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교회사 개요 

 

1세기 - 가톨릭 교회가 시작된 것은 성령 강림 때이다. 베드로를 중심으로 사도들과 제자들이 성령을 충만히 받고 나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하느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보내주셨으며 그분은 메시아 즉 구세주로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부활 승천하셨으니 그분을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으리라"하는 것이 그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이었다. 예수의 제자들이 열성적으로 복음을 전파함으로 나날이 신자들이 늘어나고 사도들을 중심으로 신앙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제자들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자 유대인을 중심으로 하는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가 각각 형성되었다. 이방인을 중심으로 한 교회 중 특히 시리아의 다마스커스 교회, 안티오키아 교회, 로마 교회가 큰 공동체로 성장하였다. 그 후 바울로(바오로)의 열성적 전교에 힘입어 이방인을 중심으로 한 교회들을 융성하나 예루살렘의 유대인 중심 교회는 쇠퇴하게 되었다.

2세기∼3세기 - 이때는 이미 12사도들이 사망하였으므로 사도 후 시대(100∼300년)가 시작되는데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교회 관습이 유대교적 색채를 띠며, ②교계제도가 확정되어 주교, 신부, 부제 등의 등급이 생겼고, ③그리스도 신학이 정립되었으며, ④로마의 영토 확장으로 그리스도교가 확장되었고, ⑤그 후 그 발전을 견제하기 시작하여 로마 황제들로부터의 박해가 200년간 계속되었다.

4세기 -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발표, 신앙의 자유가 선포되었다. 그리고 392년 데오도시우스 황제 때 가톨릭 교회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이로 인해 ①수도회가 창설되고, ②공의회를 열어 교회의 문제를 협의하고, ③전례가 발전하였으며, ④정통 가톨릭 교리가 정립되어갔다.

5세기 -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으로 로마가 멸망하였다. 게르만 민족 특히 프랑크 왕국의 문화와 고대 그리스 문화가 융합되어 중세 문화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때 가톨릭 교회가 위기를 맞는 듯했으나 게르만 민족의 회개로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고대사회 제2기 [312-604년] 

 

콘스탄틴 대제부터 그레고리오 대교

    

제1절 콘스탄틴 轉換

콘스탄틴의 개종

Constantinus는 로마군 장교 Constantius Chlorus와 Helena의 아들, 285년경 로마 제국의 속주(屬州)나이수스(Naissus)[1]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니코메디아의 디오클레시안 궁전에서 보냈다. 모친Helena는 旅人宿 주인으로서 콘스탄시우스와 결혼하였지만 법률상의 아내는 되지 못하였다. 당시의 로마법이 고급 장교들에게 속주의 주민들과의 결혼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93년에 콘스탄시우스는 로마 제국 서부지역의 막시미안(286-305) 제2정제(正帝,August) 치하에서 제2부제(副帝, Caesar)로 임명되어 Gaul 지방과 Britannia 지방의 통치자가 되었다.당시 동부지역의 제1정제는 Diocletianus(284-305)였고 제1부제는 Galerius(305-311)였다.[2] 이 때에콘스탄틴의 부친은 副帝가 되는 조건으로 막시미안 정제의 의붓딸인 Theodora Fausta와 결혼해야 했기에아내와 헤어졌다. 콘스탄틴은 296년에 디오클레시안과 이집트 전쟁에 출전하러 가던 도중에 팔레스티나에서 장래의 敎會史家이며 체사레아의 주교가 될Eusebius(260-340)를 만나 친교를 맺었다.

 

305년 5월에 두 정제인 디오클레시안과 막시미안이은퇴를 선언하였을 때에 콘스탄틴은 그의 부친이 제1정제가 되고 자신은 그의 부친을 계승하여 제2부제로임명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디오클레시안은 그의 사위인 갈레리우스를 제1정제로 임명하고 콘스탄틴의 부친은 제2정제, 두 副帝로는 Maximinus Daza(305-313)와 Severus(306-307)를 임명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불만을 품은 콘스탄틴은 몰래 황궁을 빠져나와 그의 부친이 있는 Gaul지방의 불로뉴(Boulogne)로 갔다가 후에 그의 부친과 함께 브리타니아로 건너가Galedonia 전쟁에 참전했다. 306년 7월 콘스탄시우스가 York에서 사망하자 군대의 지도자들이 콘스탄틴을 正帝로 추대하였다. 이제 그는 부친을 계승하여 골지방과 브리타니아 속주를 다스리는 통치자가 되었다.이로써 로마 제국에서는 디오클레시안이 제위 계승의효과적 방법으로 수립한 4인 정치체제의 질서가 붕괴되었다. 콘스탄틴은 그의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강력한군사력을 통해서 310년에 에스파냐를 정복하여 로마제국의 서부지역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311년, 제1정제인 갈레리우스가 사망한 후 서부지역은 콘스탄틴과Maxentius(306-312)가 영토를 나누어 지배하였고,동부지역은 Licinius(311-324)와 막시미누스 다자가지배하였다. 당시 콘스탄틴은 동방의 리치니우스와, 막센시우스는 막시미누스와 정치적 동맹을 맺고 있었다.콘스탄틴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대해 그의 부친처럼관용정책을 시행하였고 리치니우스도 이에 동조하였다.

  

312년 콘스탄틴은 당시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지배하고 있던 막센시우스와의 정권투쟁을 계획하고,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 동부지역 황제인 리치니우스에게 자기의 누이동생인 콘스탄시아를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한 후, 막센시우스의 영지인 이탈리아로 出征하였다. 그는 알프스를 넘어 Turin, Milano, Verona 등지에서 저항군을 격퇴하고 로마로 진격했다. 로마의 티베르강에 놓여 있는 Milvio橋에서 상대방의 막강한 군대와 마주쳤을 때 그의 군대로서는 로마를 점령할 수 없음을 알았다. 전투 전에 발현(또는 꿈)을 통하여 그와 그의 군대는 그리스도교 神의 가호와 구원의 표징을 받았다. 마침내 그는 그리스도교 신의 이름으로 대승리를 거두었다. 밀비오橋 전투의 승리는 그의 생애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제 그는 서부 유럽 전체를 차지한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고, 312년 10월 로마의 원로원은 그를 최고통치자로 영접하고, 그의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문을 착공했다(315년에 완성). 이제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을 보호신으로 공경하기에 이르렀고, 후일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는 길을 열어놓았다.

  

그런데 콘스탄틴의 大勝戰과 그리스도교 귀의에 대한상이한 기록과 두 견해가 논란되고 있다.

 

 첫째 문제는, 밀비오교 전투 직전에 있었던 콘스탄틴의 체험이다. 락탄시우스에 의하면, 콘스탄틴은 꿈에서 그의 군인들의 방패에 神의 천상 표시를 붙이고 싸우라는 지시를 받고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단어의 첫 글자인 ‘ ’를 십자 표시인 ‘+’에다가 윗 부분을 약간 구부려 ‘f'로 바꾸어 방패에 그려 넣어 그리스도인의 신을 보호신으로 삼고서 전투에 나가 승전하였다. 기적적 사건 기술이기보다는 황제의 꿈은 쉽게 이행될 수 있는 着想을 일으켜준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황제와 그의 군대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의 보호 하에 전쟁에 나갔으며 승전의 결과는 그리스도교의 신이 이러한 결심을 일으켜주었고, 보호신으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반면에 콘스탄틴의 친구인 에우세비오는 황제 자신이 겪은 체험을 듣고 황제의 사망 후에 <콘스탄틴의 생애>라는 저서를 내놓았는데 여기서 황제가 실제로 발현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콘스탄틴은 전쟁의 勝算을 확인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어느 날 오후에 그리스도교 신자의 신에게 기도하면서 도움을 청하였을 때 그의 군인들과 함께 공중에서 빛나는 십자가와 “이것을 가지고 싸워라”라는 문구를 보았다. 그리하여 황제는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모노그램(Χ와 Ρ의 조합문자)이 그려진 군기를 만들어 가지고 싸워 승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상의 두 기록 중에서 오늘날 학자들은 락탄시우스의 실사적 진술을 에우세비오의 기적적 진술보다 더 신빙성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둘째 문제는, 콘스탄틴의 전환에 대한 동기(動機)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있다. ① 내적인 마음의 변화 즉 종교적 체험의 영적 결과로 보기보다는 순전히 황제의 정치적 책략으로 간주하는 견해 - 그 증거로, 그의 재위기간 내내 우상숭배의 이교사상을 배격하지 않았고, 전임 황제들이 지니고 있던 대사제(Summus Pontifex)의 황제 칭호를 그대로 보유하고 있었음을 든다. ②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그의 내적 변화는 매우 긍정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 이유는 황제가 일신교적인 미트라(Mithra : 태양신)의 신도로서 어느 정도 종교적 경험을 가지고 있어 이미 오래 전부터 그리스도교의 일신론에 대해 내적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이 지적되고 있다. 콘스탄틴은 일신교와 그리스도교에 대한 경향이 짙은 가정의 분위기에서 성장하였고, 3세기 로마 제국의 종교적 성향은 모든 신들을 초월하는 최고신(Summus Deus)에 대한 신앙이 우세하였는데 그의 부친 콘스탄시우스가 바로 이러한 일신교 신봉자였다. 그는 신도들에 대한 박해령을 무시하고 관용정책을 실시하였다. 더욱이 콘스탄틴 가정에는 이복 여동생 Anathasia가 그리스도교 신자(또는 유다교 신자)였고 또 다른 이복 여동생 콘스탄시아도 그리스도교 신자로 간주되었다.

 

 帝國敎會의 창설

밀비오橋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콘스탄틴은 로마에서두 달 동안 지낸 다음 313년 봄에 밀라노로 갔다. 거기서 그는 누이동생 콘스탄시아와 동부지역의 황제 중의하나인 리치니우스의 결혼식에 참석하여 두 황제는 이른바 ‘밀라노 관용령’이라는 포고령을 선포하여 동부로마 제국의 집정관들에게 제국내의 여러 종교에 부여된 기존권을 그리스도교에도 승인하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관용을 베풀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또 다른동부 황제 다자는 박해자로서 이 포고령을 수행하는 데장애 요소가 되었다. 따라서 리치니우스는 313년 4월Adrianopolis에서 M. 다자와 싸워 승리한 결과 동부지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으며, 6월에 니코메디아에서 밀라노 관용령을 시행하라는 포고를 내렸다. 이제로마 제국의 모든 지역에서 그리스도교 박해는 완전히종식되었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한편 서부 로마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된 콘스탄틴은 그리스도교와 그 신도들에 대해 우호적 정책을 실시하였고, 312년 말 자기 군대의 군기에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를 뜻하는 상징을 사용하였다. 그는 재위기간중에 그리스도교에 대해 물질적 특혜와 법적 특권을 부여하였다. 313년 교황에게 라테란 궁전을 기증하여 그곳에 라테란 대성전(성 요한 대성당)을 건립하고, 320년경에는 베드로 대성전을, 이어 예루살렘 무덤 성당,베들레헴 예수 성탄 성당 등을 건립하였다. 이로써 그리스도교 예술과 건축이 처음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는 이교도의 종교 행사를 조심스럽게 제한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312년, 이교도 제관들에게 부여했던 면세특권을 그리스도교 성직자들에게 부여하였고 특히 주교에게 국가의 사법권을 이양(移讓)했다. 또 성당이 죄인의 도피처(逃避處)가 되는특권도 부여했다. 국사범 용의자는 교회를 피신처로 삼을 수 있었으며 주교는 이 특권으로 국가의 결정을 무시하고 성당을 정치범의 보호소로 제공하기도 했다. 황제는 315년에 십자가 처형을 폐지시켰고, 321년에는主日을 그리스도교의 예배일로 공인하였고, 국법에 의해 주일과 교회 축일을 공휴일로 정했다. 이러한 변화는 그리스도교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아울러황제는 몰수된 교회 재산의 반환 조치를 취하였고 321년에는 교회가 상속권(相續權)을 갖는 법을 제정하여신자들이 재산을 교회에 기증할 수 있게 하였다. 이로써 교회는 급속히 방대한 재산을 축적하고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토지는 교황 그레고리우스1세(590-604) 이후 교황청에 흡수되었으며, 증여물과 기부금에 의해 생긴 재산은 교회로 하여금 가난한이들을 돕는 구호단체가 되도록 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반면, 로마 동부지역 황제인 리치니우스가 324년에反교회 정책을 시행하자 콘스탄틴은 크리스폴리스 전투에서 리치니우스를 격퇴시키고 全로마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이후 그리스도교 역시 로마 제국안에서 보편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콘스탄틴은 325년에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기 위해니체아에 제국의 주교들을 소집하여 최초의 공의회를열도록 했고, 330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을 새로운 그리스도교적인 수도로 건설하였다.

 

  그는 사생활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인임을 공언하였고,그의 가족 모두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임종 직전(337년)에 세례를 받고 황제복을 다시 입기를 거부, 흰 領洗服을 입은 채 세상을떠났다. 동방교회는 대제를 ‘13번째의 사도’, ‘준사도’로 공경하고 있다.

  

대제를 계승한 세 아들, 콘스탄틴 2세(337-340), 콘스탄스(337-350), 콘스탄시우스 2세(337 -361)는 부친의 교회 정책을 그대로 시행하였고, 동시에 이교 사상과 종교 행사를 탄압하였다. 콘스탄시우스 2세는341년에 미신행위와 우상숭배를 금하였고, 346년 콘스탄스와 함께 로마 제국 전역에 이교 신전을 폐쇄하라는 명령을 선포하였다. 이들의 노력으로 로마 제국은점차 그리스도교화 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대제의 이복형제의 아들인 율리아노(361-363)가 황제로 등극하자 잠시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거부하고 과거의 우상숭배의 종교 행사를 다시 일으켰다.그러나 그가 페르시아인과의 전투에서 戰死함으로써그의 이교 사상의 부흥작업도 끝맺게 되었다.Jovianus(363-395)는 제국에서의 특권적 위치를 교회에 다시 돌려주었다. 이후 로마 황제들, 특히Theodosius 1세(379-395)가 그리스도교 정책의선구자가 되었다. 그는 유능한 통치자로서 388년에 로마 제국을 통일하였는데, 그의 시대에 교회와 국가가제휴관계를 이루어가기 시작하였다. 380년 2월 황제는 ‘가톨릭 신앙에 대한 칙령’(De fide catholica)을반포하여 동부지역의 국민들에게 니체아 공의회의 전통신앙을 받아들이도록 명하였고, 동시에 모든 국민이이 종교를 받아들이도록 선언하였다. 이 칙령은 그리스도교가 제국의 종교로 설정됨을 시사한 것이다. 황제는그리스도교 이단자들에게는 교회 설립과 종교 행사를금지시켰고 정통교회로 돌아오도록 강권을 발동하였다. 그는 1년 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소집하여 그의칙령을 법으로 통과시켰다. 그리고 당시까지 이교도의마지막 보루이며 피난처였던 원로원도 로마 신에 대한신봉을 포기해야 했다. 392년에 또 하나의 법령을 반포, 모든 그리스도교 이단의 가르침을 대역죄에 해당되는 벌금형에 처하고 이교 우상숭배의 종교 행사를 모두重刑에 처하는 금령을 내리고, 이교도 제관과 여신을섬기는 童女들의 수입금과 함께 이교 神殿의 재산을 몰수했다. 이러한 反이교정책과 親그리스도교 정책 이후로 이교 신앙은 국민의 공적 생활에서 점차로 사라지고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확고한 자리를 잡게되었다. 이러한 政敎一致로 국교 시대의 주교들은 자기지방의 행정권까지 갖게 돼 지방에서의 주교들의 영향력이 증대되고, 국민의 보호자로서 권력가들의 압박과관리들의 수탈로부터 가난한 이들을 보호하는 임무를완수했다. 또한 주교들은 황제의 정책 결정에 영향을미쳤고 그의 시행착오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전환기의 문제성

 

 교회와 국가의 이 같은 밀접한 관계에 대해 이미 동시대의 사람들도 서로 다른 견해를 보였으니,어떤 이들은→ 감사와 기쁨에 넘쳐 그것을 국가의 그리스도교화로간주(에우세비오)하였고,어떤 이들은 → 교회의 ‘俗化’를 두려워하기도 했다.

중세 교회개혁 문헌→ 콘스탄틴 이전 ‘원시교회’(Ecclesia primitiva)만이 개혁의 전형으로 보았다

즉, 사도적 단순함, 청빈에 대한 이상, 세상으로부터의격리가 원시교회의 특징으로서, 그것으로 교회가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① 교회는 이러한 특징으로 돌아가야 한다(11, 12세기피오레의 요아킴 요구)

② 13, 14세기 프란치스코회 엄격주의자들 → 콘스탄틴 이후 교회에서 쇠퇴밖에는 보지 않았다.

③ M. Luther, 이러한 쇠퇴의 원인을 교황직의 책임으로 돌리고. 그 이후 ‘쇠퇴이론’이 프로테스탄트 역사 서술에 성행하게 되었다.

계몽시대 → 모든 악의 원인이 사제직의 지배욕에서 비롯되는데, 사제들은 박해가 끝나면서부터 황제의 총애를 누리고, 권세욕에 물들고, 복음의 순수성을 그들의이기적 관심으로 희생시켰다.

콘스탄틴 이후 : 제국교회 → 자진하여 국가 권력에 순응함으로써 본연의 사명을 배반하였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부정을 저질렀다.

이러한 잘못된 발전이 시작된 시기에 대해 19세기와20세기에 이르러 이견 지닌 이들 생겼다.

① 부패가 벌써 사도시대의 종료와 더불어 시작되었다는 이들

② 초기 그리스도교의 호교가들에 의한 그리스도교의희랍화로 시작되었다는 이들

③ 콘스탄틴과 더불어 시작되었다는 이들이 있었다.

 

 주요 비난은 언제나 콘스탄틴에 대한 것이었다.

 

그가 그리스도교를 박해에서 해방시키고, 국가 질서에배열시킨 것은→ 의심 없이 하나의 선물로 간주되었다.그러나 콘스탄틴은 즐겨 자신을 ‘동료주교’로 불렀고,니체아의 축연에서 겸손하게 행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황제였다. 얼마 안 가 그는 주교직을 그의 관직처럼 지배하고, 비록 순 교회 사정에 관계되는 일일지라도 국가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할 것을 요구하였다(예 : 아타나시오 335년 황제에 의해 추방됨). 그 후 콘스탄틴은 교회 내의 생활에 더욱 심하게 간섭했다.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 → 신학 지식의 깊이와 그리스도교 구원 신비의 궁극적인 의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부족했다는 것이었다. 그 예로, 아리우스파의 분규 시초(324년)에, 그는 양측 대표자인 아리우스와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델 주교를 화해시키기 위해 그들에게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에서 양 파의 대립 문제를 지엽적인 것으로 판단했는데 실제로 이 문제들은 그리스도교의 존립문제와 상관되었고, 또 구원 교리자체가 문제시 된 사실도 그는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럼에도 콘스탄틴은 니체아 공의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중요한 신앙문제에 대해 자신이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자각하고 있었다.

 

 그는 아리우스와 그의 신봉자들을 파문한 공의회의 결의에 처음으로 국가적인 추방을 뒤따르게 했고, 종교문제에 대한 국가의 지속적 간섭은 그 이후 이단자를 화형에 처하기에 이르렀다.

 

  (예) 황위 찬탈자인 Maximus(383-388)는 스페인과 갈리아의 금욕운동의 창립자인 스페인 평신도 프리스킬리안을 385년 트리어에서 그의 6명의 伴侶와 함께 처형시켰다. 여기에는 정치적 음모가 개입되어 있었다.

 

  교회의 중요한 대표자들인 투르의 마르티노, 밀라노의 암브로시오, 로마의 시리치오 교황은 위의 이 잔학한 행위를 아주 맹렬하게 단죄했다. 그러나 불행히도처형의 편을 든 주교들도 있었다.

 

  이 같은 국가와 교회의 공생, 둘의 적극적인 상봉이란획기적 사건은 많은 신자들에게, 이제 교회는 자진해서국가의 자유에 맡겨야 하고, 국가의 임무에 적극적으로협조해야 함 생각했다.

 

  승리의 도취감 → 세속과의 격리가 급속화되고

 

                → 일종의 세계 개방적인 문화 낙관주의로변하게 되었다.

 

  콘스탄틴 자신 → 주교와 신부들에게 권한과 전권 위임하고, 교회에 많은 영예를 부여했으나,

주교, 신부들 → 국가와 교제하는데 있어서 전혀 경험이 없었다.

 

             → 그동안 박해에는 잘 대응했으나, 국가의 호의적 태도에 대해 미숙했다.

 

형편에 따라서는 호의적인 것이 적대적인 것보다 더 위험스럽다는 사실 체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의 보호를 받는 교회로 몰려든 군중은 교회에 완전히 새로운 과제를 제기했다.

 

확신에 차 있고, 순교를 각오한 신자들의 엘리트의 교회에서 → 정치적으로 야심이 있고, 종교적으로 무관심하고, 아직 반은 이교적인 사람들이 몰려들어온 대중의교회가 되었다. 이로써 종교의 평범화 및 이교적·미신적인 것의 침투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목적에서 종교의世俗化나 남용이 교회를 위협하게 되었다. 교회는 이위험들을 극복하였던 것일까?

 

  만일 우리가 예수의 肉化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또한교회를 모든 시대와 민족과 문화에 속한 사람들에게 예수의 구원사업을 완성하기 위한 예수의 삶의 계속으로인식한다면, 우리는 그 理想을 본래 주어진 형식을 고수하는 것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실제의 역사적인 발전에 여백을 남겨두어야 한다. 교회의 특성은진정한 역사성이다.

 

  교회는 시대와 떨어져서, 시대와 나란히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시대 안으로 들어가고, 시대 안에서 자신을시간화한다. 어느 시대에 있어서도 교회는 정지될 수없다. 교회는 본래 개개의 문화에 대해 중립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관심이 아니라 모든 문화에 대한 개방과접근을 의미한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모든 시대와 문화 안으로 끌고 들어가, 그 안에서 형태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와 세상을 향한 개방 사이에서 올바른 중용을 유지해야 한다. 세상으로의 접근과 세상으로부터의 격리 사이에 있는 큰 변화의 넓은폭이 교회의 품안에서 성인과 죄인, 승리와 패배의 여지를 제공한다. 그래서 한 시기의 부정적인 면에 이론을 제기하거나 그것을 간과하는 것은 비학문적이고, 비신학적일 것이고, 긍정적인 면을 부인하는 것 역시 비역사적이고 비학문적일 것이다.

 

  당시의 포교열(布敎熱), 종교문제를 토의하고 신학문제를 해결한 그 정열, 특히 수도생활의 발전과 성인의큰 숫자는, 콘스탄틴 이후의 시기가 지닌 여러 가지 약점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활기와 참된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충만했던, 교회사상 한 위대한 한 시기의 성격을부여하는 것이다.

 
[1]) 오늘날 유고슬라비아의 Nis지방


[2]) 당시 로마 제국의 동부지역에서 제1정제는 Nicomedia에,  제1부제는 Sirmium에 정주하였고, 서부지역에서는 제2정제가 Milano에, 제2부제가 Trier에 거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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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박해의 종료.

 

1)기독교박해와 콘스탄틴의 전쟁역사.

 

갈레리우스가 사망한 후 로마제국은 리키니우스, 막시미누스다이어, 콘스탄틴, 막센티우스 등등에 의하여 4개로 분할 통치되었다. 이때에 리키니우스, 막시미누스다이어, 콘스탄틴 등등은 서로를 인정하면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막센티우스를 반역자로 규정하여 적대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완전하게 종료되어지는 역사적 순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콘스탄틴에 의해서 종료되었다. 그리고 콘스탄틴에 의하여 로마 기독교가 국교로 공식화 되며 로마교회를 통하여 기독교의 세계화가 추진된다. 따라서 우리는 콘스탄틴에 대한 역사를 정리한다.

 

콘스탄틴은 기원274년에 다뉴브강 남쪽의 나이수스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디오클레시우스의 서로마 부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클로루스였고 어머니는 헬레나였다. 장남인 그는 부친이 293년에 서로마의 부황제가 되자 디오클레시우스의 황궁에서 비잔틴식 군주정치를 수업했다. 그는 부왕이 사망하자 측근들에 의해 서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투스황제 자리에 등극했다. 콘스탄틴은 로마제국의 맹주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을 확장하면서 군부를 강화시켜 나갔다. 그는 특히 고울지방과 영국 일대에 튼튼한 기반을 조성했다. 그는 당시 만족<蠻族-오랑캐>로 알려진 민족들이 출몰하던 라인강유역의 방위를 강화하고 선정을 베풀어 그 지역 주민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는 원래 이상적이고 도덕적인 인격을 소유한 군주는 아니었으나 매우 현명하고 지혜로운 정치가였다. 그는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의 주민들을 최대한으로 보살피어 그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대신 치외권에 속하는 자들에게는 혹독하고 잔인한 정복자였다. 당시에는 각종 경기장에서 격투기를 비롯한 각종 경기들이 유행하였는데 그것은 당시의 사람들이 격렬한 경기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콘스탄틴은 사람들의 흥미를 만족하게 채워주기 위하여 수시로 경기를 열었는데 이때에 격투기, 검투기, 또는 짐승들과의 싸움에는 주로 전쟁포로나 노예들이 사용되었고 특히 만족출신의 전쟁포로들이 동원되었다. 역사가 들이 전하는바에 의하면 이때에 죽어간 만족 출신의 전쟁포로들의 숫자가 엄청났다고 하며 심지어는 짐승들마저도 사람을 죽이는 일에 싫증을 냈다고 한다. 특히 그는 노련하고 치밀한 군사 전문가로서 전쟁을 할 때에 철저한 사전 준비와 전략을 세워서 속전 속결적인 전투로 아군의 피해를 최대한으로 줄이는 대신에 최대한의 전과를 올리는 승리의 귀재였다. 콘스탄틴은 오랫동안 준비를 갖춘 후에 자신의 통치지역을 먼저 철저하게 방비하여 내란이나 반란을 사전 차단하면서 군대를 고울<갈리아>지역에 집결시켰다. 그리고 순식간에 알프스산을 넘어 막센티우스가 다스리는 로마로 진격했다. 이때에 투입된 군대는 전체 병력의4/1이었다. 그는 로마 전투에서 패할지라도 본국에서의 내란으로 인하여 더욱 큰 실패를 하지 않으려는 계산을 철저하게 하였다. 콘스탄틴과 막센티우스의 한판 승부는 매우 불가사의 한 의문적 전쟁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전쟁 역사가들의 연구조사에 의하면 그 싸움은 처음부터 막센티우스가 절대적으로 승리하게 되어 있었다. 로마는 자체적으로 완벽한 수비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콘스탄틴의 군대는 험준한 알프스산을 넘어 오느라 이미 지쳐 있었다. 뿐만 아니라 콘스탄틴의 군대는 후방 보급로가 알프스산을 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할 한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약점이 있었다. 콘스탄틴이 예상치 못한 때에 갑자기 공격한 것과 속전속결로 전쟁을 마무리하려고 하는 것에는 이와같은 약점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막센티우스가 철통같은 방어만 하고 기다리는 지구전으로 나갔으면 콘스탄틴은 스스로 무너지거나 후퇴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막센티우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막센티우스는 콘스탄틴이 진격해 오자 즉시 군사회의를 소집했는데 이때에 의견이 엇갈렸다. 대부분의 장군들은 콘스탄틴이 저절로 지칠 때 까지 아우렐리안의 성벽<Aurelian`s wall>에서 기다리기만 하면 다급해진 콘스탄틴이 무리한 공격을 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방어 후 공격을 주장했다. 그러나 주술가들은 반대의 의견을 내 놓았다. 그들은 콘스탄틴군이 이미 지쳐있을 때 공격하여 그들을 패배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들에게 휴식의 기회를 주면 피로가 회복되고 또한 후방에서 보급물자가 도착하면 저들의 사기가 올라 무찌를 수 없게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아울러 그들은 자신들의 주술로 콘스탄틴군을 이길 수 있다고 호언장담<好言壯談>했다. 그들은 전쟁의 장소를 구체적으로 지정하여 티베르강의 밀비안<Tiber`s Milvian Bridge>다리가 승리의 격전장이 될 것이라고 까지 했다. 막센티우스는 당연히 군사 전문가들인 장군들의 의견을 따랐어야 하는데도 비 군사 전문가들인 주술사들의 의견을 따랐다. 한편 콘스탄틴은 결전이 있기 전 날에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았다. 콘스탄틴이 하나님께 받은 계시는 여러 가지로 전승되어지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정확한지 알 수 없다. 소아시아의 니코메디아<Nicomedia>에서 웅변학을 가리키던 라틴계의 변증가이며 기독교 역사가였던 락탄티우스<Lactantius>의 증언에 의하면 콘스탄틴은 꿈속에서 기독교의 상징을 병사들의 방패에 부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에 콘스탄틴은 꿈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병사들의 방패와 군기에 승리를 보증하는 표식으로 헬라어 알파벳 중에”CHI<X>”RHO<P>를 결합한 장식무늬를 그려 넣으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 문자는그리스도”<CHRIST>의 처음 두 문자 임으로 그 표식은 기독교를 상징하는 것이 될 수 있다. 315년에 로마에서 발행된 동전 화폐에 이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4세기 후반의 역사가들은 이 무늬를 라바룸<Labarum>이라고 명칭 하였다. <이러한 전설에 영향을 받은 일부 교회들은 XP를 기독교 상징의 문자로 사용하였고 이러한 관행은 오늘 날에도 일부 교회들에 의하여 지켜진다.>

 

한편 유세비우스의 증언에 의하면<이것으로 정복하리라>하는 단어들과 함께 공중에 그 깃발의 환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또 어떤 전승은 십자가 깃발을 앞세우고 전투하라는 음성이 있었다고도 한다. 콘스탄틴이 계시를 받게 된 사연에 대한 증언들도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콘스탄틴이 하나님께<이번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주시면 기독교 핍박을 종식시키고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하겠다.>고 기도한 후에 계시를 받았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네가 승리하면 기독교인이 되겠느냐?>라고 하문하시어 콘스탄틴이<제게 승리를 주시면 반드시 하나님의 종이 되겠나이다.>라고 대답한 후 계시를 받았다는 등 여러 가지가 있어서 과연 어떤 것이 진실인지 알 수가 없다. 콘스탄틴이 하나님께 받은 계시의 진위성을 우리가 확인할 수는 없으나 결과는 한가지로 전해진다. 콘스탄틴과 막센티우스의 전투는 로마근교 북방의 작은 마을인 삭사루브라<Saxca Rubra>에서 벌어졌다. 그들은 티베르강의 밀비안<Milvian>에서 최후의 격전을 벌였는데 이때에 막센티우스가 밀비안다리 위에서 싸우다가 강물 속으로 떨어져 빠져 죽었다. 이로서 콘스탄틴이 로마제국의 서부를 완전히 장악하였고 제국의 동부지역은 리키니우스와 막시미누스다이어가 공동으로 통치했다. 콘스탄틴은 로마제국의 서부를 장악한 뒤 동부를 공격하려는 야심을 감추고 리키니우스와 평화 동맹조약을 체결하였다. 콘스탄틴과 리키니우스는 밀란<Milan>에서 동맹 협정을 체결했는데 이때의 협정서 중에 기독교에 대한 조항이 들어 있다. 그 협정서에는 기독교에 대한 모든 탄압을 즉시 중지할 것과 몰수 된 교회와 개인들의 재산들을 환원한다는 조항이 들어있다. 역사가들은 그 협정조약을<밀란칙령-Edict of Milan-A.D.313>이라고 명칭 하였다. 역사가들 중에는 이 칙령을 관용의 칙령<Edict of Toleration>이라고 명칭하기도 하였는데 이 칙령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한 것은 아니었고 종교적 양심에 의한 절대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 준 것으로서 기독교를 여타의 종교들과 대등한 위치에 올려놓은 것이었다.<밀라노 칙령은 분실되었음으로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으나 당시에 니코메디아 관리들에게 기독교에 관한 세부규정을 설명한 리키니우스황제의 포고문은 남아있다.>

 

그러나 막시미누스다이어는 갈레리우스의 칙령에 따른 기독교 박해를 계속했다. 콘스탄틴은 동부를 공격하고자 하는 야심을 철저하게 은폐하면서 리키니우스와 막시미누스다이어가 전쟁을 하도록 은밀하게 유도했다. 콘스탄틴은 리키니우스가 안심할 수 있도록 자신의 사촌 여동생 콘스탄스를 리키니우스와 결혼시켰다. 콘스탄틴은 마지막 결전에 대비하여 전력을 비축하면서 여러 경로를 통하여 그들이 전쟁을 하도록 계략을 꾸몄다. 콘스탄틴의 계략에 휘말린 그들은 드디어 전쟁에 돌입했다. 전쟁은 막시미누스다이어가 먼저 시작했다. 콘스탄틴과 리키니우스의 동맹에 불안을 느낀 막시미누스는리키니우스가 밀란에서 콘스탄틴과 함께 있을 때에 리키니우스의 영토에 침입하여 비잔티움을 함락시켰다. 그러자 리키니우스가 즉시 반격하여 막시미누스다이어를 패퇴시켰다. 막시미누스다이어는 도주했고 얼마 후 사망했다. 이로서 로마제국은 리키니우스와 콘스탄틴이 동서를 양분하여 통치하게 되었다. 리키니우스는 이탈리아 전체와 이집트를 통치했고 콘스탄틴은 서부유럽과 북아프리카를 통치했다. 사람들은 두 황제들이 사촌 매부 처남 관계였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의 전쟁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두 황제는 다 함께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고자 하는 야망을 불태우고 있었다. 두 황제는 전력을 정비하고 다듬으면서 호심탐탐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전쟁의 불꽃이 튀었다. 콘스탄틴을 암살하려는 음모가 발각되었는데 조사결과 배후에 리키니우스의 친척이 있었음이 드러났다. 그는 도망하여 리키니우스에게로 갔고 콘스탄틴은 리키니우스에게 그를 송환 할 것과 납득할 수 있는 해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리키니우스는 그것을 거부하고 전쟁을 선포했다. 이미 전쟁의 구실을 찾고 있었던 콘스탄틴은 즉시 군대를 동원하여 리키니우스를 공격했다. 두 차례의 격전 끝에 콘스탄틴이 비잔티움을 정복했다. 비잔티움을 빼앗기면 아시아와의 교통이 두절되어 보급로가 차단될 것을 두려워한 리키니우스는 비잔티움을 돌려받는 대신에 유럽영토 대부분을 콘스탄틴에게 양도하기로 하고 평화협정을 맺었다. A.D.314년의 일이었다. 그 후 두 황제 사이의 권력 투쟁은 한 동안 소강상태에 들어갔고 제국은 평안했다. 그러나 A.D.322년에 이르러 최후의 승부를 판가름하게 되는 전쟁이 일어났다. 콘스탄틴은 야만족들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다뉴브강을 건너 리키니우스의 영토를 침략했다. 리키니우스는 이것을 고의적인 도발로 간주하고 즉시 대항했다. 이때에 콘스탄틴의 군대병력은 리키니우스 군대병력에 비해서 극히 소수였다. 그러나 전투는 콘스탄틴의 승리로 끝났다. 이때의 전투에서 리키니우스의 군대가 콘스탄틴의 군대보다 훨씬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패전한 것에 대하여 당시의 역사가들이 매우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전해준다. 이때에 도콘스탄틴군은 기독교를 상징하는 깃발들을 앞세우고 전투에 임했는데 리키니우스의 군대가 그 깃발을 몹시 두려워하여 전의를 상실하게 되자 리키니우스는 병사들에게 그 깃발을 바라보지 말고 고개를 숙인 채 전투에 임하라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리키니우스군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전투에 임했으므로 전투다운 전투 한번 못해 보고 패전하였다는 것이다. 또 어떤 역사가는 리키니우스군이 콘스탄틴군의 깃발을 보면 아예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림으로 전투가 매우 싱겁게 끝났다고도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역사가는 당시의 전투가 매우 치열했으나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리키니우스가 패했으며 패배 이유는 깃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략과 전술적 차이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리키니우스가 많은 병력으로 소수의 콘스탄틴군을 포위하여 활과 창으로 공격했으면 충분하게 이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일하게 맞대결 하여 칼로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정예군인 콘스탄틴군에게 패했다는 것이다.

 

리키니우스는 비잔티움으로 패주하였으나 콘스탄틴의 추격을 견디지 못하고 바다를 건너 소아시아 지방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콘스탄틴의 추격으로 연전연패 하면서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였다. 이때에 콘스탄스와 니코메디아<Nicomedia>의 감독 유세비우스<Eusebius>가 리키니우스의 구명을 탄원했다. 콘스탄틴은 리키니우스가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조건으로 그의 목숨을 살려주었다. 이로서 드디어 전쟁은 끝났고 콘스탄틴은 전 로마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2)콘스탄틴에 대한 역사적 평가.

 

콘스탄틴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들의 역사적 평가 기준에 따라 각기 다르다. 그 중에 특히 기독교 역사학자들과 기독교를 거부하는 역사학자들 사이의 평가가 첨예한 대립을 이룬다. 콘스탄틴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평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기독교 역사학자들의 평가.

 

기독교 역사학자들은 콘스탄틴을 훌륭한 기독교인으로 추대한다. 그들은 심지어 콘스탄틴을 신앙적 영웅 황제로 추대한다. 그들이 콘스탄틴을 신앙적 영웅 황제로 추대하는 이유는 그를 통하여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가 사실상 종료되었고 기독교가 제국의 국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콘스탄틴이 밀비안전투 이전에 하나님께 계시를 받았을 때 회심하여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모든 전투에 하나님의 군대를 이끌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출전하였으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승리하였다고 주장한다. 저들은 특히 밀비안다리에서 막센티우스를 패퇴시킨 것과 아드리아노플에서 리키니우스를 패퇴시킨 것을 하나님의 군대의 승리라고 말하며 따라서 콘스탄틴을<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황제><하나님의 황제><기독교의 수호황제>라고 명칭했다.

 

(2)일반 역사학자들의 평가.

 

기독교 역사학자들이 콘스탄틴을 영웅시 하는 것과는 달리 일반적 역사학자들은 콘스탄틴을 종교인<특히 기독교인>으로 보지 않고 노련하고 출중한 정치적 역량을 가진 탁월한 정치가로 본다. 그들은 콘스탄틴이 치밀한 계산적 정치 책략에 의한 고도의 정치 기술을 발휘하여 제국을 통치했다고 본다. 저들이 그러한 주장을 하는 이유는 콘스탄틴이 추구한 종교적 정치 노선이다. 콘스탄틴은 기독교 박해를 종식시킴과 동시에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까지 추대했음에도 불구하고 퇴위하기 직전까지 여전히 로마의 전통적인 종교를 인정했고 그 중에<정복되지 않는 태양신>을 가문적 수호신으로 받들어 섬겼으며 심지어는 이방종교들의 제사장 역할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콘스탄틴은 비잔티움을 새로운 로마의 수도로 건설한 후에 그곳에 기독교적 유물들만 건설하거나 옮겨 놓은 것이 아니라 제국 전체에 산재해 있는 모든 종교들의 각종 종교적 유물들을 거의 다 옮겨놓았다. 때문에 일반 역사학자들은 콘스탄틴은 기독교인이나 종교인으로서가 아니라 다만 정치가로서 모든 종교를 공평하게 수용하고 적절하게 아우르는 정책을 수용한 정치가 였다고 보는 것이다.

 

(3)기독교에 적대적인 역사학자들의 평가.

 

기독교에 적대적인 역사학자들은 콘스탄틴을 기회주의자이며 교활한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라고 평가한다. 저들은 콘스탄틴이 밀비안 전투에서 막센티우스에게 승리할 때와 아드리아노플에서 리키니우스를 패퇴시킨 것은 기독교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계산된 사기극에 의한 승리라고 주장한다. 즉 꿈속에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 것과 환상 속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모두가 치밀하게 계산된 거짓말이고 사기라는 것이다. 저들의 주장에 의하면 콘스타틴은 당시에 이미 기독교인들에 대한 개념이 옛날과는 많이 달라져서 사람들 중에는 기독교의 하나님은 정말로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과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황제들의 말로가 하나같이 비참하였고 특히 전임 아우구스투스황제였던 디오클레시아와 갈레리우스가 비참한 종말을 고했다는 점에 착안하여 자신이 직접적으로 기독교의 하나님께 계시 받았다고 거짓 유포하고 기독교를 상징하는 깃발들을 만들어 전투대열의 선봉에 세움으로서 적군의 사기를 꺾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자들은 막센티우스와 리키니우스를 불운한 황제로 보았고 특히 리키니우스를 더욱 불운한 황제로 동정하였다. 저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사실상 막센티우스나 리키니우스는 특별히 기독교를 탄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크게 학정을 베풀지는 않았다. 리키니우스가 콘스탄틴과 대결하기 직전에 한때 기독교를 탄압하였지만 그것은 고의적인 탄압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그를 배척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리키니우스 통치 하의 기독교는 여러분파로 분열되어 있었고 그들의 분파적 갈등과 다툼은 사회적 질서를 파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리키니우스는 할 수 없이 친위대를 동원하여 기독교의 종교적 갈등을 진압했는데 이때에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들은 리키니우스를 배척하고 콘스탄틴을 지지했다. 이에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틴 지지자들을 색출하여 처벌했는데 이로 인하여 콘스탄틴 지지자들은 점점 늘어가는 반면에 군대의 사기는 점점 저하되었고 때문에 결국은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4)객관적차원에서의 평가.

 

콘스탄틴에 대한 객관적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콘스탄틴은 개인의 권력에만 집착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로마제국의 영광을 복원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사람이었다. 그는 로마제국의 영광을 위하여 원로원과도 과감히 맞섰고 심지어는 자신의 아들조차도 제거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과거의 데키우스나 디오클레시안 황제들처럼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려 했지만 방법에 있어서는 그들과 달랐다. 과거의 황제들은 로마의 전통적 종교 위에 로마의 영광을 세우려고 했지만 콘스탄틴은 기독교의 토대 위에 로마의 영광을 복원하려 하였다. 콘스탄틴의 이러한 정책은 원로원을 비롯한 귀족들의 결사적인 반대를 받았고 심지어는 콘스탄틴을 제거하고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려는 음모까지 있을 정도로 심각한 반대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힘으로 원로원을 제압하였으며 황제퇴위 사건에 연루된 자신의 큰 아들 크리스푸스<Crispus-리키니우스와의 전쟁에서 함대 사령관이었다>까지도 과감히 처형하였다. 때문에 객관적 역사학자들은 콘스탄틴을 로마를 사랑한 아름다운 황제로 평가한다.

 

(5)우리의 평가.

 

역사란 보는 사람의 견해에 의하여 얼마던지 다르게 평가될 수 있다. 하나의 사건을 어떠한 개념에서 어떠한 눈으로 보는가? 하는 것에 따라서 반역이 혁명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혁명이 반란이 될 수도 있다. 충신이 역적이 될 수도 있고 역적이 충신이 될 수도 있으며 간적이 영웅이 될 수도 있고 영웅이 간적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전승들에 의하여 당시의 상황들 살펴보게 될 뿐이다. 때문에 과연 어떠한 견해가 바른 견해인지를 알 수 없으며 어떠한 상황이 사실적인 역사인지를 함부로 정립할 수도 없다. 따라서 콘스탄틴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참으로 조심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기독교역사에 많은 아름다운 역사를 제공한 콘스탄틴을 평가한다는 것은 자칫하면 편파적인 것이 될 수 있기에 더욱 조심스럽다. 따라서 그 점을 미리 밝히면서 기독교 박해역사를 종식시킨 콘스탄틴과 당시의 기독교와 당시의 로마의 상황을 역사적 차원에서 조명한다. 아울러 다음부터 기록하는 것들은 모두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추론일 뿐 그것이 정확한 실제적 역사는 아니라는 사실을 미리 밝혀둔다.

 

*우리는 당시의 상황들과 그의 정치적 결과들을 근거로 하여 콘스탄틴을 노련하고 탁월한 정치가로 인정한다. 그리고 그의 야심 찬 로마영광 재현의 꿈도 사실로 인정한다. 아울러 우리는 그가 막센티우스와의 전투전에 받았다는 계시도 인정한다. 역사가들의 전승들이 서로 약간씩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그 모든 것들을 다 함께 인정한다. 왜냐하면 계시의 내용이 똑같아야 한다는 이유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의 계시를 다양하게 내려주셨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는 그가 분명한 기독교인이었음을 확신한다. 그가 기독교인이 된 것은 밀비안 전투에서 였을 것이다. 그 이전의 콘스탄틴은 다만 로마제국의 맹주가 되어 로마제국을 과거의 화려하고 웅장하고 강하고 영광스러운 로마제국이 되게 하려는 야심 찬 정치가였다. 그가 야만족 포로들을 경기장에서 무참하게 죽도록 한 것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보면 분명 악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당시 로마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대로마제국의 황제로서 비난받을 수 없는 통치적 행위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콘스탄틴이 밀비안 전투를 통하여 기독교인이 되었을 때부터 그에게는 새로운 삶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그가 죽음에 임박할 때까지 세례를 받지 않은 점과 이방 신상들을 섬긴 것은 그가 기독교인이 아니기 때문이거나 또는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망서렸다거나 또는 계산된 정치적 계략에 의한 양다리 걸치기식의 비열한 태도는 아니었을 것으로 본다. 우리는 그가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그의 삶이 인격적인 기독교인의 삶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해서는 않된다. 그가 비록 회심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할지라도 로마의 귀족으로서 수십 년간 생활해 온 그가 하루아침에 성경이 요구하는 차원의 기독교인이 될 수는 없는 것이며 뿐만 아니라 대로마제국의 황제인 그가 순식간에 전형적인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그의 신앙적 삶에 대하여 많은 욕심을 내서는 않된다. 또한 우리는 당시의 로마제국과 기독교의 상반된 입장을 역사학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로마제국은 세계를 호령하는 대제국이었던 반면에 기독교는 아직 로마제국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 분야들은 전통적인 로마의 귀족들에게 편중되어 있었고 따라서 황제는 그들을 무시할 수 없었으며 로마에는 또한 수많은 종교들이 산재해 있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배려도 당연히 요구되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황제가 기독교라는 어느 한편에 치중하는 정치적 노선을 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그가 말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세례를 받고 정식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사실과 그가 이방종교들과 계속하여 꾸준히 교류를 가졌다는 것을 당연히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오히려 그때에 콘스탄틴이 오직 기독교만을 주장하지 않고 보편적인 종교정책을 펼친 것에 대하여 그의 탁월한 지혜를 칭찬한다. 만약에 그가 오직 기독교만을 주장하여 기독교 이외의 종교들을 탄압했다거나 또는 비잔틴 건설을 오직 기독적인 도시로 건설하여 다른 종교들의 접근을 일제히 차단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은 분명 콘스탄틴의 몰락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며 더욱 극심한 기독교 탄압의 역사를 재현하는 결과를 만들었을 것이다. 콘스탄틴이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먼 장래를 내다보는 지혜로움으로 그러한 정책을 펼쳤는지 아니면 다만 정치적인 차원에서 그렇게 했는지를 우리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통치 방법은 분명히 기독교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콘스탄틴의 통치 하에서 기독교는 다방면에 걸친 발전을 이루었던 것이다.

 

4.로마제국의 박해와 하나님의 섭리역사.

 

많은 역사 학자들은 로마제국에 의한 기독교 박해를 보면서 많은 의혹을 품었다. 특히 기독교역사학자들은기독교에대한로마제국의박해를보면서참담한심정을토하였다.

 

저들의 공통적 의문은 참으로 하나님은 살아 계신가? 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어찌하여 저토록 오랜, 그리고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시고 하나님께서 여전히 침묵하시는가?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살아 계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이 저토록 오랫동안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았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거나 불신하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기독교인들이 불쌍하고 어리석어 보였다. 한편 사람들은 또 다른 차원에서 기독교에 대한 의문을 갖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박해를 전혀 돌아보지 않는 하나님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리지 아니하고 여전히 섬기는 기독교인들을 이해 할 수 없었다. 특히 경기장에서 불에 타 죽거나 맹수들에게 찢기워 죽어가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밝고 평안하고 의연한 자세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독교인들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토록 길고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멸절되지 않고 오히려 더욱 확장되어 가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상 이러한 의문은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나 모두를 막론하고 박해를 받던 당시의 사람들이나 그것을 역사 속에서 보고 알게된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이 갖는 공통된 의문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신학자로서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시원하게 풀어 주어야할 책임과 의무를 갖는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립한다.

 

1)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기독교에 대한 로마제국의 박해는 기독교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증명한다. 로마제국의 박해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속하게 발전하는 기독교의 역사는 일반상식으로는 절대로 이해될 수 없는 상황이다. 일반적인 상식대로라면 박해가 극심하면 극심할수록 기독교는 움츠러들어야 하고 기독교 성도들의 숫자도 줄어 들어야한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가공할만한 박해를 보면서 기독교인이 되려는 사람이 있을 수도 없고 죽음과 고통을 이겨 내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며 따라서 기존의 기독교 성도들 가운데서도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하여 기독교를 포기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숫자가 자연적으로 줄어들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은 그토록 심한 박해 속에서도 기독교인의 숫자가 오히려 증가되며 뿐만 아니라 박해가 심하면 심할수록 기독교가 오히려 확산 되어갔다.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의 원리이다. 기독교의 발전이나 기독교인들의 증가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에 어떤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에 대한 박해로 인하여 기독교의 발전이 영향을 받아 침체 되거나 또는 답보적 상태를 갖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박해에 대한 상대적인 자극을 받아 기독교 전체 또는 기독교 개인들의 신앙이 성장하거나 분투하는 것도 아니다. 기독교의 발전과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박해를 비롯한 외부적인 것들에 전혀 영향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하여 진군된다. 하나님께서 이미 선택한 자들은 박해와 전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정한 때가 되면 하나님께 나오게 되어있다.

 

때문에 로마제국의 그토록 극심한 박해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백성들은 정해진 때에 하나님 앞에 나왔고 기독교는 유유히 그 역사를 진행해 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역사는 당시의 기독교역사를 통하여 증명 받는다. 그토록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복음의 특전사들은 로마 전 지역을 비롯한 세계 전 지역에 교회들을 설립해 나가면서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고 전파했다. 그리고 진리의 기록자들은 자신들이 보고 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기록하였고 아울러 복음전파의 현장들에 있었던 크고 작은 사건들을 하나하나 세세하게 기록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각종 철학 사상가들과 사이비이단들을 비롯한 비진리자들의 끊임없는 교리적 공격을 진리로 변증하는 가운데 기독교의 진리, 기독교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다듬어 정리해 나갔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정하신 섭리에 따라 훗날에 성경이 완성되고 정립되었으며 또한 조직신학이 완성되고 정립되었으며 하나님의 기독교역사가 기록으로 남겨져 후세에 전승되는 역사를 이룩해 나갔던 것이다.

 

어떤 역사가들은 하나님께서는 로마제국의 박해 없이도 주권적으로 기독교역사를 확장하고 진군 시킬 수 있었지 않느냐? 라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 로마제국의 박해 없이도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얼마든지 기독교역사를 발전시킬 수 있었을 것 아니냐?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적 특성과 또한 인류역사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함에서 비롯되어진 우문<愚問>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정립해야 할 것이 있다. 먼저 하나님의 섭리역사에 대한 문제이다.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진행시키심에 있어서 주로 두 가지의 방법을 사용하신다. 하나는 의도적, 고의적 차원의 주권적 역사를 창출하시는 것이며 다른 또 하나는 허용적 차원에서 인간들의 역사를 주권적으로 적용하시는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 기독교역사는 대부분 의도적, 고의적, 주권인 반면에 일반역사는 대부분 허용적 주권이다. 물론 기독교 역사에도 허용적 주권이 적용되며 일반 역사에도 고의적, 의도적, 주권이 적용된다. 그러나 특별한 역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경우 기독교 역사는 대부분 의도적, 고의적, 주권인 반면에 일반역사는 대부분 허용적 주권이다. 이와같은 차원에서 볼 때에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하나님께서 의도적, 고의적으로 그것을 창출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필요에 의하여 그것을 허용하신 것이다. 즉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로마제국 당국자들이 로마를 위하여 일으킨 사건들이었고 유대인들의 박해나 로마시민들 및 이방종교인들의 박해 역시 그들의 입장을 위하여 일으킨 사건들이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의 발전적 진군을 위한 차원에서 그것들을 허용하셨고 적용하셨다.

 

2)기독교의 발전.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기독교인 개인들에게는 참아내기 어려운 고통들을 주었지만 결국은 하나님기독교의 역사적 발전을 크게 도와주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기독교를 박해한 로마제국의 황제들은 물론 네로와 같은 정신병자도 있었지만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대부분 정상적인 황제들이었고 개중에는 훌륭한 현제<賢帝>들도 있었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 등등의 황제들은 로마제국의 입장에서는<5현제>들에 포함되는 훌륭하고 영민한 황제들이었다. 또한 황제들의 박해도 개인적인 유익을 위한 박해나 사적인 감정을 위한 박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로마제국의 영광과 평안을 위한 정치적, 종교적, 차원에 의한 박해들이었다. 로마제국을 통치하는 황제의 입장에서 볼 때에 기독교는 다양한 차원에서 암적 존재였기 때문에 그들은 로마제국을 위해서 기독교를 탄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로마의 기독교박해는 기독교를 멸절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전역과 나아가서는 세계 전역으로 확산시키는 결과를 만들어 주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로마를 떠나 로마제국의 각 지역과 세계의 전역으로 흩어지면서 가는 곳마다 기독교를 전파하고 교회들을 세워 나감으로서 기독교는 자연적으로 로마제국 전 지역화, 세계 전 지역화를 이루었던 것이다.

 

따라서 로마제국의 입장에 의한 기독교박해는 일반 역사적 차원에서는 로마제국을 위한 필연적인 것이었지만 그것이 바로 기독교역사의 진군을 크게 추진하고 후원하는 절대적인 요소가 되었다.

 

한편 로마의 기독교 박해가 로마제국 전체에서 행하여졌지만 로마시내의 박해는 극심했던 반면에 로마시외 각 지방의 박해는 그다지 심하지 않았으며 로마시로부터 멀어질수록 박해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약했다. 이러한 상황 역시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것이었다. 만약에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박해하지 않고 오히려 보호하고 장려하고 확장했더라면 어떠한 결과가 나왔을까? 물론 그러한 경우에도 기독교의 확장과 발전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하에서 당연히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을 때에 기독교가 확장되고 발전하는 속도와 범위는 박해로 인한 확장과 발전 속도와 범위보다 상대적으로 더디고 제한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인간들의 기본적인 특성은 대체적으로 어려움 속에서는 더욱 진취적이고 전투적인 반면에 평안할 때에는 오히려 누리고 즐기며 안주<安住>하려고 한다. 그리고 특히 인간의 종교적 특성은 위기적 일 때에는 진리를 위하여 투쟁하고 희생하는 반면에 평안할 때에는 오히려 비진리에 빠져 안주하고자한다. 따라서 만약에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보호하고 후원하는 입장이었다면 기독교의 세계화는 그 속도에 있어서 매우 완만하였을 뿐만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비진리적인 것으로서의 확산이 되었을 것이다. , 수많은 비진리적인 교리들의 난무 속에서 수많은 분파를 이루는 가운데 기독교 아닌 기독교들로 분산되어 졌을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역사의 현장들이 증명해준다. 기독교가 박해 하에 있을 때에도 물론 비진리적 교리들과 분파와 분당들이 난무하였지만 그것은 미약하고 지엽적인 것으로서 인간들이 사는 세상이라면 어떤 영역 어떤 사회에서도 언제나 있게 되는 흔하고 보편적인 현실들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기독교박해가 끝나고 신앙적 평안이 허용되었을 때를 기점으로 하여 전개되어진 기독교역사를 보면 참으로 안타까움과 분노를 금할 길이 없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참담한 신앙적 순교위에 세워진 기독교역사는 그때를 기점으로 하여 타락되고 변질되어져 갔으며 수많은 비진리적 교리들의 출현 속에서 수많은 분당과 분파로 갈라지고 흩어지는 역사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부끄럽고 안타까운 역사는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3)박해받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께서 기독교의 확장과 발전을 위하여 로마제국의 박해를 허용하셨다. 라는 우리의 주장에 대하여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가혹하신 하나님이 아니신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제국의 박해 때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견뎌내기 힘든 고통과 수난을 당했으며 심지어는 비통하고 비참하게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선포한다. 로마제국의 박해로 인하여 고통 받은 것은 시간적으로 볼 때에 아무리 길어도 잠시의 일이며 최고의 고통은 고문이나 형벌 등등에 의한 육체적 고통과 죽음이라고 할 때에 그것을 상태적인 차원에서 말한다고 할지라도 역시 한시적인 것이지 영원한 것은 아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당시를 비롯한 기독교인들이<주를 위하여 받는 고통과 핍박>에 대하여 참으로 많고 영원하고 아름다운 최상의 상급과 면류관들을 선물로 하사 하신다. 성경은 도처에서<주를 위하여 받는 고통과 핍박>을 받은 자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상급들과 면류관들을 선포한다. 따라서 그들은 잠시의 고난과 고통에 대하여 계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보상 받았음으로 오히려 하나님께 무한하고 영원한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상급과 면류관의 선물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최소한 네 가지 기본적인 이유에서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의 찬양과 경배를 영원히 드려야한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하고 완전한 최상의 하나님나라 국민으로 세워 주셨으며

 

둘째는 창조주하나님, 통치주하나님, 섭리주하나님, 심판주하나님을 아바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게 하셨으며

 

셋째는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하나님의 종으로 불러 세워주셨으며

 

넷째는 이 모든 것들을 이루어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내려오시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그와 같은 고난을 겪으시었는데 우리의 고통과 고난이 무엇이 그리 대단하다고 단 한마디 말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말로나 글로서는 표현조차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다만 무한히 그리고 영원히 감사하고 찬송해야 할 것이다.

 

4)박해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

 

로마제국의 박해에 동원된 황제를 비롯한 모든 자들은 당연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받았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거니와 기독교역사가 중의 한 사람이었던 락탄티우스<Lactantius>는 기독교를 박해한 황제들의 비참한 말로를 기록으로 남기면서 갈레리우스황제의 회개가<너무 늦었다>고 지적했다. 기독교를 박해한 황제들을 비롯한 모든 자들의 비참한 말로는 하나님의 섭리역사에 또 하나의 역사적 의미를 선포한다. , 누구든지 하나님의 섭리역사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자들은 그에 대한 댓가를 내생<來生>에서도 당연히 받게 될 것이지만 그전에 이미 금생<今生>에서도 필연적으로 받는다는 것이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네로,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 셉티미우스세베루스, 갈레리우스 등등의 최후이다. 네로는 신하의 칼에 엎어져 자살했고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는 아들에 의하여 암살되었으며 셉티미우스세베루스는 황후와 함께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였고 갈레리우스 역시 중병에 걸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 외의 황제들도 모두 한결같이 비참한 말로<末路>를 당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그와같은 불변의 진리를 보고 들어 알고 있는 자들<심지어는 기독교 지도자들>중에도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하고 탄압하는 자들이 부지기수로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저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을 결코 핍박하고 탄압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며 따라서 그와같은 자신의 행위가 악한 것이 아니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 저들은 오히려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의 종에게 감히 순종하지 않는 악한 자들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핍박과 탄압의 양상은 달라도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자녀들을 괴롭고 슬프게 하는 자들은 곧 하나님의 섭리를 거부하고 반대한 악한자들, 핍박자들, 탄압자들, 박해자들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은 회개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 할 것이며 내세의 심판뿐만 아니라 현세에서의 심판도 당연히 받게 될 것이다.

 

5)사단의 심정.

 

로마제국에 의한 기독교 박해의 역사를 마무리 지으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불쌍하고 가엾은 사단의 처지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지나간 역사적 이야기들이지만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가 완전히 종료된 순간 사단은 얼마나 처참한 심정이었을까? 초기 기독교에 무자비한 박해들이 진행되었던 배후에는 사단의 극성스러운 활약이 있었음을 우리는 안다. 사단은 아마도 박해의 극심한 상황을 일일이 점검하면서<이제 거의 끝나간다><조금만 더>를 연발했을 것이고 한편으로는<이번만은 절대로>라는 각오를 새롭게 하면서 고군분투 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나고 기독교승리의 팡파레가 온 천하에 울려 퍼질 때에 사단, 그는 어떠한 모습, 어떠한 심정이었을까? 목숨 걸고 고군분투한 3백여 년의 사투에 온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을 것이고 박해에 총 동원된 졸개들은<이번에도 또?>라는 한심한 눈으로 사단을 바라다보았을 것이 아니겠는가? 얼마나 참담한 심정이었을까? 연전연패, 단 한번도 이겨보지 못한 하나님과의 승부, 사단은 어쩌면 졸개들 앞에 부끄럽고 창피하여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숨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좌절감과 무력감에 젖어 차라리 자살이라도 해서 그 처참한 일생을 마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사단은 영적 존재라 하나님께서 조치하여 주시지 아니하면 죽을 수도 없는 존재인 것을.....! 가엾은 사단이여! 불쌍한 사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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