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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이스라엘과 유대인들

 

 

 

 a) 이스라엘

면적은 2만 425㎢, 인구는 625만 8000명(2001), 인구밀도는 306.4명/㎢(2001)이다.
수도는 예루살렘이고 공용어로는 헤브라이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지중해 동쪽 팔레스타인 지방의 아랍 세계에 존재하는 유대인 공화국이다.
이스라엘이란 헤브라이어로 ‘하나님이 지배하신다’는 뜻으로, 구약성서(창세 32)에 나오는 이사악의 둘째 아들
야곱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19세기 유럽에서 일기 시작한 시오니즘 운동을 배경으로 세계 각지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주하여
1948년 5월에 국가를 수립하였으므로 주변 아랍 여러 나라와 적대 관계에 있으며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1967년의 중동전쟁으로 옛 예루살렘시(요르단령)를 비롯한 요르단, 시리아, 이집트 등 인접한 아랍 여러 나라
영토를 점령하였으나 점령지역을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며 이스라엘화하려고 하는 노력은 국제적으로 승인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 지역을 합치면 이스라엘 영토는 3배로 불어나고 133만의 아랍인 인구를 수용하게 된다.
 

 b) 가자지구

면적은 363㎢, 인구는 75만 5200명(1994)이다.
해안선 길이는 40km, 평균너비는 8km로, 지중해 연안에 위치하며 남북으로 길쭉하다.
중심도시는 가자이고 가자 주변에 약간의 과수원과 경작지가 있다. 

1948년 팔레스타인 전쟁에서 이스라엘군과 이집트군의 격전지가 되었으나, 1949년 UN의 이스라엘-이집트
휴전협정에 의하여 이집트 측에 편입되었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아랍 난민촌에 살고 있으며, 게릴라의 중요한 기지였다.
1956년 수에즈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점령하였으나 1957년 다시 이집트의 영토가 되었고, 1967년 중동전쟁에서
다시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와 함께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는 1993년 9월 13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 이스라엘 점령지의 잠정자치에
관한 원칙선언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1994년 5월 가자와 예리코에서 잠정자치가 시작되었다.
 

 c) 팔레스타인

면적은 2만 6,300㎢이며, 영어로는 팔레스티나(Palestina)라고 한다.
동쪽은 요르단강(江), 남서쪽은 시나이반도, 북쪽은 레바논, 북동쪽은 시리아에 접한다. 

지중해를 따라 좁고 긴 평야가 펄쳐지고, 동쪽으로 갈수록 지대가 높아져 중앙은 구릉지대이다.
이 지역의 동쪽은 경사가 급한 계곡을 이루며, 그 계곡을 요르단강이 흐르고 있다.
남쪽은 네게브 사막지대이다.
기후는 지중해성 기후이고 비는 적다. 

현재 이 지역의 80%는 이스라엘 영토이다.
1948년의 팔레스타인 전쟁 및 1967년의 제3차 중동전쟁 결과 요르단 ·이집트령(領)이 되었던 요르단강 서쪽
연안지역과 가자 지구도 이스라엘이 차지하였다.
이 가운데 베들레헴은 1995년 12월 이스라엘로부터 반환되었다. 

팔레스타인이라고 부른 것은 BC 12세기에 팔레스타인인(人)들의 지배를 받게 된 뒤부터이다.
BC 11세기에 헤브라이인들이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여 솔로몬왕 시대에는 찬란한 영화를 누렸으나 솔로몬이
죽은 뒤 이스라엘과 유다로 분열되었다.
그 후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BC 8세기), 유다 왕국은 신(新)바빌로니아에(BC 6세기) 멸망당하였다.

이 지역은 또한 BC 4세기에 알렉산드로스 대왕 군대의 통치를 받게 되었으며, BC 1세기에는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636년 이슬람교를 바탕으로 뭉쳐진 아랍인들이 로마를 격파한 이후 팔레스타인은 오스만투르크령 시대
(1516~1917)를 포함, 이슬람교도들의 지배가 계속되었다.

다만 그 동안에도 12세기의 제1차 십자군(十字軍)이 예루살렘 왕국을 건설하여 이곳을 통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으로 말미암아 팔레스타인에는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성지(聖地)가 함께 있는
복잡한 종교적 ‘숙명(宿命)’을 안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으나 세계대전 기간 중 팔레스타인 처리문제를
두고 영국이 두 가지의 모순된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팔레스타인을 둘러싸고 아랍 ·유대인 사이에 심한 대립을
빚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강력한 시오니즘을 바탕으로 삼아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移住)와 국가수립을 위한 준비를
실력으로 추진하고 미국의 지원도 얻어내어 1948년에는 이스라엘을 건국하였다.

1967년의 중동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전역을 비롯하여 부근 여러 나라 영토의 일부를
점령하였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약 20만 명의 아랍인들이 요르단 ·레바논으로 달아났으며, 1948년의 전쟁 이후 이곳을 떠난
사람들을 합하여 이른바 팔레스타인 난민의 숫자는 300만 명이나 된다.

이들 사이에는 조상들이 살던 땅으로 돌아가려는 강렬한 소망이 있다.
1964년 이후 그들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통일적 모체로 삼고 여러 게릴라 조직을 만들어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나섰다.
1973년의 제4차 중동전쟁을 계기로 PLO의 싸움은 아랍세계의 석유전략과 결부됨으로써 비약적인 진전을 보았다.

같은 해 라바트에서 개최된 아랍 수뇌회의에서 요르단의 후세인왕은 요르단강 서쪽 연안에 대한 PLO의 주권을
인정하였으며, 1975년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의 민족자결권과 PLO를 준국가(準國家)로 인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현재 108개국이 PLO를 승인하고 있다.

1979년 3월에는 이집트 ·이스라엘 평화조약이 조인되어 요르단강 서쪽 연안 및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주민
자치문제를 두고 양국간의 협의가 진행되기에 이르렀다.
  

d) 유대인 (Jew)

보통 헤브라이인·이스라엘인이라고 부른다.
고대에 유대인은 원래 유다, 즉 유다 지파(약속의 땅을 점령한 12지파 중의 하나) 혹은 유다 왕국의(북이스라엘
왕국과 대비되는) 구성원을 의미했다.
바빌론 유수기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온 이스라엘인을 모두 유대인이라 불렀고, 스스로 이스라엘인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하였다.

그 후 유대교 신봉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예후디라는 용어(라틴어 Judaeus, 고대 프랑스어 Gyu, 현대 프랑스어
Juif, 독일어 Jude, 영어 Jew)가 사용되었는데, 유수 이후의 생존자들(과거 유다 왕국의 주민들)만이
이스라엘인으로서 고유의 주체성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북이스라엘 왕국의 10지파는 BC 721년 아시리아에게 정복된 후 뿔뿔이 흩어졌고 점차로 다른 민족들에게
동화되었음)

유대인이라는 용어는 라틴어의 유다이우스(Judaeus)와 히브리어의 예후디(Yehd)에서 비롯된 그리스어
이우다이오스(Ioudaios)에서 나온 말이다.
예후디라는 말은 〈구약성서〉의 뒷부분에만 나오는 형용사로서 이복형제인 베냐민의 자손과 함께 유다 왕국을
이루고 있던 야곱의 넷째 아들 예후다(유다)의 후손을 가리킨다.

디아스포라(離散)로 자손은 세계 각지로 유랑하여, 그 땅의 인종·민족과 혼교(混交)를 거듭하여 왔기 때문에
형질·문화·종교는 다종 다양하다.
즉 형질상 다수의 유대인은 백인이지만 일부는 유색인(有色人:인도의 Black Jews)이며, 흔히 유대코라고 불리는
갈고리 모양의 코도 지배적인 특징은 아니다.

종교적으로 유대교에서 다른 종교로 개종하거나 무신론자가 된 사람도 많다.
이디시어(語)·헤브라이어 사용자, 유대적 문화(유대曆, 시나고그, 특유의 풍속·요리 등)의 보존자는 점점 감소하고
있다.
또한 디아스포라 뒤에 가속화한 유랑 때문에 유대인은 민족을 구성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이스라엘 국민 중에는 많은 아랍인이 포함되어 있으며, 대다수의 유대인은 전세계에 분산되어 있으므로,
유대인은 현재 민족이 아니다.
유대인이란 형질·언어·문화·국적을 막론하고, 비교적 최근까지 유대교도인 자의 자손이라는 조건을 첨가할 수도
있겠지만, 단적으로 말하면 자신을 유대인이라 생각하고 타인으로부터 유대인 취급을 받고 있는 자이다.

이스라엘도 유대인을 이와 비슷하게 규정한다.
따라서 유대인의 인구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나, 약 1,300만∼1,400만으로 그 반수는 아메리카 대륙에 있다.
이것은 유럽의 유대인이 19세기에 세계 유대인 총수의 약 80%, 1930년에 약 60%였던 것과 대조적이며, 그 변화의
원인은 유럽의 유대인 박해를 피하여 이주한 때문이다.
학자·예술가의 수는 상대적으로 많지만, 대부분의 유대인은 도시에 사는 노동자·중산계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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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운동으로 인한 이스라엘 회복

 

 

 

1.시온운동 (Zionism)

 

고대 유대인들이 고국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 유대민족주의 운동

19세기 후반 동유럽 및 중부유럽에서 시작되었는데, 여러 면에서 이것은 고대 예루살렘 중심부의 시온이라는
약속된 땅, 즉 팔레스타인에 대한 유대인과 유대 종교의 민족주의적인 염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에 앞서 16∼17세기에는 수많은 ‘메시아’들이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복귀를 지원하였다.

한편 18세기 말의 하스칼라(계몽)운동은 유대인들이 서양의 세속문화에 동화되도록 유도하였으나, 동유럽의
유대인들은 동화되지 않았을 뿐더러 제정 러시아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반발로서 ‘호베베 시온(시온을 사랑하는
자들)’을 결성하여 유대 농민들 및 기술자들의 팔레스타인 이주운동을 촉진시켰다.

이러한 시오니즘에 대해 정치적 성향을 부여한 인물은 오스트리아의 저널리스트인 T.헤르츨이었다.
그의 유토피아적인 정치소설 《유대인 국가》(1896)와 《오래 된 새로운 땅》(1903)은 시오니즘을 촉진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897년 헤르츨은 스위스의 바젤에서 제1차 시오니스트회의를 소집하여 바젤계획안을 작성하였다.
이 시오니스트회의는 1901년까지 5차례 개최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시오니즘이 단지 러시아 출신의 유대인 소수파만을 대표하였으나, 그 이후 오스트리아
및 독일의 유대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시오니즘은 전세계에 걸쳐서 자발적으로 규합된 유대인 조직으로서 연설 및 안내책자, 여러 언어로 발행되는
신문들을 통해서 적극적인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러시아혁명이 실패하고 유대인에 대한 학살과 억압이 뒤따르자 러시아의 젊은 유대인들은 선구적인
이주자들로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14년에는 팔레스타인에 9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있었고, 이 가운데 1만 3000명에 이르는
이주자들은 43개의 유대인 정착촌에서 생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정치적인 시오니즘이 재주창되었고, 그 주도 역할은 영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맡게
되었다.
이러한 시온주의자들로서 C.A.바이츠만과 N.소콜로는 1917년 11월 2일, 영국으로부터 팔레스타인 내의 유대
민족국가 건설에 대한 영국의 지지를 약속하는 밸푸어선언을 얻어내는 데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뒤이어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의 도시 및 농촌에서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여 유대인 자치조직을 완성하였고,
그들의 문화생활과 헤브라이어 교육을 강화하였다.
1925년 3월 당시 팔레스타인 내의 유대인 수는 공식적으로 10만 8000명에 달하였고, 1933년에는 23만 8000명으로
증가하였다.

아랍인들은 팔레스타인이 결국 유대인 국가가 되는 것을 우려하였고, 따라서 시오니즘과 이를 지원하는 영국의
정책에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특히 1929년과 1936~1939년에는 아랍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영국은 아랍의 요구와 시온주의자들의 요구를
조정하기 위한 계획을 마련하게 되었다.

히틀러주의가 대두되고 그에 의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자 유대인들도 도피처로서 팔레스타인과 그 밖의 지역,
특히 시오니즘을 옹호하는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아랍인들과 시온주의자들 간의 긴장이 고조됨에 따라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처음에는 미국과 협의하였으나,
후에는 국제연합에 일임하였다.

1947년 10월 27일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을 아랍 국가 및 유대 국가로 각각 분할할 것과 예루살렘을 국제화할
것을 제안하였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국가가 정식으로 성립하자 1948~1949년에는 아랍-이스라엘전쟁이 발발하였고,
전쟁 결과 이스라엘은 국제연합의 결의에 따라 제공받은 땅보다 많은 부분을 아랍으로부터 획득하였다.

결국 제1차 시오니스트회의 이후 50년이 지난 후, 또한 밸푸어선언 이후 30년 만에 시오니즘은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건설하려는 목표를 달성하였다.
그 후 20여 년에 걸쳐 세계에 흩어져 있는 시오니즘 조직들은 이스라엘에 대해 재정적 지원을 계속하였고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장려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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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어원과 역사

 

이슬람의 어원은 아랍어 어근싸리마인데, 이 말은 특히 평화, 청결, 순종, 복종을 뜻한다. 종교적 의미에서의 이슬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분의 법에 복종을 뜻한다. 이 말의 원래 의미와 종교적 의미 사이의 관계는 깊고 명백하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분의 법에 복종하므로써만 진정한 평화를 실현하고 청결을 지속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에서 알라라는 말은 간단하나 지극히 단호하게, 온 세계의 창조자, 주중의 주, 왕 중의 왕이신 유일무이하고 영원한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슬람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유일한 죄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믿는 것이다. 무슬림들이 일상예배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을 다음에 들어둔다: “참으로 자비로우시고 참으로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슬람은 서기 610년 무함맏(마호멧)40세에 최초로 알라(유일신,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이래 약 23년간에 걸쳐 계시 받은 꾸란(코란)이 그 경전이다.

 

초기 이슬람은 무함맏이 그의 출생지이며 최초 계시를 받은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서 그와 몇몇 소수의 교우들에 의해 포교되기 시작했으나 다신교적 분의기의 지역 부족들이 그들의 정치, 종교, 경제적 기득권 유지를 위해 박해한다.

 

이 박해를 피해 서기 622년 메디나라는 도시로 근거지를 옮기는데 이를 "히즈라" (성천,聖遷)이라고 합니다. 이를 기준으로 이슬람력 (히즈라력)이 생겼습니다.히즈라 이후 메디나에서 교세를 확장한 이슬람은 다시 메카로 진격하고 사우디 반도를 통일한다.

 

무함맏은 그의 나이 63세에 세상을 떠나고 그의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계승한 칼리프 (계승자) 시대가 시작된다. 칼리프는 실제로 신정일치의 이슬람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로 만장일치에 의해 선출되며 세습되지 않았다. 선출에 의한 칼리프가 나라를 다스린 시기를 4대 칼리프 시대라 한다. 이후 칼리프의 구가는 동서 칼리프로 나누어지며 세습에 의한 왕조의 형태로 변질된다.

 

이 시기에 이슬람은 북으로 시리아를, 서로는 마그립(지금의 모로코)까지 진출하며 다시 바다를 건너 스페인으로 영역을 넓힙니다. 동으로는 이라크 지역과 페르시아, 다시 중앙 아시아를 거쳐 동남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이슬람의 급격한 확장에 자극받은 중세 유럽은 10961차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이후 1365년까지 아홉 차례, 25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며 이슬람에 일격을 가한다.

 

이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이슬람은 그 확장세가 뚜렷이 둔화됨은 물론 과학과 철학, 동서 교역 등등 찬란히 발달했던 그들의 문화도 사그라진다. 물론 이슬람 문명은 암흑기 중세 유럽에 인본적 사상과 과학문명을 전하여 르네상스를 촉발 시키고 유럽 시민 문화와 산업 발달의 단초를 제공했다.

 

14세기 이후 이슬람 제국은 소아시아(터키) 지역에서 일어난 오스만 제국으로 그 중심이 옮겨간다.

오스만 제국은 비잔틴을 정복하고 그 세력을 확장하여 16세기에는 파키스탄과 이집트까지 확대되어 실질적인 이슬람 제국을 형성한다. 이집트를 근거로 했던 압바스 왕조로부터 칼리프의 칭호를 이양받은 오스만은 모로코를 제외한 북아프리카 전역과 흑해 연안까지 점령하고 지중해 해상권까지도 획득한다.

 

오스만 제국은 17세기를 지나 18세기에 이르러 쇠퇴의 길에 접어드는데 유럽 국가의 남진 정책과 프랑스의 이집트 점령, 아랍 각 지역의 반 오스만 운동과 이슬람 부흥 운동, 이란 페르시아의 새로운 왕조 성립등이 그 이유였다.

 

19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북아프리카, 아라비아 반도 점령과 식민 정책 이후 오스만은 현저히 쇠퇴 하였으며 1914년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나고 오스만은 패전국이 되어 영국과 프랑스의 아랍 지역에 대한 분할 통치가 실시된다.

 

20세기 이슬람은 2차 대전 후 각 아랍국의 독립과 이스라엘의 건국 등으로 아랍.이슬람 세력과 이스라엘.서구의 세력 대결 구도로 편성되었으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영토 분쟁, 석유 개발에 따른 미국과 유럽, 옛소련의 대결로 세계의 전장이 되었다.

 

이스라엘을 앞세운 미국과 아랍국 간의 수차에 걸친 중동 전쟁, 그로 인한 석유 무기화, 1,2차 석유 파동 등 이슬람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전쟁 지역이 되고 만다. 결국 석유를 둘러싼 아랍 이슬람 지역에서의 우위 확보를 위해 미국의 대 아랍. 이슬람 정책이 이슬람 세력의 반발을 불러 오면서 미국에 대한 저항의 결과가 과격 테러로 이어지며 걸프 전쟁, 911 테러, 이라크 침공 등 분쟁이 계속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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