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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들(The Son of God & sons of God)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들 중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는 이름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은, 여호와의 증인들의 견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아버지 하나님보다 열등한 신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여기서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한 속성을 가진 존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은 그분이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라는 뜻이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과 아버지가 하나라고 동일시 하셨다(요 10:30). 유대인들도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했고, 그 말에 대해서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반응했다.

 

사복음서 중에 특히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고 있는 복음서이다.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의 기록 목적을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도록 하는 것이라고 밝힌다(요 20:31).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들이 그분이 유대인의 왕, 즉 “다윗의 아들”이심을 증명하는 것이라면, 요한복음에서의 그분의 표적들은 예수님의 신성, 즉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증명하고 있다(요 20:30,31).

 

“하나님의 아들들”(sons of God)은 구약과 신약에서의 의미가 각각 다르다.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들은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경건한 혈통인 “셋의 후손”이라고 오해하지만, 이것은 아담의 타락 이후 온 인류가 함께 타락했음을 간과한 생각이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고, 따라서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행위가 아무리 선하고 경건해도 결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릴 수 없었다. 구약 성경 어디에서도 인간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단지 이사야 43:6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리켜 “나의 아들들과 딸들”이라고 하셨을 뿐이다.

 

구약에서 이 용어는 다섯 번 등장하는데(창 6:2,4, 욥 1:6; 2:1; 38:7), 다섯 번 모두 천사들을 일컫는 말로 쓰였다.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홍수 직후 기록된 책인 욥기에 잘 정의되어 있다. 창세기 6장에 나오는 이 용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견들이 분분하지만, 욥기 1장과 2장에서 이 용어가 천사들을 가리킨다는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자연히 창세기에서도 이 용어는 천사들을 뜻한다는 것이 증명되는데,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결합하여 낳은 존재들이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라 기형적인 거인들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보통의 인간이 아닌 특수한 존재들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자기의 위치를 지키지 않고 범죄하여 땅으로 내려온 천사들로, 베드로후서 2장과 유다서에서는 노아의 홍수의 원인이 바로 이들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한 가지 의문을 품을 수 있는 것은 천사들이 아이를 낳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는 마태복음 22장에서 예수님께서 부활에 대해 언급하실 때, 부활 때의 몸은 결혼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 22:30). 일반적으로 이 말씀을 근거로 천사들이 무성(sexless)의 존재라고 인식하지만, 천사들이 무성이라는 것은 성경 어느 구절에서도 뒷받침될 수 없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땅에 내려온 천사는 항상 젊은 남자로 등장한다(창 19:10-15, 판 13:3-21, 행 1:10,20:12, 갈 4:14, 계 21:17). 남자들끼리는 결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천사들이 결혼할 수 없다는 말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구약의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해서는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창세기> 6장의 주석 참조)

 

이에 반해 신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sons of God)은 하나님의 거듭난 자녀들을 말한다. 아담에게서 태어난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방법이 신약에서 제시되었다. 이 방법은 유일한 방법이며 가장 확실한 방법인데, 요한복음 1:12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즉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니라』(요 1:12).

 

아담이 타락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형상이심을 알아야 한다(고후 4:4).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성령으로 거듭난 신약 성도들에게만 다시 회복될 수 있다. 『그 분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자기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시려고 또한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를 많은 형제 가운데서 첫 태생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태어나신 첫 번째 사람이시다. 신약의 그리스도인들도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들이다(요 3:5). 그들의 육신은 인간 부모에게서 났을지라도 그들의 죽었던 영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들 중에 첫태생이 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한 신약 성도들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것이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이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니라』(롬8:14).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의 아들들”(sons of God)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입을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이 되리라는 것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 그대로 그분을 볼 것이기 때문이라』(요일 3:2).

 

그러므로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과 같이 변화할 것인데(롬 8:29, 빌 3:21, 고전 15:49), 그 몸은 또한 하늘에 있는 천사들의 몸과도 같다(마 22:30). 이 몸은 피가 없이 살과 뼈로만 구성되어 있고(눅 24:39), 구운 생선을 먹을 수 있을 만큼 실제적인 몸이면서도(눅 24:42), 벽을 통과할 수 있는 신비한 몸이다(요 20:19). 이 몸은 순간적으로 우주 저 너머에 있는 셋째 하늘에 갔다 올 수 있는 몸이며(요 20:17, 마 28:9, 고전 15:52, 살전 4:16,17), 보였다가 안보이기도 할 수 있는 몸으로(눅 24:31), 예수님의 부활 때의 몸과 같이 서른 세 살 반 된 남자의 모습이다.

 

이러한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일어나며(고전 15:49-52, 요일 3:2),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더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복된 소망을 갖는다(딤후 4:8, 딛 2:13). 또한 성경은 우리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로 나타나길 기다린다고 말씀한다. 『피조물이 간절한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날 것을 기다리고 있나니 이는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의가 아니요, 오직 소망 가운데 그것들을 굴복케 하시는 그 분 때문이니라』(롬 8:19,20).

 

그러나 그 때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비뚤어지고 변질된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마귀의 자녀(요일 3:10), 불순종의 자녀(엡 2:2), 진노의 자녀(엡 2:3)였으나 “하나님의 아들”로 인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은 진리가 가리워진 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을 비추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는 너희 하나님의 아들들이 흠 없고 순전하여, 비뚤어지고 변질된 민족 가운데서 책망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 너희는 세상에서 빛들을 비추는 자들이라』(빌 2:15

 

 

자료제공 : http://www.biblemaster.co.kr                        

 출처 : 출처 : 월간 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6년 3월호  (통권 48 호)   page : 65

 

오늘도 찬양으로 은혜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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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으로 충만한 생활

 

 

 

회심할 때 성도들은 의로운 상태로 받아들여지고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이것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침례에 의한 거듭남을 믿어온 이단들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단지 두 구절만을 제시하며 그들의 교리를 입증하려는 것은 그들이 이 책들에서 말하는 전체적인 내용을 소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인용하는 두 구절은 로마서 6:3과 갈라디아서 3:27이다. 로마서 6장은 성령침례를 다루고 있으며, 갈라디아서 3장은 물침례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구원받지 못한 목사들에게서 드러나는 공통점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마치 무슨 죽음의 전염병인 것처럼 다루기를 꺼려한다는 것이다. 이 두 구절만 발췌하여 인용하는 이들은 결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가르치지 못한다. 이 두 책은 믿음에 의한 의, 믿음에 의한 구원, 믿음에 의한 구원의 영원한 보장 등을 분명히 다루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시며, 죄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전가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사람에게 전가된다는 내용을 분명히 가르치기 때문에 행위와 물침례에 의한 중생을 믿는 이들은 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가르치지 못하는 것이다.

  이들이 갖고 있는 한 가지 문제는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소유했다고 선언되어지는 ‘믿음에 의한 의’를 어떻게 피해서 빠져나갈 것인가이다(롬4:5). 이런 이유로 모든 구원받지 못한 로마 카톨릭은 이스라엘의 열두지파에게 쓰여진 야고보서 2장을 선호하는 것이다.

 

  리빙바이블은 야고보서 1:1-2을 변개시켜 야고보서 2장이 믿는 성도에게 적용되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였다. 이 거짓 교리를 교회 역사가들은 “이단”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에게 성경번역을 통하여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이들이 성령님께 대해 저지른 모독은 참으로 크나큰 것이다. 성경을 변개시켜 거짓말을 가르치도록 하는 죄를 짓는 사람들보다 더 웃기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없다. 야고보서 1:1은 어떤 그리스도인에게도 쓰여지지 않았다. 이 구절을 변개시킨, 살아있는 성경이라고 하는 리빙바이블은 “죽은 번역”을 한 것이다.

 

  한 사람이 구원받을 때 그는 의로운 위치에 서게 되며 의롭다고 선언되어진다. 그 다음 자신의 몸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라. 너희는 값을 치르고 산 것이니...』(고전6:19-20). 우리는 구속받았다. 우리는 “노예”들이다. 우리는 주님의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의지를 주님께 복종시킨다(롬12:1-2). 이것은 우리가 악과 이기적인 요소를 벗어던질 때 “비어진 삶”으로서 가능하다. 이 “비어진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죄인에게 전가되어 주님 안에서 죄가 없는 완전한 상태가 되지 않는다면 구원받은 삶이 아니다. 진공상태에서는 살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성령님으로 충만해야 한다. 이것이 에베소서 5:18의 명령이다. 『술취하지 말라. 그것은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 신약성경 어디에도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라는 명령은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모든 성도들은 성령으로 침례를 받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라.”가 아니고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들어간 후에(이것이 성령침례의 정의이다)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것이다.

  에베소서 5:18에는 두 가지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즉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는 죄는 술 취하는 죄와 같다. 같은 구절에서 “술 취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고 역시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두 가지 명령은 절대적이다. 그리스도인이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는 것은 마치 술 취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구원받은 후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다. 『그분 안에는 신격의 모든 충만함이 몸의 형태로 거하시나니...그의 안에서 온전하게 되느니라』(골2:9-10). 구원받았다면 삶 속에서 부족한 것은 없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다면 다음 두 가지 잘못된 사실 중 하나에 해당된다.

 

  1) 성령 충만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거나 2) 하나님께 구했더라도 삶 속에서 성령님께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령침례에 관하여 말한다면 여러분이 구원받는 순간 성령님께서는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셨다. 신격의 세 번째 인격이신 성령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피 값으로 사셔서 하나님의 소유가 된 여러분의 몸에 들어와 살기 위해 오셨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되신다. 성령님은 주님이시다. 『이제 그 영은 주시니...』(고후3:17). 하나님께로 회심할 때 모든 믿는 성도는 성령님을 소유하게 된다. 여러분이 구원받았을 때 여러분은 성령님으로 인쳐진다(고후1:22,엡1:12-13). 이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금 죄 가운데 있거나 아니면 입으로만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주관하는 것을 포기할 때 성령님은 우리에게 더욱 더 자신으로 채우신다. 이것이 바울이 갈라디아서 4:19에서 믿는 성도 안에 그리스도가 형성되도록 기도한다는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우리 안에 내주하시지만 우리의 태도에 따라 우리를 주관하지 않으실 수도 있다.

 

  특정 교리를 입증하기 위해 수십 종의 서로 다른 성서 번역본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감정적인 경험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해 왔다. 이들은 교회연합운동을 하는 자들과 은사주의자들, 그리고 경험을 중시하는 불안정한 사람들로 항상 자신들의 느낌으로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한다. 물론 이것은 매우 어리석고 현명치 못한 짓이다. 성경은 모든 책들을 심판한다. 성경은 그 교리와 함께 여러분의 태고적 조상이 태어나기 전에 확립되었고 만일 주님이 지체하신다면 여러분의 가장 나중 후손이 죽을 때까지 동일한 효력을 나타낼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구원받은 후에 당신이 경험한 몇 가지 느낌으로 사도행전이나 야고보서, 히브리서를 판단한다면 당신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는 참으로 현명하지 못한 일이며 사탄이 하는 일이다. 여러분이 구원받았을 때 하나님은 여러분을 의롭게 하신다. 그러나 성령님께 순종하여 여러분의 삶을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맡기는 일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한 사람에게 위기가 찾아오는 때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가 아니고 구원받은 후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자신을 드릴 때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경험하게 되는 가장 큰 위험은 의지를 굴복시킬 때 발생한다. 왜냐하면 사탄은 그 누구보다도 당신의 의지를 통제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위험스런 경험은 구원받은 후에 다가온다. 이 때 성경을 인용하고 성경을 믿는 체하는 이단들이 그리스도인에게 다가와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는 것은 감정적인 경험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이것이 새로 태어난 영적 갓난아이의 삶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영적으로 말하면, 이때가 대부분의 아기들이 태어나자마자 죽는 시점이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주장하고 성경을 인용하는 이단들이 결코 죄인들에게 갑자기 덤벼들지 않고 그들이 구원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이유이다. 만일 당신이 구령하는 사람이라면 그들의 전략을 알아야 한다.

 

  모든 성도에게는 성령님이 계시지만 성령님이 모든 성도를 주관하시지는 않는다. 성도들은 아직도 하나님께 반역하려는 의지와 옛 성품이 있다. 기도할 수도 있지만 안할 수도 있다. 주님을 증거 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순종할 수도 있지만 불순종할 수도 있다. 즉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성령님께 순종할 수도 있고, 아니면 저항하거나 성령님을 슬프시게 할 수도 있다. 믿음에 의한 가장 훌륭한 행위는 성도가 그의 삶을 포기하고 성령님께 내어드리는 것이다. 이때 사탄이 하는 모든 일은 당신 삶의 나머지 부분을 차지하고자 성령님을 흉내 내는 것이다. 성도가 구원받고 성령님께 헌신할 준비가 되자마자 사탄이 하는 모든 일은 성령님을 흉내 내는 일이다.

  성도가 성령님께서 그의 삶을 온전히 주장하시고 모든 작은 일이라도 완전하게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성령의 충만이 받아들여지게 된다. 성령님은 자신의 영감으로 기록하고 보존하신 성경에서 말씀하신 것과 어긋나게 성도를 인도하지 않으신다.

 

  성령님은 사도행전 2:38을 기록하셨고 그곳의 모든 대상은 유대인들이거나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이었다. 성령님은 사도행전 2장에서 5장까지는 그리스도인이 없고 사도행전 11장까지는 그리스도인이 한 명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성령님께서는 사도행전 2:38을 구원계획으로 받아들이라고 인도하지 않으신다. 그렇게 하는 것은 불결한 영이 하는 짓이다. 성령님께서는 오순절 때 어떤 회심자도 그의 일생에 단 하루라도 방언을 말한 적이 없으며 사도행전 2장에서 방언이 회심의 표적이거나 성령 충만의 표적이 아니라고 보여주신다.

 

  성령님은 고린도전서 14장을 기록하셨고 그 장 전체에서 방언에 관해 한 번도 침례를 언급하지 않으셨다. 그 장을 기록하시고 보존하신 성령님께서 “알지 못하는 방언”이 성령침례와 관계가 있다고 인도하시지 않는다. 성령님은 사도행전 2장을 기록하셨고 보존하셨으며 거기에 어떤 알지 못하는 방언도 없다고 분명하게 해 주신다. 알지 못하는 방언이 성령침례의 표적이라고 가르치는 사람은 틀림없이 그의 삶을 성경을 기록하고 보존하신 신격의 세 번째 인격이신 분께 내어드린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어떤 다른 영과 관련되어 일하는 것이지 성령님과 연관되어 일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으로 충만 하라는 것은 순종해야 하는 명령이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경험해야 한다. 에베소서 5:18은 선택적인 명령이 아니라 반드시 지켜야 되는 명령이다.

  사도 베드로는 사도행전 2:4; 4:8; 4:31에서 성령으로 충만했다. 사도행전 4:8에서 성도가 성령으로 충만했을 때 그는 방언을 말하지 않은 것에 유념해야 한다. 사도행전 4:31에서도 성도가 성령으로 충만했을 때 방언을 말하지 않았음을 유념해야 한다. 사도행전 4:8과 4:31에서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의 현저한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공개적으로 하나님의 적들에게 선포한 것이다. 강단에서만 설교하고 공개적으로 거리에서 설교하기를 두려워하는 모든 사람들은 성령 충만의 사실을 알지 못하며,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문 밖으로 나가 예수 그리스도를 곳곳에 전하게 된다. 결코 강대상 뒤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는 성령으로 충만해질 필요가 있다.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도 성령 충만은 필요하다. 성령으로 충만 되지 않고서는 주님의 뜻과 축복을 바랄 수 없다.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은 개인의 축복이자 주위 사회의 축복이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그 사회에서 악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충만해진 성도는 곳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 집을 방문하고, 공장에서, 가게에서, 호텔로비에서, 식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 성령으로 충만해진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님께서 스스로를 말하기 위해 오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성령님은 오셔서 자신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하게 증거 하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교회연합운동이나 “사랑” 혹은 성령을 증거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못 박히심, 죽으심, 장사, 부활하심을 증거 한다. 교회연합, 사랑, 경험을 나누는 것 등만을 말하는 사람은 불결한 영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 이들은 오늘날 성령님께서 증거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장사, 부활의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지성을 밝혀 주시고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시며 우리가 순종할 때까지 의지를 격려하셔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 계속해서 순종하도록 하신다. BB

 

 자료제공 : http://www.biblemaster.co.kr                        

 출처 : 월간 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2월호  (통권 35 호)   page : 34

 

 

성령 찬양으로 은혜받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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