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 예화] 국수집과 한 남자의 사연

 

 

 

서울 용산 삼각지 뒷편에 있는 '옛집' 이라고 하는 국수집에서 실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할머니가 운영하는 이 국수집은 10년 넘게 국수값을 거의 안올린. 3,000원에 판매하는 곳인데요. 국수도 더 달라고 하면 더 주는 곳입니다.

몇 년전 이 집이 sbs tv에 소개 된 후 한 남자가 담당 pd에게 전화해 다짜고짜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들어보니,

이 남자가 15년쯤 사기를 당해서 재산이 거덜나고 아내도 도망가버렸습니다.

남자는 노숙자가 되어 밥을 구걸하기 위해 이 식당 저 식당을 전전했는데요.

가는 곳 마다 번번히 쫒겨나게 되면서 독이 올라 휘발유로 불을 질러버려야 겠다는 극단적인 결심을 하기에 이르는데요...

할머니가 운영하는 국수집에 들어간 이 남자는 국수를 주문했고 한접시를 허겁지겁 먹어버리자 할머니는

그릇을 빼앗아 가서는 국수를 한그릇 다시 내주었습니다.

두 그릇을 다 먹은 그는 냅다 도망을 쳤는데요.

뒤를 따라오던 할머니는 이 남자를 향해 소리쳤어요.

"이봐 젋은이 그냥 가. 뛰지 말구. 다쳐!"

그 한마디에 이 남자는 세상을 향해 품었던 증오를 버렸다고 합니다.

단 한사람이 베푼 작은 온정이 막다른 선택의 기로에 있던 한 사람을 구한 것입니다.

이 사연을 듣고 실제로 그 국수집을 일부러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하는데요.

저도 할머니 국수집을 찾아가서 국수 한그릇 먹으면서 따뜻함을 느끼고 오고 싶습니다.

우리 주변에 갖가지 절망으로 마음의 문을 꼭 닫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아니 극닥적인 선택으로

이끄는 사탄의 꼬임에 넘어갈 수 밖에 없는 지친 영혼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 수 있는 따뜻함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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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시편의 현대적 이해  / 황성일 교수


1. 서론: 문제 제기


구약 신앙을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다윗은 복수심에 불타서 나발을 죽이려 달려가며 (삼상25), 옛 원한을 잊지 못해 솔로몬에게 요압과 시므이를 죽여라고 유언한다 (왕상1:4-9). 나아가 다윗은 시를 통해서 적에 대한 강한 증오심을 나타내며 또 그를 저주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 신약의 정신이며, 구약의 정신도 동일하다 (잠20:22; 24:17; 레19:17-18).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복수심 혹은 저주와 관련된 구절들을 피하려 한다. 마치 그와 같은 구절들을 읽기만 해도, 내면 속에 가까스로 감추어 두었던 분노, 증오와 원한이 폭로될 것 같은 은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읽어서는 안되는 금서를 대하듯 넘어가 버린다.

저주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지만, 저주를 표현하고 있는 시편의 부분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5:8-10; 6:10; 7:12-16; 10:15; 12:3; 17:13; 18:43-48; 28:4-5; 31:17-18; 35:4-9, 26; 37:2, 9-10, 15, 20; 40:14-15; 41:10; 44:5-7; 54:5; 55:9, 15, 19, 23; 58:6-8; 59:12-14; 63:9-11; 64:7-9; 68:21-23; 69:22-28; 70:2-3; 71:13; 74:11; 79:6, 10-12; 83:9-17; 109:6-20, 29; 119:78; 120:3-4; 129:4-6; 137:7-9; 139:19; 140:8-10; 141:10; 143:12.


2. 형식

2.1 용어 설명

구약 성경에 나타나는 저주의 형태는 크게 둘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선언적 저주이며, 다른 하나는 기원적 저주다. 선언적 저주란 어떤 대상에 대하여 재앙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재앙이 임하게 되는 원리를 선포하면서 재앙을 경고하는 것이다. 열방에 대한 경고 역시 선언적 저주에 속한다 (사13-23). 이와 같은 선언적 저주가 선포되었을 때, 그 경고를 무시한 자에게는 저주가 자동적으로 임한다 (창27:13; 신28:15; 슥5:1-4; 대하34:24). 저주에서 피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슥5:3). 레26과 신28-20에서 27개의 저주가 선포되었고, 이는 6가지 형태로 간추릴 수 있다: 전쟁에서의 패배 (defeat), 질병 (disease), 땅의 황폐함 (desolation), 약탈 당함 (deprivation), 땅에서 추방 (deportation), 그리고 죽음 (death).

기원적 저주는 남에게 불행이나 재앙이 일어나도록 비는 것이다. 저주한 뒤, 회개를 요청할 수도 있다 (행8:20-24).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심판의 요청이 회개와 그로 인한 사죄의 가능성을 전혀 배제한 상태에서 어떤 대상을 향하여 주어질 때 그것을 기원적 저주라고 부를 수 있다. 이는 예언, 소원, 혹은 기도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여기에는 원수의 시기심을 일깨우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시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원수의 처참한 죽음을 소원하는 것, 더 나아가 원수의 어린 자녀가 비참하게 죽는 것을 소원하기까지 이른다 (137:9). 그러므로 저주에는 그리스도의 마음과 반대되는 복수심이 분명히 나타난다.


2.2 저주의 사회적 용례

저주는 앗수르 조약의 가장 핵심이며, 모든 조약에서 나타난다.

[에살핫돈의 계승 조약 414-420] 신들의 왕이며, 운명을 결정하는 신 앗수르가 네게 악하고 불쾌한 운명을 결정하기를 원하며, 네게 장수함을 허락하지 않기를 원하노라. 그의 사랑하는 아내 물리수가 그 입의 말들을 악하게 하며, 너를 위해 중재하지 않기를 원하노라. 신들의 왕인 아누가 네 모든 가족들에게 질병, 극한 피곤, 말라리아, 불면증, 근심, 허약함을 비처럼 내리기를 원하노라. 하늘과 땅의 광채인 신이 문둥병으로 네게 옷 입히고, 네가 신들과 왕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기를 원하노라.

복수심에 의하여 신들에게 호소하며 자기의 원수들을 저주한다.

[히타이트 정복 기사] 오 아린나(Arinna)의 태양 여신, 나의 여주인이시여, 나를 '어린애'라 부르고, 나를 모욕하였던 이웃의 원수 나라들이 당신의 영토를 침범해 왔습니다. 오 아린나의 태양 여신, 나의 여주인이시여, 내 옆에 서셔서, 앞서 말한 이웃의 원수 나라들을 내 앞에서 무찌르소서.

[아캇 신화] 마라랏투굴랄아, 영웅 아캇이 네 옆에서 살해되었으니, 네게 화가 있으리로다. 너의 뿌리가 땅에 싹을 내지 못할 것이며, 그가 너를 뽑아 낼 때, 네 머리가 떨어지리라. 지금부터 영원히, 지금부터 모든 세대에 이르기까지, 피난민이 되리라.

구약 시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저주는 보편적 현상이다. 흔히 보호를 위한 일종의 방책으로 저주를 사용한다. 하나님을 섬기고 (신28:47), 이웃에게 악을 범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백성들의 충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저주를 선포한다 (신27:15-26; 28:15-19, 20-36). 이스라엘 지파들이 베냐민 지파와 결혼하지 못하도록 규정한 조약을 보장하기 위해서 저주한다 (삿21:18). 사울이 그의 군대에게 식사를 금하게 하기 위해 저주한다 (삼상14:24, 28). 여리고성 재건을 막기 위해 여호수아가 저주했다 (수6:26). 자신의 주장 혹은 행위의 진실성을 보증하기 위해 저주하며 (시7:3-5; 의심의 소제, 민5:19-31), 보복과 응징의 수단으로서도 저주한다 (창4:11; 삿17:2). 보복할 수 없는 현실적인 무능력으로 인해, 저주를 통해 보복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삼하3:29).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비통함으로 인하여 구체적인 대상이 없이 저주하기도 한다 (욥3:1-10). 개인 혹은 국가의 원수들에 대해 저주한다 (시79:6-12). 모든 종류의 약속 혹은 계약에 있어서, 그것이 구속력이 있도록 만드는 보호수단으로 저주가 사용될 수 있다 (삿21:18; 왕상 9:6-9; 느10:29).


2.3 저주의 형식


3. 해석

3.1 잘못된 해석들

1) 저주는 나쁜 것이므로, 말시온처럼, 성경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주 역시 성경의 한 부분이므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에게 유익이 있다 (고전10:11; 딤후3:16). 예수와 사도들이 저주시편의 권위를 인용한다. 그러므로 저주시를 기록한 시인들은 틀렸으므로, 신약의 성도들이 그들의 저주를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말시온적인 이원론이다.

2) 시편의 저주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유익이 있으므로, 저주 부분들을 성경에서 제거해서는 안되지만, 동시에 저주하는 시인들의 영적 혹은 도덕적 수준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보다 낮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의 문제점은 다윗이나, 바울과 같은 영성이 뛰어난 사람들을 저주하기를 즐기는,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또한 성경에 기록된 저주에 관한 많은 내용들이 간접적인 유익만 주고, 그 자체로서는 좋지 않다고 본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가 손상될 수 있다는 것도 문제다.

3) 시인의 저주는 당대의 자기 원수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적에 관한 예언일 뿐이다고 말한다. 신약에서 흔히 저주시들을 그리스도와 관련된 예언적 시로서 인용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은 견해는 시인이 시를 기록하는 당시의 정황을 지나치게 무시하는 잘못이 있다.

4) 구약의 시인들은 내세에 대한 희망이 없었으므로 현세에의 정의를 원한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시인이 부활에 대한 혹은 내세에 대한 소망을 갖고 있었느냐 하는 것은 그가 저주를 할 수 있느냐 하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는 않는다. 만일 저주가 구약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금지되어야 한다면, 그가 혹시 내세에 대하여 불확실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의 저주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5) 복수를 요청하는 것은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롬12:17, 19) 라는 사도의 교훈과 일치한다. 그러나 바울은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하나님께 복수를 맡겨라고 권면하지만, 시편은 원수를 저주함으로써, 하나님께 복수를 맡기고 있다.

6) 이러한 저주들은 모두 집단적 성격이라고 간주하기도 한다. 원수 자신 뿐 아니라, 조상이나 후손에게까지도 저주가 임하길 바란다. 그러나 많은 시들에서 비록 개인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내 원수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는 것처럼 저주의 개인적 성격은 흔히 분명하게 나타난다.

7) 우리들 역시 아무런 제한 없이 시편과 같은 내용의 저주를 행해도 된다는 것도 잘못이다. 우리 개인을 핍박하는 자들, 혹은 교회와 인류에 큰 죄를 범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저주해도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다.


3.2 이해의 방법

복수를 요청하는 목적은 원수들이 하나님께 승복하고 자신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게 하는 것이다. 시인의 분노는 저속하고 잔인한 복수심이 아니라, 여호와께 대한 정열적인 사랑에 기인한다.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시인들의 열망이 표현되는 것이다. 이는 시인이 분노하고 저주를 요청하는 이유에서 나타난다. 시인은 개인적인 손실이나 상처로 인해 저주를 요청하지 않는다. 사회적 불의, 하나님께 대한 모욕, 불신과 불순종,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짐과 같은 것들이다. 악인은 사람에게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

        비록 시인이 개인적인 상처를 입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고통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다고 간주할 때만, 하나님의 편에 서서 저주한다. 이스라엘 백성과 여호와 사이의 특수한 관계, 즉 공동운명체 사상에 기초한다. 시인은 자기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의 원수에 관하여, 하나님의 원수를 향하여 저주한다. 그러므로 저주는 가장 영적인 행위다.

구약 시대는 영적인 것을 현세적인 것으로 표현하며, 인간 심성에 내재하는 복합성을 단순화시켜 흑과 백의 논리로 표현한다. 선인이 있고 악인이 있다. 그러나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한 사람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구약에서는 일반적으로 죄와 죄인을 구분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는 그 죄에 관한한 저주를 받고 심판 받아야만 한다는 것을 시인은 선언한다. 그의 나머지 부분이 의롭다는 것은 시인의 관심 밖에 있다. 이것은 시인의 도덕적 수준이 낮아서가 아니라, 구약 시대의 일반적 계시 방법에 따른 것이다.

        도덕수준이 낮아서 저주한 것이 아니라, 그의 영이 맑게 깨어있기 때문에 저주한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원수 사랑이라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실천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저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시인들만큼 혹은 신약의 바울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닮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저주하지 못한다.


3.3 올바른 사용법과 유익

시편의 저주 부분들을 사용하는 세 가지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1) 개인을 저주하는데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저주의 원칙을 선포함으로써 '나' 역시 같은 원칙 아래 있음을 인정하라 (7:3-5). 그리스도인은 구약의 저주를 사용하여 악한 영, 사탄을 저주할 수 있다. 사탄을 가장 잘 저주하는 방법은 전도다.

2) 조건적으로 사람을 저주할 수 있다. 우리가 사람을 저주하려 할 때,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 번째 조건은 이기심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개인의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를 향해 저주하라는 것이다. 칼빈은 이렇게 충고한다. 우리 자신에게 해를 입힌 사람들에게 이기심으로 인해 복수하려 하지 말라.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의 충동적 감정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대표하는 하나님의 대리인이라고 여겨질 때, 자기의 원수를 하나님의 원수라 여기고 저주할 수 있다.

두 번째 조건은 하나님의 마음에 자신의 마음이 완전히 일치했다고 여겨질 때 저주하라. 하나님이 저주하신다고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경우에 그를 저주할 수 있다. 사람을 판단하는 일에는 거듭 신중하라. 하나님의 판단과 일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이와 같은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을 때, 저주하지 말아야 한다.

3) 저주하려 하지말고, 시인의 저주하는 소리를 들어라. 자신의 억울한 고통에 분노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상처 받은 자녀가 지켜보는 것처럼, 시인이 분노하여 저주하는 목소리를 들어라.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그들을 대표하여, 원수들을 향해 분노하고 있다. 시인은 하나님의 분노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통 속에 있다면, 시인의 말을 빌어서 저주하려 하지 말고, 의로운 시인의 분노를 듣기만 하라. 그것은 하나님이 고통 당한 그리스도인의 편에 서 계시며, 그의 고통에 참여하고 계시며, 그를 위해 일어나셔서, 그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그의 억울함을 풀어주실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저주하기 위해 시편 시인의 저주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을 정결케 하고, 저주심을 극복하기 위해 저주를 이용한다.

4) 저주의 원인이 되는 인간의 정황을 깊이 살피게 한다. 옳고 그른 것을 날카롭게 구분할 수 있게 한다. 신약의 교훈에 익숙해진 우리는 죄인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죄조차 사랑해 버린다. 유대인이 이방인보다 더 심한 저주를 한다면 그것은 유대인이 옳고 그름에 대해 훨씬 더 심각하게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58: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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