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사순절 종려주일설교 :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예수

 

 

 

제목 :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예수

말씀 : 누가복음 18:31~34

 

3월에는 고난 주간에 이어 부활주일이 함께 있는 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느 때와는 달리 좀더 특별한 자세를 가지고 이 한 달을 생각하게 됩니다.

당시 초대교회에서는 부활주일을 앞에 두고 2~3일 동안 금식했다고 합니다. 이기간 동안 하루 한끼, 혹은 온종일 금식하면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경배했다고 합니다. 주후 4세기 경쯤 교회가 굉장히 부흥하고, 교회 제도가 제도화되면서 '사순절'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부활 직전 40일 동안을 특별한 방법으로 금식하는 절기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을 기념하기 위해 하루 한끼나  각자 정한 대로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그분의 고난을 묵상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잃어버린 복음을 다시 찾고 교회가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하기 시작하면서, 사실상 사순절이라는 구교의 형식적인 행사를 따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사순절이라 하여 특별한 행사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반드시 기억해야 될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고난주간을 앞두고 우리의 삶이 좀더 경건하고 거룩해져야 겠다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욕심을 절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묵상하면서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는 계획을 세우고 생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을 보면서 다시 한번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갖고 이번 한 달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생각하고 마음에 담을 수 있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아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동안 예루살렘을 몇 차례 오르내리셨지만 이번 행차는 단순한 방문이 아님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거기에 올라가면 선지자들이 이미 구약에서 예언하고 기록한 대로 인자가 이방인들, 즉 로마인들에게 넘기워져 희롱과 능욕과 침 뱉음, 그리고 채찍질을 당한 다음 결국 십자가에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예언하십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세상을 떠나실 것인가를 세세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22편에서, 예수님은 사람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여 사람들의 훼방거리와 백성들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고, 십자가에 매달려 수족이 못 박힌 채 죽게 될 것이며, 그분의 겉옷과 속옷을 제비를 뽑히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53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에 상하고 찔릴 것이며, 우리의 모든 죄악을 홀로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면 그 예언대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사건은 피할 수 없는 사건이거나 돌발적으로 일어날 사건이 아닙니다. 이는 수백 년 전부터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각본대로 일어날 사건입니다. 곧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길을 따라 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사실들을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신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손에 칼을 들고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메시야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유대 나라에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파라다이스를 세울 수 있는 메시야를 꿈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그렇게 하고도 남음이 있는 능력자라고 믿고 따라 다녔습니다.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면,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신다고 하자 '지금이야 말로 그때가 왔구나!' 하고 마음으로 반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는 예루살렘에 가면 이방인에게 넘겨져서 능욕과 침 뱉음과 모욕을 당하고 채찍질을 맞아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칼을 손에 든 메시야를 꿈꾸던 제자들의 마음에 십자가를 등에 짊어지고 죽으시는 메시야란 도무지 받아 들일 수 없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렇듯 자기들이 듣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그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듣고 싶은 설교는 귀에 잘 들리지만, 듣고 싶지 않은 말씀은 아무리 큰 소리로 전해도 다 옆으로 새고 맙니다. 손에 칼을 든 정복자 메시야를 꿈꾸고 있는 사람에게 십자가에서 죽는 메시야에 대한 이야기가 들릴 리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라고 말씀합니다.(3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자신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일이었습니다. 십자가의 길 외에 세상을 구원하는 길이 없음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절대 복종하기로 각오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세상을 위해 생명을 내어 놓기로 작정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해 발을 옮기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8절에 있는 말씀대로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에 자기 몸을 맡기셨습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고 계신 것입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이 퍽 침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묵묵히 죽음의 길을 가십니다. 이어서 제자들이, 그들로부터 조금 떨어져 무리들이 따라 갑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그 뒤를 따라가면서 심히 두렵고 무서워했다고 말합니다.(막10:32) 여기에서 우리는 어둡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금새 느낄 수 있습니다.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당하는 사람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당하는 사람과는 천지 차이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세밀하게 내다보고 그것을 당하는 자는 그 비극을 겪기 전에 이미 2번, 3번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한걸음씩 발을 옮겨놓고 계십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저는 먼저 '내가 큰 죄인이구나.' 하는 사실을 느낍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나의 죄를 짊어지고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죄 없는 예수를 죽인 죄인인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어린양에게 자신의 죄를 전가시키는 절차가 있었습니다. 먼저 제사장에게 어린양을 끌고 와서 그 위에 자기 손을 얹고는 자신의 모든 죄를 고백하는 기도가 끝나면 그 어린양을 제사장에 맡겼습니다. 그러면 이 어린양은 주인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제단에서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의 어린양이 되셔서 예루살렘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놓고 계십니다. 나의 검은 손을 그분의 머리 위에 얹고 내 모든 죄를 그분에게 뒤집어 씌우고는 내 대신 죽도록 예루살렘을 향해 밀어 내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입니까? 죄 있는 나를 대신하여 죄 없는 예수님을 죽음의 형틀에 밀어 넣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입니까? 그러므로 저는 예루살렘을 향해 묵묵히 가시는 주님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 죄인 중의 괴수구나. 정말 이것은 살 가치가 없는 무서운 죄인이구나.' 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흔히 교회 안에서 보면, '죄' 또는 '죄인'이라는 말을 듣는 것을 거북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죄라는 말을 듣는 것은 마치 죽음이라는 말을 듣는 것처럼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고 우울한 반응을 보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분들 중 상당수가 '죄'나 '죄인'이라는 말을 교회에서 사용하는 상투적인 단어쯤으로 생각하고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립니다.

이 말은 고귀하고 품위 있는 모임이나 기쁨의 축제인 예배에서는 되도록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받은 상처로 하나님의 위로를 특별히 기대하면서 예배 드리는 사람들에게 죄, 죄인이라는 어두운 말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게 여기는 목사님들이나 교인들도 많습니다. 사랑의교회와 같이 복음주의 입장에 굳건히 서있고, 양질의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런 말을 새겨 듣지 못하는 분들이 이따금씩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평생 가슴 아프도록 느껴보지 못한 채 예배를 드리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런 분들은 죄, 죄인이라는 말을 가급적이면 듣지 않길 원하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지도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무슨 가책을 받을 만한 일을 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지 않고, 할 수 있으면 다른 사람이나 환경 탓으로 돌리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선하다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준은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기준으로 삼아 내가 선하지 악한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과 비교하는 데서 우월감을 가지려는 태도는 출발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자신의 어렸을 때 경험을 이야기한 글을 소개합니다. 그 목사님이 어렸을 때 조금 개구쟁이였는지 자기 방 청소를 잘 하지 않았습니다. 아침마다 어머니가 들어와서는 눈을 부릅뜨고 화를 냅니다. "너 어떻게 방을 이 모양으로 정리하니? 침대는 이게 뭐니? 양말은 양말대로, 옷은 옷대로 어떻게 이런 식으로 정리하면 되겠어?" 하고 나무랐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때마다 이 목사님은 주저하지 않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도 엄마, 내가 형보다는 나아요. 형 방에 한번 가보세요." 사실 형 방은 자기 방보다 훨씬 더 지저분합니다. 그래서 형과 비교하면 자기 방은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어머니는 두말하지 않고, 아이의 팔을 끌고는 아래층에 있는 엄마 방으로 내려간답니다. 엄마 방에 가보면 침대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화장실도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습니다. 무엇 하나 흐트러진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엄마가 큰 소리로 "내가 네 방을 깨끗이 치우라는 것은 바로 이렇게 치우라는 거야. 네 형처럼 하라는 것 아니야. 이 방처럼 치우라는 거야." 하고 호통쳤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의 어린시절 경험에 비추어, 우리가 죄인이라고 말할 때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지 않고 날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기준을 맞추어 '나는 그래도 좀 선하다.'고 생각한다면 철없는 어린 애와 똑같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자기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우리도 그만큼 의롭고 선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어 인정 받을 만한 선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똑 같은 사람들끼리 비교하기 때문에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비교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우리는 형편없는 죄인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를 십자가에 밀어 넣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만큼 우리는 악한 죄인들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시는 많은 성도들 가운데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해야 될 분들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근본적인 변화란 철저한 죄인 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이러한 철저한 변화를 위해선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야 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앞에서 이 예수를 내가 죽였다고 고백하는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그럴 때 나는 철저한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체험을 근본적으로 바로 할 때 비로소 그 믿음이 바로 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을 보면 이런 철저한 변화, 근본적인 변화를 체험하지 못한 채 교회 다니는 분들이 많습니다. 오늘 이 시간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해주시길 바랍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시는 예수님을 보십시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나의 죄를 짊어지고 자기 몸을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묵묵히 향하시는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분을 거기에 가도록 한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나입니다. 그러므로 나만큼 큰 죄인이 없다는 의식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네덜란드의 화가 램브란트(Rembrandt)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는 먼저 예수님을 그린 다음 그 주변에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치며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동조하는 군중들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그 군중들 가운데 한 사람을 자기 얼굴로 그렸습니다. '이 군중 가운데 내가 있다. 내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인 장본인이다.'라는 것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았습니다. 내가 예수를 못 박는 이 무리들과 한패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나는 겉잡을 수 없는 슬픔을 가지고 대성통곡을 했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내가 예수를 오래 믿었든, 늦게 믿었든 상관없습니다.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한두 번쯤은 깊이 실존적으로 인식하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며, 그것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그것 때문에 십자가를 부둥켜 안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됩니다. 이런 변화를 전혀 모른 채 신앙생활 하는 것은 십자가를 우롱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성령께서 이 시간 우리 모두의 마음을 움직여 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밀어 넣은 죄인이 아닌가? 죄인 중에 괴수가 아닌가?' 하고 깊이 인식하는 마음이 있을 때 은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또 무엇을 느끼십니까? 저는 하나님의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를 느낍니다. 너무나 크고 풍성하신 은혜, 내 입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은혜를 느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하신 일이 있습니다. 내 죄를 예수님께서 짊어진 대신 자기의 의를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없는 예수님은 죄인이 되고, 죄 있는 나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신분이 이렇게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의를 들고 서있는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로 영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만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8절에도 이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우리를 불의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그의 마음에 흡족한 의가 있는 자만을 받아들이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의로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에게서 그 의를 얻을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의만 가지면 하나님께서는 만족하시고 우리를 받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그 의를 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맥스 루카도(Max Lucado) 목사님은 자신이 경험했던 작은 에피소드를 통해 예수님께서 주신 이 의의 은혜를 설명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교회 직원들과 함께 쿠키 파티를 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이 파티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은 각자 자기가 만든 쿠키 한 접시를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만든 쿠키든지 간에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쿠키를 만들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교회 직원들에게 이메일을 통해 하소연했다고 합니다. "나는 쿠키를 만들지 못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위해서 쿠키 한 접시만 만들어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이 파티에 기꺼이 참석할 수 있게 됩니다. 저를 도와주세요." 그러자 교회 직원 중 한 자매가 정성껏 쿠키 한 접시를 만들어서 목사님에게 드렸습니다. 목사님은 그 쿠키 한 접시를 들고는 파티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는 파티석상에 놓여진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온 다양한 쿠키들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나라에 파티를 열어놓고 계십니다. 그것은 쿠키 파티가 아닙니다. 그것은 의의 파티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의를 가지고 오면 하나님께선 무조건 받아 주시고, 하늘 나라에 있는 모든 행복과 기쁨을 누리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영원히 영생할 수 있는 축복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나님나라의 파티에 들고 갈 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의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이것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 밑에서 나대신 죄인이 되신 예수님, 그리고 자기의 의를 나에게 넘겨 주신 예수님, 자기는 죄인이 되고 우리는 의인으로 만드신 이 예수님의 은혜 때문에 우리는 이 의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의를 들고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손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보시고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예수를 오래 믿었느냐, 늦게 믿었느냐를 따지지 않으십니다. 무조건 우리를 받아 들이시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파티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자격은 오직 예수님께서 주시는 의의 소유 여부에 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소용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의를 내가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의를 다 소유한 것으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 의를 소유하고 있지만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깨닫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는 것 같습니다.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상식일 뿐, 가슴으로 그 은혜에 감격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시는 주님, 머지 않아 십자가 형틀에 그 발을 올려 놓으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그렇게 비참한 죽음을 당하시는 이유는 나를 의인 만들어 하나님나라의 파티에 참석할 수 있도록 자격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주님의 사랑 때문에 가슴 속에 눈물이 솟고 흥분할 정도로 그 은혜에 깊이 감격하고 있습니까?

 

제가 좋아하는 찬송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오르신 그 발, 흘린 피로 나의 죄를 대속하셨네." 자신이 흘린 피로 우리에게 의를 주시고, 우리를 의인으로 만드신 예수 그리스도. 이 은혜 앞에 울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가슴은 반석일 것입니다. 이 은혜 앞에 무릎을 꿇지 못하면 그 무릎은 굳은 무릎일 것입니다. 이 은혜 앞에 가슴 속에서 우러나는 뜨거운 사랑을 바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중생 받은 자의 가슴이 아닐 것입니다.

이 은혜를 아십니까? 의가 없는데도 나를 의인 만드신 은혜를 아십니까?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갈 수 있는 이 축복을 주신 은혜를 얼마나 느끼십니까?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터치하셔서 식어버린 이 은혜의 마음을 다시 한번 뜨겁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잊어버렸던 이 은혜를 다시 회상할 수 있길 바랍니다.

최근 어느 검사로부터 들은 말입니다. 그 검사가 이렇게 질문 했습니다 "형무소에서 가장 기뻐하는 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언뜻 답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형무소 시설이 좋다고 해도 거기서 기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자 그 분이 대답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형을 3개월 받고 들어온 사람이 이제 나갈 일이 가까이 왔으므로 제일 기뻐할 것 같죠?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진짜 형무소에서 기뻐하는 사람은 사형수로 있다가 무기수로 감형된 사람입니다." 언제 죽을지 몰라 조마조마한 가슴을 안고 사형 집행 날을 기다리던 사람에게, 사형 집행이 중지되고 비록 감옥에서나마 종신 살 수 있는 무기형이 선고되면 너무 기뻐서 소리지르며 돌아다닌다는 것입니다. "나 이제 살게 됐어요. 나 이제 살게 됐어요." 하면서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감이 갔습니다. 생명이란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를 의인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주님이 주신 그 의를 들고 하나님나라에 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종신형에서 무기형으로 감형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셔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토록 하늘에 있는 모든 축복과 행복을 누리도록 허락하셨으니 어찌 큰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런 은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한달 동안 예루살렘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 놓으시는 예수님, 그리고 그곳에 가셔서 십자가에 발을 올려놓으시고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치시는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자주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 놀라운 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면서 주님께 내 마음을 드릴 수 있는 한 달이 되길 바랍니다. 주님 앞에 내 정성과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는 한 달이 되길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내가 하나님 앞에 영원한 의인이 되어 주님 앞에 받아 누릴 수 있는 모든 축복과 행복을 받아 누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 성도들이 이번 고난 주간을 앞두고, 죄 없는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큰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은혜가 있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죄인이 되심으로 내가 의인이 된 이 놀라운 은혜 앞에 감격하여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고 찬송할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예수님 외에는 우리가 자랑할 분이 없고, 예수님 외에는 우리가 찬양할 분이 없음을 믿고 주님을 높이 받들며 사는 귀한 하루가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은혜스런 찬양, 기도, 설교를 듣고자 하시면
유튜브 <미션스쿨>을 이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미션스쿨 바로가기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종려주일 설교 -다시 듣고 싶은 은혜의 설교

 

 

종려 주일 설교


[마리아에게 왔다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대 사람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몇몇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가서, 예수가 하신 일을 그들에게 알렸다.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공의회를 소집하여 말하였다. "이 사람이 표징을 많이 행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사람을 그대로 두면 모두 그를 믿게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우리의 땅과 민족을 약탈할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르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소." 이 말은, 가야바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 해의 대제사장으로서, 예수가 민족을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한 것이니, 민족을 위할 뿐만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자녀를 한데 모아서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한 것이다. 그들은 그 날로부터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고난주일이며 종려주일인 오늘 아침, 주님의 전을 찾아 나온 모든 이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소망이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수요일은 춘분이었습니다. 춘분, 낮의 길이가 밤의 길이보다 길어지기 시작하는 절기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만 춘분은 자연계에 있어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나는 절기로 동양과 서양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춘분을 중요한 날로 여겨왔습니다. 겨우내 꽁꽁 얼었던 땅이 어느새 녹고 그 위로 새싹들이 쑥쑥 올라옵니다. 저 안에 무슨 생명력이 남아 있을까 싶어 보였던 메마른 나뭇가지 위에도 새순이 돋고 꽃들이 활짝활짝 피어납니다. 생명의 기적, 부활의 기적이 일어나는 절기가 바로 춘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기념하는 이 절기와, 생명이 새롭게 태어나는 춘분절기를 지내며 우리의 마음과 우리 사회에도 그런 참되고 아름다운 변화가 일어나길 소망해 봅니다.

 

● 예루살렘 입성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에 제자들과 더불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최대의 명절로 그 어느 때보다도 예루살렘이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그해의 예루살렘은 유난히 붐비고 뜨거웠습니다. 이스라엘 대중 사이에 이번 유월절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신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한 바 있었고,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셨기에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자들은 이번 유월절 명절을 맞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게 되면 대중의 지지를 힘입어 이스라엘 전 사회에 큰 변화를 일으키실 것이라 믿었고, 그 변화는 자신들의 입지와 사회적 지위를 크게 높여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인가를 두고 다투기까지 했지요. 

예수님께서 성서의 예언처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사람들은 구원자를 맞아들이는 예법으로 예수님을 맞았습니다. 큰 무리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가 폈으며, 다른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았습니다.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무리와 뒤따라오는 무리가 외쳤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더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마태복음 21장 10절에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때에, 온 도시가 들떴다’(마 21:8-10)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결코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셨기에 제자들에게 세 번에 걸쳐 당신이 예루살렘에서 죽게 될 것을 예고하셨던 것이죠.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향해 열렬히 외치는 ‘호산나‘ 소리가 곧 ‘십자가에 못 박으라’라는 소리로 바뀔 것까지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그곳은 영광이 기다리는 자리 같았으나 죽음이 기다리던 곳이었습니다. 

 

● 예루살렘
예루살렘,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 그 중심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습니다. 헤롯에 의해 46년에 걸쳐 크고 웅장하게 지어진 성전, 비록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지배하에 있었지만 아직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하심을 느끼게 해주던 곳,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곳곳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모여 제사를 통해 민족공동체성을 재확인할 수 있었던 곳. 그러나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의 겉모습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제사장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순례자들을 대상으로 제물을 비싼 값에 팔았고 성전세금을 거두어 막대한 부를 쌓았으며 그 돈의 상당부분을 자기들의 비호세력인 식민지배자 로마에 갖다 바쳤습니다. 

“최고의 것이 부패하면 최악이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대제사장 무리는 이스라엘 최고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맡기신 자리를 옳게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식민지배하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위로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백성들의 돈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갈취해 자신들의 배를 불렸습니다. 그러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가 부여한 세금과 부역 이외에도 성전에 제물을 바쳐야만 했고 종교세를 내야만 했습니다. 그야말로 2중 3중의 고난으로 허리가 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 다음 날 바로 성전에 가셔서 제물을 파는 사람들의 의자와 돈을 바꾸어주는 사람들의 상을 둘러엎으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짐승들과 사람들을 모두 성전에서 내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불의하고 부패한 성전체제가 뒤집어져야 함을 표현한 것입니다. 

권력자 중에 자기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사람을 그냥 두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제사장 무리는 그 순간부터 예수를 죽일 방도를 찾았습니다. (누가복음 19:47, 막 11:18)

 

●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이유
예루살렘은 예수님에게도 쉽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 동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 차례나 예루살렘성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당신이 당할 고통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제자들을 준비시키기 위함이기도 했겠지만, 예수님 스스로에게도 고난을 준비하게 함은 아니었나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주 말함으로써 자신을 확신시켜나가기도 하니까요. 

예수님께서는 소위 말하는 최후의 만찬 후에 제자들 몇 명과 함께 예루살렘 건너편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십니다. 마가복음은 그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다. 예수께서는 매우 놀라며 괴로워하기 시작하셨다. 그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서 깨어 있어라.” (막14:33,34) 
‘매우 괴로워하다’.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이다’ 라는 표현은 왠지 예수님이 사용하시면 안 될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너무 연약하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만큼 그 고통이 크고 무거운 것이었다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아버지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세 번이나 기도하셨던 것이구요. 

기도 후 제자들과 이야기를 하고 계실 때,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이 보낸 무리가 칼과 몽둥이를 들고 유다와 함께 찾아오게 되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붙잡혀 의회 앞에 끌려가 고난을 겪게 되십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적대자들이 우글거리는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걸까요? 굳이 그들과 정면으로 부딪히지 않으셨어도 되지 않았을까요? 오히려 그들과의 정면충돌을 피하고 갈릴리와 이방 땅으로 가셔서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좀 더 많은 기적을 행하시는 게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데 더 좋은 방법은 아니었을까요? 학교를 세워 더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고 당신의 말씀과 가르침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저술 작업에 힘쓰시는 게 더 나은 방법은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십자가를 지신다 해도 1,2년 더 미룰 수도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왜 꼭 그 때여야만 했던 것일까요?

 

● 양을 살리기 위해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이 전해주지 않는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있었던 하나의 사건을 길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11장에 나오는 나사로를 살리신 이야기입니다. 장소는 베다니입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아주 가까운 마을입니다. 베다니는 예수님에게 좀 특별한 마을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마르다와 마리아, 나사로 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11:5)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아프다는 말을 들으시고는 그곳으로 가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반대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가만두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죠. 그런데도 예수님은 끝내 베다니로 가셨고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다시 살려내셨습니다. 

모든 기적의 결과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은 예수님의 적대자들의 두려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긴급대책회의(공의회)를 소집했습니다. 한 사람이 말합니다. “이 사람이 표징을 많이 행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사람을 그대로 두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우리의 땅과 민족을 약탈할 것입니다.” 그러자 대제사장 가야바가 말을 받습니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르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소.”

그들 논의의 결론은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를 죽이자’(11:53)였습니다. 그들은 크게 두 가지 잘못된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과 자기들이 속한 집단을 사회 전체와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고방식은 생각보다 자주 만나게 되는 사고방식인데 무척 위험한 것입니다. 자기의 이익은 공동체 전체의 이익이요, 자기의 손해는 공동체 전체의 손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와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자는 공동체에서 제거해야 하는 불순분자로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자기가 ‘절대’가 되는 겁니다. 그들은 자신이 사회공동체의 여러 부분 중에 한 부분임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자신들의 무너짐이 오히려 공동체의 안정과 평안을 가져올 수도 있는 것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두 번째의 잘못된 생각은 자기들의 안정과 평안을 위해 그 누군가를 희생시킬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강요된 희생에 기반을 두고 유지되는 구조는 폭력적인 구조입니다. 자기가 살고자 남을 죽이는 구조는 악한 구조입니다. 또한, 그것을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구조는 악마적 구조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폭력적인 구조와의 충돌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는 그런 폭력적인 구조가 반대자를 처리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대제사장 무리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한 시점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따르면 성전정화 사건 이후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이후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아예 성전정화 사건이 이 때 일어난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일어난 일로 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오신 목적이 나사로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든 나사로를 살리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 작정하게 된다고 해도, 그래서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된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고 싶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신 것입니다. 

두 곳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대책 없이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간 목자, 늑대와 같은 들짐승들이 자기에게 달려들 수도 있는 그 위험을 전혀 계산하지 않고 오직 잃어버린 한 마리만을 생각하며 온 땅을 헤매던 목자, 또 그 양 한 마리를 찾은 게 뭔 큰일이라고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아 ‘나와 함께 기뻐해 달라’고 말하던 목자에 대한 예화가 떠오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로 가시기 전에 하셨던 말씀,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라는 말씀도 떠오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 베다니가 있는 예루살렘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신 순간 그 예화와 그 말씀은 육신이 되었습니다. 

 

● 한 생명을 살리고자
여기서 주목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무리의 방향성과 예수님의 방향성.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온 우주가 무장할 필요는 없다는 말도 있지만, 대제사장 무리는 예수 한 명을 죽이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동원했습니다. 하나님, 민족, 성전, 대중, 로마를 동원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죽이기 위해 동원한 하나님, 민족, 성전은 물론 올바른 하나님, 민족, 성전이 아니었지요. 그들이 겉으로 내세운 높고 숭고한 가치들의 이면에는 자기들의 잇속을 챙기고 자리를 지키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이권과 자리를 지키기 위해 어마어마한 무기들로 중무장하고 예수를 죽이러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그 중무장한 무리를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권력화된 하나님도, 으리으리한 성전도, 민족을 대표할 권한도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고 물 위로 올라올 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참 좋아한다’라고 말씀해주신 하나님, 내 몸 하나를 하나님이 머무시는 성전으로 삼고 산다는 정신, 이스라엘 곳곳에서 자신을 메시아로 생각하며 따르는 가난한 민초들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연어가 강 상류에 새 생명을 낳기 위해 거칠고 험한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듯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베다니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결국, 대제사장 무리는 한 생명을 죽임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고, 예수님은 한 생명을 살림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셨습니다. 

과연 우리의 삶은 어느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삶으로 보여주신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처럼 일체의 것을 뒤로하고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겉으로는 예수님을 말하지만 실상은 대제사장 무리를 따르고 있지는 않는지요?

얼마 전 <영재발굴단>이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9살 최주원이라는 어린이가 소개되었습니다. 주원이는 아인슈타인을 좋아합니다. 특히 특수상대성이론을 좋아합니다. 특수상대성이론은 속도가 빛보다 빨라지면 시간이 느려진다는 이론이고 실험을 통해서 증명된 바가 있는 이론입니다. 주원이는 블랙홀과 웜홀에도 관심이 많은데 웜홀은 영화 인터스텔라에서도 나온 바 있죠. 두 시공간이나 한 시공간의 두 곳을 잇는 좁은 통로를 의미합니다. 그 좁은 통로를 이동하는 비행체가 소위 말하는 타임머신이죠. 주원이는 이 타임머신에 엄청 관심이 많습니다. 9살짜리 주원이는 이 쉽지 않은 이론들을 줄줄 꿰고 있었습니다. 방송을 위해 찾아간 피디와 카메라 촬영기사를 앞에 세워두고 긴 강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주원이는 더 공부하고자 틈만 나면 책을 보고 영어사전을 찾아가며 영어논문들까지 보고 밤늦게까지 공부를 했습니다. 방송국 사람이 물었습니다. “주원이는 타임머신을 타고 뭘하고 싶어요?” 주원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세월호 침몰할 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때로 돌아가 형, 누나들에게 저 배는 침몰하니까 타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래서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좀 더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주원이가 5살 때 세월호 사건이 있었고 그때부터 주원이는 세월호 관련 뉴스를 보면서 굉장히 마음 아파했답니다. 주원이는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세월호의 형, 누나들을 구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순수하면서도 바보 같아 보이는 열심, 한 생명을 살리고자 자기의 전부를 쏟아붓는 모습은 저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고난주간, 온갖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커다란 도전으로 서계십니다. ‘너 이곳에 올 수 있니?’, ‘너 또한 이곳에 서야 하지 않겠니?’ 물으시는 것만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나사로가 누구인지 모르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알려주셨습니다. 이 시대의 강도 만난 자가 우리의 나사로라고, 우리 가운데 있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우리의 나사로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는 혼자 감당할 수 아픔 속에서 절규하는 한 생명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아픔과 눈물을 외면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 나사로들의 울음소리를 주님의 울음소리로 알아듣고 그들 곁으로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아픔과 고난을 품어 안아 줄 때, 그 아픔과 고난은 우리를 참된 생명에 이르게 해 줄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메마른 가지에서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놀랍고 아름다운 변화일 것입니다. 이 변화의 춘분 절기와 고난과 부활의 절기를 지내며 우리의 삶에 그런 아름다운 변화가 일어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절기예배설교 / 종려주일 설교 Palm Sunday preaching

 

 

 

제목 : 만왕의 왕 예수
말씀 : 눅19:28-40

평화의 사자로 자칭하는 미국과 영국연합군이 바그다드에 입성했습니다. 폭격으로 중요한 모든 건물들이 다 파괴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인명피해가 있었습니다. 앞으로 또 얼마나 사람들이 죽을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저들은 이라크 국민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 바그다드에 왔다. 고 했습니다. 평화를 주기 위해 온 사람들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비극을 안겨 주었습니다. 부모와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울부짖음, 병상에서 부모를 잃고 누워 있는 어린아이. 그 처참한 모습은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땅에 전쟁은 다시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저들은 평화의 사자로 자칭하면서 장갑차와 탱크를 앞세우고 들어 왔습니다. 앞으로 군정을 통해서 자유를 주겠다고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종려 주일입니다. 그분은 탱크와 장갑차로 무장을 하고 입성하지 않았습니다. 말을 타고 기마병을 동원하지도 않았습니다. 수많은 병사들과 함께 간 것도 아닙니다. 12영도 더되는 하늘의 천군 천사들이 그를 보호하고 지킬 수 있음에도 말입니다. 그는 조그마한 나귀를 타고 입성 하셨습니다. 그것도 나귀 에미가 아니라 한 번도 사람이 타 본적이 없는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 하셨습니다.

길들여진 나귀가 아닙니다. 그러니 사람을 제대로 태울 수가 없어요.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얼마나 초라합니까? 왕의 입성으로는 너무나 초라하고 보잘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입성 하셨습니다. 왜냐구요 평화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죽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죽으러 오셨습니다. 빼앗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주러 왔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오십니다. 제자 둘을 불러 맞은편 마을로 가서 아무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가 메여 있는 것을 보면 풀어 끌고 오라 누가 남의 나귀를 끌고 가느냐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래서 제자들이 갔습니다. 정말 나귀새끼가 있고 저들이 끌고 갈 때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왜 남의 나귀 새끼를 끌고 가느냐? 해서 주가 쓰시겠다 하니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습니다.

나귀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놓고 예수님을 타시게 했습니다. 안장하나 없어서 겉옷을 안장으로 삼았습니다. 궁색하기가 그지없습니다. 세상의 왕들은 금으로 만든 안장을 깔고 다니는데 예수님은 천으로 된 안장 하나도 없습니다. 가시는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양탄자를 못 깔고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제자들의 겉옷은 보잘 것 없었지만 그 안에는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움이 있습니다. 그 겉옷은 겉옷이 아니라 사랑의 양탄자입니다.

예수님의 하신 일을 목격한 제자들과 무리들이 큰소리로 찬양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 했습니다. 그런데 무리 중에 있던 어떤 바리새인들이 시비를 겁니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제자들이 외치는 소리는 왕의 입성을 알리는 소리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때 주님의 대답이 분명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왕이라는 말입니다.

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왕이 입성하는데 왕의 노래를 부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은 왕입니다. 왕이면서 만 왕의 왕입니다. 그런데 그 왕께서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자기백성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거기에 우리 가슴이 뭉클 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인데, 내가 무엇인데 왕께서 나를 위해 고초를 당하셨나 하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그 보혈 흘렸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1.주의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예수님은 주의이름으로 오셨습니다. 세상에는 누가 세우지도 않았는데 제 스스로 왕이 된 사람도 많습니다. 어느 정신 병원에 한 환자가 나는 왕이다. 나는 왕이다 하고 가니까 저 앞에서 고무신을 끈으로 묽어 끌고 오는 환자가 하는 말이 내가 언제 너를 임명했냐 그러더 랍니다. 세상에는 원하지도 않는데 세우지도 않았는데 강제로 폭력으로 제가 왕이 된 사람이 많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주의이름으로 오셨습니다. 오래 전부터 선지자들이 예수님 오심에 대하여 예언했습니다.

세례요한 이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평탄케 하고 증언했습니다. 때가 되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우연히 오신 것이 아니고 강제로 오신 것이 아니고 주의이름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에 하늘 문이 열리고 소리가 나서 들리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의 이름으로 오셨습니다.

2.나귀 타고 오신 왕
왕의 입성이라면 뭔가 화려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 지구상에 나귀 타고 입성한 사람은 예수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외국에 내빈 하나만 와도 빨간 융탄 자가 깔리고 고급 쎄단차가 기다립니다. 예수님은 말도 아니고 나귀입니다. 나귀는 장사꾼들이 예루살렘을 드나들면서 타고 다니는 짐승입니다. 그런데 나귀새끼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나귀 타고 오는 것을 겁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귀는 그들과 친숙한 동물입니다. 그들 삶 속에는 언제나 나귀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셔서 저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평화가 어디 있습니까? 주님을 모신 자리가 평화입니다. 또한 나귀 타고 오심은 겸손입니다. 온유하심입니다.  만 왕의 왕께서 가장 낮은 자리에 오셨습니다. 스스로를 낮추신 것입니다. 우리를 가까이 하시기 위해 낮추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사에 쓸데없는 교만과 허세가 있습니다. 기억할 것은 언제든지 빈 수레가 요란 하구요 가벼운 것이 멀리 날라 갑니다. 세상의 모든 것의 주인 되신 주님은 요란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겉치레로 화려한 것 보다 든든한 속마음을 장식으로 삼았습니다. 그를 진정 사랑하는 제자들의 순종이 더 좋은 장식품이 되었습니다. 그를 사랑하는 제자들의 겉옷이 양탄자보다 더욱 값진 것이었습니다.  양탄자는 돈으로 살수 있지만 사랑은 돈으로 살수가 없습니다. 무엇이 더 소중한 것입니까? 무엇이 더 귀한 것입니까? 그분은 우리 위에 군림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고 돌보며 도리어 섬기기 위하여 오신 분입니다.

3.찬양 받고 받으실 왕
사람들이 노래합니다. 호산나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주의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기에 찬양 받아 마땅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자 되기에 찬양 받아 마땅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속죄하셨기에 찬양 받아 마땅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주 되시기에 찬양 받아 마땅합니다. 그분은 창조주 되시기에 찬양 받아 마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래합니다.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4.죽으러 오신 왕
지금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남들은 좋아할는지 모르나 주님은 그러하지 못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세상의왕처럼 군림하러 가는 줄 알고 자기들도 한자리 할 줄 알고 좋아하나 주님은 그러하질 못합니다. 주님은 지금 죽으러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아주는 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시기에 인간적으로는 더욱 고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러 가자 하고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발을 옮기자 그들이 무엇을 했습니까?

서로 누가 높으냐 하고 다투었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지금 답답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만 주님이 하시는 일은 이해가 안됩니다. 왜 죽으러 간다고 하는지가 이해가 안됩니다. 예수님의 그 능력으로 로마 놈들을 싹 쓸어버리고 왕으로 올라앉으면 그만인데 왜 저렇게 꾸물거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일곱 살 난 아이가 담배를 피우더랍니다. 그래서 꼬마 놈이 왠 담배를 피우느냐고 물었더니 “ 마음이 답답해서 피운답니다. 네가 뭐가 그리 답답하냐 했더니 남북통일이 안돼서 그럽니다 하더랍니다. 어른들이 답답 한거요 빨리빨리 철조망 뜯어내고 손잡으면 될 터인데 맨 날 무슨 회담이나 하고 앉았으니 답답하지요. 제자들이 그래요

믿음생활하면서 답답한 일이 없습니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나에게 예수님을 맞추지 말고 나를 예수님에게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입니다. 왜 죽어야 하는지, 십자가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보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찢으신 몸과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피기 무엇인지를 알고 오늘 성찬에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김영태 목사 설교 중에서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