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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틴 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
 

1.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내는 글

(To the Christian Nobility of the German Nation).


본서는 루터가 1520년에 기록한 논문이다. 루터가 이 책을 기록한 것은 그리스도계를 개혁시킬 필요성을 느낀 나머지, 개선해야 할 여러 가지 점을 들어 그 당시 독일의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낸, 하나의 뜻있는 권면과 충고의 글이라고 볼 수 있다.

본 논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기본적인 문제를 논하는 부분과 실제 문제를 취급하는 부분이다.


그 첫 부분은 1천년 가까이 서방세계의 사회, 경제, 정치, 법조, 종교계의 기반을 이루고 있었건 문제들을 이른바 “로마의 세 가지 담<Mauer>"에 비유하면서 신학적으로 논박한 것이다. 첫째 담은 세속적 계급 위에 있는 영적 계급의 담인데 이러한 계급은 조작된 것이라는 것이 루터의 주장이다. 루터는 모든 크리스천들이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계급”에 속하는 것이며 그들 가운데는 직무상의 차별 이외에는 아무것도 차별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사제는 그저 하나의 관리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크리스천은 모두 세례를 통하여 사제로서 성별을 받는다는 것이다. 루터는 세속적 계급에 대한 영적 계급의 우위성은 근거가 없는 주장이며 모든 크리스천은 다 사제라는 만인 제사장주의를 선언한 것이다.


둘째 담은 성서해석자인 교황과 교황의 무오설에 관한 내용이다. 루터는 교황이 성서의 유일한 교사가 되려고 한다고 비판하였다. 즉 교황은 스스로 유일한 권위자라고 생각하며, 교황은 악인이거나 선인이거나 간에 신앙문제에 있어서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교황(敎皇) 무오(無誤)의 거짓 주장을 하여 우리를 납득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교황은 이 문제에 대하여 성서적으로 한 마디도 증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이유들로 인하여 교회에는 이단적이고, 부자연스럽기까지 한 규정들과 교회법이 교회에 들어왔다. 이 문제에 대하여 루터는 성서적인 근거(고린도전서 14장 30절)를 제시하면서 모든 크리스천은 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요한복음 6;45)고 하였다. 즉 성서 해석이나 그 해석의 확인이 홀로 교황에게만 속한다고 하는 것이 전혀 조작적인 이야기이며 그들은 여기에 대하여 한 글자도 증언하지 못한다고 비판을 가하였다.


셋째 담은 교황과 공의회의 담이다. 즉 공의회를 소집하거나 결의를 확인하는 것이 홀로 교황에게만 속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루터는 아무런 성서적인 근거가 없이 자신들의 법령에만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루터는 실례로 공의회 가운데 가장 유명한 니케아 공의회가 주교에 의한 것이 아닌 콘스탄틴 황제에 의하여 소집이 되고 확인되었다는 역사적인 증거를 제시하였다. 그런데 이 공의회는 가장 그리스도교적인 공의회였다는 것이다. 만약 교황청이 주장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런 공의회는 분명 이단적인 것이 되어야 하지만 니케야 공의회는 가장 그리스도교적이었다는 것이다. 루터는 이 논문의 첫째 부분에서 직업적인 차이가 있기는 하나 신자간의 근본적인 차이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당시 교회의 세 가지 담을 파괴한 것이다.


둘째 부분에서 루터는 공의회에서 논의되어야 할 여러 가지 문제들과 반드시 개선되어야 할 당면한 실질적인 문제들을 27개 항목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취급하였다. 교회 내의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분야 등 다방면에 걸쳐서 문제의 핵심들을 다루어 개혁을 제안한 바 있다. 루터는 먼저 교황의 교만한 마음에 대하여 질타를 가하면서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마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하여 날마다 울고 기도하는 일과 모든 겸손의 본을 세우는 일 외에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교황은 교만하여 영혼 구원에 관하여는 관심을 지니지 못하고 오히려 권력을 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추기경은 독일의 재산들을 독일로 가져가기 위하여 만들어진 직분이기에 하나님 예배를 땅에 떨어뜨리게 하였다고 질타한다. 루터는 추기경은 단 한사람도 없을 지라도 교회는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교황청 역시 다 없어지고 단 하나만 남더라도 신앙 문제에 있어서 결정을 내리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첫 수입세와 교황의 달, 자유 교구령, 성록령 등은 교황의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악법이었다는 것을 루터는 비난하였다. 그러면서 루터는 첫 수입세의 폐지와, 로마의 임명에 대한 금지, 그리고 개교회의 권리회복을 주장하였다.


교황은 이런 모든 고상한 상행위(교황의 생각에 비추어 볼 때)를 위하여 로마에 거래소인 교황청 내의 집을 세웠는데 성록령과 교구령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다 이리로 오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는데 루터는 이러한 행위를 창녀의 집에 비유하였다.


루터는 또한 세속적인 문제를 가지고 교황의 법정에서 심판하는 것에 대한 배제를 주장하였으며, 주교 법정의 재판관들에 의하여 자행되는 난폭한 착취를 모든 주교가에서 금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루터는 결혼생활에 관하여도 자신의 견해를 보이고 있는데 결혼 생활을 자유롭게 행하고, 모든 사람이 결혼을 하든지 않든지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외에도 루터는 죽은 자의 미사를 폐지할 것과, 성사금지를 폐기할 것, 성자의 날이나 순례도 금지할 것을 촉구하였다. 즉 루터는 본 논문에서 신학적인 것보다는 실제적인 개혁의 방침을 세웠는데 교황권의 악정과 직임 임명, 과세는 억제되어야 하며, 부담이 되는 의식은 철폐되어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독일 교회는 마땅히 독일 민족교회 산하에 있어야 하며 교직자의 결혼은 허락되어야 하며, 수많은 성일은 줄여서 산업과 사회에 관심을 갖도록 하고, 탁발 교단들을 포함한 구걸은 금지되어야 할 것은 말하였다. 또한 사창가는 폐쇄되어야 하고, 낭비는 억제되어야 하며, 대학의 신학 교육은 개혁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루터는 마감말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 주장이 바르다면 나는 지상에서는 정죄를 받아야 하고 다만 그리스도에 의하여 하늘에서만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크리스천들과 전 그리스도 교계의 주장은 홀로 하나님 한 분에 의해서만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모든 성서가 보여주기 때문이다.”


2. 교회의 바벨론 감금(Babylonish Captivity of the Church).

이 논문은 루터가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내는 글”을 발표한 2개월 후에 나온 글이다. 이 논문은 당시의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잘못된 성례관을 신학적으로 조리 있게 설명하고 반박한 글이다.


“바벨론 감금”이란 말은 성례전의 왜곡된 가르침을 일례로 통칭하는 말이다. 곧,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싸움에 패하여 오랫동안 바벨론이 포로가 되어 있으면서 고난의 생활을 한 것처럼 그리스도 교회의 성례전이 중세기 로마 교회에 의하여 “포로”가 되었던 현실을 비유해서 붙인 표현이다.


루터는 본 논문에서 카톨릭 교회의 성례를 비판하였다. 즉 카톨릭 교회의 7가지 성례인 세례, 성찬, 참회, 안수례, 견신례, 결혼례, 그리고 임종시의 도유식을 포함한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이 7가지의 성례 가운데서 세례와 성찬만을 성례로 보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첨가한다면 참회까지도 성례로 보았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는 참회와 같은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표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루터는 나머지에 대하여 말하기를 주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고 인정하신 것이 아니면 성례전으로 취급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루터의 논점이다.


루터는 먼저 떡의 성례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루터는 성만찬에서 평신도들에게 성경의 말씀을 예로 들면서 포도주 잔을 금지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만일 교회가 평신도들에게 한 가지 요소인 포도주를 빼앗을 수 있다면, 역시 다른 한 가지 요소인 떡도 빼앗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평신도들에게서 성만찬의 두 가지 요소를 거부하는 것은 사악하고 전제적이며, 어떤 교황이나 공의회도 이러한 권한을 지닐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루터는 성만찬에 있어서 화체설(化體說)의 미신적인 요소와, 성만찬을 희생으로 해석하는 점에 대하여 비판한다.


루터는 또한 희생의 미사를 비판한다. 중세 카톨릭 교회는 미사가 선행이고 희생제라는 의견보다 더 일반적으로 보유하거나 또는 확고하게 믿어지는 의견이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미사 때마다 희생의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또한 우리의 죄사함의 보속을 위해서 인간도 희생의 제물로 바쳐지는 노력과 공로가 있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십자가에서 희생의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더 이상 희생을 드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 신앙이 따르며, 신앙 다음에 사랑이 따른다. 그리고 사랑은 모든 선행을 행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악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루터는 세례가 성례에 관하여는 최대의 축복으로 여기고 있다. 루터는 세례는 하나님의 약속이며,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곳에는 어디서나 반드시 신앙을 요구하며, 이 두 가지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약속이 없이는 믿을 수 없고, 믿음이 없다면 약속이 수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성례에서 신앙이 필요 불가결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성례가 본래의 의도에서 벗어난 것에 대하여 비판을 하고, 세례에 대하여 설명을 하는 가운데 중세기 수도원 제도를 비판하면서 세례의 언약 외에 다른 언약은 있을 수 없다고 가르쳤다.


루터는 성례에 관하여 말하면서 성례의 첫째가는 폐해는 참회를 완전히 폐기해 버린다는 것이다. 루터에 의하면 교황청은 참회를 회개와 고백과 보상으로 나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할 때 그 하나 하나에 있어서 좋은 것은 다 제거해 버리고 거기에다 자기들의 변덕과 횡포를 가져다 놓았다는 것이다.


3. 크리스천의 자유(On Christian Liberty).


“크리스천은 더할 수 없이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크리스천은 더할 수 없이 충의로운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한다.”는 이 두 가지 명제에 대하여 루터는 서로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기독교인의 두 가지 모습을 기술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기독교인의 두 가지 모습이란 서로 모순되는 두 사람이 한 사람 안에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하나는 내적이고 영적인 사람이고 하나는 외적인 사람 즉 옛 사람이다. 우선 외적인 것은 어떤 것이라도 기독교적인 의나 자유를 만들어 내거나 또는 반대로 불의나 종속됨을 만들어 내는 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우리들은 우리들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삶과 의와 자유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 즉 그리스도의 복음 한 가지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복음이 신앙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신앙은 인간의 의와 구원을 위하여 율법이나 공적이 필요치 않도록 만드는 능력이 있다고 루터는 말한다. 이것이 신앙의 첫 번째 능력이요,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고귀한 예배는 우리가 진실성과 정직성과 그리고 신뢰하는 사람에게 돌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로 돌리는 것이 신앙의 두 번째 능력이고, 영혼과 그리스도를 결합시키는 것이 신앙의 셋째 능력이라는 것이다. 결국 루터는 이 논문에서 만인 제사장직을 주장하고 나섰다. 즉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 아래 얽매여 있지 않고,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그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그리고 이웃에 도움이 되도록 사랑으로 묶을 수 있기 때문에 종이라는 것이다.


루터는 선행이 선한 사람을 만들지는 못하지만 선한 사람은 선한 일을 행한다고 하였다. 즉 선행이 선한 사람을 따르고 그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선을 행하는 사람은 어떤 공적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선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신앙이라는 것이다. 신앙 외에는 아무 것도 사람을 선하게 만들지 못하며 불신 외에는 아무 것도 사람을 악하게 만들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 논문에서 루터는 마지막에 이런 말을 잊지 않았다. “그리스도시여! 우리로 이 자유를 이해하고 보존하게 하옵소서. 아멘.”


◈ 평가

본 종교개혁 3대 논문은 루터의 저서 가운데 가장 빛나는 책들이라고 여겨진다.

루터는 이 책들을 통하여 위대한 종교개혁을 이룩할 수 있었으며, 참된 신앙의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본인은 이 책을 읽으면서 때로는 화가 치밀기도 하였고 때로는 무엇인가 가슴을 꽉 막고 있었던 체증이 풀리는 듯한 인상을 받기도 하였다.

당시대의 교회가 너무나 부패하여 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져 가는 모습을 보면 정말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런 사악한 세상에서 루터와 같은 인물이 나와서 꺾이지 않는 정열로 당시의 권력에 담대히 맞설 수 있었다는 것을 보면서 그나마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본 논문을 읽으면서 오늘 21세기를 목전에 둔 우리들의 모습이 마음 한 구석에 영상으로 나타났다. 그러면서 오늘의 우리 교회에 루터가 나타나면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스친다. 자신이 없다. 루터 앞에서 우리는 떳떳하다고 큰 소리로 말할 수 있는 자신이 없다.

한 가지 소망을 지닌다면 아직은 우리가 무너지지 않았으니 이 시대의 루터가 나타나기 전에 우리의 신앙과 삶을 재정립하였으면 하는 생각을 지니게 한다. 우리는 말씀 중심의 신앙으로 거듭나야 하겠다. 루터 당시에도 말씀이 없어서 무너지고 있었지 않았던가! 물론 우리들에게 체험도 중요하고 신비주의적인 신앙도 중요하다. 그러나 말씀이 없는 체험은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 중심의 신앙으로 거듭나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여본다.

물량주의, 성공주의 신앙에서 십자가 신학의 신앙으로 거듭나는 모습이 되었으면 한다. 우리는 너무 물량주의화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교회도 큰 교회, 버스도 큰 버스, 모든 것이 큰 것은 좋은 것이라는 생각에 젖어 있다. 그러면 소외와 빈곤과 억눌림의 아픔은 누가 함께할 것인가? 교회가 함께 하여야 한다. 그럴러면 교회는 십자가의 신학의 신앙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이기적인 신앙에서 더불어 살고 더불어 주는 신앙의 모습을 보이기는 소망한다. 이것이 바로 루터가 바라는 진정한 신앙인의 삶일 것이다.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


1. 오늘 우리들의 교회는 너무 자본주의화 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주님의 지상 명령인 선교보다는 내 교회 늘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멀쩡한 건물을 때려 부숴 새로운 교회 건물 짓고, 교회 묘지 터를 사고, 차를 바꾸고 너무 자본주의에 물들어 가고 있는 느낌이다.

이런 교회의 모습에서 함께 더불어 사는 생활의 모습으로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


2. 교회의 진정한 성공의 지표는 무엇일까?

교인의 증가인가? 교회 재산이 증식인가? 오늘날 교회가 진정으로 선호할 수 있는 신앙의 목표는 무엇일까?

 

[자료] 송 용석 (San Francisco Theological Semi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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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세례Baptism

세례(洗禮) 또는 세례 성사(洗禮聖事)는 물을 이용하는 정화의식이다. 세례는 기독교, 만다야교, 시크교를 포함하여 여러 종교에서 행해진다. 기독교의 세례는 유대교의 의식인 "미크바"에 기원을 두고 있다. 또한 영세(領洗)라고 한다.

초기 기독교 예술에서의 침례.

 

기독교의 세례

파울로스는 로마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세례를 받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영적(靈的)으로 연합되어 그의 죽음에 동참한다고 설명한다.대부분의 기독교 종파에서는 물을 이용하는 세례 의식을 행하고, 이를 예수께서 성만찬과 더불어 친히 제정한 성사라고 믿는다. 하지만 세례의 의미나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자격, 세례의 형태 등에 대해서는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성령운동을 강조하는 오순절 교회를 비롯한 몇몇 종파에서는 물에 의한 세례는 성령에 의한 세례로 대체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물에 의한 세례는 기독교 전통에 의해 불필요하게 계승되었다고 보고 있다.

 

세례의 형태

기독교 공동체의 전통에 따라 세례의 예식은 다음과 같다.

침수례 - 몸 전체를 물속에 담그는 방식 (침례라고도 한다.)

살수례 - 물을 머리에 뿌리는 방식

관수례 - 물을 머리에 붓는 방식

이 중 정교회나 침례교, 오순절교회에서는 침수례를, 로마 가톨릭교회는 관수례를 실시하며, 성공회, 감리교, 장로교 등의 개신교 종파는 관수례를 실시한다. 원래 고대에 채택되던 형태는 침수례이나, 살수례와 관수례는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많아짐에 따라 시간을 줄이기 위해 약식으로 제정된 전통이다.

 

세례의 의미와 기능

기독교 내에서도 세례의 의미와 효력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루터교, 성공회, 감리교 등

세례는 구원을 받기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며 성사의 요구조건으로 하고 있다. 한 예로서,마르틴 루터는 1529년에 "The Large Catechism"(대요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간단히 말해서, 세례의 능력과 효과와 유익과 열매는 구원이다. 왕자가 되기 위해 세례를 받는 사람은 없다. 단어 그대로 "구원받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죄와 사망, 사탄으로부터 해방되어 그리스도의 왕국에 들어가 그와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다. ”

 

성공회(聖公會)에서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6:3-4("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를 근거로 세례성사를 죄의 용서와 구원에 필요한 성사(Sacrament)로 보고 있다. 또한 어른과 어린이 모두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어린이에게 사제가 세례성사를 집전하는 유아세례가 있다.

침례교

침례가 가치있는 관습이긴 하지만 아무런 성스러운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은 보이지 않고 내적인 것이며, 성례전 자체와는 독립적인 것으로서, 침례는 이 능력의 결과를 외적으로 증언하는 행위라는 견해이다. 침례 '의식'이 의미있고 필요한 것이라고 가르치나, 유아세례는 반대한다.

개혁주의 (개혁교회 및 장로교)

개혁주의는 예수를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보며, 세례를 성찬과 더불어 예수가 그의 백성들에게 시행하라고 제정한 성례전으로 본다. 이는 구약의 할례와 유월절 의식이 신약의 교회에 발전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것은 언약 신학의 한 내용이다.) 그러므로 세례는 '예수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자기 위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라고 본다. 그것을 물로 씻는 형태로 제정된 것은 다른 종파들과 같이 예수의 피흘림으로 죄 용서를 받는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의 징표'라는 의미에서 구약 시대에는 아직 신앙이 확인 되지 않은 어린 아이에게도 할례를 시행했는데, 이것을 본받아 개혁주의 역시 유아 세례를 기독교 가정 내에서 시행하는 것을 동조한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

회복된 기독교를 자처하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에서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의 계명을 지킨다는 성약의 표시이며, 죄를 회개하여 침수로서의 침례로 물로 장사 지내고 물에서 올라 옴으로서 과거의 옛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표징이며, 하나님의 교회의 백성이 된다는 선언이 되고, 교회 회원이 되는 관문이 된다.

 

침례를 받은 이에게는 성신의 안수례가 주어지며, 매주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기념하는 성찬 의식을 행함으로써 침례 성약을 새롭게 한다.

 

유아들(정신박약자 포함)은 죄가 없으며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의 상속자가 되므로 침례를 행하지 않는다.[1] 어린이에게 복음을 가르쳐서 만 8세 이후에 성약을 맺게하여 침례를 베푼다.

 

침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합당한 절차에 의해 교회에서 승인된 방식에 따라야 함을 믿으며, 신권의 권능을 가진 이로써 지명받은 자라야 하나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줄 수 있다. 침례를 줄 수 있는 신권은 아론 신권이라고도 하는 소신권 중에서 제사 신권이 있고, 대신권으로서 장로나 대제사가 있다. 이들의 교리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침례 요한) 또한 아론 신권을 가진 이었다.

 

1829515일 몰몬경을 번역하던 조셉 스미스와 이를 기록하던 올리버 카우드리가 서스케하나 강변에서 침례 성역에 관해 알고자 기도하던 중에 침례자 요한이 부활한 영광스러운 신분으로 이들에게 나타나 아론 신권을 안수성임하였는데, 이 교회에서는 매년 이날을 신권회복 기념일로 기린다.

 

합당한 신권소유자는 합당한 회원에게 회원들의 지지하에 안수함으로써 신권을 부여하고 성임하게 된다.

 

침례 받을 사람과 같이 물에 들어가 침례 주는 이가 침례 의식문을 선언하고 침수로서의 침례를 주는데 그 의식문은 다음과 같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위임을 받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신의 이름으로 그대를 침례하노라. 아멘"

 

침례를 받은 개종자는 대신권 소유자로부터 성신의 안수례를 받게 된다.

 

Masaccio (14251426), Baptism of the Neophytes (it), Brancacci Chapel, Florence. This painting depicts baptism by affusion, which continues in the East except for infants, but in the West it had dropped almost completely out of use by the 15th century. The artist may have chosen an archaic form for this depiction of baptism by St. Peter.

성 베드로에 의해 침례 묘사

 

세례의 자격 /신자의 세례

 

세례(침례)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은 교파마다 다르나, 대개 자기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로서, 글로서 신앙을 고백하거나 공개적으로 신앙을 선언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유아 세례

로마 가톨릭교회, 성공회, 장로교 등에서 행하는 유아 세례의 경우에는 세례를 받고 신앙고백을 한 부모가 자녀를 대신하여 유아세례의 자격을 받을 수 있다. 유아 세례의 기록은 성서에는 없지만 4세기에 교부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에 의해 그 필요성이 기술되었다. 아우구스티노는 세례가 죄를 씻어주기 때문에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도 행해져야 하는데, 이는 갓난아기도 원죄에 의해 더렵혀졌으며 따라서 세례를 받기 전에 사망할 경우 죄의 저주를 받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보다 한 세기 전에 교부인 터툴리안은 믿음으로 받는 세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 있다.

 

“ "상황과 개인적인 성향, 또한 나이를 고려하여 세례를 늦추는 것이 좋다. 하지만 어린 아이의 경우에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알 수 있게 되면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라." ”

 

성공회의 종교개혁 전통을 강조하는 저교회파 성공회를 포함한 많은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세례가 "내적인 변화를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세례는 그리스도를 따라 행해지는 것이며, 그들의 삶을 그리스도께 맡기고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났을 때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편지 517) 그 내적인 변화를 다른 사람들에게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세례

기독교에서 침례가 교회 공동체로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일정한 의식이 된 것은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세례자 요한이 예언자라고 믿는 사람들은 그가 준 침례를 앞으로 올 메시아에 대해 준비하는 회개의 메시지로 받아들인다.(루가 복음서 33-6, 8) 요한은 죄사함이 있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하다고 말하였다. 죄의 얼룩은 지워질 수 있는 것이며, 타락한 행위로부터 돌이켜 주님의 길로 돌아갈 때에 지워질 수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은 세례 의식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세례 요한이 그의 세례가 충분한 것이 아니며, 회개만으로는 죄로부터의 분리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고 가르쳤을 것이며, 죄로부터의 해방을 위해서는 그가 줄 수 없는 더 큰 세례가 필요하다고 가르쳤을 것이라 믿고 있다. 루가 복음서에 따르면, 세례 요한은 자신이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안 되는 높은 분이 오셔서 성령과 불로써 침례를 주실 것이라 말하였다. (루가 복음서 316) 기독교에서는 세례가 보여주는 것은, 사람이 회개함으로써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려는 노력은, 죄의 대가를 대신 지시는 하느님의 어린양(라틴어: Agnus Dei)에 의해 대체되고 완전해진다는 것이라고 믿는다.

 

마태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는 열두 제자에게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임무를 맡긴다.(마태오 복음서 2819) 이 구절은 세례의 일반적인 방식이 되었는데, 실제로 민중신학자 안병무 선생은 갈릴래아의 예수에서 마태오 복음서 2819절을 교회사적으로 해석하였다. 안병무 선생에 의하면 기독교의 성격이 예수운동에서 보편교회로 바뀌면서 직제와 전례를 정하게 되었으므로 예수가 성부, 성자, 성령으로 세례를 주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들어간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로는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만으로 세례를 준 것으로 되어 있다. (사도행전 816, 1048, 195)

 

유대교의 정결 의식

세례는 유대교의 의식을 부르는 말로 사용되지는 않지만, 유대교 율법에서 정한 정결의식인 미크바(Mikvah)에서 세례의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유대교의 경전과 다른 문서들에는 종교적인 정화를 위한 목욕이 특별한 목적을 위해 제정되어 있는데, 이는 "종교적으로 정결한 상태"를 위한 것이다. 한 예로서, 시체를 만진 유대인은 모세의 율법에 의해 "오염된 상태"가 되어,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mikvah를 행하여 정결한상태가 되어야 한다. 유대교로 개종하기 위해서는 물에 잠기는 의식이 요구된다. 이러한 의식 전반에 걸쳐, mikvah에서 물에 잠기는 것은 정화와 회복을 의미하며, 유대교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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