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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도회헌신예배] 내가 하리이다

 

 


말씀 : 요20:11-15

제목 : 내가 하리이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 첫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몇 명의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을 때에 일어난 일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날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드기 위하여 무덤을 찾아갔습니다.(막16:1) 왜냐하면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은 금요일 오후여서 안식일이 시작되는 그날 저녁까지 장례를 마치기 위하여 너무나 서둘러 장례를 치렀기 때문에 예수님의 몸에 향유도 제대로 발라드리지 못하여 너무나 안타까워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덤 입구를 막아놓은 돌을 굴려낼 걱정을 하면서 예수님의 무덤에 도착했을 때는 어찌된 영문인지 무덤 문은 이미 열려져 있었고 깜짝 놀라 들어가보니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너무나 마음이 아파 울고 있는데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그러자 마리아는 사람들이 주님을 어디에 두었는지 알지 못해서 운다고 말하는데 이때 뭔가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자 놀랍게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셨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그런데 참 안타깝게도 마리아는 자기 앞에 나타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하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고, 게다가 예수님의 모습도 신령한 몸으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그곳을 지키는 동산 지기인 줄 착각하고 당신이 옮겼으면 어디 두었는지 알려주면 내가 가져가겠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여기까지의 말씀을 보았는데 저는 이 말씀을 통하여 특별히 15절 말씀을 가지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주님을 진정 사랑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서 먼저 생각해 볼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리아는 진정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모든 두려움과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예수님 무덤가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먼저 오늘 1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여러분, 이 말씀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이 말씀은 주님께 대한 온전한 사랑이 없이는 결코 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그것은 그때의 상황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께서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유대종교지도자들로부터 신성모독죄로 혹은 이단자로 몰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예수님께서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잘못을 책망하고 힐난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성모독에다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준 권위에 도전하는 자로 간주하여 괘씸죄까지 추가되어 가장 극악한 죄수를 사형시키는 십자가의 사형을 언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율법을 파기하는 이단의 괴수요 국가의 권위에 도전하는 반역자 취급을 받고 가장 끔직한 십자가의 처형을 받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후환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모든 실권을 쥐고 있는 유대종교지도자들에게 잘못 보이면 자신도 무슨 봉변을 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짐짓 예수님과 관계없는 사람 행세를 하면서 예수님 곁을 떠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상황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다가 다시 장례를 잘 치러준다는 것은 결국 반역자를 돕는 것입니다. 반역자를 돕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도 반역자 편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그러면 자신에게도 어떤 불이익이 올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주님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한 치의 망설임이나 주저함 없이 그 일을 했던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혹시 불이익을 당한다해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위해서 죽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영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용감하게 주님의 시신을 달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도 바로 이런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기억한다면 우리가 어찌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정말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마다하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주님은 나같은 죄인을 살리기 위하여 그 몹쓸 멸시와 천대와 조롱과 희롱과 고통과 아픔을 다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영생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와같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그 끔찍한 고난을 당하시고 모든 사람들이 믿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지상명령으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주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기억한다면,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고 풍요롭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면 어찌 주님의 생명의 역사에 참여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마22:37,3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보세요.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야 말하면 뭐하겠습니까? 주님을 진정 목숨처럼 사랑한다면 어찌 주님의 역사에 참여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을 만났다면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을 진정 사랑한다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몸된 교회를 사랑한다면 정말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해야 합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자기 부인과 헌신과 섬김과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를 위하여 끔찍한 죽음을 당하셔서 생명을 주신 주님의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는 길이기에, 그것이 주님이 생명을 주시면서까지 이루시기를 너무나 원하셨던 생명의 역사를 이루는 길이기에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생명의 능력과 은혜가운데 살게되고 주님의 역사는 아름답게 이루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은 자로서 주님께 대한 사랑과 주님의 생명의 역사에 대한 소망으로 주님의 거룩한 역사에 참여할 때에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며 그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용기와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또 생각해야 할 것은 주님을 섬기는 일에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바 대로 그때의 정황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너무나 불리한 정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반역자요, 이단자라는 죄명으로 십자가에서 참혹한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제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생각하고 다 흩어져 버렸습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후환이 두려워서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다가 다시 장례를 치러주는 사람에게는 어떤 불이익이 올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미 주님이 어떻게 부활하셨는지 혹은 복음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무덤가를 찾아간다는 것이 큰 위협이나 걱정거리로 생각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그 무덤을 찾아갔을 때는 상황이 전혀 달랐습니다. 부활은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당시 권세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서슬이 시퍼렇게 주님을 따르는 자들을 찾아 핍박하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지금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다가 장례를 치러주고 돌본다는 것은 어떤 고통과 불이익이라도 감수하겠다는 용기와 각오와 결단이 없으면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주님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용기 있게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시신을 내가 가져가겠노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환난과 핍박과 후환과 불이익이 있더라도 오직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오직 주님을 조금이라도 잘 모시기 위한 생각으로 내가 그 일을 하겠다고 용기 있게 행동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두려움과 걱정 염려를 물리치고 주님을 찾게 되었고 내가 가져가겠다고 말씀했고 그래서 결국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얻고 은혜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물론 당연히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정말로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 진정한 생명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세상에서 혹시 환난과 핍박이 있어도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 안에 생명이 있는데요, 그 안에 영생복락이 있는데요, 거기에 진정한 자유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있는데요, 어찌 세상에서 좀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다고 그걸 피하겠습니까? 어찌 세상에서 조금 불이익이 있다고 주님을 섬기는 일에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해야 하고 사랑한다면 진리를 위하여,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용기와 결단을 가지고 거기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것이 옳은 일이고, 그것이 복된 일이고, 그것이 생명의 역사를 이루는 일이고, 그것이 우리가 자신이 진정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만나 더욱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마16:24,25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진정으로 나를 따르려면 자기의 생각과 이성과 환경과 상황을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 때문에 주저하지 말고 약해지지 말고 오직 나를 믿고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진정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그 역사를 이루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진정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사랑함으로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어 진정한 용기와 결단력으로 주님의 거룩한 역사에 참여할 때에 주님의 역사를 이루며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은총을 충만하게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책임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바르게 섬기려면 책임감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있어도 누가 뭐래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 나는 내게 주신 이 귀한 사명,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내게 맡긴 이 일에 충성을 다겠다는 책임의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어떤 상황과 환경과 여건 속에서도 사명을 감당하고 그래야 진정으로 충성스러운 일꾼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15절에서 우리는 마리아의 이와같은 책임감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15절 하반절만 다시한번 보겠습니다.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여기서 내가 가져 가겠다는 이 말은 곧 내가 책임지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당신이 혹시 치웠다면 나에게 주십시오. 내가 그분을 잘 모시겠습니다. 내가 책임지고 비록 시신이나마 제가 돌보고 안식하도록 최선의 조치를 다하겠습니다. 그러니 나에게 주십시오하는 뜻인 것입니다.

여러분,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넘쳐나고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이 드물다는 말이 있습니다. 즉 정승이 살았을 때는 뭔가 잘 보여서 유익을 얻을까하여 조그마한 일에도 열심히 그 집을 찾아 가지만 막상 정승이 죽으면 자신에게 별로 득 될게 없으니 멀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생전에는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마음이 상한 자, 병든 자, 메시야 왕국을 바라는 자, 진리에 갈급한 자 등 많은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이 반역자로 몰려 돌아가시게 되자 그 많던 사람들도 어디론가 다 자취를 감춰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냥 자취를 감춰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도리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데 한패가 되어 예수님을 정죄하였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도망갔을 때 그녀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남들이 별로 거들떠보지 않는 예수님의 시신을 친히 모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어떤 불이익이 온다고 해도 예수님의 이 시신을 자신이 돌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가져가겠노라, 곧 내가 책임지겠노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다 도망갔어도, 남들이 잘 안하려는 일이지만 내가 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일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피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일 자체로 보아도 기분 좋은 일이 아니고 더더구나 자칫하면 커다란 불이익이 올 수도 있는데 누가 기꺼이 하려고 하겠습니까? 남 보기에 좋은 일, 고상한 일, 깨끗하게 차려입고 폼 나게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나마 좀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궂은일은 뒤로 빠지기 쉽습니다. 궂은 일, 어려운 일, 힘든 일을 남에게 미루고 무언가 그럴듯하게 자신이 드러나는 일만 하려고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뭔가 폼나고 재미있고 대접받고 드러나고 영광받고 하는 일만 한다면 그것은 봉사가 아닙니다. 그건 그저 자기 만족 자기 기쁨 자기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일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기 힘든 일, 남들이 꺼려하는 일, 궂은 일을 하는 것이 진정한 헌신입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조건이 나쁠 때, 힘들 때, 부족할 때, 연약할 때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사랑이 위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시면서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좋은 조건을 보고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통해서 무언가 많은 것을 얻어 보려고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함으로써 예수님에게 인간적으로 무슨 큰 영광이 되고 명예가 되기 때문에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를 사랑하는 일에는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참혹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멸시와 천대와 조롱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기꺼이 지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는 정말 주님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세상에서 혹시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주님의 역사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깨끗하고 폼나고 그럴듯하고 남 보기에 좋은 일이 아니더라도 비록 인간적으로는 좀 꺼려지고 힘들고 하찮은 것처럼 보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일에 헌신하는 것이 진정한 헌신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그러한 사명들을 감당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진정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용기와 결단력을 가지고 책임감있게 주님의 교회를 섬길 때에 여러분의 삶도 더욱 아름답게 빛나고 주님의 거룩한 역사도 힘있게 이루어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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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도회헌신예배] 헌신의 은혜

 

 

 

 

제목 : 헌신의 은혜

말씀 : 고후8:1~9

1.모든 것이 주님의 것입니다.

제법 오래전에 경기도 의정부의 미군 부대 옆에 작은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 교회는 교인이라야 약30여 명 남짓하였는데 어찌 된 일인지 두 분 장로님을 중심으로 교인들이 두 패로 갈려 분쟁이 생겨 서로 헐뜯고 이간질하며 싸움만 교회는 잘 돌보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날 예배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종을 치는 사람이 없어 목사님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꼬마 아들에게 종을 좀 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예하고 달려가 종을 치고는 막 달려오다가 그만 과속으로 달려오던 미군 차에 치어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그것도 모르고 시간이 되어 강대상에 올라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는데 조금 있으려니까 뭔가 웅성웅성하더니 교인들이 빨리 예배를 마치고 내려오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끝까지 예배를 마치고 강단에서 내려왔고 그때서야 아들이 차에 치어 죽은 사실을 알고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사고현장에는 경찰과 미군 장성이 와 있었고 아들은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있었습니다. 이를 본 사모님은 졸도하여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때 미군 장성이 다른 부관들과 함께 와서 목사님에게 정중하게 사과를 하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운전병의 실수로 이런 일이 일어난 점 진정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목사님, 무엇이든 목사님께서 해 달라는 대로 정성을 다해 해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러자 목사님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장군님, 바쁘신데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생명은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내 아들은 하나님께서 뭔가 뜻이 계셔서 데려가신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염려하지 마시고 제게 아무것도 안 해주셔도 됩니다. 그리고 운전병도 너무 책망하거나 징계하지 마십시오.”

이에 미군 장군이 너무나 감격하여 세상에! 이렇게 귀한 주의 종이 있다니 하면서 재삼재사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부대로 돌아가서는 참모들과 목사님에게 어떻게 해 드리면 좋을지를 의논했습니다. 그러자 참모들이 그 목사님의 교회가 너무 초라하니 좀 더 크게 새로 지어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결국 전적으로 미군이 부담하여 넓은 부지를 구입하고 초라한 교회는 헐어버리고 크고 멋진 교회를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예배당 건축되고 봉헌식을 드리게 되었는데 마지막으로 장로님이 목사님에게 예배당 열쇠를 드리는 순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장로님이 열쇠를 가지고 강단으로 올라가다가 그만 중간에 멈추어서더니 그 자리에 서서 울면서 올라오지를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어서 올라오시라고 하자 장로님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감히 강단에 올라 갈 자격도 없고, 목사님께 열쇠를 드릴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제가 장로로서 허물어져 가는 성전을 건축하고 교회를 부흥시키기는커녕 싸움만 했는데 어떻게 올라가겠습니까? 게다가 우리를 대신하여 목사님의 아들이 희생 제물이 되어 교회가 세워졌는데 제가 어떻게 이 열쇠를 목사님께 드리겠습니까?” 그러자 목사님이 내려가서 장로님을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그러자 그만 온 교회가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다음에 목사님이 장로님의 손을 잡고 올라와서 열쇠를 봉헌하여 헌당식을 마치게 되었고 이후로 교회는 온 교우들이 하나가 되어 교회를 섬김으로 아름답게 부흥하였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아들이 사고로 죽었을 때 그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야말로 땅이 꺼지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뼈가 녹아내리는 고통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목사님은 생명은 하나님께 달렸으니 아들이 죽은 것도 분명의 하나님의 뜻안에서 이루어진 일로 인정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뜻은 그 아들을 통하여 성도들을 깨닫게 하여 교회를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뜻대로 되어 목사님의 아들이 희생제물이 되어 교회를 살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것이니 주님 뜻대로 사용하시옵소서 하면서 주님께 맡기며 주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그럴 때 우리 자신도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고전6:19,20절을 보십시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래서 롬14:8절에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이제 내가 살아도’라는 복음성가도 있지 않습니까? 함께 불러 보겠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신앙의 고백가운데 살기를 바랍니다. 저는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이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 어차피 사라질 것을 주님을 위해서 드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영광입니까? 어차피 무엇인가에게 바쳐져야 할 것들, 주님의 생명의 역사에 바쳐진다면 얼마나 영광이겠습니까? 이런 마음으로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며,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고,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2.주님은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주셨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주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힘껏 주님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마게도냐 교회는 그들도 너무나 어렵고 힘들었지만 그들 자신과 그들에게 주신 물질도 힘껏 주님을 위해서 사용하였습니다.

오늘2,3절을 보겠습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여러분, 보십시오. 그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이 있었고 극심한 가난 중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힘에 지나도록 연보를 하였습니다.

놀라운 말씀 아닙니까? 환난의 많은 시련가운데서 넘치는 기쁨이 있었다. 극심한 가난이 도리어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환난의 많은 시련 속에서도 기쁨이 넘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극심한 가난이 도리어 풍성한 연보를 할 수 있습니까?

우선은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므로 많으면 많은대로 적으며 적은대로 주님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비록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심한 가난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천배만배 크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서도 아무리 힘들어도 그래도 주님이 주신 은혜가 더 크고 나아가서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은총은 그것을 얼마든지 덮고도 남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낮고 천한 곳까지 오셨습니다. 침뱉음과 뺨맞음과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 로마 병정들이 휘두른 채찍에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수모와 멸시와 천대와 고통과 아픔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우리를 구원하여 영광의 나라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가 어찌 헌신하고 충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느 날 한 권사님이 꿈을 꾸었는데 하나님께서 네가 권사로서 잘 한 일이 무엇인지 말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권사님은 ‘하나님, 저는 열심히 기도하면서 아이들을 위해서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고 뒷바라지를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다 믿음 안에서 자라나서 다 결혼하고 자리를 잡고 잘 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래 그것도 귀한 일이다. 그런데 자녀를 위한 헌신은 누구나 다 하는 일이 아니냐? 그보다 나를 위해서 한 일이 무엇인지 말해봐라.

그러자 권사님은 ‘저는 주일 예배도 드리고, 십일조도 드리고, 교회 청소도 하고 점식식사 준비도 하고 설거지도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그것도 잘 한 일이구나. 그런데 그것도 권사가 아니라 일반성도라도 다 해야 할 일이 아니냐? 그런 것 말고 나를 위해 네가 특별히 한 일을 말해 보거라.’ 그러자 권사님이 유구무언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섭섭하구나. 나는 네가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었다. 심지어 내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했고 앞으로 네가 와서 살 천국 집도 마련해 놓았다. 그런데도 너는 나를 위해서 별로 한 일이 없나 보구나. 너무 섭섭하구나.’

여러분,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입니다. 비록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도 그래도 주신 은혜가 천배만배 큽니다. 게다가 주님은 심지어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 놀라운 은혜를 받은 우리가 주님을 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2:20절에서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나님께서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다. 게다가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셨다. 이 큰 은혜를 받았으니 어찌 그 분을 위해서 살지 않겠느냐 그런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이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하여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힘있게 이루어가고, 주의 은혜가 더욱 충만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헌신하는 자에게 풍성한 은혜를 주십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헌신과 봉사하고 충성하라고 하신 것은 결코 우리를 힘들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 고귀한 역사에 참여할 때에 죽어가는 영혼이 살아나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또한 그렇게 세상에서 그 어떤 것보다도 귀한 역사에 참여한 심령들에게는 은혜를 주고 기쁨을 주고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부요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9절을 보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오직 영광과 찬양만을 받으시게 합당하신 분이지만 우리를 위하여 비천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까지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가난하게 되고,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것은 그렇게 비참하게 끝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통하여 인류를 살리고, 부활을 통하여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로서 더욱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망권세를 깨트리고 부활승천하셔서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역사에 참여하는 것은 힘들고 지치고 초라한 모습으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은 그런 귀한 사역을 통하여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려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케 함으로써 부요케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삶만 부요케되고 우리는 어렵고 힘들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의 삶도 감사와 기쁨과 자부심과 보람과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또한 그런 귀한 사역을 위하여 헌신한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그에 상응하는 복을 주십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의 상급은 물론 지금 여기서도 풍성한 은혜를 주십니다.

마19:29절을 보십시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물론 무조건 전토를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때에 영생을 누리는 것은 물론 이 땅에서도 여러 배의 축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옛날 평안북도 정주에 백사겸이라는 농부가 있었습니다. 이 분이 그 마을에 선교사가 들어와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예수님을 믿고 나서 이 분은 열심히 교회 일에 충성을 다하며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어느 정도 성장하자 예배당을 짓게 되었는데 온 성도들이 함께 나와 벽돌을 찍고 땀을 흘리며 일했지만 그래도 건축비가 부족하여 중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백사겸성도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땅 1000평을 모두 팔아서 건축비로 헌금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교회가 완공되었고 백사겸 성도는 땅이 없어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 교회 사찰로 임명되어 겨우 생활비를 받아 연명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선교사님이 백성도의 신실함을 보고 그의 아들을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공부할 수 있도록 주선을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으로 건너간 아들은 파커대학과 프린스톤신학교와 대학원을 거쳐 예일대 철학박사, 파커대학 신학박사, 스프링필더대학 인문학박사, 디포대학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귀국하여 연세대교수, 서울대 교수, 연세대총장을 거쳐 제2대 문교부장관을 지내고 정부에서 대한민국무궁화 훈장을 받고 하나님의 부르신 후에는 국립묘지 애국지사의 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이 분이 바로 백낙준 박사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신실하게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며 자신의 전 재산을 하나님께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책임져 주시고 백배천배로 갚아 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와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주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까지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주심은 우리가 생명의 은총을 누릴 뿐 아니라 이 역사에 참여함으로 생명의 역사를 이루려 하심입니다. 그 생명의 역사는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귀하고 귀한 사역입니다. 그래서 그 귀한 역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너무나 귀히 여기시고 그래서 큰 상급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전도회 헌신예배를 드리면서 여전도회원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우리 몸과 마음과 시간가 물질을 주님을 위하여 사용하며 살아갈 때에 이 땅에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며 주님의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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