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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부흥의 불길(19031906)

 

대각성 불길, 원산개성평양목포로

 

1900년대 초 한국교회는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선교사의 내한 이래 첫 10년간은 고투의 날들이었으나 청일전쟁 이후 수적 성장을 보이더니, 1900년 이후 도처에서 사경회(査經會)가 개최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으로도 변화의 시기였다. 청일전쟁(19845), 을미사변(1895), 노일전쟁(19045), 을사늑약(1905), 그리고 1910년의 강점으로 이어지는 국권상실의 과정은 역사의 아픔이자 좌절의 시기였다. 감리교 선교사 무즈(J R Moose)는 자신의 관할지역에서 의지할 곳 도무지 없소”(Wei-chi hal kot tomochi oupso, There is altogether no place to trust)라는 조선인의 절망을 보았다며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황금 같은 시기가 도래했다고 썼다. 암울한 역사현실로부터 탈출하려는 욕구와 무언가 새로운 역사의 변혁에 대한 기대가 뒤엉킨 1900년대 첫 10년 동안 한국교회에는 몇 가지 형태의 신앙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1903년부터 1907년에 이르는 신앙부흥, 그리고 1909년의 100만인 구령운동(救靈運動)이었다.

 

부흥이란

 

부흥이란 인간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포괄적인 개념인데, 근본적으로 부흥은 생명(life)과 각성(awakening)을 의미한다. 부흥운동사가인 에드윈 오르(Edwin Orr)는 부흥을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나 신앙공동체에서 나타나는 초대교회에서와 같은 성령의 역사라고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 가운데 행하시는 특별한 역사로 정의되어 왔다. 이렇게 볼 때 성장(growth)은 인간의 계획과 의도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는 점진적인 발전이라고 한다면, 부흥(revival)성령께서 비상하게 역사하실 때 교회의 생활 속에서 체험되는 현상으로서 혁명적인 요소가 있다. 부흥은 영적 각성과 함께 수적인 성장을 가져오기 때문에 웨일즈부흥(1859) 기간 중에는 부흥을 하나님으로 충만한 사람들, 사람들로 충만한 교회라는 말로 정의하기도 했다.

 

이런 부흥이 1900년대 한국에서 재현된 것이다. 그 시원이 1903년 원산에서 일어난 회개의 역사였다. 중국에서 일하던 남감리회의 화이트(Mary Cutler White)와 장로교의 매컬리(Louise H McCully)는 의화단(義和團) 사건을 피해 원산에 오게 되었는데, 이들은 부흥을 위해 기도하던 중 824일부터 1주일간 기도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이때 캐나다 출신의 감리교 선교사 하디(Dr. R A Hardie)는 효과적인 기도에 대해 강의하던 중 자신의 죄를 회개하게 되었다. 회개는 자신에게도 큰 변화를 주었고, 회중 가운데서 회개의 역사를 불러 일으켰다.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였다. 이 작은 시작이 1903년 이후 이 강산을 부흥의 물결로 파도치게 만들었던 변화와 각성의 시작이었다. 부흥의 역사는 19038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해 10월 스웨덴에서 온 프란슨 목사(Rev F Franson)가 원산에서 장감침(長監浸) 연합사경회를 인도했을 때에도 회개를 동반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

 

한국에서의 부흥

 

이런 부흥의 역사는 1904년 봄 원산에서 다시 재현되었다. 이때의 초교파 사경회에서 장로교 선교사 롭(Alexander F Robb)과 장로교의 전계은(全啓恩), 감리교의 정춘수(鄭春洙) 목사도 성령충만을 경험했고, 부흥은 곧 개성 송도로 확산되었다. 그해 3월 서울에서 하디의 집회가 개최되었고, 여기서도 놀라운 각성이 일어났다. 1905년에도 개성을 중심으로 영적 각성이 일어났다. 이와 같은 부흥이 일어나고 있을 때인 19059월 주한 네 장로교선교부와 두 감리교선교부 선교사들은 한국복음주의 선교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를 조직하고, 한국교회의 진정한 부흥을 위해 기도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 기도달력(Prayer Calender)이었다.

 

1903년에 이어 1906년에는 또 한 차례의 큰 부흥을 경험하게 된다. 1906년 개성의 송도(松都)에서 부흥을 경험했는데, 크램(W G Cram)은 이때에도 회개와 죄의 고백이 일어났다고 증언했다. 평양주재 선교사들은 1906826일부터 92일까지 하디를 초청하여 평양선교사 사경회를 개최하였는데, 하디가 요한1서를 설교하면서 자신의 죄를 회개했을 때 성령께서 자신을 변화시켰음을 증거 하였다. 이 집회에서도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셨다. 평양선교사 사경회 이후 서울에서 선교사연례대회(9. 29)가 개최되었다. 미국에서 온 존스톤 목사(Rev Howard Agnew Johnston)가 인도 카시아지방(Kassia hills)과 웨일즈에서 일어난 부흥에 대해 보고했을 때 한국인들과 선교사들에게 영적 깨달음을 주었다. 그 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의 사경회, 10월에는 목포에서도 동일한 역사가 일어났다. 부흥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사경회)과 죄의 고백에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쯤 평양에서는 한국교회의 고유한 전통이 된 새벽기도회가 시작되었다. 평양 장대현교회 장로이자 전도사였던 길선주는 동료 장로인 박치록과 함께 19069월경부터 교회에서 새벽마다 기도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1907년 이후 교회의 공식적인 기도회로 발전되었다. 1907년의 대부흥은 이런 과정 속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고신대 이상규교수, 역사신학)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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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한국에서 기독교 부흥 배경

 

기독교와 민족주의

 

앞에서 한국에서의 급속한 기독교 성장에 대한 자료를 제시하고, 1895년 이후의 급속한 성장은 청일전쟁 이후 민족자강의식이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사실 교회 성장은 어느 한 가지 요인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요인이 있다. 한국이라는 동일 문화권에서조차도 지역에 따라 기독교 수용 정도가 달랐다는 사실은 이 점을 암시한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 성장의 원인으로 다음의 몇 가지가 지적되어 왔다. 가장 대표적인 설명이 선교정책설인데, 한국교회 성장의 주된 요인이 선교사들의 고유한 선교정책 때문이었다는 주장이다. 복음전도와 함께 시행된 교육, 의료 활동이 영향을 끼쳤고, 1890년대 이후 채용된 네비우스 정책과 선교지역 분담정책이 한국교회 성장의 주된 요인이라고 말한다. 소열도(Stanley T Soltau), 왕영덕(Alfred W Wasson), 곽안련(Charles A Clark) 등 선교사들이 이런 입장을 대변한다. 김양선 김재준 강근환 등도 이에 동조한다. 그러나 정대위(鄭大爲)는 선교사 중심의 선교정책설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한국교회 성장을 한국의 기층문화인 샤머니즘, 곧 무교적(巫敎的) 세계관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결과로 주장한다. 그는 예일대학교에 제출한 박사학위 청구논문 한국 사회에서의 종교혼합 현상’(Religious Syncretism in Korean Society, 1959)에서 한국교회의 급속한 성장은 샤머니즘과 기독교와의 종교혼합 현상의 결과였다고 주장했다. 박봉배, 스펜서 팔머(Spencer Palmer)도 비슷한 입장이다.

 

한국교회 성장의 몇 가지 원인

 

이와는 달리 감리교적 배경의 윤성범, 유동식 등은 한국인의 심성(心性) 혹은 종교성(宗敎性)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사회학자 정재식은 한국 개신교의 성장은 19세기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지형학적 위치 때문에 외세의 침략을 받아 왔고, 정치적 환경에서 조성된 사회적 불안과 혼란은 종교적 욕구를 강화시켜 왔다고 주장한다. 쉬리어, 왓슨(Alfred W Wasson), 서고도(William Scott), 라토렛(K. S. Latourette) 등도 이 견해에 동조하고 있다. 이런 입장은 교회성장은 그 시대의 역사 환경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역사환경론(歷史環境論)과 동일하다.

 

정치적 정황론이 정치적 상황이라는 한 측면을 강조한다면 역사환경론은 정치적 상황뿐 아니라 그 시대의 사회 경제 문화 등 다양한 요인을 포괄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런 주장이 나름대로 설득력을 지니지만 한국에서의 기독교 수용과 성장에 대한 논의에서 간과할 수 없는 한 가지 기본적 전제는 한국이 일제의 식민 지배 하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직접적으로 일제의 통치를 받기 시작한 것은 1910년 이후지만, 기독교가 전래될 당시 한국은 점증하는 일제의 침략 하에 있었다. 병자수호조약의 체결(1876)을 통해 조선 진출의 발판을 확보한 일제는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 한반도에서 청과 러시아 세력을 물리쳤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이듬해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1910년에는 한국을 병합하였다. 이때부터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고, 흔히 ‘15년 전쟁이라고 부르는 만주사변(1931), 상해사변(1932), 중일전쟁(1937) 그리고 태평양전쟁(1941)을 거쳐 1945년까지 일제의 지배를 받았다. 이와 같은 일제의 식민 지배 하에서 기독교가 한국에 전래, 수용되어 갔다. 말하자면 일제의 강압적 식민 지배와 수탈 과정에서 기독교는 서구 문화나 교육, 의료 활동 등을 통해 민족의 필요를 채워주고 있었다.

 

기독교와 민족주의의 결혼

 

정리하면 우리나라는 아아(亞阿) 제국의 다른 나라와는 달리 기독교 국가의 식민 통치를 받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기독교 국가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나라에서의 민족주의는 대체적으로 반()기독교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것은 어떤 점에서 반민족적 행위로 인식되기까지 했다.

 

그 대표적인 나라가 인도네시아였다. 300여년간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았던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는 두 가지 성격이 있는데, 첫째는 반 외자(外資)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반기독교운동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 반대적 상황이었다. 우리는 반기독교적인 일본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민족주의는 기독교 신앙과 융합될 수 있었다. 일제에게 우리는 수탈을 경험했으나, 기독교는 우리에게 수혜자였다. 기독교 신앙은 반일적 국민의식의 정신적 기초를 제공하였고, 때로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반일운동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그래서 교회는 민족과 유리된 배타적 집단이 아니라 민족의 아픔과 고난의 동반자였다.

 

선교사였던 존스(G. H. Jones)기독교 신앙에 대한 실질적 집착보다 더 강력한 애국충군의 보루는 찾기 어렵다고 평가했을 만큼 서양인의 눈에도 이런 현실이 읽혀지고 있었다. 이런 역사적 상황에서 기독교와 민족주의는 결합될 수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기독교적 민족주의(Christian nationalism)’을 형성하게 된다. 김세윤은 이런 특수한 상황을 기독교와 민족주의의 결혼이라고 불렀다.

 

바로 이런 특수한 상황이 한국에서 기독교 수용을 보다 용이하게 했고, 일제 지배 하에서도 기독교가 건재할 수 있는 힘이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우리 역사에서의 일제의 현존은 기독교의 수용과 성장을 촉진하는 배후세력이었다.

 

(고신대 이상규교수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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