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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낮 예배 설교 
 

 


본 문 : 여호수아 3:14 - 17

제 목 : 약속의 땅을 바라보라

주자의 권학문(勸學文)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미각지당춘추몽(未覺池塘春草夢)인데 계전오엽기추성(階前梧葉己秋聲)이라? 연못가의 봄풀이 꿈에서 미쳐 깨어나기도 전에 뜰앞의 오동나무 잎새가 가을을 알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봄인가 싶더니 어느새 가을이라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막 2017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습니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만 2017년도 뒤돌아보면 돌아보면 아쉬움이 많은 한해였는지 모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도 많았습니다. 경제적으로도 그랬고, 정치적으로도 그랬습니다. 사회적으로는 밝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기대했지만 그러나 늘 들려오는 소리는 거짓과 사기와 부정과 부패와 폭력과 강도라는 달갑지 않은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정말 책임있고 깨끗한, 진정 국가와 민족을 위한 그런 정치다운 정치를 기대해봤지만 정치인들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권모술수와 싸움과 욕설과 권력욕에만 급급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새로 찾아온 이 한해도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저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하면서 회의가 찾아오기도 합니다. 물론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자화상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인간의 부정적인 자화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인생을 향하여 하나님은 오늘도 은혜를 베풀려고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인간 스스로는 희망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있는 자에게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과 위로하심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다시금 밝아온 이 새해에는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더 이상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희망을 찾고 거기서 은혜와 기쁨과 생명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우리는 부족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미련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혜와 능력과 사랑이 충만하십니다. 그 능력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시고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그분만을 바라보며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며 그분의 지시를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과 동행하는 삶이란 어떤 것이겠습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의 기쁨 가운데 이 새롭게 밝아온 한해를 살아가는 비결이겠습니까?

 

1.말씀을 앞세우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이 그렇게도 손꼽아 기다려왔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드디어 요단강을 건너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제 이 요단강만 건너면 그들이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요단강을 건너려고 할 때는 하필이면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우기였습니다. 그래서 요단강물은 홍수로 인하여 금방이라도 둑을 넘을 기세로 넘실거리며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낙심도 되었고, 좌절과 실의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염려하지 말아라. 다만 내가 시키는대로 하여라 하면서 제사장이 언약궤를 메고 무조건 요단강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넘칠 듯이 흐르던 요단강이 멈추어 설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정말 어이없는 말씀이었습니다. 인간적 논리로는 당치도 않은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백성의 앞장을 서게 됩니다. 그리고는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집어 삼킬 듯이 넘실대던 요단강물이 신기하게 멈추어 서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댐을 쌓은 것처럼 물이 멈추어 위쪽으로 쌓이고 그들이 서있는 곳은 마른땅 같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차례로 물을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놀라움과 감격과 기쁨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가나안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들이 삼키려고 넘실대던 요단강이, 가나안땅에 들어가는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중의 하나였던 요단강이 도리어 그들에게 감격과 기쁨을 주며 이스라엘의 가나안으로의 행진을 축하해 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언약궤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상징하는 상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먼저 강에 들어가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고 건너라는 것이었습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강중앙에 서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바라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것을 의지하며 걱정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고 강을 건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어떤 세력이라해도 너를 삼키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어떤 것도 가나안 복지를 향해 달려가는 너의 길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 언약궤를 바라보며,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신뢰하며 그것을 바라보며 강을 건넜고, 그럴 때 가나안을 건너가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요단강물도 결코 그들의 발목을 잡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저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달려가는 순례객들입니다. 여러분의 그 순례길의 막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막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세상의 물결이 여러분을 삼키려하고 있습니까? 무엇이 가나안 복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여러분을 실망케 하고, 좌절케하고, 힘들게 만들고 있습니까?

그러나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원망이나 불평일랑 더더욱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고 다만 그것을 좇아가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의지하며,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제거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 놓여있는 모든 장애물들은 물러갈 것입니다. 말씀앞에서 모든 대적자들은 쫓겨 갈 것입니다. 아무쪼록 새롭게 다가온 이 새해에는 오직 말씀을 바라보며 신뢰하며 의지하며 말씀안에서 달려갈때에 여러분의 발목을 잡고, 여러분을 힘들고 지치고 낙심케 했던 모든 어두운 것들에서 온전히 해방되어 진정한 가나안복지의 은혜를 누리며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도전 세력과의 전쟁에 동참해야 합니다.

가나안 복지의 은혜를 누리기 위하여 또 한가지 생각한다면 그것은 가나안 복지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에 함께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며 요단강을 건넘으로 그들이 할 일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며 요단강을 건너긴 했지만 아직도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가나안 족속들을 물리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가까스로 가나안땅에 들어오긴 했지만 그러나 그 땅은 비어 있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는 블레셋 족속을 비롯한 가나안 일곱족속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보다 훨씬 발달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견고한 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싸워서 이겨야만 그땅을 차지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난관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었던 여리고 성이었습니다. 이 난공불락의 성 여리고를 무너뜨려야만 했습니다. 만약 그성을 함락시키지 못하면 그들은 가나안복지의 은혜를 누릴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또 다시 하나님을 의지하며 이 작전에 참여합니다. 어쩌면 정말 무모한 싸움이었습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을 앞세우고 온 백성이 그 뒤를 따르며 그 성을 일주일 동안이나 돌았습니다. 그 견고한 성 주위를 그저 돌고 또 도는 것이었습니다. 위에는 여리고성의 군인들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성위에서 대대적인 공세를 취한다면 그들은 여지없이 패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너무나 무모한 방법에 회의가 따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그저 묵묵히 돌고 또 돌았습니다.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그 행렬에 동참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외치라고 했을 때 일제히 함성을 질렀고 그러자 난공불락의 성 여리고는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물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 가운데서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땅은 그냥 거저로 가만히 앉아서 들어가야 할 땅은 아닙니다. 우리가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해야 할 또 하나의 일이 이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함께 동참하는 것입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행렬에 같이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땅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세력들을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승리가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나안 복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길을 막는 것이 정말 많습니다. 마귀 사탄은 우리를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고 별의 별 짓을 다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무지를 동원합니다. 때로는 완고함을, 때로는 문화를, 때로는 과학을, 때로는 돈을, 때로는 향락을, 때로는 무사안일함을, 때로는 권력을, 때로는 지식을, 때로는 환난과 시험을, 심지어는 가족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이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의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세력들이 정말 많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깨닫고 그것들에게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쩌면 내 힘만으로는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내 힘만으로는 확실히 안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가는 길을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도우셔서 우리로 하여금 능히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새로운 2018년을 맞이하였습니다. 올해는 작년보다 더 힘든 상황이 펼쳐질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어둡게 찾아온 새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그 어떤 것보다도 세상의 돈보다도 명예보다도 권력보다도 더 든든한 빽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이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을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그분을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다만 그 분을 믿고 신뢰하며 따르기만 하면 그것들은 모두가 우리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새롭게 찾아온 이 새해에는 더욱 주님을 바라보는 새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능력을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서 우리 앞에 있는 모든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시기 바랍니다. 모든 방해꾼들을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가나안복지를 향할 발걸음을 방해하는 것이 환경이든 상황이든 사람이든 돈이든 권력이든 아니면 나 자신이든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그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는 이 새해가 되어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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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설교] 범사에 감사하라

 

 

 

민수기 11장 4∼15절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군대에 쫓기다 홍해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 당신이 우리를 끌어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끌어내 이같이 하느냐” “애굽에서 당신에게 우리를 내버려두라 했고,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했느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게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고 길을 터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광야에선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우리가 애굽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온 회중이 굶주려 죽게 됐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먹고도 남을 충분한 만나를 새벽마다 주셨습니다. 그러자 이들은 만나가 끊길 수 있다며 또 불안해했습니다. 르비딤에서는 마실 물이 없다고 원망합니다.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 우리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이 샘솟아 나오는 기적을 통해 그들의 갈증을 해결했습니다.

1년 후 바란 광야에선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땐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었다. 이제는 우리 기력이 다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이미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그 장엄한 광경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격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음에도 그들은 이런 불평을 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저녁마다 메추라기 떼를 공급하셨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 처음 그들은 하나님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이 많은 식량을 공급하심에 경외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매일 같은 음식에 싫증내기 시작했습니다. 이슬과 함께 내린 만나, 저녁마다 진에 덮인 메추라기, 그 기적의 산물을 보면서 하나님께 마땅히 감사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른’ 간사한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 아닐까요. 감사하는 일에도 조건부 감사와 범사에 감사하는 게 있습니다. 조건부 감사가 하나님의 응답과 풍성하게 채워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라면,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훌륭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면서 감사와 영광을 돌렸겠지요. 일종의 조건부 감사입니다. 범사에 감사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며, 기대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감사할 일이 있을 때 잊지 말고 감사하라’고 하지 않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명령에 순종하는 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알고서 믿는 게 아니라 믿으면 믿을수록 더 알아가게 됩니다. 감사할 일이 있어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에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허현 목사(양주진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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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 설교
 

 

 

 

 

아나니아 부부의 불행 이야기(행5장1-11)

 

성경본문|사도행전 5장 01절 ~ 11절

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7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9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10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우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름답고 감동적인 모습은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저는 지난 화요일 국기원에서 개최된 “2006 미션컵 전국태권도대회”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며 태권도 시범을 잠시 관람했는데, 청소년들이 자기들이 닦은 태권도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태권도 시범에 최선을 다하는 청소년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저는 눈물겨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전국에서 모인 600여명 이상의 선수들의 뒷바라지를 하며 최선을 다하는 순복음노원교회 성도들의 헌신적인 모습도 아름답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사도 행전 2장 이하에 기록된 예루살렘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기들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기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교제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봉사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전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바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했습니다. 밭과 집이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두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행4:34,35). 신앙 생활과 봉사 생활에 최선을 다하는 저들의 모습은 참으로 눈물겹도록 아름답고 감동적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기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교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봉사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전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바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신자들 중에는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이기적이고 불성실한 신자들도 있었습니다. 기도회에도 제대로 참석하지 않고, 교제하는 일이나 봉사하는 일에도 제대로 참석하지 않고, 전도하는 일이나 바치는 일에도 제대로 참석하지 않는 이기적이고 불성실한 신자들도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그와 같은 불성실한 신자들 중의 두 사람인 아나니아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아나니아 부부가 불성실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저는 그렇게 추측합니다.

 

바클레이의 주석을 보았더니 아나니아 부부가 범한 죄 중의 기본적인 죄가 불성실의 죄였다고 지적했습니다. Failure in diligence 가 그들의 기본적인 죄였다고 지적했습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신앙 생활에 불성실할 때, 여러가지 잘못에 빠질 수가 있는데 오늘 아침 아나니아 부부가 빠졌던 세 가지 잘못에 대해서 함께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첫째, 아나니아 부부는 명예욕에 빠졌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을 받기를 원합니다. 존경과 칭찬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나쁜 일은 아닙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신앙의 인격을 갖추고 봉사의 삶을 지니면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고 칭찬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도 인정과 칭찬을 받게 됩니다.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행16:2)라고 했습니다. 도르가는 욥바에 있는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고 고넬료는 가이사랴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행10:22). 도르가와 고넬료는 하나님으로부터도 인정과 칭찬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들도 모두 칭찬 받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행6:3). 초대교회 신자들 중 밭과 집이 있는 신자들이 그것을 팔아서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두었고 사도들은 그것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했을 때, 저들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칭찬을 받았습니다. 신자들이 신자다운 인격과 삶을 지닐 때 존경과 칭찬을 받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신자들이 사회로부터 인정과 존경과 칭찬을 많이 받는 것은 좋은 일이고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 부부는 신앙 생활과 봉사 생활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주변에 있는 신자들이 교회 안팎에서 존경과 칭찬을 받는 것을 보고는, 자기들도 존경과 칭찬을 받고 싶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 중에 밭과 집이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서 그 값을 헌금으로 바치고 특히 바나바가 밭을 팔아서 그 값을 헌금으로 바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래서 저들이 사도들과 신자들의 존경과 칭찬을 받는 것을 보았을 때, 아나니아 부부는 자기들도 무엇을 해서라도 존경과 칭찬을 받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저는 강변교회를 시작하기 전에 새로 시작하는 개척교회인 영안교회를 8개월 동안 맡아서 섬긴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제가 여러 가지 중요한 교훈들을 얻었는데 그 중의 한 가지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교회당을 하나 지어서 바치든지, 1억 원의 헌금을 드리든지, 자동차를 한 대 사서 드리는 일이 반드시 옳은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자동차를 받지는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기 위해서 1억 원의 헌금을 드릴 때, 1억 원 상당의 죄를 지을 수도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앙 생활도 봉사 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기 위해서 무슨 일을 일부러 시도할 때 무서운 잘못을 범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 설교에서 이렇게 경고의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마6:2).

 

사람에게 인정과 칭찬과 영광을 얻으려고 사람들이 보는 데서 억지로 헌금도 하고 억지로 구제도 하고 억지로 봉사도 하는 것을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정 반대로 생각을 하면 그것도 큰 잘못입니다. “그래, 나는 사람들의 인정이나 칭찬을 받지 않으려고 헌금도 하지 않고, 구제도 하지 않고, 봉사도 하지 않아, 내가 참 잘 하는 것이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큰 잘못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아무런 칭찬도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가 자기의 모든 소유를 헌금으로 바치는 것을 보시면서 그를 칭찬하시고 부자의 인색한 헌금은 칭찬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막12:41-44). 아나니아 부부는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기 위해서 두 사람이 공모한 후 소유를 팔았습니다. 바나바처럼 그들도 땅을 팔았습니다. 대단한 결단이었지만 그 동기는 순수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는 불순한 명예욕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 아나니아 부부는 탐욕에 빠졌습니다.

아나니아 부부가 소유를 판 것은 대단한 결단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는 명예욕에 이끌려서 그렇게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헌금을 하기 위해서 소유를 판 것은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소유를 판 값이 얼마였는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이 소유를 판 값을 바라보았을 때 그것을 다 바치기가 아까운 마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탐욕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땅을 판 값의 일부를 감추기로 공모를 했습니다. 두 사람의 마음이 꼭 맞았습니다. 한 사람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부부가 좋은 일에 공모를 하여야 하는데 아나니아 부부는 나쁜 일에 공모를 했습니다.

 

박종렬 목사님의 설교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어떤 가정은 나쁜 일에 부부가 보조를 맞추는 일이 있다. 예배에 지각하고 헌금에 인색하고 맡은 일에 무책임하고 말 많고 세상 쾌락을 사랑하고 교역자를 괴롭히는 일에 부부가 죽이 맞는 일이 있다. 아나니아 부부가 그러했다.”

아나니아 부부는 땅을 판 값의 일부를 감추기로 공모를 했습니다. 두 사람은 돈을 너무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는데, 두 사람은 돈을 너무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헌금을 바치기 위해서 마련한 돈이었는데 헌금의 일부를 떼어 먹은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때로는 헌금의 일부를 떼어 먹을 수가 있습니다. 십일조의 일부를 떼어 먹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무서운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됩니다. 아나니아 부부는 돈을 사랑해서 헌금의 일부를 떼어 먹다가 그만 무서운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돈을 너무 사랑하다가 헌금의 일부를 떼어 먹을 때 그것을 그대로 두고 보시지만은 않습니다. 무섭게 책망을 하십니다.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 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 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말3:8,9).

 

구약 시대에 아간이란 사람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금 덩이 오십 세겔을 자기 장막 땅 속에 감추었다가 무서운 저주를 받아 아골 골짜기 돌 무더기에 묻힌 일이 있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그것들도 돌로 치고 불 사르고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수7:25).


엘리사의 종 게하시도 옷 두 벌과 은 두 달란트를 나아만에게서 받아 자기 집에 감추었다가 무서운 저주를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엘리사가 이르되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을 때냐 그러므로 나아만의 문둥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나오매 문둥병이 발하여 눈 같이 되었더라”(왕하5:26,27). 재물에 대한 탐심과 탐욕은 무서운 책망과 무서운 저주를 불러옵니다.

 

저의 삶을 돌이켜볼 때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제가 헌금을 떼어 먹은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돈에 대한 탐심도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신학교의 교장으로 있을 때 나를 위해서 판공비를 어느 정도 쓸 수도 있었지만 거의 한 푼도 쓰지 않았습니다. 저는 강변교회의 목사로 있으면서 교회가 써야 할 돈이 많을 때 되도록 적게 쓰려고 했고 다른 돈으로 그것을 보충한 일이 많았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것은 제가 저의 어머니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자주 들은 이야기이지만, 저의 어머니는 돈에 대해서 깨끗했습니다. 남에게서 빌린 돈은 기한 내에 반드시 값 곤 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아나니아 부부는 돈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돈에 대해서 깨끗하지 못했습니다. 어둡고 컴컴한 면이 있었습니다. 재물에 대한 탐욕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땅을 판 값에서 일부를 감추었습니다. 두 사람이 공모해서 벽장에 감추었는지 땅을 파고 거기에 감추었는지, 땅을 판 값의 일부를 감추었습니다. 그래서 무서운 책망과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셋째, 아나니아 부부는 거짓과 불 회개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명예욕이나 탐욕 등 죄에 빠질 때 그 죄를 지적하시며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가룟 유다에게도 예수님은 죄를 지적하시며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아나니아 부부가 땅을 판 값의 얼마를 감추고 일부를 그에게 가져왔을 때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 삽비라에게 저들이 땅 값을 감춘 죄를 정면으로 지적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5:3,4).

 

아나니아는 사도 베드로의 긴 책망을 듣고도 아무런 뉘우침의 반응을 나타내 보이지 않았습니다. 세 시간 후 그의 아내 삽비라가 사도 베드로에게 와서 똑 같은 책망을 듣고도 아무런 뉘우침의 반응을 나타내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당당하게 자기들의 죄를 은폐했습니다. “예 이것뿐입니다” 라고 당당하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 오니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 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행5:7,8). 두 사람이 단단히 공모를 하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두 사람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회개의 기회를 박차고 거짓과 불 회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가장 불행하고 가장 비극적인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깊이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과 관련하여 명예욕이나 탐욕이나 거짓의 잘못을 범할 때 그것이 단순한 윤리적인 죄에 그치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사단을 끌어드리는 무서운 죄이고 성령을 대적하는 무서운 죄라는 사실입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종들 앞에서 명예욕이나 탐욕이나 거짓의 죄를 범할 때 그것이 사단을 끌어드리고 성령과 대적하는 무서운 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행5:3).

 

회개의 기회를 박차고 거짓과 불 회개에 빠진 아나니아 부부는 둘 다 사도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서 혼이 떠나 죽었습니다.

“아나이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사람들이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행5:5,6).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 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온 교회가 크게 두려워하더라”(행5:10,11).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아나니아 부부의 불행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신자의 생활을 하다가 그리고 헌금의 일부를 교회에 갖다 비치다가 심판을 받게 되는 일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 강변교회 신자들 중에서 아나니아 부부와 같은 불행에 빠지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를 간절히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때로는 여러분들이 좋아하지 않는 책망의 말을 자주 하곤 합니다.

 

어떻게 하여야 불행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평상시에 신앙생활과 봉사 생활에 최선을 다하면 될 것입니다. 기도와 교제와 봉사와 전도와 바치는 일에 항상 최선을 다하면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전도부원들처럼 모이기를 힘쓰고 기도하기를 힘쓰고 봉사하기를 힘쓰고 전도하기를 힘쓰면 될 것입니다. 평상시에 신앙 생활과 봉사 생활에 최선을 다하면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선배들인 청교도들은 신앙 생활과 봉사 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 지나칠 정도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위선과 거짓의 죄를 범하게 될 때 즉시즉시 회개를 하면 될 것입니다.

 

다음 주일에는 “일곱 집사들의 행복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강변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모두 일곱 집사들처럼 행복한 사람들이 될지언정 아나니아 부부 같은 불행한 사람은 한 사람도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은혜와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출 처| 김명혁목사(강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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