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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기본교리 (Christian basic doctrine) 구원의 10단계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구원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이제 '구원을 받는다'라는 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라는 말씀과 같이,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과 예수를  자세히 모르고서는  확실하게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다음과 같은  10단계로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1. 작정.  2. 예정.   3. 부르심.  4. 회개.    5. 영접.  6. 중생.  7. 칭의.  8. 성화.   9. 영화.  10. 구원.

 

1. 작정.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奇異)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 우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定)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冊)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


(시139:14-18)라고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섭리는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기 전에 미리 계획하고 준비하시고, 바다의 모래보다도 많은  수의 이미 정해진 세상의 일들을 하나님의  작정 섭리와 뜻대로 움직이며 주관하시다가,  결국 최종  심판을 하시는 것을  보여 줍니다.  심지어 우리의 인생의 사소한  일들이라도 우리의 형질이 이루기 전에 미리 계획되고 작정된 대로 주의
생명 책에 기록되어져 있고, 하나님께서   그대로 성취하심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2. 예정.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신령한 복으로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 하
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4-7)라는 말씀과 같이,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이미 창세 전에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입어 구원을 받기로
예정된 사람들인 것입니다.

 
3. 부르심. :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 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1:9)라는 기록대로, 하나님께서  오직 은혜로 영원한  때  전부터 예정된 성도들을 자녀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을 부르는 주인의 음성을 분명히 깨닫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고백하며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요10:3)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 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
르느니라.  요10:26-27)  혹자는 아무나  예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성경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
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이여  함과  같으니라'(롬10:13-15)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음  전파하는 자를  보내어 말씀을  듣게하면, 믿음이 생겨서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므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섭리인 것입니다.


4. 회개. :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라'(고후7:10)라는 말씀과  같이, 성도가 자신이 죄인임을 스스로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 뜻대로 근심하게 하심으로 회개케 하시는 것입니다.


5. 영접.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라는  말씀에서 보면,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도 믿는 집안이라서 혹은  자신의 의지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로서  났다는  것은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히2:11)라는 말씀과 같이, '하나'라는 것은 이 시공  세계가
아닌 영원한 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성도들은 비록 육체로는 이 세상 가운데 살고 있어도, 그 속의 내재하는  영은 영원한 세계의 존재로서  다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6. 중생.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라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중생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그  영이  '죽은 영'으로 태어납니다.  이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처음 창조함을 입었을 때에는  '산 영'이었지만,  선악과 열매를  따먹고  그 영이 죽어 버렸던 것입니다.(첫째  사망)    그러므로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여야만이 그  죽은 영이  다시 중생 되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7. 칭의.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6)라는 기록대로, 죄인된 성도들을 의롭다 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이라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며, 아무나 누릴 수가 있는것도 아닌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8-9)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살후3:2)   


8. 성화. : 대체로 1에서 7단계까지는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은 인정하여도,  이 성화  과정만큼은 성도 스스로가 애쓰고 노력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과정  역시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히6:17-18)라는 말씀과 같이, 성도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그 예정하신  약속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보증으로 맹세까지 하심으로 확실함을 증거   하시고, 그 증거로써 보혜사 진리의 성령을 성도들의 마음속에 보내어 진리를 생각나고 깨닫게  하여 구원을 이루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14:26)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가 있음으로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와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전1:8)'라는 말씀과 같이, 주께서 성화시켜주시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성화시켜주시는 방법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영혼의 생명의 양식으로 주셔서 그 영혼이 무럭무럭 자라 가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엡4:13)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벧전3:18)

 
9. 영화. :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15:49)라는 기록대로, 성도들이 이 세상 삶을  마치고 그  육체가 흙으로 돌아간 후, 마지막 심판의 나팔 소리에 성도들은 생명의 부활로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부활하게 되어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이  중생 되지 못하고  죽은 영으로  있는 사람들도 그 육체가 죽은  후에  결국 부활하게  되지만,  그들은 최후의 심판을 거쳐 둘째  사망 곧  영원한 지옥불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10. 구원. :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9)라는 말씀과  같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결국 그 영혼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예약이 되어
있어야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믿음이라는 것을 한 순간의 개념으로 이해하여 믿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여서는  안 됩니다.  즉 '믿음'이라는 것은  성도들이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의 일평생에 걸친 인생 여정동안,   하나님의 예정섭리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중생하여 그 영혼이 성경의 진리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먹고  마심으로  점차  성숙하여지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눙하신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하나님의 자녀로  택한 성도는 복음을 듣게 하여  믿도록 하여  주시고, 불택한 사람들은 그 영혼의 귀를 막으셔서 복음을 듣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이사야6:9-10)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오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하시느니라.  롬9: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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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의와 교리의 차이점

 

 


1. 교의와 교리에 해당하는 영어는 dogma와 doctrine이다.

 

2. 교리와 교의는  어떤 신앙 조항에 대한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요약 진술하였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로마 카톨릭의 경우 성경에서 명백히 가르치지 않더라도 교회 전통이 가르치는 것도 교의나 교리가 될 수 있다 (예: 마리아 무흠 수태설은 카톨릭교회에서 교의로 선포되었다); 슐라이에르마허를 따르는 경험주의는 인간의 종교적 경험도 교의가 될 수 있다고 본다).

 

3. 교리와 교의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교회의 권위로 선포되었는가의 여부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교리들은 매우 많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만 교회가 교의로 선포하였다. 따라서 모든 교의는 교리라고 할 수 있지만, 모든 교리가 교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3.1. 예를 들어, 종말론에 관한 한 여러가지 성경적 가르침이 있다: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 하지만, 이 교리들이 교의로 선포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심지어, 축자 영감설도, 우리의 신앙을 위해서 대단히 중요한 성경적 교리이지만, 교의로 선포된 적은 없다. 만약, 오늘날 개혁주의 교회들이 모여서, 이 영감설을 교의로 선포한다면, 교의로서 권위를 가지게 될 것이다.

 

4. 로마교에서 교의는 계시된 진리로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지며, 불변하는 진리로 간주되지만, 개혁교회는 교의를 매우 존중하지만,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지지 않는다.

 

5.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교의가 아니라 교의들이다. 하지만 교의학은 교의들을 개별적으로 다루지 않고, 전체의 구도 속에서 유기적으로 다룬다: 한국말에서는 전혀 구별이 되지 않지만, 전체로서의 교의(dogma)는 개별적인 교의(a dogma)와 구별된다. 더구나, 한국말의 용법상 교의와 교의들은 세밀하게 구별되어 사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교의라는 단어는 문맥 속에서 이해 될 수밖에 없다.

 

6. 교의가 교리가 구분 되기는 하지만, 교의학은 교의만을 다루지 않고(이 경우, 교의학은 신조학이 되어 버린다), 다른 성경적 교리를 참조하면서 교의(이 경우에는 교의들을 의미한다)를 다룬다.

 

7. 로마교의 경우, 교의와 교리에 더하여 훈령(discipline)이 구분되는데, 교회의 교직(magisterium)에 의하여 가르쳐진 신앙 행위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어서 성직자 독신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규범 역시 교회에서 대단한 권위를 가지지만, 교의와 같은 권위를 가지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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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파 신앙과 알미니아니즘|종교개혁자들

  

알미니아니즘(Arminianism)은 홀란드(Holland)에서 개혁파 교회의 목회자였던 제임스 알미니우스(James Arminius, 1560-1609)의 이름에서 유래된다. 그는 1603년 라이덴(Leyden) 대학교의 신학교수가 되었다. 라이덴에서 교수직에 있는 동안 개혁파 신앙을 떠나게 되었다. 비록 1609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교리는 지속적으로 가르치고 발전되어 추종자들이 있게 되었다.

본래 알미니안 논쟁은 1604년-1619년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레이든 대학교의 두 명의 교수, 즉 알미니우스와 고마루스 간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하여 네덜란드 전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어서 교회의 하나됨이 국가의 존폐의 위기까지 가기에 이르렀다.

   문제의 발단은 철저한 칼빈주의 사상을 지키는 가운데 약간씩 수정하여 받아들이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할렘(Haarlem)의 법률가였던 코른헤르트(Dirk Volkerts Coornhert, 1522-90)이 예정론을 수정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그를 반박하도록 알미니우스가 보내졌는데 그를 비판하기보다 그를 동의하였다. 더욱이 1603년 레이든의 교수로 된 알미니우스는 코른헤르트를 동조하는 자신의 신학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우선적인 하나님의 예정은 미리 예정하는 것이 아니고, 창조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피조물들이 타락하도록 허용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은혜의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고; 네 번째 예정은 구원받을 사람을 예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신적 예지를 가지고, 회개할 사람과 은혜를 받을 사람을 아시기 때문에 예정하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철저한 칼빈주의자였던 프란시스 고마루스(Francis Gomarus, 1563-1641)는 그를 공격하게 이르렀다. 하지만 논쟁이 무르익게 되어 전 네덜란드로 퍼져나갔다. 결국 논쟁을 즐기지 않는 알미니우스는 헤이그(Hague)에서 열린 남부 주들 앞에 자신을 변호하라는 부름을 받았으나 연약한 건강에 강하게 받은 심신의 긴장으로 알미니우스는 병을 얻게 되어 1609년에 죽었다. 그러자 그를 따르는 자들, 즉 ‘항의자들’(Remonstrants)이 힘을 규합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게 이르렀다. 그는 도르트회의(Synod of Dort, 1618-19)에서 억압을 받은 사람들과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1610년 “항의서”(Remonstrance) 또는 “알미니안 5개 항목”(The Five Arminian Articles)라 알려진 문서가 46명의 목회자들이 서명하여 연합 주의 시민 권위자들에게 제출되었다:


I.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작정으로,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자신의 아들을 의지하고 이런 믿음 안에서 이런 은혜를 통해 끝까지 신실한 순종을 일삼을 사람들을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결심하셨다; 그리고 다른 면으로, 요한복음 3:16에 있는 복음에 따르면, 믿지 않는 자들을 죄 가운데 내버려두시기로 또 그리스도로부터 그들을 소원시키셨다.

II.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그래서 그는 모든 사람에게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죄들의 화해와 용서를 얻게 하신다; 그러나 요한복음 3:16에 따르면, 신자들 외에 누구든 이와 같은 죄의 용서를 실제로 누릴 수 없다.

III. 사람은 저절로 구원받는 은혜나 자유의지의 힘을 소유하지 못한다. 사람은 저절로 그리고 스스로 참된 선을 생각할 수도, 원하지도, 그리고 행할 수도 없다(구원받는 믿음은 분명히 이와 같다); 하지만,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성령을 통해 하나님께로 다시 태어나야만 하며, 요한복음 5:5에 따르면, 참된 선을 올바로 이해하고, 생각하고, 원하고, 그리고 행하기 위해서 이해, 성향, 의지, 그리고 모든 능력에서 새롭게 태어나야만 한다.

IV.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는 시작, 계속, 그리고 모든 선의 완성인데 이 은혜는 심지어 중생한 사람이 스스로 예기, 후원, 깨달음, 순종, 그리고 협력하시는 은혜 없이는 결코 생각할 수도, 원할 수도, 선을 행할 수도, 악의 유혹을 이길 수도 없는 데까지 이른다; . . . 하지만 이런 일에 대해 이 은혜는 저항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은 성령을 저항한다. 사도행전 7장과 다른 곳을 보라.

V.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결합한 사람은 그것으로 생명을 주시는 성령과 함께 하는 사람이 되고, 그것으로 사탄, 세상, 그리고 자신의 육체와 싸울 수 있고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성령의 도우시는 은혜로 이것이 이루어짐을 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유혹에서 자신의 성령을 통해 그들을 도우시고, 자신의 손을 펴시며, 그들이 싸울 준비가 되었고 그의 도움이 필요하고, 활동적일 때에만, 그들을 떨어지지 않도록 하신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말씀 즉, 요한복음 10:28에 따르면, 사탄의 계략이나 능력이 아니더라도 그들은 실족할 수도 있고, 그리스도의 손에서 끌려 내릴 수도 있다.1)

   이 항목들은 “항의자들”(Remonstrants) 또는 알미니안들의 교리를 말하는데 특히 예정론, 속죄의 범위, 구원받는 은혜의 근거, 그리고 견인(perseverance)에 관한 것이었다. 논쟁 초기에는 무관심 속에 있었지만 항의자들이 성장하면서 그들의 5개 항목에 대한 개혁파 신앙의 5대 교리, 즉 무조건적 예정, 제한적 구속, 전적 타락, 불가항력적 은혜, 그리고 성도들의 견인 등이 나타났다. 이 5대 교리가 개혁파 신앙 또는 칼빈주의를 정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혁파 신앙은 진리의 체계이며 5개 항목 이상으로 규정될 수 있다. 하지만 5대 교리 안에 본질적인 내용들이 다 포함되어 있다고 하겠다. 알미니안들이 공격하는 5대 교리들 가운데 칼빈주의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것들은 알미니안 체제와는 정반대의 입장을 갖는다. 그렇다고 알미니아니즘의 잘못을 5개 항목으로 제한시켜서도 안된다. 알미니아니즘은 신학이며 이 신학과 개혁파 교회의 신학과는 다르다. 알미니안 신학은 5가지로 요약되기 때문에 과거의 논쟁도 5가지로 대두되었던 것이다.

1. 무조건적 예정

   1610년의 항의파들의 첫 번째 항목은 예정론에 관한 것이었다. 초기 종교개혁자들은 모두 예정론에 관해 일치를 가졌다. 루터만 아니라 칼빈이 소유했던 절대적 예정론의 주도권은 개혁파교회만이 유지했다. 무조건적 예정의 의미를 웨스트민스터 고백서 3장에서 찾을 수 있다:

1항. 하나님은 영원 전에 그 자신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의도에 따라 자유롭게 그리고 불변하게 앞으로 일어날 모든 것을 정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것에 의해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가 되거나, 피조물의 의지에 강제력을 행사하거나, 제2원인의 자유와 우연성이 제거되지 않고 오히려 확립되는 방식으로 하셨다.

2항 비록 하나님이 모든 가상된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어떤 것도 그것을 미래로, 또는 그와 같은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예견하기 때문에 정하지 않으셨다.

3항 그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인간과 천사의 일부는 영원한 생명으로, 나머지는 영원한 사망으로 미리 운명이 예정되었다.

4항 이와 같이 운명이 미리 예정된 천사들과 사람들은 개별적으로 그리고 변경되지 않도록 설정되었으며, 따라서 그들의 수가 매우 확실하고 확정되어서 증가되거나 감소될 수 없다.

5항 세계의 기초가 조성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목적과 자기 뜻의 비밀한 의도와 선한 기쁨에 따라, 생명으로 예정된 일부의 인류를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계속될 영광으로 선택한 것은 단지 그의 값없는 은혜와 사랑에서 나온 것이며, 결코 신앙이나 선행, 혹은 그 중 하나의 견인이나 피조물 안에 있는 다른 어떤 것에 대한 예견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움직인 조건이나 원인이 아니다. 따라서 모든 공로가 그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양하는데 돌려져야 한다.

   1645년 웨스트민스터 교회 지도자들이 구성한 이 교리 설명은 개혁파 교회가 고수하고 알미니안들이 공격했고 초기 종교개혁자들이 유지했던 것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중요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주적 역사를 크든 작든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에 포함된다는 것이며, 발생하는 모든 것은 크든 작든, 선하든 악하든,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모든 것이 발생한다는 것에 있다. 첫 번째 문장에서 알미니안과의 충돌되는 것은 하나님의 전 포괄적인 작정과 연관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작정이 이성적 존재의 운명에 의존되며, 특별히 인간의 운명에 의존되며, 다시 말하면 작정이 다른 사람들의 죽음에 관해 미리 숙명적(foreordination)이고 어떤 인간들의 삶을 예정한다는 것 적용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유롭고 불변하게 발생하는 일들을 예정(ordains)하신다면, 어떤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멸망 받을 시키는 일이 일어난다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이런 사실들만 아니라 다른 사실들까지 자유롭게 그리고 불변하게 예정했다(ordained)는 것이다. 만일 알미니안들이 후자를 부인한다면 전자를 부인하는 것이다.

   생명과 예정, 그리고 죽음과 숙명(foreordination)은 본질적으로 영원부터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자신의 뜻의 방침에 따라 인류의 정한 수를 영생으로 선택하셨다는 것, 또 하나님은 그들을 개인적으로 선택하셨다는 것, 그리고 이런 선택에 있어 하나님은 믿음이나 선행을 미리 보심을 조건으로 하지 않으셨고 단지 선택이 스스로와 다른 어떤 것에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가운데서 발견되는 주권적 기쁨으로 결정하셨다. 다른 말로 하면, 절대적, 무조건적, 그리고 불변하는 작정으로 하나님은 자유로운 은혜와 사랑으로부터 어떤 사람들의 구원을 결정하셨고, 그러한 작정에 따라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와 사랑의 목적을 실행하신다. 죄인들의 응보하시는 것처럼 영원한 형벌로 정하시기로 작정하신 동일한 주권적 선한 기쁘심을 실행하심으로 선택하시지 않으셨다.

   이런 교리를 알미니아니즘은 부인한다. 제임스 알미니우스는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미리 예정하시지 않으셨지만 작정 안에서 그들을 신자들로서 여기셨다”고 말한다. 이런 사실은 인식해야만 하는 것이다. 믿음의 항목에서 알미니아니즘의 근본적 원리는 개혁파 기준들 안에 나타난 교리를 부인하는 것이다. 알미니아니즘은 부정적인 견해, 즉 주권적 무조건적 선택 교리를 부인한다. 하지만 알미니안 입장의 긍정적 노력이 아무리 긍정적 노력으로 구현된다 하더라도 무조건적 선택을 부인하는 한 알미니안이기를 결코 쉬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것은 주요한 질문이다. 무조건적 선택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개혁파 교리의 본질인 진리의 면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이미 지적했듯이 알미니안 견해는 단순히 부정적인 것 이상이다. 항의파들(Remonstrance)은 이렇게 말한다: “1항. 세상의 근본 앞에 예수 그리스도 그의 아들 안에 있는 영원하고 불변한 목적으로 인해 하나님은 타락하고 죄성을 가진 사람들을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기 위해 결정하셨다. 그들은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자 예수님을 믿을 것이며, 믿음, 즉 순종하는 믿음 안에서 끝까지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견인할 것이다.” 언 듯 보면 이것과 개혁파 기준들 안에 정착된 입장 간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성자를 믿고 끝까지 견고케 하시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결정하신 하나님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목적을 말하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은 영원토록 불변하게 끝까지 믿고 거룩하고 견인하는 자들을 구원하시려고 결정하신다. 하지만 알미니안이 여기서 확언하는 것과 칼빈주의자가 확언하는 것 간에 차이점의 큰 간격이 있다.

   그 차이점은 이와 같다. 칼빈주의자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약정되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이런 작정으로 인해 주권적으로 구별하신 특별한 사람들의 구원을 영원토록 불변하게 작정하신다고 확언한다. 구원의 작정에 따라 하나님은 그 성취를 향해 목적들을 작정하시고, 믿음을 주시기로 작정하시고, 그리고 구원에 예정된 모든 사람들을 견인케 하신다. 알미니안은 개인의 구원을 정하는 그러한 작정을 부인하고, 그 대신 확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끝까지 믿고 순종하는 자들을 견인케 하실 모든 자들을 구원하시려고 작정, 목적하셨다고 한다. 칼빈주의적 견해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의 대상들인 사람들의 구원에 영원한 의도(destination)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알미니안적 견해는 믿음과 견인으로 특징 지워지는 계층(class)을 구원하시려는 신적 목적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전자는 사람들의 선택이고 후자는 능력(qualities)을 가진 모든 자들이 구원받을 것이라는 규정을 가진 능력자들의 선택이다.

   어떤 알미니안들은 논쟁 속에서 또 주석적 기반 아래서 계속적인 견해를 유지할 수 없음을 간파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믿는 모든 자들을 작정하실 뿐만 아니라 믿는 모든 자들을 선택하신다고 말한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구원받게 될 모든 사람들의 선택의 수, 즉 개인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선택이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개혁파 기준들의 가르침이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살펴보면 이것이 허위임을 알 것이다.

   칼빈주의의 특징은 무조건적 선택이며, 알미니아니즘의 형태는 당연히 거부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개인들의 정해지고 불변하는 선택을 고백한다. 하지만 의미는 하나님께서 믿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고, 믿을 자들을 영원부터 미리 온전히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러한 개인들이 영생에 이르도록 예견하신다. 하나님은 믿을 것이고 끝까지 견인할 것이라고 예견하시는 모든 자들을 선택하신다. 하나님의 선택은 사람들 가운데 존재하는 어떤 잘못된 점들을 미리 예견하심으로 결정된다. 그 차이점이란 하나님께서 스스로 원인이 아니시고 단지 인간의지의 측면에서 주권적 선택이라는 것이다. 선택의 이러한 형태에 나타난 결정적 요소는 하나님의 주권적 무조건적 선한 기쁘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예견하시는 인간의 의지의 결정이다. 선택은 믿음의 근거가 아니라 예견된 믿음은 선택의 근거 또는 조건이 된다.


   끝으로, 이것은 결코 신적 선택이 아님을 분명해진다. 사람들 가운데 존재하는 차이의 궁극적 결정요인이 사람 안에 있는 어떤 것이며 하나님의 주권적 선한 기쁘심에 있지 않기 때문에 주요한 점에서 불가능하다. 먼저 개혁파 입장에 근접한 것처럼 여겨지는 알미니아니즘의 이런 형태는 단순히 두 체제들 간에 전적인 차이점을 보다 분명히 할 뿐이다. 개혁파교회 내부에서 가르치는 선택은 구원과 영생에 이르는 선택이고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의 성취를 향한 하나님께서 정하신 수단으로서의 믿음과 모든 다른 은혜들을 위한 선택이다. 선택은 믿음을 조건으로 하지 않지만 믿음은 선택의 열매이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사람들 안에서 사역하신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정한 영원한 방침 안에 갖고 있으시기 때문이다. 믿음은 선택의 논리적 사건(prius)이 아니라 선택은 믿음의 영원한 사건이며 근거이다. 알미니아니즘은 이와 같은 모든 가정들을 부인한다.

   무조건적 선택 부인은 하나님 은혜론의 핵심에 충격을 가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절대적으로 주권적이고, 구원하시는 은혜의 절대적 주권을 인식하는데 실패는 인간 마음의 교만의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면에서 사람들을 다르게 다루심을 요청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궁극적 요소에서 구원의 결정적 요소는 사람이 행하는 것임을 의미하고, 사람의 구원을 결정하는 분이 하나님이 아니시고, 자신들의 구원을 사람들이 결정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 구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 아니시고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이슈이다.

2. 제한적 구속

   1610년에 제출된 알미니안 항의자들의 두 번째 항목은 속죄의 범위에 관한 것 이었다: “항목 2. 세상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죄의 용서와 구속을 주셨지만; 어느 누구도 실제로 신자들 외에는 이러한 죄 용서를 즐기지 못한다. 요한복음 3:16에 보면 . . . 그리고 요한일서 2:2를 보면, . . .” 이런 주장은 우주적(universal) 속죄론으로 알려진 것이며, 그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고 동등하게 그리고 차별 없이 죄의 용서와 구속을 베푸신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한다는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구원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주장과는 정반대로 개혁파 신앙은 제한적(limited) 구속으로 본다. 제한적 구속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1) 선택자들을 위해 속량된(purchased) 구속

   가장 최선의 대답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8장 5항을 보면 뚜렷하게 알게 될 것이다:

주 예수는 그의 완전한 순종과 영원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 단번에 드려진 그 자신의 희생에 의하여 아버지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키셨으며,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화해뿐 아니라 하늘나라에서의 영원한 기업을 사주셨다.

천국에서의 영원한 유업과 화해는 성부에 의해 성자에게 주어진 모든 사람들을 속량했다는 것을 분명히 정의하고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1항에 보면:

그의 영원한 목적 안에서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이신 주예수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 선지자, 제사장 및 왕, 그의 교회의 머리와 구원자, 만물의 상속자, 그리고 세계의 심판자로 선택하고 임명하기를 기뻐하셨다. 하나님은 그에게 모든 영원 전부터 일단의 사람들을 주어 그의 씨가 되도록 그리하여 때가 이르면 그에 의해 구속, 소명, 칭의, 성화, 그리고 영화되도록 하셨다.

그리스도에게 주신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사람들과 동일한 사람들이다. 3장 5항을 보면:

세계의 기초가 조성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목적과 자기 뜻의 비밀한 의도와 선한 기쁨에 따라, 생명으로 예정된 일부의 인류를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계속될 영광으로 선택한 것은 단지 그의 값없는 은혜와 사랑에서 나온 것이며, 결코 신앙이나 선행, 혹은 그 중 하나의 견인이나 피조물 안에 있는 다른 어떤 것에 대한 예견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움직인 조건이나 원인이 아니다. 따라서 모든 공로가 그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양하는데 돌려져야 한다.

또 그들은 단순히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된 인류, 즉 선택된 백성들이다. 그들에 관하여 계속하여 6항에서:

하나님께서 선택된 자들을 영광으로 지명하시면서, 그는 또한 자기 뜻의 영원하고 가장 자유로운 목적에 의해, 거기에 이를 수 있는 모든 방편을 미리 설정하셨다. 그러므로 선택된 자들은 아담 안에서 타락하였어도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속되며, 정해진 시기에 역사하시는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지도록 유효적으로 소명되고, 그의 능력으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통하여 칭의 되고, 양자로 입양되며, 성화되고 보존된다. 오로지 선택된 자 외에는 다른 아무도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되거나, 유효적으로 소명되어, 칭의되고, 입양되며, 성화되어 구원받지 못한다.

생명으로 예정된 자들, 즉 선택된 자들은 성부로부터 성자에게 주어진 자들이고,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나라에 화해와 영원한 유업을 받은 자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자들이다. 그래서 이제 알미니안과 차이점이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2) 속량과 적용의 동시성

   8장 8항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구속을 사신 모든 사람에게, 그는 확실하고 유효적으로 그것을 적용하며 전달하시는데, 그들을 위하여 대신 간구하시며, 그들에게 말씀 안에서 그리고 말씀에 의하여 구원의 비밀들을 계시하시고, 그의 성령으로 믿고 순종하도록 효과적으로 설득하시며,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그들의 마음을 다스리시고, 그의 놀랍고 심오한 경륜에 가장 일치하는 양식과 방법으로 그의 전능하신 능력과 지혜를 사용하여 그들의 모든 원수를 물리치신다.

구속의 속량의 범위는 실제적 구원의 범위와 동일하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속량하셨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고 주어진다. 제한된 숫자만 궁극적으로 구원받는다면 그 숫자만 그리스도께서 구속을 속량하신다.

   너무나 분명하기에 다른 설명이 불필요하다. 하지만 이것이 간과해야할 성명이 아니라 고백적 가르침의 결정적 원리이기 때문에 보다 분명하게 진술될 필요성이 있다:

그리스도는 그의 순종과 죽음으로 이와 같이 칭의된 모든 자들의 빚을 다 갚아주시고, 그들을 대신하여 자기 아버지의 공의에 정당하고 실질적이며 완전한 만족을 드리셨다. 그러나 성부께서 그를 그들에게 주셨고, 그들 대신에 그의 순종과 만족을 받아주셨는데, 둘 다 값없이 주셨고 그들 안에 있는 어떤 것 때문이 아니므로, 그들의 칭의는 오직 값없는 은혜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엄정한 공의와 풍성한 은혜가 죄인들의 칭의에서 영광을 받게 하신 것이다(11장 3항)

그리스도께서 빚을 갚으셨고 공의를 만족시키셨던 사람들은 칭의를 받는다. 하지만 칭의 받는 자들은 역시 효과적인 부르심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유효하게 부르신 사람들을 그가 또한 값없이 의롭게 하시는데, 이는 그들에게 의를 주입함으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그들의 인격을 의롭게 여겨 받아줌으로서 이다. 이는 결코 그들의 노력이나 성취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행위로서, 신앙 자체 즉 믿음의 행위나 그 외의 어떤 복음적 순종을 그들에게 그들의 의로 전가시킴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과 만족을 그들에게 전가시킴으로서 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의지하는데, 이 믿음도 그들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11장 1항).

효과적 부르심은 10장에 언급되어 있는데 예정론으로 되돌아가도록 한다.

하나님은 그가 생명으로 예정하신 모든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만을 그가 정하시고 수락하는 때에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그들이 본질상 처해있는 죄와 죽음의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은혜와 구원에 이르도록 효력 있게 부르기를 기뻐하신다. 그들의 마음을 영적으로 그리고 구원적으로 밝혀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하게 하시고, 그들에게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며 그들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이 선한 일을 추구하도록 결정하시며,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효력 있게 이끄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의지를 변화시켜 가장 자유롭게 나아오게 하신다.

또 11장 4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모든 선택받은 자들을 의롭게 하기로 작정하셨으며, 그리스도는 때가 차매 그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그들의 칭의를 위하여 부활하셨다. 그러나 성령께서 적당한 때에 실제로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적용하실 때까지는 그들이 의롭게 되지 않는다.

생명, 구속, 효과적인 부르심, 그리고 칭의에 이르도록 예정되었다는 것이다.

2) 한정적 구속

  선택받지 못한 자들, 즉 실제적으로 구원의 참여자가 아니고 마침내 잃어버리고 마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속량하신 구속의 범위 내에 들어오지 못한다. 이러한 사실은 위에 인용된 고백서의 가르침에서 충분히 인용할 수 있다. 그래서 3장 6항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선택된 자들을 영광으로 지명하시면서, 그는 또한 자기 뜻의 영원하고 가장 자유로운 목적에 의해, 거기에 이를 수 있는 모든 방편을 미리 설정하셨다. 그러므로 선택된 자들은 아담 안에서 타락하였어도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속되며, 정해진 시기에 역사하시는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지도록 유효적으로 소명되고, 그의 능력으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통하여 칭의 되고, 양자로 입양되며, 성화되고 보존된다. 오로지 선택된 자 외에는 다른 아무도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되거나, 유효적으로 소명되어, 칭의 되고, 입양되며, 성화되어 구원받지 못한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속되거나”와 “속량된 구속”은 같은 말이다.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이나 구속의 속량은 구원받는 자들만을 위한 것이다. 부름을 받지 않았지만, 의롭고, 선택되고, 성화되고, 그리고 구원받는 자들이다. 구속은 포괄적(extensively)일뿐만 아니라 한정적(exclusively)이다. 반복하는 것이지만 고백서의 가르침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1) 구속은 선택자들을 위해 속량 된다; 2) 구속은 속량된 모든 자들에게 적용 된다; 3) 구속은 선택받지 못한 자들, 즉 마침내 멸망 받을 자들을 위해 속량되지 않았다.

  구속은 희생, 화해, 구속, 신적 의의 만족, 빚의 탕감이라는 의미임을 고백서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하나님께서 선택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기로 예정하셨다는 의미로 구속을 정의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구속 사역으로 인해 그들의 구원을 보장하시기 때문에 그들은 구원받는 것이다. 잃어버린 자들은 보장된 구원의 품, 즉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구속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알미니아니즘과 칼빈주의 간에 차이점은 다시 한번 분명히 여기에서 들어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가능하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자신을 드리면서 죽으셨는가? 또는 자신의 백성들의 구원을 틀림없이 보장하시기 위해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자신을 드렸는가? 알미니안들은 전자를 고백하고 후자를 부인하지만 우리의 바른 견해, 믿는 것은 성경께서 후자를 지지한다는 것이다.

3) 거부된 대답

  ‘제한’구속이란 말은 많은 공격을 받는다. 그렇게 호감을 주는 언어는 아닌 상 싶다. 오해와 그릇된 설명이 있어진다. 어떤 이들은 “정해진”(define) 또는 “특별한”(particular) 구속이라는 의미로 설명한다. 하지만 분명하게 변호되어야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어떤 용어가 선정되었느냐는 것이다. 만일 “제한적”(limited)이라는 용서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그 용어가 상징하는 교리를 단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시 말하면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개혁파 신앙의 적과 타협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그 용어 사용을 고수해야만 한다. 구속은 제한적이다. 그 이유는 영원한 구원에 이르도록 하나님의 결정적 목적 안에서 예정하신 자들에게만 그 정확한 의미, 뜻, 그리고 효력이 발하기 때문이다. 국가, 민족, 언어, 문화를 따라 사람을 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끔 제한구속론이 완전한 구원과 자유구원에 대한 설교를 불가능하게 한다고 반대한다. 전적으로 그릇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성취된 구원은 무제한적으로 충족하고 우주적으로 적합하다. 구별함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로운 믿음(bona fide)을 무제한적으로 충족시키고 완전하게 적합함을 나타내기도 한다. 제한구속론은 주권적 선택론이 복음의 제안을 둘러싼 울타리를 보다 견고하게 하는 것 이상이다. 화목제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이라는 복음은 구별됨 없이 모든 자들에게 주어진다. 주권적 선택과 제한구속으로부터 이 사실, 즉 은혜의 강물이 지속적으로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신적 주권성과 복음의 충만하고 자유로운 제안이 우리에게 와 닿게 되는 제한구속의 물결을 타는 것이다. 모든 자들에게 제안하는 구원은 은혜로운 믿음이다. 믿는 모든 죄인들은 틀림없이 구원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목적과 진실하심은 거짓되지 않기 때문이다.

  제한구속론이 복음을 자유롭게 제안하지 못하다도록 한다는 비평은 복음 전파를 위한 보장과 믿음의 우선성의 의미를 잘못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자들을 위해 죽으셨지만 우주적인 초청, 복음의 요구와 약속은 구세주와 구속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완전 충족성과 적합성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이름 안에서 요구하는 복음의 사도라는 의미는 잃어버리고 무력한 죄인이 확실히 구원받을 것이라는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근거하고 받아들여진다는 청원과 함께하는 모든 것의 충족한 구속주에게 자신을 헌신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잃어버린 죄인이 믿음의 보장을 근거로 하여 자신이 구원받을 것이라는 신뢰, 즉 확신을 가지고 구주에게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다. 그가 믿는 것은 구원받았다(has been)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이 그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죽으셨다는 확신, 즉 다시 말하면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사람의 대상이라는 사실은 믿음의 우선적 행위(primary act)가 아니다. 신자의 의식 속에 논리적으로 심리학적인 구별을 의식할 수 없다는 믿음의 우선적 행위와 가깝게 밀착되어 있다. 하지만 믿음의 우선적 행위는 모든 것의 충족하시고 적합한 구세주에게 자신을 헌신하며 그 신뢰의 유일한 보장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와 구원의 차별 없고, 충만하고 자유로운 제안이다.

 

3. 전적 타락

  알미니아니즘의 5개 항목들 중 세 번째는 원죄 또는 인간타락에 관한 것이다. 인간타락에 관한 알미니안의 분명한 입장에 대해 윌리엄 커닝험(Willing Cunningham)은 이렇게 말한다: “논쟁 과정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것처럼 전적 차이점은 알미니우스를 추종하는 자들이 자신들의 견해들은 이런 주제에 전적으로 근거하고 있는 인간의 자연적 상태와 속성이라는 주제에 성경론과 종교개혁이 놓여있다고 주장하면서부터였다.”2) 알미니안들은 일반적으로 타락한 인간성을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의 핵심을 피해간다. 문제의 핵심은 전적, 또는 완전히 타락했느냐 아니냐 라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우리의 첫 부모와 금지된 실과를 먹음으로 지은 죄에 관해 말하고 있다.

6.2. 이 죄에 의해, 그들은 그들의 원래적 의와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타락했으며, 영혼과 육체의 모든 부분과 기능이 전부 오염되었다.

6.3 그들이 모든 인류의 근원으로서, 이 죄의 죄책이 통상적인 출생에 의해 그들로부터 내려오는 그들의 모든 후손들에게 전가되었으며, 또한 동일한 죄 가운데서의 죽음과 부패한 본성이 그들에게 전달되었다.

6.4 우리가 모든 선에 대하여 철저히 무관심하고 무능하며 대립하게 되고, 그리하여 전적으로 모든 악으로 기울게 된 이 최초의 오염으로부터 모든 자범죄가 나온다

9.3 죄의 상태로 타락함으로서, 인간은 구원에 수반되는 영적 선에 대한 의지의 모든 능력을 전적으로 상실하였으므로, 그러한 선으로부터 전혀 싫어하며 죄 가운데 죽어있는 자연인은 그 자신의 힘에 의해 그 자신을 회심시키거나 그 자신을 거기로 준비시킬 능력이 없다.

  이상에서 전적 타락의 함축되고 간결한 의미는 조심스럽게 조명되어야 한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 본유적으로 있는 능력, 잠재능력에 관해 매우 낙관론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미의 자유로운 선택에서 개인의 구원이 결정된다고 알미니안이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개혁파 교회들과 전적으로 무관한 말이다. 고백서에서는 우리가 자연적 덕행 또는 시민적 의로움이라 불리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비중생한 자들이 행한 행위들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으로 여길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타락했다는 것이나, 이러한 타락으로 인해 우리가 전적으로 불가능하고, 부적절하고, 모든 선한 것에 위해 되고, 그리고 사악한 것에 치우쳐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고백서에서 분명히 말하는 것은 신적 기준과 판단이란 입장에서 볼 때 사람들의 도덕적 영적 조건에 관해 성경에서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에 말하고 있다. 그 규범에서 본다면 그들은 죄로 죽었고 전적으로 타락했음을 알 수 있다.

4. 불가항력적 은혜

  계속되는 논쟁에서 드러나는 것은 전적타락론을 확언하느냐 부인하느냐라는 의미라는 면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연관되었다. 질문은 이것이다: 사람들이 믿게 하고 회개시킬 때 하나님의 성령의 신적 활동(operations)의 형태는 무엇인가? 모든 사람들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에 동의한다. 복음에 나타난 은혜의 제안을 구별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들이 믿고 어떤 이들이 믿지 않느냐라는 사실을 설명하면서 일어난다. 알미니안들은 사람들이 마음에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로운 활동을 떠나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은혜의 속성은? 믿음의 근거는? 어떤 이들이 그들의 영혼의 구원을 믿는 것과 어떤 이들이 그것을 믿지 않게 되는 이유는? 구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인가 아니면 믿는 사람들에게만 은혜가 주어지는가? 그 은혜는 저항될 수 있는가 아니면 항상 목적을 효과적으로 일어나서 좌절되지 않는가?

  알미니안들 가운데서도 상이점들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충족한 은혜, 즉 그 은혜가 자연적 소유인지 은혜로운 베푸심으로 여겨지든지 간에 그 은혜는 모든 사람들에게 거하고 계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믿을만한 능력을 갖고 있다. 어떤 사람이 믿고 어떤 사람이 믿지 않는다는 사실은 차이 나는 반응에서 전적으로 사람들의 편에 놓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차이 나는 반응은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협력하거나 증진하는 단계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차이 나는 반응은 특별히 인간의 자유 의지에 달려있다. 불신자의 경우처럼 신자의 편에서 차이 나는 반응에 대해 그 자신이 전적으로 책임을 지게 되지만 의지에 속한 자율을 실행하기 때문에 유일한 결정적 요소가 된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 사역하시는 것처럼 믿는 사람에게 구원적으로 효율적으로 역사하신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역 가운데 이와 같은 차이에 대해 알미니안은 매우 격렬하게 반응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과 모두들에게 동등하게 행하심을 주장한다. 그래서 구원의 이슈는 인간의지의 주권적 결정에 놓여 있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다르게 할 수 있다.

  만일 사람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은혜를 협력하거나 증진시킬 수 있다면 사람이 어떤 선한 형적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의 요소가 매우 결정적이기 때문에 그 요소는 개인의 역사에서 일련의 사건들이나 가장 중요한 사건을 실천할 수 있도록 결정한다. 이것은 알미니안 입장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의 주권성과 효력만 아니라 죄성 있는 사람의 전적 타락에도 영향을 준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의 주권성과 효력을 부인하는 것이 전적으로 우리의 신앙고백이 말하는 것이다. 10장 1-2항에서 이렇게 말한다:

1항. 하나님은 그가 생명으로 예정하신 모든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만을 그가 정하시고 수락하는 때에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그들이 본질상 처해있는 죄와 죽음의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은혜와 구원에 이르도록 효력 있게 부르기를 기뻐하신다. 그들의 마음을 영적으로 그리고 구원적으로 밝혀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하게 하시고, 그들에게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며 그들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이 선한 일을 추구하도록 결정하시며,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효력 있게 이끄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의지를 변화시켜 가장 자유롭게 나아오게 하신다.

2항. 이 유효한 소명은 오직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특별한 은혜에서 나오는 것이며, 결코 사람 안에 예견된 어떤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성령에 의해 되살아나고 새로워짐으로서 이 부르심에 응답하고 그 안에 제공되고 전달되는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는 완전히 수동적이다.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받는 영혼이 영접하는 믿음은 근원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과 관련을 맺고 있으며 그 원인으로서 핵심에 하나님의 중생하시는 사역과 관련을 맺고 있다. 하나님의 자신의 효력 있는 은혜를 베푸시기를 주권적으로 기뻐하신다. 또 그것은 믿음으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주권적으로 베푸시는 은혜로부터 오는 능력이다. 효율적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은 성령이 갱생시키실 때까지 수동적으로 임한다. 새로운 마음이 그에게 주어지고 올바른 영이 성령의 신비로운 사역으로 그에게 창조된다. 그가 새로운 마음과 올바른 영을 가졌기에 복음의 부르심에 그의 반응은 사랑하는 영접과 신뢰임을 의미한다. 육체적 마음의 반응이 하나님에 대한 적대심인 것처럼 성령의 마음의 반응은 믿음과 신뢰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자신을 나타내신 것처럼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마음의 성격이다.

  고백서에서 중생과 믿음 간의 관계를 잘 볼 수 있다. 신학적 논쟁 영역에서 우리의 입장은 다음의 질문에 따른 대답으로 잘 알 수 있다: 우리가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중생시키시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중생시키시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 것입니까? 다시 말하면 무엇이 우선적 원인, 중생, 또는 믿음인가? 믿음이 중생의 수단이라고 말하는 수많은 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을 중생시키신다고 한다. 그들이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알미니안 단체에 부속하며 개혁파 교리와는 정반대 입장이다. 그들은 참된 복음주의의 파괴를 이끄는 입장으로 나아간다. 새로운 탄생이라는 제한된 의미로 “중생”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런 의미로 어거스티니즘과 칼빈주의에서는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본다. 그 이유는 믿음의 원인과 설명처럼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사역으로부터 나아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도록 선택하셨다. 이런 구원이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예정하셨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의 전적타락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믿음을 행사할 수 없다. 그들은 범죄와 죄로 죽었다. 그들은 믿음으로 되살리기 위해 하나님은 성령의 대리자를 통해 새로운 마음과 올바른 영을 그들에게 심으신다. 그래서 효율적으로 불가항력적으로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신다. 그들은 은혜에 의해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 그들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5. 성도들의 견인

  효율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은혜론에 관련하여 신자의 영원한 보장하는 교리로 마무리되어야 한다. 알미니안은 이것을 막무가내 부인한다. 그들에 의하면 참 신자는 은혜에 있을 수 있지만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있고 끝내는 폐망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그러한 입장은 논리적으로 구원하시는 은혜론에 논리상 매우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개인의 구원의 문제에서 결정적 요인이 자신의 자유의지의 자율적이라면 일관성은 불확실하고 변덕스러운 입장과 같은 구원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최종적 분석에서 구원을 결정하는 것만큼이나 안정적이다.

  효율적 은혜와 성도들의 견인과의 조화는 새롭게 우리들에게 드러난다. 개혁파 신앙은 하나님께서 죄인의 구원을 결정하시는 분임을 분명히 고백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것을 하나님은 완전히 완성하신다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은혜에 놓여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손길을 버리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무효화 시키지 않는다. 고백서 17장 1-2항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항. 하나님이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아들이시고 성령으로 효력 있게 부르시고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로부터 전적이거나 최종적으로 타락할 수 없고 끝까지 확실히 견인하여 영원히 구원을 얻을 것이다.

2항. 이 성도들의 궁극적인 구원은 그 자신들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값없이 주시고 변치 않는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예정의 불변성에 의한 것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의 효력과 그들 안에 성령과 하나님의 씨의 내주와 은혜계약의 본성에 의존된 것이니, 이 모든 것에서 또한 궁극적인 구원의 확실성과 무오성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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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신학/교회사

쯔빙글리의 67개 조항


나 쯔빙글리는 영감되어진 것(theopneustos:즉 하나님에 의해 감동되어진)으로 불리는 성경의 근본(ground)에 대해서, 훌륭한 도시 쮜리히에서 이러한 67개의 조항내지 의견을 설교해 왔음을 고백한다. 나는 성경을 통해 이 조항에 대한 변호와 증거를 제시한다. 만약 내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면, 나는 수정될 준비가 되어있으나, 그것 역시 오직 동일한 성경으로부터 뿐이다.


1. 복음이 교회의 견진성사(confirm!!ation of the church)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모두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2. 복음의 요약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참된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신 그분의 아버지의 뜻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 자신의 무죄하심으로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구속하시고,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셨다.


3. 그래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 있게 될 사람들 모두를 위한 유일한 구원의 길이시다.


4. 하나님께로 향하는 다른 길을 추구하거나 지시하는 자는 누구든지 영혼의 살인자이며 도둑이다.


5. 그래서 복음 외의 어떤 다른 가르침에, 복음에 부여하는 영예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을 부여하는 자들 모두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며 복음이 무엇인지 그들이 알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6. 이는 예수님만이 모든 인류에게 하나님에 의해 약속되어지고 주어진 선구자(Pioneer)시며 대장(Captain)이시기 때문이다.


7. 그분은 영원한 구원자시며 그분의 몸인 모든 신자들의 머리가 되신다. 그러므로 그분 없이는 그 몸은 죽은 것이며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8. 이러한 것들을 통해, 첫째로 이 머리 안에 거하는 모든 이들은 하나님의 지체(members)이며 자녀이다. 이것이 교회이며 성도들의 공회이며,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우주적 교회(ecclesia catholica)인 것이다.


9. 둘째로, 마치 몸의 일부가 머리의 지시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자는 어느 누구도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10. 몸의 일부가 머리없이 무언가-눈물을 흘리는 것, 상처를 입는 것, 자신에게 자해를 가하는 것-를 할 때처럼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머리되신 예수없이 교만하게 무언가를 하려고 노력할 때, 저들은 감각을 잃고 자신을 공격하며 어리석은 율법으로 서로를 짐 지우게 된다.


11.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그들의 허식(pomp), 출판 승인(imperiousness), 사회적 지위, 직함 그리고 법으로 구성된, 소위 교회적 전승(ecclesiastical traditions)들은, 저들이 머리를 따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모든 종류의 광기(madness)의 근원임을 안다.


12. 그래므로, 미쳐 날뛰지만(rage on) 그것이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시대에, 이러한 사실에 주의가 기울여져 왔다. 저들은 영원히 발광하도록 허락되지 않을 것이며 오직 머리되신 분에게 귀를 기울여 듣도록 의식이 회복되어질 것이다.


13.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곳에서, 그들은 쉽고 분명하게 하나님의 뜻을 배우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분께 인도되며, 그분께로 개종convert)할 것이다.

 

14.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서나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설교되어지는 것을 보기 위해 최대한의 근면함을 나타내야 한다.


15.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함을 얻고, 믿지 않음으로 저주를 받는다. 이는 명백하게 진리가 복음에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16. 복음 안에서, 우리는 인간적인 가르침과 전승이 구원을 위해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배운다.


로마교황과 저들이 따르는 바에 대한 주의에 대하여(Notice, Pope What follow!)


17.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고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다라는 것이 자신들을 대제사장으로 받아 넘기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영예와 권능을 반대하고 심지어 거절한다는 사실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


미사에 대하여(Of the Mass)


18. 단번에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신 그리스도가 모든 믿는 자들의 죄를 위하여 드려진, 영원히 지속되며 효과있는 희생제물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미사(Mass)가 희생제가 아니라 한 희생제의 기념이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선하게 행하신 구속의 인(seal)치심이라고 결론짓는다.


성인들의 중재에 대해서(Intercession of the Saints)


19.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시다.


20. 하나님은 그분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신다. 이점에서, 지금부터 영원히 그분의 중보외에는 다른 어떤 중재도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다.


21. 땅에서 우리가 서로를 위해서 기도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이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짐을 확신하는 방식으로 기도한다.


선행에 대하여(Good Works)


22.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義)이시다. 그래서 행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한 선한 것이지만, 우리 자신들로 말미암는 행위가 되는 한 그것은 의롭지도 선하지도 않다.


성직자들의 부(富)에 대하여(How the Prosperity of the Clergy Should Be Christ)


23.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부와 호화로움을 책망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름으로 자신을 위해서 부를 축적한 자들은 그들이 자신의 탐욕과 사치를 위해 그분을 구실 삼을 때, 심각하게 그분을 중상하는 것이다.


음식을 금함에 대하여(Prohibition of Foods)


24.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것을 행할 의무가 없다. 그들은 아무 때나 어떤 음식이든 먹을 수 있다. 그러므로 치즈와 빵에 대한 로마 교황의 교서는 로마주의자들의 협잡(froud)임을 배운다.


축제와 순례에 대하여(Of Festivals and Pilgrimages)


25. 절기와 장소가 그리스도에게 묶여 있는 것이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들에 속박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점으로 부터, 그리스도인들을 절기와 장소에 속박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합법적인 자유를 강탈하는 것임을 우리는 배운다.


두건 달린 수도복과 뱃지와 그와 같은 것들에 대하여(Cowls, Badge, and the Like)


26. 위선보다 더욱 하나님을 불쾌하시게 하는 것은 없다. 이러한 점으로부터, 인간들에게 그것 자체로 중요한 것이라고 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의 커다란 위선이며 파렴치한 것임을 결론짓게 된다. 따라서 수도승들의 외투, 뱃지, 바지, 그리고 그와같은 것들은 더욱 위선적이며 파렴치 한 것이다.


성직계급과 당파에 대하여(Order and Sects)


27.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서로 그리스도의 형제들이며 이 땅에서 어느 누구도 신부(神父)(father)라고 불리워 질 수 없다. 하물며 성직계급(orders), 당파(sects), 도당(cliques), 그리고 그와 같은 것들은 더욱 그러하다.


성직자의 결혼에 대하여(The Marriage of Clergy)


28.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거나 금하시지 않은 모든 것은 (행함에 있어-역자주) 적절한(proper)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결혼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절한 것임을 배운다.


거룩하지 않은 설교자는 반드시 부인을 얻는가 대해서 (The Impure Priest Should Take a Wife)


29. 그들이 하나님께서 순결을 위해 결혼제도를 주셨음을 이해하였지만 결혼을 통해서 자신들을 성결하게 지키기 않는다면,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죄인인 셈이다. 하나님께서는 순결을 위해 그들에게 결혼제도를 주셨다.


순결(독신(獨身)-역자 주)에 대한 맹세에 대하여(Vows of Purity)


30. 순결의 맹세를 행한 자들은 매우 미친 짓이며 유치한 것이다. 이것을 통해 그러한 맹세를 행한 자들이 경건한 사람들을 음탕한 자들로 간주한다는 것을 우리는 배우게 된다.


출회에 대하여(fo Excommunication)


31. 어떤 개인이 성도를 출교시킬 수 없으나, 규칙에 따라서 교회-즉, 출회당할 개인이 함께 생활하고 있는 무리들의 공회-가 감독으로 시행할 수 있다.


32. 출회당해야 하는 경우는 공적인 추문(public scandal)을 일으킨 사람의 경우에만 해당한다.

 

소유주 불명의 물품에 대하여(Of unclaimed Goods)


33. 소유주 불명의 물품의 경우 만약 그것이 정당한 소유주에게로 돌려지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을 성전, 수도원, 수도승, 사제, 또는 수녀에게 주어질 것이 아니라,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어져야 한다.


권위자에 대하여(Of Authorities)


34. 소위 정신적 재능(spiritual estate)을 가진 자들이 자신들의 영예를 위해서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일은 정당화 될 수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세속 권위자에 대하여(Secural Authority from God)


35. 그러나 세속적 권위자는 정당한 권력을 마땅히 가질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위들에 의해 이러한 점이 지지된다.


36. 소위 정신적 재능을 가진 자들이 권리를 가지고 또는 그 권리의 보호를 위해서 주장하는 모든 것들은, 만약 저들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세속적인 권위자에게 합당한 것이다.


37. 이러한 권위자들에 대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순종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38. 권위자들이 하나님과 상반되는 어떤 것들을 명령하지 않는 한에서 그러한 의무가 있다.


39. 그래서 모든 세속적 법률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conformed) 제정되어야 하는데, 이는 심지어 압제받는 자들이 불평하지 않더라도 권위자들은 저들을 보호해야 하는 것이다.


40. 오직 이러한 세속 권위자들만이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시키지 않고서 사람을 사형집행할 권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오직 공적인 추문을 범한 자들에게만 시행되어야 하며 이는, 그 추문에 대해 하나님께서 다른 판결을 (이미 기록되어진 성경을 통해서-역자주)주시지 않은 조건 하에서이다.


41. 만약 세상 통치자들이 하나님께서 책임감을 부여하신 모사들과 참모들과 함께 합당하게 임무를 수행한다면 통치자들은 그들에게 육신적인 생계를 제공해 줄 의무가 있다.


42. 그러나 만약 통치자들이 불신앙적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원리에 따라 행하지 않는다면, 저들은 하나님에 의해 대치될 것이다.


43. 요지는 이것이다. 가장 최고의 그리고 최상의 세속 정부는 통치자가 하나님에 의해 지배받는 곳에 존재하며, 반대로 자신의 마음에 따라 다스리는 통치자가 있는 곳은 가장 사악하며 위태로운 정부이다.


기도에 대하여(Of Prayer)


44. 참된 예배자는 사람들 앞에서의 커다란 소란함(fuss)없이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자이다.


45. 위선자들은 사람들에게 보여지도록 행하며, 현세에 자신들의 상급을 받는다.


46. 따라서 교회에서 헌신함 없이, 그리고 오직 자신을 위한 찬양으로 노래하고 외치는 것은 인간으로부터의 명성을 얻기 위한 것이거나 이익을 얻기 위해 행해진다는 사실이 뒤따른다.


실족에 대하여(Of Offense)


47. 그리스도인을 실족시키거나 치욕스러움을 주기에 앞서 그리스도인은 육신적 죽음의 고통을 선택해야 한다.


48. 이유없이, 우둔함과 어리석음으로 인해 (타인을) 실족시키는 사람은 무엇이 참으로 죄악이며 또한 무엇이 죄악이 아닌지를 깨닫도록 가르쳐야 한다.


49. 사제에게 합법적인 아내를 갖는 것이 허락되지 않으며 오히려 내연의 처를 갖는 것이 허용되는 것보다 더욱 죄된 것은 없다. 이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인가?


죄의 용서에 대하여(Of the Forgiveness of Sins)


50. 오직 하나님만이, 오직 그분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를 용서하신다.


51. 이러한 권세를 피조물에게 돌리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강탈하여 하나님이 아닌 그 무엇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우상숭배인 것이다.


52. 그래서 죄악을 용서받기 위해서 사제나 이웃에게 고백을 행해서는 안되며 단지 상담(counsel)을 목적으로 할 수 있다.

 

53. (출회를 제외한) 보속(assigned work of satisfaction)은 인간 상담의 산물이며 그것으로 죄를 없이 할 수 없으며 그들을 괴롭게 하기 위해서 다른 이들에게 부과되어진 것들이다.


죄를 속죄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하여(The Sorrow of Christ Atones For Sins)


54. 그리스도는 우리의 고난과 곤고함를 당하셨다.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속한 고행의 사역을 (성도에게-역자주)부과하는 자는 누구나 그릇 행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보류된 용서에 대하여(Withholding of Forgiveness)


55. 참회하는 자에게 죄 용서하기를 거절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이나 베드로의 입장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며 악마적이다.


56. 돈 때문에 죄를 용서해주는 자는 누구든지 시몬과 발람의 동류들이며 사탄의 진정한 선지자이다.


연옥에 대하여(Of Purgatory)


57. 참된 성경은 연옥에 대해 아무 것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58. 이미 죽은 자들에 대한 심판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


59.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해 우리에게 알도록 하시지 않는 한, 우리는 그것을 알아내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된다.


60. 만약 죽은 자들과 상관이 있는 자가 죽은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하나님께 간구한다면 그것에 대해 나는 비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을 위해 시간을 정하는 것(사망의 죄를 위해 7년동안 기도하는 것)과 (그로 인한-역자주) 이익을 위해서 그 일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인간적이 아니라 악마적인 것이다.

 

성직와 서품에 대하여(Of the Priesthood and Ordination)


61. 최근에 고안되어진(invented) 성직 임명의 종류에 관하여 성경은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62.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들 외에 어떠한 사제에 대해서도 밝히지 않는다.


63. 주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에게 영예가 주어져야 함을 성경은 요구하며 이는 저들에게 육체적인 생계가 주어져야 함을 말한다.


악한 행실을 다루는 것에 대하여(Of Dealing with Misdeed)


64. 자신의 악한 행실을 의식하고 있는 자들에게 뭔가를 위해 고통을 주는 것이 요구되어서는 안되며 평안이 죽을 수 있도록 허락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저들이 교회에 남기게 되는 재산들은 그리스도인의 방식대로 관리되어야 한다.


65. 하나님께서는 확실히 자신들의 악한 행실을 깨닫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다루실 것이다. 따라서 만약,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타락시키는 것이 너무나 명백하여 그 일이 무시되어질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아니고서는 우리는 저들에게 신체적인 상해를 가해서는 안된다.


66. 모든 영적인 지도자들은 겸손해야 하며 자신들의 돈주머니보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높이기를 추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멸망받을 것이다. 그 예가 십자가 위에 있다.


67. 만약 어떤 이가 나와 더불어 세금, 십일조, 세례받지 못한 아이들, 또는 견진성사(confirm!!ation)에 대해 토론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그에 대한 답변을 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궤변과 인간적인 지혜로 논쟁하도록 하지 말며, 성경으로 그 판단자를 삼으라(성경은 하나님의 영이 살아 숨쉰다). 그러므로 그대가 진리를 찾을 수 있으며, 또는 만약 진리를 이미 발견했다면, 그것을 붙들 수 있게 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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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교리 / (종말론) 6.최후의 상태 


6. 최후의 상태 
  

그리스도를 재판장으로 한 최후의 심판을 거친 이성적 피조물들이 영원토록 누릴 최후의 상태에 대한 언급이다.
  

1. 악인의 최후상태
 

1) 악인의 처소         
 

지극한 고통이 있는 지옥이다(마 13:42; 계 20:14,15).
 

2) 악인의 상태         
 

소극적으로는 신적 은총에서 끊어짐에 따른 영원한 행복에 대한 상실감(마 8:12), 적극적으로는 영육간에 미치는 모진 고통이다(계
14:10).
 

3) 악인의 영벌에 대한 반대 견해         
 

사랑의 속성을 지니신 하나님께선 악인을 영벌하지 아니하시거나, 혹은 악인을 완전히 멸절시켜 아무런 기쁨이나 고통도 느낄 수 없는
무(無)의 상태로 만드실 것이라고 주장한다.
  

2. 의인의 최후 상태
 

1) 의인의 처소         
 

성도의 영혼들은 현재 낙원에서 임시로 거하지만(고후 12:2-4), 부활체(復活體)로 영원히 거할 곳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조성
될 새 하늘과 새 땅이다(계 21:1-4).
 

2) 의인의 상태         
 

영원하며(계 21:3,4), 완전하며(고전 13:12; 15:49), 평화로우며(마 25:46; 계 21:3), 거룩하며, 영화로운 삶(계 7:9,10)을 살게 된다.
  

3. 사단의 최후 상태
 

1) 사단의 처소 - 악인처럼 지옥이다(계 20:10).
 

2) 사단의 상태 - 유황불로 영원히 고통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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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교리 / (종말론) 4.부활(부활의 성경적 증거, 부활의 성질)

 

4. 부활(復活) 
 
성경에 일관되게 흐르는 사상일 뿐 아니라 이 지상의 삶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삶과 이어진다는 복음의 핵심이며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신앙이다. 
  

1. 부활의 성경적 증거 
 

1) 구약의 증거         
 

  (1) 아브라함의 신앙 - 이삭의 부활을 믿었다(히 11:17-19).

  (2) 죽음 묘사 - 깨어남을 전제, ‘잔다’라고 묘사한다(대하 26:23).

  (3) 부활 언급 - 직접 ‘살아나고’라고 말한다(사 26:19).
 

2) 신약의 증거         
 

  (1) 그리스도의 증거 - 스스로를 부활과 생명으로 말씀하셨다(요 11:25,26).

  (2)그리스도께서 직접 부활하셨다.(마28:6, 막16:6, 눅24:6)

  (3) 바울의 증거 - 논리적으로 언급하였다(롬 8:11,23; 고전 15장.

  (4) 요한의 증거 - 계시록은 부활을 회화적으로 그린다(계 20:4,5). 
  

2. 부활의 성질
 

여기서는 그리스도 재림 직후 있을 성도의 생명의 부활만을 다룬다.
 

  (1) 부활은 삼위의 사역이다(요 5:21).

  (2) 그리스도의 부활이 보증이다(고전 15:22).

  (3) 육체적, 가견적 부활이다(고전 15:52).

  (4) 옛 육체의 신령한 회복이다(고전 15:53).

  (5) 전인류의 예외없는 부활이다(행 2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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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교리 / (종말론) 3.천년왕국과 종말 사건(무천년설, 후천년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역사적 전천년설) 

 

3. 천년 왕국과 종말 사건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 후 성도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할 것’을 말한다(계 20:1-6).
  하지만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리스도 재림 및 그와 관련된 종말 사건의 순서가 달라지게 된다. 그러나 아래에서 설명한 어떠한 견해를 취한다 할지라도 결정적으로 잘못되었다거나 완전히 바른 주장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하에 나오는 견해들은 성경에 부분적으로 묘사된 종말에 대한 계시들을 각자의 해석학적 입장에 따라 해석하고 또 이를 상호 연결시켜 종말 사건의 전개 순서를 구성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구원에 대한 충분하 계시이기는 하나 구원에 관한 모든 내용을 다 말해 주는 계시는 아님으로 종말 사건 자체는 분명히 언급하였지만 그 세부 내용을 정확히 그리고 다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또한 해석학적 입장에 따라 세부 내용에 있어서는 다소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종말론에 있어서는 성경이 명백히 밝히고 있는 부분들, 즉 종말 사건 자체 또는 종말 시기의 불가지성 등에 대해서 이견을 가지면 분명히 이단이지만 추정 범위 안에서는 인간의 한계 및 성경 계시의 특성을 고려하여 서로 상대방의 견해를 용납하여야 할 것이다.
  어쨌든 이제 천년 왕국을 중심으로 종말 사건의 전개 순서를 이해하는 데 중심이 되는 종말 사건의 전개 순서를 구성하는 데에는 주로 다음의 견해들이 있다. 
  

1. 무천년설(Amillennianism)
 

성경의 ‘천년’을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전기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1) 종말 사건의 순서         
 

  (1) 천년 왕국의 기간 - 이 기간 동안 사단이 결박되어 무저갱에 갇히고(계 5:10), 첫째 부활을 한 자, 즉 중생한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으로 왕노릇한다(계 5:10).

  (2) 대배교, 대환난 - 천년 왕국이 끝날 무렵 성경에 묘사된 7년 환난이 일어나는데 이는 사단이 잠시 놓임으로 말미암는 결과이다(계 20:3). 이때 거짓 선지자와 적그리스도의 출현이 있고, 성도들은 환난을 당하며 일부는 배교에 이를 것이다. 이는 아마겟돈 전쟁, 즉 곡과 마곡의 전쟁을 절정으로 끝을 맺고 사단은 영원한 형벌에 처해진다.

  (3) 재림 - 천년 왕국은 성도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마쳐진다.

  (4) 대부활과 성도의 휴거 - 성도는 생명의 부활을, 불신자는 심판의 부활을 한다. 그후 성도는 신령한 몸을 입고 공중으로 휴겨(rapture)되어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영접한다(살전 4:17).

  (5) 대심판 - 성도가 휴거된 상태에서 부활한 악인들과 생존한 악인들은 형벌을 받아 영원한 불못에 던져진다. 이것이 둘째 사망이다(계 20:14).

  (6) 신천신치(新天新地) - 악인이 불못에 던져진 후, 이 땅은 새롭게 변화되어 신천신지가 되고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여기서 영원토록 산다.
 

2) 무천년설(無千年說)의 의의         
 

중생한 성도가 구속의 진리가 완전히 계시되고 그 조선이 예수의 사역으로 성취된 신약 시대에는 비록 육적으로는 아니어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적으로 왕노릇한다는 사상은, 창조, 타락, 재창조(구속)라고 하는 신, 구약의 경륜과도 맞아 떨어진다. 또한 종말 사건의 순서 구성의 각 단계가 매우 합리적이라는 장점도 있다. 그러나 ‘천년’을 상징적 기간으로, ‘첫째 부활’을 영적 부활로, ‘무저갱’을 억압 상태로 해석하는 것이 무리하다는 비판도 있다. 
  

2. 후천년설(Postmillennianism)
 

천년 왕국을, 복음이 전세계에 확산되고 이 세상이 살기 좋은 이상적인 세계로 변화될 복음의 황금 시대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며, 이러한 천년 왕국 후에 그리스도의 재림이있다고 본다.
 

1) 종말 사건의 순서         
 

    (1) 선의 점진적 향상 - 복음의 확산으로 인해 세상에는 악의 영향이 점차적으로 감소된다.

    (2) 천년 왕국 - 복음의 세계 전파로 인류 대부분이 신자가 되는 이상적 사회를 이룬다.

    (3) 대배교, 대환난 - 천년 왕국이 끝날 즈음에 결박되었던 사단이 잠시 놓임을 받는다(계 20:3). 사단은 그 때 참신자가 되지 못한 자들을 하수인 삼아 이 세상을 어지럽힌다. 이를 칠년 아마겟돈 전쟁, 곡과 마곡의 전쟁으로 표현한다.

    (4) 재림 - 대환난의 절정기에 재림이 있다.

    (5) 대부활 - 무천년설과 동일하지만, 휴거에 대한 강조가 없다는 점에서는 상이하다.

    (6) 대심판 - 악인들에 대한 공의의 심판으로 영원한 형벌이 주어진다.

    (7) 신천신지 - 대심판 후 성도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2) 후천년설(後千年說)의 의의         
 

일반 역사와는 비교적 조화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으나 지나친 인본주의적 사고와 낙관주의적 세계관에 기초한 것이기에, 이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는 성경의 가르침 및 이 세상의 제반 영적 현상등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3. 세대주의적 전천년설(Dispensational Premillennianism)
 

세대주의는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7단계로 구분하고 그 마지막에 천년 왕국을 둔다. 이는 이들이 성경을 문자적 그리고 도식적으로 이해한 결과이다.
 

1) 종말 사건의 순서         
 

  (1)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 - 가견적(可見的) 지상 재림 이전에, 성도들만을 위함이다.

  (2) 성도의 부활과 변화 및 휴거 - 이미 죽은 성도는 부활하고, 살아서 재림을 맞은 성도는 변화되어 그리스도에게로 들림을 받는다.

  (3) 어린양의 혼인 잔치 - 공중으로 휴거된 성도들과 그리스도가 함께 잔치를 벌인다.

  (4) 복음의 재전파와 이스라엘의 회심 - 한편 지상에서는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에 대한 복음이 전파되며 이스라엘의 대서 회심이 일어난다.

  (5) 대환난과 적그리스도의 출현 - 기간은 7년이다. 이때 전3년 반은 위에서 언급한 복음 전파와 이스라엘의 대회심이, 그리고 후3년 반은 적그리스도의 출현으로 인한 대환난이 강조된다.

  (6)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 - 7년 대환난이 끝난 다음, 휴거되었던 성도들과 함께 지상으로 재림하신다. 이때 그리스도는 대환난 때 죽은 성도들을 부활시키고 아마겟돈 전쟁을 통해 적그리스도를 멸망시키고 사단을 천년간 감금한다.

  (7) 천년 왕국 건설 - 성전 제사가 회복된다.

  (8) 사단의 일시적 석방 - 천년 왕국 마지막 즈음에 결박되었던 사단이 잠시 풀려남으로써 혼란과 무질서가 있다.

  (9) 곡과 마곡의 전쟁 - 사단의 사주로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한 문자적 의미의 전쟁이 실제로 있다.

  (10) 사단의 멸망 - 사단이 결국 불못에 던져지며 영원토록 이곳에 머문다.

  (11) 악인의 부활과 대심판 - 성도의 부활보다 천년 늦게 부활하여 지상에서 지은 범죄에 대해 심판 받는다.

  (12) 신천신지 - 악이 완전히 제거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리스도의의로 힘입은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산다.
 

2)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의의         
 

상징과 암시가 많은 계시록을 무조건 문자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인간의 호기심은 충족시킬 수 있으나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지나치게 복잡하게 만든다는 문제점이 있다.
  

4. 역사적 전천년설(Historical Premillennianism)
 

공중 재림과 지상 재림을 구분치 않고 재림을 단회적으로 본다는 점 등에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과는 다르다.
 

1) 종말 사건의 순서         
 

  (1) 대배교, 대환난 -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워졌을 때 적그리스도 출현의 결과로 성도에게 큰 어려움이 닥친다.

  (2) 재림 - 대환난의 절정에 지상 재림이 이루어진다.

  (3) 죽은 성도의 부활 - 죽어 천상에서 영혼의 상태로 있었던 성도들이 그리스도 재림과 더불어 부활한다(계 20:5,6).

  (4) 성도의 휴거 - 부활한 성도와 변화된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함이다(살전 4:16,17)

  (5) 사단의 결박 - 그리스도에 의해 아마겟돈 전쟁에 패함으로 이렇게 된다(계 20:2,3).

  (6) 천년 완국 - 죄의 근원이었던 사단이 결박된 결과, 죄가 없어지므로 이 땅에는 그리스도의 통치로 평화와 공의가 이루어진다.

  (7) 곡과 마곡의 전쟁 - 천년 왕국 마지막에 사단이 잠시 풀려남으로써, 곡과 마곡을 하수인 삼아 그리스도의 나라를 대적한다(계 20:8,9).

  (8) 사단의 멸망 - 사단은 다시 결박되며 영원한 유황불에 던져진다(계 20:2,3).

  (9) 악인의 부활과 대심판 - 심판을 위한 부활에 이어 영원한 고통 속에 처해진다.

  (10) 신천신지 - 악인의 심판과는 반대로 구원받은 자는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된다.
 

2) 역사적 전천년석의 의의         
 

성경을 문자적으로 일관되게 해석했다는 특성이 장점일수도 있으나 이를 너무 일방적으로 고수한 점이 문제일수도 있다. 또한 천년 왕국에 여전히 악인이 존재하면서 성도의 통치를 받는다는 조화키 어려운 문제를 남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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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교리 / 2.그리스도의 재림(재림의 징조, 재림의 양식, 재림의 목적) 

 

2. 그리스도의 재림 
  
앞에서 시간을 두고 각 사람에게 임하는 개인의 종말에 대한 언급이었지만, 여기서부터는 이 세상 역사 자체의 종말에 대하여 다룬다. 한편 그리스도의 재림은 우주의 대종말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종말론에서는 제일 먼저 언급된다.  
 

1. 재림의 징조
 

재림의 시기는 하나님 이외에 아무도 알지 못한다(마 24:43; 벧후 3:10). 다만 그리스도께서 알려 주신 아래와 같은 징조들을 통해서
재림의 임박함을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
 

1) 복음의 세계적 전파(傳播)         
 

전 세계 만민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신앙을 가질 기회를 갖는다(마 24:14).
 

2) 이스라엘의 회심(回心)         
 

구원하시기로 작정된 모든 유대인들이 주께로 돌아온다(슥 12:10; 롬 11:25,26).
 

3) 적그리스도의 출현(出現)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하나님에게 돌아갈 경배를 가로채며(살후 2:3,4), 거짓된 교리로 미혹하고(마 24:23), 자신들을 쫓지 않는 성도를 핍박하는 사람의 출현이 있다.
 

4) 대환난(大患難)         
 

자연적 재난 뿐만 아니라 사단의 세력에 의한 인격적 박해도 있을 것이다(마 24:9-11).
 

5) 대배교(大背敎)         
 

거짓 선지자(마 24:11,24) 및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마 24:5,23)과 쾌락을 사랑하는 세상 풍조(딤후 3:4)로 인하여 참된 믿음의 소유자가 드물게 된다(눅 18:8).
  

2. 재림의 양식(樣式)
 

성경은 그리스도의 승귀(昇貴)의 절정인 재림이 승천시 모습 그대로일 것으로 말한다(행 1:11).

1) 인격적 재림(人格的再臨)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뒤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바로 그분이 직접 다시 오신다(히 9:28).
 

2) 신체적 재림(身體的再臨)         
 

영적으로가 아니라 육체를 가진 채 오신다.
 

3) 가견적 재림(可見的再臨)         
 

영광 중에(마 24:30),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오신다(계 1:7).
 

4) 돌발적 재림(突發的再臨)         
 

‘생각지 않은 때’(마 24:44), ‘도적 같이’(살전 5:2; 계 16:15) 오신다.
 

5) 승리적 재림(勝利的再臨)         
 

초림은 비하(卑下)의 신분으로서 이루어졌지만, 재림은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신다(살후 1:7,8).
 

6) 완성적 재림(完成的再臨)         
 

신자에 대한 구원의 최종적 완성과 불신자에 대한 형벌이 중요 목적 중의 하나이다.
  

3. 재림의 목적
 

재림의 최종적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재림 직후의 사건들과 관련되는 일차적 목적만을 살핀다. 
 

1) 죽은 성도의 생명의 부활         
 

재림시 제일 먼저 있을 사건이다(살전 4:16). 물론 이어 악인의 심판을 위한 부활도 이어진다(요 5:28,29).
 

2) 생존 성도의 변형         
 

여전히 살아 있던 성도들도 그리스도를 맞이하기에 합당한 몸으로 변형된다(고전 15:51,52).
 

3) 어린양의 혼인 잔치         
 

부활하였거나 변화된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기쁨의 연합을 즐기는 것을 의미한다. 즉, 완전한 교제의 회복이다.
 

4) 성도의 포상(褒賞)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수고한 성도에 대한 시상으로 ‘의의 면류관’이 주어진다(딤후 4:8).
 

5) 악한 세력의 파멸         
 

하나님에게 항거하던 사단을 결박하고(계 20:1,2), 그 하수인들을 영원히 멸망시키신다(살후 2:8; 계 19:19:21). 이는 완전한 하나
님의 통치를 실현키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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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교리  / 1.개인종말론(육체적 죽음, 영생, 중간기 상태)

  

1. 개인 종말론 
 
현재의 세상 곧 아담의 범죄의 영향으로 오염된 이 우주가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이은 심판으로 완전 폐지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되는 역사 종말 외에도 인간 각 개인의 영,육이 분리됨으로 인하여 현세의 세상과는 관계를 끊게 되는 개인적 종말이 있다.
  

1. 육체적 죽음  

 

1) 육체적 죽음의 정의와 필연성         
 

  (1) 육체적 죽음의 정의 - 육체와 영혼의 분리를 말한다(요 19:50). 이때 육체는 그 기능이 정지된 채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별도의 지정된 곳으로 간다(전 12:7).

  (2) 육체적 죽음의 필연성 - 원래의 인간에게는 눅음이 없었으나, 죄를 범함에 따라 하나님이 진노하시므로(시 90:7) 그 심판의 결과(롬 1:32; 5:16; 갈 3:13) 필연적인 죽음이 오게 되었다(창 2:17; 3:19; 롬 5:12,17; 6:23; 히 9:27; 약 1:15).
 

2) 성도가 겪는 죽음의 의미         
 

성도는 믿음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롬 5;21; 8:15,16). 그러나 성도도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 이는, 성도로 하여금 겸손을 배우게 하며, 육적인 데서 떠나게 하며, 신령한 데 삶의 목적과 목표를 두게 한다.
 

3) 죽음에 대한 성도의 자세         
 

불신자에게는 죽음이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는 징계이나, 믿는 자에게 있어서는 죽음이 연단임을 아는 성도는 자신의 한 번뿐인 인생을 봉사의 기회로 삼고(엡 5:16), 세속에 물들지 않기 위해 힘쓰되(딤후 4:17), 죽음에 임박해서는 두려워 말아야 한다(살전 4:13-18). 또한 성도가 믿지 않는 자들같이 단지 육적 죽음만을 가지고 지나치게 슬퍼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못하며(살전 5:13-18), 오히려 부활과 영생의 상급을 바라며 상호 위로해야 한다(롬 12:15).
  

2. 영생(永生)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이 영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사실 인간은 영생할 존재로서 지음받았다.
 

1) 영생에 대한 증거         
 

영생에는 성도가 복된 삶을 영원히 누리는 좁은 의미의 영생과 악인이 영원히 징계받는 것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영생이 있다. 이러한 사실이 경험적으로는 증명되지 않으나 많은 간접적 증거와 더불어 성경의 명확한 지지를 받는다.
 

  (1) 역사적 논증 -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한 심오한 사상들은 인간의 영생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한다.

  (2) 종교적 논증 - 모든 종교는 영생을 목적으로 하는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3) 목적론적 논증 - 인간이 지닌 재능은 이 지상에서의 삶 동안에는 완전히 개발되지 못하며 이상(理想)을 실현할 충분한 기회가 주어지지도 못한다. 이는 내세의 필요성의 당위를 보여 준다.

  (4) 도덕적 논증 - 이 세상에서 상벌(賞罰)이 완전히 시행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 상벌이 완전히 시행될 내세(來世)가 있음에 대한 증거이다.

  (5) 성경적 논증 - 인간의 이성에 의한 추론을 통해서도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영생이 증명되나, 보다 명확한 증거는 절대 무오한 하나님 말씀에서 찾아야 한다.

    ① 구약 - 구약에는 죽음을 맛보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언급이 있으며(창 5:24; 왕하 2:11), 족장들이 열조에게로 갔음을 말하며(창 25:8;
               35:29; 49:33), 이 밖에도 영생에 대한 암시들이 있다(시 16:10,11; 사 26:19; 단 12:2,3; 욥 19:25,26).

    ② 신약 - 예수님(요 11:25,26), 사도바울(롬 8:18; 고후 4:17,18; 딤후 4:7,8), 히브리서 기자(히 11:19), 그리고 모든 신실한 사람이 영생을 믿
               었다(마 22:23).
 

2) 영생에 대한 잘못된 견해         
 

영생은 믿음으로 이를 수용하지 않는 인간에게 합리적으로 증명 되지 않는 사항이므로, 혹자들은 종종 성경의 진리에 맞서는 주장들을 말한다.
 

  (1) 유물론(唯物論) - 진화론이나 생리적 심리학(生理的心理學) 등에 서는 인간의 영적 영역 특히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나 이를 물질적 작용으로 봄으로써 육체가 소멸할 때 모든 것이 없어진다고 주장한다.

  (2) 종족적(種族的) 영생 관념 - 후손의 계속된 번식을 영생으로 보는 견해이다.

  (3) 기념적(記念的) 영생 관념 - 한 인간의 업적 혹은 폐해가 후대 사람들의 마음에 남는 것을 영생으로 본다.
  

3. 중간기 상태(中間期 狀態)
 

인간이 죽어 육체가 소멸된 후 다시 육체를 입게 될 부활 때까지 그 영혼이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가에 대하여 다룬다.
 

1) 중간기 상태에 관한 로마 카톨릭의 견해         
 

중간기 처소를 5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나 이는 성경적 언급을 정리 구분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 추론에 입각한 인위적 구분에 불과하다.
 

  (1) 천국 - 교회의 영세를 받고 공덕을 쌓은 사람이 죽음과 동시에 간다.

  (2) 지옥 - 영세를 받지 않은 성인(成人)과 영세를 받고도 고의로 교회법과 율법을 어긴 자가 간다.

  (3) 연옥(煉獄) - 영세를 받았으나 공덕이 부족하여 천국에 미치지 못한 자가 간다. 그들은 여기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연단을 받으며, 소정의 정화 기간(淨化期間)이 차면 천국으로 옮겨진다. 그러나 유족 혹은 친지의 선행과 기도로 정화 기간은 단축될 수 있다.

  (4) 선조 림보(The Limbus Patrum) - ‘가장자리’라는 뜻이 있는 림보는 지옥 근처에 있다고 주장되며, 이곳은 구약 성도들의 영혼이 거하는 처소이다.

  (5) 유아 림보(The Limbus Infantum) - 유아 영세를 받지 않은 유아들이 형벌이나 행복도 없이 지내는 처소이다. 선조 림보에 거하던 영혼들은 이미 천국으로 옮겨졌으나, 여기에 있는 영혼들은 영원히 그렇게 되지 못한다.
 

2) 중간기 상태에 관한 개신교의 견해         
 

중간기 상태는, 역사 이래로 죽은 자들의 모든 영혼들이 그리스도에 최후의 심판 때까지 대기하는 기간 혹은 그 기간의 상태를 말한다.
 

  (1) 인간은 죽음과 동시에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며, 그
 영혼은 중긴기 처소인 ‘낙원’과 ‘음부’로 각각 들어간다(눅 16:23-25).
  (2) 최종 심판은 죽음 직후 이뤄지지 않는다. 세상 끝날에 각인에 대한 최종 심판이 있다(계 20:12-15).

  (3) 영생과 영벌의 장소는 세상 끝날 이뤄질 천국으로서의 신천 신지(新天新地)와 영원한 지옥이다(계 20:10). 지금의 중간기 상태는 완전한 영생과 영벌의 상태와 족히 비교될 수 없다.

  (4) 중간기 상태에서는 최종 심판에 영향을 줄 회개의 기회가 일체 없다(시 6:5; 눅 16:25,26; 히 9:27).

  (5) 중간기 처소인 낙원과 음부에도 각각 축복과 형벌이 있지만,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행복과 형벌과는 비교될 수 없다(계 20:10).
 

3) 사후 영혼의 의식         
 

부활함으로 재림하신 그리스도와 영적 기쁨을 나누는 그 이전 단계인 중간기 상태의 영혼이 의식을 지니고 있느냐의 문제에 대하여도 각기 다른 여러가지의 견해가 있다.
 

  (1) 영혼 수면설(靈魂睡眠說) - 사람이 죽으면 부활 때까지 그 영혼도 무의식의 상태에 있게 된다는 견해이다.

  (2) 멸절설(滅絶說) - 죽음과 동시에 죄로 인하여 영육간의 영원한 멸절에 이르게 되므로 영원히 의식이 사라진다는 주장이다.

  (3) 조건적 영생설(條件的永生說) - 성도의 영혼과 달리 불신자의 영혼만은 죽음과 동시에 멸절하여 의식이 없어진다는 견해이다.

  (4) 성경적 견해 - 장차 임할 천국과 지옥에서 경험할 복락과 고통에는 비교할 수 없으나 낙원과 음부에서도 이 지상의 것보다는 훨씬 큰 즐거움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의식을 소유한다(눅 16:19-31).
 

4) 사후 영혼의 활동에 대한 오해         
 

죽음으로 육체에서 이탈된 영혼이 부활하기 이전까지 어떠한 체험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오해를 소개한다.
 

  (1) 제 2시련설 - 시련을 통한 일정한 정화의 과정을 거쳐 회개의 기회를 갖게 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사후에는 이 지상 생활에 대한 보상이나 형벌만이 주어지며 회개의 기회는 박탈된다.

  (2) 강령설(降靈說) - 죽은 자의 영혼은 강령술 등을 통하여 이 세상 사람과 교분을 나눌 수 있다는 오해이다(욥 7:9,10; 눅 16:27-31). 물론 이러한 현상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실상 그것은 눈속임이거나 악령의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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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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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교리(1.서론)    


I. 서론(序論,Introduction)
 


  인간 구원의 진리를 체계화한 교리의 세부 내용을 고찰하기 전에 먼저 정확 무오한 교리는 어떻게 확정할 수 있는가 하는 방법론의 문제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는 정확한 방법론이 먼저 규정되어야만 그 방법론에 의해서 정리된 교리가 신빙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론을 다루는 서론은 기독교 인식론과 정확 무오한 교리의 절대유일의 근거로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의 여러 속성에 대하여 다룬다.
  

1.교리(敎理)가 필요한 이유
 

1. 이단(異端)의 극복         
 

성경적이지 못한 ‘다른 복음’(갈 1:6-9)을 가려낼 수는 지침으로서 필요하다. 
  

2. 신앙 성숙         
 

성경 진리의 조직화는 성숙한 사고와 바른 행동을 가능케 한다.
  

3. 성경의 건전한 연구         
 

성경의 전체 맥락 속에서 상호 유기적인 성구들을 관련시켜, 연구할 때 편향적 성경 해석에 따른 오류를 배제할 수 있다. 
  

4. 인간 본성과의 조화         
 

성경의 체계적인 연구인 교리는, 유기적으로 사고하며 지식을 통합하여 이해하려는 인간의 본성과 합치된다. 
   

5. 전도         
 

논리적 사고 구조를 갖고 있는 불신자들을 진리로 이끌기 위해 필수적이다. 
 

6. 교회의 기준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딤전 3:15)는 성경적 진리의 수호를 위하여 일관되고 통일성 있는 기준을 필요로 한다.
  

2.기독교 진리의 인식 과정
 
1. 인식의 원천-하나님
 

불완전한 인간이 아닌 완전자이시며 만물의 창조주이시자 구원의 주체이신 하나님만이 구원의 진리를 인식하기 위한 원천이실 수 있다(고전 8:6).
  

2. 인식의 통로-하나님의 계시
 

죄인된 인간은 거룩하시며 초월하여 계신 하나님에게 접근할 수 없고, 그래서 그분으로부터 능동적으로 진리를 받을 수 없다.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계시를 통해서만 구원 진리의 인식이 가능하다(요 5:39).
   

3. 인식의 창-이성과 신앙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객관적 진리는 인간의 주관적 수납으로써 그에 대한 인식의 과정이 종료된다.
물론 인식의 과정에 있어서 이성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죄로 오염되어 영적 분별력이 크게 약화된 이성만으로는 진리의 수납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이성적 활동은 성령의 감화로 말미암는 신앙에 의하여 지배되어야 한다.
이는 반(反) 이성적이 아니라 초(超) 이성적이라는 이야기이다. 
 

3. 계시(啓示)
  
1.계시의 개념
 

하나님이 인간들로 하여금 구원을 받고 당신을 섬기도록 하기 위하여 인간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계시가 필요한 까닭은 하나님의 초월적 거룩성과 인간의 영적 무능력 및 불완전한 이성(理性)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하지 않으신다면, 인간은 그 어떠한 방법으로도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얻을 수 없다.
  

2. 계시의 분류
 

계시의 방법에 따라 ‘자연 계시(自然 啓示)’와 ‘초자연 계시(超自然 啓示)’로, 계시의 내용과 목적에 따라 ‘일반 계시(一般 啓示)’와 ‘특별 계시(特別 啓示)’로 각각 분류된다. 그런데 ‘자연 계시(natural revelation)’는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자연과 역사 그리고 인간의 일반적 정신 구조를 통하여 주어지며(시 19:1,2 ; 롬 1:20), 한편 ‘초자연 계시(supernatural revelation)’는 선택된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특별한 의도에 따라 자연 질서를 초월한 방법들을 통하여 주어지는 계시이다.
  

3. 일반 계시(general revelation)
 

일반 계시는 우주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일반적 의지를 계시할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이는 곧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근거하여 모든 인간에게 개방된 계시이다.
   

1) 일반 계시의 양식(樣式)         
 

일반 계시는, 창조 때부터 그리고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한 구원 행동을 하실 필요가 없을 때부터 주어진 것이다. 이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일반적 섭리를 인간에게 알리시는데, 그 방편은 다음과 같다.
 

  (1) 자연 현상 - 하나님의 위대한 속성을 보여주는 창조 세계의 여러 현상들(시 19:1,2).

  (2) 역사적 사건 -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진행되는 역사 속의 여러 사건.

  (3) 인간의 마음 - 신에 대한 생래적(生來的) 관념으로서 양심을 갖게 되며, 또한 이로 인해 선을 지향하고 악에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롬1:19).
 

2) 일반 계시의 불충족성         
 

펠라기우스파(Pelagianist), 자연신론자(Deist), 합리주의자(Rationalist)는 일반 계시가, 인간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을 섬기는 데 충분하다고 주장하나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부정된다.
 

  (1) 타락으로 인한 오염 - 타락한 인간은 진리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저하되었을 뿐 아니라 자연 역시 인간의 타락의 결과 함께 저주받아 오염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완전히 드러내지 못한다(요 1:5 ; 롬 8:20-22).

  (2) 종교의 근거로서의 불충분성 - 일반 계시가 일반 학문이나 과학의 근거는 될 수 있으나 하나님이나 구원에 대한 구체적 정보는 주지 못한다(마 11:27 ; 행 4:12).

  (3) 일반계시의 가치 - 이상의 불충족성에도 불구하고 일반 계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위대함을 인간에게 보여 주신 것으로서 우주 질서를 유지케 할 뿐 아니라 특별 계시를 알고자 하는 욕구를 일으키게 한다는 의의를 지닌다.
 

4. 특별 계시(special revelation)
 

  인간의 타락 이후 그 타락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새로이 요청되는 구원의 섭리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이다.

  내용상으로 이는 중요한 구원의 진리를 담고 있지 않은 일반 계시의 미비함을 채우기 위하여, 또한 그 계시의 전달방법상으로는 일반 자연 만물을 통하지 않고 특별히 하나님에 의하여 주도된 직접적 방법으로 계시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성경은 인류 역사 이래로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여러 모양으로 주셨던 특별 계시의 최종적 종합의 성격을 갖고 있다.


1) 특별 계시의 필요성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자연계에도 저주가 내려졌다(롬 8:22). 그리하여 일반 계시는 절대적으로 흐려졌다. 또한 인간도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을 상실하였음은 물론 이제 새로이 인간 구원을 위한 사역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하나님은 인간구원에 관한 당신의 새로운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특별한 뜻을 새로운 방법으로 새삼 계시하실 필요가 있었다.

  (1) 죄 문제 해결 -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인됨을 양심을 통한 일반 계시보다도 분명하게 깨닫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죄책에서 벗어날 수 있기 위한 은혜를 갈구하게 된다.

  (2) 구원 진리 제공 - 죄로 인해 죽었던 생명을 다시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충분히 제시되어 있다.

  (3) 분명한 영적 지식 제공 - 일반 계시가 해석상의 모호함이 있는 반면 특별 계시는 분명한 진리를 전달한다.

  (4) 영적 욕구 충족 - 구원을 얻은 후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계속할 수 있는 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2) 특별 계시의 방법         
 

일반 계시가 주로 자연적인 방법을 통하여 전달되는 반면, 특별 계시는 주로 초자연적인 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1) 신현(神顯,Theophany) -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 이후 인간과의 밀접한 교제를 스스로 금하셨으나, 인간 구속과  관련하여 당신을 인간에게 드러내셨다.

    ① 상징적 임재 - 주로 무생물을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등 당신이 선민(選民)들과 함께 계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셨다. 즉, 지성

                  소 그룹 사이에서(시 80:1;99:1), 불과 연기 및 구름 사이에서(창 15:17; 출 3:2; 19:9,16; 33:9; 시 78:14; 99:9), 미풍 사이에서

                  (왕상 19:12) 그렇게 하셨다.

    ② 여호와의 사자를 통한 임재 - 구약에 나타나는 여호와의 사자는 일반 천사가 아니라 성부 하나님과 구별되는 또 다른 하나님 곧 성자이시

                  다(창 16:13; 32:28; 출 23:20-23; 사 63:8,9).

    ③ 성육신(聖肉身)과 교회를 통한 임재 - 구약 시대에 여호와의 사자로서 선민들에게 나타나셨던 성자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신현

                  (Theophany)의 절정이었다(골 1:19; 2:9). 한편 승천하신 성자께서 보내신 성령 하나님은 교회와 신자 속에 내주하시면서(고

                  전 3:16; 6:19; 엡 2:21) 신자들을 영적으로 조명하시어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전 2:12). 이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

                  님이 완전히 현현(顯現)하실 것의 분명한 보증이다(계 21:2,3).

  (2) 신언(神言, Divine Word)  - 특별한 경우 하나님이 직접 당신의 의지를 인간들에게 나타내셨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이 신자들을 진리로 인도하시기 위한 성령의 조명과는 분명히 구별된다.

    ① 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 창 2:16; 3:8-19; 출 19:9; 신 5:4; 삼상 3:4.

    ② 제비 뽑기와 우림과 둠밈으로 - 민 27:21; 신 33:8; 삼상 10:20,21; 대하 24:5-31; 느11:1.

    ③ 꿈으로 - 창 20:3-6; 민 12:6; 신 13:1-6; 욜 2:28.

    ④ 환상으로 - 사 6:1- 13; 21:6; 겔 1:1; 8:1; 단 1:17; 2:19; 7:1; 암 7:1.

    ⑤ 기록된 말씀과 성령의 조명으로 - 이것은 신약 시대에 하나님이 주로 사용하시는 신언 방법이다. 즉 하나님은, 영원한 말씀이신 성자의 성

                  육신과 그분의 제자들에 의하여 기록된 말씀, 그리고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충족한

                  계시의 특전을 입게 하신다.

  (3) 이적(異蹟, Divine Work) -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이 그 원인이지만, 이는 특별히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을 통하여 일상적인 자연 법칙을 일시 극복하고 일어나는 사건을 말한다. 따라서 여기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이 있게 마련이다.

    ① 이적의 의미 - 이적(miracle)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기이한 사건으로서,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이 있게 마련이다.

    ② 이적의 역할 - 하나님의 크신 권능의 가시적 표현인 이적은 악한 자를 징벌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며, 하나님의 가르침의 권위를 높
                  여 준다. 한편 이처럼 이적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신앙의 수단인 바 이적만을 과도히 추구해서는 안된다.

    ③ 최대의 이적 - 성자 하나님이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사건, 곧 성육신(Incarnation)은 다른 이적과는 비교될 수 없는 최대의 이적으로 모든
                  이적의 목적과 본질을 반영한다.
 

3) 특별 계시의 특징         
 

  (1) 역사적 점진성 - 특별 계시는 처음부터 완전하게 보여지지 아니하고,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점차적으로 보다 명확하게 주어져 왔다. 내용면에서는 최초의 원시 복음(元始 福音)에서부터(창 3:15) 아브라함 언약과 모세 언약, 그리고 다윗 언약 등을 통하여 주어진 구원의 약속이 그리스도를 통한 새 언약으로 완성되었다. 또한 방법면에서는 처음에는 신언이나 이적 혹은 선지자를 통하였으나 결국 그리스도와 기록된 말씀을 통함으로써(히 1:1,2), 선민들이 충족한 계시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2) 사실성 - 특별 계시는 허구적인 관념이나 교훈의 수준이 아니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행하신 구속 사역 그 자체이거나 혹은 그 사실에 근거한 하나님의 완전한 인격의 반영으로서, 인간의 전 인격에 깊이 역사하는 힘이 있다(히 4:12).

  (3) 목적성 - 특별 계시는 세상의 기원을 과학적으로 말하거나 인간에게 세속적 윤리를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죄인 구원이 그 중요한 목적이다.
 

4. 성경(聖經)
  
타락한 인간의 구속을 목적으로, 수많은 특별 계시가 주어졌었지만, 역시 그것의 진수(眞髓)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이다.
   

1. 특별 계시로서의 성경
 

인간 구원을 위하여 반드시 특별 계시가 필요하다. 그런데 여타의 다른 특별 계시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간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기 때문에 더 이상 유효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 특별 계시들이 왜곡되거나 소멸됨을 막기 위하여 경전의 형태로서 기록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성경은 특별 계시이지만, 모든 특별 계시가 다 성경은 아니다. 적어도 이 두 가지는 그 기원이나 본질 혹은 목적에 있어서는 동일하지만, 존재 양식에 있어서는 다르다.
 

1) 특별 계시와 성경의 다른 점         
 

  (1) 방법의 측면 - 여타의 특별 계시가 주로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한데 반하여, 성경에는 초자연적이면서도 인간의 경험이나 역사적 탐구의 결과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특별 계시는 초자연적 사건이나 사실 그 자체이지만, 성경은 그 사건이나 사실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그리고 성경은 철저하게 신적 기원을 갖는다.

  (2) 시간의 측면 - 성경은 인간들에게 앞서 주어진 특별 계시를 기록한 것이라는 점에서, 특별 계시보다 시간적으로 뒤진다. 그러나 시간적으로 뒤진다 하여 성경이 여타 특별 계시에 비하여 열등한 것은 아니다.

  (3) 분량의 측면 - 모든 특별 계시를 다 기록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성경은 당연히 특별 계시보다 분량이 적다(요 21:25). 이는 성경이 그 중에서도 구원의 진리를 구성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만을 기록하였음을 뜻한다(요 20:30,31). 그러나 이것이 성경의 열등성을 의미하지 않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두 가지 모두 인간의 구속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밝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성경은 특별 계시로서의 구속적 사건 및 그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을 기록하여 놓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특별 계시와 다르지 않다(요 10:35).
  

2.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
 

성경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자증(自證)한다(마 15:4; 롬 3:2; 살전 2:13; 히 1:1). 또한 예수님도 당신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하셨다(요 10:30,38).
   

1) 하나님 말씀의 특성         
 

  (1) 능력 - 인간의 말은 실행되기 전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에 능력이 있으므로 번복되지 않고(창 1:27,33), 반드시 성취되기에 이른다(창 1:3; 눅 1:37).

  (2) 계시 - 말씀은 인간이 스스로 발견한 것이 아니라 계시로 주어진 것이다(삼상 3:7; 렘 38:21; 암 4:1). 따라서 인간의 뜻이 전혀 개입되지 않았으므로, 결코 그것 중 어느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는 일이 없다(사 55:11).

  (3) 복음 - 신구약 성경 모두 인간의 영적 질병을 치료하며(시 107:2), 중생케 하는 역할을 한다(약 1:18).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 구원을 위한 복음의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벧전 1:25).

  (4) 성경 - 성경은 형식 측면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계시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내용의 측면에서는 인간 구원에 필요한 모든 진리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성경은 인간 구원을 위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 전부라고 할 수 있다.
   

2)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증거         
 

  (1) 내적 증거 - 성경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자증한다(롬 3:2; 살전 2:13).

    ① 통일성 - 성경 66권은 저작자, 저작 시기, 장소, 배경이 각각 다르지만 그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이라고 하는 동일한 목적으

                   로 완전히 통일되어 있다. 이는 성경의 원저자는 하나님이심에 대한 결정적 증거이다.

    ② 적응성 - 성경은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이에게 공통으로 구원의 지침이 되기에 충분하다.

    ③ 절대성 - 성경은 구원의 지침과 삶의 지침이되, 선악 및 진위(眞僞)구별을 위한 절대적 지침이다. 그러나 다른 저술들은 상대적 지침 정

                    도에 그친다.

  (2) 외적 증거 - 성경을 둘러싼 여러 객관적 사실들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한다.

    ① 이적 - 성경에 기록된 많은 이적들은 하나님이 자연의 일반 법칙을 일시적으로 초월하여 행하신 것들로서, 하나님의 진리 선포의 권위

                   를 보여 주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적들은 성경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직접 계시임을 확증한다. 그러나 다른 책들에

                    기록되어 있는 이적들은 사실상 인간이 미처 이해할 수 없는 자연 현상이거나 혹은 일시적 눈속임일 뿐이다.

    ② 예언 - 만일 성경이 인간적 산물이라고 한다면, 그 안에 담겨 있는 예언들은 논리적 추론의 결과일 뿐으로서 허약한 인간의 허망한 바람

                   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예언들은 역사적으로 성취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예언들은 역사적으로 그

                   대로 성취되어 졌으며, 지금도 성취되어가고 있다. 이는 성경 말씀이 전지(全知)한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입증해 준다.

    ③ 역사 - 초대 교회 세대 및 그 후대의 수많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세계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의 근본인 성경이 신적

                   탁월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성경이 인간적 산물이라고 한다면 박해 기간동안 원래와는 전혀 다른 모양으로 변형되었을

                   것이며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온전히 보존되어 널리 보급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④ 감화 - 인간 세계의 도처에서 발견되어지는 훌륭한 문화적 유산들이나 혹은 탁월한 제도들은 대부분 성경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

                   다. 이는 성경이 개인, 가정, 사회를 변화 시키는 감화력을 지녔음을 뜻한다(히 4:12).

  

 

3. 성경의 진정성(眞正性)
 

성경은 인간적 요소도 지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표면적 현상일 뿐이며 성경은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서 우리 인간들이 구원을 위해 절대적으로 믿고 따를 수 있는 절대적 지침서(指針書)이다.
 

1) 구약 성경의 진정성         
 

말시온(Marcion) 같은 사람은 구약 성경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구약 성경 안에 많은 이교적 요소들이 들어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약 성경은 신약의 뿌리이며,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은 상호 일관적 내용을 많이 담고 있어서, 서로가 서로의 진정성을 증명하여 준다. 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은 신약 성경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되기에 합당할 만큼의 충분한 증거들을 갖고 있다.

 
2) 신약 성경의 진정성         
 

혹자는 신약 성경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즉, 교회가 여러 전승들을 모아 놓은, 다만 그 시대의 신앙 고백일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신약 성경 여러 책들 간의 상호 일관된 조화와 통일, 그리고 교리적 일관성 및 역사와의 완벽한 일치는 그러한 불순한 주장을 그치게 하기에 충분하다.
  

4. 성경의 영감성(靈感性)
 

성경이 비록 인간에 의하여 기록되었음은 분명하나, 하나님은 기록 중에 발생할 수 있는 인간적 오류를 막기 위하여 그 저자들에게 성령을 통하여 영감하셨다.
   

1) 영감에 대한 성경의 증거         
 

  (1) 계시에 대한 영감 ? 성경으로 기록되기 이전에 하나님의 계시가 영감되었다.

    ① 선지자의 소명 - 하나님 계시의 전달자를 가리키는 ‘선지자’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나비’는 ‘대언자(代言者)’를 뜻한다. 이는 선지자가

                   스스로 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말함을 보여 주며, 선지자의 소명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을 때에만 가능함

                   을 입증한다.

    ② 선지자의 의식 - 선지자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예언으로 전달하였다. 선지자가 심지어 자기가 뜻을 완전히 알지 못하는 내용조차

                   도 예언하였는데(단 12:8.9), 이는 인위적인 거짓 선지자의 예언과는 달리, 선지자의 예언은 하나님에 의하여 영감되었다는

                   사실을 확연히 보여준다(렘 14:14.15).

  (2) 기록된 계시에 대한 영감 - 원래의 계시가 하나님에 의하여 영감되었을뿐 아니라 그 계시가 성경으로 기록될 때도 영감되었다. 따라서 기록된 계시로서의 성경은 오류가 없다.

    ① 기록자의 의식 - 성경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기록되었으며(출 17:14; 민 33:2), 인간 자의(自意)로 기록된 것이 아니다. 또한 성경의

                   기록은 하나님을 일인칭으로 묘사함으로써, 그 기록 주체가 하나님임을 증거 한다(사 10:12; 호 4:1).

    ② 성경의 자증(自證) - 성경은 성경의 원저자가 하나님이심을 말하며(히 1:1), 또한 성령의 영감에 따라 기록되었음을 자증한다(딤후

                   3:16; 벧후 1:21).


2) 영감의 방법         
 

  여기서는 성경 기록의 도구인 인간의 역할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의 문제를 다룬다.

    ① 기계적 영감(Mechanical Inspiration) - 성경 기록의 도구인 인간의 정신 활동이 정지됨에 따라, 인간은 다만 기계적으로 하나님의 말

                   씀을 받아쓰는 역할만을 했다는 견해이다.

    ② 동력적 영감(Dynamic Inspiration) - 성령의 영감은 있되, 그 영감이라는 것은 다만 기록자의 지적 능력이나 영적 지각력을 극도로 심

                   화 향상 시킨데 불과하다고 보는 견해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성령의 초자연적 영감을 부인하는 셈이다.

    ③ 유기적 영감(Organic Inspiration) - 하나님께서 인간 저자의 성품과 기질 그리고 재능 등을 활용하시되, 성령의 감동으로써 죄의 영향

                   을 제거하여 하나님의 뜻이 추호의 오류 없이 기록되게 하신다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성경의 여러 기록들은 저자의 문체적

                   특성이나 신학적 강조점이 각각 다르다는 점에서 절대적으로 옳다.


3) 영감의 범위         
 

  여기서는 성경 기록 중 어디까지를 영감하셨는지의 문제를 다룬다.

    ① 사상 영감 - 성경의 사상 전반은 영감되었지만, 그 사상의 표현에 사용된 용어들은 순전히 저자의 선택 결과라는 견해이다. 그러나 사상

                   은 언어 혹은 용어들의 결합이므로, 사상과 용어의 분리는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이 견해는 자체의 모순이 있다.

    ② 부분 영감 - 성경에 차등을 두어 어떤 부분은 영감되었지만 다른 부분은 영감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혹자는 교리서의 영감

                   을 인정하지만 역사서의 영감은 부인한다. 또 어떤 이는 산상 수훈만이 영감되었다고 하며, 또한 어떤 이는 예수님이 말씀하

                   신 부분만 영감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일부분이라도 영감이 안되었다면 이

                   것은 결국 그와 연관된 모든 부분의 영감을 부인하는 결과가 된다.

    ③ 완전 영감 - 성경 66권 모두가 영감되었다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성경을 폐하지 못한다’는 주님의 말씀에 근거해 볼 때 진리이다(요

                   10:35). 또한 바울도 자기의 성경 기록을 하나님께로 온 ‘영이 가르치는 말씀’이라고 함으로써 이 견해의 타당성을 뒷받침한

                   다(고전 2:13). 한편 이와 유사한 견해인 ‘축자 영감설(逐字 靈感說)’은 성경의 일점 일획까지도 영감되었음을 주장하는데

                   (마 5:18), 이는 성경에 대한 지극한 경외심을 갖게 해주는 그야말로 성경적 견해라고 할 수 있다.

 

  

5. 성경의 속성(屬性)
 

성경은 신자들에게 완전한 신앙 생활의 규범이 될 수 있다.
  

 

1) 필요성         
 

재세례파(Anabaptist)같은 신비주의 집단들은 객관적 진리인 성경보다는 주관적인 ‘내적 광명(內的 光明)’을, 로마 카톨릭은 교황의 교서(敎書)를 무오(無誤)하다고 보며 더 중요시 한다. 그러나 성경만이 인간 구원과 구원받은 자의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완전한 지침서이다.
 

2) 권위성         
 

성경이 절대적 행위 지침이 될 수 있는 것은 성경의 신적 기원 때문이다. 따라서 피조물인 인간들은 하나님의 뜻이 담긴 성경의 명령에 절대 순종해야 한다.
 

3) 명료성         
 

로마 카톨릭은 인간의 이성은 어두워져 있으므로 교회의 해석이 있어야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구원과 행위의 지침을 충분히 제공할 만큼 명료하다. 가장 어려운 교리의 하나인 삼위일체를 다루는 부분들도 믿음으로 얼마든지 수납할 수 있다(시 119:105).
 

4) 충족성         
 

성경은 그 자체 안에 구원과 행위에 필요한 완전한 지침을 제공하므로, 로마 카톨릭의 교황 교서나 재세례파의 내적 광명과 같은 다른 무엇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
 

 

6. 성경의 무오성(無誤性)
 

교회사에는 성경의 오류를 주장하는 자들의 출현이 빈번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은 어떠한 오류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1) 과학적 측면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의 다른 세속 문헌들과는 결코 비교될 수 없을 만큼의 과학적 정확성을 보여준다(욥 26:7; 전 1:7). 이는, 성경 저자가 당시의 과학적 수준으로 모든 현상들을 언급하였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성령이 영감으로 오류를 방지하였기 때문이다.
 

2) 역사적 측면         
 

성경의 기록이 세속 역사서나 세속 문헌의 기록과 상이할 수 있는데, 이는 세속 문헌의 자료 수집의 오류로 말미암았을 가능성이 많다. 특별히 수치상 차이가 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유대인의 숫자 표기 관습이 인근 다른 나라와 같지 않기 때문이지 결코 오류라고 볼 수 없다. 그리고 현대의 역사학과 고고학의 발달은 성경 기록의 진실성을 여실히 증명하여 주고 있다.
 

3) 도덕적 측면         
 

혹자는, 특히 구약 성경의 경우 노예, 일부다처, 이혼, 복수 등의 부도덕한 측면들이 많이 언급되어 있다는 것은, 그러한 내용이 담겨있는 성경이 신적 산물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비록 부도덕한 측면을 언급하지만 그것을 옹호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시대의 도덕적 혹은 영적 연약성을 반영할 뿐이다.
 

4) 인용적 측면         
 

신약의 저자가 구약을 인용할 때 원래와 다르게 인용한 경우가 왕왕 있다(사 60:1과 엡5:14; 창 47:31과 히 11:21). 이것은 그러나 신약 저자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문맥에 맞추기 위하여, 영감을 받아 거기에 해석을 가하거나 자구(字句)에 매이지 아니하고 그 전반적 사상을 인용하곤 했기 때문이다. 가령 막 1:2,3은 말 3:1과 사 40:3을 합한 인용이다.
 

5) 통일적 측면         
 

구약의 열왕기와 역대기 그리고 신약의 사복음서는 동일한 사실의 중복 기록이면서도 약간의 내용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는 동일한 사실을 바라보는 저자들의 강조점의 차이일 뿐 본질의 차이가 아니다. 따라서 상호 간의 차이를 비교 분석하면서 종합적으로 살필 때, 더 많은 이해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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