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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주일예배설교 (성가대헌신예배설교)거룩한 사역자(대하20:2023)


제목 : 거룩한 사역자

말씀 : 대하20:20~23

오늘 말씀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남 유다의 여호사밧 왕 당시 암몬과 모압과 에돔 사람들이 연합군을 이루어 유다를 침공하였는데 여호사밧은 온 백성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는데 전쟁은 내게 속한 것이라며 너희가 싸울 것이 없이 내가 싸울 것이니 너희는 대열을 이루고 서서 내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여호사밧은 희한한 결정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군대를 이끌고 나가 대열을 이루고 그 앞에 성가대를 앞세워 찬송을 하게 합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지지요. 찬송이 시작될 때에 모압과 암몬과 세일산 사람들이 서로 치고받고 하면서 자멸하고 맙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칼 한번 안 쓰고 오직 찬양으로 전대미문의 승리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보면 성가대가 가져야 할 자세를 볼 수 있는데요 이 말씀을 묵상하며 성가대가 어떤 자세로 주님을 섬겨야 할지를 살펴볼 때에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1.성가대원들은 거룩한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먼저 오늘 21절 보겠습니다.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여러분, 여기에 보면 거룩한 예복 즉 성가대 가운을 입혀서 찬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지금이 어떤 상황입니까? 비상 상황입니다. 그런데 찬송은 왠 찬송이며 거룩한 예복은 또 뭡니까? 그럼 왜 이런 비상상황에 거룩한 예복을 입혀서 찬양했습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거룩한 사명감의 고취라고 볼 수 있습니다. 거룩한 예복을 입힘으로 그들이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거룩하신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영광스러운 직분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재인식시키면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성가대도 거룩한 예복 즉 가운을 입는데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폼으로 입는 게 아닙니다. 사람보기에 멋있으라고 입는 게 아닙니다. 목사 가운이나 장로 가운이 성가대 가운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이제 우리는 거룩히 구별되어 그리스도로 옷입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거룩한 사명을 받은 자로 구별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물론 가운을 입는다고 거룩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세로 그 거룩한 직분이나 사명을 감당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가대원들은 이런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우선은 그리스도의 피로 구별된 백성이라는 그래서 거룩한 백성이라는 고백이 확실해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찬양을 위하여 특별히 세움 받은 자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겉으로 입는 예복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믿음과 고백과 사명감이 진정한 예복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고백이 있다면 일상적인 삶도 거룩하게 성결하게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일상적인 삶은 아무렇게 하면서 성가대석에 앉아서 아무리 꾀꼬리 같은 소리로 찬양을 해도 그 찬양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물론 예배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세상에서는 그냥 내 마음대로 살다가 그럴듯한 옷을 입고 그럴듯하게 찬양한다고 그게 온전한 찬양이 되겠습니까? 찬양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구원과 인도하심과 거룩하심과 영광스러움과 인자와 자지를 높여 드리는 일인데 그러한 진정한 고백을 가지고 찬양해야 하고 그렇게 진정한 고백을 가지고 찬양한다면 당연히 일생생활에서도 거룩한 모습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우리 성가대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나는 주님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아 성별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찬양 사역을 위하여 구별된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일상생활도 거룩하고 진실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며 믿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할 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성도들에게 큰 은혜를 끼치며 더욱 생명의 은총과 능력이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성가대는 믿음으로 앞장 서야 합니다.

성가대는 귀한 사명을 가진 자들이니 만큼 일상생활에서나 교회생활에서나 모범을 보여야 하고 앞장서야 합니다. 귀한 일을 맡으면 맡을수록 모든 일에 본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보았던 21절 다시 봅니다.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여러분,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여호사밧은 성가대원들에게 거룩한 예복을 입혀서 군대의 앞에 세워 찬송을 하게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전술적으로보면 이렇게 어리석은 일이 어딨습니다. 적군이 성가대를 향해 돌진해오면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죽을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가대원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다면 두렵고 떨려서 찬양도 제대로 못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선두에 서서 찬양을 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20절 하반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사밧이 서서 이르되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즉 여호사밧이 ‘걱정 말아라.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러면 형통할 것이다.’라고 하자 성가대원들이 그 말씀을 믿고 적을 눈앞에 두고 군대의 제일 앞에서 담대히 찬양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물론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지만 성가대원들은 이런 믿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 속에서 믿음 생활에서 앞장서고 본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교회는 성가대가 목사님 강단보다도 더 앞에 있더라고요. 그래서 성가대원들은 목사님 뒤통수 보면서 예배를 드리더라고요. 오늘 이 말씀을 보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이건 아닌 것 같아요. 뭐니뭐니해도 예배의 꽃은 말씀인데 말씀보다 앞에 가면 좀 그렇지 않을까요? 또 어떻게 보면 뭐 그렇지는 않겠지만 제일 앞의 제일 높은 자리에 앉아 영광을 받는 것 같기도 하고...... 설령 그렇지 않아도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고 하려면 마주보고 해야지 뒷모습보고 하면 좀 그렇잖아요. 여러분, 이야기할 때 한 사람이 뒤돌아서서 하면 어떻겠어요?

여하간 여러분,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귀한 사명, 귀한 직분을 맡은 사람은 언제나 남보다 앞장서야 하고 본을 보여야 한다는 겁니다. 성가대도 동일합니다. 특히 성가대는 예배의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모든 교우들이 마찬가지지만 성가대는 정말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일이 아니면 예배에 빠지면 안됩니다. 안 그래요? 예배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데 빠지면 어떻게 되겠어요? 바쁘다고 빠지고 집안에 무슨 일이 있다고 빠지고 상황이 그래서 여건이 그래서 빠지고... 아닙니다. 생명이 죽고 사는 일이 아니라면 예배보다 우선 될 수는 없습니다.

사탄은 온갖 그럴듯한 이유로 예배를 방해합니다. 합리화시킵니다. 그러나 그런 합리화나 변명은 하나님의 소리가 아닙니다. 사탄의 소립니다. 우리가 속고 있는 것입니다. 아휴 목사님, 세월이 그런데요. 요새 교인들 다 그런데요. 그러면 교인들 다 도망갑니다. 그러면 힘들어서 교회 생활 못합니다. 여러분, 그래서 교회가 힘들어진 게 아닙니다. 반대입니다. 거꾸로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따라 환경 따라 상황 따라 사람 따라 사람 생각대로 편한대로 하니까 믿음이 죽어가고 교회가 힘을 잃고 교회가 욕을 먹고 생명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지면 안됩니다.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은혜와 능력과 지혜를 덧입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탄의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모든 일에 본이 되고 앞장서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자세도 본이 되어야 합니다. 성가대석에 앉아서 졸면 안됩니다.

그리고 물론 교회의 다른 일에도 앞에서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폼 나게 싹 차려입고 하는 일에는 제법 참여하고 궂은 일은 안 하려고 합니다. 부모들도 보면 자녀들을 폼나는 일은 안시켜주면 뭐라고 그러고 궂은 시킨다고 뭐라 그럽니다. 그러나 안됩니다. 그러면 결국 자기가 영광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쁘고 즐거운 일만 아니라 어렵고 힘들고 궂은 일에도 동참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경주의 어떤 교회 이야기인데 그 교회 장로님이 자기 교회는 성가대 찬양 소리가 잘 안 들릴 때가 많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성가대가 잘 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성가대와 함께 다른 쪽에서 학생들이 관현악기 현악기 타악기가 합주를 하는데 그 악기 소리 때문에 성가대가 찬양할 때에 고음은 그런대로 들리는데 저음은 안들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님이 악기연주자를 줄이자고 하니까 목사님이 악기를 연주하는 학생들의 부모들이 서운해 해서 곤란하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학생들에게 교회 화장실 청소를 시키다가 그만두라고 했으면 어땠을까요? 아니 화장실 청소를 시키면 난리가 날 겁니다. 여러분, 폼나는 자리는 안 앉혀 준다고 뭐라 그러고, 궂은 일은 시킨다고 뭐라 그런다면 이게 믿음있는 행동입니까? 여러분, 가정에서든 교회에서도 궂은 일도 해야 합니다. 궂은 일 하는 사람 따로 있고 폼나는 일하는 사람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폼나는 일만 하려고 한다면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요 자기가 영광을 받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특별히 너무나 귀한 찬양의 사역을 맡은 우리 성가대는 찬양하는 일뿐 아니라 신앙생활의 전반적인 영역에서 모범을 보이고 앞장섬으로 삶의 예배가 뒷받침되어 여러분의 찬양이 진정 향기로운 찬양이 되고 여러분의 삶에도 은혜와 기쁨이 넘쳐나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또 한가지 성가대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찬양은 자기 만족이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위로와 소망과 기쁨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찬양을 하면서 우리도 은혜와 위로가 되고 소망도 갖게 되고 능력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한 것은 찬양은 그게 목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찬양이 뭡니까?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구원과 인도하심을 기억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즉 찬양은 나의 기쁨이나 만족이나 은혜나 소원을 이루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오직 전지전능하시고 영화로우시고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며 기쁘시게 해드리며 영광을 돌리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와 능력을 주셔서 상황이나 환경도 이기게 되고 위로도 받고 소망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순서가 바뀌어 자신이 뭔가 얻으려고 찬양을 한다면 그건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노래이므로 찬양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21절 후반부 다시 봅니다.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보세요. 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세요. 힘을 주소서. 용기를 주소서. 저들을 물리쳐 주소서. 그렇게 찬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인자하심을 믿고 그래서 그렇게 구원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찬양소리가 나기 시작했을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도와달라고 위로해달라고 힘을 달라고 소망을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감사와 영광을 돌리자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게 진짜 찬양입니다. 나의 위로 소망 구원 도움이 목적이 되면 찬양이 아니라 찬양을 나의 필요를 채움받기 위한 도구로 전락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진정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성가대는 이 찬양 사역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되새겨보며 믿음으로 감사와 기쁨으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찬양하는 일만 아니라 신앙생활 전반에 걸쳐 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일상생활도 거룩하게 아름답게 하시기 바랍니다. 사람 보기에 그럴듯한 일이든 그렇지 못한 일이든 교회를 섬기는 일에도 앞장 서 주시기 바랍니다. 그때에 정말 여러분의 찬양과 삶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상달되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며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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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주일예배설교 찬양의 힘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


제목 : 찬양의 힘

말씀 : 고후1:3-10

1.찬송은 영혼의 노래다.

서양의 속담에 ‘나에게 하나의 작은 노래를 만들게 하라. 그러면 나는 온 국민을 움직이리라.’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노래가 인간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고, 인간의 감정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군대생활 할 때에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하면서 고향의 봄을 부르면 저절로 눈물이 난다. 멀리 외국에 나가 있을 때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하며 아리랑을 부르면 또 눈물이 난다. 그래서 우리 옛 어른 들은 한이 많아 늘 노래 불렀다. ‘한많은 이세상 야속한 님아, 나를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 그러면서 한을 달래고 애수에 젖기도 하였다.

그렇다. 어쨌든 노래는 인간의 희노애락을 가장 잘 표현하는 수단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쁠 때도 노래를 하고 슬플 때도 노래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에 빠질 때는 사랑의 노래를 부르며 기뻐하고 이별을 할 때는 이별의 노래를 부르면서 이별의 아픔을 달래기도 한다.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무언가 일이 잘 풀리고 형통할 때는 감사의 찬송을 불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바다를 건넌 후에 감사의 찬송을 불렀다. 한나는 아기를 낳지 못하다가 하나님의 은총을 사무엘을 낳고 너무나 기뻐서 그를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을 찬송했다. 마리아는 천사의 예고대로 성령으로 예수님이 잉태된 것을 알고 역시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반대로 어렵고 힘들 때는 하나님의 구원을 호소하며 노래를 불렀다. 다윗은 원수에게 쫓길 때도 시를 지어 노래했고, 범죄하였을 때도 시를 지어 읊조리며 회개를 하였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찬송을 했다. 여호사밧은 국가적인 위기 때에도 찬송을 불렀다. 그러자 감옥문이 열리고 적군이 물러갔다. 그리고 죽을 것 같았던 그들은 살아나 승리했다.

그렇다. 찬송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신앙적 행위이다. 찬송은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와 능력을 받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며 방법이다.

그래서 시33:1절에서는 말씀한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믿음의 사람들은 마땅히 찬송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일이 잘 될 때나 안될때나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과 지혜와 선하심을 믿고 영광의 찬송을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형통하면 감사하여 찬송드리고,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며 호소하며 찬송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믿음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위로를 맛보는 통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사랑과 은혜와 선 앞에서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시기 바란다.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인도하심을 기억하며 감사찬송하며 사시기 바란다. 어렵고 힘들때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위로하심을 바라며 호소하며 찬양하시기 바란다. 그리하여 찬양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찬양을 통해 내려오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기쁨과 위로를 더욱 충만하게 누리는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2.찬송하는 자에게 위로를 주신다.(3-7절)

그렇다. 우리는 찬양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과 위로를 덧입게 된다. 오늘 3절 말씀 보자.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을 찬송하는데 왜 찬송하느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시오, 위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찬송해야 할 이유는 너무나 많다. 그의 전능하심과 자비하심과 은혜와 거룩함과 인자하심과 구원하심과 인도하심과 사랑하심과 뭐 말할 수 없이 많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특별히 위로의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3~7절까지에서는 위로라는 말씀이 매절마다 반복해서 무려 열 번이나 나오고 있다. 왜 이렇게 위로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을까? 그것은 지금 고린도 교회 교우들이 너무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고린도는 항구도시이며 상업도시였다. 물질적으로 부요했으나 도덕적으로 타락한 도시였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흥청망청 살았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소외된 계층들이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조롱과 핍박을 당하고 심지어는 가정과 직장에서 버림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힘든 상황에 있는 교인들에게 위로의 하나님을 전하면서 바울이 제일 먼저 한 말은 무엇인가? 오늘 말씀 3절을 보라. ‘찬송하리로다.’ 놀랍지 않는가? 지금 고린도 교회 교우들은 너무 힘들다. 먹고 살기도 힘들고, 사람들로부터 따돌림 당하고 업신여김 당하고 있다. 교회 안다니는 사람들은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세상적으로 재미있게 살고 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런데 그들에게 제일 먼저 하는 말씀이 뭐라고? 찬송하라는 거다.

어떻게 보면 좀 이상하잖은가? 여러분, 힘들지요. 조금만 참으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위로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힘들어 죽겠는데 찬송하라는 거다. 왜?

이유는 바로 그 말씀 3절 안에 포함되어 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그 모든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넉넉히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기 때문인 것이다. 지금 힘들고 어려워도 너희의 그 모든 고통과 어려움을 진정으로 위로해 줄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여러분, 안 그런가? 정말 우리를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정말로 우리가 어렵고 힘들 때 과연 무엇이 위로가 될까? 사람? 돈? 권력? 지식? 문명? 과학? 물론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제한적이고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다. 결코 그것들을 우리의 진정한 위로자가 될 수 없다.

생각해보라. 돈이나 명예나 권세나 지식이나 과학이나 뭐 이런 것들이 늙고 병들고 세상 떠날 때 무슨 위로가 되겠는가? 물론 세상에 사는 동안 그런 것들도 분명 위로도 되고 힘도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실상 가장 결정적인 때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 어떤 위로도 안된다.

금번에 일본에서 일어난 엄청난 참상을 보라. 과연 인류의 그 엄청난 문명이 우리에게 무슨 힘이 되겠는가? 어떻게 우리의 안전을 보장하겠나? 우리가 아무리 철저하게 대비하고 훈련하고 엄청난 문명을 쌓아 올린다해도 그런 것들이 결코 우리를 지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여기서도 위로와 소망이 되며 나아가 영원히 위로와 소망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그 주님을 믿고 잘 될 때나 안될때나 주님을 찬양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언제 어떤 상황속에서도 낙심하고 절망하고 한탄하고 좌절하고 원망하고 탄식하지 마시기 바란다. 그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란다. 그러면 분명히 주님의 위로와 은혜와 능력이 함께 하신다. 승리케 하신다. 꼭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위로와 소망을 가지고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3.찬송하는 자에게 승리가 있다.

여러분, 그렇다. 세상에서도 그렇고 성경속에서도 그렇고 진정으로 승리한 자들은 다 고난의 순간을 이겨낸 사람들이었다.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은 사람치고 인생의 밤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교회 안에서도 신앙이 좋다고 하는 분들을 가만히 보면 대개가 밤을 통과하신 분들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들을 기꺼이 고난 속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 말씀8,9절에서는 말씀한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사도바울의 전도 여정이 얼마나 험난했는지 살 소망이 끊어지고,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같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3절에서는 ‘찬송하리로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찬송하겠다. 찬송하라. 찬송해야 한다. 왜? 그래도 하나님이시니까. 그래도 주님이시니까. 결국은 승리케 하실 것이니까. 그래서 그는 실제로 죽음과 같은 고통속에서도 찬송했고 승리하지 않았는가? 맞아 죽게 되어도, 배고파도, 헐벗어도, 파선을 당해도 감옥에 갇혀도 기도하고 찬송했고 결국 그는 승리했던 것이다.

여러분, 그렇다. 분명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삶에도 고난이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고난도 우리를 삼킬 수는 없다. 우리는 결코 버려지지 않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전능하신 하나님, 구세주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함께 하셔서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고 능력을 주신다. 그래서 승리하게 하시고 더 성숙하게 하시고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언제 어떤 상황가운데서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원망과 불평은 더더구나 하지말고 기쁘면 기뻐서 감사찬양하고, 어렵고 힘들 때는 주님의 인도하심과 위로하심을 바라며 호소의 찬송을 드리며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능력과 용기와 지혜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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