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9시간 발로뛰며 「말씀」인도
경로당·시장 등 두루 누비며 교회출석 설득/“뿌린대로 거둔다” 실감… 최우수 전도상 수상
1992년 10월… 신앙인의 길을 걷고 있는 내겐 참으로 잊을 수 없는 아름답고 귀한 추억의 시간들이었다.
내가 출석하고 있는 안산광림교회에서는 그때 믿지않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1만명 초청잔치」라는 이름아래 총력전도를 펼치고 있었다.교회문턱을 넘어선지 불과 1년 남짓한 시점이었고,예수님품안이 무조건 좋고 감사하기만 할 때였다.
전도의 비결을 일러 주기 위해 대구에서 오신 정종근장로님께서 전도인원 작정 결신서를 내라고 하셨다.『많이 쓸수록 많은 열매를 맺을수 있다』는 장로님의 말을 너무나 확실히(?) 믿은 나머지 남편은 2천명을 적어 냈고,나는 겁도 없이 5천명이나 적어내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써낼 땐 그저 동그라미 많이 치는게 잘하는 일 같아서 적어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걱정이 됐다.
출석한지 몇달만에 우리가족 4명을 전도한 전적밖에 없는 내가 무슨 용기로 5천명을 적어냈는지….
아무튼 하나님께 약속을 한 일이라 조급해지기 시작했다.교회에서는 「전도특공대」가 조직됐는데 전도경험이 많은 분을 조장으로 하여 3명이 1개조가 되어 합력하여 선을 이뤄내도록 독려하였다.같은 여선교회 회장인 김재옥집사와 박순자집사가 한 조가 되었는데 전도경험이 없는 박집사와 나는 오로지 베테랑인 김집사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김집사는 먼저 하나님께 약속하도록 만들었다.「새벽기도 1시간전인 새벽4시에 나와 기도할 것」과 「아침9시에 집합하여 저녁 6시에 헤어질것!」다시말해 한달동안은 어떠한 개인적인 용무나 가정의 대소사도 하나님께 약속드린 「9 to 6」(9시간)의 시간을 범할 수 없다는 일종의 계엄령같은 조치였다.
아픈 것도 허용되지 않는 전시 이상 상황처럼 오로지 하나님 일로만 다니는 걸 보고 글쟁이 남편은 김집사의 별명을 「독일병정」이라고 지어주었다.나도 100% 공감했다.
우선 교회에서 나눠준 초청장을 욕심껏 가져다가 봉투를 맞춰서 정성스럽게 넣고 우리의 이름을 새긴 고무도장을 찍었다.남동생이 물려준 탱크 소리나는 스텔라 자동차가 전도 특공대의 장갑차가 됐다.그 차에는 교회에서 내준 선물용 쓰레기봉투가 가득했고 초청장,설교지,광고전단등이 수북했다.「끌어 오려면 베풀어야 한다」는 김집사의 「노하우」대로 초청한 날에 오기만 하면 확인도장을 받는 티켓도 발부했고 경로당 노인들에게는 KBS 견학권을 대대적으로 뿌리고 다녔다.또한 번화가에서는 띠를 두르고 노방전도를 했고 아파트와 연립주택을 가가호호 방문하는 것도 빠뜨리지 않았다.
교회 글귀가 새겨진 껌과 사탕도 늘 주머니에 불룩하게 갖고 다니며 학생들과 시장에서 마주치는 주부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그러면서도 교회의 모든예배와 행사는 우선적으로 참여했다.우리 3인방의 기도는 목숨을 건듯이 맹렬했다.점심은 시간날 때 먹는 것임을 그때 알았다.
그렇게 우리가 뛴 거리가 작은 안산시에서 5백㎞를 넘어섰으니 꽤 다닌 셈이다.
마침내 우리의 전도로 교회문턱을 넘어선 사람들이 버스로 몇대가 넘었다.할렐루야!
우리 3인방은 결국 최우수전도상을 탔고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아직도 그때의 감격과 사랑이 내 영혼과 생활에서 신앙의 길잡이가 되고 있으니 정말로 감사한 일이다.
<안산 광림교회 집사>/전미경(나는 이렇게 전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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