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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 동성애, 성적 순결… 성경은 명료하게 말한다” [2019.10.31 22:47]

2019 TGC 코리아 컨퍼런스, 필립 라이큰 박사 강의


요즘 젊은이들, 성경 읽지 않아, 이야기 낯설어해
세상 따라 살지 않으려면? 성경 말씀 따라 살아야
가르치기, 꾸짖기, 교정하기, 의로 훈련하기 유익



▲필립 라이큰 박사와 통역하는 곽수광 목사(오른쪽부터). 그는 “우리가 믿음으로 말씀을 받으면, 
그것을 철저하게 경청하여 넉넉하게 나누려 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대웅 기자


‘2019 TGC 코리아 컨퍼런스’가 ‘하나님이 가라사대: 성경의 권위와 신뢰성(The Authority and Authenticity of the Bible)’을 주제로 30일 개막해 2박 3일간 일정이 진행되고 있다.

둘째날인 31일 오후에는 전날에 이어 휘튼대 총장 필립 라이큰 박사(Philip Ryken)가 ‘성경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다’는 주제로 강연했다.

필립 라이큰 박사는 디모데후서 3장 1-17절을 본문으로 “양식이 없는 것도 마실 물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이 땅에 기근이 있다. 아모스가 예언했던 것처럼, 영혼이 마른 기근”이라며 “우리 주변 많은 아이들도 이러한 영적 영양실조에 처해 있다. 그들은 성경 이야기에 익숙하지 않고, 복음서를 읽어보지도 않았고, 성경 구절을 외워보지도 않았다”고 지적했다.

라이큰 박사는 “대부분의 대학생들에게 성경은 ‘전혀 읽어보지 않은 가장 위대한 이야기’로 남아있다. 그 결과 기독교적 세계관은 대중의 삶에서 자취를 감추고, 사람들은 성경을 언급하지 않는다”며 “교회에서는 상황이 좀 낫기를 소망하지만, 때로 의문을 갖게 된다. 성경 읽기도 줄어들고, 30세 이하 성인들이 가장 성경을 읽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충격적”이라고 전했다.

그는 “성경을 읽는 사람들조차, 영혼을 만족시키는 방식으로 성경을 묵상하지 않는다. 어떤 교회에서는 성경을 가르치지도 않는다”며 “이 땅에 이러한 기근이 있다. 성경을 읽는 데 시간을 들이지 않는 한, 우리 영혼은 기근을 경험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필립 라이큰 박사는 “사람들이 지금 가장 사랑하는 것이 자신, 돈, 쾌락이다. 크리스천들도 자기 도취적이고 물질주의와 쾌락주의의 유혹을 받으며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위험에 처해 있다”며 “크리스천으로서 우리가 이런 영향을 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본문에서 바울은 성경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고 전했다.

라이큰 박사는 “14-17절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3가지 진리를 말한다. ①말씀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②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 ③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신다”며 “성경 저자 개인 고유의 경험과 능력이 개별 성경의 특징으로 녹아져 있음을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것조차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따라서 성경은 온전히 믿을 만하고 절대적으로 사실이다. 성경 전체는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그분의 완벽성을 지니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됐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적”이라며 “구약성경에서 기대된 구원은 복음서에서 드러나고, 그 외의 신약성경에서 설명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성경 66권에 담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다음 예처럼 하나 하나 열거했다. “창세기는 예수님이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이며 이 땅의 모든 나라에 복을 내려줄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예언서들은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예언에서 그분의 특별한 사명을 말한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우리에게 구원의 좋은 소식이 된다고 말한다.”

필립 라이큰 박사는 “성경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도하고 은혜로 성장하도록 돕는다. 바울은 성경의 유용성을 설명하기 위해 4개의 단어를 사용한다”며 “하나님 말씀은 ‘가르치기’에 유용하고, 교리의 오류를 논박함으로 ‘꾸짖기’에 유용하다. 또 우리의 행동을 ‘교정하기’에 도움이 되고, 의로 ‘훈련하기’에 유익하다”고 밝혔다.


‘오직 성경’, 개신교인들에게 잘 알려진 강령
성경의 명료성, 누구나 읽고 이해 가능한 것
성경 명료성에 대한 공격, 하나님 대한 공격


라이큰 박사는 30일 저녁 ‘성경은 명료하다’는 주제로 공개 강의를 열기도 했다. 그는 “‘오직 성경’은 개신교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강령으로, 종교개혁을 유럽 전체에 퍼지게 한 중요한 전략이었고, 일반인도 쉬운 언어로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했다”며 “이 강령은 윌리엄 틴데일이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데 평생 헌신하게 했다. 그는 일반 사람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접하게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고 여겼다. 이것이 오늘의 초점이고, 오늘날 공격당하고 있는 성경에 대한 복음주의 신학의 주요 원리”라고 말했다.

필립 라이큰 박사는 “틴데일은 누구나 성경을 읽으면 이해가 가능하다고 가정했다. 신학자들은 그것을 ‘성경의 명료성(the perspicuity of Scripture)’이라고 한다”며 “그러나 성경의 명료성은 계속 공격을 받아왔다. 현대 교회 안에서도 기독교의 핵심 교리가 저평가되고 있는데, 이는 기독교의 근본 신앙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라고 전했다.

라이큰 박사는 “사탄은 하나님의 명확한 말씀에 모호성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도록 유혹했다. 그리고 이 성경의 명료성은 여전히 로마가톨릭의 공격을 받고 있다. 가톨릭교회는 외부 정보나 권위를 제외하고 성경이 모든 교리의 핵심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다고 믿지 않는다”며 “신흥 교회 지도자들도 이를 공격한다. 일례로 브라이언 맥라렌(Brian McLaren)은 성경이 명료성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맥라렌은 성경 안에 성경의 주권이나 무오성, 객관성이라는 교리적 용어들이 없는데도 사용되고 있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며 “다른 이들은 성경의 ‘모호성’을 강조하며, 성경의 교훈에 대해 너무 독단적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모든 접근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의 명백한 진리를 의심하게 한다”고 했다.

그는 “이 모든 공격들은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에게서 온다. 어떤 학자들은 성경이 본문에 대한 역사적·고고학적·문화적 배경을 알 때만 명료해진다며, 학술적 전문성을 성경 이해의 핵심으로 여긴다”며 “성경의 명료성에 대한 공격은 절대 진리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청중들에게 매력 있어 보일 수 있다. 청중들은 성경의 명료성을 포함해 모든 것에 의문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태도는 성경을 단지 ‘또 하나의 책’으로 여기도록 교회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고 했다.

필립 라이큰 박사는 “성경의 명료성은 성경 자체에 근거한다. 성경은 누군가가 의미를 명료하게 해 주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모호한 책이 아니며, 누구라도 읽고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책”이라며 “그렇다 해서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예수님은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에게 성경을 근거로 추가 설명을 했고, 빌립도 이사야 53장을 기초로 내시에게 더 깊은 해석을 제공했다”고 소개했다.

라이큰 박사는 “성경의 명료성이 부인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어떤 독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성경을 더 잘 이해한다는 사실에 있다”며 “성경은 어느 본문이든 똑같이 명료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명료하지도 않다. 이는 모든 사람의 은사와 능력이 같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성경이 단순하지만 심오한 깊이를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전했다.




▲컨퍼런스 참석자들이 강의를 듣고 있다. ⓒ이대웅 기자


또 “어떤 이들이 다른 이들만큼 성경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들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의 관계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며 “그래서 그들은 구원의 복음을 오해하고, 하나님의 법을 잘못 적용하고는,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문제는 성경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믿음으로 그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성경이 명료한 이유는, 하나님의 품성과 성경의 증언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실재의 기초이며 모든 진리의 근본이다. 그러므로 특히 성경에 관한 교리를 말할 때는 하나님의 품성을 근거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모든 성경 말씀의 저자는 하나님 자신이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품성, 즉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성경이 하나님에 대해 보여주고 있는 가장 분명한 것들 중 하나는 하나님이 소통하시는 분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다. 이는 성경의 시작과 끝에 나온다. 성경의 시작과 끝뿐 아니라 중간에 나오는 말들도 사실이고, 하나님이 모두 말씀하신다는 점뿐 아니라 그분의 백성에게 하신 말씀을 기록한 것도 모두 사실”이라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영원히 그분을 알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결국 성경의 명료성에 대한 공격은 하나님에 대한 공격이 된다”고 했다.

필립 라이큰 박사는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때로 대화 중 의미를 상실할 때도 있고 진정한 소통이 불가능할 때도 있는데, 그것은 언어 때문”이라며 “하지만 성경은 언어를 하나님의 선물로 보고, 하나님은 스스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구원 사역을 알 수 있도록 특별히 말씀하신다. 이는 복음, 즉 말해진 말씀, 선포된 기쁜 소식이다”고 역설했다.

라이큰 박사는 “따라서 성경의 명료성이 위험에 처한다는 말은,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교리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구원에 관한 교리도 위험에 처한다는 것”이라며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면, 어떻게 구원받을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결론에서 그는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성령께서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우리가 더 그리스도와 같아지도록 그 말씀을 사용하실 것이다. 말씀을 자녀들에게도 가르칠 수 있고, 그들이 하나님의 참 말씀을 이해하면 하나님은 그들이 그분의 아들을 알아 성장하는데 그 말씀을 사용하실 것”이라며 “성경이 명료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복음 전파에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더불어 “성경의 명료성이 없다면, 우리는 어느 신학도 할 수 없다. 현대 사회가 도전하고 있는 낙태, 남녀평등, 간음과 동성애, 성적 순결과 같은 여러 윤리적 문제들에 대해서도 성경은 명료하게 말하고 있다”며 “성경은 가난한 자를 돌보고, 정의롭게 전쟁을 추구하며, 우리 소유에 대한 청지기직 등에 대해서도 명료하게 말한다”고 전했다.

필립 라이큰 박사는 30일 오후 첫 강의 ‘성경은 영원하다’에서 성경의 영원성에 대한 5가지 진리로 ①성령의 감화로 기록됨 ②믿음으로 받음 ③다른 사람들과 나눔 ④위험에 처했을 때 사람들이 거부할 때도 있음 ⑤하나님이 보존하심 등을 꼽기도 했다.

‘2019 TGC 코리아 컨퍼런스’에서는 이 외에도 TGC 대표이자 미국 트리니티신학대학원 명예교수로 신약학 대가인 D. A. 카슨(Don A. Carson), 커버넌트신학대학원 명예총장 브라이언 채플(Bryan Chapell), 고든콘웰신학대학원 교수이자 보스턴시티라이프장로교회 목사인 TGC 부대표 스티븐 엄(Stephen Um)이 각각 강의했다.

TGC는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약자로 개혁주의 신학과 복음중심 신앙을 전 세계에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창립된 기독교 연합단체다. 위 언급된 이들 외에도 부대표에 뉴욕 리디머장로교회를 설립한 팀 켈러 목사(Timothy Keller), 이사장에 그리스도언약교회 케빈 드영 목사(Kevin DeYoung), 이사로 존 파이퍼 목사(John Piper) 등 유명 목회자들이 함께하고 있다.

TGC코리아는 TGC의 철학과 신앙고백을 계승해 대한민국과 한국어권 교포사회에서 개혁주의 신앙을 사수하고 전파하기 위해 2018년 11월 설립됐으며, 현 대표는 박태양 목사다.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출처] 크리스천투데이
[원본링크]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26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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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기본교리] 교회론(敎會論:ECCLESIOLOGY)

 

 

 

 

대부분의 학자들은 신약성경이 씌어진 당시에 교회들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신약성경의 교회의 원리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심지어 어떤 이들은 성경의 모본이 오늘날에는 "실제적"인 것이 못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교회는 어떻게 조직되는 것이며 예배는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에 대해(일반적인 원칙으로서) 신약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지침을 주셨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대로 따라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형성

신약성경에서 "교회"라고 번역되는 단어는 "불러낸 무리" 혹은 "모임"을 뜻합니다. 이 단어는 에베소에 있는 이교도들의 모임이나(행19:32) 애굽에서 불려나온 무리인 광야에 있던 이스라엘을 가리킬 때도 쓰이고 있습니다만(행7:38),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에 대해 사용되는 것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믿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교회는 세 가지 면에서 분명히 구별되어 사용됩니다. 이 단어는 살아있거나, 죽었거나, 혹은 아직 세상에 나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 대해 사용되는데, 이 사람들은 오순절부터 휴거 때까지의 기간 중 믿었거나 믿게 될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오늘날 영어권에서 이러한 뜻으로 사용될 때 "교회"라는 단어는 지역교회와의 구분을 위해 종종 대문자(Church)로 쓰여집니다.


이 단어는 특정 시기에 이 땅에 살았던 신자들에 대해 사용됩니다(가령 "16세기 교회"처럼). 이 단어는 어떤 지역에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 예배하고, 기도하며, 성경을 공부하며, 전도도 하는 어떤 지역의 신자들에 대해 사용됩니다. 한 지역에 여러 개의 교회가 있는 경우에는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갈1:2), "마게도냐 교회들"(고후8:1)과 같이 복수형인 "교회들"(church)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결코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건물을 가리켜 "교회"라 부르지 않으며, 교회협회나 특정 교파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 모두는 다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 와서 만들어낸 개념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흔히 추상적인 개념이 분명하게 이해되게 마련인데, 바로 성경에는 이런 식의 설명이 가득해서 우리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에서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를 몇 가지 보게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엡1:22,23). 그리스도는 머리로서 하늘에 계시고, 교회는 그 몸으로서 이 땅에 있으면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2:12,13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한 건물입니다(엡2:20-22). 그리스도는 이 건물의 모퉁이 돌이시며, 이 건물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고린도전서3:9,16도 보십시오. 교회는 한 새 사람이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엡2:15). 전에 원수가 되어 서로 싸움을 벌이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부터 하나님은 한 새 사람을 만드셨는데, 이는 새 피조물이요 곧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엡5:25-27, 고후11:2).여기서 교회는 사랑의 대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이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신부인 점과 비슷하지만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신약성경의 다른 곳을 보면 교회를 나타내는 예들이 또 있는데 가령 양무리(요10:16), 하나님의 밭(고전3:9), 하나님의 집,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3:15) 등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에게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이루어진 한 새로운 몸이 언젠가 생길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고 감추인 바 되었기에 성경은 교회를 가리켜 "비밀"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교회는 거룩한 비밀로서 하나님께서 신약의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통해 이제 알게 하셨다는 것입니다(엡3:4,5,9. 골1:26. 롬16:25,26). 그리스도는 마태복음16:18에서 미리 장래를 내다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미래 시제) 하셨고 사도행전1:5에서는 제자들에게 약속하시기를 그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5:11은 교회가 현재 존재하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고, 고전12:13은 그리스도의 몸이 성령의 세례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미리 예언하신 말씀과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교회에 대한 언급(이 언급은 바울이 성령께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세례를 주사 한 몸이 되게 하신다고 한 묘사와 부합됩니다) 사이에 오순절이 있었습니다(행2:4). 그러므로 오순절은 그리스도인의 교회가 탄생한 날입니다. 유대교의 특성 일부가 기독교에 남아있긴 하지만, 그 기원과 목적, 운명에 대해서는 이스라엘과 교회는 분명히 구별됩니다. 이렇게 상이한 두 무리를 혼동하면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 각자에 대한 성경의 특별한 가르침 중 많은 것을 혼동하게 되며 그리하여 기독교에만 있는 은혜와 복들을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함께 퇴색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믿는 자들이 모이는 각 지역교회는 우주적인 교회의 진리를 반영해야 합니다. 그 특징이라 하면 ① 하나됨(엡4:4 참된 교회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② 머리에 순종함(그리스도께 엡5:23, 골1:18. 같은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를 대표하시는 성령님께 요14:16, 26), ③ 보편성(행2:47, 고전12:12-26 모든 믿는 자들은 이 한 몸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역 교회는, 정결한 삶을 살고 심각한 과오를 계속 저지르지 않는 모든 믿는 자들을 영접해야 하는데, 이는 이들이 우주적인 교회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④ 거룩함(고전3:17 하나님은 이 죄악된 세상으로부터 자기 백성들을 구별하셨으며 이는 전 성도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지역교회의 성도 각자는 순결하고 선한 삶을 유지함으로써 이 사실을 나타내고 또한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해드려야 합니다), ⑤ 성장(엡4:11,12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교회에게 주신 은사들로 말미암아 굳게 세워져[덕이 세워져]갑니다), ⑥ 믿는 자의 만인 제사장(벧전2:5,9 이것은 모두가 설교한다는 것이 아니며 모두가 예배하는 제사장으로서 그 역할을 감당한다는 뜻입니다) 등이 있습니다.

 

모든 신자는 믿음을 전파하는 일에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각자가 가진 은사를 통해서 하게 됩니다. 숫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우주적인 교회와 지역 교회들은 에베소서4:12,13에 그려져 있는 대로 일종의 연쇄반응에 의해 세워져 나갑니다. 은사를 주신 것은 성도를 온전케 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입니다. 그래서 은사 있는 인도자들은 성도들이 자라서 섬김으로 몸을 세우는 일을 하도록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지역교회에는 각각의 은사를 발휘할 분야가 있는데, 이러한 은사를 쓰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교회로 하여금 권리를 잃게 하는 것입니다. 국내와 해외에서 여러모로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고, 돕는 일을 할 때 우주적인 교회가 사도행전에서와 같이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행1:8).

 

신약교회가 어떻게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보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왜 교회를 만드셨는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여기에 대해 에베소서가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엡3:10,21)고 답을 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복음 전파와 그리스도로 충만된 신자들의 삶을 통해 세상 뿐만 아니라 천사들의 세계에도 하나님의 지혜를 증거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역교회에서 믿는 자들이 함께 모여 그분께 예배하고 찬양할 때 영광을 받으십니다. 교회가 온 세상을 다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데 성공할 것이라는 사상은 말세에 배도가 있을 것이라는 성경의 예언과 상반되는 것입니다(딤전4:1-3,7, 딤후3장, 4:1-4, 벧후2 장, 유3,4).

 

교회의 기능

 

하나님께서 지역교회로 하여금 그분의 지혜와 은혜를 영광스럽게 증거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하시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분은 자기 성도들에게 능력과 은사, 조직, 예식, 징계, 여자들의 섬김, 재정지원 수단을 주셨습니다.
참 교회의 능력은 한 위격 안에 있습니다. 그분은 다름 아닌 성령님이십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1:8). 교회는 기도모임 가운데 탄생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의 능력은 기도를 통해서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2:42에서 우리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고 기록된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흔히 기도모임은 교회의 여러 집회들 중에서 참석자가 가장 적지만 그리스도는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뿐만 아니라 합심기도와 연관된 특별한 약속도 주셨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19,20).
어떤 누구도 아닌 바로 성령님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되십니다. 공적인 사역을 결정함에 있어서나, 헌금을 적절히 분배해 사용하는 일에나, 예배와 집회를 준비함에 있어서나, 범죄한 신자를 징계함에 있어서나, 또 그 외 크고 작은 모든 일에 있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인위적인 계획을 구상하는 것은 비교적 쉽지만 성령 하나님께 여쭙고 그분의 답을 구하는 데는 영적인 지도력이 필요합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제한하는 고정된 규제사항들을 가지고 성령을 "소멸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아담하고 질서 있게" 그리고 신약성경의 원리라는 틀 안에서 일을 처리하기만 한다면, 예배나 공중 집회, 혹은 기타 다른 부분에서 모든 지역교회가 똑같아야 될 의무는 전혀 없습니다. 은사 있는 형제들과 성경적으로 인정받는 장로들의 인도는 일의 질서를 유지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승천하실 때 사람들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엡4:8-16). 여기에는 은사로 일컬어지는 다섯 가지 유형의 사람들 즉,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가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12:8-10에도 그가 목사나 교사 혹은 전도자이든 관계없이 어느 신자에게든지 성령께서 주시는 재능적인 "은사"의 목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전임 전도자가 되지 않고도 사람을 구주께 인도하는 전도자의 일을 할 수 있는 은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 장에서는 에베소서4장에 나오는 주요 은사 다섯 가지를 상고할 것입니다.

 
사도들은 교회의 터를 세우는 일을 위해 있었습니다(엡2:20). 이들은 우리 주님의 부활의 증인이었고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능력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구원받을 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뵈었습니다). 오늘날 사도라는 이 낱말이 지닌 의미에 완전히 걸맞는 사도는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선교사들이("사도"라는 말은 "보냄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모두 이 사도들과 비슷한 일을 하지만 이들에게는 바울이나 베드로가 가졌던 놀라운 은사나 권능은 없습니다. 오늘날 자기가 사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도의 권위를 도둑질하려고 애쓰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피해야 합니다. 사도들에게는 "후계자"가 없습니다.

 

신약성경이 기록되기 전 신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고 장차 올 사실들을 예언하였으며 지역교회에 전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누구도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완성된 신약성경이 신앙과 실제적인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자기가 신약의 선지자들과 동등한 수준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속은 자들이거나, 아니면 속이는 자, 혹은 둘 다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항상 전도자가 필요하며 또 항상 전도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널리 알려졌든 아니면 지역교회 안에만 알려졌든지 간에 이들은 복음을 전함으로써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언제나 여기 저기 다닙니다. 그래서 주님께 돌아온 자가 여럿 되면, 목자들과 교사들이 이 새신자들을 가르쳐서 새로운 모임을 세우거나 이미 그곳에 모이는 모임에 더해지게 합니다. 진정한 전도자는 성령님을 의지하여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정하게 합니다. 성경적이지 않거나 정직하지 못한 "전도" 때문에 교회가 비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단지 몇 달이나 혹 그보다 더 짧은 기간에 끝나버리는 거짓 신앙고백 보다는, 차라리 "결신자"가 적거나 없는 것이 더 낫습니다.

 

목자는 목자장 밑에 있습니다. 목자장은 그리스도십니다. 목자들(신약에서는 언제나 복수형으로 나옴)은, 일반적으로 잘못된 생각처럼 지역교회의 통치자가 아니라 은사입니다. 목자들은 장로나 감독의 책무를 맡은 자들과 동일한 사람인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원문에서는 목자들이 교사들과 너무나 긴밀히 관련되어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은 목자와 교사가 한 가지 은사의 양면이라고 믿습니다. 다시 말해서 만일 가르침의 은사가 없다면 결코 진정한 목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 목자들은 가르침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영적인 양식을 자기 양떼에게 먹이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부탁하신 양떼를 돕기 위해 다른 일들도 해야 합니다. 격려의 말을 해주고, 병이 든 자들과 방황하는 자들을 심방하고, 문제를 가지고 있는 이들을 상담해 주는 일들은, 이들이 해야될 많은 일들 중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목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성령님의 도우심을 따라 성도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게 됩니다. 은혜를 입은 여러 목자들이 있는 지역교회는 실로 복된 것이며 큰 교회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수백 명 혹은 수천 명을 돌본다는 것은, 그 사람이 아무리 능력이 있고 성심성의껏 일하는 사람이라 해도 마땅히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교사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즉 정보를 전달해주는 사람인 것입니다. 영적인 면에서 교사는 이런 수준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왜냐하면 가르침의 은사는 자기가 가르치는 내용을 삶으로 실천해야 하고 또 그가 가르치는 것이 영감받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교리(Doctrine)"(행2:42)는 단지 사도들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성령님 없이는 어떠한 가르침도 성경적 수준에 미칠 수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구체적인 사실이나 건전한 교리를 학문적으로 배울 수는 있지만 이렇게 하는 것은 인간의 교만만 부추기고 영적 성장을 저해합니다. 성경을 배우기에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지역교회에서 가르침의 은사를 가진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것입니다. 한 번에 조금씩 배우기 때문에 이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건전한 기독교 학교에서 정식으로 성경을 배우면 체계적인 가르침으로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으며 또한 지역교회에서 안 가르칠지도 모르는 어떤 배경지식들을 습득하는 데도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교회 안에서 목회하기 전에 정식으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은 없습니다. 말씀으로부터 훈련받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특별히 교육을 많이 받았다고 해서 늘 신령한 은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교회들이 이 점 때문에 파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전도하고, 성도를 돌아보며(목회하며), 말씀을 증거하고,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는 모든 사람들을 존경하고, 귀히 여기며, 재정적인 지원을 해주고,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신약성경은 조직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까요?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닙니다(고전14:33). 지역교회 안에는 질서가 있어야 하는데, 사람의 질서가 아닌 하나님의 질서이어야만 합니다.
빌립보에 보낸 편지는 그 받는 대상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성도들과 감독(지키는 자)들과 집사들이었습니다. 교회의 모든 신자들 가운데에는 감독들과 집사들이 포함되지만, 이 감독이나 집사에 속하는 사람들은 지역교회 안에서 특별한 조직상의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 안에는 신약성경 곳곳에 나타난 질서인 여러 명으로 된 각 부류가 있었습니다. "직분을 맡은 자들"(굳이 용어를 사용하자면)이 중요하지만 사도들의 문안 편지에서 첫 번째 자리에 놓인 부류는 예배하는 제사장인 모든 지체가 놓여 있는데, 이것은 소위 "성직자"가 첫째 위치에 있고 "평신도"가 두 번째 위치에 있는 오늘날 널리 퍼진 일부 제도와는 매우 다릅니다.

 

감독(bishop)이란 낱말은 "지키는 자" 혹은 "감독관"이란 뜻의 낱말을 그저 영어로 옮긴 것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권위를 지닌 한 사람의 성직자(즉 "주교" - 역주)가 여러 개의 교회를 주관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적으로 볼 때 한 교회 안에 감독들이 몇 명씩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20장(17절과28절을 비교해보십시오)과 디도서1장(5절과7절을 비교해 보십시오)은 "감독"과 "장로"가 같은 뜻임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두 용어의 차이점은 이 위치에 있는 사람의 의무(감독하는 일)와 위엄(장로)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밝히고 있는 장로가 되기 위한 자격기준은 매우 높으며 또 영적인 것입니다. 사업을 성공적으로 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장로가 될 자격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디모데전서3:1-7과 디도서1:7-9은 장로가 되기 위한 분명하고도 세밀한 자격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누가 이 높은 직위를 맡기에 합당한지 보여주실 수 있을 뿐입니다. 그분은 양떼를 주인이 아닌 목자처럼 돌볼 사람들, 자신과 자기 가족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들, 그리고 거짓 교사들을 대하여 믿음을 지키고자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을 선택하실 것입니다(벧전5:2, 행20:28). 비록 장로들의 의무이기 때문에 양무리를 꾸짖고 권고하더라도(이로 인해 마음이 상한 자들이 그들을 인기 없는 자로 만들 수도 있지만), 우리는 그들을 가장 귀히 여기며(살전5:13), 잘 다스리는 자를 또한 "배나 존경"해야(이 낱말은 흔히 재정적으로 돕는 것을 의미합니다) 됩니다(딤전5:17). 성실히 일한 충성된 감독들은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됩니다(벧전5:4).

 

헬라어 디아코노스( )는 단지 종이라는 뜻입니다. 때로 이 낱말은 신약에서 전혀 비전문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또한 그렇게 번역되고, 어떤 때는 빌립보서1:1에서처럼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며, 영어로 표기할 때 단순히 집사라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아마도 사도행전6:1-7은 집사들을 언급한 최초의 말씀일 것입니다. 이 단락에서는 실제로 집사에 해당되는 단어가 아닌 연관된 동사("섬기다")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집사들의 봉사는 그저 식탁에서 시중드는 것보다 더 범위가 넓어서, 온갖 일을 다 포함하되 장로들이 직접 책임 맡고 있는 일은 포함하지 않는다고 여겨집니다. 집사의 자격 요건은 높으며(딤전3:8-13), 장로들의 자격요건과 비슷합니다. 또한 집사들은 정식으로 섬김을 허락 받기 전에 다음 사항들이 증명되어야 합니다(10절). 즉 단정하고, 신앙이 건전해야 되며, 이(利)를 탐내지 않는 것 등이 그 자격요건 중 일부입니다. 11절은 집사들의 아내(흠정역) 혹은 여자 집사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로마서16:1은 뵈뵈를 여자 집사로 부르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그를 교회 안에서 섬기는 종으로 부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잘 섬기는 집사는 아름다운 지위를 얻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습니다(딤전3:13).

사람들은 예식 혹은 성사(聖事)를 많이 만들어 왔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두 가지 예식을 언급합니다. 즉 물 침례와 떡을 떼는 것 두 가지입니다. 이 예식들이 참여자들에게 무슨 "은혜"를 주는 것은 아니며 다만 구주께 대한 사랑과 순종의 증표가 되는 것입니다. 침례식은 한 사람에게 단 한 번 베푸는 것이 옳습니다. 성찬은 자주 빈번하게 베풀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침례를 지역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에 필수요건으로 삼습니다. 이상적으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침례를 받아야하지만 성경 어디에서도 침례를 교회지체가 되는 것과 연관 짓고 있지는 않습니다. 사실 지역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에 대한 성경말씀은 있지도 않습니다. 침례가 마음속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표시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면 침례에 대한 논란은 많이 없어질 것입니다. 침례는 죄를 씻지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침례는 사람을 구원할 수도 없고 또 구원하는 데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침례가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가리키며, 또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과 부활하심에 있어 그분과 한 몸으로 여김받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성령으로 침례받는 것을 상징한다"고 여깁니다. 요컨대 모든 전도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것은 침례가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행위요, 한 사람을 공적으로 구별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일부 국가에서는 오늘날도 단순히 믿음을 고백하는 것보다 침례를 받는 것이 더 큰 핍박의 신호가 되고 있습니다.

"침례를 주다"는 단어에는 헬라어로 "물에 담그다" 혹은 "물에 잠기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단어의 이차적인 의미는 "동일한 것으로 여김"인데, 그리스도와 동일시된다는 것은 침례에 있어 중요한 개념입니다. 물에 완전히 잠겨야 침례를 올바르게 받는 것입니다. 침례요한은 "물이 많은"(요3:23) 장소를 골라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만일 물을 뿌리거나 붓는 것이 옳은 방식이면 이렇게 많은 물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침례받으실 때 "물에서 올라오셨으며"(마3:16),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는 둘 다 "물에 내려갔습니다"(행8:38).


침례의 의미나 방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침례의 대상입니다. 구원받지 못했으나 종교적인 사람이 기독교 내에서 조직을 갖춘 어떤 무리에 의해서 어떤 방식으로든지 침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여전히 침례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신약에서는 구원받은 사람만이 침례를 받습니다. 침례받는 사람이 다 어른이라야 되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구원받은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아기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게되면 자기 영혼의 안전에 대해 그릇된 인식을 갖게 됩니다. 사람은 너무나 쉽게 종교의식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순서를 보면 언제든지 "믿고 세례를 받더라"며 결코 그 반대가 아닙니다. 가끔 빌립보 간수의 경우를 예로 들며, 진실한 믿음과 관계없이 온 집안 사람이 다 침례를 받아야 된다는 주장을 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행16:34)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가서 모든 족속을 가르치고 세례를 주라고 명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이 가르침이 성경적이라는 것과 또한 침례 자체에 대해서도 살펴보았습니다(마28:19,20).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은 "성찬식"이나 "주의 만찬", 또는 사도행전에서처럼 "떡을 떼는 것"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합니다. 성찬식은 단순한 예식으로서 침례와 마찬가지로 복음서에 명령되어 있고 사도행전에서 실천되고 있으며 서신서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잡히시던 날 밤 주 예수님은 떡을 떼고 잔을 나눔으로써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을 기억해야 할 예식을 제정하셨습니다(고전11:26). 주님의 분부이기 때문에 이렇게 주님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사람의 연약을 알고 계신 주님은 자비롭게도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상징을 주셨는데, 곧 우리를 위해 주신 주님의 몸을 나타내는 떡과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흘린 피를 나타내 주는 포도열매를 주신 것입니다. 이런 상징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교회를 사랑하신다는 최고의 증거로서 우리의 기억을 생생하게 소생시켜 주는 것입니다.
믿는 자인 동시에 제사장으로서 함께 모여 죽으신 주님을 예배할 때, 우리는 주의 상에 둘러앉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임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존전에 직접 나아감을 얻습니다(히10:19-22). 성찬식은 오랜 세월을 내려오며 변함없이 믿음을 고백하는 대부분의 교회에서 예배의 중심이 되어왔습니다. 현대에 들어와 일부에서 의식주의(儀式主義)를 두려워한 나머지 성찬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일도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만일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진심으로 예배를 드리게 하실 수 있다면, 떡을 떼는 것이 단순한 의식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기억하는 모임은 믿는 자들에게 놀라운 영적 유익을 주며,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을 막아주는 보루가 되어줍니다.

우리가 주의 만찬을 기념하기 위해 얼마나 자주 모여야 하는지에 대한 엄격한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은 매 주일마다 주의 만찬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행20:7). 분명 연보도 이 날 드렸을 텐데, 그 이유는 매주일 첫날에 자기들의 헌금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고전16:2). 본성적으로 우리는 대부분 너무나 냉담하고 고마움을 모르는 자들이기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영적으로 자주 돌이켜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함께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는 데에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것입니다.


교회의 간증은, 복음집회나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각종 집회에 참석하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 의해 손상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찬에 참여하도록 허락을 받자마자 함께 믿는 신자로서 성도들과 교제가운데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는데, 그것은 부도덕하거나 경솔하게 살도록 잘못 인도하는 자나 혹은 잘못된 교리를 퍼뜨리는 자를 징계하는 교회의 다스림을 받을 의무도 됩니다. 오늘날 교인을 잃을까 염려해서 징계라고는 전혀 하지 않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또한 어떤 지역이나 무리 중에서는 징계 가운데 있다가도, 다른 곳에 가면 아무 잘못도 범한 적이 없는 사람인양 영접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징계의 온전한 목적은 잘못한 자를 바로 잡아 다시 교제를 할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에 있어 지혜와 은혜가 절대 필요하지만, 만일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교회가 거룩하려면 규모없는 자에게는 반드시 경고가 주어져야 합니다(살전5:14). 규모 없는 자들은(살후3:11,14, 15)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과 더불어 피해야 될 대상입니다(롬16:17). 또 이단은 딱 잘라서 거절해야 합니다(딤3:10). 신약에서 이단은 중요한 교리상의 문제에 있어 잘못된 견해를 받아들임으로써 분열을 조장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징계의 최종적인 형태는 출교입니다(고전5:11,13). 출교는 신중하게 해야되며, 음행하는 자와, 탐람하는 자와, 우상 숭배하는 자와, 후색하거나 술취하거나 토색하는 자들이 그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징계는 공정해야 되며 교회문제는 그 교회 성도들만 알게 하고 교회 밖으로 나가게 해서는 안됩니다. 앞에서와 같이 자격을 전적으로 상실한 사람들 중 일부가 어느 다른 건전한 모임에 교제를 요청할 때 통제되어진다면 아마 우리는 복음증거에 있어서 더 많은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여자들의 섬김은 대단한 것이지만, 강단 사역은 그들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는 동등하지만(갈3:28), 여자들은 교회에서 말해서는 안되며(고전14:34,35) 남자들을 가르치거나 남자의 권위를 빼앗아 주관하려 해서도 안됩니다(딤전2:12). 여자는 다른 여자들과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지만 남자가 섞여있는 무리를 가르쳐서는 안됩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하는 표시로 머리를 가려야 하는데, 이것은 교회의 질서를 지켜보고 있는 천사들에 대한 간증이기도 합니다(고전11:10). 여자들이 순종해야되는 이유는 여자가 나중에 지음 받았고 죄는 먼저 범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자가 설교자나, 공적인 교사나, 혹은 장로가 될 수 없다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여자는 자기의 물질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으며(눅8:3), 손 대접을 할 수 있고(롬16:1), 자기보다 나이 어린 여자들을 또한 가르칠 수 있습니다(딛2:4). 교회 밖에서는 여자도 브리스길라가 남편 아굴라를 도와 아볼로를 가르쳤던 것처럼 남자들을 비공식적으로 가르칠 수 있습니다(행18:26). 여자는 모든 사람을 격려할 수도 있습니다. 지난 수세기 동안 헌신된 여인들은 구제나 해외선교, 또 그 밖에 셀 수 없이 많은 봉사를 활발하게 벌여 왔습니다. 여자들은 성경의 제한 안에서 쉽게 머무를 수 있으나,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봉사가 결코 적은 일이 아닙니다.

 

지역교회의 모임 장소를 준비하거나 선교사와 장로들, 과부와 가난한 자, 설교자와 전도자를 지원하는 데는 비용이 듭니다. 이 돈들은 다 어디서 오는 걸까요? 즐겨내고 사랑으로 하는 성도들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에서 이스라엘은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이 의무였지만, 은혜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최소한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입니다! 헌금은 수입에 비례해야 하며(고전16:2), 은밀해야 하며(마6:1-4), 즐겨 내야 합니다(고후9:7). 우리 모두는 할 수 있는 한 많이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토록 즐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할 수 없는 은사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고후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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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기본교리] 종말론 (그리스도의 재림,천년왕국 )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베푸시는 구원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구원입니다. 성령님은 쉬지 않고 믿는 자를 죄의 권세에서 구출해내시지만, 옛 성품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아무리 성숙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때때로 죄를 지으려는 내적인 충동이 있습니다. 이 옛 성품은 주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영원히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메시야가 이 세상에 오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구절들은 메시야가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했으며(예를 들어 시편22편, 69편), 또 어떤 구절은 그분의 영광에 대해 말씀했습니다(시2편, 72편). 선지자들은 이런 두 가지 상반된 예언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지 몰랐습니다(벧전1:10,11). 여기에 대해 설명을 하자면 그리스도는 초림하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재림시에 다시 영광 중에 오신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많은 구절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과 요한 모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고 여러 차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친히 "내가 다시 와서…"(요14: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상고해 보면 한 가지 사실이 더 밝혀집니다. 초림에 두 가지 국면이 있었던 것과 똑같이, 재림도 두 가지 양면성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해서, 한 선지자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 오실 것이라 했으며(미5:2), 또 다른 선지자는 말하기를 그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오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슥9:9). 이 두 예언은 글자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마2:1, 21:1-11). 재림에 대해서도 어떤 구절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성도들을 위해 오신다 했으며(살전3:13), 다른 구절들은 그분의 성도들과 함께 오신다고 했습니다(요14:3). 그러므로 이 두 사건 사이에는 어느 정도 시간적인 간격이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장차 일어날 사건들을 그 시간적인 순서대로 상고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휴거

그리스도께서 자기 성도들을 위해 다시 오실 때, 성도들은 공중으로 들림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휴거"라고 합니다. 영어 성경에는 "휴거"라는 말이 나오지 않지만, 이 말은 "잡아채다"라는 뜻을 지닌 말에서 유래하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데살로니가전서4:17을 라틴어 성경에서 "우리가 들림받아 … 공중에서 주를 만나게 될 것이라"라고 번역한 데서 볼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휴거의 진리를 가르치고 있지 않은데 이는 휴거가 그리스도인들로 된 교회와만 관계있고, 이 교회는 이스라엘에게 감추인 "비밀"이었기 때문입니다(엡3장). 바울은 또 휴거를 "비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15:51). 그는 이 진리를 "주의 말씀으로", 즉 직접적인 계시에 의해 받은 것입니다(살전4:15). 성경 전체를 통해 우리는 영광 중에 오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읽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께서 먼저 성도를 위해 오신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이 진리를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이 진리에 대한 가장 중요한 부분 두 가지는 고전15:51-56과 살전4:13-18에서 발견됩니다. 이 말씀들로부터 우리는 주께서 호령과 더불어 강림하신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이미 죽은 신자들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일어날 것입니다. 살아있는 신자들은 변화되어 새로운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공중으로 들림 받게 되는데 이 일은 갑작스럽게,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은 언제 일어날까요? 주님은 우리가 예비하고, 언제나 깨어 있어 주님을 기다리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그 날을 가르쳐주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주님 오실 때가 가깝다는 약속이 기쁘고도 놀라운 "복스러운 소망"입니다(딛2:13). 그러나 이런 즐거움과 더불어 우리로 정신을 차리게 만드는 것은 우리들 각자가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롬14:12).

그리스도의 심판대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믿는 자들은 이 일이 일어날 때 자기 죄에 대해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기 때문입니다(롬8:1).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믿는 자들은 충성스럽거나 헌신적으로 봉사한 것에 대해 상급을 받게 될 것이지만, 어떤 이들은 비록 자신은 구원 얻되 자기가 한 일이 불꽃 가운데서 살라지는 것을 슬퍼하며 보게 될 것입니다(고전3:13-15). 만일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휴거와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염두에 두고 산다고 하면, 삶이 놀랍게 변화될 것입니다!

어린양의 혼인잔치

충성스럽게 섬긴 것에 대해 상을 주실 때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벌어지게 됩니다(계19:1-8). 주님과 주님께 속한 자들은 말할 수 없는 즐거움에 참예할 것입니다. 성경이 여기에 대해 세부적으로 말씀하고 있지는 않지만, 혼인잔치야말로 우리를 영원한 복락으로 인도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도록 하기에 적절한 방법입니다.

 

대환난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온 이래로 사람은 슬픔과 고통을 겪어왔습니다. 지진과 태풍, 기근, 전염병 등은 인간이 흔히 겪는 것이며 전쟁은 유사(有史)이래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대환난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계7:14). 마태복음24장에서 예수님은 "재난의 시작"이라고 알려진 장차 오게 될 고통의 시기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세상이 알고 있던 것 중 가장 큰 환난의 때까지 잇따르게 될 것입니다(마24:8,21). 많은 세부적인 내용들이 마치 그림처럼 계시록6장부터 18장에 묵시적인 형태로 나타납니다. 아마도 이 환난은 우상에게 무릎을 꿇으려 하지 않는 유대인들이 공격을 받는 것으로 시작될 것이며, 그 다음에 모든 유대인에게로 확산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에 대해 유대인들을 심판하려고 그들이 핍박을 받도록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의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이 정도에 지나게 될 것이고, 이것과 다른 이유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열방에게도 쏟아지게 됩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온통 두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계6:15-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거부합니다. "…회개치 아니하고 … 회개치 아니하였더라…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하나님을 훼방하고"(계9:20,21, 16:9,11).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거대한 범위 속에서 이 환난의 주된 이유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늘 사람에게 자비하시지만, 사람은 계속 죄 가운데 행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만일 사람이 아직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의 죄에 대해 심판하신다면, 사람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알아차리고 회개하여 그분께 돌아갈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진노를 남김없이 다 보여주셔도, 사람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대환난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대환난은 교회가 떠난 후에(계3:10 원래 의미는 "그 때를 피하게"),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시기 전에 일어납니다. 이 환난은 너무도 끔찍해서 하나님은 "그 날들을 감하실 것"입니다(마24:22). 선지자 다니엘은 칠년 간의 황폐에 대해 말했습니다(단9:27). 처음 삼년 반은 비교적 조용하고 번영도 합니다만, 나머지 삼 년 반은 무서운 날들이 될 것입니다. 참 그리스도인들은 이 칠 년간의 환난기간이 시작되기 전에 끌어 올려 영광 중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영광 중에 주님과 함께 안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대환난 중에도 진리를 증거하는 자들을 일으키셔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대환난은 그리스도께서 땅에 임하실 때 돌연 멈추게 됩니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24:29,30). 환난 전 휴거는 우리 주님의 재림에 대한 전체 모습 중 한 부분일 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먼저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민족이 메시야를 어떻게 배척했었는지를 기억하고 애곡할 것입니다(슥12:10). 주님께서 승리 가운데 나타나실 때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한 모든 열방들의 반대는 중지될 것입니다(계19:11-21).

살아 있는 민족들이 받는 심판

다음으로 살아 있는 민족들이 심판을 받게 됩니다(마25:31-46). 신실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인 하나님의 백성들을 도움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나타낸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외의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모든 악한 것들이 정결케 되어질 때, 그리스도는 지상왕국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그 소망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큰 위로의 근원이 되어왔습니다. 이 진리가 사단의 특별 표적이 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조롱하는 자들은 항상 재림을 비웃어 왔으며, 훗날에 이런 사람들의 공격은 더더욱 맹렬해질 것입니다(벧후3:3,4). 더욱이 많은 잘못된 사상들이 난무함으로써 주님을 욕되게 했는데, 그런 사상 가운데는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생겨난 경우도 더러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람이 믿을 때 주님께서 그 마음에 들어가심으로써 주님의 재림이 성취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죽을 때 그리스도께서 그 영혼을 위해 재림하신다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 말들이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재림하시는 것은 개인적으로, 문자적으로 이루어질 것이고, 눈으로 볼 수 있게 일어날 사건입니다."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행1:11). 오히려 신자들은 죽으면 그리스도께로 가는 것입니다.

교육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교회의 의무며 그 이후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는 대중화된 교리가 있는데, 이것을 가리켜 "후천년설"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한 세대에 두 번의 세계대전은, 복음이 점진적으로 세상에 변화를 줄 것이라는 이론에 전혀 도움이 안됩니다.

일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교회가 "그 죄를 씻기 위해서" 환난을 통과하거나 혹은 최소한 그 일부를 겪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환난은 "개신교의 연옥"이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믿는 자에게 징계가 있기는 하지만, 이는 그로 하여금 계속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환난은 이 악한 세상을 징벌하기 위한 것입니다.

"부분휴거설"에 따르자면, 교회의 일부는 반드시 환난을 통과하게 되는데, 이 말은 곧 이 세상에서 주님께 순종하지 않은 성도들이 환난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의 몸은 그 일부만이 영광스럽게 부활한 몸을 입고 혼인잔치를 즐기게 되는 반면, 몸의 나머지 부분은 이 땅에 남아 불시험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모든 자기 사람들이 그가 계신 곳에 함께 거하게 될 때까지 만족을 얻지 못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환난이 있기 전에 이미 육신적으로 살다가 죽은 신자들은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이들도 다 부활해서 고난을 받아야만 된다는 것입니까?

아직도 주님이 몇 날 몇 시에 재림하신다고 날짜를 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날짜 중에는 성경에 나오는 숫자와 이름들을 놓고 온갖 상상을 동원하여 신비적으로 해석하여 정한 날짜와, 점성술이나 심지어 피라미드를 측량해서 얻은 자료로 정한 날짜들까지 있습니다 ! 이런 노력은 언제나 실패하고 맙니다. 인자이신 주님조차도 땅에 사실 때 그 날과 시간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막13:32). 하나님의 지혜로 보건대 우리가 주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모르는 것이 더 나은 것입니다. 주님이 오늘 오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재림을 예비할 마음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천년왕국

 

구약성경의 예언은 메시야가 왕으로서 온 땅을 다스리게 될, 미래에 있을 황금시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20:4에서 그분이 천년 동안 다스리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기간을 "일 천년"을 의미하는 두 단어로 된 라틴어에서 유래해서 "천년왕국"이라고 부릅니다. 땅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저주 아래 있게 되었으며(창3:17,18), 지금 그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낙원은 다시 회복될 것이며(계2:7), 사막은 백합화처럼 필 것입니다(사35:1). 야생 짐승들이 길들여지고(사65:25), 모든 피조물이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것입니다(롬8:19-22).
천년왕국 기간 중에는 세계 열방이 번영하게 될 것입니다. 전쟁도 없을 것이며(사9:7), 범죄도 최소로 줄어들 것입니다. 평화시에도 치안과 국방을 위해 엄청난 예산을 투자하던 일들이 그때는 사라지게 됩니다. 한편 오늘날 거짓종교는 그 복잡한 의식을 유지하느라 엄청난 돈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계시록17장과 18장에서 우리는 상업화된 종교의 멸망을 보게 됩니다. 천년왕국에서는 단순한 영적 질서로도 충분합니다. 그 때에는 병과 죽음이 흔한게 아니라 오히려 극히 적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대단히 오래 살게 될 것입니다(사65:20). 천년왕국에 들어가게 되는 사람들은 숫적으로 얼마 되지 않겠지만, 천년왕국 기간 중에 인구가 증가하게 될 것이며,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의 필요를 공급하실 것입니다. 이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요3:5, 마25:34). 이 사람들에게서 태어나는 자식들은 거듭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거듭나게 됩니다. 실제로 믿지 않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마지못해 겉으로는 의로운 척할 것입니다(사11:4,5). 사단은 결박될 것이며(계20:2), 그를 따르는 수많은 악령들도 활동하지 못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이사야60:12에서 이스라엘이 세계를 이끄는 최강국이 될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지위는 이스라엘의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스라엘에게 주실 것입니다. 열두 사도는 주님과 함께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됩니다(마19:28). 이 환난 기간동안 신실함이 입증된 유대인들도 권세를 받게 됩니다(눅19:17).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며, 그분의 신부로서 그분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요14:3).
천년왕국 기간동안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계시는 한 모든 사람은 그분께 복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회가 오면 많은 사람들이 왕을 대적하여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천년의 세월이 끝나는 때 사단은 잠시동안 풀려나게 됩니다(계20:3).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로 군대를 이루어 하나님의 보좌를 전복시키려는 마지막이자 최대 규모인 반란을 감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군대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불에 의해 전멸 당하게 됩니다. 또 마귀는 불못에 던지우고(계20:10), 하나님의 통치를 거스리던 모든 것이 영원히 끝이 나게 될 것입니다.

 

둘째 부활과 크고 흰 보좌

이 일 후에 둘째 부활이 있습니다. 우리는 천년 왕국이 세워지기 전, 휴거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것을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만,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고전15:22). 모든 사람은 몸과 영과 혼을 온전히 다 가진 채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크고 흰 보좌 앞에는 오직 구원받지 못한 자들만이 서게 되며, 그 앞에는 책들이 펴지고 모든 사람들이 자기 행한 것을 따라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심판자로서 앉으실 것입니다(요5:22).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배척한 사람들에게는 절대 구원이 없습니다. 이들의 이름은 어린양의 생명책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본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예비된 불못 속으로 던지우게 될 것입니다(계20:11-15).
지옥은 무엇이며 또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주 예수님은 잃어버린 바 된 자들이 겪게 되는 고통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두려움, 슬픔, 분노" 등과 같은 말로 묘사해 주셨습니다. "바깥 어두운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22:13, 25:30). 사악한 자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입니다(유13). 우리는 지옥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다는 것 말고는 어디 있는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8:21).
성경은 천국이나 지옥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천국에는 슬픔, 우는 것, 고통, 저주, 사망 등이 없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곳에는 빛과 생명 그리고 사랑과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계21:22- 22:5).

 

영원한 상태

시간은 영원이라는 무한한 바다에 둘러싸인 작은 해변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시간이 얼마나 오래 계속될 지 알지 못합니다. 세상이 지음 받기 전 영원이라고 하는 무한한 기간이 있었습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90:2). "영원"이라는 낱말은 끝이 없거나 무한정한 기간 동안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바울과 베드로와 요한은 다 한결같이 "영원무궁한 세월"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원에는 결코 끝이 없을 것입니다.
영원무궁한 역사 동안 하나님은 여러 가지 면으로 자신을 계시해오셨습니다. 예를 들어 율법 시대, 은혜 시대, 천년왕국 시대가 있는 것입니다. 장래에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엡2:7). 또한 성경과 역사, 그리고 자연에 대해 풀 수 없었던 수수께끼들에 대한 답을 알게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물론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아시지만, 영원 가운데 거하게 될 구속받은 자들은 지금처럼 한계를 갖지 않을 것입니다.

죄로 인해 더럽혀진 이 우주는 불로 멸해지고,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입니다(벧후3:10-13). 이사야는 말하기를 이전 것은 기억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사65:17).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이상을 보았습니다(계21:1). 현재의 땅에서 천년왕국 기간동안 의가 통치할 것이지만(사32:1), 새 땅에서는 의가 거하게 됩니다(벧후3:13).
악인은 멸절을 당하거나 아니면 아마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원"이란 말을 써서 세세토록 계신 하나님을 묘사하고 또 동일한 말로써 끝없는 형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계14:11과 15:7). 끝끝내 그리스도를 저버린 사람들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될 것입니다. 그들이 받을 형벌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영생과 마찬가지로 "영원할 것"입니다.
믿는 자들은 세세토록 왕노릇할 것입니다(계22:5).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요17:24).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가 될 것입니다(롬8:17).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게 될 것입니다(요일3:2). 우리는 영원토록 주의 우편에 있게 될 것입니다(시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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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교리] 구원론(구원)  


죄에 대한 연구는 우리에게 구원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구원에 대한 연구는 "구원론(Soteriology)"이라고 하며, 이 단어는 "구원자(Soter)"를 뜻하는 헬라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고 승리를 외치셨습니다(요19:30).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사역은 모든 사람이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며 다만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을 수 있도록 예비해놓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사역의 주요한 면을 요약하고 있는 낱말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대속(substitution)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이르기를,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겔18:20)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율법을 무시할 수 없었고, 이제는 사랑이 하나님의 거룩한 합법적인 요구들을 만족시켜주는 방법을 찾아내어야만 했습니다. 결국 죄지은 자를 위해 기꺼이 죽을 대속물이 필요했습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죄인은 자기 죄로 인해 죽어야 했으며 그러므로 그에게는 구원이 없었습니다.


한편 이 대속물은 ①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해야 했습니다. 사람이 보기엔 이 외에 뭔가 다른 계획도 가능할 것 같지만, 재판관이신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려야만 합니다. ② 정죄받은 사람과 동등해야 했습니다. 짐승은 사람보다 열등합니다(히10:4). 천사는 사람보다 더 뛰어나지만 순수한 영일뿐 육체가 없으므로 죽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적합한 대속물은 바로 사람이라야 했습니다. ③ 죄가 없어야 했습니다. 자기 죄가 단 하나라도 있는 사람은 아무도 다른 사람을 위한 대속물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죄를 위해 죽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④ 기꺼이 죽을 수 있어야 했습니다. 무죄한 어떤 사람을 억지로 다른 사람을 위해 죽게 한다면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 못되실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셨다면 마귀는 곧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고소했을 것입니다. ⑤ 무한한 생명을 지니고 있어야 했습니다. 죄가 없더라도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 단 한 명만 구하기에 족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생명은 생명으로"(신19:21)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무한하십니다. 다시 말하자면 완벽한 대속자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셔야 했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며 동시에 사람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말고는 어느 누구도 이러한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는 성부와 성령으로 더불어 동등하신 분입니다.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이자 동시에 사람이셨던 주님께서 기꺼이 버리신 생명은 무한한 생명이었습니다. 이에 구원받은 피조물들의 찬송과 경배는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대속물"(substitute)이란 말을 흠정역 성경에서 찾을 수는 없어도, 대신해서 고난을 당한다는 개념만큼은 흠정역 전체에서 두루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짐승제물들은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그림으로 하나님께서 받아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아벨의 양은 받으셨지만 가인의 피 없는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창4:4,5). 하나님께서 친히 이삭 대신 죽을 숫양을 공급하셨습니다. 레위기의 제사제도 아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역사를 통해 말 그대로 수백만 마리의 짐승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대속의 진리는 이사야가 이사야서 53장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이 우리 허물을 인해(5절), 우리의 죄악을 인해(5절),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해(8절), 속건제물로서(10절), 범죄자를 위하여 죽을 것이라고 했던 것입니다(12절).


신약성경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주시고, 우리를 위해 그 피를 흘리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눅22:19,20). 바울과 베드로는 대속의 진리를 거듭 거듭 가르쳤습니다(롬5:8, 갈3:13, 벧전3:18).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죽으셨으며 이는 곧 죄인들을 대신해, 그들을 위해, 그들의 유익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분은 또 죄 때문에 죽으시되 친히 그 형벌에 대한 책임까지도 지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완전한 사람으로서 이상적이며 합당하신 그리고 유일하신 대속물이십니다!

다음은 구속(redemption)입니다. "구속하다"라는 말은 "무엇을 사다" 또는 "되사다"는 뜻합니다. 구속은 죄와 또 거기에서 풀려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구약을 보면 한 사람이 병이나 가난 때문에 자기 재산을 팔아야 할 처지에 놓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구속자(goel) 혹은 유업을 무를 자라고 하는 그의 친척에게는 그 재산을 언제든 도로 사서 되찾아 줄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사람과 그 친척은 자기 집안의 재산을 지키게 되었습니다(레25:23-25). 룻기4:1-10과 예레미야32:6-12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신약에는 "구속하다", "값을 주고 사다" 등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동사가 다섯 가지 있습니다. 이 단어들은 하나님의 정하신 절차를 보여주며, 또 그리스도의 사역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완벽하게 예비된 것으로 오직 믿는 자들(택함을 입은 자들)에게만 효력이 있고 유용할 뿐임을 가르쳐 줍니다.


그 첫 번째 낱말로 "시장에 자주 가다" 혹은 "시장에서 사다" 라는 뜻을 가진 것이 있습니다(마13:45,46, 눅9:13). 모든 사람, 즉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죄인까지도 그리스도께서 예비하셨다는 점에 있어서 모두 속함을 받고, 사신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벧후2:1). 믿는 자의 몸은 값으로 사신 바가 되었습니다(고전6:20). 우리는 피로 사신 바 되어 나라와 제사장들이 됩니다(계5:9,10).
두 번째 낱말은 첫 번째 것과 비슷합니다만 접두사(ex)가 붙음으로써 판매대상에서 제외되고 과정을 되돌릴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낱말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예비하신 구원을 받아들인 신자들에게만 쓸 수 있습니다(갈3:13, 4:5).


세 번째 것은 속전을 받고 풀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전서 1:18,19은 이 속전(값)이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가리키고 있으며, 디도서2:14은 우리가 불의로부터 구속받아서 그분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네 번째 동사는 세 번째 것과 비슷하나, 접두사(apo)가 붙어 있어서 "무엇으로부터 떨어져" 풀려난다는 뜻이 더 강하며 로마서3:24과 에베소서1:14에는 명사형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섯번째 것은 앞의 낱말들과는 어근의 의미가 조금 다릅니다만 사도행전20:28에 "사셨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담긴 뜻은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취하시고 또한 돌보셨다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사람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으셨으나 죄로 말미암아 다른 것의 다스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리스도께서 속전을 지불하셨습니다. 사실 그분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곧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것이며 이렇게 하심은 "극히 값진 진주(사랑하시는 교회)"를 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상 우리가 살펴본 낱말들은 교훈을 얻기 위한 것이므로, 이 은유적인 말들을 성경에서 인정하고 있는 범위를 벗어나 지나치게 강조하여서는 안됩니다. 가령 성경은 그 속전을 누구에게 지불했는지 말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사단에게 주시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피로 대속하셨다"는 이 위대한 교리를 생각해볼 때, 그리스도인들의 찬송이 구속자께 드리는 찬양과 구속받은 자들의 영광으로 가득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닌 것입니다!

 

화목제물(propitiation)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죄에 대해 구속을 이루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만족(또는 화목)하게 해드리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렸고,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 의와 거룩함, 공의를 저버리지 않으시고도 죄인들을 대하여 사랑으로 행하실 수 있게 해드렸습니다. 성부는 늘 진노하시고 온유하신 성자 예수님은 그 성부의 마음을 달래드린다고 하는 사상은 정말이지 생각해 볼 가치조차도 없습니다. 실상은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신 동기가 바로 사랑때문이란 것을 요한일서4:10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고 하신 요한일서 2:2 말씀은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린 것의 효력이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진노는 하나님과 화목되지 못한 결과로 임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사용된 헬라어 "속죄소"(히9:5)와 "화목제물"(롬3:25, 그리스도를 가리킴)은 구약의 동일한 단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속죄소는 죄를 가리는 것과 의의 거룩한 표준이 요구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누가복음18:13에 나오는 세리의 기도는 "하나님이여 죄인인 저와 화목해주시옵소서"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역으로 만족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이루신 일은 단 한 번으로 완전하게 된 것이었습니다(히9:28). 화목제물로 인해 하나님은 자유롭게 그리고 정당하게 모든 죄를 용서하실 수 있게 되었고 믿는 자는 누구든지 의롭다고 하실 수 있게 되었으며, 모든 은혜와 영광을 죄인들에게 베푸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자비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비하시다는 사실과 예수님과 그분이 이루신 사역에 완전히 만족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그러하십니다. 우리도 그와 같이 되어야하겠습니다.

 

성경에는 또 화목(reconciliation)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죄에 대한 대속, 구속, 하나님께서 진노를 거두셨다는 화목, 그리고 이제 사람편에서 하나님과 화목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심으로써 이루신 주요 공로들입니다. 우리는 죄론에서 죄의 성품에 대한 심판을 위해 준비된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그분은 위대한 두 가지 다른 업적인 죄사함과 정결함의 근본이십니다. 흔히 범하는 실수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 사람과 화해하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성경의 가르침은 화해가 필요한 당사자는 바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흔히 화해라는 말을 쓸 때 피차 사이가 불편하던 두 사람을 화합하게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화해는 입장을 완전히 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흠정역 로마서 5:11에 "대속"{"화목"(개역성경) : [역주]}(atonement)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실상은 "화해"를 가리키는 헬라어 명사를 영어로 옮긴 것입니다. 10절을 보게되면 이 단어의 동사형은 "화목되었다"로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대속"은 신학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사역에 대해 일반적으로 쓰고 있는 용어이지만 신약에서는 단 한 번 쓰일 뿐입니다(그리고 바로 이때도 "화해"라는 뜻의 단어를 쓸 자리에 잘못 들어가 있는 경우입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죄를 "덮는다"는 개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둘 것 같으면 대속이라는 용어를 써도 하등 문제가 없습니다. 화목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적대적인 위치에서 다정한 관계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인해 얻어진 이 화해에는 잠정적인 측면과 실제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잠정적인 측면에서 온 세상은 하나님과 화목되었습니다(고후5:14,15, 19). 이것은 세상이 지금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지금 구원받은 상태라거나 온 세상이 구원받게 되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온 세상이 구원받을 수 있는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실제적인 화목은 고린도후서5:20에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과 화해를 하게 될 때 모든 것이 새롭게 되며 그의 지위 또한 "아담 안"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바뀌고 죄에서 의로 옮기게 됩니다. 죄에 대한 대가는 지불되고 새로운 피조물이 존재하게 되며, 믿는 자는 구원을 받은 자가 됩니다. 하늘에 속한 것들, 곧 보좌들과 정사들과 권세들도 화목되었다는 것 또한 주목하시기 바랍니다(골1:16,20).

 

택정하심

택정은 문자적으로 "선택하는 것", "골라내는 것" 또는 "정하는 것"으로서 성경의 가장 어려운 가르침들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도를 깨달을 의무는 없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비록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을 택하기 전에,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그 사람들을 골라내셨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이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사람의 "선택"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유의지의 갖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구원받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선택하사 구원받게 하신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구원받을 자격을 갖춘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주시기 위해 선택하셨습니다(요6:37).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누가 잃어버린 자가 되기로 택함을 받았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불못은 마귀와 그 천사들을 위해 예비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그곳에 "보내시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지옥에 가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9장은 선택에 대한 대표적인 말씀이지만,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에 대한 말씀은 아닙니다. 여기서 천사들, 이스라엘, 또 그리스도까지도 모두 "택함받은 자"로 말씀하고 있습니다(딤전5:21, 사45:3-4, 벧전2:6). 그리스도인들이 택함을 받은 자들이라고 불리우고 있는 곳은 롬8:33, 골3:12, 벧전1:2입니다. 아무도 구원받을 자격을 갖춘 이가 없기 때문에, 설사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은 구원받게 하시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대로 두신다고 해도 이는 부당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지 못하는 그 사람들은 자기 의지로 복음을 거절한 사람들로서 책임을 지닌 존재들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목적을 갖고 있다고 믿는 자들에게는 그 "택하심"이 격려가 됩니다. 택함받았다는 것은 섬김의 동기가 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택이 하나님의 주권을 높인다는 것입니다. 택하심에 대해 이해하기 힘들면 성구사전의 도움을 받아 "택함", "선택", "예정" 등의 낱말들을 상고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정은 미리 정하심(롬8:29)과 양자 삼으심(엡1:5,11) 보다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부르심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롬8:30). 부르심의 수단은 복음입니다(살후2:14).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자기에게 모으시는 행위를 말합니다. 부르심에는 일반적인 면과 실제적인 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부르심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오라고 초청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것"과 관계 있습니다(요12:32). 많은 사람들은 누구든지 오라는 이 일반적인 부르심을 거절하고 있는데 반드시 그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히12:25). 실제적인 부르심은 확실한 구원을 얻게 합니다. 이것은 요한복음6:37,44에 나오는 "이끄심"과 관계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드님에게 주신 사람들은 틀림없이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분을 영접하게 됩니다. 어느 누구도 복음을 받아들이라는 강요를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택함을 받은 자들은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영광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기에, 이들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롬8:39). 부르시는 분은 분명히 이 일을 하실 것입니다(살전5:24).
부르심의 결과는 확실하지만 그 방법은 복음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전도해야만 합니다.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자연과 양심, 또 오래 전부터 알려진 진리 중 일부 남은 것들(많은 오류 가운데서도 조상때로부터 보존되어진 많은 문화)로부터 받은 빛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온 세상의 심판자는 이런 이교도 백성들에 대해서 공정하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의 책임은 많은 복음적인 교회와 기독교 라디오 방송과 기독문서 등이 있는 나라에서 그리스도를 배척한 사람들의 책임보다 훨씬 적을 것입니다.

 

죄를 책망하시는 성령님의 역사

성령님의 역사가 없으면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그대로, 육에 속한 채로 있다면 이 사람은 죄 가운데서 죽은 자이며(엡2:1-3), 사단에 의해 눈먼 자입니다(고후4:3,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며(고전2:14) 이들 중 단 한 사람도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롬3:10-18). 기도를 해주거나 복음을 전하지는 않고 그저 믿으라고 압박만 가했을 경우 결국 사람들이 구원받았다고 고백은 합니다만 실제는 아무것도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성령님은 오늘날 전 세계의 죄인들에게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책망하는 일을 하시고 계십니다(요16:8). 이렇게 책망을 듣고 죄를 깨달은 죄인들이 반드시 그 깨달음을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습니다만 아무튼 자기들의 죄가 무엇인지는 인식하게 됩니다. 맨 먼저 죄인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다는 이 큰 죄에 대해 책망을 받습니다(요16:9). 다음에는 의에 대해 책망을 받는데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가시기 때문입니다(10절).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이 그분의 의를 입증한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그리스도는 죄인처럼 저주받은 나무 위에서 죽으셨지만 무죄하신 분이셨습니다). 즉, 그리스도는 영광의 몸을 입은 분으로서 의의 표준이 되십니다. 10절의 이 말은 또 그리스도께서 땅에 계실 때 사람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는 일을 하셨으나 지금은 성령님께서 이 일을 계속하시고 있다는 뜻인 것으로 보입니다. 세번째로 사람들은 심판에 대해 책망을 받습니다(11절). 이것은 십자가에서 사단에 대한 심판을 가리킵니다. 죄의 주모자가 그렇게 심판받았다면 그를 따르는 자들도 그가 만들어 놓은 세상의 제도에 참여한 것에 대해 심판을 받을 것이 틀림없습니다(자기가 사단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 사람들이 알았는지 여부는 관계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실제적인 교훈은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해 이러한 책망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제대로 살지 않는다면 죄를 책망하는 성령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조건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이것이 구원의 "조건들"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온갖 행위와 의식(儀式)들을 이 단순한 복음에 더해보려고 갖은 애를 써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덧붙여본들 결국 구원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요 아무것도 더할 게 없다는 사실만 부각될 뿐입니다(엡2:8). 회개는 믿음의 일부입니다. 과거에 대해 마음이 전혀 바뀌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믿는다거나 믿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단지 마음을 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이 회개하면 감정의 변화가 아울러 따르기도 합니다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회개할 때 울어야 되고 통성기도를 해야한다는 생각은 사실적인 근거나,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입으로 고백하는 것, 물 침례를 받는 것, 그리스도의 주재권과 또 그 외 여러 가지를 구원의 일부로 삼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구원받으면 나타나는 합당한 결과이긴 하지만 오직 믿음 하나만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구원을 주시는 통로가 됩니다. 이것 외에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믿음"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보통 내리는 정의는 "다른 사람이 선언한 것에 마음으로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을 구원하는 믿음에는 그저 동의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많은 것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사랑을 나타내셨고 그리스도인들은 이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해줄 때, 만일 듣는 자가 머리로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이 복음을 믿으면 그에게는 믿음이 생깁니다. 신뢰, 확신,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쉬는 것 등은 믿음이 가진 여러 면모들인 것입니다. 믿음은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내미는 마음의 손입니다. 오직 성령님께서만 사람에게 참된 믿음을 주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심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취하시고 사람은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납니다(읽는 것도 포함함; 롬10:17).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 대해 증거하신 것에 기초한 것입니다(요일5:7-9). 복음을 말하거나 설교할 때 우리는 듣는 이에게 그들의 믿음을 맡길 수 있는 어떤 것,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해주어야만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인품을 통해 죄를 책망하시기보다 오히려 말씀 그 자체를 통해서 하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특권은 바로 "말씀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이는 꼭 강단에서가 아니더라도 일상생활에서 분명히 누릴 수 있는 특권인 것입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맡기신 일, 즉 우리 죄인들을 위한 대속물로, 죄에 대한 구속으로, 하나님께 대한 화목제물로, 사람을 위한 화목으로, 자신을 드리신 사역을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십자가 위에서 이루셨는지 보았습니다. 또한, 이러한 드리심이 성령님의 책망을 듣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효과를 나타내는가도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인들이 그 아들을 믿을 때 성부께서 어떻게 죄인들을 구원하시는지, 즉 위대한 구원사역 안에서 삼위이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하시는 완전한 사역에 대해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이미 우리는 구원론에서, 구원이 그저 지옥에서 벗어나는 "비상구" 이상의 것임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이와 같은 사실에 훨씬 더 큰 증거를 더해줄 것입니다. 췌이퍼(L.S.Chafer) 박사는 죄인이 믿는 순간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해주시는 일 서른 세 가지를 목록으로 만들어서 설명하였습니다!(췌이퍼의 조직신학 제3권 "하나님 은혜의 부요함"). 여기서는 그중 몇 가지만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칭의(稱義:justification).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교리 중 하나입니다. 무엇인가를 없애주는 용서는 소극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믿는 자에게 무엇을 더해주는 칭의는 적극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십니다(롬4:5). 이 말은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 믿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자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는 뜻입니다. 의롭다하심은 의롭게 만든다거나 현재 의로운 상태라는 것이 아니며 법적인 의미에서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의롭다" 와 "옳다"는 분명히 같은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가 됩니다"(롬3:24). 칭의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루신 구속을 그 기초로 합니다. 갈라디아서에도 칭의에 대한 가르침이 많이 나오긴 합니다만, 로마서가 칭의 교리에 대한 대표적인 책입니다. 로마서는 어떻게, 어떤 수단에 의해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인지 말씀해줍니다. 이것은 은혜로 말미암습니다(3:24). 곧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에 의해서입니다. 이것은 또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5:1). 곧 하나님의 베푸시는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는 피로 말미암습니다(5:9). 곧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치르신 값입니다. 또 칭의는 의로 말미암는데(5:18,19) 곧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순종하신 것입니다. 의롭다하심을 얻은 결과로서 로마서에 나와 있는 것들은 화평(사32:17, 롬5:1), 정죄로부터 벗어남(롬8:33,34), 후사가 됨(딛3:7, 롬8:17), 영화롭게 됨(롬8:30)입니다.
야고보서2:21,25에 묘사되어 있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의롭게 됨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보기에 의롭다고 여겨지는 것이며, 오직 경건으로 일관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때에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의 의롭다함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는 오직 행위와 관계없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하심을 받은 후에라야 가능합니다.

중생(重生:regeneration).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것을 "영적으로 죽었다"고 봅니다. 이는 죄의 결과입니다(엡2:1). 이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은 아담이 가졌던 것과 똑같은 육에 속한 생명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 생명은 지구에서, 또 특별한 조건을 갖추면 우주에서 사는 데도 적합할 수도 있지만, 천국에서 살기에는 전혀 적합지 않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거듭납니다(요3:5, 벧전1:22). 우리는 혈통으로나(자연적인 출생), 육정으로나(스스로의 결심이나 스스로의 노력), 사람의 뜻에 의해서(누군가 다른 사람의 행위에 의해, 가령 제사장의 중보나 침례) 하나님의 자녀로 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이러한 권세를 얻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 이름을 믿음으로써 얻습니다(요1:12,13).
거듭남에 의해 우리는 거듭나고 새 생명을 얻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옛 것은 지나가고 모든 것이 새 것으로 됩니다(고후5:17). 우리는 새 사람을 입습니다(골3:10). 우리는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할 수 있고 또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후사들이며(갈4:7), 그리스도와 더불어 유업을 받을 자들입니다(롬8:17). 유업을 이을 자로서 우리는 아버지의 징계를 받게 되는데 이런 징계는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위해 베푸시는 것입니다(히12:6).


이제 요약해 보면 거듭남, 즉 두 번 나는 것은 영생을 나누어받는 것이며 이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중생한 사람만이 구원을 받은 것이며 오직 하나님만 우리를 거듭나게 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목적은 우리로 그 지으신 피조물 가운데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려 하심이며(약1:18), 유업을 이을 자가 되게 하고(벧전1:3,4) 선한 일을 행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엡2:10).

 

양자(養子:adoption). 이 용어는 바울의 서신에만 나옵니다. 이 용어를 오늘날 친자식이 아닌 아이들을 자기 아이로 삼는 "입양"한다고 하는 것과 절대 혼동해서 안되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거듭난 자기 자녀들에 대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업을 이을 모든 권리를 가진 자녀들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속해 있는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양자가 되는 것도 구원받는 순간 얻게 되며, 이는 믿는 자가 이 교리에 대해 알든지 모르든지 상관없이 되는 것입니다(마치 훌륭한 집에 새로 태어난 아이가 그 스스로 알지 못하더라도, 육체적으로 태어난 순간부터 그 이후까지 출생으로 인한 모든 혜택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이른 바 "제2의 은총"이 아닙니다. 우리가 거듭날 때 자녀가 되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는 우리의 이와 같은 신분이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양자의 영을 소유하고 있지만 이것이 완전히 드러나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롬8:15,23).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는 증거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롬8:14), 세상과 분리되는 것(고후6:14-18), 이기는 삶(계21:7), 그리고 아버지의 징계하심이 있습니다(히12:6-8).

 

성화(聖化:sanctification). 성화에는 매일 실제로 거룩하게 되어가는 것과 또 구원받을 때 얻는 지위 상의 거룩함이 있습니다.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해 따로 구별되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분리(구별)된다는 것입니다. 과거를 볼 때 신자는 죄의 형벌로부터 분리되었고, 현재는 죄의 권세로부터 분리가 되었고, 미래에는 죄의 존재로부터 분리됩니다. 이 분리가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기초는 모든 믿는 자가 하나님의 "성도"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이러한 신분에 맞게 살아야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순서를 바꿔놓고 말하기를 "지금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나중에 가면 성자라고 불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10:10-14은 이 신분상의 성화는 단번에 완전히 주어진 것이며 다시 반복할 수도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거룩함은 절대적입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거룩함이 되시기 때문입니다(고전1:30). 모든 믿는 자는 구원받는 그 순간에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그리고 영원히 구별(거룩하게)되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믿는 사람 각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점점 더 "거룩하게 될(죄에서 분리될)" 의무가 있습니다(요17:17, 벧전1:15,16).

 

용서(forgiveness). 칭의는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의를 인정받는 것입니다. 반면에 용서는 죄로부터 풀려나는 것이요, 불의가 우리에게서 제하여지는 것입니다. 이 교리는 우리 일상 생활에서 그와 상응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습니다. 예를 들면 곧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신분적인 면에서 볼 때 용서는 우리가 믿을 때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엡1:7, 4:32, 골1:14, 3:13). 하지만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는 아버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우리가 실패할 때마다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께 우리 죄를 자백해야만 하는 것입니다(요일1:9). 어떤 이들은 자기의 미래의 죄까지도 이미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워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당시에는 우리의 모든 죄가 미래의 것이라는 것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었을 때 우리의 모든 죄는 주님이 다 가져가셨습니다(완전히 용서받았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용서받았기 때문에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엡4:32).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잊어주신 것처럼 잊어버려야 합니다.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8:12). 죄를 용서받은 결과는 큰 기쁨과 평안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감. 이것은 하나님의 존전(尊前)에 들어가는 권리입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무한한 복을 누리게 해줍니다(롬5:2).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한 성령에 의해 아버지의 존전에 나아가게 됩니다(엡2:18).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화목케 하시는 역사에 기초하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때 온전한 담대함이 뒤따르게 됩니다(엡3:12, 히4:16, 10:19,20).

 

율법으로부터 해방됨. 율법은 경건치 않은 자들을 제어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딤전1:9), 결코 구원의 길이 아니었는데, 이 점은 구약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은혜 아래에서도 규범이 있지만(신약성경은 계명으로 가득 차 있지만 불순종에 대한 형벌을 정하는 법조항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일상생활규칙과 같은 법 아래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롬8:2). 즉 우리는 율법에 대해 죽었으며(롬7:4) 또한 율법으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롬7:6). 이 모든 것이 우리가 구원받을 때 일어났으며 이때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역의 다른 부분들도 더불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거룩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을 나타내는 말씀으로 모세의 윱법을 존중하지만, 은혜는 율법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삶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확신(Assurance)과 안전(Security)

신약에서 가장 큰 위안을 주는 교리 중 하나는 사람이 일단 구원받으면 다시는 잃어버린 바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금" 구원받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확신입니다. 또 자기가 "영원토록" 구원받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안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자는 가지고 있지만 후자는 불가능하다거나 혹은 받기엔 너무 염치없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불행하게도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이 진리에 대한 문제들의 대부분은 잘못된 가르침, 타고난 두려움, 그리고 구원이 정말 무엇인지 오해하고 있는 것들로부터 생깁니다.

확신에 대해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요일5:13, 3:1과 요3:36, 5:24을 주의해서 상고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들은 확신에 대한 유명한 구절 중 일부입니다. 물론 더 있습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주로 확신을 얻게 됩니다. 우리 구원의 기초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입니다만, 우리 확신의 기초는 하나님께서 그렇다고 친히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나 보내신 이를 믿는…").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시거나 마음을 바꾸실 수가 없는 분입니다.
구원의 또 다른 두 가지 증거로 그리스도인의 체험과 성령님의 내적인 증거입니다. 체험은 우리의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우리 감정은 날씨와 건강과 환경에 따라 변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깊이 의식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만일 누군가 가진 교리가 잘못되었다든지 혹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떠나서 살고 있다면 물론 그가 겪는 체험은 별로 격려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체험에는 형제 사랑과(요일3:14, 롬8:29), 성경을 이해하고 간절히 사모하는 것(고전2:14), 죄에 대해 책망을 받는 것(요일1:5-10, 3:7-14), 착한 행실(약2:14-16),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임을 의식하는 것(마11:27)과 자기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를 의식하는 것(고후13:5),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 믿음을 다른 사람들도 함께 가지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것 등이 들어갑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서 하시는 사역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케 하는 것과(롬5:5), 우리를 인도하는 것과(롬8:14), 우리에게 증거하시는 것(롬8:16)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회심할 때 느낀 감정이나 우리가 들은 설교방식이 나 또는 우리가 복음을 완전히 이해했는가 보다는,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 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얻는 구원의 복음을 믿었습니까? 우리가 믿음의 손을 내밀어 주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로서 구원을 받았습니까? 만일 그렇게 했다면 우리는 구원받았다는 절대적인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영원한 안전에 대해 상고해 보겠습니다. 지금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고 새 생명의 증거들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의문을 아직도 갖고 있습니다. 곧 "진실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혹 그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나?"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타락한 사람"은 구원을 잃고 지옥에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무조건적인 영생을 확신한다면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계속 죄를 지으며 살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 자녀를 징계하시되 때로 죽게도 하시며 이렇게 하심으로써 자기 자녀들의 죄를 다루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부정한 자와 호색하는 자는 다만 거짓 신자요 십자가의 원수일 뿐입니다(엡5:5,6, 빌3:18,19).
성경은 안전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할까요? 요10:27,28과 벧전1:5, 요11:26, 딤후1:12, 히7:25, 유24절을 읽어보십시오. 이 구절들 중 맨 마지막 말씀에 나오는 "능히… 하실 자"라는 부분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안전의 참된 열쇠입니다. 신자들은 그 믿음 가운데서 인내해야 됩니다. 신자는 실제로 이렇게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를 보존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내의 이러한 양면성은 빌2:12,13에서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끝까지 인내함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은(수학문제 풀이처럼)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디모데후서2:19에서도 말씀하기를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악에서 떠나야 합니다(사람 편에서). 이는 주께서 자기 백성들이 누구인지 아시기 때문입니다(하나님 편에서).
사람이 일단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고 가르쳐 주는 다른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만일 구원이 조건적이라면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조차도 모순이 되고 말 것입니다. 로마서8:31-39은 네 가지 수사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과 더불어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답도 제시하고 있으며 이 모두는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다른 구절들로는 요6:37,39, 롬11:29, 고전1:8,9, 빌1:6, 엡4:30이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이 일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이것은 문맥을 무시한 채 그 구절들만 따로 떼어 이해할 때 생기는 오해일 따름입니다.
마태복음24:13은 흔히 그 문맥을 무시한 채 인용하여 교회시대에 대해서 잘못 적용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구원받은"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건짐받은"이란 단어와 동일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들이 자행하는 대학살과 환난을 견디어내는 유대인들이 건져내어질 것이라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정말 믿는 자들임을 나타내는 것은 바로 그들이 "끝까지 견디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에스겔 33:7,8을 써서 만일 우리가 잃어버린 바 된 영혼들에게 경고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의 영혼도 잃어버리고 말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이스라엘을 경고하라고 선지자 에스겔에게 가르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교회에게 말씀하는 것도 아니며, 에스겔이 자기 영혼의 구원을 잃게 될 것이란 말씀도 아닙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잃어버린 바 된 영혼들에게 경고해야 되지만, 에스겔서가 그렇게 해야할 증거를 담고 있는 책은 아닙니다!
디모데전서4:1,2은 배도자들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믿는다고 거짓으로 고백하지만 실제로 거듭난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구절에서 "그 믿음"이라 한 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개인적인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배도자들에게는 이 개인적인 믿음이 없음), 기독교인다운 신앙을 가리키는 것임을 주목하십시오.
베드로후서2:1-22에 나오는 거짓 교사들은 단지 잠정적인 측면에서만 사신 바 되었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이 사람들이 실제로 거듭난 적이 있었는지 전혀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이 개들이라고 불리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먼저 이들이 부정한 이방인임을 보여줍니다.
믿는 자의 영원한 안전을 부인하고 있다고 제시되는 많은 구절들이 사실은 단지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나 개심(改心)한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으며 이들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13:1-8은 넘어지는 자들에 대한 예를 들고 있지만 이들이 진짜 구원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말씀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15:1,2와 히3:6에 있는 굳게 지키는 것이 구원받았다는 증거이기는 하지만 구원받는 조건은 아닙니다.
요15:6은(어떤 사람들에게) 가지가 제하여져서 잃어버린 바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리스도는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제자들에게 열매 맺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지 구원에 대해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가지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열매맺는 자리에서 쫓겨나 던지우게 됩니다.
히브리서6:1-8은 믿는 자들이 구원으로부터 "떨어져서" 잃어버린 바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데 흔히 사용되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히브리서 전체의 맥락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이 서신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지 얼마 되지 않아 유대 배경을 가진 신자들에게 쓴 것이며 몇 가지 매우 특별한 권면과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이 서신은 믿는 자들에게 유대교의 의식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실재성 속에서 성장하라는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히6:1-3). 이 서신에는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거짓으로 고백하는 유대인들에게 주는 매우 심한 경고도 몇 가지 들어 있습니다(히2:1-3, 3:7-13, 6:4-8, 10:26-31). 이런 사람들은 지적으로는 복음의 비췸을 얻었습니다(그러나 영적으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고, 겉으로는 성령에 참여하였으며,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능력 있는 역사와 이적들)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영적인 기회를 가졌으면서도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복 받기를 거부하고 유대교의 죽은 의식으로 돌아가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이런 사람들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모든 것을 주셨지만 이들은 의도적으로 자기들에게 베풀어진 기회의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간에 서서 이들은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쪽을 택했으며 그리하여 현저하게 그리스도를 욕보였습니다(히6:6 하반절).
이 구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에게 적용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날 기독교를 연구하고 자기 주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목도(目睹)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리스도를 거부하기로 결심을 굳히고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더 이상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영원한 심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갈라디아서5:4은 "은혜에서 떨어지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은혜로 사는 고차원적인 삶에서 율법주의라는 열등한 삶의 원리로 추락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떨어진다"는 말에 들어있는 개념은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골1:21-23이나 고전9:27, 그리고 요13:8과 같은 구절들도 가끔 이것과 관련해 인용되기도 합니다만, 사실 이 구절들은 믿는 자들이 상급을 잃어버리거나 아니면 교제가 끊어지게 되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각 위께서 지니신 속성과 하시는 일이 영원하고 확실한 구원을 보장해주고 있습니다. 구원의 성격 자체가 영원한 안전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 구원은 근원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택정받은 것과 연관이 있으며 또한 이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슨 내세울 것이 있어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무슨 부끄러운 점이 있다고 해서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은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요19:30).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안전을 주신 것은 그분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일에 분발케 하기 위함이며(유24,25: 벧전1:3-5),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자극제로서(엡4:30, 시55:23), 또 그분을 섬기려는 동기가 일어나게 하려고 주신 것임을 친히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고전15:58). 우리의 영혼과 섬김에 대한 상급은 안전합니다. 우리는 "결코 멸망치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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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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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란 무엇인가?

 

 

 

고경태

 

기독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섬기는 종교입니다. 한국에서도 20%의 인구를 점유한 유력한 종교(불교, 유교와 더불어)입니다. 본 내용은 기독교에 대한 기초적인 소개를 위한 글로써 전도를 목적으로 하였습니다.

 

기독교는 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기독교는 많은 분파들이 있습니다. 기본적인 구분으로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서방교회는 로마캐토릭(구교)과 개신교(신교)이며, 동방교회는 그리스, 러시아, 시리아 정교회라고 합니다. 세계적으로 로마캐토릭이 가장 광범위한 영역(유럽, 남아메리카)을 갖고 있고, 동방교회는 그리스, 러시아의 지역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개신교는 미국에서는 침례교, 영국에서는 영국국교회(성공회)와 스코틀랜드 장로교, 독일은 루터 교회, 네델란드는 개혁파의 분파가 주도하고 있습니다. 영국에서 감리교, 구세군가 많은 분파가 발생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장로교”가 가장 큰 분파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분파의 총합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基督敎)는 “기독(基督)의 종교(宗敎)”라는 뜻입니다. 기독은 ‘그리스도’에 대한 중국의 번역으로 우리에게 소개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야소(耶蘇) 기독(基督)’으로 번역되었고, ‘야소’는 ‘예수’로 바뀌었지만 ‘기독’은 ‘그리스도’와 함께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국 선교 초기에는 “야소교(耶蘇敎)”로 소개되었다가 점차 ‘기독교’로 통합된 것으로 보입니다. ‘야소교’는 ‘예수교’입니다. ‘예수교’와 ‘그리스도교’는 동일한 종교인데 한국의 통상어가 ‘기독교’가 되었고, 영어도 ‘Christianity’로 됩니다. 한국 장로교의 역사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명칭이 가장 먼저 형성되었습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종교(Religion of Christ)” 혹은 예수의 종교(Religion of Jesus)입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가진 분파의 총칭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다를 때에는 이단이 됩니다. 다양한 분파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에 대한 강조와 적용하는가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방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종교임으로, 그리스도로부터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그 순간 기독교가 되지 못합니다.

 

1. 인간에게 주어진 종교의 필연성

 

인간은 동물과 다른 많은 특징들이 있습니다. 언어, 유머, 창조성 등 그중에서도 ‘종교’는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입니다. 칼빈은 ‘종교의 씨앗’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근거 종교성을 제시했습니다. 종교는 모든 인간이 갖고 있습니다. 무종교도 종교의 일환이며, 무신론자도 신개념을 전제함으로 종교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입니다.

21세기 최첨단 과학 시대에 종교가 과학 아래로 서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종교가 세상을 결정합니다. 천동설과 지동설도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비도 종교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현재에도 여전히 미신적인 제사 행위는 계속되며, 혹은 증가하기도 하였습니다. 과학이 만연된 사회에 오히려 미신이 증가하는 것은 진정한 종교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반 종교는 평안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구원과 영생을 목표하는 종교입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 여러 종교를 추구하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죄사함이 없는 상태, 영생의 소망이 없는 상태에서는 참된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칼 맑스는 종교를 아편으로 주장하였습니다. 임시적으로 주어진 평안은 아편과 같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구원(죄사함)과 영생은 참 평안을 줍니다(요한 4:14).

 

2. 종교: 미신(거짓 믿음)과 복음(참된 믿음)

 

최첨단의 과학시대, 인터넷, 정보시대가 도래했는데 주변에는 점집이 계속해서 증가합니다. 궃, 당산제 등은 전통문화로 채색되어 우리의 주변을 범람하고 있습니다. 서양에서도 점이 성행하며 신비주의 종교가 범람합니다. 왜 사라져가던 미신 행위가 다시 우리 생활로 들어올까요? 미신은 불안을 증폭시키며 공포를 조장하고 제거하는 척하는, -병주고 약주는- 형태입니다. 불안이 증폭된 현 세대에서 쉬운 해결방법과 위로를 얻으려는 조급함이 미신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기복신앙으로 불리는 것도 일종의 미신입니다. 즉 자기의 안녕과 유익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주어지는 구원과 영생입니다. 값진 진주를 사기 위해서 모든 재산을 팔 수 있으며, 진리를 위해서라면 이익뿐만 아니라 생명도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신과 신앙이 다릅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철학과도 구별됩니다. 철학은 사상의 총합으로 진리를 추구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진리는 허무에 빠지게 됩니다. 현대철학은 불가지론, 허무주의로 귀결되었습니다. 기독교만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배하고, 자기 자신을 명확하게 성찰할 수 있습니다.

 

3. 종교: 과학(가설과 불확실) VS 믿음(정직한 이성)

 

이 시대의 시금석은 ‘과학에 근거한 합리성’입니다. 그렇다면 과학은 무엇입니까? 국어사전에는 “과학(科學)어떤 영역의 대상을 객관적인 방법으로, 계통적으로 연구하는 활동, 또는 그 성과의 내용.”으로 제시합니다. 객관성을 얻기 위해서 실험과 증명이 필요합니다. 실험과 증명으로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매우 적은 사항에 대해서만 증명되었지 실험에 의해서 증명된 사항은 많지 않습니다. 또한 기본 단위들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원주률(π)도 ‘3.14’라고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지구의 중력(g)도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과학은 오차를 인정합니다. 과학은 진리와 양심의 시금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최첨단의 과학 시대로 정평된 지금에 오히려 윤리가 강조되며, IQ에 부가되어, EQ. SQ(Social, Spirit) 등 다양한 지수들이 등장합니다. 과학과 윤리는 인간의 고안물로서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계가 명확하게 인정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집 센 인간은 한계에 대해서 절대로 인정도 물러서지도 않습니다.

기독교는 믿음으로 진리를 증명하는 체계입니다. 과학은 시대가 변하면서 바뀌고 바뀔 수 있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고 변할 수 없습니다.

 

4. 기독교 복음(福音)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의 시작입니다(마가 1:1). 보통 복음을 “좋은 소식, 기쁜 소식(good news)”라고 문자적으로 이해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주님에 대한 소식을 복음이라고 이해했지만, 그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과 사역으로 이해(Sola Christus)해야 합니다.

복음은 죄인을 의인으로 세워주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롬 1:17). 복음은 죄인이 의인이 되는 하나님의 구속 경륜에 대한 선포입니다. 복음은 죄인을 구속하시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 영원한 인격과 지상의 공생애 3년의 사역, 승천과 통치입니다. 복음은 인간적 산물이 아니기 때문에 비록 인간 방법과 언어로 제시되었다할지라도,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오직 믿음(Sola Fide)으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 복음으로 죄사함의 신비를 믿어 새 생명의 기쁨과 능력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복음으로 영생의 소망을 갖게 됩니다.

 

5. 기독교의 신(神) 명칭: ‘하나님’과 ‘하느님’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신 명칭이 ‘하나님’이냐? ‘하느님’이냐?라는 의견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느님’은 ‘신(神)’과 동일합니다. 초기 한국 선교에서는 하나님을 ‘천부(天父)’, ‘상제(上帝)’등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영어에서는 ‘God’와 ‘god’로 구별하지만, 독일어에서는 ‘Gott’와 ‘Gott’로 동일합니다. 한국에서는 ‘신(神)’으로 ‘하느님’으로 부르지만, 기독교 교회에서만큼은 ‘하나님’으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안에서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하느님’으로 전환하였고, 기독교 진보 진영에서 ‘하느님’으로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한국 기독교의 아름다운 일 중 하나는 독자적인 신명(神名)을 창출한 것입니다. 어느 나라에서도 자신의 신의 이름을 창출한 종교가 없고 기존에서 사용한 신의 이름을 부과했습니다. 아랍권에서 기독교 진영에서 ‘알라’라는 신명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주장한다고 합니다. God, Gott, 알라까지도 자신의 신(神) 개념을 만들지 못했지만(인도네시아는 자국어로 성경을 편찬하지 못하도록 금지), 우리나라에서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구별하여 기존의 신, 토속신과 다른 유일하신 신(神)을 고백하는 고귀한 일을 하였습니다.

 

6.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

 

신(神) 존재에 대한 인정은 인간의 죄성을 인정하는 것과 동일하게 인류의 보편적인 성향입니다(롬 1:19-20). 칼빈은 인류에게 있는 미신 숭배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제시합니다. 아무리 인간이 신(神)을 부정하려고 해도 인류는 부정하지 못했습니다. 본래적으로 참 신(神)을 섬기는 것은 자연이성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성경은 죄 아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제시합니다. 그리고 알려고 하지도 않으며, 혹여 알수있다할지라도 거부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이기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명확히 아는 것은 절대적인 일입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정당한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7. 인간의 죄된 본성

 

인간에 대해서 긍정적이고 완전한 상태로 평가한 종교, 혹은 철학 그리고 과학은 없습니다. 모든 종교, 윤리, 철학에서 인간은 항상 연약하며, 부족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인간 이해의 독특함은 “죄(罪)”로 규정하며, 생래적인 죄(원죄)로 이해합니다. 연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면서도 해결할 수 있는 완전한 방법을 제시하는 종교나 철학은 없습니다.

인간 심리에 대한 연구가 100년 이상 전개되었지만, 결국 알 수 없음으로 규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정신병, 우울증 등을 치료하기 위해서 물리적으로 치료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죄의 해결을 제시합니다. 죄가 가리 울 때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자기 자신도 그리고 이웃 인간 그리고 피조물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제시하는 죄의 해결은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8. 인간의 본성의 회복

 

성경은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롬 3장) 규정합니다. 많은 종교들은 사람을 죄인으로 규정하지 않고, 무한 가능성을 내재한 존재 혹은 하나님의 자원을 받을 수 있는 존재로 규정합니다. 종교들은 명확히 문제를 지시하지도 해결 방법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죄가 있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가능성도 없는 것으로 규정합니다(롬 3:11, 롬3:23). 인간을 철저하게 부패한 죄인으로 규정하는 것은 진단에 대한 치료책이 있기 때문입니다(마 9:12, 막 2:17).

인간의 죄된 본성의 치료자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구속주로 이 땅에 오셔서 치료의 방법을 보여주셨습니다. 구속주께서는 속죄 제물로 자기의 몸을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치료(의의 수여의 근거 확립)하였습니다. 치료를 받은 사람(속죄의 믿음)은 건강한 삶을 영원한 통치자와 살게 됩니다(화해). 인류의 유일한 구속주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롬 10:13).

 

9.구속주 예수 그리스도

 

도입에서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치료하여 회복시키는 의사(치료자)로서 구속주이십니다. 예수께서 구속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성육신하셔서 구속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첫째, 치료의 방법으로 구속 사역을 하셨습니다. 아담의 죄악을 치료하시기 위한 구속 사역은 성육신과 십자가에서 속죄 제사로 이루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몸소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속죄 제사를 완성하셔, 누구든지 예수의 구속 사역을 믿는 자에게는 회복의 길(속죄=칭의)을 열었습니다. 이 속죄 제사는 구약 성경(특히 레위기)에 예표 되어 있습니다.

둘째, 치료의 방법은 믿음의 백성들을 다스리심으로 완전한 회복(성화=화해)을 성취하십니다. 십자가와 부활 후에 승천하신 주(主)께서 성령을 교회에 보내심으로 백성의 다스리심을 확정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 백성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아, 주와 함께 연합하게 됩니다.

 

10.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머리

 

영원한 하나님의 경륜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복음의 가르침을 통하여 가장 큰 자로부터 가장 작은 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류를 자기와 연합함으로 한 자신의 나라(그리스도의 왕국)를 창설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유일한 제사장으로서 자신의 몸을 죽음의 속죄 제사를 드림으로 아버지의 노하심을 녹이셨는데, 그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계속해서 깨끗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의 피는 우리들의 죄의 영원한 속죄 행위이며 우리들에게 유일하게 주어진 죄 씻는 정결의 수단입니다.

그의 순종은 우리들의 완전한 화해이라는 것이고, 그는 우리들의 기도가 그의 은혜로 인하여 가납(嘉納)되게 하는 유일한 도고이십니다. 그는 우리들을 보호 아래 감싸 주시는 신실한 우리의 보호자가 되신다는 사실이며, 우리들의 육신의 죄를 제어하여 의와 거룩한 것으로 우리를 다시 지으시고, 그 자신만이 우리 안에서 복된 삶을 시작하시고 완성하신다는 사실입니다. - 칼빈의 사도행전 주석 헌사에서 발췌 - 신약성경의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의 천상 통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1. 죄사함

 

기독교는 죄사함의 종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오신 구세주(그리스도)입니다. 작금의 종교들은 죄사함이 아닌, 마음의 평화, 기쁨을 추구합니다. 종교의 목적이 마음의 평안과 위로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합니다. 즉 마음의 평안과 위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죄사함과 영생입니다. 기독교에 죄사함이 없는 마음의 평안은 위선입니다. 맑스는 종교를 ‘아편’이라고 평가했는데 타당성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아편을 취급하지 않고, 생명을 취급합니다. 맑스의 제자들이 아편을 제거하려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인간 본성에 뿌리박힌 종교심은 제거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인류의 종교는 마음의 평안을 추구함이 총합이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죄사함을 통한 평안과 위로를 추구합니다.

이 죄사함의 근거가 예수님께서 피 흘리시고 죽으신 십자가의 죽음과 천상에 계신 예수님께서 마치 사도 바울을 부른 것처럼 자기 백성을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12. 그리스도인의 삶(성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 즉 죄사함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죄사함은 사람을 아는 지식을 정당하게 세울 수 있으며,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게 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속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셔서 삶을 영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성령으로 삽니다. 성령의 삶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항상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삽니다. 천상에 계신 그리스도와 연합을 믿습니다.

둘째, 성령의 은사로 자기의 소명을 이루어 갑니다. 죄사함은 동일하지만, 은사는 다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적인 은사를 받았음으로 개발, 활용해야 합니다.

셋째, 그리스도인의 삶은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넷째,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도의 삶입니다.

 

 

13. 기독교 - 그리스도인의 모임 = 교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항상 공동체를 만들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은 처음 시작이 120명, 교회에서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혼자서 사역하지 않으시고, 12명, 70명의 제자를 두어 공동체를 형성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만드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며, 교회는 구원의 표징으로 필수적이며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를 떠난 그리스도인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도는 각 지체들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성도들은 머리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지체들입니다. 이 교회는 성경 위에 설립되어지며, 성경으로 운영되는 말씀 공동체입니다. 말씀의 권위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없습니다. 둘째, 교회는 교제하는 공동체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성도를 더욱 성도답게 만들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합니다. 셋째, 성례(세례와 성찬)를 거행하는 모임입니다. 교회의 회중은 어쩌면 성례를 거행하기 이한 모임일 수도 있습니다. 넷째, 교회는 기도하는 공동체입니다. 기도는 연결하는 점입니다. 모든 곳에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연결하고, 기도로 끝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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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을 말하다  ( The Lord's Prayer )

 

 

 

 

 

주기도문, 익숙한 데서 벗어나라

 


어거스틴과 루터, 칼뱅처럼 기도를 가르친 위대한 스승들은 그 누구도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기도의 논리를 전개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산상수훈의 골간을 이루는 주기도문(마 6:9-13)을 최고의 본보기로 삼아 거기서 무얼 믿고 훈련할지 뽑아냈다. 루터의 고전적인 편지들도 그렇지만 칼뱅의 [기독교 강요] 역시 예수님이 본보기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한 줄 한 줄 연구하고 분석하는 데 관련된 지면(제20장)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성경적인 주석과 해석학적인 저작들뿐 아니라, 목회적이고 신학적인 글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적어도 한 군데씩은 적잖은 분량을 배정해 주기도문에 대해 설명했다.

 


지금부터 이 위대한 스승들의 사상을 통해 주기도문을 살피면서 기도라는 주제에 관한 그들의 지혜를 온전히 끌어내고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깊이를 더듬어 보려고 한다.

 


주기도문 속에 길이 있다


인류 역사상 주기도문만큼 자주 되풀이되며 입에 오르는 성경 구절이 또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는 풍요로운 기도의 곳간을 여는 열쇠로 이 주기도문을 주셨다. 그런데 그 엄청난 자원이 방치되다시피 하는 데는 지극히 익숙하다는 사실도 한몫하는 듯하다.

 


당신이 난생처음 철길 옆에 사는 지인을 찾아갔다고 생각해 보자. 한가하게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데 갑자기 기차가 굉음을 내며 쏜살같이 달려온다. 앉은 자리를 고작 몇 미터 상관으로 스치듯 지나가는 바람에 기겁을 하고 일어나며 소리친다. "저게 도대체 뭐지?" 하지만 주인인 친구는 되묻는다. "뭐가 뭐야?" 다급하게 대꾸한다. "저 소리 말일세! 난 뭐가 벽을 뚫고 둘어오는 줄 알았어!" 친구는 그제야 태평스럽게 설명한다. "아, 저거? 그냥 기차야. 난 이제 익숙해져서 가는지 오는지 신경도 안 써." 상대는 말문이 막힌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주기도문도 마찬가지다. 온 세상은 신령한 체험을 갈구한다. 예수님은 몇 마디 말을 주셔서 그 도구를 삼게 하신다. 이를테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셈이다. "온 우주를 다스리는 하늘 아버지와 날마다 마주 앉아 그분 앞에 마음을 다 쏟아 놓고 그분이 귀 기울여 듣고 사랑해 주시는 경험을 하고 싶은가?" 우리로서는 두말할 것도 없이 환영이다. "예!" 예수님은 대답하신다. "주기도문 속에 모두 들어 있단다." 우리는 듣도 보도 못한 소리라는 듯 반문한다. "어디 ... 들어 있다고요?" 너무나 익숙해서 거기엔 신경도 쓰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리스천에게 필요한 게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문 안에 다 있다. 어떻게 하면 '익숙함'이라는 치명적인 위험을 피할 수 있을까? 오랜 세월 성찰하고 훈련하면서 주기도문의 깊이를 가늠해 왔던 이 위대한 세 스승의 말을 유념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어떻게 드려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했을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는 부르는 말이고, 사실상 간구는 아니다. 칼뱅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행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설명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자녀로 입양되지 않는 한, 누가 감히 하나님 아들의 영광을 주장할 수 있겠는가?" 루터도 이 구절은 곧장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누려는 의도가 아니라 기도로 진행하기 전에 우선 스스로의 처지를 되새기고 그리스도 안에서 갖게 된 위치를 자각하려는 부름말이라고 보았다. "하나님은 엄중한 심판을 받아 마땅한 우리에게 ... 그분을 아버지로 여기고 또 그렇게 부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고 평안해 하는 믿음을 마음에 심어 주시길" 구하는 것으로 기도를 시작해야 한다. 칼뱅 역시 "주님은 한없이 다정한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모든 불신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고 말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현대인들로서는 첫 번째 간구를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거룩히 여김을 받다'라는 동사가 요즘 흔히 쓰이는 말이 아니며 세속화된 사회에서 '거룩'이란 개념 자체가 낯설기 때문이다. 루터가 지적했듯 논리적인 문제도 발목을 잡는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구한다는 건 도대체 무얼 기도한다는 얘긴가? 주님의 이름이야 이미 거룩하지 않은가?" 루터는 곧바로 그분의 이름이 거룩하다는 데는 재론의 여지가 없지만 "그분의 이름을 사용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이 항상 거룩한 건 아니다"라는 답을 달았다. 그리고 세례를 받은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이름을 지녔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존귀한 이름을 품은 존재로서 선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표하므로, 부름을 받은 그 호칭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 선하고 거룩해질 힘을 주시도록 꾸준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영광을 받으신 것처럼 열방 가운데서 영화롭게 되시기를" 소원하는 어거스틴 기도에 깊이 공감하면서 루터는 또 다른 의미로 바라보았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온 세상 방방곡곡에 두루 퍼지며 크리스천들이 그리스도를 닮은, 한마디로 거룩한 삶을 살아서 주님을 드높여 드리고 더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분의 이름을 부르게 되길 요청하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칼뱅은 전반적인 기조를 같이하면서 내면 깊숙이 새기고 있던 생각 하나를 덧붙였다. "은혜를 짓밟는 행위로 조금이나마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는다면, 그만큼 가당찮은 짓이 어디에 있겠는가?" 다시 말해서 주께 배은망덕하고 냉담한 태도를 가지면 그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그저 착하게 사는 차원을 넘어 늘 기꺼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며, 더 나아가 그 아름다움에 경이감을 품는다는 뜻이다. "주님을 바라보며 탄복하는 마음에 사로잡히지 않는 한," 그분의 이름을 드높이며 경배할 리가 없다.

 


"나라가 임하오시며"


어거스틴은 한사코 눈을 뜨지 않으려는 이에게는 사방이 암흑 천지인 것처럼, 지금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세상을 통치하시지만 그분의 법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고 말한다. 사실, 모든 인간고(人間苦)의 원인이 여기에 있다. 인간은 창조주를 섬기도록 지음을 받았으므로 마땅이 주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다른 것들을 두고 섬기면 영적, 심리적, 문화적, 심지어 물질적인 문제들이 줄을 잇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가 '임해야' 한다.

 


칼뱅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데는 두 가지 경로가 있다고 보았다. 하나는 "정욕을 바로잡아 주시는 성령님"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생각들을 빚어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주권'과 관련한 간구다. 왕이신 하나님이 감정과 욕구, 사상과 헌신을 비롯한 삶의 모든 영역에 왕권을 펼쳐 주시길 구하는 것이다. 이는 토머스 크랜머(Thomas Cranmer)의 기도를 떠올리게 한다. "주님이 약속하신 것을 얻게 하시고, 명령하신 것들을 사랑하게 하소서." 하나님이 온전히 다스려 주셔서 온 마음을 다해 기쁨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생각이 가득하길 구하는 것이다.

 


루터는 여기에 외면적이고 미래적인 관점을 덧댔다.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부분적으로 드러날 뿐이지만, 장차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서는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완전하게 실현될 것이다. 온갖 고통과 상처, 가난과 죽음은 사라진다. 그러므로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기도는 "정의와 평화가 흘러넘치는 미래의 삶을 갈망하는" 간구다. "앞으로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이 우리 가운데서 시작하신 나라의 완결과 완성"을 구하는 것이다.

 


"뜻이 이루어지이다"


루터는 세 번째 간구의 의미를 더없이 생생하고 솔직하게 설명한다. 그는 이 구절을 이렇게 풀이했다.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 주셔서 온갖 질병과 가난, 수치와 고통, 역경을 기꺼이 견디며 주님의 거룩한 뜻이 그 가운데서 우리의 뜻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음을 알게 해 주소서." 이처럼 담대하게 말하기엔 입술이 잘 떨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주기도문 첫 구절이 갖는 중요성만큼은 또렷이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심을 가슴 깊이 확신하지 않는다면, 감히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할 수 없다. 어린아이들에게 아버지는 속을 알 수 없는 존재이기 십상이다. 네 살배기 아이는 이것도 하지 말고 저것도 해선 안 된다는 아버지의 갖가지 금지 명령을 납득하지 못한다. 그저 믿고 따를 뿐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신뢰하고 의지할 때만 인내하고 감사하며 어려움을 견딜 은혜를 구할 수 있다.

 


더러 하나님이 정말 믿을 만한 분인지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예수님 자신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상 누구도 마주한 적이 없는 지독히 참담한 처지에 몰렸을 때 주기도문의 이 부분을 고백하셨다는 사실이 답이 될 수 있겠다. 주님은 스스로의 욕구를 좇는 대신 아버지의 뜻에 따랐고 결국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것이 그분을 신뢰할 수 있는 이유다. 예수님은 그가 해 주신 일보다 더 힘든 일을 하라고 물어보시지 않는다. 아무리 힘들고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더라도 말이다.

 


어거스틴의 뒤를 이은 루터는 이런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꿰차고 앉아서 자신에게 해를 입힌 상대에게 복수하려 들게 된다고 했다. 주님께 자신을 드리는 법을 배우고 나서야 비로소 "인신공격과 중상모략, 뒤에서 몰래 하는 험담 ... 다른 이들에게 퍼붓는 저주 따위를 피할 수 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서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하지 못한다면 한줌의 평화조차도 느낄 수 없다. 인간을 지배하고, 환경을 조작하며,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일을 몰아가고 싶은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삶을 통제하는 건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이어서 결국 자멸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기에 칼뱅은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한다는 건 어떤 환경이 닥치든 낙담하거나, 쓰라린 아픔에 시달리거나, 냉담하지 않도록 제 의지뿐 아니라 감정까지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지금까지 주기도문 앞쪽 세 구절에 담긴 간구를 살펴보았다. 어거스틴과 루터, 칼뱅은 하나같이 위치, 즉 이 세 가지 기원이 초반에 배치된 사실이 갖는 중요성에 주목했다. 기도의 도입부는 모두 하나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스스로의 필요나 문젯거리가 기도를 지배하게 두면 안 된다. 도리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며, 주님의 위대하심을 깨닫고 그분의 영광이 온 천지에 드러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길 갈망하며, 온전히 사랑하며 순종하기를 염원하는 걸 으뜸으로 삼아야 한다.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는 이러한 진리를 함축해서 아름답게 표현했다.

 


내 마음의 소원이

주님의 뜻을 향해 굽어지니,

완전히 들어맞게 되기를

열망합니다.

 


찬양과 감사(하나님 중심)가 우선이다. 시선이 자신을 향하여 시야를 왜곡하는 자기중심적인 마음가짐을 치유하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기도는 절반을 넘긴 셈이고 시각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바라보는 쪽으로 바로잡히고 명쾌해졌으니, 이제 우리와 세상의 필요를 향해 흐름을 바꿔도 좋겠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어거스틴이 여기서 말하는 '일용할 양식'은 사치품이 아니라 생필품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예수님은 초반에 하나님을 참다운 양식이요, 재산이요, 행복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세 가지 간구를 드렸다. 이제 필요를 채워 주시길 구하는 '기도 제목'을 새로 짜인 마음의 틀에 맞춰 정리하신다.

 


이미 얘기한 것처럼  어거스틴은 온전한 기도란 너무 가난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도 말고, 너무 부유해서 주님을 잊어버리지도 않게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라는 잠언 30장 8절처럼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칼뱅은 일용할 양식에 관해 언급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는 게 아니라 ...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방편이 되는 것들을 구하라"고 강조하며 어거스틴과 같은 입장을 취했다. 크리스천들은 긍정적인 응답을 기대하며 필요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오지만, 먼저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그분만을 신뢰하는 마음가짐이 전제되어야 한다.

 


루터는 이 기도에 사회적이 차원을 더했다. 누구나 빠짐없이 일용할 양식을 얻으려면 경제가 활성화되어야 하고, 취업률이 높아져야 하며, 정의로운 사회가 구현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이 땅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는 사업과 거래, 노동 시장에서 '가난한 이들을 짓밟고 하루하루 끼닛거리를 앗아 가는 악의적인 착취'에 대적하는 기도다. 루터는 불의한 짓을 하는 이들을 향해 여기에 내재된 능력을 역설하며 음울한 경고를 보낸다. "교회가 중보하고 있음을 똑똑히 알려 주고 ... 주기도문의 이 기도에서 배제당하지 않도록 조심시켜야 한다." 루터에게는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가 번영과 공정한 사회 질서를 갈구하는 간구였던 것이다.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다섯 번째 간구는 하나님,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모두 아우른다. 오랜 세월에 걸쳐 개인적으로 죄와 용서의 문제를 두고 치열한 씨름을 벌인 루터는 날마다 기도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누구든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고 남들을 멸시하는 이가 있으면 ... 이 간구와 마주서서 자신을 살피게 하라. 자신이 남보다 나을 게 없으며, 누구라도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고 겸손이라는 높이 낮은 문을 지나 용서의 기쁨 가운데로 들어가야 함을 깨달을 것이다.

 


아울러 루터는 이 간구를 교만에 대한 도전일 뿐만 아니라, 영적인 실상에 대한 검증으로 규정했다. 회개나 고백하는 것이 하찮게 여겨진다면, "마음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지 않으며 ... 복음에서 확신을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꼬박꼬박 죄를 뉘우치고 고백하는데도 삶 가운데 확신과 기쁨이 점점 커지지 않는다면,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신앙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 직결시켜 판단하신다. 이는 두 방향으로 작용한다. 스스로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군가에게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상대를 용서하거나 편들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해소되지 않고 남아 있는 쓰라린 상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는 신호다. 뿐만 아니라, 원한을 그대로 품고 있다면 스스로는 용서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죄만큼은 하나님께 용서받기를 구하는 위선과 마주칠 따름이다. 칼뱅은 그런 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마음에 미워하는 감정을 계속 붙들고 있다면, 앙갚음할 궁리를 하거나 어떻게든 해코지할 기회를 골똘히 찾고 있다면, 더 나아가 원수처럼 여기는 상대가 보여 준 호의에 보답해서 거기에 어울리는 온갖 배려를 하려 애쓰지 않는다면, 이 기도를 드려 봐야 하나님께 우리 죄를 용서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는 꼴이 될 따름이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옵고"

어거스틴은 이 간구를 두고 중요한 구분을 지었다. "이는 시험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시험에 끌려들어가선 안 된다는 기도다." 실험하고 검증한다는 의미의 시험은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기까지 하다. 성경은 고난과 환난을 심령의 숱한 불순물들을 '태워 없애서' 더 건강한 자기 인식과 겸손, 참을성과 믿음, 사랑을 갖게 하는 도가니로 풀이한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시험에 들지 않게"(마 26:41)는 죄에 굴복할 가능성이란 개념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칼뱅은 '오른편'과 '왼편', 두 범주로 나누어 시험을 열거한다. 오른편에서 오는 시험은 '부, 권력, 명예' 따위로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죄에 빠지게 몰아가는 유혹이다. 왼편에서 오는 시험은 '가난, 수치, 멸시, 고통'처럼 절망하게 하고, 소망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하고, 분노에 차서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리게 만드는 시험이다. 번영과 역경이 모두 쓰라린 시함이 될 수 있으며 제각기 주님을 향한 신뢰를 버리고 자기 자신이나 다른 무언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과도한 욕구'에 집중하며 살도록 유혹하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칼뱅은 이 구절을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옵고"와 한데 묶어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간구로 취급했다. 그러나 어거스틴과 루터는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로도 번역할 수 있다. 루터는 이를 두고 "악한 나라에서 뿜어 나오는 구체적인 폐해 ... 가난, 수치, 죽음 ... 한마디로 우리를 위협하는 모든 것들에 맞서는 기도"라고 썼다. 어거스틴은 내면에 잔존하는 악에서 구해 주시길 간청하는 게 여섯 번째 간구라면, 일곱 째는 외부의 악, 곧 세상의 사악한 세력, 특히 호시탐탐 해칠 기회를 노리는 적들로부터 보호해 주시길 구하는 기도라고 해석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마지막으로 마무리 찬양에 해당하는 구절이 남았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어거스틴은 이 부분을 언급조차 않는다. 초기 성경 문서나 라틴어로 번역된 불가타성경에선 찾아볼 수 없는 구절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고 지나간다. 반면에 칼뱅은 "라틴어 판에 없는" 문절임을 알면서도 "여기에 두는 게 지극히 타당하므로 제외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믿었다. 크리스천은 결핍과 역경, 한계 따위에 깊이 들어갔었지만 마침내 하나님이 온전히 채워 주신다는 진리로 되돌아오게 마련이다. 세상의 그 무엇도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의 손에서 낚아챌 수 없음을 기억하고 '평온한 안식'으로 수렴하게 되는 것이다.

 


"베풀어 주시고 용서하시고 구원하소서, 우리를!"

칼뱅이 주기도문 해설을 마무리하며 결론은 참으로 유익하다. 루터가 [단순한 기도방법(A Simple Way to Prayer)]에서 그랬던 것처럼, 칼뱅 역시 주기도문을 대하는 크리스천은 어구의 특정한 형식에 매일 것이 아니라 내용과 기본적인 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누가만 하더라도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판박이처럼 똑같은 단어를 동원해 기록하지 않았다. 주기도문은 기도의 강조점과 주제, 목적과 정신을 규정하는 본질적인 지침을 제공하는 요약판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기도에 사용되는 "용어는 전혀 다를지라도 뜻이 변해서는 안 된다." 어떠한 기도를 드리든 끝없이 갈고 다듬어 그 안에 주기도문을 새겨 넣어야 한다. 자유롭게 간구하는 기도로 가기 전에, 루터가 했던 것처럼 하루에 두 번씩, 주기도문을 자기 식으로 바꿔 기도하는 연습은 더없이 유용한 도구다.

 


주님이 이 기도문을 복수형으로 주셨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포인트다. 크리스천들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도록 기도해야 하며, 될 수 있는 대로 "공개적이어서 ... 같은 믿음을 고백하는 이들 사이의 교제가 깊어지게 해야 한다." 미국의 신학자 마이클 호튼(Michael S. Horton)은 "공적인 사역이 개인의 경건을 빚어 갈 뿐,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칼뱅의 지적을 부각시킨다. 칼뱅은 기독교회의 공동 예배가 개인적으로 드리는 기도의 틀을 단단히 잡아 주길 바랐으므로 공중기도와 성례전을 규정하는 데 무척 공을 들였다.

 


그러므로 기도는 오롯이 개인적인 일이 아니다. 함께 모여 예배든 비공식적인 자리든, 힘닿는 데까지 다른 이들과 더불어 기도하는 게 바람직하다. 어째서 그런가? 하나님이 시작하신 대화를 이어가는 데 기도의 본질이 있고 하나님을 더 잘 아는 게 그 목적이라면 공동체 안에서 여럿이 어울려 간구하는 형태가 가장 효과적일 수밖에 없다.

 


C. S. 루이스는 개인을 알기 위해서는 다수가 모여 이룬 공동체를 통하는 게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스스로의 교우 관계를 되짚어 보면, 한 친구가 가진 인성의 일부 면모는 다른 벗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서만 드러나더라는 것이다. 두 번째 친구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렇지 않았더라면 잘 알 수 있었을 첫 번째 친구의 일면을 놓쳐 버린다. "혼자 힘으로 한 인간을 총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나는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그의 전모를 드러내려면 나 외에 또 다른 빛들이 필요하다." 평범한 한 인간을 알아 가는 데도 공동체가 필요하다면, 수많은 이웃들은 물론 예수님을 알아 가는 데는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동료들과 더불어 기도하면, 예전엔 알지 못했던 예수님의 다양한 풍모를 보고 들을 수 있다.

 


루이스는 이사야 6장에서 천사들이 서로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라고 외쳤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고 본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제각기 한 면씩 목격하고 동료들과 공유했다는 것이다. 주님을 아는 게 집단적이고 누적 가중되는 일이라면, 기도와 찬양 역시 공동 작업이 되어야 한다. "하늘의 양식은 나누면 나눌수록 더 온전하게 되기 때문이다."

 

'팀켈러의 기도'에서 발췌(158-17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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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교리 기독론  /  그리스도의 이름

 

 

 

1. 그리스도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이 그분의 속성을 잘 나타내 주듯이, 그리스도의 여러 이름들도 그분의 속성과 사역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준다.
 

1. 예수(Jesus)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이름 ‘여호수아’( [ v h y )의 헬라어 표기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탄생 전에 주어진 이름이며(눅 1:30,31), 그분의 사역 목적이 인간의 구원임을 분명히 보여준다(마 1:21). 따라서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인솔 하여 가나안 원주민을 무찌르고 약속의 땅에 정착시킨 여호수아의 사역은 예수께서 택한 자들을 사단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만드는 일을 예표했었던 것이다.
 

2. 그리스도(Christ)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 있는 구약의 ‘메시야’( h y c m )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 핼라어 표현이다(요 4:25,26). 구약 시대에 기름 부음을 받았던 세 가지 직분 곧 선지자(왕상 19:16)와 왕(삼상 10:1), 그리고 제사장(출 29:7-9)은 완전한 메시야 곧 그리스도의 사역적 예표였다. 결국 이러한 사실은 신약의 그리스도가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어떠한 사역의 담당자이신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한편 여기에서 기름은 성령을 상징한다(삼상 16:13).
 

3. 인자(Son of Man)
 

그리스도의 비하(卑下)와 승귀(昇貴) 신분에 대하여 동시에 강조한다. 즉 재림주로서의 세상을 심판하실 분의 위엄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단 7:13,14; 마 16:27,28; 24:30; 26:64).
 
 

4.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모양은 가지셨으나, 성령으로 말미암으신 특수한 존재임을 암시한다(눅 1:35), 그러나 여기서 ‘아들’은 성부에 대한 성자의 열등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들’은 아버지와 동등하기 때문이다(요 5:18).
 

5. 주(Load)
 

당시 황제에게 적용되었던 명칭이었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그분을 ‘주’(主)로 고백하는 한 개인과 이 세상에 대한 주권자 혹은 통치자이심을 분명히 보여준다(고전 12:3; 빌 2:11).
 

6. 말씀(Word)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기 이전에도 이미 존재하셨으며 천지 창조와 계시의 주체이셨음을 보여준다(요 1:1-5; 14:9; 히 1:2).
 

7. 그밖의 이름
 

‘임마누엘’(마 1:23), ‘독생자’(요 3:16), ‘만왕의 왕’(딤전 6:15), ‘다윗의 자손’(마 1:1), 목자장’(벧전 5:4), ‘알파와 오메가’(계 1:17,18) 등의 명칭은 그분의 하나님되심과 성육신하심 및 역사의 주체이심과 구원자이심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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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교리가 필요한 이유

 

 

 

1. 이단(異端)의 극복         
 

성경적이지 못한 ‘다른 복음’(갈 1:6-9)을 가려낼 수는 지침으로서 필요하다.
 

2. 신앙 성숙         
 

성경 진리의 조직화는 성숙한 사고와 바른 행동을 가능케 한다.
 

3. 성경의 건전한 연구         
 

성경의 전체 맥락 속에서 상호 유기적인 성구들을 관련시켜, 연구할 때 편향적 성경 해석에 따른 오류를 배제할 수 있다.
 

4. 인간 본성과의 조화         
 

성경의 체계적인 연구인 교리는, 유기적으로 사고하며 지식을 통합하여 이해하려는 인간의 본성과 합치된다.
 
 
5. 전도         
 
논리적 사고 구조를 갖고 있는 불신자들을 진리로 이끌기 위해 필수적이다.
 
 
6. 교회의 기준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딤전 3:15)는 성경적 진리의 수호를 위하여 일관되고 통일성 있는 기준을 필요로 한다.

 

2.기독교 진리의 인식 과정
 

1. 인식의 원천-하나님
 

불완전한 인간이 아닌 완전자이시며 만물의 창조주이시자 구원의 주체이신 하나님만이 구원의 진리를 인식하기 위한 원천이실 수 있다(고전 8:6).
 

2. 인식의 통로-하나님의 계시
 

죄인된 인간은 거룩하시며 초월하여 계신 하나님에게 접근할 수 없고, 그래서 그분으로부터 능동적으로 진리를 받을 수 없다.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계시를 통해서만 구원 진리의 인식이 가능하다(요 5:39).
 

3. 인식의 창-이성과 신앙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객관적 진리는 인간의 주관적 수납으로써 그에 대한 인식의 과정이 종료된다.
 
물론 인식의 과정에 있어서 이성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죄로 오염되어 영적 분별력이 크게 약화된 이성만으로는 진리의 수납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이성적 활동은 성령의 감화로 말미암는 신앙에 의하여 지배되어야 한다.

이는 반(反) 이성적이 아니라 초(超) 이성적이라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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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교리 구원론] 구원의 이해

 

 

 

1. 구원의 전반적 이해
 

구원론은 구원을 적용하시는 성령의 사역이 어떠한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지는지를 다루는 부분과 그 구원이 각 사람에게 적용되는 과정을 다루는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여기서는 전반적인 것에 대해 언급한다.
 


1. 구원의 서정(序程)
 

구원의 서정(order of salvation)이란 구원이라고 하는 일련의 과정을 세부적으로 나누고 그 순서를 정한 것을 말한다. 물론 성령의 사역을 세부적으로 나누어 순서를 정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인간 구원을 위한 성령의 다양한 역사를 살피고, 그 은혜를 더욱 풍성히 체험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은 시간적 순서라기보다는 논리적 순서일 뿐이다.
 


1)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서정         
 

성경의 분명한 언급은 없으나, 롬 8:30에 따라 소명(calling), 중생(regeneration), 회심(conversion), 신앙(faith), 칭의 (justification), 성화(sanstification), 견인(perseverance), 영화(glorification)라는 구원의 순서를 말할 수 있다.
 

2) 구원의 서정에 대한 다양한 견해         
 

구원의 서정에 관한 견해는 크게 로마 카톨릭과 루터파, 알미니안파, 개혁파 등으로 나누어진다. 그런데 이러한 차이는 구원의 과정에서의 인간 의지 혹은 선행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구원의 전체 조건으로 강조한다. 즉 하나님만이 구원의 근본 열쇠를 지니고 계시다.
 
 

2. 구원에 있어서의 성령의 사역
 

여기서는 성부께서 계획하시고 성자께서 성취하신 구원을 각 사람에게 적용시키는 주체로서의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고찰한다.
 
 

1) 성령의 일반 사역과 특별 사역         
 

일반 사역은 자연과 인간을 유지 발전시키며, 일반 은총(一般恩寵)적 지도를 통하여 창조시에 받은 은사를 계발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시는 일이다. 사실 이것은 다음에 언급되는 성령의 특별 사역의 준비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편 특별 사역은, 택자에게 그리스도의 구속을 적용시켜 구원을 얻게 하는 일이다(요 3:5; 14:16,17; 고후 3:18; 약 4:5,6).
 

2) 일반 사역의 방법         
 

일반 계시를 통한 자연인의 양심 지도(롬 2:14,15), 세속 통치자에 의한 인간의 완악함의 억제(롬 13:4,5), 특별 계시의 영향에 의한 신적 율법과 일치되는 공적 여론의 형성, 신적 율법과 일치되는 각종 사회 보상 제도를 통한 일반적인 선행 장려 등이다.
 

3) 일반 사역의 효과         
 

회개의 기회 부여를 위한 신적 형벌 집행의 유예(사 48:9; 렘 7:23-25; 눅 13:6-9), 인간 사회 및 개인 속에서의 죄 확산 억제(창 20:6; 31:7; 롬 13:1-4), 진리와 도덕 및 종교에 대한 욕구 유지(행 17:22; 롬 2:15),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한 외면적 선과 세속적 공의(公義) 수행(왕하 10:29,30; 14:3,14-16), 현세에서의 자연적 축복의 향유(창 17:20; 마 5:44; 눅 6:35,36)등이다.
 
 

3. 예수와의 신비적 연합(神秘的 聯合)
 


1) 의미         
 

이것은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와 신자들간의 영적 연합을 말한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신자들이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결합함으로써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여하여 구원에 이르게 됨을 가리킨다(롬 6:3,5). 한편 이것은 자연인이 아담과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과 대조된다(창 5:3; 롬 5:12-19; 고전 15:49).
 

2) 특성         
 

  (1) 유기적(有機的) 연합 - 그리스도는 신자 안에서 역사하시며,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봉사한다(요 15:5; 고전 6:15-19; 엡 1:22,23).

  (2) 생명적(生命的) 연합 - 영적으로 죽었으나(엡 2:1) 그리스도로 인하여 살아나게 되었다(고후 13:5; 갈 2:20).

  (3) 중재적(仲裁的) 연합 - 성령의 중재로 말미암은 연합이다(고전 6:17; 12:13; 고후 3:17,18; 갈 3:2,3).

  (4) 발전적(發展的) 연합 - 성령의 감화에 따라 그 연합의 정도가 더욱 심화된다(요 14:24; 15:4,5; 갈 2:20).

  (5) 개인적(個人的) 연합 - 신자 각 개인이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다(요 14:20; 고후 5:17).

  (6) 변형적(變形的) 연합 - 옛 사람을 벗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게 된다(골 1:24; 3:10; 벧전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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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리 이해 ?

 

◈ 진리


우리는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들이 성령의 감동 하심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으며 그 원본에 있어서는 전혀 오류가 없는 것으로 믿는다 . 오직 성경만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경 외에 또 다른 하나님 말씀은 없다고 믿는다. 그리고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초는 성경이다.

(딤후 3:16. 벧후 1:21. 잠 30:5-6 )

◈ 하나님


하나님은 한분 이시며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의 삼위로 존재하심을 믿는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무한 하시며 편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시고 영원하시며 또한 변함이 없으시다.

(출.34:6-7. 신6:4. 마28:19. 요 4:24, 10:30. 행 5:3-4. 고후 13:14. 히 1:8-12 )

 
◈ 예수님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리고 하나님과 동등하시며 또한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완전한 인간이시다. 그는 동정녀를 통하여 무죄하게 세상에 인간으로 오셨으 며 인간의 연약을 가지시고 사셨으나 범죄치 않으셨으므로 죄가 없으시다. 그는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으며 무덤에 묻히셨다가 3일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성도의 대제사장으로 앉아 계신다.

(마1:21-23. 요 1:1.14. 행 1:9. 롬 1:3-4. 고후 5:21. 히 1:8. 4:14-15. 7:25. 벧전 2:24, 3:18)

◈ 성령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삼위 중에 한 분으로서 하나님과 동등하시며 죄인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시며 거듭난 자들 안에 거하셔서 구원에 대한 보증이 되신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거룩한 삶을 살수 있도록 능력을 더하시며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바른 길로 인도 하신다.

(마 28:19. 요 16:8. 롬 8:9-16. 고전 12:13. 엡 1:13-14 )


◈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 되었으며 죄가 없는 자였으나 그는 죄를 범해 죄인이 되었고 인간의 조상으로서 그 모든 후손들에게 죄의 본성을 물려 주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 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며 또한 죄를 범하여 죄인이다. 하나님의 구원 없이는 인간들에게 소망이 없다.

(창1:27, 9:6. 롬 5:12. 엡 2:1)


◈ 죄


죄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이다. 죄는 또한 의를 행하지 않은 것이며 하나님의 모든 영광에 이르지 못한 것이 죄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에 온전히 이르지 못한 것이 죄이다. 하나님은 죄의 값으로 사망 즉 죽음을 요구하셨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

(사 53:6. 겔 18:24. 롬 3:23. 약 2:10, 4:17. 계 20:11-15)


◈ 구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없이는 죄 용서함이 없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 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것이며 율법 준수나 선행으로 얻지 못한다. 복음을 듣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자들은 모두 영생을 얻는 다.

(막 1:15. 요 1:12-13. 행 4:12. 롬 10:9-13. 고전 15: 1-4. 히 9:22)


◈ 교회


우주적인 교회는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셨을 때부터 휴거 때까지 구원 받은 모든 자들로 이루어진다. 각 지역 교회는 우주적인 교회의 축소형이다. 지역 교회는 구원 받은 자들로 이루어지며 모여서 함께 가르침을 받고 교제하며 떡을 떼고 기도하며 또한 전도를 한다. 각 지역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께서는 지역 교회를 다스리고 인도 하도록 목자들에게 맡기셨다(장로들, 감독들, 목사들, 목자들은 성경에서 모두 같은 자을 말하고 있다). 각 지역 교회에는 또한 실질적인 면에서 성도들을 섬기는 집사들이 있다.

(행 2:42-47. 고전 12:12-13, 27. 엡 1:22-23, 5:24-25,30. 행 6:3-6. 딤전 3:1-13. 히13:17)


◈ 예식


교회에는 두 가지 예식이 있다. 하나는 침례이고 다른 하나는 주의 만찬이다. 물 속에 잠기는 침례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무덤에 묻히는 것을 상징하며 물에서 나올 때 이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이제는 새 생명 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주의 만찬은 신자들이 주님의 고난 받으심 과 죽으심을 기념하며 예배하고 또한 그가 오실 때까지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다. 초대교회 시대에 맨 처음에는 매일 떡을 떼었으며 나중에는 매주 주님의 날에 떼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마 28:19-20. 눅 22:19-20. 행 2:42-47, 10:47-48, 20:7. 고전11:26)


◈ 속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셨으며 또한 그의 죽으심과 흘리신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사하시기에 충분하며 죄를 속하기 위한 다른 노력이나 선행이 필요하지 않다고 믿는다.

(엡1:7, 2:8-9. 고후 5:21. 벧전 3:18)

 

◈ 구원의 확신과 안전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말씀에서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영원히 안전하다.

(요5:24,10:28-29. 롬 5:1. 딤후 1:12. 요일 5:13 )


◈ 그리스도인의 삶과 우선순위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삶을 살도록 부름 받았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영혼의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나타내는데 적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세상에 재물을 쌓아 놓지 말라고 명하시고 주를 신실히 섬기는 자들에게는 하늘에서 보상을 약속하셨다.

(마 6:19-34. 막 8:34-35. 고전 3:12-15. 벧전 1:15-16. 요일 2:6)


◈ 성령의 은사

성령님께서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고 거듭날 때 각자에게 주님을 섬기며 성도들을 섬기도록 성령의 은사를 주셨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의 고유한 권한으로 주신 것이며 사람이 바라거나 기도함으로 주시지 않는다. 은사는 교회를 세우는데 기초적인 은사가 있으며(사도, 선지자) 병 고침이나 능력 행함, 방언 그리고 방언 통역과 같은 이적의 은사가 있고 이러한 은사들은 교회가 처음 세워졌을 때 즉 변환기에 유대인들에게 표적으로 주신 것이다. 기초적인 은사나 이적의 은사들은 그 목적이 이루어졌을 때 끝났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병을 고치실 수가 있고 방언을 하게 하실 수도 있지만 그것은 기도나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인한 것이며 은사로 주신 것은 아니다.

(롬 12:6-8. 고전 12:7-11, 14:22. 고후 12:12. 엡 2:20, 3:5, 4:11-12. 히2:3-4)


◈ 장래일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시대를 통하여 인간과 관계를 가지시고 또한 다스려 오셨다. 각 시대 마다 구원의 방법은 오직 믿음 뿐이었다. 현 시대는 은혜의 시대이다. 교회는 은혜시대 이전 에는 존재하지 않았었고 교회가 이스라엘의 자리를 대신하지 않는다. 은혜시대 끝에는 교회의 휴거가 있고 그 후에는 대환란이 있으며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친히 오셔서 이 땅을 다스리시는 천년왕국과 불신 영혼들에 대한 심판과 구원 받은 자들에 대한 영원한 복락이 있을 것이다.

(마 24:21, 29-30, 25:46. 롬 6:14. 고전 10:32. 엡 3:2-6. 골 1:25-27. 살전 4:13-18, 5:4-10 히 7:18-19. 계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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