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하나님을 경배하나?

미국의 저명한 {가정부인}지에 보통 사람의 생애를 70년으로 생각하고 분석한 결과를 게재했다. 여기에 보면 6년을 먹는데 소모하였고, 11년을 일하는데 5년반을 세탁과 옷 손질에 3년을 교육에 8년을 오락에 6년을 걷는데, 3년을 독서에 3년을 대화에 24년을 잠자는데 겨유 6개월을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데 사용한다는 분석이 있다. 70년을 사는 인간이 불과 6개월간을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 날에 간다? 인생의 1%도 안되는 0.7%의 삶을 바치고 그토록 큰 사랑과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니 참으로 믿음이 얼마나 좋고, 아가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알 수 있다. 나는 몇 개월쯤 될까?

 

거듭났을때 삶은 빛난다.

중국 내지 선교의 개척자 허드슨 테일러 목사의 이야기 그가 중국에서 선교하고 있을 때 한 청년이 {신자가 되는데 몇년이 필요합니까?}라고 물었다. {램프의 심지는 얼마 동안 타고 빛을 발합니까?} 테일러 목사가 이렇게 반문하자 청년은 {그야 심지에 불을 붙이는 순간부터 빛을 내지요}라고 대답했다. 테일러 목사는 청년의 손을 꼭잡고 이렇게 말했다. {바로 그겁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구원하셨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새로운 삶의 빛이 그 영혼에서 타오르게 된답니다.}

 

세상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것 세가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다시는 돌아 올 수 없는 것이 세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입에서 나간 말입니다. 우리가 한 번 한말은 다시는 돌아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는 화살이라고 합니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거둘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째는 흘러간 세월입니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지만 우리는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을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반성이라는 법정에 서서 지난 일들을 돌이켜 보며 "무엇을 잃었으며 또한 무엇을 얻었는가"라는 물음을 묻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얻은 것에 감사하고 잃은 것을 반성할 때 세월은 흘러간 것만이 아니라, 새롭게 살아 갈 수가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걱정할 필요없는 걱정

기독교 출판협의회 회장 여운학 장로의 칼럼에서 {왜 너는 걱정하느냐?}의 일부분 발췌 "어느 권위 있는 연구 조사에 의하면 우리의 걱정 근심 가운데 80%는 일어 날 수 없는 쓸데 없는 것이며 12%는 자기와 상관 없는 일이고 오직 8%만이 진정으로 걱정할 만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나머지 8%의 걱정 근심도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8%까지도 하나님께서 대신 맡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는 하루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살롬"

 

똑 같은 경험 반복

항상 무사안일 하게 10년을 한 직장에서 지낸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창의력을 전혀 발휘하지 않고 주어진 일에 적당히 대처하며 지냈다.

이런 소극적이고 불성실한 태도로 인해 이 사람은 승진에서 계속 밀려 났다.

그는 회사 고위 간부에게 하소연을 하며 {그래도 내게는 10년간의 경험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간부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바로 그 점이 당신의 문제 입니다. 당신은 한 해의 경험을 10회나 반복했을뿐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크리스천이 아무리 몇 십년 동안 믿었어도 달라진 것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요?

94년 학생회 표어처럼 빛의 자녀 됨으로 빛의 열매 맺는 우리 학생회가 되길 바랍니다.

   

두려움 없는 삶의 비결

어떤 사람이 공동묘지를 넘어 막 마을로 가려하다가 너무나 밝은 얼굴로 뛰어노는 한 꼬마를 만났다. {공동묘지 근처인데 너는 무섭지 않니}이 사람이 이렇게 물자 꼬마는 {아뇨}라고 하면서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쳐다 봤다. {왜 무섭지 않니?} 다시 이 사람이 묻자 꼬마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아빠가 이 묘지 관리인이거든요}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삼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이사야41:10)

 

승리의 비결

1977915, 우리나라의 등반대가 세계에서 8번째로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하여 전세계에 우리 민족의 위대성을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등반 대원들이 돌아와서 이번 등반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힘이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들이 장도에 오르기 전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는데 그 때 읽은 성경 말씀이 시편 121:1-2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우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는 말씀이였습니다. 그들은 산에 올라가면서 수많은 어려움을 만나게 되었고 그때마다 등반을 포기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등산가와 같습니다. 커다란 계획을 세우고 그 정상에 올라가기 위하여 여러가지 준비를 합니다. 훈련도 합니다. 면밀한 계획도 세웁니다. 그러나 모두 성공하는게 아닙니다. 정상을 향해 올라가다 떨어지기도 합니다. 부상 당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이 포기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끝까지 참고 견디는 사람은 결국 정상을 정복하여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 승리를 위하여 필요한 것이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라는 말씀이며 새힘이 되시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 서로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참는것은 곧 사랑이다.

사도 바울은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낸다"라고 말했다. 여러나라 금언에서 볼 수 있듯이 인내는 사랑을 실천하는 유일한 길이다.

"한 줌의 인내는 한 부쉘의 뇌보다 더 값지다"-네델란드-

"인내는 쓰나 그 열매는 달다"-프랑스-

"인내는 악을 쳐 이긴다"-독일-

"인내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전혀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다"-이탈리아-

"인내는 천국에의 열쇠이다"-터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21:19) 참고 견디는 자에게 생명이 있다. 언제나 참고 견디는 정신을 배워 생활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

 

우산을 준비하고 비오기를 준비하자

한 작은 농촌 마을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다. 모든 농작물은 메말라 가고 가축들이 죽어가고, 모든 주민들에게 큰 고통을 가져다 주었다.

어느날 오후, 마을 주민들은 비를오게 하도록 교회에서 기도회를 갖기로 했다. 그들은 계속 모여 기도했다. 마침 그때 하늘이 번쩍이고 침침한 구름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계속 기도했다.

그들도 모르게 바람이 거세어지고 하늘은 구름으로 어두워 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 천둥이 치고 대문이 흔들거렸다. 모든 사람들이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마침내 기다리던 비가 내렸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 서로들 껴안고 춤을 추고 기쁨의 환성을 올렸다. 갑자기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8살쯤 먹은 한 소녀가 온통 함박 웃음을 짓고 우산을 쓰고 비를 바라다 보는 모습을 돌아 본 것이다. 모든 주민들이 비오기를 기도했으나 소녀처럼 비올 것을 믿고 우산을 준비하는 신앙이 부족했던 것이다.

 

후탁성도

요즘 후탁 성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후탁성도란 무슨 말인고 하면 일주일 내내 성경 한 장, 찬송 한곡 안부르다가 주일날이 되면 먼지가 쌓인 성경 찬송을 ""하고 불고 ""하고 쳐서 먼지만을 털고 나오는 성도를 가르치는 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면회 오는 정도로 신앙생활을 하나다면 그의 삶을 주님이 어떻게 인도하시겠는가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일 것입니다.

 

기도를 위한 제안

여기 당신의 기도를 돕기 위한 몇가지 제안이 있습니다.

1.찬양하십시오.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가 행하신 일을 말입니다.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06:1)

2.고백하십시오. 당신의 조그만 잘못이 당신을 파멸로 이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오"(요일1:9)

3.말하십시오, 하나님께 당신과 형제들의 필요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4:6,19)

4.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이 배운 것을 실천하는데 도우시도록.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14:15)

 

어린아이가 태어날 때의 모습

어린 아이가 이 세상에 때어날 때 세 가지 모습을 합니다."울고, 잡고, 발버둥친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사람들이 일생동안 반복하며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살아감에는 슬퍼도, 기뻐도, 눈물이 있고 성취하려고 발버둥치고 소유욕에 붙잡으려고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정신없이 이 땅에 태어난 것 같습니다.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 살아가며 나를 알고, 너를 알고, 우리를 알고 나의 삶을 인도해 주시는 주님을 알았을 때 비로서 나의 사명을 알고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과 속의 씨앗

"누구든지 사과 속의 씨앗은 헤아릴 수 있어도 오직 하나님만 이 씨앗 속의 사과를 헤아릴 수 있다(Any fool can count the seeds in an apple but only God can count apples in a seed)"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인간은 유한하면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시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우둔하고 하나님은 지혜로우시다는 것입니다. 사과 속의 씨앗이야 쪼개어 보면 10개이내의 적은 수 입니다. 누구든지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씨앗을 심게 되면 장차 얼마나 많은 사과나무가 자라서 사과가 열릴 줄은 모릅니다.

 

어떤 심라학자의 삶의 철학

어떤 심리학자가 성공적인 삶의 철학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첫째로,그 않은 자세부터 다르다고 합니다. 성공적인 사람은 맨 앞자리에 앉아 자세를 흐트러 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둘째로,눈동자가 다르다고 합니다. 성공적인 사람은 그 눈동자가 기운이 있고 촛점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눈동자에 확신이 있고 빛이 납니다.

셋째로,성공적인 사람은 말에 음성이나 표현을 ㅗ아서 알 수 있습니다.

넷째로,성공적인 사람은 걸음걸이가 확신에 찬 빠른 걸음으로 걷습니다.

다섯째,성공적인 사람은 시간을 잘 지킨다고 합니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한 시간을 꼭 지킨다고 합니다.

 

이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득자는 꼭 "우리들"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것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리고 모름지기 이렇게 덧붙일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방법으로 하는데 대해 당신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링컨은 저 유명한 메티즈 버어그의 연설에서 이 "우리들"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 연설에서 그는 몇번이고 ""가 아니라 "우리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점을 주의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위대한 전쟁터에서 서로 만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기도를 올리기 위해 여기에 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위대한 사업에 한 몫 끼어들게 하는 말입니다 "우리들"이라는 말을 써야 할 것입니다.

""를 사용해서는 안될 말입니다. ""라는 말은 쓸쓸한 말입니다.

 

승리하는 사람과 패하는 사람

승리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아니요"의 선택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실패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아니오"의 선택이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쓰러지면 언제나 일어나 앞을 보지만 실패하는 사람들은 쓰러지면 뒤를 돌아옵니다. 승리하는 사람들은 눈을 밟아 길을 만듭니다. 실패하는 사람들은 눈이 녹기 만을 기다립니다. 승리하는 사람들의 호주머니 속에는 꿈이 들어 있고 실패하는 사람들의 호주머니 속에는 욕심만 잔뜩 들어 있습니다.

 

오묘한 자연의 섭리

어떤 농부가 큰 호두나무 그늘에 앉아 쉬다가 옆에 있는 호박을 보고 {하나님도 참! 저렇게 큰 호박이 왜 약한 덩쿨에 달리게 하셨담. 저 높은 곳엔 작은 호두가 달리게 하셨고 }라고 중얼 거린 후 잠이 들었다.

조금 후 호두 하나가 뚝 떨어져 농부의 머리를 때렸다. 농부는 화들짝 놀라 농부의 머리를 때렸다. 농부는 화들짝 놀라 일어나며 말했다. {저 큰 호박이 높은 곳에 달렸다면 나는 큰일날 뻔 했구나, 작은 호두를 높은 곳에 두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호박은 낮은 곳에 있어야지요

 

잃는 고통과 찾는 기쁨

인간이 살아가면서 체험하는 쓰라린 아품중의 하나는 잃어버리는 고통입니다. 가진 것이 많으면 잃는 아품도 비례합니다. 내 것을 많이 가질수록 잃어버리는 고통은 지속되며 또 잃어 버릴까 불안에 떨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내가 가지고 온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할때, 잃는 고통에서 해방을 얻고 자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기의 자그마한 소유일지라도 잃어버릴 때 오랫동안 괴로움을 느낍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향한 구원의 심정을 잃는 것에 대한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사람이 양이 백마리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마리를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 다니게 됩니다. 찾은즉, 나는 잃은 것을 찾았노라 하면서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찬란한 슬픔

그리스도인에게 찬란한 슬픔이란 무엇인가? 이는 이 세상의 어떤 종류의 슬픔보다 자신의 죄악을 돌아보는 회개 눈물이 바로 찬란한 슬픔입니다. 찬란한 슬픔 후에 다가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평안을 만나 보십시오.

내가 슬프다고만 슬픈 것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찬란한 슬름은 회개의 눈물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옥합을 깨뜨린 여인 가슴을 쏟는 고통의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기던 여인 이 여인의 슬름은 찬란한 슬픔 영혼을 찾는 슬픔입니다.

 

우리들의 삶은 여행길

우리들의 삶은 여행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삶이 바로 인생의 긴 여행의 과정이라면 기차역 구내의 안내 표지판 같은 것으로 확실하게 표시가 된 것이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다음에 내릴 역은 어대에 어디쯤에서 인생의 길이 바꾸어진다고 말입니다. 불행하게도 인생을 정확하게 안내하는 안내판은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과 함께 갈때 방황하지 않고 확실한 삶의 여행길을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달모양과 성도

우리들의 믿음은 빌려 줄 수도 없고 빌려 올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생활을 달의 모양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믐달 같은 성도는 있으나 마나한 성도입니다. 초생달 같은 성도는 삐뚤어진 신앙을 가진 성도입니다. 상현달 같은 성도는 완전한 것 같으나 부족한 성도입니다. 보름달은 남에게 비추어 주는 성도,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나타내는 성도입니다. 주위를 밝히고 세상을 밝히는 세상에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는 성도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달이라 생각합니까?

 

왜 기도 하는가?

죤스라는 학자는 "사람은 왜 기도하는가?" 하는 질문은 마치 뻐꾸기는 왜 우는가? 라는 질문과 같습니다. 또 독수리는 왜 끝없이 창공을 치솟아 오르는가? 하는 질문과 다를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뻐꾸기는 울도록 지음을 받았고 독수리는 높이 날 수 있도록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기도하도록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기도를 요구합니다. 기도 없이는 생명을 얻을 수 없고 살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극한 환경이 만드는 {最高}

이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향료는 꽃이나 열매에서 추출한 것이 아니라 고래 기름에서 추출한 것이다. 그런데 보통 고래 기름에서 향료가 나오는게 아니라 병든 고래의 기름에서 나온 물질이 향기로운 향료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엠비기스}라고 한다.

병든 소에서 우황이 나와 해열, 진정, 강심제로 쓰인다. 로미산 정상 부근에 나무가 자랄 수 없는 {수목 한계선}이 있는데 거기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겨우 웅크리고 있는 나무가 가장 공명이 잘되는 바이올린 재료가 된다. 고난은 인생을 값지게 한다.

 

하나님을 아는 방법

하나님을 자연 속에서 찾아보면 그의 존재와 그의 지혜와 능력을 엿볼 수 있고, 역사 속에서 찾아보면 도덕적 통치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으며, 인간의 마음 속에서 찾아 보는 사람도 하나님의 인격성과 도덕성을 직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추적이 낳은 잡다한 종교와 철학등이 고장난 라디오의 잡음처럼 혼란 스럽다. 하나님이 성경 속에서 이스라엘 역사와 예언자를 통해서 자신을 직접 계시했고 예수는 그 성경 주체요. 성육신이다. 예수를 보고 아는 것이 하나님을 보고 아는 것이다.(14:7-10). 그 이상도 그 이하도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없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 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14:7)

 

절대변수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127:1)" 만능의 기계 컴퓨터 문명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아폴로13호의 고장 확율은 100만분의 1이였다. 그러나 고장났다. 괄호 안의 수자가 전부 플러스일지라도 괄호 밖의 수자가 마이너스일때 괄호 안의 수자는 마이너스로 변해 버리는 것처럼 하나님을 게산에 넣지 않으면 실패한다. 아무리 보약을 먹어도 하나님의 시한은 못 막는다.무에서 유를 만들고 쓰례기더미 속에서 장미를 피게 하며. 죽음에서 부활하게 하는 하나님의 절대 변수는 컴퓨터의 초인적 게산도 무로 만든다. 모세의 마른 지팡이 하나로 애굽을 이기게 하신 절대변수이다.

 

요한복음과 믿음

요한복음은 믿음과 영생의 책이다.

믿음이란 말이 98회 사용되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를 받고 믿음으로 영생을 얻고 믿음으로 배에서 생수가 터지듯 성령을 받는다 (7:38) 믿음으로 부활에참여하고(11:26) 믿음으로 빛 가운데 거하며(12:46) 믿음으로 예수의 큰일을 행한다(14:12) 요한 서신에도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고 했으며(요일5:4) 바울은 믿음으로 성령을 받고(3:2, 3:4) 믿음으로 악마를 이겼다(6:16) 히브리서 기자는 신.구약 성도의 모든 덕은 믿음의 열매라고 말하고 있다(11)

 

예수의 제자된 표식

1.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생활(14:27) 십자가는 자원해서 지는 것이며,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자기 삶을 내 안에서 사는 생활이다. 중생으로 출발한다.

2. 말씀 안에 거하는 생활(8:31) 성경 속에 거주하고 성경을 먹고 마시며 사는 순종 생활

3. 열매 맺는 생활(15:8) 열매에는 두가지가 있다. 성령의 열매, 즉 품성의 열매와 전도의 열매이다.

4. 사랑(13:34)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을 예수의 사랑으로 사랑한다. 이 벳지를 달지 않은 크리스찬은 가짜이다.

 

유일의 길. 질리. 생명

범죄 이전의 아담은 하나님과 통했고 하나님을 아버지 알듯 알았고 죽음과 죄를 모르는 생명을 소유했었다. 그러나 범죄 후 하나님과의 대하는 단절되고 하나님 아는 일에는 무지하고 죄와 생명과와 차단된 가인족이 되었다 아담은 3중 상실을 했다. 하나님과의 교통 상실 하나님 지식 상실 생명상실

예수님은 3중 회복을 해 주셨다 그의 십자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회복 말씀이 육신되고 하나님이 사람 되신 분 하나님께 대한 최선 최후의 계시이며 진리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중생과 영생을 주신다. 그 유일성은 내 생명의 수보다 유일하다.

 

나사로야, 무덤에서 나오라

죽어 나흘이나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께서 큰 소리로 "나사로야 그곳에서 나오라"하자 죽은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왔다(11:44)

우리가 처해 있는 곳은 어디인가? 어느 무덤 속에 자고 있는가 살펴보자. 회의의 무덤인가? 큰 죄의 무덤인가? 세상 허욕과 근심의 무덤인가? 일 속에 공부 속에 파묻혀 못 나오는 무덤인가? 무슨 시험의 무덤인가?

무덤에 있는 자들아 부활하신 주님의 명령을 듣자, 아무개여. 네 무덤에서 나오라, 지금 그대가 처해 있는 무덤에서 나오라.

 

1."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테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49:15-16)

2."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것이라"(43:1)

3."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8:32-39)"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1:12-13)

세가지가 부정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는 유전이나 혈통으로 출생 될 수 없다 베드로의 자녀일지라도 예수를 개인적으로 영접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못된다 종교 감정적 흥분과 황홀과 도취감 같은 것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태어날 수 없다 종교적 의지와 노력과 성실을 다하고 고행과 금욕 수도생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 돌은 아무리 닦아도 돌이고 아무리 좋은 소도 사람은 아니며 아무리 성자라도 하나님의 자녀는 못된다. 그것이 종()의 원리이다.

 

그리스도의 향기

주님과 우리 사이를 표현하는 여러 비유와 상징이 있다. 포도나무와 가지, 양과 목자, 스승과 제자, 친구, 신랑과 신부, 몸과 지체 그리고 바울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요, 대사요, 향기라는 표현을 썼다.

중은 중냄새, 장사꾼은 돈냄새, 정치가는 정치냄새, 도둑은 도둑냄새가 있다. 사냥개는 사람마다 다른 냄새를 추적한다. 우리에게는 예수 믿는 냄새가 나야 한다. 이광수의 소설 {사랑}속의 순옥은 자기 피가 향기롭기를 원했다. 머지 않아 과학자는 마음의 냄새를 재는 기기를 만들것이다. 내 표정 속에, 피속에, 꿈속에, 무의식속에, 죽음속에 예수의 향기를 풍기길 바랍니다.

 

신앙과 미신

하나님의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이 불신이라면 사실 아닌 것을 사실처럼 믿는 것이 미신이다. 따라서 참 사실을 참 사실대로 믿는 것이 참 신앙이다.

인간을 신앙의 면에서 세 가지로 분류한다면 무신(無信), 미신(迷信), 진신(眞信)으로 분류할 수 있다. 말을 바꾸면 사실은 하나인데 안 믿거나 잘 못 믿거나 옳게 믿거나 셋 중 하나인 셈이다.

더 생각해 보면 못 믿거나 바로 믿는 양자 택일인 것 같다.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둘 중 하나이지 제 3의 입장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진리가 인간의 무지와 미지 속에 잘못 믿어져 왔던가.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할 때까지 전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천동설을 믿었다. 불신자의 미지(未知)와 무지(無知) 속에서 예수가 못 믿어지고 있다. 사실을 안다면 안 믿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생명 로고스

태초에 말씀[예수(로고스 )]이 계시니라. 이 예수는 하나님과 함께 계시고 그 예수는 곧 하나님이시니(1:1) 만물이 예수를 말미암고 예수를 위하여 창조 되었으며 예수 안에서 존립한다(1:16-17)

예수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1:4) 모든 무릎이 그에게 굻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2:11)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그에게 주고(28:18) 그 안에서 통일되게 하신다(1:10)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1)

 

인생의 을 다스리는 믿음

어느 시골에 아름다운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갑자기 주위에 독초가 돋아 나기 시작하더니 물고기가 죽었고 가축들도 그 물을 마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연못가에 버드나무를 심어 보자고 말해 동네 사람들이 버드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러자 버드나무가 자라면서 독초가 자라지 못하도록 양분을 다 빼앗아 그 독초는 죽었고 곧 물이 맑아져 물고기가 살고 가축들도 다시 그 물을 마셨습니다. 때로는 인생에 독소가 돋아날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심겨지면 모든 독기가 사라집니다.(김선도칼럼)

 

1%의 영감이 없이는

에디슨은 성고으이 비결을 묻자 {99%의 노력과 1%으 영감 덕분}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누구나 자신의 우수한 머리만 믿지 말고 땀흘려 노력하라는 권면이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1%의 영감이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 그리고 노력으로는 되지 않는 그 영감이란 하늘이 준 선물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성공과 실패를 결정 짓는데에 1%의 비중밖에 차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다. 그러나 그 1%가 채워지지 않으면 99%가 송두리째 무위로 돌아가야 함을 알아야 한다. 비율로는 1%에 지나지 않지만 그 중요성은 99%의 노력보다 오히려 더할지도 모른다. 1%의 영감. 그것은 하나님의 몫이고 역활이다. 하늘과의 통로를 열지 않으면 1%의 영감은 주어지지 않는다. 기도로, 뜨거운 기도로, 그 통로를 열자.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39절에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셨다. 하나님이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장소를 몰라서 "네가 어디 있느냐" 라고 부르신 것도 아니다. 하나님을 피해서 나무 사이에 숨어 있는 아담을 하나님이 찾아 내셨다. 찾기는 찾았는데 속이 병들고 찢겨 있고, 하나님의 형사이 죽어 있고 인격이 죽어 있고, 영혼이 죽어 있고, 마음과 정신이 병들어 있었다. 이것도 답답하고 기가 막힐 노릇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탄식하신다. 약속을 지켜야 할 네가 어디 있느냐? 인격적인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네 본래의 모습이 어디 있느냐? 양심적인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하나님은 오늘도 나를 부르시고 계신다.

 

내가 문을 열자

예수님이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는 성화 있는데 성화를 본 사람이 그 그림을 그린 화가에게 물었다. 이 그림에 문이 있는데 이 문을 밖에서 열 수 있는 고리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더니, 화가가 말하기를 "이 문은 밖에서 열 수 있는 고리가 없으므로 안에서 열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마음의 문은 밖에서는 열 수가 없다. 안에서 부터 내가 열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하여 그리스도를 향하여, 지금 이 순간 내가 안으로 부터 마음 문을 열고 은혜와 축복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방법

설익고 건방진 공대 4학년생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대는 모는 것을 아는가?" 했더니 조금은 안다고 했다. "10퍼센트를 아는가?" 했더니 100만 분의 1도 모른다고 했다. "그럼 그대가 모르는 99퍼센트 속에 하나님이 존재할 수도 있지 않는가?" 했더니 그 다음에는 존재하는지 않는지 그것도 모른다고 했다" "그럼 그 모르는 것은 어떻게 아는가?" 했더니 그것도 모르겠다고 했다."그럼 그 모르는 것은 어떻게 아는가?" 했더니 그것도 모르겠다고 했다.

우리는 전 공간과 시간, 그리고 모든 존재를 다 뒤져 볼 수 없다. 하나님을 철학 속에서, 비종교 속에서, 역사 속에서, 이 성과 양심 속에서, 실험관 속에서, 자연 속에서 찾아봐도 확실치 않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면 하나님을 안다. 그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다. 그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는 하나님이 사람되어 내게 오신 분이다. 그 밖에 하나님을 알 길이 없다(14:9)

 

()믿음, ()지식

선생이나 부모나 선배들이 일러 준 것을 처음에는 덮어 놓고 믿고 해 본 결과 실효를 알게 되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

길을 모르면 아는 사람에게 물어서 가는데 일고 가는 것이 아니고 믿고 간다. 결혼도 믿음으로 하는 것이지 뿌리째 송두리째 어찌 사람을 다 알고 하는가. 약을 알고 먹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음식도 믿고 먹지 어찌 다 일일이 실험해 보고 먹는가. 진실하고 존경할 만한 분들이 열심히 권해서 해보면 그대로 되는 일이 많다. 인삼 같은 것은 효과를 본 많은 사람들의 증언과 증거 때문에 먹는다. 예수 믿는 것도 수천년 동안 너무도 존경스럽고 진실한 분들이 너무도 열심히 죽으면서까지, 그렇게 많은 분들이 권해서 믿어보면 과연 사실인 것을 후에 알 수 있다.

 

가나안 도착

가나안은 광야를 지나서 전쟁을 치르고 요단강을 건너야 도착하게 된다. 천국은 세상을 지나고 영적인 싸움(선한싸움)을 치르고 죽음의 강을 건너서 도착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출애굽 여정은 기독교인들의 신앙 생활의 여정과도 같다. 창조는 혼돈에서 질서를 말하며 출애굽의 여정은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세상에서 천국으로, 죄에서 의로, 지옥에서 천국으로의 여정이다.

 

어리석은 자의 정의(正義)

"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14:1)" 성경의 가장 어리 석은 자는 하나님 없이 사는 자이다. 성경의 제 1악덕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신앙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케에르 케고르는 "악의 반대는 선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했다. 이와 반대로 성경이 가르치는 지식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일이다(1:7).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교육 만큼 인간에게 참 사는 지혜를 알게 해 주는 교육은 없다. 무신론적 지성은 빛나는 악덕이고 백야(白夜)처럼 어둡다.

 

헌신의 뜻

한 대학생이 목사에게 와서 예수님께 헌신한다는 뜻을 설명해 달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생각 끝에 백지 한 장을 가져오게 해서 그 대학생에게 내밀면서 "예수님전 백지 위임장"이라고 쓴 후 주소와 성명과 날짜를 쓰고 지장을 누르게 했다. 주님은 그 위임장에 무슨 말이나 쓸 수 있도록 위임하는 것이다.

세계를 누비고 다니는 부호 미망인의 외동 딸이 있었다. 귀국 때는 한아름 진귀한 선물을 사다 주었다. 이번에는 국제 전화가 왔다 "네 생일에 무슨 선물 사다 줄까?" "엄마, 선물은 싫어 다 그만둬" "그럼 무얼 원하니?" "엄마가 필요해 엄마 자신이" 헬라의 어느 왕이 궁의 보석, 토지, 건물, 의복 모두를 나누어주었다. 한 궁녀만은 원하는 것이 없었다.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왕이 물었더니 "나는 임금님 자신을 원합니다"했다. 왕은 그녀를 왕비로 택했다. 우리는 예배드리고 헌금 드리고 찬양을 드린다고 한다. 그러나 주님은 나 자신을 원하시고 나는 주님 자신을 원한다.

 

성령이 알게 하신 지식

아무리 완전한 지식도 인간의 지식에는 그림자가 있고 반대 이론이 50%는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이 가르쳐 준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다.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이 내 죄와 죽음에서 나를 구속하셨다는 지식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의 부활이 내 부활이라는 사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 부르고 그가 나를 죽도록 사랑하신다는 사실, 주님이 다시 오시고 내 기도를 들으신다는 사실은 천지가 없어지고 내가 열 번 죽어도 절대 확신하는 성령이 내 영에게 가르쳐 준 지식이다.

 

예수의 살과 피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예수를 믿어 그와 연합하여 그의 가지(15)가 되고 그의 신부가 되고 그가 성령으로 내 속에 대신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크리스천은 먹고사는 양식이 다르다. 세상 떡 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생명 떡, 생명수인 예수를 먹고산다. 예수가 문자 속에 성육신 되었다고 할 수 있는 성경이 성령으로 신자의 의식과 생활 속에 혈육화 될 때 예수는 내 속에 사시게 된다. 음식은 생명의 최우선 필수 요소이다. 음식은 누구나 예외 없이 필요하다 음식은 날마다 필요한 것이다. 음식의 질이 건강과 성장을 좌우한다.

성경 속의 예수를 주야로 묵상하며 거기에다 뿌리를 박고 그 속에 살며(8:31) 내 의식을 예수 의식으로 바꾸며 그를 먹고 마시며 사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이다.

 

필요한 기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데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일들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죄를 이기고, 자신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일을 위해서 필요한 것을 기도해야 한다. 주의 복음이 전파 되는 일을 위해서 필요한 것을 기도해야 한다. 갈바를 알지 못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를 위해서 중요한 문제를 앞에 두고 바른 결정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더 큰 믿음을 얻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은혜에 고마움을 느낄 때 감사하는 기도를 하게 된다.

 

천국과 은혜의식

세상은 공작이 날개를 과시하듯 경쟁과 과시와 비교하는 데에 온갖 삶의 정력을 소모하고 있다. 미모, 가문, 소유, 권력, 예술, 웅변, 노래, 학력, 의복, 체력 등을 겨루어 1등하고 스타가 되고 인기를 얻기 위해 싸우고 죽이기까지 한다. 패자와 승자가 생기고, 등수와 우열이 생기고,빈부와 상하와 온갖 차등이 생긴다. 어린이 세계에도 있고, 실업인 세계 체육인, 예술인, 인기 직업인, 정치인, 학계, 심지어 종교계까지 라이벌은 없는 곳이 없고, 시기, 질투, 중상, 모략 없는 세계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천국은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은혜로 성화 되었고 성령의 은사로 봉사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사랑했고, 주시는 힘으로 순교했기 때문에 자랑하고 뽐낼 것이 하나도 없다. 자기 실력으로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은혜 의식은 겸손과 감사와 찬송과 영광만을 주님께 드리고 싶은 것이다. 거기는 우월감과 열등감이 발붙일 곳이 없다.

 

반 예수 판결에 대한 사형

"일요일 오전 천하의 교회의 종소리를 듣는다, 저것은 모두 1900년 전 로마의 사형수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증거는 아무 데도 없다. " 니체의 말이다. 니체는 거짓말쟁이다. 예수 부활의 증인과 증거만큼 강력한 증언은 일찍이 역사상 없었다. 2000년전 예루살렘의 종교 법정{산헤드린}과 빌라도는 대표된 로마 제국의 정치 법정과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죽이라고 아우성치던 민중 세력은 합세해서 예수를 사형했다 니체 족은 살신(殺神)을 선언하고 사르트르 족은 예수를 살신보다 더 냉혹하게 묵살(默殺)했다. 분노한 민중은 K.K.K단이나 공산당 같은 테러리스트 바라바를 등장시키기 위해 예수를 말살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예수를 부활시켰다. 예수 부활 사실은 인류의 총의(總意)로도 지울 수 없고, 천하가 없어져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예수 부활은 과거와 미래의 반 예수 판결 전수(全數)에 대한 사형인 동시에 예수의 권위에 대한 최종적인 확증인 것이다.

 

어리석은 부자의 4(四無)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는 부지런하고 영리하며 출세한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물질적 성공 외에 지위나 학문, 예술과 스포츠와 기술과 명성등 스타격인 인물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행복했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네 가지 안 가진 것이 있다.

하나님이 그의 의식 속에 없었다. 내세가 없었다.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았다. 영혼을 위한 대비가 없었다. 참 생명은 인간의 영인데 껍데기 가짜 생명만을 생각했다. 이웃이 없었다. 내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내 영혼을 구하려는 노력과 내 이웃을 도우려는 노력도 하나이다. 그것이 내세를 위한 준비이다(12:20-21)

 

바로 말해라.

크리스마스의 상징처럼 눈에 띄는 풍경은 산타클로스와 징글벨 상가세일, 캠페인일 것이다. 거기에다 각종 파티와 교회가 벌이는 사랑과 구제 행사에 으레 신, 구교 대표들과 국가 대표들까지 인도와 박애의 굵직한 메시지가 성명서처럼 발표된다. 아무튼 예수의 성탄이 인류 역사의 A.D B.C의 분수령인 만큼 인류의 성탄절이 된 셈이다. 그러나 여기에 사단이 발명한 전술 가운데 독특한 것은 연막 전술이다. 예수님을 산타클로스화 시켰다. 예수님은 병자와 가난한자 눌리고 고통받는 자의 산타클로스가 아니다. 몽매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을 깨우치는 계몽과 개과천선시키는 산타클로스나 석가나, 해방자가 아니다. 그런 것들은 복음의 부산물일 뿐이다. 말을 바로 해야 한다. 예수는 죄값으로 죽은 사람들을 구속해서 영생을 주러 오셨다(3:16, 53) 그것이 성탄의 핵심 진리이고 복음이다. 자기 죽음으로 죽음을 죽여서 영생 얻게 하려 오신 것이 성탄의 참된 의미이다.

 

예수 안에 산다는 것

어린아이는 내 살 길은 엄마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배가 고파도 엄마 생각, 몸이 아파도 엄마 생각, 신기한 것을 봐도 엄마를 찾고 잘 때도 엄마 손을 붙잡고 엄마 품에서 엄마의 자장가를 들으며 잠듭니다. 크리스천과 주님의 관계도 사랑과 생명의 관계이며 인격적인 신비의 관계이며 영과 영의 관계이다 내주(內住)생활이란 양이 목자를 의존하고, 아기가 부모를 의존하듯, 나무가 태양과 공기와 대지에 뿌리를 박고, 의존해 살듯, 제자가 스승을 믿고, 노아가 방주에서 주만 의지하고, 출애굽의 이스라엘이 주만 믿고 살듯이 그렇게 사는 것이다. 95년도도 주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중, 고등부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사랑함으로 배우는 사랑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7-8)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예수를 아는 지식이 자라고 성도가 성화(聖化) 되기 위해서는 죄를 이기는 것과 성령 안에서 사랑의 생활이 익어야 한다. 대설교가이고 대 신학자일지라도 사랑이 성숙하지 못하고 사랑의 열매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며(고전13) 신유의 은사가 있고 삼층 천을 갔다 왔을지라도 사랑이 떫은 감 같으면 껍데기 신자이다. 그러면 어떻게 사랑을 얻는가? 사랑은 첫째로, 성령 충만의 열매이다. 고로 지속적인 성령 충만의 비결을 배우고, 둘째로, 사랑은 사랑함으로써만 키울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말은 말함으로 배우고, 노래는 노래함으로 배우고, 일은 일함으로 배우듯이 사랑은 행동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만 키울 수 있다.

 

주여 감사합니다.

어느 중년 성도가 대학 병원의 한 수술실에서 혀의 암 때문에 혀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게 되었다. 마취주사를 손에든 의사가 잠시 머뭇거리며 "마지막 남길 말씀은 없습니까?"라고 했다. 글로 쓸 수는 있겠지만 혀를 사용하는 언어는 이것이 최후이다. 간호원 조수, 견습 의사들둘러선 사람들의 표정과 분위가는 심각했고, 잠시 침묵과 긴장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저마다 만일 나라면, 만일 내게 한마디 언어만 남아 있다면 누구의 이름을 부를 것인가 생각해 본다.

드디어 입이 움직이고 두 줄기 눈물이 흐르더니 "주 예수여 감사합니다"라고 세번 되풀이 했다.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끼리만 아는 비밀인 것이다.

 

신앙적 사고방식

사람은 늘 된다고 생각하고 되려고 노력하면 노력하는 대로 되는 경우가 많다 "이이고 죽겠다", "다 틀렸다", "나는 죽었다"하는 식의 부정적 사고 방식과 언어 습성부터 고쳐야 우리 민족의 의식 혁명이 이루어질 것 같다. 민수기 13장의 열 두 정탐 가운데 열 명은 자신들은 가나안 족속의 눈에 매뚜기로 보이고 자신들 눈에도 자신들이 거인 앞의 메뚜기처럼 보이더라고 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이 우리의 밥이라고 했다. 전자는 불신앙적 사고를 했고, 후자는 신앙적 사고를 했다. 전 이스라엘군은 블레셋의 골리앗 앞에서 고양이 앞의 쥐처럼 떨었으나 소년 다윗은 골리앗을 신앙의 눈으로 볼 때 그의 밥이었다. 신앙적 시야, 신앙적 사고의 습성을 길러야 겠다.

 

전심(全心)의 신앙 생활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6:5)",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16:9)", "너희가 점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29:13)" 히스기야 왕은 병들어 꼭 죽게 됐을 때 평소에도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던 그는 전심으로 기도하여 15년을 더 사는 축복을 받았다(38) 솔로몬은 전심으로 지혜를 구했다. 성경의 간구들은 전심으로 생명을 건다. 야곱의 기도, 모세의 기도, 엘리야의 기도, 에스더의 기도, 사도행전의 인물들은 전심 전력 지성을 다했다. 누가복음 18장의 과부의 기도도 한 맺힌 기도였다. 철저히 믿자, 산 순교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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