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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예배 설교

 

 

 

 

제목 : 항상 찬양해야 합니다.

말씀 : 마26:30-35

 

1.항상 찬양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하신 다음에 감람산으로 가시면서 있었던 일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씀하는 감람산으로 가셨다는 것은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이제 이 세상 떠날 준비를 다 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아주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30절 말씀보세요.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여러분, 지금이 어떤 상황입니까?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피땀 흘리는 기도를 하러 가시는 상황입니다. 다시 말하면 몇 시간 후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 할 상황입니다. 그런데 찬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 상황이 어떤 상황입니까? 죽음을 앞두고 있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이 그걸 모르십니까?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아니 단지 알고 계신 것이 아니라 역사를 창조하시는 주님께서 그 죽음을 향하여 스스로 걸어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바로 앞의 말씀에 보면 성만찬을 하고 계신 것을 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떡과 잔을 나누시며 뭐라고 하셨습니까? 26절에서는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28절에서는 잔을 주시며 마시라고 하시면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45절을 보세요.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이제 때가 되었다. 인자의 때, 곧 인류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죽음을 당할 때가 되었다. 따라서 너희들에게도 고통의 시간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니 좀 쉬어두어라 그런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람산을 향하여 가셨습니다. 십자가라는 처절한 죽음을 앞두고,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견디기 힘든 그 참담한 상황 속에서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죽음을 향하여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던 것입니다.

 

이유는 말할 것도 예수님의 죽으심은 인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죽음만이 인류의 죄를 속하고 마귀의 권세에서 속량하여 생명의 은총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고 이제 공생애를 마치고 십자가의 그 처절한 죽음을 앞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비록 고통의 길이긴 하였지만 하나님께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분명히 알게 됩니다. 왜 입니까?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과 마귀와 지옥의 권세에서 건짐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 살면서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지나가야 할 때도 있지만 찬양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의 고통은 너무나 처절한 것이었지만 그래서 심지어는 주님도 그 고난의 잔을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유일한 길임을 아셨기에 결국 찬양하여 그 길을 가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가는 길이 비록 험하고 멀어도 이 길만이 생명과 진리와 영원한 승리의 길이기 때문에 그 길을 가야하고 억지로 가는 것이 아니라 감사 찬양을 드리며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찬양하며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그 믿음을 보시고 더욱 힘주시고 은혜주시고 능력을 주셔서 더욱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험난한 전도자의 길을 가면서 늘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행16:25절 보세요.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때는 어떤 상황입니까? 빌립보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입니다. 그냥 감옥에 갇혀 있습니까? 아닙니다. 죽지 않을 만큼 매를 맞았습니다. 온 몸에 피멍이 시퍼렇게 들고, 피가 흘러나왔습니다. 온몸의 상처가 쑤시고 아팠습니다. 게다가 손과 발은 쇠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그렇게 참혹한 모습으로 감옥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찬양했고, 위대하심을 찬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찬양했고, 그 능력을 찬양했습니다. 지금까지 사역을 감당케 하신 것에 찬양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옥터가 움직이고 감옥문이 저절로 열렸습니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들이 바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세례 받고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상황 속에서도 찬양할 수 있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며, 찬양할 때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문제를 해결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어려울 때 찬양할 수 있는 능력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거 어려운 거 아닙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됩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도록 힘주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이 능력을 받아서 잘되고 형통할 때 뿐만 아니라 어렵고 힘들 때도 찬양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아니 오히려 무엇인가 문제가 있고, 해결이 안 날 때 더욱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구속의 은총을 기억하며 찬양하고,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찬양하고, 큰 능력으로 인도하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 안에서 더욱 은혜와 능력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또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앞에서 본 30절의 말씀에 예수님은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하러 감람산으로 가셨습니까?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은 이곳에 처음 가신 것이 아닙니다. 이곳은 예수님이 늘 기도하러 가시던 장소였습니다.

 

눅22:39,40절 말씀을 보세요.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여러분, 보십시오. 습관을 좇아 가셨다고 하였습니다. 즉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감람산으로 가셨는데 그곳은 생소한 장소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습관적으로 늘 가시던 장소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습관적으로 그곳에 뭐하러 가셨습니까? 바람쐬러 가셨던 것도 아니고 놀러 가셨던 것도 아닙니다. 기도하러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너희도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도 늘 기도하셨습니다. 큰 일이 있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평상시에도 늘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새벽기도를 하셨습니다. 막1:35절을 보십시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어떤 젊은 목사가 새벽기도가 너희 힘들어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했다고 합니다. “어떤 놈이 새벽기도를 만들어서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고 말입니다. 어떤 놈이라니요? 예수님이 만드셨는데요. 그러면 여러분, 예수님조차도 새벽 기도가 필요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필요할까요? 예수님조차 습관적으로 나가서 기도하는 일이 필요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필요할까요?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자나 깨나 찬양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과 사랑과 은혜와 지혜와 인도하심과 보호하심과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선하심을 아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 놀라운 능력과 구원과 사랑과 은혜와 지혜와 인도하심과 보호하심과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선하심을 안다면 어찌 찬양하지 않겠습니까? 또 그렇게 진정 하나님을 알고 찬양하는 사람들에게 어찌 은혜가 넘치지 않겠습니까?

 

물론 찬양만이 우리의 의무는 아닙니다. 기도하는 것도 우리의 의무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주님의 만남의 시간입니다. 대화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기도할때에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게 주님의 뜻을 깨닫게 됨으로 능력있는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느때라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과 사랑과 은혜와 지혜와 인도하심과 보호하심과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선하심을 기억하며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능력과 구원과 지혜와 인도와 보호와 거룩과 선과 의를 덧입기 위하여, 그 하사님과의 뜻을 바르게 알고 능력있게 주님과 동행함으로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기 위하여 더욱 깨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어려움과 환경과 조건을 이기고 찬양하며 감사하며 승리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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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참된 교회(마16:13-20)

 

 

 

 

 

제목 : 진정한 교회

말씀 : 마16:13-20

우리 한국교회의 이름은 중앙교회, 제일교회 등의 이름이 많이 있습니다. 혹은 성경적인 좋은 뜻을 가진 소망, 충신, 사랑, 은혜 교회 등으로 사용합니다. 이처럼 교회 이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름이 좋다고 다 좋은 교회는 아닙니다.

진정으로 가장 모범적이며 살아서 역사하는 좋은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가장 좋은 교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가장 성경적인 교회가 바로 좋은 교회입니다. 바로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가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좋은 교회의 모델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모범적인 초대 교회의 모델을 통하여 교회가 어떻게 해야 교회다워져 가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교회는 교회의 초석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비록 소수의 사람이 모여도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곳이라면 두 세 사람이 모여도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말씀의 강조점은 예수님께서 성도의 삶의 중심에 계시고 교회의 중심에 계신다면 숫자의 많고 적음을 불문하고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들도 주님과 함께 하시는 성도요, 우리 교회도 주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뿌리와 속성이 되는 것은 교회에 모인 무리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모였는가에 큰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더 깊은 의미로 새겨 볼 때에는 2-300명 아니 2-3,000명의 숫자가 모여도 예수님이 그들 중에 함께 하시지 아니하면, 참된 교회의 의미가 상실된다는 강한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서적분야에서 한때 베스트셀러였던 재미있는 책 한 권이 있습니다. 그 책이름은 교회에 가기 싫은 일흔 일곱 가지 이유라는 책입니다. 교회 안 다니던 사람이던 다니던 사람이던 교회 가기 싫은 이유, 일흔 일곱 가지 있답니다.

교회에 나오기 싫은 이유 중 하나는 교회와 세상이 별다를 뜻이 없더라.하는 얘기입니다. 교인과 세상 사람들이 매한가지더라. 왜냐하면 교회에서도 보니까 학력, 신분 따라 대우하고, 경쟁심 많고, 공명심 많고, 자기 이름 내려고 하고, 시기, 질투가 많고, 돈으로 사람을 평가하더라.

교회는 똑같아야 되는데 이렇지 못하고 이걸 세상의 신분대로 또 돈 있는 대로 특별하게 대해주고 이런 다고 하면 이 교회가 교회 될 수 없다. 이런 것들이 거슬리더라합니다. 그래서 예수는 좋으나 교회 가기 싫다. 그렇게 된다고 합니다.

왜 교회를 교회답게 하지 못하는 할까요? 어떻게 하면 교회를 교회답게 할 수 있을까요?

1. 신앙 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져야 합니다.

(마 16: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에 대하여 제자들은 말하기를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답하게 되었고, 그 때에 제자중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본문 말씀에서 교회의 의미와 특징을 3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교회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신앙 고백 위에 서 있어야만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둘째, 이 고백은 인간의 어떤 깨달음에서 기인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신앙 생활 역시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셋째,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고백하는 교회에 사도적인 하나님의 축복권이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마 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 축복권은 개개인이 갖는 믿음과 기도를 통해서 받는 축복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자신의 몸된 교회에 부여된 하나님의 약속된 축복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이는 교회와, 조직위에 축복을 허락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존재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교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오늘 여러분은 교회에 왜 나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귀한 교훈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특별히 열 두 제자를 쭉 가르쳐 나가다가 아주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주시는 아주 소중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하는 도시에서 말씀하십니다. 이 가이사랴 빌립보는 당시에 로마 사람들이 팔레스타인 지구를 지배하는 군사 본부가 있는 곳입니다. 번영지입니다. 거기에 로마 사람들의 군사령부가 있습니다. 이렇게 로마 군인들이 여기에 와서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 로마 군사기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으로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길로 지나가면서 제자들과 함께 이야기를 합니다. 제자들이 이 길로 지나가며 이 로마 사람들의 그 군사기지를 보고 그 군인들이 훈련하는 모습이나 말을 타고 지나가는 모습 이런 걸 볼 때 지금 로마에 식민지 생활을 하는 자신들의 모습이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나라가 독립하나? 언제나 우리는 이렇게 큰 소리를 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들의 모습을 부러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부러워하는 마음으로 아, 참 좋다. 어떻게 우리고 저럴 수 없을까? 그리고 언제나 우리는 자유함을 얻고 식민지에서 자유 국가로 회복할 수 있을까? 이렇게 부러워하고 있는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고 이래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고 묻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열 세 사람뿐입니다. 열 두 제자를 앞에 놓고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하고 고백을 할 때 고백하는 순간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내가 세우리라.

내 교회를 내가 세우리라. 여기서 교회가 이루어집니다. 지금은 초라하게 보입니다. 적은 무리요 하찮은 사람들같이 보이지만 거기서 역사가 바뀝니다. 그래서 오늘의 역사가 이루어졌고 새로운 기원이 시작이 됩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믿음 생활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또한 교회를 세우는 목적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나, 친교, 혹은 사람을 사귀러 온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그 목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사귀며, 체험하고, 그 분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영생 복락을 누리며, 생명을 소유하여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나와서 항상 이것을 확인하고 신앙 생활을 해야만 합니다. (고전 6:15)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이처럼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서로 예수님을 배우고 알며, 예수님을 소개하고, 체험하며 또한 그 안에서 교제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도 이 같은 체험이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교회는 천국의 열쇠를 소유하였습니다.

교회가 교회되도록 하는 것이 교회의 중요한 사명이자 부흥의 비결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 부흥의 비결이 무엇인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범적인 교회 모습으로 즉 초대교회와 같이 생동감 넘치며 살아 있는 교회가 되도록 하는 것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에는 사도들의 복음전파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에게는 복음 전파하는 능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느냐고 묻게 됩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행 2: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이처럼 모범적이며 살아 있는 교회는 신령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며 이로 말미암아 성도들은 은혜의 신령한 양식을 공급받아서 영적인 풍성한 삶과 육적인 삶에 큰 활력을 얻어서 승리의 삶을 누려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행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것이 바로 부흥의 원리이며 결과인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특징은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겠으나 그 중에 하나는 내면에 영적인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흘러내리는 교회였고, 신령한 영적 힘과 강인한 생명력이 넘쳐 흐르는 살아 있는 교회였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생명을 의미하고 생명은 부단히 성장합니다. 이 생명은 모든 성도들에게서 넘쳐 흘러야만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비한 영역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놀라운 역사가 우리 모든 성도들과 우리 교회에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당시의 상황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핍박이 가중되어서 성도들이 피신해야 했고 뿔뿔이 흩어져야만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온 땅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신앙, 살아있는 신앙은 수리아 안디옥을 중심하여 아시아 지방과 더 나아가서 마게도냐와 로마 그리고 마침내 유럽과 세계로 향하여 복음을 증거하는 진보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복음의 생명력은 자라나서 마침내 세계를 정복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천국의 열쇠를 준다하는 말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결코 천국을 건설하라고 명령하지는 않았습니다.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천국을 건설하라. 천국을 만들어라.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천국은 주께서 오심으로 이루어지고 주님의 십자가와 함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천국은 들어가는 것이지 천국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을 세우는 것이 아니고 천국에 내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천국은 전파되는 것입니다. 내가 천국을 건설한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이루신 천국을 전파하는 것 뿐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교회의 참된 모습이 어떠해야만 합니까?

그것은 성경적이며 초대교회 신앙으로 돌아가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성경적인 교회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는 어떻게 해야 살아 움직이는 교회가 되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의 뿌리에 깊게 박혀서 천국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구세군의 창시자 월리암 부츠는 어느 신문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미래에 가장 큰 위협을 이야기할 때 교회가 이 세상에서 중생 없는 용서를 말하는 철학적 기독교와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소개하는 것이며, 성령 없는 종교, 하나님 없는 정치, 지옥 없는 천국을 소개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교회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것은 이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성령의 역사가 있으며, 우리 중에 날마다 구원의 역사가 있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그것입니다.

우리의 자랑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교회가 살아 역사하는 초대 교회의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말씀이 흥왕하며 성령의 신비로운 체험이 넘쳐 흘러야 할 것입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의 영이 있고 말씀의 역사가 있는 이 곳에 교회의 진정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초대 교회처럼 살아 움직이며 역사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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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등불 (A lamp of life ) (잠6:20-23)
 

 


제 목 : 인생의 등불

말 씀 : 잠언 6:20-23

잠언의 말씀속에서 정말 줄기차게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 있다. 그것은 말씀안에서의 삶이다. 물론 성경 전체에서도 그렇지만 잠언서에서는 말씀을 더더욱 강조하고 있다. 성경에서 말씀에 대하여 지혜나 진리나 율법이나 법도 혹은 법이나 훈계나 명령 등의 여러 가지 표현을 쓰고 있지만 모두가 사실은 같은 의미이다.

그래서 잠언서에 보면 지혜라는 말이 무려 122번이나 나오고, 훈계라는 말이 24번, 법이 8번, 진리가 8번, 명령이 8번, 율법이 4번, 그래서 말씀안에서 살것에 대한 말씀이 무려 176번이나 반복해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잠언서가 31장까지 있으니까 한 장에 대략 여섯 번 정도 말씀을 언급하며 그 말씀을 따라 살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말할것도 없이 거기에 복이 있고, 거기에 은혜가 있고, 거기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3:1-4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즉 하나님의 법을 잊지 말고 그 명령과 규례를 따라 살면 평강과 장수의 복과 아울러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귀히 여김을 받는 복된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말씀하고 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니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따라 살면 그 말씀이 너를 인도하고 보호하며 너로 하여금 생명의 길로 걸어가게 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너는 죽으나 사나 말씀가운데 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면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의 의미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1.말씀안에서 살라.(20,21절)

1)말씀을 지키고 그것을 떠나지 말라.(20절)

본문 20절을 보자.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아비의 명령, 어미의 법이라고하여 표현은 부모님의 명령과 법을 지키고 그것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명령과 법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님 개인적인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며 하나님의 법으로 훈계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소위 쉐마라고 불리우는 신6:4-9절에서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 엡6:4에서는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23절에서는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앞에 있는 명령, 법, 훈계가 생명의 길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빛,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안에만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비의 명령을 지키라고 했을 때 지킨다는 것은 [지킨다, 보호한다, 경계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니까 명령을 지키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 즉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잘 간직하라는 것이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들이 말씀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지키고 보호하고 경계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돈이나 향락이나 권력이나 욕심이나 하여튼 그 어떤 것이라도 말씀을 앞서가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무엇이라고해도 말씀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가장 중요한 공간에 간직한 다음에는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라도 말씀의 위치를 빼앗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고 했을 때 떠나지 말라는 말은 [~한 상태로 놓아두거나, 맡겨버리거나, 버리거나, 허락하지 말라는 말라]는 의미이다.

이 표현은 예를 들면 이럴 때 사용한다. 즉 땅을 묵히거나(출 23:11) 농작물의 추수를 보류함으로써(느 10:31[32]) 땅을 버려둘 때, 혹은 동물을 돌보지 않고 내버려 둘 때, 먹고 남은 음식이 버려질 때 등이다. 그러니까 말씀을 떠나지 말라는 것은 말씀을 방치함으로써 그 말씀이 나에게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는 상태로 만들지 말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무리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더라도, 말씀이 아무리 빛이라해도 내가 그 말씀을 좇아가지 않고 말씀 따로 나 따로 있으면 그 말씀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내가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버려 둔다면 그 좋은 음식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아무리 좋은 차라도 내가 이용하지 않고 들 한가운데 방치해 둔다면 그게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말씀을 지키고 말씀을 떠나지 말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런 사실을 꼭 기억하자.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게 해서는 안된다. 어떤 상황이나 물질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이성이나 향락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게 만들지 말라.

그리도 말씀을 방치해두지 말라. 말씀은 그저 교회속에서나 있고, 말씀은 성경책속에나 있는 것처럼 여기지 말라. 일상적인 모든 삶속에서 말씀이 나와 가장 가깝게 만들라.

2)말씀을 목에 매고 살라.(21)

말씀을 지키고 떠나지 말라고 말씀한 다음에는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목에 매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말씀을 지키고 떠나지 말라는 말씀보다 훨씬 더 강화된 말씀수호 명령이다. 그렇지 않은가? 새긴다는 것은 말그대로 절대 지워지지 않도록 철필로 새겨 넣으라는 말이다.

여기서 새긴다는 말은 [함께 매다, 묶다, 연합하다, 공모하다]는 의미로 완전히 말씀과 하나되는 것을 말한다. 완전히 묶여져서 절대로 떠날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네 목에 매라고 하셨는데 목에 맨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겉으로 완전히 들어나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너와 함께 있음을 다른 모든 사람들이 알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네가 그 말씀을 떠나지 않게 되고 범죄의 유혹에서 조금이라도 더 자유로울 수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목사님에게 들었다. 운전을 하고 가는데 옆에서 갑자기 어떤 차가 끼어 들었다. 깜짝 놀라서 급히 브레이크를 밟아 겨우 접촉사고를 면하기는 하였지만 놀라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다시 옆차선으로 가서 그 차옆에 대고는 [야! 이 놈아, 운전 좀 똑바로 해]!하고 소리를 지르려고 하는데 운전석앞에 성경책이 놓여 있더란다. 그래서 소리를 지르려다가 멈추고 얼른 성경책을 치우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무엇을 말하는가? 물론 우리의 심령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하는 것이 그 사람의 행동을 좌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의 행동을 좌우하는데는 외적인 요인들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내적인 상태가 외적인 행동들을 통제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외적인 요인들이 내적인 것을 통제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래도 양복을 쫙 빼 입었을때와 작업복을 입었을때의 행동이 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예비군복만 입혀놓으면 아무리 신사라고 해도 모두가 행동이 제멋대로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 면에서 사실 교복이나 제복도 매우 필요하다고 본다. 학생들도 아무래도 교복을 입으면 그 교복이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게 만들며, 군인도 멋진 군복을 쫙 빼 입으면 웬지 걸음걸이도 절도 있게 되는 것이다. 저는 그래서 목사도 제복이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신부나 승려는 제복이 있어서 언제어디서나 그 제복을 입고 있으면 자기 자신 스스로나 혹은 다른 사람들의 보는 눈을 의식해서라도 아무래도 행동에 조심을 하는데 목사는 별도의 제복이 없어서 때로는 행동이 너무 자유스러운 것이 아니냐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말씀을 목에 매라는 의미는 그런 의미다.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나 너의 목에 매달고 다님으로써 그 말씀으로 너의 행동을 제어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면 더욱 말씀을 따라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말씀을 목에 달고 다닌다고 해서 성경 말씀을 적어서 목걸이처럼 매고 다니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이 너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너를 보면서 바로 알 수 있도록 하라는 그런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말씀을 마음판에 깊이 새기고, 마치 목걸이를 목에 다님으로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게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말씀이 우리와 함께 하도록 하기 위하여 열심히 예배와 말씀과 찬양과 기도의 생활을 하여 그것이 몸에 배도록 해야 한다.

2.말씀안에서 살아야 할 이유(23절)

본문 23절에서는 말씀안에서 살아가야 할 이유를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말씀이 곧 빛이기 때문에,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명령은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율례를 말하며, 법은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하나님의 계명을 말한다. 예를 들면 네 이웃을 네몸처럼 사랑하는 말씀은 이웃 사랑에 대한 포괄적 말씀으로 법에 속한다고 할 수 있고, 마5장에 나오는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등은 구체적이고 특수한 하나님의 명령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 하나 모두가 곧 등불이고 빛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삶에도 등불이요, 빛이며, 인간의 세부적인 삶의 모습들에 있어서도 역시 등불이요 빛이아른 것이다. 그러기에 말씀만이 인간의 모든 영역을 환하게 비춰주어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가게 만들어 준다는 이야기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유일한 등불이다. 유일한 빛이다. 완전한 빛이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인 성경만이 인생의 모든 문제를 완전히 밝혀주는 유일한 빛인 것이다. 그것은 그냥 인간의 전체적인 삶의 틀만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며, 인간이 살아숨쉬면서 활동하는 개개의 모든 일들에 있어서도 역시 빛이요, 등불인 것이다.

이것은 같은 이야기같지만 사실은 깊이 생각해야 한다. 많은 경우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며, 빛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인간 개개의 삶을 통제하고, 인간 개개의 삶을 인도하는 빛이라는 사실에 대하여서는 매우 둔감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하면 맞습니다. 그렇지요,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고, 하나님안에 생명이 있고, 하나님안에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습니다. 이렇게는 인정을 하지만 어떤 구체적인 삶의 현장속에 들어가면 그만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나의 생각이나 나의 경험이나 나의 이성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되고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마6:33절에 보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세상의 어떤 상황이나 환경이나 조건속에서도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가 구하지 않은 세상의 것들로도 채워주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전체적으로는 그것을 인정을 하면서 막상 어떤 구체적인 상황속에서는 어떤가?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는 것인가, 이것이 과연 주님의 향기를 발하는 것인가하는 것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가, 아니면 이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이것이 과연 나에게 실제적으로 얼마나 유익이 될 인가, 세상 사람들은 내가 그렇게 할 때에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하는 등등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것이다.

말씀이 등불이요, 빛이라는 말씀은 이러저러한 모든 것을 초월해서 말씀을 우리의 삶을 조명해 주는 유일한 빛이니까 오직 그 말씀따라 살라는 것이다. 오직 말씀만이 모든 인간의 모든 영역을 비춰주는 진정한 빛이니까 모든 상황, 모든 조건, 모든 이론, 모든 경험을 초월하는 빛이니까 그 빛을 따라 살라는 말씀인 것이다.

3.말씀안에서 살아가는 자가 누릴 은혜(22절)

말씀안에서 살아가는 자가 누리게 될 은혜에 대해서는 본문 22절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물론 그것이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율례이다. 그러니까 말씀안에서 말씀을 지키며 떠나지 말며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목에 매고 다니는 사람은 말씀이 그의 발걸음을 인도하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도한다는 말은 이끌다, 인도하다, 안내하다는 의미로 말그대로 말씀을 간직하고 말씀안에서 살아갈때에 우리의 삶을 진리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은혜의 길로 인도해 준다는 말이다.

말씀이 우리를 인도한다는 말을 깊이 묵상해보라. 무엇이 나를 인도하느냐, 이것이 우리의 인생을 얼마나 달라지게 만들 것인가? 도적이 나를 인도하면 도적이 된다. 사기꾼이 나를 인도하면 사기꾼이 된다. 마귀가 나를 인도하면 나는 어둠의 사람이 된다.

물론 말씀을 마음판에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면 그 말씀이 나의 생각을 통제하고, 나의 말을 통제하고, 나의 행동을 통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말씀이 나를 인도하여 나는 생명의 사람, 진리의 사람,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 보호한다는 말은 지키다, 준수하다, 보존(간수)하다, 감시하다, 주의하다를 의미하는 말로 우리의 삶을 보호하셔서 우리를 거짓과 어둠과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지켜준다는 의미이다.

이 지켜준다는 것도 역시 중요한 말씀이다. 물론 인도한다는 말씀과 대동소이한 말씀이겠지만 무엇이 나를 지켜주느냐하는 것이 내 인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이다. 선한 것이 나를 지키면 나는 선한 사람이 된다. 진리가 나를 지키면 나는 진리의 사람이 된다. 그러나 악한 것이 나를 지키면, 거짓이 나를 지키면, 어둠의 세력이 나를 지키면 나는 보나마나 어둠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 비록 선한 것이 나를 지킨다해도 별로 힘이 없는 것이 나를 지키면 그것도 별 것 아니다. 아무리 선하다해도 힘이 없으면 자기보다 더 강한 악이 덤벼들면 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지키면 혹은 하나님의 성령이 나를 지키면 나는 가장 선한 길, 완전한 진리의 길, 완전한 생명의 길로 안전하게 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다닐 때, 잘 때, 깰 때는 꼭 문자적으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다닐 때, 잘 때, 깰때는 인간의 삶의 모든 행위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즉 말씀을 간직하고 말씀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말씀이 자신의 모든 삶의 영역을 간섭함으로써 그 삶을 인도하고 보호하며 은혜의 길로 안내해 준다는 말씀인 것이다.

오늘 이러한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우리 모든 성도여러분은 오직 유일하고도 완전한 생명의 빛인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의 어떤 것이 유혹을 하고 공격을 해온다고 해도 빼앗기지 않도록 마음판에 잘 새겨넣고, 그 말씀들이 항상 우리 안에 있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삶을 통하여 언제나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라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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