순처럼 한국 땅에 교회가 세워졌다. 이러한 교회설립은 곧 한국 사회변화의 시작이었다. 세워진 교회들을 통해 학교와 병원과 양로원 등의 사회사업이 시작되었다.

  

글쓴 이 / 이상규(고신대 역사신학 교수)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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