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말하는 행복이란? -전도서를 중심으로-
법치적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개개인은 행복추구권이 있으며, 누구나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며 목표를 세우고 살아간다. 개인마다 행복해지는 방법은 다양하며, 행복을 느끼는 조건도 다양하다.
자본주의적 현대사회의 행복의 중심 조건은 돈, 쾌락, 권력, 명예로 특징지워지며, 그 밑으로 파생되는 행복의 조건은 경제적 여유로움을 통해서 기반으로 얻을 수 있는 상대적 우월감, 욕망의 분출, 사회적 성공, 자아실현 등이다.
특히 성경에서 죄악으로 규정하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통해서 쾌락과 행복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왜나하면 이러한 죄악과 탐욕과 욕망은 자극적이고 큰 쾌감을 주기 때문이다.
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행복의 정의, 행복의 조건은 무엇인가?
A)먼저 죄, 부패, 욕망, 탐욕, 사망을 품고 있는 세상은 허무하다 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이러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각 개인은 허무하다. 욕망과 부패와 탐욕의 결국은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허무주의는 아니다.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가 없는 삶에 한정된다. 즉 성경은 세상에 대해 조건적 허무주의를 표방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1)하나님이 없는, 또는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에서 행복을 추구하고 욕망을 목표로 하는 모든 수고와 행위들은 허무한 것이다.
각자가 야망을 꿈을 가지고 삶의 투쟁의 최전선에서 열심히 살아가지만 결국은 허무한 것으로 결론되어 진다. 헛되고 헛되며 너무나 헛된 것들이다.
전 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 1:3 사람이 해 아래서(하나님이 없는 죄 아래의 세상을 의미)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전 2:1 내가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
전 2:11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2)인간은 유한하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노력과 추구하는 것은 허무하다.
내가 지금은 영원히 살 것 같지만 결국 서서히 약화되어 죽어가고 있음을 깨닫고 있는가? 인간의 생명을 저 광대하고 유구한 자연과 비교해 보라.
인간은 자연을 개발하고 자연 속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으며 마치 자연의 주인인척 자만해 하지만 결국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고, 저 자연은 훨씬 오랫동안 지속된다.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고 자연을 연구하고 기록하고 관찰하여 학문을 발전시킨다. 하지만 자연이 인간 역사를 보고 기록한 진정한 관찰자인걸 알고 있는가? 자연만이 인간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을 부분적으로 관찰하였지만, 자연은 인간 역사의 전체를 관찰하여 왔다. 인간의 역사는 자연과 우주의 삼라만상에 비교하면 한 줌의 재와 같다.
전 1: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전 1:5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전 1: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전 1:7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전 1:14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3)인간의 욕망은 채울 수 없고 만족을 모르기 때문에 허무하다.
오늘 그대에게 최상의 행복을 주었던 조건들이 내일 가면 약효가 떨어질 수 있다. 어쩌면 마약처럼 더욱 자극적이고 강한 행복의 조건들을 추구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지만 늘 마음 한 구석은 공허함으로 가득하다. 그대에게 주는 행복의 쾌감은 너무나 짧고 허무와 공허는 너무나 길게 지속된다.
인간의 행복의 조건은 늘 상대적이다. 상대방과 비교하여 우위를 가질 때만이 행복을 느낀다(우월적 행복감). 내가 가지고 있거나 누리는 조건들이 좋을 지라도, 상대와 비교하여, 상대보다 못하고, 상대보다 밑에 있다고 생각하면 행복하지 않다. 내가 가진 조건들이 나쁘지 않지만 상대적 빈곤을 느끼기에 공허하고 허무하다.
전 1:8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전 2:1 내가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
전 5:10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4)인간이 추구하는 학문과 지식의 결론은 인간이 허무하다는 것으로 도달한다.
왜 허무로 결론되어질까? 파면 팔수록 더 어려워지고, 연구하면 할수록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계속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내지만 결국 인식론적 한계를 느끼고 더욱 절망하게 된다.
인간의 학문과 지식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의 이치를 다루는 것이기에, 결국 하나님의 시각으로 결론되어 진다. 인간은 학문과 지식발전을 통해 신으로부터 도피하여 인간의 자유와 능력을 갈망하지만, 오히려 인간의 자유와 능력은 더욱 제한되어진다.
인간의 학문과 지식은 자연과 우주 앞에 인간의 무능과 연약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인간의 지적 능력에는 인식론적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학문을 하는 자들은 이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우주와 이 세상에 대해 거만한 자세를 낮추어야 한다. 그러기에 인간의 학문과 지식이 만능이며 신적 능력에 도전하여 결국 이것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거만한 생각은 버려야 한다.
전 1:13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B)하나님이 없는 세상, 죄 아래의 세상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것은 허무하다. 그러나 성경은 새로운 낙관적 희망을 제시하며, 참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1)이 세상은 허무하지만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에게는 새로운 낙관적 희망이 보인다.
성경의 낙관주의는 죄 아래 세상의 허무주의를 뼈저리게 느끼고 통탄할 때 비로소 다가오며 느낄 수 있다. 성경의 낙관주의는 허무주의와 미묘한 긴장관계를 두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영구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신적 목적을 품고 있으며,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신의 의지와 신의 목적을 모두 알 수 없지만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세계를 추구함으로써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물질적 세계는 유한하고, 영적 세계만이 영원하다는 이원론적 세계관(플라톤적 이원론)은 비성경적이다. 성경은 물질과 영적 세계 모두 하나님의 계획과 주권 아래 있을 때 영원함을 갖는다고 말한다(예를 들면 주님의 재림시에 있을 새로운 부활의 몸과 이 세상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 완전하게 회복되는 것)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으며, 이것이 충족되어질 때 행복을 느낀다.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자신의 본질을 찾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일부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부인하면서, 무신론적 물질적 세계관을 갖거나, 또 다른 일부는 타종교의 신앙으로 방향을 돌리고 만족을 추구한다.
전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2)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선을 행할 때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은 무한경쟁을 통해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자 하는 싸움을 할 때 공허함을 느끼지만 좋은 일, 선한 일을 할 때에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선을 행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남이 모르게 선을 행하여 보라. 그대에게 진정한 행복이 파도처럼 밀려 올 것이다.
전 3:12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3)하나님은 각자에게 몫을 할당해 주셨다(분복). 이러한 자기의 분복에 만족해하는 자는 행복하다.
어떤 이는 더 많이 가질 수 있고, 어떤 이는 더 유명해 질 수 있듯이 각자의 분복 즉 할당된 양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공평하시기에 남이 없는 것이 나에게 있을 수 있으며, 나에게 없는 것이 남에게 있을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각자의 고유의 몫이기 때문에 서로 비교해서는 안되는 고유의 영역이다.
각자 개인은 하나님이 주신 분복-할당된 몫-에 만족해 하며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서로를 비교하여 시기와 질투를 하는 것은 사탄의 속성이기에, 마땅히 이를 지양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각자의 이러한 분복을 누리고 수고해서 만족해야 참다운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자기 몫에 대하여 자기만족을 해야만 참다운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주신 분복-할당된 몫-을 넘어서는 과도한 욕심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
전 3:13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전 5:18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
전 5:19 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4)인간은 인식론적 한계, 지식과 학문의 한계를 겸허히 인정할 때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학문과 지식의 발달과 연구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학문과 지식을 연구해서 발전시켜야 한다. 그러나 어짜피 인간의 학문과 지식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연구하는 것이다. 결국 학문과 지식의 결국은 하나님을 향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은 학문과 지식을 통해 인간이 만드는 유토피아적 세상을 세울 수 있다고 낙관적 희망을 갖지만, 세심히 보면 아직 많은 문제가 남아있으며, 그러기에 더욱 겸허해지는 자세를 배워야 행복해 질 수 있다(20세기 초 산업혁명과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간은 낙관적 유토피아를 꿈꿔왔다. 그러나 안타깝지만 현실에서는 반대로, 더 많은 식민지가 건설되어 생명을 유린하고 자본을 약탈하였으며, 영토확장과 정치적 충돌은 과학기술로 말미암아 가속화되었고, 이로 인한 1차,2차 세계대전은 오히려 인간의 잔인과 무지, 파괴적 본능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전 8:17 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 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
5)참다운 행복은 수많은 성적 파트너와 성적 탐욕을 추구하지 않고 부부와의 온전한 관계를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할당된 몫은 배우자이지 또 다른 성적 파트너가 될 수는 없다. 세상의 무료함에서 일탈하고자 성적 탐닉에 빠져 수 많은 파트너와 쾌락을 즐기는 것은 결코 행복을 줄 수 없으며 육신의 질병과 심한 심적 공허함을 더할 뿐임을 알아야 한다. 오늘도 또 다른 파트너와 모텔에서 광난의 시간을 보냈는가? 그러나 마음은 더욱 공허해질 것이다.
전 9:9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6)참다운 행복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들을 지킬 때 온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은 인간을 결박하고 옥죄어서 자유를 빼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자유롭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감시하는 분이 아니며, 오히려 죄악과 사망과 욕망의 감옥에서 탈출하여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누리기 원하신다.
하지만 세상의 죄악 가운데에 있는 사람은 신의 속박으로 부터 해방을 누리기 위해 신을 부정하며, 신으로부터 멀리 멀리 도망을 가지만 결국 그들이 얻는 것은 죄악의 쇠사슬로 묶여 지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와 행복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결박당하고 구속당할 때 찾아오며, 하나님으로부터의 도피는 오히려 절망과 허무, 공허함을 더 할 뿐이다.
전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7)참다운 행복은 종말론적 심판을 준비하는 삶의 자세에서 나온다.
종말론적 심판을 부정하는 자들은 인간은 죽으면 끝이며 더 이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의 근원은 물질론적 세계관이다. 인간은 물질이기에 인간이 죽으면 물질은 사라지며 더 이상 아무것도 없고, 아무 것도 느낄수 없는 無 의 세계라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은 물질만의 존재가 아니며 비물질적 존재이기도 하다. 비물질은 사라지지 않으며 인간의 물질부분(육체)이 사라진다 할지라도 영구히 지속된다. 영구한 비물질이 존재한다는 세계관에는 선과 악에 대한 종말론적 심판이 있다. 종말의 심판을 준비하는 자는 마치 회계(accounting 會計)하는 자처럼 철저하고 꼼꼼하게 자신의 삶을 준비한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 있는 자들은 이러한 종말론적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믿음 안에서 철저히 준비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이 세상의 종말은 파괴가 아니라 새롭고 완전하게 되는 회복이며, 그러한 회복에 앞서 먼저 선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져야 한다. 종말론적 심판의 의미는 하나님 만이 절대기준이며, 이러한 기준에 따라 모든 사람은 공정하게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대 앞을 그냥 스쳐 지나갈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심판을 부인하며 자신의 정당성을 보장받고 싶어하지만 안타깝게도 피해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전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결론
인간의 행복은 허무주의와 낙관주의의 긴장관계에 있다. 인생사는 허무하면서도 낙관적이다. 어떻게 보면 비참하고 허무한 것이 인생사이지만, 어떻게 보면 희망과 낙관이 있다. 행복은 세상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모든 가치와 행동, 그리고 얻어지는 부와 명예와 탐욕과 쾌락은 너무나 공허하며 허무하다.
진정한 행복은 이처럼 죄 아래의 세상은 허무하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며, 하나님 아래서 주어진 각자의 몫을 발견하고 각자 수고하며 그 결과물에 만족하고 누릴 때 찾아온다. 각자의 분복-할당된 몫-은 절대적 가치를 지녔기에 타인과 절대 비교불가이다. 어떤 사람은 죄악 가운데서 부를 누리지만 허무한 인생을 살고, 어떤 이는 하나님 안에서 가난하지만 참다운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다. 과연 믿는 자들은 세상에서 어떤 행복을 추구하며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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