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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교회사 (Church_History_Beginning)


 사도시대 ~ 사도 후 시대의 교회
 종교 자유 시대의 교회: 5대 교회의 형성
 로마교회 (서방교회)의 발전
 중세 전기의 교회 (750∼1054년)
 중세 후기 교회 (1054∼1300년)
 종교개혁 전야(前夜)의 교회
 종교개혁 시대의 교회
 가톨릭 교회의 쇄신
 근대교회
 현대교회 (제2차 바티칸공의회 1962.10∼1965.12)
 
  여러분이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에 대해서 알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세계교회사를 알아야 할 것이며, 세계교회사를 공부하는 동안 가톨릭과 개신교와의 관계, 가톨릭과 동방교회와의 관계를 이해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교회가 다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교(기독교)이면서도 왜 여러 교파로 나누어지게 되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발전사, 그중에서도 특히 가톨릭교회의 발전사를 살펴 세계교회사를 통해 로마 가톨릭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어느 정도 알고 나서 우리는 다시 한국에서 가톨릭이 어떤 식으로 발전해 왔는지도 공부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우리나라에 수용될 당시 사회적, 정치적, 사상적 여건은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발견하고 그 진리에 대한 확신으로 이를 용감하게 받아 들이고, 또 전할 수 있었던 우리 조상들의 구도모습과 한국천주교회의 발전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신앙 선조들이 찾아 얻은 진리에 대한 더 큰 관심을 가지고, 더욱더 적극적인 신앙자세를 가다듬고자 한다.

1. 사도시대~사도 후 시대의 교회
  가톨릭교회의 역사는 30년경 유다교의 축일인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사도들이 베드로를 중심으로 군중 앞에 나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면서 구약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러한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이들이 사도들을 중심으로 사랑과 일치의 공동체를 형성하였는데, 초창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유다교 예배에 참여하였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유다교 종파 중의 하나로 보았다. 그러나 초대교회 신자들은 자신들만의 예배, 즉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를 거행하면서 베드로를 대표로 하는 사도단과 그들을 보좌하는 이들로 공동체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 즉 구세주로 고백하면서 그분의 기쁜 소식을 열심히 전하였으니,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루살렘 밖으로까지 전파되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이들을 그리스도교인이라 불렀다. 처음에는 유다인들을 중심으로 전파되던 그리스도교는 차츰 그리스인, 로마인들에게도 전파되었으며, 사도들과 성 바울로와 다른 여러 제자들의 열성적인 선교활동 덕분에 로마제국 안에 있는 큰 도시들 대부분에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70년 예루살렘의 멸망 후에는 유다인들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쇠퇴하기 시작했고, 외국인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날로 커져 갔다.
  이들 초기교회 공동체는 아직도 유다교의 전통을 어느 정도 따르면서도 나름대로의 교리와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사도들이 죽은 후, 2세기로 접어들면서 주교를 중심으로 하여 장로(사제)와 부제들이 보좌하는 지역공동체(교회)들이 생기게 되었다. 이들 공동체들은 서로 협력하는 가운데 교리문제를 해결하면서 급속도로 로마제국 안에 퍼지게 되었다. 교회가 발전하면서 로마 황제들과 잦은 마찰이 있게 되면서 2세기부터 4세기 초에 걸친 대 박해로 수많은 순교자를 낳게 되었다.
 
2. 종교 자유 시대의 교회: 5대 교회의 형성
  수많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발전을 거듭하던 교회는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밀라노에서 내린 칙령에 의해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이후로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 황제들의 호의적인 도움을 받으며 세계적 종교로 성장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마침내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329년에 포고령을 통해서 그리스도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하였고, 이러한 국교시대를 맞이하여 그리스도교는 여러 분야에 걸쳐서 발전하게 된다. 이때 많은 수도원이 창설되어 영성에 대한 도움을 주었으며, 공의회가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조직으로 등장하였고 신앙생활의 활성화로 인하여 전례가 발전되기 시작하였으며, 그밖의 교리 논쟁 등은 여러 공의회를 통하여 해결되었으며, 최종적으로 정통 가톨릭 교리가 정립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당시 로마제국 안의 큰 도시들에 세워진 교회들은 훌륭한 주교들과 학자들의 영향으로 전례와 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주위의 작은 지방교회들은 이 큰 교회들로부터 전례와 신학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어느 일정한 지역 전체에 영향을 행사하는 큰 교회들이 생겨났으니, 이들 교회들을 총대주교좌(總大主敎座) 교회라고 불렀다. 5세기에 이들 총대주교좌 교회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 예루살렘에 있었다. 이들 교회들은 서로 협력하면서도 각자 서로 다른 역사를 걸어가면서 발전하였다. 로마를 제외한 다른 교회들로부터 파생된 교회를 우리는 현재 동방교회들이라고 일반적으로 부르고 있다.
 
3. 로마교회(서방교회)의 발전
  5세기 중반기는 로마의 국경지대에 게르만족이 이동하면서 로마제국을 멸망시키자 그리스도교 자체도 붕괴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는 본래의 사명인 선교 열의를 잃지 않고 영국에 선교사를 파견함과 동시에, 프랑스와 독일 지역의 새 주인으로 등장한 게르만족을 개종시켰으니, 이로써 고대 그리스 문화권과 게르만 민족이 융합하여 새로운 중세문화를 탄생시켰고,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고유한 민족적 특성을 지니면서 같은 신앙 위에서 일치된 중세기 그리스도교의 기원이 된다.
 
4. 중세 전기의 교회(750∼1054년)
  게르만 민족의 이동과 프랑크 왕국과 교황청의 융합이라는 과도기(450∼750년)를 거치면서 시작되는 중세기(750∼1300년)는 시대적으로 양분(兩分)될 수 있다.
  중세 전기에는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서구 그리스도교 제국이 창설되었고 종교적 입장에서는 그리스도교 교세의 확장과 교황령(敎皇領)의 탄생 등, 외적 발전이 이룩되었다. 그러나 교회가 국가로부터 물질적인 혜택을 받은 반면에 황제의 내정간섭을 받아 교권이 약화되고 교회가 세속화 되었고,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가 밀착되었던 프랑크 제국이 정치적으로 붕괴됨으로써 교회의 권위와 교황의 권한이 쇠퇴하는 교회의 암흑기를 맞게 된다. 암흑기 동안에 그리스도교는 처음에 로마 귀족의 지배를 받았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교회 내정간섭으로 자율성을 잃게 된다. 아울러 성화상 파괴 논쟁으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신학적 충돌을 하였고, 교리 논쟁 이후로 서방 라틴교회와 동방 비잔틴교회는 각기 다른 노선으로 발전하게 된다.
(1) 성화상 파괴 논쟁   동방교회들 안에서 5∼7세기에 대중 신심으로 크게 유행하였던 성화상 공경이 신도들을 우상숭배로 빠지게 할 염려가 있다 하여 성화상들을 파괴하는 운동이 100여 년 동안(726∼843년) 지속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제국 안에서 교회박해, 폭력사태, 정치적 혼란 등 사회소요가 야기되었다. 성화상 공경을 찬성하는 서방교회(로마교회)와 이를 금지하는 동방교회 사이에 논쟁이 있었으나 결국 843년 콘스탄티노플 교회회의에서 성화상 공경을 부활시킴으로써 성화상 논쟁이 끝났다.
(2)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결별(1054년)   남부 이탈리아에 위치한 교회의 영향력 행사를 둘러싸고 로마교회와 콘스탄티노플교회와의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1054년 서로를 파문하는 가운데 비극적으로 끝나고 말았으니, 이후 동·서방 교회는 1965년 서로의 파문을 철회하고 화해하기까지 결별상태에 있게 되었다.
 
 
5. 중세 후기 교회(1054∼1300년)
  중세 후기에는 클뤼니 수도단체의 개혁과 그레고리오7세의 교회쇄신으로 교회는 세속권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권을 회복할 뿐 아니라 세속권을 지배하는 시대에 들어서게 된다. 이러한 개혁운동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각성시켰고, 평신도의 영성강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는 11세기에 시작된 십자군운동과 청빈운동에서 나타난다. 십자군운동은, 이슬람교도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성지순례에 불편을 느끼고 있던 중,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1세가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서방교회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교황 우르바노2세는 1095년 두 차례의 종교회의에서 서방 그리스도교 국가에 이를 호소하였다. 이때 동방교회를 돕기 위한 염원과 이교도로부터 성지를 탈환하려는 열망은 국가란 장벽을 넘어 서구 세계를 단결시켰다. 이 십자군운동은 대중의 종교적 운동으로 시작되어 몇 세기 동안 8차례 (또는 4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십자군운동은 그리스도교적인 목적을 위하여 일어났지만 기사들의 모험심, 명예욕 등의 세속적 동기도 있었다. 그리고 기사들의 활력은 비그리스도교적인 광포로 나타나 십자군 운동을 중세의 한 잔인한 현상으로 변질시키기도 했다. 십자군운동으로 인해 기사 수도회가 탄생했으며 비잔틴 문화와 이슬람 문화와의 접촉이 가능했고, 학문, 특히 스콜라 철학과 신학, 예술의 발달에 이바지 한 점 등이 그 긍정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6. 종교개혁 전야(前夜)의 교회
  14∼15세기(1300∼1500년)에 있어서 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는 중앙집권의 정치체제 또는 지방분권화의 정치적 상황으로 단일성을 상실하였다. 또한 교회는 일련의 대사건 즉 교황청의 아비뇽 환도(遷都)와 대분규(大紛糾, 西歐의 大離敎)로 인한 교황권의 약화로 말미암아 공의회 우위사상의 흐름 속에서 이단 운동이 발생하여 혼란 속에 빠졌다.
  프랑스인들이 교황으로 뽑히면서 그들이 프랑스의 아비뇽에 머무는 70여 년 동안(1305∼1377년) 교회는 중심을 잃고 크게 흔들렸으며, 교회 개혁 또한 지지부진하게 되었다. 로마로 다시 천도한 이후에 교회는 큰 위기를 맞게 되는데, 그것은 세 명의 교황이 선출됨으로써 서로가 자신을 정통 교황이라고 주장하게 되고 이로써 교회 전체가 분열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콘스탄스공의회(1414∼1417년)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렸고, 이로써 분규는 끝났으나 그 후유증은 오래 남았으니, 영성의 쇠퇴, 신학의 퇴보, 교회 쇄신 작업의 실패로 교회는 날로 흔들려 갔다.
  한편 일반대중의 신심생활은 매우 활발하였으며 이는 수많은 성당의 건립, 자선활동, 신심서의 보급확대, 모국어 성서의 번역, 새로운 신심의 번창에서 볼 수 있다(묵주 기도, 십자가의 길, 성지순례 등). 그러나 이 시대의 신심은 개인주의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고, 현세적 두려움을 피하고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데 치중하여 미신적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으로 교회 안에서는 비난과 함께 개혁를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지기에 이른 것이다.

7. 종교개혁 시대의 교회
  1517년 10월 31일에 독일의 성 아우구스띠노 수도회의 수사신부이며 성서학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는 대사(大赦) 남용에 대해 항의하면서 대사 교리의 재정립을 제의하기 위해 그의 교구장과 동료, 교수, 신부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에는 유명한 95개 조항의 신학명제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정통신앙의 뿌리를 뒤흔들어 놓았으며 그리스도교 교계를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개신교)로 분열시키는 종교개혁 시대를 열게 되었다. 여기서 마르틴 루터와 대사남용에 대하여 잠시 살펴 보자.
(1) 마르틴 루터   아우구스띠노회의 수사신부(修士神父)였던 루터는 대사(大赦) 남용에 충격을 받고, 그는 1517년 교회의 관습대로 그의 교구장과 독일의 대사 시행을 책임진 고위 성직자에게 항의하는 편지와 대사의 남용을 논박하는 신학명제인 '95개항 명제'를 작성하여 보냄으로써 대사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분열의 원인이 되었고 오늘날 우리가 개신교 기원을 루터의 종교개혁에 두고 있다면 그 시발점은 바로 이 대사논쟁(大赦論爭)이라고 할 수 있다. 루터는 사목자로서 설교를 통해 대사 교리와 구원론을 설명하면서 대사 설교가들을 비판, 신자들에게 대사 남용의 위험을 경고하였다. 그에 의하면 우리 영혼은 원죄로 인하여 완전히 부패하여 그 어떤 착한 행위도 우리 의지로 할 수 없으므로 스스로는 의로와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덕(功德)이 병풍과도 같이 인간의 죄를 덮어 주는 것이므로 오직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만 있다면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고신극기(苦身克己), 종교계율의 엄수, 고해성사, 자선사업, 덕행 등이 구원의 조건일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아무런 조건 없이 그리스도의 자비에 대한 신뢰만 필요하며, '우리를 구하는 것은 선행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수한 자비만이 우리를 구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성서만으로, 은총만으로, 신앙만으로 구원될 수 있다고 요약하였다.
(2) 대사논쟁(大赦論爭)   죄를 범한 죄인은 고해성사를 통하여 죄의 잘못을 용서받고 영원한 벌에서 벗어났지만 자기 죄로 인해 생긴 벌을 받아야 하는데 이러한 죄의 벌은 고해신부가 부과하는 보속의 실천을 통해서 탕감될 수 있고, 현세에서 보속을 하지 못할 경우 연옥에서 보속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교회는 가르치고 있다. 이 보속을 면제해 주는 것을 대사라고 한다. 대사는 교황이나 주교들이 줄 수 있다.
  이러한 대사제도는 초대 교회 박해시대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당시 교회의 보속 규정에 의하면 죄인은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일정한 기간 동안 자신의 죄를 보속하는 속죄기간을 거쳐야 그에 해당하는 벌을 사면받는다고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박해기간 동안에는 이러한 규정을 지키기가 힘들었고, 후에 신자들이 다시 교회에 들어오는 데 일종의 장애 요소로도 작용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특별한 경우에 주교들은 속죄기간을 단축하여 주기도 하였는데, 이 속죄기간의 단축이 대사의 기원을 이룬다. 그후 속죄기간의 단축이 아니라 속죄를 사면하는 관습이 생겨났고, 이는 이른바 대사의 원형이 되었다. 그후 십자군운동이 일어나면서 대사는 십자군에 참가하는 자나 십자군을 위하여 재산을 기부하는 자에게 주어졌는데, 이 대사는 십자군운동이 끝난 후에도 일정한 공익사업을 위해 기부하는 자에게도 주어졌다. 즉, 이는 중세말 소위 '대사 설교가'라는 사람들이 나타나 대사를 남용하면서 소위 '면죄부(免罪符)'라고 알려진 증서를 발매하기에 이른 것인데, 이것이 바로 루터의 95개항의 '항의명제(抗議命題)'가 나온 원인이다. 1506년 성 베드로 성전을 개축할 때 막대한 돈이 필요했으므로 교황들은 전대사(죄의 벌을 전부 사해주는 것)를 반포하고 신도들에게 재정지원을 청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당시 대사의 반포가 너무나 자주 있었고, 그외에 대사 선전자들 주변에는 흔히 탐욕이 뒤따랐다. 그들은 이 대사를 기회로 잡아 돈벌이에 이용하였고, 그 폐단이 사람들 사이에서 비난거리가 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15세기 중엽에 이르러 대사는 교회의 중요한 수입원으로 오용되어 설교가들은 모금의 성공을 위하여 대사의 효과를 과대하게 설명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죄의 용서와 죄벌 사이의 구분이 불투명해졌고 무지한 신자들은 대사와 구원을 혼동하여 대사 부여를 약속하는 고해성사표를 곧 천국 통행증으로 오해하였다. 신자들은 고해성사표에서 강조하는 대사를 얻기 위한 내적 정화를 등한시하여 돈이면 구원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대사 교리가 중세 말기의 지배적인 견해였고 여기에 근거한 대사 시행과 대사 판매의 행위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공식적으로 이러한 과장된 교리를 밝힌 적이 없었다.
  이에 교회 안에서는 잘못된 대사 시행에 대해 개혁의 소리가 높았고, 대사에 대한 본래의 의미를 재확인하여 공식적으로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볼 때 루터가 대사 교리에 대한 토의를 제기하기 위해 '95개항 명제'를 공표한 사실은 자연스러운 사건이라고 하겠으나 교회 안에서의 개혁이 아니란 사실이 지극히 아쉬운 관점이라 하겠다. 이와같이 루터의 사상과 대사 논쟁은 결국 루터의 파문과 함께 그리스도교 세계가 양분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프로테스탄트에서는 독일의 루터 종교개혁을 위시하여 스위스에서는 쯔빙글린의 종교개혁과 칼빈의 종교개혁, 그리고 재세례파의 급진적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영국에서는 국교회(성공회)가 탄생하였다.
 
8. 가톨릭 교회의 쇄신
  가톨릭도 15세기 초부터 교회 쇄신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던  중에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자극을 받아 교회 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다. 교회 쇄신을 바라는 사람들이 공의회의 개최를 요구함에 따라 1545년 트렌트에서 공의회(1545∼1563년)가 개최되었으니, 여기서 타락한 교회에 대해 반성하면서 신학과 교리를 재정리하고 교회 규율을 혁신하였다.
  이 공의회는 종교개혁으로 혼란스러워진 가톨릭 교의를 명백히 하였고 교회 개혁을 추진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 공의회 이후에 가톨릭 교회는 교황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성립되면서 교황청을 중심으로 지방교회와 수도원에서 교회 쇄신이 일어났다. 트렌트 공의회의 개혁정신은 선교활동에서도 나타났는데, 종교개혁 이전까지 유럽의 종교로 머물러 있던 가톨릭 교회는 리베리아 반도의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신대륙 탐험을 통해서 세계 선교에 나선다. 그리하여 이제 가톨릭 교회는 동서양에 걸쳐 엄연히 존재하는 세계적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기에 들어서 유럽의 가톨릭 교회는 세계의 여러 나라로부터 정치, 종교, 사상에서 정면으로 도전을 받게 된다. 특히 국교회 사상과 가톨릭 정통 신학을 반대하는 이단 운동인 얀세니즘(Jansenism), 그리고 계몽주의 사상도 가톨릭 신학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9. 근대교회
  18세기에 이르러 계몽주의는 외적으로 프랑스 대혁명을 일으켰다. 그 영향을 받은 가톨릭 교회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일부 지역에서 점점 그 권위를 상실하게 되었고 세속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과 세속화는 교회가 자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교황청과 지방교회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고, 이에 교회는 반가톨릭 국가에서 단결하게 되었고 국가지상주의와 국교회 사상에 강력하게 도전하는 운동, 즉 교황지상주의(敎皇至上主義)가 세력을 넓혀가게 되었다. 이에 제1차 바티칸공의회는 상처받은 교황 권위를 회복하였으며 가난해진 교회는 근로대중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는 반교회적 요소들에 대한 대처방안과 이에 따른 교회법의 개혁에 대한 필요성 때문에 1869년에서 1870년까지 열리게 되었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신앙과 계시의 속성에 대한 헌장과, 이성과 신앙 및 교황의 무류성과 수위권에 대한 헌장을 반포하였다. 레오 13세(1878∼1903년)는 1891년 '가톨릭 사회주의 대헌장' 또는 '새로운 사태'라 불리는 회칙을 반포하여 근로대중을 위한 사회의 개선을 요구하였다. 이 회칙은 널리 유포되기 시작한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운동을 어느 정도 저지하고 그리스도교 노동조합을 창설, 발전시키며 가톨릭 정신이 구현되는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그리스도교적 정당을 탄생시켰다.

10. 현대교회(제2차 바티칸공의회 1962.10∼1965.12)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가톨릭 교회는 새로운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우선 성직자 중심의 교회체제에서 벗어나 평신도의 지위와 사명이 부각되었으며 '평신도 신학'이 정립되어 성직자와 평신도가 교회에 대해 함께 책임을 지는 그리스도 공동체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20세기 가톨릭의 중요한 사건은 교황 요한23세(1958∼1963년 재위)가 소집하여 교황 바오로6세(1963∼1978년)가 마무리지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이다. 바티칸 성베드로대성전에서 개최된 이 공의회는 화해와 쇄신을 통해 교회가 인류의 복지와 평화와 구원을 촉진시킬 수 있는 교회로 되기 위한 공의회였다고 할 수 있겠다. 오늘날 가톨릭 교회는 급변하는 현대세계에 적응하는 정책을 수립하여 시행하는 동시에 다른 그리스도교와의 일치를 위해서 계속 노력하고 있다. 또한 비그리스도교 종교들과도 폭넓은 대화의 길을 모색, 진행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미래세계를 향한 일치와 희망으로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결론 : 그리스도 교회는 초기 사도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세계 안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고 온 인류에게 희망을 제시하며 생활해 왔다. 이러한 교회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박해와 이단사상, 그리고 분열의 고통과 아픔을 겪으면서도 좌절하거나 후퇴함이 없이 더욱더 성숙되어 하느님의 사명을 실현해 왔다. 이를 통해 교회는, 하느님이야말로 세상과 교회의 역사를 이끄시는 분임을 고백하며 더욱 새롭게 변화된 모습으로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이웃과 갈라진 형제들과의 일치를 위하여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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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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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교회사 [敎會史, church history]  개요

 

교회사는 교회이 역사라고 할 수 있는데, 넓은 의미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신 그 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총망라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고, 좁은 의미로 말한다면 기독교회의 역사와 교리적 발전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써 시작된 기독교회의 역사에 관한 것이다.

교리적 발전과정은 교리사라는 이름으로 따로 부르기도 한다. 


교회사는 교회의 기원과 어떻게 일어나고 성장했다가 또한 어떻게 쇠하게 되었는지를 연구하고 조명하는 학문이다. 또한 교회사는 기독교의 외적인 팽창과 축소, 선교와 박해의 역사, 교회행정과 기강의 유형적인 조직, 교리와 신학의 발달, 예배, 다양한 예배의식과 예식, 기도문, 성시(聖詩), 성가, 경건의 표시, 윤리, 자선단체의 활동 등에 관한 모든 자료들을 연구하고 정리하고 체계화 한다. 그러기에 교회사는 교회를 통한 하느님의 역사(役事)와 사탄의 세력과 그 영향력에 의하여 펼쳐진 투쟁의 기록이며, 이에 대한 교회의 발자취라 할 수 있다.


교회사는 일반 역사 구분을 참고하여 다음과 같이 시대적으로 크게 구분하여 연구한다. 


첫째, 고대 교회사.

이 시기는 그레고리우스 1세(주후 590년)까지의 처음 6세기 동안을 말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시기가 포함된다.

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사역과 십자가의 죽음과 승천, 그리고 사도들의 활동 시대

② 박해시대와 콘스탄티누스 1세와 니케아공의회(325)까지

③ 교회와 국가연합시대, 교리의 공식화와 전(全)교회 공의회가 있는 시대(590)


이 시대는 유대 땅에서 시작된 기독교가 로마에 전해지고 나아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전세계화 되는 시대이다. 이 때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사도 바울이다. 


둘째, 중세 교회사.

이 시기는 초대 교회 그레고리우스 1세로부터 시작하여 마르틴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이 일어난 때(주후 590-1517년)까지를 말한다. 이 시기를 세분화 하면 다음과 같다.

① 선교시대 : 그레고리우스 1세부터 그레고리우스 7세까지(590∼1050). 이 때 교회는 북유럽과 서유럽의 켈트족·슬라브족·튜튼족에가지 퍼져나갔다. 이때에 다른 한 편으로 이슬람종교가 일어났다. 그리고 기독교회는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로 나뉘게 된다. 

② 그레고리우스 7세부터 보니파티우스(보니파시오) 8세까지(1050∼1294). 이 때 일어난 일들이 이슬람 제국에 의해 정복된 예루살렘을 회복한다는 미명하에 일어난 십자군 원정, 탁발수도회(托鉢修道會)와 스콜라철학의 대두, 대학과 고딕 건축양식의 발생, 이단 종파의 발생과 이에 대한 종교재판이 성행 등이다.

③ 교황권의 쇠퇴와 종교개혁의 징조가 보인 보니파티우스 8세로부터 M.루터의 95개조 논제가 나오기까지(1294∼1517). 이 시기에 일어난 주요 사건들은 교황의 아비뇽유수(幽囚), 교황의 분립, P. 콘스탄스의 등장, 바젤에서의 개혁회의 개최, J. 위클리프, J. 후스, G. 사보나롤라, 베셀 등의 활약, 독일의 신비주의자인 에크하르트와 타울러의 등장, 르네상스의 싹틈, 인쇄술 발달, 신대륙 발견 등이다.


셋째, 현대 교회사.

이 시기는 중교개혁(주후 1517년)부터 시작하여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를 말한다.

이 시기는 그야말로 복잡하고 다양한 일들이 일어난다. 종교개혁의 바람은 다양한 교회와 교단들을 탄생시켰고, 독일의 합리주의와 영국의 이신론(理神論) 등이 출현하면서 성경에 대한 비판이 일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신학의 대두로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간에 갈등이 생긴 시대이기도 하다. 세분화 하면 다음과 같다.

① 종교개혁과 로마 가톨릭의 반동시대(1517∼1648),

② 비국교도와 주관적 신앙심과 투쟁한 스콜라철학의 논쟁적 고백주의 시대(1650∼1750), ③ 합리주의와 종교적 부흥과 교회연합 시대(1750∼현재) 


<부가적인 설명>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 자체가 역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지으시고 섭리해 오시는가에 대한 이야기들을 담겨 있으며, 신약시대로 들어오면서 다양한 신앙사상들과 철학사상들이 발전하면서 신앙의 핵심적인 내용을 그러한 사조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사도시대에 전승된 신앙의 내용들과 기록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필요성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때에 역대 주교의 목록이나 교회의 연대기가 작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교회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가 광범위한 사료의 수집검토 후, 325년까지의 『교회사』 10권을 로마황제사와 관련시켜서 상술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서 그리스어권이나 라틴어권에서 교회와 국가를 동시에 다루는 관점에서 연대사 작성과 같은 연구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참회록”를 쓴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저서 “신국”을 통해서 이 지상의 국가의 개념과 하나님의 나라(신국)의 개념을 대비하여 역사적으로 묘사하였다.


중세 이전에는 교회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보는 통합적 시각이 아직 형성되어 있지 않은 때여서 주로 개개의 민족, 수도원, 주교구 등의 연대사가 중심으로 연구되고 기록되었다.


11세기 이후에 이르러서 중교개혁이 이후에 개혁운동이 전교회적으로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교회를 전체적으로 보는 통합적인 교회사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에 따라 교회 전체의 연대사가 정리되기 시작하였다.


프라이징의 오토가 『양국사』 8권을 쓰고, 중세적 교회관에서의 벗어나고자 헸던 15~16 세기의 인문주의자들은 교회사에 대해서 비판적인 관점에서 연구하여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프로테스탄트의 플라치우스 일리리쿠스(Matthias Flacius Illyricus, 1520~75)는 고대 교회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 루터파라는 것을 입증하려는 의도에서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당장 반발을 불러왔는데, 종교개혁의 대상이 되었던 가톨릭 교회에 속한 바로니우스(Caesar Baronius, 1538~1607)는 더 많은 역사적 자료들을 근거로 연구해서 1198년까지 『교회연보』 12권을 발표함으로써 일리리쿠스의 견해를 반박하기도 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학술적 교회연보작성은 역사가들에게 많은 흥미를 불러 일으켰고, 17~18세기에는 예수회의 보란두스 학파나 베네딕도(베네딕트)회의 마우리니 학파 등에 의한 광범위한 연보가 작성되고, 수많은 교회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고대, 중세의 연대사(chronicler)가 연구하는 당사자들의 견해를 다소 첨삭한 것에 비해서, 16세기 이후의 연보작성자(annalist)들은 사실에 가능한 한 충실하려는 객관성을 중시했다. 마빌론(Jean Mabillon, 1632~1707) 등의 마우리니 학파에 의해 고문자학, 고문서학, 연대학도 창시되어 방대한 교회보관문서에 대한 조직적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이들 연구를 토대로 19세기 전반의 독일에는 튀빙겐 대학의 뮐러(Johann Adam Möhler, 1796~1838)를 중심으로 일종의 역사신학이나 교회론이 성행하였다.


그러나 교황청이 신스콜라학파를 지지하면서 위와 같은 연구사조들을 위험시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교회사에 대한 연구는 프로테스탄트 측에 이어져서 연구자의 주관적 관점에서의 교회사 해석이 20세기 전반까지 유행하였다.


20세기 중엽 이후에는 신학계의 새로운 동향과 병행해서 교회사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현대에는 교회사 역시 일반 역사학과 완전히 동일한 연구방법을 따라 연구되고 있다. 즉 교회는 무엇인가를 경험적(a posteriori), 실증적으로 연구하고자 하는 학문적 노력을 말하며, 이것은 이전의 교리신학과는 대조적으로 또다른 차원에서 교회가 무엇인가를 연구하고 발전시키는 일종의 역사신학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요즘은 단순히 교회사라고 부르기보다 역사신학이라고 불러서 이론신학의 한 분야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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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교회사 약사

  
1. 초기 교회(사도시대와 그 후 시대의 교회)

 

가톨릭 교회의 역사는 30년경 유대교의 축제일인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사도들이 베드로를 중심으로 군중 앞에 나아가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면서 구약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러한 복음 선포를 경청하여 받아들인 이들이 사도들을 주심으로 사랑과 일치의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초창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할손례, 정화례, 안식일등의 유대인의 종교적 의무를 성실하게 준수하는 유대교 종파중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특수한 공동체를 이루고 고유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베드로를 대표로하는 사도단과 그 밑에 야고보를 중심으로하는 장로단과 스테파노를 지도자로 하는 부제단이 구성되었다. 사도들의 열성적 선교활동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루살렘 밖으로 전파되었다. 이때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두그룹이 공존하였는데, 하나는 아직도 엄격한 유대사상을 보존하면서 실천하던 유대지방의 에루살렘교회, 갈릴래아교회, 사마리아교회, 요르단 서안지방의 교회등유대계 그리스도교 공동체이며, 다른 하나는 시리아의 다마스커스 교회와 안티오키아의 교회, 로마교회 등 이방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로서 이는 개종한 그리스인, 헬레니스트, 기타 비유대인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과격한 유대 민족주의의 등장과 그로 인한 반감, 바울로 사도의 선교활동으로 이방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급속히 성장하였고, 70년 예루살렘의 멸망 후에 유대교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쇠퇴하였다.

 

2세기에 이르러 12사도들이 모두 사망함으로써 계시의 사도시대가 끝나고 사도들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을 후 시대에 전하는 사도 후 시대 (100-300)가 시작되었는데 이는 다시 사도 교부시대(100-150), 초대 교부시대(200-300)로 구분되고 있다. 이 시대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관습은 아직도 유대교적 또는 유대교 그리스도교적 색체를 띄고 있었다.

둘째, 교계제도가 최종적으로 확립되어 주교, 장로, 부제등의 세 성직계급이 등장하였다.

세째, 그리스도교 신학이 그리스도교 영지주의 이단과 투쟁하면서 성립하기 시작하였다.

네째로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로마 제국의 영토확장에 따라서 널리 전파되어 교세가 급속적으로 성장하였다.

다섯째로 이러한 교세확장으로 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의 황제들에게 정치적불안감을 안겨주어 200년간의 박해를 받았다.

  

1) 교회에 대한 박해

 

가. 박해의 원인

 

첫째 원인 : 유일신교와 다신교의 충돌이었다. 로마제국은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국가의 이교적 경신예식에 참석하고 황제 숭배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였다. 즉, 그리스도교인들은 이교 로마인들에게는 무신론자와 국가의 적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둘째 원인 : 로마 시민이 그리스도교와 그 신도들에게 갖고있던 오해와 증오심이다. 자연의 재해, 패전등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국가의 신들에게 제사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군중들은 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미움을 폭발시켰다. 또한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등 인간의 육신을 먹고 그들이 서로 형제 자매로서 근친상간의 죄를 범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세째 원인 : 황제들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적대감과 국가위기의식이다. 로마제국의 통치자들은 범세계적이고 초국가적인 확장의 그리스도교는국가를 전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2) 교회의 승리와 신앙의 자유

 

311년에 갈레리오 황제(305-313)는 그의 박해가 효과 없음을 인정해야 했고, 죽음을 앞둔 병석에서 관용의 칙서를 발표하였다. 이로써 교회는 313년 신앙의 자유를 얻고 콘스탄틴대제의 옹호아래 국교로서 급성장하게 된다. 이후로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의 황제들의 호의적 도움을 받으며 세계적 종교로 성장하였다. 국교시대를 맞이하여 그리스도교는 여러 분야에서 발전하였다. 첫째로 수도원이 창설되어 발전하면서 수도생활은 일반신자들의 영성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둘째로 공의회가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조직으로 등장하여 교회의 모든 현안문제를 해결하거나 결정하였다. 세째로 신앙생활의 활성화와 함께 전례가 발전하게 되었다. 그밖에 국교시대에 그리스도교는 정통과 이단 사이의 격렬한 교리 논쟁으로 분열되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교리논쟁은 일련의 공의회를 통해서 해결되었고 그 결과 정통 가톨릭 교리가 정립되는 역사를 가져왔다.

 

5세기 중반기에 국경지대의 게르만 민족이 이동하면서 로마제국을 멸망시키자 그리스도교 자체도 붕괴될 위험에 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속에서 교회는 본래의 사명인 선교의 사명을 잃지 않고 유럽세계의 새 주인으로 등장하는 게르만 민족을 개종시켰다. 특히 서부 게르만 계통의 프랑크족의 개종은 유럽사에 있어서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 문화권과 게르만 민족이 융합하여 새로운 중세문화를 탄생시켰고,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고유한 민족적 특성을 지니면서 같은 신앙 위에서 일치된 중세기 그리스도 교회의 기원이 되는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2. 중세 시대 전·후기의 교회

 

게르만 민족의 이동과 프랑크왕국과 교황청의 융합이라는 과도기(450-750)를 거쳐서 시작되는 중세기(750-1300)는 시대적으로 양분될 수 있다. 중세 전기(750-1054)에는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서구 그리스도교 제국이 창설되었고 종교적 입장에서는 그리스도교 교세의 확장과 교황령 탄생 등의 외적 발전이 이룩되었다.

 

그러나 교회가 국가로부터 물질적 혜택을 받은 반면에 황제의 내정 간섭을 받아 교회의 세속화와 교권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교회와 국가가 밀착된 관계로 프랑크 제국의 정치적 붕괴는 교회의 권위와 교황의 권한이 쇠퇴하는 교회의 암흑기(880-1046)를 탄생시켰다. 암흑기 동안에 그리스도교는 처음에(880-962) 로마 귀족의 지배를 받았고, 후에는 (962-1046) 독일 신성 로마 제국황제의 교회 내정간섭으로 자율권을 상실하였다. 아울러 교리 논쟁이후로 서방 라틴교회와 동방 비잔틴 교회가 각기 다른 노선으로 발전하였다. 8세기에 동방 교회는 성화상 파괴 논쟁을 통해서 서방교회와 신학적 충돌을 하였고 1054년에 두 교회는 완전히 결별하였다.

 

 

1) 성화상 파괴 논쟁

 

약 725년부터 842년 사이에 비잔틴 교회가 격론하게된 성화상 논쟁을 말한다.

 

이 논쟁의 주요 쟁점은 종교적 문제, 즉 그리스도교 교리와 전례에 대한 것이었다. 성화상 파괴는 모든 종교 예술품에 대한 적의에서 비롯되는데, 이러한 자세는 구약성서에 야훼가 이스라엘 백성을 우상숭배에서 구하고 신의 영적 본성을 살리기 위하여 어떠한 형태의 모상도 공경하는 것을 금지한 사실에 기인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신이 가시적 인간의 모습을 갖춘 이후로 신약에서 모상금지는 더 이상 구약에서와 같은 의미를 갖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교회는 오랫동안 모상에 대해 경고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모상보다는 상징을 택하였다. 그러다가 5세기에 성화상의 공경이 시작되어 7세기 비잔틴 교회에 있어서는 대중신심으로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후 시대에 이르러 소아시아에서 성화상 공경에 대한 반대가 일어났다. 그것은 일반대중이 모상과 그것이 뜻하는 대상을 구별하지 않음으로서 이러한 신심행위가 우상숭배에 떨어질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육화한 그리스도의 모상은 그 신성과 인성을 내포해야 하는데, 신성은 나타낼 수 없었고 또 인간 모습만의 표현은 네스토리우스 사상과 같은 이단에 빠질 위험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동 로마 제국에 있던 단성론의 이단자들도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참된 인성을 부인하였기 대문에 성화상 공경을 배격하였다. 아울러 동방교회의 주교들을, 이슬람교도인 아랍인들이 시리아와 에집트에 침입하면서 성화상에 대해 적개심을 갖고 있어서 이들의 개종에 이 신심행위가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여 반대하였다. 그러나 제 2 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692)는 성화상 공경에 찬의를 공표하였다. 또한 8세기 초에 신학자인 다마소의 요한은, 성화상은 "침묵의 설교, 하느님 설교"에 대한 기록일 뿐 아니라 성화한 물질의 표상은 그리스도의 육화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었다고 신학적 설명을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육화가 신학과 성화상의 의미를 연결시켰고 신에게만 바치는 흠숭과 피조물에게 드리는 공경을 구분하였다.

  

2) 동, 서방 교회의 결별

 

비잔틴 교회와 성방의 라틴교회의 견해는 오랫동안 각기 다른 노선으로 발전하였다. 정치, 신학, 전례, 규율에 있어 상호간에 많은 차이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더우기 샤를르 대제와 오토 대제의 서방 제국 건설과 이탈리아 진출, 서방 교회의 개혁 정신등은 두 교회 사이의 대립, 또는 적대감정을 격화시켰다. 결국 두 교회의 충돌은 북구의 노르만 민족이 비잔틴 제국의 영토였던 남부 이탈리아를 점령하였을 때에, 교황 레오 9세(1049-1054)가 그의 정치세력을 이 점령지역까지 연장하였을 때에 일어났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9세(1042-1055)가 점령자들을 축출하기 위해 교황과 동맹을 맺고자 하였다. 이때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미카엘 체프랄리우스(1042-1058)가 그의 관할지역인 남부 이탈리아에서 교황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교회내의 충돌을 일으킴으로서 비잔틴 제국과 교황청의 상호이해를 저지시켰다.

 

가) 교회분규의 내용

로마 교황청은 남부 이탈리아의 비잔틴 교회를 라틴전례로 통일하고자 시도하고 교황의 수위권을 주장하였던데 반해, 비잔틴 교회는 관할지역에 있는 라틴전례 성당에서 비잔틴 전례를 사용하고, 미사성제에서 누룩없는 빵의 이용금지 및 사용을 단죄하였으며 전통적인 자치권을 고수하려고 함으로써 분규과 확대되었다.

 

나) 교황특사의 파견과 상호 파문

레오 9세는 두 교회의 협력관계를 도모하기 위하여 추기경 훔베르트를 대표로 하는 사절단을 콘스탄티노플에 파견하였으나 교황사절단은 고자세의 입장에서 총대주교를 대하였고, 교황의 절대적 권한에 의거하여 체프랄리우스에게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할 것을 강조하였으며 서방교회의 관습이 유효하고 유일한 것임을 주장하였다. 총대주교가 이와같은 요구를 거절하자 훔베르트는 체프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에 대한 파문서를 작성하여 1054년 7월 5일 성 소피아 성당 제대위에 놓고 로마로 돌아갔다. 그러나 황제 콘스탄티누스 9세는 이 파문서를 소각하였고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된 교회회의는 훔베르트와 그의 일행을 파문하였다. 이로써 두 교회는 결별하여 그리스도교 세계는 양분되었다. 오늘날에 와서 이 문제는 홈베르트의 월권행사로 간주된다.

  

3) 중세 후기 교회

 

중세 후기(1054-1300)에는 클뤼니 수도단체의 개혁과 교황 그레고리오 7세(재위:1073-1085)의 교회쇄신으로 교회는 세속권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권을 회복할뿐 아니라 세속권을 지배하는 시대에 들어서게 되었다. 두 가지 개혁운동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각성시켰고 평신도의 영성강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는 11세개에서 시작된 십자군 운동과 청빈운동에서 나타났다. 십자군 운동은 기사 수도회의 탄생과 서구의 비잔틴 문화와 이슬람 문화의 접촉을 가능케 함으로써 학문, 특히 스콜라 철학과 신학과 예술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청빈 운동은 교회의 생활 혁신을 불러 일으켰으나 지나친 주장은 이단으로 변질되었으며 이러한 이단운동을 저지하기 위해서 부정적 방법으로 종교재판이 생겨났고 긍정적 입장에서 탁발수도회가 창설되었다. 탁발수도회는 이단자의 개종과 선교활동 이외에 13세기에 설립되기 시작한 대학에서 학술활동을 통해서 문화 발달에 공헌하였다.

 

3. 종교개혁의 원인과 배경

 

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중세교회(476-1517)를 마감하고, 새로운 교회쇄신의 계기를 마련하여 준 사건은 종교개혁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 교회가 속된 모습을 보였을 때마다 그 내부에서는 개혁의 외침과 쇄신의 움직임이 있어 왔었다. 그런데 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교회쇄신 운동으로서의 종교개혁은 1500여년 동안 전승, 보존되어온 그리스도교 신앙을 근본적으로 파괴하였고 1504년의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결별이후 다시 한번 그리스도교 세계를 오늘날까지 회복할 수 없을 만큼 갈라 놓은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러면 이러한 불상사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는가? 사실 종교개혁의 원인에 대한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쟁점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일단 간접적 원인으로서 14-15세기의 정치, 사회, 문화, 종교 등의 역사적 환경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으며, 직접적 원인으로서는 탁발 수도회인 성 아우구스티노 은수사회의 신부이며 수사였던 마틴 루터(1483-1546)에서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원인만으로 일어난 것도 아니며, 거기에는 종교개혁의 타락 외에 인문주의의 대두라는 사상적, 정치적, 사회적인 여러가지 원인들이 겹쳐서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1) 인문주의의 대두

 

인문주의는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삼고 모든 속박과 권위에서 해방시키려는 사조이다. 따라서 종교, 도덕의 모든 계명에서 벗어나 오직 자기의 의지와 감정의 명령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하고자 하였다. 진리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나아가 교회의 교리상의 원칙을 완전히 부정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사조는 새로 발명된 인쇄술의 도움을 받아 광범위하게 민중 속에 퍼져 갔다.

  

2) 정치적 원인

 

신성 로마 제국의 무력화와 모든 구속으로부터 국가의 절대권위를 가능하게 하는 로마법의 채택은 신앙분열의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그 결과 제후들의 세력은 커졌고, 교회에 관한 일에서부터 자기 백성의 신앙생활에 까지 지배하기에 이른다. 한편 그들은 부국강병책의 일환으로 성당, 수도원의 재산을 노리게 되고, 이러한 중에 교회에 대한 반항운동을 성공시키게 되는 바탕을 마련하게 된다.

 

 3) 사회 경제적인 원인

 

중세 말기의 서구사회는 경제적으로 볼 때 도시와 지방 사이에 빈부격차가 극심하였다. 당시 몰락과정에 있었던 기사계급과 농민계급의 빈곤화도 하나의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불안과 불평, 불만족에 있었던 그들은 반교회운동에 휩쓸리게 된다. 여기서 그들 속에 뿌려진 후기 인문주의자들의 소책자는 민심을 점차로 교회로부터 이탈하도록 만들었다.

  

 

4. 종교 개혁 시대의 교회

 

1517년 10월 31일에 독일의 성 아우구스티노 은수사회의 수사 신부이며, 성서학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는 대사남용에 대해 항의하면서 대사교리의 재정립을 제의하기 위해 그의 교구장과 동료 교수, 신부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서 유명한 '95'개 조항의 신학 명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은 전통신앙의 기저를 뒤흔들어 놓았으며 그리스도교계를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분열시키는 종교 개혁시대(1500-1650)을 열었다. 프로테스탄트에서는 독일의 루터 종교개혁을 위시하여 스위스에서는 즈빙글리의 종교개혁과 칼빈의 종교개혁, 그리고 재세례파의 급진적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영국에서는 국교회가 탄생하였다. 여기서 마르틴 루터와 '대사논쟁'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1) 마르틴 루터

 

루터는 1483년 10월 10일 독일 신성 로마 제국의 아이슬레벤에서 빈농 출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처음에서 부친의 소망에 따라 법학부에 등록하였으나, 2개월 후에 스토테른하임이란 마을 근처에서 뇌우 속에 번쩍이는 번개불에 놀라 죽음이 임박하였다는 위기 위식에서 수도자가 되기로 다짐하고 에르프르트의 성 아우구스틴 은수사회에 들어갔다. 그는 1506년 수도서원을 하였고 1년 후에 사제 서품을 받고 신학연구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그의 초기 생애 속에서 그 나름대로 경건한 신앙인, 모범적 수도자, 열성적 사목자로서 생활하였던 루터는 '성베드로 대성전 전대사'의 시행과정에서 드러난 남용에 충격을 받았다. 여기서 그는 1517년에 교회 관습대로 그의 교구장과 독일의 대사시행을 책임진 고위 성직자에게 항의하는 편지와 대사 남용을 논박하는 신학명제인 '95개항' 명제를 작성하여 보내어 대사논쟁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개신교의 기운을 루터의 종교개혁에 두고 있다면, 그 시발점은 바로 이 대사논쟁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문제의 촛점이 되었던 대사논쟁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2) 대사 논쟁

 

루터에게 항의의 구실이 된 것은 대사문제이다. 당시 교황 율리오 2세(1503-1513)는 1506년 로마 대성전 개축에 착수했다. 규모가 컸던 만큼 막대한 비용이 들어 율리오 2세와 레오 10세(1513-1521)는 전대사를 반포하고 신도들의 재정적 도움을 청햇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당시 대사의 반포가 너무 자주 있었고, 그 위에 대사 선전자들 주변에는 흔히 탐욕이 뒤따랐다. 그들은 이 대사를 기회로 잡아 돈벌이로 이용하였고, 그 폐단이 사람들 사이에서 비난거리가 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15세기 중엽에 이르러 대사는 교회의 중요한 수입원으로 오용되어 설교가들은 모금의 성공을 위하여 대사의 효과를 과대하게 설명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죄의 잘못과 죄의 벌 사이의 구분이 불투명해졌고 무지한 신자들은 대사를 구원과 혼동하여 대사 부여를 약속하는 고해성사표를 곧 천국 통행증으로 오해하였다. 신자들은 고해성사표에서 강조하는 대사를 얻기 위하여 필요한 내적 정화를 등한시 하여 돈이면 구원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교리가 중세말기의 지배적인 견해였고 여기에 근거한 대사 시행과 대사 판매의 행위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공식적으로 이러한 과장된 교리를 밝힌 적이 없다. 이제 교회 안에서는 잘못된 대사 시행에 대한 개혁의 소리가 높았고, 대사에 대한 본래의 의미를 재확인하여 공식적으로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볼 때 루터가 대사교리에 대한 토의를 제기하기 위해 '95개항' 명제를 공표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사건이라고 하겠다. 이같은 대사논쟁으로 인하여, 결국 루터는 가톨릭교회로부터 파문 당하게 되었으며, 교회는 구교(가톨릭)와 신교(프로테스탄트)로 나뉘게 되는 역사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5. 교회의 쇄신운동

 

한편 가톨릭도 15세기 초부터 교회 쇄신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그 실현을 위한 움직임을 보이던 중에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자극을 받아 교회 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다. 콘스탄스 공의회(1414-1417)와 바젤 공의회(1431-1491)에서 교회 쇄신에 대한 문제가 논의되었고, 르네상스 교황들도 산발적으로 교회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모두 좌절되거나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교황들과 교황청에 이를 시행할 만한 내적 및 종교적 역량이 결여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더우기 교회 쇄신을 위한 공의회 개최를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졌으나 교황 클레멘스 7세(1523-1534)는 공의회 소집을 주저하였다. 그 이유는 교황이 공의회주의, 즉 공의회 우위사상의 재등장을 우려하였고 교황령에 대해 더욱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여러가지 이유로 몇 차례의 연기를 거쳐 1545년 12월에 가톨릭의 교회 쇄신 공의회는 트리엔트에서 개최되었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는 퇴락된 교회에 대해 반성하면서 신앙과 교리를 재정리하고 교회 규율을 혁신하였다. 공의회 이후에 가톨릭 교회는 교황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성립되면서 교황청을 중심으로 지방 교회와 수도원에서 교회 쇄신에 착수하였다. 트리엔트 개혁정신은 선교 활동에서도 나타났다. 종교개혁이전까지 '유럽의 종교'로 머물러 있었던 가톨릭 교회는 교회쇄신의 일환으로 이베리아 반도의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신대륙 탐험을 통해서 세계 선교에 나섰다.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 등의 수도회와 예수회는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에서 선교활동에 종사하였다. 이제 가톨릭 교회는 동서양에 걸쳐 엄연히 존재하는 세계적 종교가 되었다.

  

6. 근대 공의회 이전 교회(19세기)

 

19세기를 사로잡았던 사상인 계몽주의는 외적으로 프랑스 대혁명을 일으켜 가톨릭 교회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일부 유럽지역에서 그 권위를 상실하였고 세속화 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세속화는 교회가 자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교황청과 지방 교회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교황청의 승리를 안겨 주었다. 교회는 반가톨릭적 교회에서 단결하였고 국가 지상주의와 국교회 사상에 강력하게 도전하는 운동(교황지상주의)을 일으켰다. 그러나 19세기 후반기에 일어난 가톨릭 자유주의는 교회를 내적 혼란 속에 휩싸이게 하였으나 신앙 오류표(Syllabus)의 반포로 인해 외적으로 평온에 들어 갔다. 또한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권에 대한 신조 결정으로 분열되어 독일에서는 '구가톨릭 교회'가 떨어져 나갔으며 이른바 '문화투쟁'으로 교회는 일시적으로 난관에 봉착하였으나 가톨릭인의 단합으로 결국은 승리하였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상처받은 교황의 권위를 회복하였으며 가난해진 교회는 근로 대중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교황 레오 13세(1878-1903)는 1891년에 '가톨릭 사회주의 대헌장' 또는 '노동 헌장'이라 불리는 칙서(새로운 사태)를 발표하여 근로 대중을 위한 사회의 개선을 요구하였다. 이 칙서는 널리 유포되기 시작한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운동을 어느 정도 저지하고 그리스도교 노동조합을 창설, 발전 시키며 가톨릭 정신이 구현되는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그리스도교적 정당을 탄생시켰다.

 

 7. 현대 공의회 이후 교회(20세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가톨릭 교회는 새로운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우선 성직자 중심의 교회 체제에서 벗어나 평신도의 지위와 사명이 부각되었으며 '평신도 신학'이 정립되어 성직자와 평신도가 교회에 대해 함께 책임을 지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20세기 가톨릭 교회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교황 요한 23세(1958-1963)가 소집하여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가 마무리 지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이다(1962-1965). 1959년에 교황 요한 23세는 교회를 내적으로 쇄신하고 외적으로는 문호를 개방하여 그리스도교 세계의 일치를 촉진하기 위해 공의회를 소집하고 교회법을 개정할 것을 선포하였다. 이 계획은 3년 동안의 공의회에서 진지하게 논의 되었으며, 1983년에 새로운 교회법이 선포되어 1984년에 발효하게 되었다. 오늘날 가톨릭 교회는 급변하는 현대 세계에 적응하는 정책을 수립하여 시행하는 동시에 다른 그리스도교와의 일치를 위해서 계속 노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그리스도교 종교들과도 폭넓은 대화의 길을 모색, 진행하고 있다.

  

8. 참고문헌

 

1. 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가톨릭대사전, 서울, 1985.

2. 요트 마르크스, 가톨릭 교회사 上下, 김창주 편역,

3. 김성태, 세계교회사 I,
 

(출처 : '세계 교회사 약사' - 네이버 지식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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