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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대강절 설교 그날을 바라보며

 

 

 

말씀:이사야 35:1-10

제목:그날을 바라보며

영국의 극작가 사무엘 베켓은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작품으로 1969년도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이 책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두 사람이 황량한 길가에서 <고도>라고 하는 미지의 인물이 나타나 그들을 구원해줄 것을 막연히 기다리면서 행하고 있는 여러 가지 삶의 모습들을 그리고 있는 책입니다.

그들은 고도가 나타나면 그들을 구원하여 무언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해 줄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무작정 고도를 기다리면서 서로 다투기도 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이 떠들어대기도 하고, 혹은 소리를 지르며 노래를 불러보기도 하는 등의 별 의미도 가치도 없는 행동을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때로는 절규하기도 하고, 때로는 희희낙낙하기도 하고, 때로는 절망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다시 희망을 갖기도 하면서 그저 무한정 고도를 기다리는 것으로 이 책의 이야기는 아주 허무하게 종결을 짓고 있습니다.

무슨 결론도 없고 마치 쓰다가 만 책처럼 그렇게 끝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책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은 오늘날 방황하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아주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는 참된 인생의 목표나 기다림도 없이 그저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는, 그것이 마치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길인 것처럼, 그것이 마치 인생의 목적인양 생각하며 무의미하게 살아가고 있는 인생의 모습을 고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현대인들은 인생의 진정한 목표와 소망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궁극적으로 가야할 영원한 고향을 망각한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저 먹고 마시고 소유하고 즐기면서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것이 마치 인생의 의미요, 인생의 가치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모습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기쁨도 될 수 없고, 참된 만족과 가치를 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진정한 소망이 될 수 없고, 기다려야할 대상도 될 수 없습니다. 도리어 허무와 좌절과 고독만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영원한 절망과 고통만을 안겨 줄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과 만족과 은혜를 주실 분은 누구십니까? 정녕 우리가 기다려야 할 대상은 누구입니까? 정녕 우리 인류가 소망을 걸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말할것도 없이 성육신하셔서 이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온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기쁨이며 소망이며 기다려야 할 유일한 분이십니다.

 

1.갈림길에 서 있는 인생

여러분,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오늘 말씀에서는 두 개의 세상을 대비시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광야와 같은 세상입니다. 식물도 동물도 제대로 살 수 없는, 설령 산다고 해도 온갖 고초속에 살아가야 할 그런 험하고 거친 세상입니다. 소경과 귀머거리와 저는 자들이 있을 수 밖에 없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세상입니다. 우리를 넘어뜨리고 상처를 주고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그런 사나운 세상이요, 소망이 없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것과 정 반대의 세상입니다. 그야말로 낙원과 같은 세상입니다. 광야와 사막 위에 샘물이 솟아나서 백합화가 무성하게 피어나고, 온갖 종류의 풀과 꽃들이 만발한 샤론평원처럼 아름다움과 향기가 넘치는 그러한 세상입니다. 저는 자는 일어나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고, 소경의 눈이 열려서 누구하나 소외당하거나 고통 당하는 사람이 없이 함께 은혜와 기쁨을 누리는 그런 세상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분명 기억해야 합니다. 이 두 개의 상이한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합니다. 이러한 두 개의 상이한 세상이 다만 우리의 상상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갓 이상향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이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된 세상이며, 우리를 위해서 예비된 그런 세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이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누리고 있든 누리고 있지 못하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지금도 이 두 개의 세상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 두 개의 세상중 어느 한쪽에 속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속에서 험하고 절망적이고 영원한 고통의 삶을 살아 갈것이냐 아니면 낙원과 같은 세상속에서 영원한 영광과 은혜의 삶을 누릴 것이냐 우리는 이 두가지를 선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물론 누가 광야의 삶을 원하겠습니까? 누가 영원한 고통과 절망의 삶을 원하겠습니까? 누가 낙원의 삶을 바라지 않겠습니까? 누가 영원한 행복과 은혜의 삶을 원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하면 이 광야의 삶에서 해방되어, 이 절망과 무의미의 삶에서 벗어나서 영원한 기쁨과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고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그저 적당히 먹고 마시고 즐기는 가운데 거기에 진정한 행복과 은혜의 삶이 있겠습니까?

거기에 대한 해답은 오늘 본문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크게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2.인간을 찾아오신 하나님

먼저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구원해 주실 그때에만 진정한 은혜와 행복의 삶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4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바벨론 포로와 같은 세상속에서 좌절과 두려움과 참된 평강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생에게 주님이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오셔서 어둠의 세력들을 물리쳐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좌절하고 고통스럽고 근심걱정하게 하는 모든 사단의 세력을 물리쳐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소경의 눈이 열리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저는 자는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하는 모든 것이 물러가고 우리는 진정한 은혜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는 우주 만물의 주관자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외에는 다른 어느 누구도 해결할 자격도 능력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천지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인간의 불행의 근원인 죄와 사단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하여, 그리하여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우리를 건져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 오신 것입니다.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안에 있는 자에게 진정한 생명과 평강과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 이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잊지 말고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이 대강절넷째주일을 보내면서, 성탄절을 준비하면서, 그리고 이제 성찬식과 세례식에 참여하면서 먼저 이천년전에 이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끊임없이 거역하고 불순종하고 어리석고 미련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은혜를 주시려고 기쁨을 주시려고 변함없이 찾아오시는 주님께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찾아오셨을 때 비로소 구원의 길이 열리고, 은혜의 길이 열리고, 낙원으로 향하는 통로가 열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더욱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주님을 영접해야 할 인간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사실과 더불어 우리가 진정한 은혜와 기쁨과 영광의 삶을 살기 위하여 또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주신 은혜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놓으신 구원의 길이요, 생명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과 더불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을 우리는 어떻게 영접하느냐하는 문제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다리를 만들어 주셨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그 다리를 건너가지 않으면 그 다리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진수성찬을 차려놓았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먹지 않으면 아무리 풍성한 진수성찬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다. 8절 말씀입니다.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 무슨 말씀입니까? 광야와 같은 세상에 대로를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거룩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거룩한 길을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 영광의 나라에서, 그 낙원과 같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길을 누가 갈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누가 그 길을 통과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누구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깨끗지 못한자는 지나가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만이 그 길을 통과할 수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덧입어서 죄사함의 은총을 입은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고 그래서 죄로부터 해방되어 깨끗하게 되어 질때에 우리는 그 거룩한 길을 건너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대로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가 영원한 영광과 기쁨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행동만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결단만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셔서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영접하고 그분을 믿음으로 그분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고 구속함을 받을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다만 그분을 진실로 영접하고 믿고 따르기만 한다면 그 거룩한 길이, 그 영광의 나라가 우리의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얼마나 감격스런 일입니까?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무지로 말미암아, 어둠으로 말미암아, 완고함과 강퍅함과 고집스러움과 교만함으로 말미암아 이것을 모르는채 광야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알았습니다.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주님을 믿고 죄 사함의 은총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영광과 기쁨의 나라를 맛보며 또한 그 나라를 바라보며 살고 있습니다.

이 어찌 감사하지 않으수 있으며, 이 어찌 영광돌리지 않을 수 있으며, 이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으며, 이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오셨습니다. 이천년전에 이땅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자유와 평화와 기쁨과 생명을 주셨습니다.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향한 통로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의 심령속에 가정속에 교회속에 끊임없이 찾아오셔서 기쁨과 은혜와 생명을 주시고 계십니다.

물론 아직은 영광의 나라가 완성된 것이 아니기에 힘이 들때도 있을 것입니다. 고통의 순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조차도 영광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게 영원한 기쁨과 안식과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때에는 아무도 우리를 괴롭게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직 은혜만이 안식만이 영원한 영광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대강절 넷째주일을 보내면서 이러한 주님의 은혜를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이 광야에 같은 세상에서, 죄와 사단의 권세에서 건지시어 참된 생명과 기쁨과 은혜가운데 살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주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님께 소망을 두고 그 나라를 바라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영광의 나라를 오늘 여기서 맛보며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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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절예배설교] 기쁨이 되는 인생

 

 

 

 

말씀 : 엡5:8-10

제목 : 기쁨이 되는 인생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것은 시인 김춘수님의 꽃이라는 시입니다. 이 시는 벌써 오래전 이야기지만 제가 옛날에 문학쪽에 좀 뜻을 가지고 있을 때 애송하던 시였습니다. 그 당시 저는 이 시를 아주 감명깊게 읽었고 그래서 늘 암송하며 그 뜻을 음미하곤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사실 기억속에서 희미해져 있었는데 이 설교 준비를 하면서 문득 다시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옛날 기억을되살려 암송을 해보게 되었는데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의미심장함을 느끼는 시입니다.

이 시의 의미는 이런줄 압니다. 우리 인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무언가 의미있는 무엇이 될 때에 존재의 가치를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만 자기 자신 혼자뿐이라면 웃고 울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공부하고 일하고 하는 등등의 모든 삶의 행위들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모두는 서로가 서로의 가치와 인격을 인정해주고 존중해주는 가운데 무언가 서로에게 의미 있는 무엇이 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서로간의 아름다운 관계속에서 우리의 삶을 좀더 의미있고 가치있고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보자는 그러한 시인의 바램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제가 작자의 의도와는 좀 다르게 해석을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서로간의 관계속에서만 진정한 가치를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토록 서로가 서로에게 무언가 의미있고 가치있는 존재가 되어지기를 바라며 애쓰며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위는 누군가 상대가 있고, 그 상대방과의 관계속에서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누구나 사랑을 하고 또 사랑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사랑도 누군가 상대방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고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무언가 대상이 없는 사랑이란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또 사람들은 권력과 명예를 갖기를 원하는데 권력과 명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아닌 다른 어떤 상대방이 있기 때문에 그 권력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아무도 없고 자기 혼자뿐인데 대통령이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장관이나 판사가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아무도 없는데 돈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무언가 나와 관계하는 어떤 것이 존재할때에 돈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언가 상대방이 있어서 그 지식을 나누고 활용하고 그래서 서로를 유익하게 할 때 그 지식은 비로소 진가를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서로라고 하는 관계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참된 의미와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정은 남편과 아내와 자녀와의 관계속에서만 가정으로서의 가치를 가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목사와 장로와 집사와 성도들과의 올바른 관계속에서만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마을은 이웃과의 관계속에서, 국가는 대통령과 정치인과 경제인과 농업인과 근로자등의 모든 구성원들과의 올바른 관계속에서만 국가로서의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해주면서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간에 어쩔수없이 하나의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공동운명체인 것입니다. 하나의 배를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공동운명체이기에 서로간의 올바른 관계속에서 협력하며 도우며 살아갈때에 너와 내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면 너무나 실감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요즈음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자 근로자들도 어려움을 겪에 되었습니다. 임금이 동결되거나 삭감되고 실업자가 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근로자들의 고통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어려움을 겪자 소비가 위축되었습니다. 그러자 농산물 가격의 하락을 부채질하게 되어 농민까지도 그 여파가 오게 되었습니다. 장사하는 사람들도 장사가 안된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농촌 문제나 모든 사회적인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한쪽이 망가지고 어렵게되고 썩어지게 되면 그 여파가 다른 곳에까지 미쳐 같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사회의 모습은 안타깝게도 이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상대방의 존재를 무시하고 마치 자기 혼자서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잘되면 잘 살 수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익과 나의 만족을 위해서는 남의 권리를 짓밟고 폭력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나의 이익을 위해서 너는 희생을 당하든 고통을 당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너의 권리는 침해를 당하든 너의 인격은 무시를 당하든 나는 알 바가 아니라고 합니다. 더 적극적으로는 너의 권리를 빼앗아서라도 나의 이익을 추구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내 인생 내 멋대로 사는데 네가 왜 참견이냐고, 나는 내 멋에 사노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내 돈 내 마음대로 쓰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말을 합니다. 내 행복을 위하여 내 맘대로 하는데 왜 난리냐고 말들을 합니다. 심지어는 부모가 자녀를 훈계할때도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나 좋은 대로 할 터이니 나대로 살도록 내버려두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조차도 이런 잘못된 풍조가 스며들어와 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하면서 말씀을 전해도 내 신앙은 내 나름대로 내 생각대로 내가 보기에 좋은대로 내가 알아서 할터이니 제발 좀 들볶아대지 말라고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며, 각기 자기에게 실리가 있는 곳을 찾아다닙니다. 그저 적당히 세상의 조류를 타고 다니면서 적당히 실리도 취하고, 적당히 세상의 재미도 보고, 적당히 세상에서 누릴 것을 누리면서, 그러다가 죽어서 천국에 가서 편안히 살면 이것이야말로 꿩먹고 알먹는 일이 아니겠느냐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한 생각들과 생활모습들은 무언가 오해를 해도 엄청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밥 먹고 내 맘대로 컸으니 내 방법대로 내 고집대로 내 생각대로 살도록 내버려두라는 사람은 마땅히 어느 무인도에 가서 혼자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세상속에서 살려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간에 어차피 가정이든 학교이든 직장이든 교회이든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살아야하고,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살려면 마땅히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지켜야 할 법과 관습과 예의와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싫다면 어쩔 수 없이 혼자 무인도에나 가서 독불장군으로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내 신앙은 내가 알아서 내 생각대로 내 소견에 옳은대로 영위해 나가려는 사람은 교회밖으로 나가서 자기 혼자 신앙생활해야 할 것입니다. 아니 그런 사람은 신앙생활을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려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간에 주님의 몸된 교회에 속하여 주의 율례와 주의 법도와 주의 계명을 따라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이 싫다면 주님도 버리고 교회도 버리고 저 광야와 같은 세상속으로 나가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서로와의 관계속에서 살아가야 할 존재입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이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이든 우리는 서로를 올바르게 인정하고 존중해주며 사랑하며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한 관계속에서만이 우리는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참된 생명의 은혜와 존재의 가치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교제하기 위하여 성육신하셔서 이땅에 오셨고, 우리와 교제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여기서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그분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죄와 무지가운데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의 가치와 기쁨을 누릴 것이냐, 아니면 끝까지 내 멋대로 내 고집대로 내 의지대로 죄와 어둠과 무지속에 살다가 영원한 고통을 맛볼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께서는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이 자리에 앉아 계십니다. 그분과의 관계회복을 바라면서 오늘도 주님의 존전을 찾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하면 좀더 그분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하면 그분과의 올바른 관계속에서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가치를 누리며 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오늘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씀드린다면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지 늘 이것을 생각하며 살아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오늘본문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빛의 자녀가 되었은즉 이제는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 빛의 자녀로서의 삶이란 선하고 의롭고 진실한 삶이다.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인지 무엇인지 시험해보라고 말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으로 오신 주님의 빛을 받아서 빛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라면 마땅히 이 어둡고 혼탁하고 추한 세상에 빛을 비추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빛을 비추는 삶을 살기 위하여 어느 장소, 어느 시간속에서 무엇을 하든지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가 정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먼저 따져 보고 나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일이어든 행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지 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우리가 정말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의 기쁨이 될 수 있을까하는 것입니다. 어느 장소, 어느 시간속에 있든지 생각할때나 말 할 때나 행동할때나 무엇을 할 때나 정말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인지 아니면 주님을 근심하게 하는 일인지 이것을 먼저 따져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시험하여 보라고 했을 때 시험해보라는 말씀의 의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시험해보라는 말을 영어성경에서는 find out으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find out이란 찾아내다, 발견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시험하라는 말씀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게되는 많은 행위들 가운데서 정말 주님이 기뻐하실 일이 무엇인지 그것을 찾아내어, 그것을 골라내어 바로 그 일을 하라는 그러한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만약에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기쁨을 주지 못한다면, 서로에게 염려와 근심을 안겨주는 존재가 되어진다면 그 가정이 어찌 행복하겠습니까? 부모와 자녀 사이에 있어서, 성도와 성도 사이에 있어서, 이웃과 이웃 사이에 있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기쁨도 주지고 못하고 도리어 근심과 염려를 주는 존재라면 그 가정이 그 교회가 그 사회가 어찌 평안이 있고 어찌 기쁨이 있겠습니까?

사람과 사람사이에서도 이러할진대 하물며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속에서 만약 내가 주님에게 기쁨을 드리지 못하고, 내 가정이 기쁨이 되어지지 못하고, 교회가 주님께 기쁨을 드리지 못하고 있다면 어찌 주님의 평강과 은혜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기쁨을 주기 위하여 사랑과 은혜의 메시지를 계속해서 보내고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외면한채 그저 내 육신의 욕구만을 따라 산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었는데 이제는 빛의 자녀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하느니라. 빛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려면 너희들은 언제 어느 곳 어느 상황속에서도 어떻게 하는 것이 과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지 먼저 이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삶속에 실천해야 하느니라.

그러면 너희들은 주님의 빛을 받아서 선하고 의롭고 진실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주님의 기쁨이 될어질 것이다. 주님의 기쁨이 되기만 한다면 우선은 너 자신이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게 될 것이요,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세상에 빛을 비추는 존재로써 참으로 복되고 귀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가 세상에서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인구의 1/4이 기독교인이라고 하는데 오늘 한국 교회가 이땅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이땅위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우리 온혜교회가 이 온혜땅, 이 도산땅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경외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외면을 당하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정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를 생각하기보다는 그저 어떻게하면 내 육신을 기쁘게 할까, 어떻게 하면 좀더 많은 것을 얻어서, 어떻게하면 내가 좀 이득을 봐서 좀더 많이 차지하고, 좀더 많은 것을 누리고, 좀더 편안하게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까 여기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잘 먹고 잘살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하면 좀더 많은 권력과 명예와 부귀를 차지할 수 있을까하는 것도 잘못된 생각이 아닙니다. 아니 도리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것을 차지해야 합니다. 높은 권력에도 올라야 합니다.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 우리 기독교인들이 차지해야 합니다.

행정부에도 입법부에도 사법부에도 과학계에도 언론계에도 경제계에도 우리 기독교인들이 최대한 많이 진출하여 높은 자리를 차지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나라 구석구석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해야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하면 좀더 많은 권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인지, 어떻게하면 부귀와 지식과 명예를 가질 수 있을지 이것을 연구하며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에 있어서 우리가 반드시 유념하지 않으면안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권력을 차지하고 명예를 얻고 부귀를 누리려고 하는 것이 과연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권력과 명예와 부귀가 그저 내 육신 하나, 내 가족, 내 자녀 하나 잘 먹고 잘살고 으시대며 살려고 하는 것은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말 주님의 영광을 위한,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얻기 위한 방법과 수단이 정녕 올바른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과 수단이 정말 주님이 기뻐하실 만큼 깨끗하고 정당하고 진실한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이나 그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 중 하나라도 잘못되어 있다면 그것은 결코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이 둘 중의 하나라도 잘못되어 있다면 결코 세상에서 빛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이나 그것을 방법이 모두 선하고 옳고 진실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야만 주님이 기뻐하시고 그래야만 우리가 추구하는 것들이 너와 나에게 동시에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이 어두운 세상속에서 진정한 빛의 역할을 감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것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때로는 손해를 볼지도 모릅니다. 세상에서 조롱거리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그것이 옳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옳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에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요구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옳은 일이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일이기에 그것만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이기에 그것만이 우리가 진정한 생명의 은혜와 기쁨과 가치를 누리는 길이며, 그것만이 세상의 빛의 비추는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어떠하든 세상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든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기쁘게 할 것을 먼저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부모는 자식을, 자식은 부모를 진정 기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와 성도간에 있어서, 내 이웃, 내 직장 동료들, 내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간에 있어서 정말 서로 진정한 기쁨을 주는 것이 무엇이냐를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녕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장소 어떤 시간속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이것이 정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지 아닌지 이것을 먼저 꼼꼼이 따져보고 나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00.12.17낮 대강절 셋째주일 2000-104-13

그래서 우리는 정말 서로가 서로에게 진정한 기쁨을 가져다주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기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빌어서 확언하건데 누군가에게 진정한 기쁨을 가져다주는 자를, 무엇보다도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사람을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결코 손해보지 않게 하십니다. 결단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기쁨으로 채워주십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든 성도 여러분께서는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 남에게 어떻게하면 진정한 기쁨을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인가를 늘 생각하며 살아가실때에 서로가 서로에게 기쁨이 되어지고, 특별히 우리 주님의 기쁨이 되어질때에 주님안에 있는 그 풍성한 생명의 은혜와 기쁨을 늘 흡족히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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