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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으로서 꼭 알아야 할 예수님과 십자가

 

 

 

예수님과 십자가  

 

요한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을 얻기 위해선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분께서 인류를 위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알아야 기도로 대화할 수 있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닮아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그분이 어떤 분이고 어떤 삶을 사셨는지 잘 모릅니다. 그럼 구원의 유일한 문이요 길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의 이름 

 

요한 1/17 이는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것이기 때문이라.
(For the law was given by Moses, but grace and truth came by Jesus Christ.) kjv

 

신약 성경에 나오는 '예수스'(Jesus, 지저스)라는 이름은 히브리 이름 '여호수아'의 단축형 '예슈아'의 헬라어 형태입니다. 이 예수님의 이름 '여호수아' 속에는 하나님의 성호 네 글자 야훼(YHWH)가 축소되어 담겨져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이름인 YHWH의 정확한 발음은 알 수 없으나 보통 '야훼' 또는 '여호와'로 발음합니다. 여호수아는 '여호와는 구원하신다' 또는 '여호와는 도우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류 구원의 주체요, 모든 도움과 은혜의 주체적 행위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主)로 고백하는 신앙공동체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예수님의 영이 성령의 능력으로 함께 하는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요한 14/13~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것은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마가 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들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으며 새 언어들을 말하며 뱀들을 집어 올리며 어떤 치명적인 것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들에게 안수한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사도행전 4/12 다른 이에게는 구원이 없나니 이는 하늘 아래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이니라, 하였더라.

 

로마서 10/13 이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임이라.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하면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예수님이 시행하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능력을 받아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새 언어(방언)를 말하며, 악한 것으로부터 해를 받지 않고, 병든 사람을 안수하여 치료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 이외에 다른 구원자가 없으며, 하나님이 인간에게 구원할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나의 구원주로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 했습니다.

 

 

2.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신 구세주 그리스도(메시야)입니다. 

 

구약시대 4000년은 아담의 범죄에 대한 형벌 기간으로 죄와 율법에 얽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메시야를 인류에게 보내 주셔서 온전한 구원을 이룰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사야 11/1~2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의 뿌리들에서 한 가지가 자랄 것이라. 주의 영이 그의 위에 머물리니 지혜와 명철의 영이요, 계획과 능력의 영이며, 지식과 주를 두려워하는 영이라.

 

다니엘 9/25~26 그러므로 알고 깨달으라. 예루살렘을 복원하고 건축하라는 그 명령이 나오는 때부터 메시야 통치자까지 칠 주와 육십이 주가 될 것이요, 그 거리와 그 성벽이 재건되리니 곧 고난스런 때들이라. 육십이 주 후에는 메시야가 끊어질 것이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요, 또 장차 올 그 통치자의 백성이 도성과 성소를 파괴하리니 그 끝은 홍수로 뒤덮일 것이요, 그 전쟁의 끝에는 황폐함이 정해졌느니라.

 

이사야 선지자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를 뿌리로 하여 메시야가 다윗의 혈통에서 나실 것을 예언했는데 마태복음 1장에서는 자세한 족보를 들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의 영'(성령)이 그에게 강림하심으로써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이상세계를 이루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인 메시야가 활동하고 죽는 시기까지 예언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10/38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께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 부어 주셔서 그가 두루 다니시면서 선한 일을 행하시며 마귀에게 억압받는 모든 자를 치유하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심이라.

 

누가 23/3 빌라도가 그에게 물어 말하기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하니, 주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렇도다.”라고 하시니라.

 

히브리서 4/14 우리에게는 위대한 대제사장, 곧 하늘들로 올라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계시므로, 우리는 우리의 고백을 굳게 붙들어야 하리라.

 

마태 21/11 그 무리가 말하기를 "이분은 갈릴리 나사렛의 선지자 예수시라"고 하더라.

 

하나님 영이 강림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명자 역할을 한다는 것인데, 기름이 성령을 상징함으로 구세주를 그리스도(Christ, 기름 부음 받은 자, 헬라어) 또는 메시야(마쉬아흐, Messias, 기름 부음 받은자, 히브리어)라고 합니다. 구약 시대에서 기름 부음 받은 세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왕, 제사장, 선지자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자, 신약시대의 대제사장이자, 말씀을 전하는 선자자(대언자)의 역할을 모두 하셨습니다.

 

미가 5/2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프라타야, 네가 비록 유다의 수천 가운데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통치할 자가 너로부터 내게로 나오리라. 그의 나오심은 예로부터요, 영원부터였느니라.

 

누가 2/4~7 요셉도 갈리리 나사렛 성읍에서 유대 다윗의 성읍, 즉 베들레헴이라는 곳으로 가니 (이는 그가 다윗 가문의 계열이기 때문이더라.) 그가 자기와 정혼한 아내 마리아와 함께 등록하러 갔는데, 그녀는 아이로 인하여 배가 불렀더라. 그들이 그곳에 있는 동안 날이 차서 그녀가 해산하게 되었더라. 그리하여 그녀가 자기의 첫아들을 낳아 그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누이니, 이는 여관에 그들이 들 방이 없었기 때문이라.

 

미가 선지자는 유다의 작은 마을인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통치자가 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유대인 요셉이 로마황제의 명령에 따라 조세 등록을 위해 갈릴리 나사렛에서 고향 베들레헴으로 정혼한 아내 마리아와 함께 갔습니다. 그곳에 있는 동안 날이 차서 마리아가 아들 예수를 낳음으로써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누가 2/11 이는 다윗의 고을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분은 주이신 그리스도시니라.
(For unto you is born this day in the city of David a Saviour, which is Christ the Lord.) kjv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 주위에 있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다윗의 고을인 베들레헴에서 구주가 나셨는데 그분은 주(主)이신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이끌어 주는 주인이라는 의미에서 구주(救主, Savior, 구세주, 구원주, 구원자) 또는 주님(the Lord)으로 불립니다.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한 표적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보라, 한 처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태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한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해석하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이라.

 

마태 1/18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이러하니라. 그의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였으나 동침하기 이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그녀에게 나타났더라.

 

이사야 선지자는 한 처녀가 남자와 동침하지 않고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 예언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표적(sign)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신 징표입니다.
아들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는데 임마누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예언대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약혼)한 사이였지만 동침하기 전에 임신을 했습니다.

 

마태 1/20~21 그가 이 일들을 생각하고 있을 때에, 보라, 주의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 말하기를 “너 다윗의 아들 요셉아, 마리아를 네 아내로 삼는 일을 두려워 말라. 그녀에게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그녀가 한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주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들에서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니라.”고 하니라.

 

이에 요셉이 파혼하려고 하자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아기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마리아와 결혼했고, 마리아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아기의 이름을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들에서 구원해 줄 것이기 때문에 '예수'라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하나님(여호와)은 구원해 주신다'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4/15 이는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할 수 없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기 때문이라.

 

벧전 1/19 흠도 점도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기 때문이라.

 

예수님이 인간 유전이 아닌 처녀 상태에서 성령의 잉태로 세상에 오신 것은 아담의 원죄를 상속 받지 않고 하늘이 주신 깨끗한 몸으로 오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죄 없이 태어나셨고, 죄를 짓지도 않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를 가져갈 흠 없는 어린 양이 되신 것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생명을 낳으시며,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에게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사야 53/5 그러나 그는 우리의 허물로 인하여 상처를 입었고, 그는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상하였도다. 우리의 화평을 위한 징계가 그에게 내려졌고, 그가 맞은 채찍으로 우리가 치유되었도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실 것을 암시하는 구절로 우리 죄를 대신해 고통을 받으실 것을 예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악으로 몸이 상하셨고, 이를 믿는 사람은 저주에서 벗어나 치유되고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메시야 초림에 관한 구약의 예언 48가지를 성취하셨는데, 이는 확률적으로 우연히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정확히 성취한 것은 예수님이 메시야란 가장 큰 증거입니다. 이밖에 예수님이 하신 진리의 말씀, 그가 행한 다양한 기적, 십자가 죽음 이후의 부활과 승천 등도 증거가 됩니다. 예수님이 성취하신 대표적인 구약의 예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로부터 오실 것이다(민 24:17-19). 
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 될 것이다(창 12:3 ;17:19, 민24:17).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이다(미 5:2). 
그리스도는 처녀에게서 태어나실 것이다(사 7:14).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실 때는 상세히 예언되어 있다(단 9:25). 
그리스도의 오심은 그의 선두주자에 의해서 선포될 것이다(사 4:3-4). 
메시야는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다(사 9:6). 
그는 어린 시절을 이집트에서 보내실 것이다(호 11:1). 
그는 고난을 받고 속죄를 이루실 것이다(사 53장).  
그는 나귀의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것이다(슼 9:9). 
그가 고통 중에 있을 때 쓸개즙과 식초가 주어질 것이다(시 69:21).  
그의 뼈는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시 43:20). 
사람들은 그의 옷을 나눠 갖기 위하여 제비를 뽑을 것이다(시 22:18). 
그는 죽음의 고통 가운데서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기록된 어떤 말들을 할 것이다(시 22:1). 
그는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질 것이다(시 16:10). 
그리스도는 친구에 의해 배반당한 것이다(시 41:9). 
그는 은 삼십에 팔릴 것이다(슼 11:12). 
그는 거짓 증인에 의해 모함받을 것이다(시 35:11). 
그는 침 뱉음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맞을 것이다(사 50:6).  
그는 이유없이 미움을 받을 것이다(시 35:19). 
그는 멸시와 조롱을 당할 것이다(시 22:7,8).

 

 

3. 예수님은 새로운 시대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각 시대마다 새로운 계명을 주시는데 그 계명을 지키면 구원 받고, 지키지 못하면 심판을 받습니다. 아담과 이브 때는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계명(명령)을 주셨고, 노아 때는 방주를 짓고 타라는 계명을 주셨으며, 모세 이후에는 율법과 제사법을 주어 지키게 하였습니다.


신약시대에 예수님이 오신 것은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법, 즉 인류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누가 5/37~38 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붓는 사람은 아무도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그 가죽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쏟아지고 가죽 부대도 망가지리라. 그러나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부어야만 하나니, 그리하면 둘 다 보존되느니라.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왜 금식하지 않는냐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넣어야지,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가죽 부대가 터져 못 쓰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낡은 가죽 부대는 구약시대, 새 가죽 부대는 신약시대, 헌 포도주는 율법, 새 포도주는 생명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시대가 왔으니 이전 시대의 법인 율법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한 6/68 그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여,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 주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나이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믿고 따른 것은 영생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영생이란 영원한 생명(Eterner Life)으로 죽었던 우리 영이 살아나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반해 구약 시대에는 영이 죽었기 때문에 육신의 계명에 관한 율법과 육신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법밖에 받을 수 없었으며 이로 인해 영의 온전한 구원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 그럼 구약 시대의 율법과 제사법이 신약 시대에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아 보겠습니다.

 

 

a) 형식에 얽매었던 육적인 제사가 하나님을 영적으로 섬기는 경배(예배)로 바뀌었습니다.


 

요한 4/24 하나님은 한 영이시니 그 분께 경배드리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경배드려야만 하리라.고 하시니라.
(God is a Spirit : and they that worship him must worship him in spirit and in truth.) kjv


 사마리아 여인이 꼭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드려야 하느냐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은 한 영이시니 영과 진리로 경배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이 살아 났기 때문에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영적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드리며 영광 돌리면 되는 것입니다. 제사(offering)는 신께 헌물을 드리는 의미가 있지만 경배(worship, 예배)는 신을 공경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마태 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너희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

 

신약시대에는 영이 살아 났기 때문에 제사장을 통하지 않고도 당당히 하나님께 우리가 원하는 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화하듯이 기도로써 우리의 소원을 말하면 아버지가 자녀의 소원을 들어 주듯이 우리의 소원을 들어 줄 것이라 하셨습니다. 영이 죽었던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 필요한 것을 구하기는커녕,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에 급급했었습니다.

 

 

b) 육신에 관한 율법이 영에 관한 생명의 말씀으로 바뀌었습니다.


 

율법은 육체가 도덕적으로 타락하지 않기 위해 주신 법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인데 우상 섬기지 말고, 살인, 간음, 거짓말, 도적질 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육신에 관한 법으로 영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영에 관한 진리 말씀이 바로 생명의 법이며,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Ⅰ) 주 예수를 믿어야 구원 받습니다.

 

구약 시대 때는 모든 율법을 지켜야 복을 받고, 그 중 하나라도 어기면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율법은 그 종류가 613가지나 되어 외우고 실천하기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그 중에는 안식일법이나 제사법이나 정결례 같은 지키기 까다로운 법도 있습니다. 사람이 율법을 모두 지키기도 어렵지만 모든 율법을 지켰다 하더라도 영의 구원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요한 3/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마태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주는 그리스도,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더라. 

 

 

요한 14/6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아무도 없느니라.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 가운데 보내신 이유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멸망(심판, 지옥행)하지 않고 영생(구원, 천국행)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한 아들이자, 나의 유일한 구원주임을 믿어야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요한 5/24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정죄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느니라.


요한 1/14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므로,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으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 6/48~51 나는 그 생명의 빵이라. 너희의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죽었으나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니 그것을 먹는 자는 죽지 아니하리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니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또 내가 줄 이 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줄 나의 살이라."고 하시니라.

 

마태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현명한 사람과 같아서
 

예수님을 나의 구원주로 믿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주신 말씀을 들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며, 그 말씀이신 예수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니 나를 먹으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실체가 말씀이니 예수님의 말씀을 영의 양식이자 진리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믿어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신앙의 집을 반석 위에 지은 현명한 사람입니다.

 

 

Ⅱ) 하나님과 이웃 그리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마태 22/37~39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며, 큰 계명이니라. 둘째는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예수님이 주신 계명 가운데 가장 핵심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형식적으로 섬기는 것이 아나라 나의 마음과 혼과 생각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십니다. 늘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두고 생각하고 의지하며 사랑해야 죄와 사탄이 틈을 타지 못합니다.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가까운 사람 뿐만 아나라 불우한 이웃들까지 사랑해 도우란 것입니다.

 

출애굽기 21/23~25 만일 어떤 피해가 따르면 그때는 생명은 생명으로 갚아야 하며,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인 것은 데임으로, 상처는 상처로, 매질한 것은 매질한 것으로 갚을지니라.

 

마태 5/44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천대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구약시대에는 내게 해를 끼치는 사람은 그대로 갚아 주었지만, 신약시대에는 나의 원수를 사랑하고. 나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를 잘해 주고, 나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내게 해를 끼치는 원수를 미워하지 않기도 힘든데 사랑한다는 건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고 원한은 나를 악하게 만든다는 걸 생각할 때 오히려 원수를 불쌍히 여기고, 더 이상 죄 짓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이 예수님을 본받은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진정한 영의 사랑은 육신의 감정적 사랑과는 다릅니다.


육신의 사랑은 외모나 일시적 기분에 의해서 좋아지고 시간이 지나면 싫증나며 여러 이유로 실망하거나 미워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의 사랑은 하나님이 주신 가장 거룩하고 숭고하며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이며 무한하고 영원한 사랑입니다.

 

고전 13/4~7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고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고 무례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급히 성내지 아니하며 악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를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뎌 내느니라.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사랑은 인내하고, 친절하고, 온유하고, 시기 질투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이기적이지 않고, 예의 바르며, 화내지 않고, 선하고, 진리를 기뻐하며, 모든 것을 바라고 믿고 참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점점 미움과 시기와 타툼이 심해지고, 이혼율이 높아가는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악하거나 이기적이지 않고, 선한 진리와 겸손과 인내와 믿음과 희생으로 다져진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Ⅲ) 내게 죄 지은 자를 무조건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마태 18/21~22 그때 베드로가 주께 나와 말씀드리기를 "주여, 내 형제가 내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그를 용서해 주어야 하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라고 하니,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에게 일곱 번까지라고 말하지 않고,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고 하노라.

 

누가 17/4 그가 하루에 일곱 번이나 너에게 죄를 짓고, 또 하루에 일곱 번이나 너에게 돌아와서 '내가 회개한다.'고 말하면 그를 용서하라."고 하시더라.

 

베드로가 예수님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일곱 번 정도 용서해 주면 되겠습니까? 라고 물어 보니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 즉 490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했습니다. 또한 형제가 하루에 일곱 번이나 자신에게 죄를 짓고, 일곱 번 회개한(잘못했)다고 말하면 그를 용서해 주라고 하십니다. 이는 형제가 내게 행한 죄에 대해 복수하거나 원한을 품지 말고 무조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마태 18/33 내가 너를 가엾게 여김 같이 너도 네 동료 종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당연하지 아니하냐?

 


그리고 그 이유를 마태 18/23~35 에서 빚 탕감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 우리의 큰 죄(빚)를 은혜로 용서(탕감)해 주셨는데 우리가 형제의 작은 죄(빚)를 용서치 않는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지만 구원 받은 자는 최소한의 도리를 지켜야 계속 은혜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마태 6/12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 준 것같이 우리의 빚진 것도 용서해 주옵시며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도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 준 것같이 우리의 빚진 것도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다윗은 사울왕에게 쫓겨 다니면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맞았는데도 그를 미워하지 않고 용서했습니다. 사울왕을 죽일 기회도 있었지만 죽이지 않고, 그가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바랬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도 악행을 반복하던 사울왕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로마서 12/19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 스스로 복수하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은 나의 일이니 내가 갚으리라. 주가 말하노라."고 하였느니라.

 

로마서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벧전 2/21~23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에게 한 본을 남겨 놓으시어, 너희로 그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짓지도 아니 하셨고, 그 입에는 간사함도 없으셨으며, 모욕을 당하셨으나 다시 모욕으로 갚지 아니하셨고, 고통을 당하셨으나 다시 위협하지 아니하셨으며, 오직 의롭게 심판하는 분께 자신을 의탁하셨느니라.

 

이와 같이 악인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이 하는 것이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에 대해 악으로 대항하면 악에게 지는 것이고, 악에 대해 선으로 대응하면 악에게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욕을 당하셨으나 다시 모욕으로 갚지 아니하시고, 고통을 당하셨으나 다시 위협하지 않음으로 원수를 사랑하고, 죄를 용서하며, 선으로 악을 이긴 본을 친히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Ⅳ) 남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겸손하라고 하십니다.

 
 

마태 7/1~3 "판단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라. 너희가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너희도 판단받을 것이며, 너희가 재는 그 자로 너희도 다시 측정을 받으리라. 어찌하여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생각지 못하느냐?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남의 허물을 비웃고 함부로 판단하거나 정죄해 상처를 주는 일이 많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다 똑같은 죄인인데도 자신의 잘못은 깨닫지 못하고 남의 탓만 합니다. 이는 남의 흉을 보면서 자신은 우월감을 느끼려는 심리적인 작용에서도 비롯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판단받지 않고 긍휼을 입으려면 나도 상대방을 판단하지 말고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학교에서는 마음에 안들거나 연약한 급우를 집단으로 따돌림 하고 괴롭힙니다. 집단 따돌림 당한 학생은 마음에 심한 상처를 입고 우울증에 걸리거나 자살하기까지 합니다. 남을 언어나 행동으로 괴롭히는 것은 간접적인 살인행위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일 중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상대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오히려 덮어주고 감싸줘야 겠습니다.

 

 

Ⅴ) 마음으로 범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 6/45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한 보화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악한 보화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그 입이 말하기 때문이라.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결국 선한 행동을 하고,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결국 악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미운 마음이나 서운한 마음을 가지면, 결국 나도 모르게 그 사람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의 발생지인 마음을 바르게 다스리라고 하십니다. 구약시대에는 행동으로 범죄한 것이 것이 죄이지만, 신약시대에는 마음으로 범죄한 것도 죄가 됩니다.

 

 

야고보서 1/15 그러므로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느니라.

 

사람이 마음에 욕심이 생기면 죄를 짓게 되고, 점점 더 큰 죄를 지어 결국 영혼육의 파멸(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인간의 모든 욕심(물욕, 명예욕, 권력욕, 식욕, 성욕)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자전거 타면 소형차라도 타고 싶고, 소형차 타면 중형차 타고 싶으며, 중형차 타면 외제차 타고 싶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은 저급한 육신의 감정에 얽매이지 말고, '차원 높은'(영적인) 진리를 추구(사모)하며 살아야겠습니다.

 

 

4. 유대인은 왜 예수님을 배척했나?

 

 

유대인들은 자신을 구원할 왕이자 기다리던 메시야인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핍박하며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믿게 하기 위해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며, 죽은 사람까지 살리셨습니다. 그런데도 바리세인 서기관 같은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며 시기하고 미워했습니다. 죄인, 세리, 창녀, 어부 등 그시대 하층민만 예수님을 선지자로 여기고 따랐을 뿐입니다.

 

 

* 그럼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배척했는지 이유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a) 위선과 탐욕에 빠진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을 예수님이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3장에서는 예수님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을 신랄(辛辣)하게 비판하십니다. 대표적인 잘못은 형식주의와 위선에 빠져서 겉으로는 경건한 체 하고 높임을 받지만 속으로는 각종 죄악과 탐욕이 가득한 회칠한 무덤과 같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은 희생하기 싫어하면서 남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우고, 말과 행실이 다른 것 등을 지적하셨습니다.

 

 

마태 23/14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 이는 너희들이 과부들의 집을 삼키며 남들에게 보이고자 길게 기도하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너희는 더 큰 심판을 받으리라.

 

마태 23/25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 이는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나 속은 약탈과 방탕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라.

 

마태 23/27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 이는 너희가 회칠한 무덤들처럼 실로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도다.

 

 

누구든지 자신의 잘못을 들추어 내면 싫은 법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지적을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드리지 않고 오히려 분개했습니다. 민중의 마음이 언행 일치하는 예수님에게로 쏠리자 이에 밥줄이 끊길 것을 염려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세우게 됩니다.

 

 

b)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이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요한 10/33 유대인들이 주께 대답하여 말하기를 "선한 일로 인하여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모독하기 때문이라. 이는 네가 사람이면서 하나님으로 자처하기 때문이라."고 하니라.

 

요한 19/7 유대인들이 그에게 대답하기를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는데 우리의 율법에 따르면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하나이다. 이는 그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기 때문이니이다."라고 하더라.

 

레위기 24/16 주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지니, 모든 회중이 분명히 그를 돌로 칠지니라. 타국인도 그가 주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 땅에서 난 자와 마찬가지로 죽을지니라.

 

 

예수님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니라"고 하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사람이면서 하나님으로 자처한 것은 신성모독이라며 예수님을 돌로 치려 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율법에 따르면 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예수님이 하나님 내지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말이 쉽게 이해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요한 14/10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을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에게 하는 말들은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께서 그 일들을 하시는 것이라.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하자 예수님은 나를 본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본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언행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안에 계셔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 병자를 고쳐 주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등 엄청난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또한 성령(아버지께서 보내신 영)의 감동을 통해 우리를 구원할 온전한 진리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마태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주는 그리스도,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더라.

 

시편 8/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깊이 생각하시오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찾아오시나이까?

 

마태 27/54 백부장과 그와 함께 예수를 지키고 있던 사람들은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크게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참으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하더라.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합니다. 인간은 엄밀히 말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부모(사람)로부터 태어난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 人子)입니다. 예수님은 외모로는 사람의 아들이지만 내면으로는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과 형상을 그대로 닮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지진과 기적이 일어나자 백부장과 지키던 사람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합니다.

 

 

c) 율법을 지키지 않는 예수님을 율법 파괴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가 6/7 그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주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를 지켜보고 있었으니, 이는 그에게서 고소할 구실을 찾으려 함이더라.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을 보고 분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제자들은 일하지 말라는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었고, 떡 먹을 때 손을 씻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일하지 말라는 안식일에 손마른 사람, 귀신들려 꼬부라진 여자, 38년된 병자 등을 고쳐주셨습니다. 유대인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기 보다는 율법으로 그를 트집 잡았습니다.

 

마태 12/8 인자는 곧 안식일의 주니라."고 하시더라.

 

예수님은 새시대의 주인으로 새로운 말씀을 선포하러 오셨기 때문에 정권이 바뀌었으니 이전의 법은 효력을 잃었습니다. 예를 들어 박정희 군사정권에서는 밤 12시 이후에 다니는 것이 통행금지 죄에 해당했지만 지금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시대 새로운 법을 선포하신 예수님은 구약시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라 하여 율법 모두를 폐하신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 3/31 그렇다면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폐하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오히려 우리가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로마서 6/6 우리가 이것을 아나니 곧 우리 옛 사람이 그와 함께 십자가에 처형된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더 이상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율법 중 제사의식이나 형식적인 규례는 지킬 필요가 없지만 신앙과 도덕적인 계명은 여전히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지킬 수 없는 율법을 폐하시고, 더 높은 차원의 영의 법인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근원이 되는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난 새 생명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랑으로 가득찬 사람은 형제에게 거짓말 하거나 도적질 하거나 해를 끼치지 않으므로 율법이 저절로 지켜지게 됩니다.

 

 

마태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서를 폐기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기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이루려고 왔노라.

 

 

따라서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신 것이 아니라 더 이상적으로 발전시켜 완성시킨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린 아이였을 때에는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서 종 노릇 하였으나

 

 

율법은 초등학문이고, 초등학문을 거쳐야 고등학문인 생명의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사람들도 초등학교를 나와야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육신에 관한 율법은 차원 높은 영의 법을 익히기 위한 과정이지 목적은 아닙니다. 또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지키지 않는다고 지적한 것은 율법도 아닌 장로들이 만든 전통인 유전이었습니다.

 

 

마태 15/2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어기나이까? 그들은 음식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라고 하니,

 

 

d)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교만에 빠져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

 

요한 7/52 그들이 대답하여, 그에게 말하기를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갈릴리에서는 어떤 선지자도 나오지 않는다고 했으니 찾아보라."고 하더라.

 

당시의 엘리트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교만과 위선에 빠져 유대의 변방 지역이었던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학식을 갖추고 위엄 있다고 생각한 이들이 시골 출신이자 정통교육도 받지 못하고 누추한 차림의 예수님께 머리를 굽힌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마가 2/17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병든 사람들에게는 필요하니라. 나는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들을 회개에 이르게 하려고 왔노라."고 하시니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왜 예수님이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지 물으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건강한 자가 아닌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 예수님은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려고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암환자가 암세포가 온 몸에 퍼지고 있는데도 나는 건강하다고 버티면 의사가 치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잘나고 똑똑한 사람도 이런 상황에선 의사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지시에 따라야 합니다.

 

야고보서 4/6 그러나 그가 더 많은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그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거절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느니라.

 

 

이와 같이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땐 나는 구제불능의 죄인이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없으며,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오직 예수님만 믿고 의지한다는 마음을 가져야 예수님께서 우리를 치료하고 구원해 주십니다. 지극히 거룩하시고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은 교만하고 마음이 부유하며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절하시고,  겸손하고 마음이 가난하며 죄를 애통해 하는 자를 찾아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5. 유대인의 배역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거부인가?

 

 

예수님께서는 여러 비유를 통해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는 혼인잔치 비유가 나오는데 임금이 아들 혼인잔치를 위해 종들을 보내서 사람들을 초청하나 다 자기 일에 바뻐 무관심 할 뿐만이 아니라 보낸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진노하여 군대를 보내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동네를 불사르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의 천국 복음을 거부한 유대인들의 심판을 나타냅니다. 마태 21/33~41에서는 포도원 비유가 나오는데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나가서 열매가 익을 때 소출을 받으려고 종들을 보내니 심히 때리고 죽이므로 '내 아들은 공경하겠지' 라고 생각하고 아들을 보내나 상속자 아들을 죽여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아들도 죽이니 포도원 주인이 돌아와 이 악한자들을 진멸하고 다른 농부들에게 농장을 줍니다. 이 역시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과 예수님을 죽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거부한 유대인들의 심판을 나타냅니다.

 

 

살전 2/15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계시록 2/9 내가 너의 행위와 궁핍을 아노라. 자칭 유대인이라고 말하는 그들의 모독을 아노니,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요, 오히려 사탄의 회당이니라.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사도들을 핍박한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초대교회 성도들을 복음사역을 훼방하고 박해한 유대인들의 모독을 아신다고 하시면서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사탄의 회당(synagogue, 유대인의 집회장소)이라고 합니다.

 

 

에스라 7/13 내가 칙령을 내리노니 내 영토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그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중에서 자원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마음먹은 자들은 다 너와 함께 갈지어다.
(I make a decree, that all they of the people of Israel, and of his priests and Levites, in my realm, which are minded of their own freewill to go up to Jerusalem, go with thee.)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와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가진 '자유의지'(freewill) 때문입니다.

 
 

freewill은 '자유의지'로 내가 누구의 간섭 없이 내 마음대로 행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원격조종 로봇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아담과 이브도 자신이 가진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길 수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5/11 내가 사울을 세워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이는 그가 나를 따르는 것에서 돌이켜 내 계명들을 이행하지 아니하였음이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슬퍼하여 밤새도록 주께 부르짖더라.

 

사무엘상 16/7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나 키의 크기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이는 주가 보는 것이 사람이 보는 것과 같지 아니하기 때문이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주는 마음을 보느니라.

 

 

하나님은 사울을 세워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자신의 마음대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도 후회를 하십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자식 잘 못 되는 것을 어쩔 수 없듯이 하나님도 인간이 자유의지에 관여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outward appearance) 보다 마음(heart)을 보시고 다윗을 왕으로 삼으십니다.

 

 

출애굽기 19/5~6 그러므로 이제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 음성에 복종하고 나의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백성보다 나에게 독특한 보물이 되리니, 이는 온 땅이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에게 제사장들의 왕국이 되며 거룩한 민족이 되리라.' 이것이 내가 이스라엘의 자손에게 고할 말이니라." 하시니라.

 

이사야 49/6 그가 또 말씀하셨도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의 보존된 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라. 내가 또한 너를 이방인들에게 빛으로 주리니 네가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이 되리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에 복종하면 모든 백성보다 독특한 보물이 되고, 제사장 왕국이자 거룩한 민족이 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을 이방인의 빛으로 삼아 땅 끝까지 구원을 베풀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아 온갖 죄악과 우상숭배에 빠졌고, 결정적으로 구원주이자 왕인 예수님을 받아 들이지 않아 심판을 받게 되었으며, 이방인에게 그 모든 복락이 돌아갔습니다.

 

 

로마서 5/10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도 그의 아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으니 더욱더 화해하게 된 우리는 그의 생명으로 인하여 구원받게 되리라.

 

2,000년전 유대인의 불신과 무지로 예수님이 돌아가셨지만 유대인은 죄 많은 우리 인간을 예표합니다. 즉 죄인된 인간이 의인인 예수님을 미워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간을 용서하셨고, 우리는 우리 죄를 대신해 흘리신 그의 피로써 죄사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인된 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님의 깊은 사랑에 감사해야 합니다.

 

 

* 유대인의 배역은 다음 두 가지 결과를 초래합니다.

 
 

첫째는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마태 23/35~36 그리하여 의로운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모든 것이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마태 27/25 모든 백성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하더라.

 

누가 19/43 그 날들이 너에게 닥칠 것이니, 너의 원수들이 흙언덕을 쌓고, 너를 에워싸고, 사면으로부터 너를 공격하여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죽인 의인과 선지자들의 의로운 피가 당세대에 유대인에게 돌아갈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무죄한 피(보응)를 자신과 자손들에게 돌린다고 하였습니다. AD 70년에 로마 군대가 반란을 일으킨 유대민족을 진압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는데 주위에 흙언덕을 쌓고 입성합니다.

 

 

마가 13/2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이 거대한 건물들을 보느냐?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않고 다 무너지리라."고 하시니라.

 

로마군은 성전의 금을 약탈하기 위해 성전을 모두 무너뜨리고, 유대인들을 대량학살 했으며, 나라 자체를 없애고, 남은 자들을 노예로 팔아 넘겼습니다. 또한 유대인은 2000년 가까이 전 세계를 유랑하며 온갖 핍박과 수모를 당했고,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600만명이라는 기록적인 학살을 당했으니 메시야를 죽인 죄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이방인(비 유대인)에 대한 선교입니다.

 

 

로마서 2/28~29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체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요, 할례는 마음의 할례이니 영에 있고 법문에 있지 않은 것이라. 그들의 찬사는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니라.

 

혼인잔치 비유와 포도원 비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본격적으로 이방인 선교가 시작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 선교를 위해 지중해 인근 여러 나라를 순회하였고,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랐습니다. 유대인은 구세주인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으로서의 특권을 잃어버렸습니다. 신약시대에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는 혈통적 유대인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요한 4/19~20 이것이 정죄라. 즉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빛보다는 오히려 더 어두움을 사랑하니 이는 그들의 행위가 악하기 때문이라. 악을 행하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혹 자기의 행위가 책망받을까 함이라.

 

고전 9/27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하게 함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한 후에 어떻게 해서든지 내 자신이 버림을 받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본능과 쾌락과 욕심에 빠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육신을 예표하는 민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였고, 참혹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어두움(죄, 거짓, 사탄)을 좋아하는 육신은 본능적으로 빛(의, 진리, 하나님)을 멀리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온전한 구원을 위해서는 반항적이고 이기적인 자기 육신을 억제해 복종시켜야 합니다.

 

 

6.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지는 의미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드리면 구원이고, 거부하면 심판인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은 온 인류를 심판하고 사탄에게 내어 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과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 대신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써 내 모든 죄가 씻어진다는 것을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요한 3/14~15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같이 인자도 그렇게 들려올려져야만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3/1 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가운데서 너희 눈 앞에 분명하게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어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를 설명한 구절로 출애굽 때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를 불신하고 불평 불만을 늘어 놓아 하나님으로부터 심팜을 받았지만 놋 뱀을 쳐다 보아야 불 뱀에 물리지 않았던 것처럼, 신약시대에 예수님을 불신했던 인류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쳐다 보아야지만 구원(멸망치 않고 영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눈 앞에 보이므로 거짓에 속지 말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너희를 교란시키는 어떤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개시키려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십자가 복음 이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각 시대마다 구원 받을 수 있는 계명을 주시는데 이는 인간 스스로 바꿀 수 없습니다. 아담 때에는 선악과 따 먹지 말라는 계명이 있었고, 노아 때에는 방주에 타라는 계명이 있었으며, 모세 이후에는 십계명과 율법을 지키는 것이 계명입니다.

 

 

에베소서 1/7 그 사랑하시는 이 안에서 우리가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보혈을 통하여 구속 즉 죄들의 용서함을 받았느니라.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을 유일한 구원주이자 그리스도로 시인하고, 그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셨으며,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써 내 모든 죄가 씻어져 죄사함 받는다는 것을 믿는 것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계명입니다. 예수님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모진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고전 1/22~24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처형되신 그리스도를 전파하노니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거치는 것이 되고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 되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유대인들에게나 헬라인들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또 하나님의 지혜니라.

 

계시록 7/14 내가 그에게 말씀드리기를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들은 대환난에서 나온 사람들이며 자기들의 옷을 씻어 어린 양의 피로 희게 하였느니라.

 

 

사도 바울은 십자가 복음이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에게는 걸리는(stumblingblock, 장애물) 것이고, 지혜를 찾는 헬라인에게는 어리석게 들리지만 누구든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고 합니다. 계시록에서는 말세 때 대환난을 피하는 사람은 어린 양(예수님)의 피로 자기 옷을 씻어 희게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즉 말세 때 구원 받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 받아 거룩하고 의롭게 된 사람입니다.

 

 

*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가지는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a) 대속 (代贖, substitution)

 

 

대속은 죄를 대신 받는다는 말로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시대에 자신의 죄를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기 위해서는 성막에서 자신의 죄를 무죄한 염소나 양에게 안수해 전한 다음 제사장이 암염소나 어린 암컷양을 잡아 피를 번제단 뿔에 바르고 단 밑에 쏟은 다음 나머지를 번제단에 불살라 죄를 용서 받았습니다.

 

 

마태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골로새서 1/14 그 안에서 우리가 그의 보혈을 통하여 구속, 곧 죄들의 용서함을 받았느니라.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신의 피로 한 번 성소에 들어가셔서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구속을 이루셨느니라.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스스로 '흠 없는'(죄 없는) 어린 양이 되어서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내 모든 죄가 깨끗이 씻어져 용서 받는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b) 구속 (球贖, redemption)

 

 

구속이란 죄인을 속전을 내고 건져낸다는 말로 예수님이 죄인된 우리를 마귀로부터 건져내기 위해 피로써 죄값을 치루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죄로 감금된 사람을 보석금을 내고 석방시켜 주는 것이나, 노예로 예속된 사람을 '몸 값'(ransom)을 주고 해방시켜 주는 것과 같습니다. 

 

마태 20/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몸값으로 주려고 온 것이라."고 하시더라.

 

고전 6/20 너희는 값을 치루고 산 것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딤전 2/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몸 값으로 내어 주셨으니 때가 이르면 증거되리라. 

 

우리가 예수님의 희생과 은혜로 사탄의 권세에서 건짐을 받았으니 우리 모두 예수님에게 빚진 자입니다.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구하기 위해 예수님은 엄청난 희생과 고초를 감수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 우리를 용서하지 않았다면 인류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피로써 값을 치루고 산 존재이니 구원 받은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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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에 나타난 선택사상 

 

목     차

Ⅰ.  서    론

    A. 연구의 목적

    B. 연구의 범위와 방법


Ⅱ.  구약 성서에서 선택의 개념

    A. 어원적 의미

    B. 신학적 의미


Ⅲ. 선택과 관련된 개념들

    A. 언약

    B. 축복

    C. 구속


Ⅳ. 구약 성서에서 선택 사건들

    A. 아브라함의 선택

    B.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

    C. 선택의 변천


Ⅴ. 아브라함의 선택과 이스라엘 선택의 관계

 

Ⅵ. 구약 성서에서 선택의 기능


Ⅶ. 결론


    참고문헌

 

Ⅰ.서론


   A. 연구의 목적    


성서 전체를 흐르고 있는 중요한 종교적 개념들 중의 하나는 하나님께서 개인, 종족, 민족, 도시, 또는 권위를 부여해 주었다는 선택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히롯트(Walther Eichrodt)가 지적한 바와 같이 구약 성서 전체가 선택사상을 증거하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1) 그렇기 때문에 선택 사상은 구약 성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상중의 하나인 것이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함이 성서의 중심 사상이라고 본다.  따라서 선택 사상을 자세히 고찰하지 않고서는 성서의 신앙과 이스라엘 구원의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사야 55:1, 2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혈혈단신으로 있을때에 내가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였느니라”하여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하심의 선택을 천명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독자적 축복으로 아브라함의 씨가 창성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2) 또한 신명기 7:6에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느니라”를 미루어 이스라엘이 선택받은 백성, 즉 선택받은 나라였다는 것이 구약 신앙의 기본적 조항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구약 성서 저자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확신했다.

구약 성서에 나타난 선택 사건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아브라함의 선택과 모세를 통한 이스라엘 선택이라고 생각된다.  구약 성서에 나타난 선택 사상을 바르게 이해하게 될때 기독인으로 자신이 택함을 받은 이유와 세계속에서 우리 한국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바르게 인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아브라함의 선택과 이스라엘의 선택을 고찰함으로써 선택의 의미, 두 선택사건의 상호 관계 그리고 선택의 기능을 살펴보고자 한다.


   B. 연구의 범위와 방법


구약 성서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선택 사건으로서 아브라함의선택, 족장들의 후손의 선택, 유다, 아론, 레위, 다윗의 선택, 이스라엘의 선택, 희생 장소의 선택, 그리고 예루살렘과 시온의 선택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아브라함의 선택과 이스라엘의 선택에 대해서만 고찰하려고 한다.

본 논문의 연구를 다음과 같은 절차와 방법에 따라서 전개하려고 한다.

제 Ⅱ 장에서는 구약 성서에 나타난 선택의 의미를 개관하려고 한다.  선택의 어원적 의미를 찾아 본 후에 학자들의 견해를 탐구할 것이다.

제 Ⅲ 장에서는 선택과 관련된 개념들 중에서 언약, 축복, 그리고 구속의 어원적, 신학적, 종교적 의미를 살펴볼 것이다.

제 Ⅳ 장에서는 아브라함의 선택과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을 차례로 논술하되, 다음 장에서 두 선택 사건의 관련성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주력할 것이다.

제 Ⅴ 장에서는 아브라함의 선택과 이스라엘 선택의 관계를 고찰하되 두 선택 사건이 별개의 선택 사건이 아니라, 동일한 하나님의 통일성 있는 선택이라는 측면에 주안점을 두고 연구할 것이다.

제 Ⅵ 장에서는 구약 성서에 나타난 선택의 기능을 살펴 본 후 제 Ⅶ 장에서 결론을 맺으려 한다.


Ⅱ. 구약성서에서 선택의 개념

 

   A. 어원적 의미


성서에 나타난 선택사상이란 하나님께서 개인을, 민족들, 종족들, 성들 또는 성전들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 그 하나와 유일하고 독점적인 관계를 맺고, 그것에 특수한 역할, 의무 또는 권위를 부여 해주었다는 종교적인 확신을 가리킨다.  가장 중요한 용례들은 이스라엘의 조상들, 왕들과 제사장들, 그리고 예루살렘성과 관련 되어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 왕들과 제사장들의 두 용례는 신약에서 계승되어 예수와 열 두 제자 및 종교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선택에 사용되고 있다.3)

선택이라는 개념과 관련된 용어를 우선 히브리어 어근 bahar와 이 어근의 파생어들인 bahir, bahor 그리고 mibbar를 포함하고 있다.4) 마ꃯ가지로 신약성서 안에 있는 “택하다”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eklegomai(εκλεγομαι)라는 동사와 거기에서 파생된 형태들인 “택함 받은”의 뜻을 가진 ekletos(εκλεκτοσ)와 “선택”이라는 뜻의 ekloge(εκλογη)라는 말도 선택이라는 말에 대한 진정한 해당어들은 아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 이 두 언어에서 다 “하나님”이 주체적으로 “택하신다”는 뜻을 가진 술어는 다른 어떤 어휘로도 전달되지 않는 특수한 의미를 가지므로, 특수한 용법으로만 그 뜻을 나타낼 수 있다.5)

     bahar가 사용된 구약성서의 용례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6) 

(1)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실 때 (느 9:7)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2)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실 때 (신 7:7; 사 44:1)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 7:7)

(3)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선택하실 때 (신 7:6; 14:2)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신 7:6)

(4) 하나님이 족장들의 후손을 선택하실 때 (신 4:37; 10:15)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사랑하신 고로 그 후손 너를 택하시고 큰권능으로 친히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며”(신 4:37)

(5) 하나님이 유다 (시 78:68), 아론(시 105:26), 레위(렘 33:24), 왕

  특별히 다윗을 택하실 때 (신 17:15; 삼상 10:24; 16:8, 9, 10; 삼하 6:21; 왕상8:16; 대상 28:4, 5; 29:1; 대하 6:5; 시 78:70)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삼하 7:21)

(6) 하나님이 희생의 장소를 선택하실 때 (신 12:11,18; 14:25; 16:7, 15; 대하 7:12)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을 택하실 그곳으로 나의 명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의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 십 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 서원하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신 12:11)

(7) 하나님이 도시를 선택하실 때 (왕상 8:16, 44)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내 이름을 둘 만한 집을 건축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서 아무 성읍도 택하지 아니하고  다만 다윗을 택하여 내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였노라 하신지라”(왕상 8:16)

(8)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선택하실 때 (대하 6:6; 사 14:1; 슥 1:17;2:16)

     “예루살렘을 택하여 내 이름을 거기 두고 또 다윗을 택하여 내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였노라 하신지라”(대하 6:6)

(9) 하나님이 시온을 선택하실 때 (시 132:13)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10) 사람이 어떤 물건을 선택할 때 (욥 7:15; 9:14)

     “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무슨 말을 택하여 더불어 변론하랴” (욥 9:14)

(11) 사람이 사람을 선택할 때 (출 17:9; 삿 5:8)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은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출 17:9)

bahar와 유사한 것으로는 min과 결합된 yada가 있는데 아모스 3:2에 나타나 있다. “땅의 모든 족속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 여기 나타난 “안다”라는 말은 단순히 지적인 의미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인정하다”는 뜻과 “채택하다”는 의미를 다 지니고 있다.7) bahar가 사용되는 선택은 철저한 조사에 의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어느 곳(렘 26:44; 암 5:21; 사 33:8)에서는 “가치있게 평가하다”로 사용된다.8)

히브리어 동사 bahar와 관련된 다음 동사들은 bahar가 내포하고 있는 요소들을 설명해 준다.  qara(부른다); qanoh(속한다); hibdil(분리시킨다); hiqdish(떼어놓다)9) 또한 다음 히브리 낱말들도 선택사상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  Hashaq(부착시킨다 = to be attached to); 'ahab(사랑하다);  raham(긍휼히 여긴다)10)


B. 신학적 의미


이사야 51:1, 2에 “아브라함이 혈혈단신으로 있을 때에 내가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였느니라”하여 하나님의 자유하심의 선택을 천명하였다.11) 하나님의 선택은 주권자의 자유로운 행위의 표현이며 결코 피택자에게 어떤 의무(빚)가 있어서 선택한 것은 아니다.

야곱(Edmond Jacob)은 선택을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과의 관계를 맺으시고 그 처음의 행위, 또는 그 결속의 계속성을 확신시키는 영원한 실재라고 정의하였다.12) 그에 의하면, 역사에서 하나님에 의한 모든 간섭은 선택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시려는 장소나 그의 의도를 수행하기 위한 백성을 선택하시거나 그의 종과 사자가 될 사람을 선택하시거나 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그가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다른 사람은 선택에서 제외시킨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스라엘의 선택이 반드시 하나님이 다른 민족의 역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도 역시 아니다.

선택교리의 종교적인 함축적 의미는 다양하고도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초월적인 의지와 은혜로우신 의도를 가지고 역사속에서 한번만 아니라, 종종 행동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암시한다.13) 하나님은 존재하시고 하나님은 행동하신다.  그는 아직도 오늘날 자신의 소유가 되기 위해서 자기를 섬기도록 하기 위하여 사람을 선택하신다.  선택은 하나님의 계속적 행위를 의미한다.  이에 대해, 그의 백성의 신앙이 담겨 있고 이로써 그의 목적의 결과가 보장된다.  왜냐하면, 선택은 인간의 역사에 대해 신의 목표가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14)

선택의 직접적이 동기는 무엇인가 ?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한다.  신명기 7:7, 8에 “사랑”이란 말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처음에는 명사로, 그 다음엔 ’ahab란 원형을 가진 동사로 쓰여 있다.  ‘ahab는 어떠한 언약의 조건에 제한받지 않는다.  다만 사랑하는 자의 뜻과 성품에만 달려 있다.15)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동기였다.  또 그것은 이스라엘의 선택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세상의 구세주가 되도록 보내시는 동기가 되기도 하였다.16)

이스라엘 민족의 선택은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것이면서 바로 족장들 (조상들), 특별히 아브라함에 맹세한 언약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나타난다(창 12:2 - 3; 13:15 - 17; 15:13 - 21등; 신 7:8).17)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신 7:8)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은 이스라엘의 힘과 의가 탁월했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민 4:37; 7:6 - 8; 9:4 - 6).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중에서 가장 작은 민족이었으며 또한 반역을 일삼고, 목이 곧은 백성이었다(민 9:7 - 13).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고 그들을 기뻐하신 것은 오로지 하나님 자신의 선한 뜻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택사건이 선택받은 자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가를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선택은 분리를 위한 것이다.  선택은 모든 다른 나라들로 부터 이스라엘을 분리시켜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기업이 되는 백성, 즉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백성을 삼으시려고 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특별한 가치가 있는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이다.18)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시 135:4) 이러한 구별은 “거룩”이란 말로 바꿀 수 있는데, 이 거룩이란 말은 결코 어떠한 윤리적 의미에서 쓰여진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로 구별된 존재라는 뜻이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신 7:6 = 14: 2).

둘째, 선택은 순종을 위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출애굽기 19:5이하의 기록이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여기에는 언약을 지키라는 요구를 내포하는 조건이 제시되어 있다.19)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특별한 소유요 거룩한 백성의 자격을 “제사장 나라”로 표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말에서 이스라엘이 제사장적인 중재자의 역할을 위해서 구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의 특권은 그에 상응하는 의무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으며 또한 불충성에 수반되는 저주와도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신 27;1 - 26).

세째, 선택은 선택받은 자 속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한 영원한 구원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자연히 여기서의 선택은 구원을 위한, 보다 더 특별하고 특수한 선택과는 구별된다.  이것은 구약에 예시되어 있으며(참조 왕상 19:18; 시 95:8 - 11; 사 1: 9; 10:22, 23) 신약에서 더 분명히 나타나 있다.  “이스라엘에서 난 자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롬 9:6; 참조, 롬 9:7 - 13; 11:7 - 10히 4:2 - 7).20) 하지만 주목해야 할 중요한 점이 있다.  비록 민족 선택이 구원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경시되어서는 안된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라”(롬 3:1, 2).  이스라엘의 선택은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꺼이 자신의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고, 또한 때가 되면 만민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을 이루시려는 하나의 매개체였다(창 12:3; 22:18).  이러한 맥락에서 그리스도가 오셨다(롬 1:3; 9:5; 갈 4:4).21)

비록 민족 선택이 구원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민족 선택을 구원을 위한 특수한 선택과 분리해서 생각해서는 안된다.  민족 선택을 받은 자 중에는 언제나 구원에 이르는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고, 민족 선택에 의해 부여된 축복과 특권은 특수한 구원이 나타나 그 구원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 주었다.22) 밀턴(John P.Milton)은 선택에 관한 구약성서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23)

1) 구약에서 선택의 교리는 직접적으로는 개인의 구원과 관련이 되어있지는 않다.  다만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행동과 전체적인 구원의 계획에 관련되어 있다.  그는 여러가지 방법을 제각기 다른 때 자신의 목적에 사용하기 위하여 사람과 민족을 택하시고 부르시고 위임하신다.

2) 구약에서 선택의 교리는 하나님의 뜻의 성취와 이미 예정된 구원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인격적 하나님에 대한 개념, 혹은 신앙과 같이 광범위하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Ⅲ.선택과 관련된 개념들

 

   A. 언약


구약성서에 있어서 선택사상은 언약이라고 하는 구체적 표현으로 나타난다.  언약사상은 선택 사건을 위해서 하나의 형태(Form)와 내용을 제시하려는 것이다.24) 선택은 하나님의 독자적 선재 은총에 의해 근본적 사건을 형성한 것으로 언약이라는 틀(Formework)안에서 활동되어진다.25) 선택은 자연히 하나님과 선택받은 자 사이에 새로운 관계에 돌입되는 것을 의미한다. 거기에는 언약이라는 줄을 통해 서로를 묶게 된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언약에 따른 하나님의 약속 성취에 대한 주제는 이스라엘 전체 역사는 물론 특별히 민족 형성사를 구축하고 있는 중심 주제이다.26)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이 언약에 기초해 있다고 할 수 있다.27)

구약성서에서 언약의 뜻으로 berith를 사용하고 있으며 278회 이상 발견된다.  70인역에서도 이 말과 비슷하게 사용되고 있어 헬라어는 diatheke(διαθηκη)이다.  diatheke는 히브리어 berith가 표현하는 개념과 같은 내용을 갖고 300회 이상 언급되고 있으며 신약에서도 33회가 발견된다.28) 또한 그외에도 같은 내용으로 사용되어 지고 있는 단어가 있다.

(1) 헤두트:“증거”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출 27:21, 31:7,32:15). “모세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오는데 증거의 두판이 그 손에 있고 그 판의 양면 이편 저편에 글자가 있으니”

(2) 다발:말씀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신 9:5).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3) 카툽:기록된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대하 25:4).

   “저희 자녀는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한

   대로 함이라…”

(4) 토라:율법으로 사용되고 있다(단 9:13).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이 모든 재앙이 이미 우리에게 임하였사오나…”29)

종교적이고 신학적인 의미에서의 언약에 대한 사전의 정의는 “순종, 회개, 믿음 등과 같이 인간측에게 어떤 규정을 조건부로 하는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한다.30) 이것은 데이비스 (John D.Davis)의 정의와 어느면에서 일치한다.  즉 그에 의하면 “인간과 맺으신 신의 언약은 일반적으로 인간이 어떤 조건부를 완성한 것을 근거로 하여 주시는, 하나님측에서는 전혀 자유로운 약속이다”라고 했다.31) 이는 근본적으로 동일한 생각이 보다 구체적으로 라일(Herbert E. Ryle)에게서 나타났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에서 하나님은 약속을 만드시고 조건을 설정하신다.  하나님은 규정들을 세우시고 인준하시는 반면, 사람은 그 규정들을 무조건 받아들이게 된다.  사람 사이의 계약 협의에서와 같이 관계의 평등성이 거기에는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약속의 힘에게 복종해야만 한다”라고 주장하였다.32)

히브리어 berith와 헬라어 diatheke의 공통 분모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언약에 있어서 하나님으로 부터의 발의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berith와 diatheke는 모두 “상호협약이 되는 것에 뜻을 둔 일방적인 법규를 암시한다.  berith는 믿음으로 받는 신의 약속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  즉 그것은 역시 신성한 명령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에 사람은 순종으로 반응을 보인다.  그리고 믿음의 순종에 의하여 신의 berith는 상호협약이 된다.33)

몇가지 예에서는 berith라는 말이 구약 성서에서 사람 사이의 관계를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이 말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berith는 근본적으로 종교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34) 사실상 성서에서 berith가 사용될 때, 그 내용은 여러 개의 신적인 언약 가운데 하나를 지칭한다.  즉 노아와 아브라함과 이스라엘과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모압땅에서) 레위인들고 다윗과 또 다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렘 31:31 - 34 의 새언약)들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재하심으로 맺어진 새 언약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35) berith는 또 여러 개의 의미 심장한 복합어와 함께 사용되고 있다.  이를 테면, “언약서”(출 24:7), “언약의 피”(출 24:8), “언약의 말씀, 곧 십계”(출 34:28), “언약의 두 석판 ”(신 9:15), “언약 궤”(민 10:33), “언약의 소금”(레 2:13), “언약의 사자”(말 3:1), “하나님의 언약”(대하 34:32), “우리 열조의 언약”(말 2:10), “나의 평화의 언약”(민 25:12; 사 54:10), “밤낮으로 나의 언약을 ”(렘 33:20, 25)등이다.

berith의 어근은 히브리어에서는 분명치 않고 아카드어 baru(속박하다, 의무를 지우다:fetter, bind)에서 찾는다.36)

berith의 개념은 어원학적 연구나 단어의 용도와 의미에 국한하여 재정의나 개념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많이 있었는데, 이 중에서 크게 공헌한 학자가 베그리히(J.Begrich)이다.  그는 berith의 근본적이고 원시적인 의미를 법적 결합(Rechtsgemeinschaft)을 뜻하는 것이라고 했으며, 이것은 강한 자 편이 임의로 체결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같은 경우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이나 다윗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단순히 그의 가호를 약속함으로서 신과 인간이 특별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37)

쇼트로프(W.Schottroff)도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을 준수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상전인 신이 언약을 관대하게 하사할 것을 호소하는 것인 만큼 언약 개념의 일방적인 면이 있다고 주장하였다.38)

퀼러(L.Kohler)는 언약이란 단어의 어원학적 연구를 더욱 발전시켰는데, 그에 의하면 krth berith (cut a covenant)란 대표적 문구는 양편이 동등한 위치에서 맺는 언약이고 krth brith le~/'im (cut a covenant for/with)란 강자가 약자에게 언약을 허용하는데 쓰인다.39)

또 하나 많이 쓰이는 haqym berith (raise up a covenant)라는 문구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 쓰는 말이며 그 뜻은 하나님이 언약을 지켜주실 것이라는 것이다.berith란 단어 그 자체는 음식과 식사를 뜻하는 barah란 단어의 어근과 관련 되었다고 보며 퀼러는 언약에 수반된 제의된 식사(Covenant meal)에서 나왔다고 보고 “언약을 자르다”란 문구 역시 언약 식사를 할 때 음식을 자르는데 연유된 것으로 본다.40)

그러나, 노트(N.Noth)는 위의 견해에 반박하여 구약원전에 “언약을 맺다”, “언약을 수립하다”를 karath berith로 쓰고 있으며 이것의 직역은 “언약을 자르다” (cut a covenant)가 된다고 주장하였다.41) 그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고대 마라문서에 나타난 언약풍습을 추적했다.  여기에 의하면, 두 사람이 언약을 체결한다는 사실을 “‘하누’와 ‘이다마라스’사이에 나귀를 살해한다”(to kill an ass between the Hanu and Idamaras)라고 표현하고 있다.42) 대체로 알려진 바에 의하면 고대 근동에서 계약을 맺을 때는 계약 당사자들이 어린 나귀나 당나귀를 살해한 (to kill a young donky)다음 그 사체를 양분하여 마주 대하여 놓고, 계약자 쌍방이 그 사이를 같이 걸어 지나가는 풍습이 있었다는 것이다.43) 그래서 구약에서 “언약을 체결하다”를 karath berith(언약을 짜르다:to cut a covenant)라고 쓴 것은 동물을 짜르던 언약체결 의식에 그기원을 두고 있음을 아모리인의 자료가 확인해 주었다44)

상기와 같이 어원적인 의미 교찰을 통하여 언약의 개념을 파악하였지만, 언약에 대한 중요한 견해를 학자들을 통해 고찰해 보아야 한다.

페데르센(Johs. Pedersen)이 주장한 정의로써,berith란 “이 관계가 참여 당사자들에게 부과되는 권리와 의무를 다같이 지니는 상호관계”를 지칭한다고 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피차간의 태도인데, 그 관계는 신분상의 어떠한 동등성을 적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호간의 관계이다.  berith가 때때로 일방적인 (비동등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것 처럼, 성서에서 사용되고 있는 이유는 특수한 언약, 특별히 신과 인간간의 언약의 내용이 일반적인 berith의 형식을 변칙적으로 따르는데 기인한다고 주장했다.45)

멘덴홀 (George E, Mendenhall)에 의하면, 이는 구약의 모세 언약과 주전 2천년대의 서방 아시아의 종주권 조약 사이에는 형식에 있어서 식별이 되는 유사성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종주국과 속국사이의 정치적인 계약이었다.  종주국이 속국에게 계약을 제시하면 속국은 그 계약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약을 세움에 있어서 종주국은 자기측의 힘의 소유에만 근거하지 않는다.  즉 속국을 향한 자기들의 자선의 행위를 회상시키는 것이다.46)

트럼벌(H.Clay Trumbull)은 쌍방의 언약을 통해서 형제들이나 친구들, 또는 형제들 이상과 같은 아주 가깝고 가장 영구적이며, 가장 신성한 관계를 맺는 상호적 입장의 언약 체결형식, 다시 말하여 피로 언약을 맺은 원시적인 의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 증거를 제시하였 다.47)

언약에 대한 일반적인 뜻이나 어원적인 뜻, 그리고 여러학자들의 견해들을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모두 적용할 수는 없다.  berith라는 말은 구약에서 사용될 때 거의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관계되는 단어로 사용된다.

로빗슨(O.Palmer Robertson)은 berith를 “주권적으로 사역되는 피로 맺은 약정”이라고 했다.48) 또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처분권” 혹은 “협정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재가”라고 정의할 수 있다.49)

포스(Geerhardus Vos)에 의하면 berith의 특징적인 표시는 그것이 합의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그 합의가 어떤 특별한 종교적인 재가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berith는 사람의 협력없이도 존재할 수 있으나, 이것은 사람을 절대적으로 묶고 있다는 것이다.50) 또한, 데이비스(John D.Davis)는 “일반적으로 사람이 어떤 조건을 이루었을 때를 근거해서 세워진 하나님측의 자유로운 약속”이라고 정의했다.51)

야콥(Edmond Jacob)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언약 체결에 있어서 다음 세가지 면을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첫째, 언약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주는 선물이다.  둘째, 언약으로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의 관계속에 들어오는 친교의 결합(a bond of communion)을 창조한다.  세째, 언약은 율법이라고 하는 구체적 형체를 가지고 책임을 창조한다.52) 즉, 언약이란 이스라엘 백성의 존재의 의미, 목적, 책임과 하나님과의 근본적이 관계를 말해 주고 있다.5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 생활 속에 들어와서 그의 공동체가 존재하는 근본적 의의를 보여 주신 것이다.  주님이시고 또 통치자이신 하나님은 언약을 그의 은혜로서 주신 것이다.  그 언약의 선물을 받아들일 때 이스라엘 백성은 많은 유산을 받을 것이고 적들로부터 안전을 누릴 것이고, 법과 질서를 유지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평화(Shalon)을 경험하게 되어 건전하고 조화된 삶을 갖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유 의사로서 하나님과 언약 가운데 들어 갔고 하나님을 섬겼다.  이 언약의 조건으로서 율법(Torah)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다.  그 율법 안에 살때 평화와 정의와 안전을 갖게 된다.54)


   B. 축복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선택 사건으로 시작하여 언약 사건을 통해 구체화 되는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방법을 인하여 성취되어간다.  그래서, 선택과 언약 사건에는 항상 “축복”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55)

성서에 “복”과 관련된 말이 387회 나타나며 “축복”과 관계된 말이 102회 나타난다.  이상 두가지를 종합하면 모두 489회이며 신약에 93회가 구약에 396회가 나타난다.56)

“축복”과 관계된 단어는 구약에서 barak(   )와 에세르(   ) 신약에서 율로게오 (ευλογεω)와 마카리오스 (μακαριοσ)이다.

barak의 본래의 뜻은 “무릎을 꿇다”(Kneel)는 뜻으로 낮은자가 높은자를 경배하고 찬미할 때 사용되었다(시 72:15,95:6, 대하 6:13). 또 축복을 빌때나 (대상 4:10), 이미 받은 축복을 감사하며 찬양할 때 (시 145:1 - 2, 대상 29:10; 느 9:5; 출 18:10; 룻 4:4; 삼상 25:32; 삼하 18:28; 신 8:10) 사용되었다.57) 흔히 “경배하다, 숭배하다, 찬양하다” 또는 “축복을 기원하며 인사한다”는 이차적인 의미로도 쓰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비와 호의를 보임으로써 인간을 축복할 때(창1:28, 9:1, 12:2, 22:16 - 18; 신 7:12 - 16)에 나타나 있다.58)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실 것을 약속할 때는 영적이며, 물질적이며, 동시에 후손이 받을 먼 훗날의 축복까지 포함하였다.  멜기세댁의 축복기사는 양면적인 면을 모두 내포하고 있다 (창14:19 - 20).  인간이 하나님의 축복을 불러 일으킴으로서 다른 사람을 축복할 때도 이 말이 쓰였다(창14:19).

에세르는 “복으로 주는 행복과 성도의 바른 행동에서 얻어지는 행복”을 의미한다.59)에세르는 동사 “아사르”(   ) 에서 나온 파생어이다.  이 동사는 “똑바르다”, “올바르다”, “인도하다”(사 1:17; 잠 23:19), “지위가 향상되다”, “전진하다”의 뜻이다.60) “행복하다”를 뜻하는 두 동사 “barak”와 “아사르”는 그 출발이 다르다.  “barak”이 사용될 때, 그 주도권은 하나님께로 부터 나오는데, 이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받을 자격이 없는 축복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아사르”는 인간에게만 사용되는 단어로 복을 받기 위하여는 인간의 갈망과 행동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을 받을 자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시 2:12, 34:8; 잠 16:29)이며 그의 율법에 지배되는 자(시 1:2, 119:1)이며, 그의 법도에 지배되는 자(시 128:1)여, 가난한 자를 돌보는 자(시 41:1; 잠 14:21)인 것이다.61)

율로게오는 히브리어  “barak”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 사용되었다.62) 그런뜻은 “칭찬하다”, “찬양하다”(마 14;19; 막 6:41; 눅 24;30; 고전 14:16), “축복하다”(눅 24:50; 히 7:1; 출 23:25)이다.63) 또는 “예배하다”, “무릎을 꿇다”라는 뜻으로도 많이 사용되었다(롬 12:14; 눅 24:50).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영적인 축복에 사용되었다(행 3:26; 히 6:14; 갈 3:8; 엡 1:3).64) 그런예로, 초대기독교에서 축도형식으로 사용되었고(고후 13:13) 서신에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로 부터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 경우에도 사용되었다(롬 1:7; 벧전 1:2). 65)

마카리오스는 “행복한”, “복있는” 이란 뜻으로 보통 하나님께서 수여하시는 복에서 오는 행복한 인간의 상태나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 같은 것을 의미한다.66)마카리오스는 구약의 “아스레이”를 헬라어로 번역할 때 사용되었다.  마카리오스는 사람에 대하여는 종교적 의미에서 사용되었고 (요 3:17), 비인격체에 대하여도 사용되었으나 (행 20:35),67) 주ꃯ 신령한 축복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마 5:3 - 11; 눅 11:28; 요 20:29; 행 20:3 - 5; 약 1:12; 계 1:3, 14:13, 20:28)68)


   C. 구속


성서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택하셨다고 말할 때 거기에는 하나님의 축복과 더불어 하나님의 구속도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구속이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활동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기본적인 관념 중의 하나이다.  구속이란 말은 본래 “폭을 넓히는 것”, “방해를 받지 않고 발전하는 것”, “전쟁에서 승리를 얻는 것”, 또는 “필요한 능력과 힘을 소유하고 그 힘을 행동화하여 명성을 떨치는 것”등의 세속적인 개념이었으나 구약, 특히 신명기, 시편, 이사야에서 매우 중요한 신학적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고, 신약에서도 역시 사용되었다.69)

구속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ga'el, padah, koper이 해당한다.

동사 go'el은 “구원하다”, “도로사다”, 또는 “가까운 친족, 동족으로 행하다”의 뜻이 있다.  이 동사의 분사형 go'el은 본래 어떤 사람의 죽음이나 채무를 대신 갚아 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을 지칭함으로서, “구속자, 보응자, 친적”등으로 사용되는 바 히브리어의 가정법에서 유래한 말이다.70) 또,  린드블럼(J.Lindblom)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구속자라고 말할 때, 이것은 그가 자기 민족을 특히 압제자의 손에서 부터 구원하심으로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71)

이스라엘 백성을 압제자로 부터 구출해 내신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인격적이기는 하나 동등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go'el은 소유자와 소유물 사이의 관계회복을 나타내고 있다.72)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속전으로 어떤것을 지불하셨다고 하는 개념을 피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애굽의 압제자에게 값을 치르었다고 보기보다는 강력한 힘의 행사에 대한 개념이 도처에 나타남으로 구원의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의 노력은 가격 혹은, 댓가로서 비유 된다고 본다.73)

padah의 뜻은 “가격을 지불하고 도로 사다”의 뜻으로 번역된다.  그런데 이말은 상업적인 교역활동에 있어서 아무런 채무 이행의 요구가 없이 행해지는 거래를 나타내기도 한다.74) 또한, padah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장자의 구전으로 돈의 가치를 요구할 때 사용했다(출 13:2, 11 - 16).  예를들면 출애굽후에 하나님을 섬기는 일중에 모두 처음난 아들과 동물을 드려야 하는 의무가 있었는데 이 때 그 값을 내고 그 의무에서 놓임을 받을 때 이 말을 사용했다(출 21:8; 레 25:47 - 49; 민 3:46 - 49, 18:15).75)

모리스 (L.Moris)에 따르면, 얼핏 보기에 padah의 뜻은 단지 “구조”혹은 “구원”에 지나지 않는 듯 하지만, 사실은 go'el과 마찬가지로 padah역시 댓가를 치룬 구원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견해는 대리의 개념에 포함되어 있다.  물론 동사의 주어가 하나님일 때에는 대리의 개념이 약간의 수정을 요구하지만, 댓가를 치룬다는 의미를 여전히 그대로 함축되어 있다.76)

koper의 동사형인 kopur는 “덮다”, “가리다”, “달래다”, “용서를 얻게 하다”를 뜻하고 명사형인 koper는 “속죄의 댓가”, “죄를 가리움”, “속전”의 뜻을 나타낸다.  “소가 남자나 여자를 받아서 죽이면 그 소는 반드시 돌에 맞아 죽을 것이요 그 고기는 먹지 말 것이며 임자는 형벌을 면하려니와 … 만일 그에게 속죄금을 명하면 무릇 그 명한 것을 생명의 속으로 낼 것이요(출 21:28 - 30)” 여기서 이 단어는 법률적 용도로 사용된다.  “속죄금”이라고 표현된 이 법정적 상황에서 볼 때 koper는 제의에 관한 한 의식에 의한 죄를 보상한다는 특별한 신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엄격히 말하면 속죄 보다는 대리(substitution)의 느낌이 강하다.77)

 

Ⅳ.구약성서에서 선택사건들


   A. 아브라함의 선택


노아 홍수이후 4세기 동안 노아의 아들들은 수 많은 족속들로 성장하였으며, 성장한 후손들은 각기 살 장소를 찾아 흩어져 가고 있었다.  민족들의 분산은 언어와 생활 방식, 습관이 다르고, 서로 엉켜진 여러 나라를 필연적으로 발생시켰으며, 나누어진 여러 민족들이 하나님께 대해 가지는 상이한 태도 속에 내포된 우상숭배는 점점 자라서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린 이방주의의 다신교적 종교로 타락시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신 사건을 통하여 계시의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셨다.  이 계시의 출발은 창세기 12장과 더불어 시작되어 성서기사 가운데 주요한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라고 명령하셨다. 이 명령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오염되고 더러워진 사회로 부터 구별을 요구하신 것이다.  그것은 다만 외형적, 혹은 육체적인 구별을 뜻하는 것만이 아닌 내부적인 면까지 포함한다.  그의 인간적인 면, 야망과 열정, 인간의 욕심과 안목의 정욕등에서도 분리되어야 한다고 볼 수있다.  종교적인 의미에서 볼 때 분리는 부정적인 의미라기 보다는 본질적인 면에서 긍정적 이라고 보아야 한다.  “가라”는 하나님의명령속에는 하나님의 요구가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믿고 순종하며 그에게 자기 자신을 전폭적으로 위임하라는 요구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본토, 친척, 아비집을 버림으로 철저한 분리를 하였다.77) 이사야는 이 분리를 아브라함의 구속이라고 기록하였다(사 29:22).

스팁스(A.M.Stibbs)는 아브라함의 순종은 아브라함의 구원사역에 있어서 결정적인 단계이었으며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었고, 또한 그에 대한 부르심은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결혼을 요청하는 것과 같은 요구였다고 하였다.78)

아브라함의 소명은 바벨탑 사건 후 인간 문명이 위기에 부딪쳤을 때이다.  그 때는 이미 달과 별을 숭상하는 우상종교가 편만해 있었다.79) 아브라함의 고향인 우르는 명칭 본래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빛” 혹은 “불”이라는 뜻으로, 불을 숭상하는 우상 종교의 의식에서 생겨진 단어라고 한다.80) 우르에 대한 조직적인 발굴 작업이 1922년에 울리(Leohard Woolley)의 지도하에 대영 박물관과 펜실바니아 대학 발물관의 합동 탐구로 이루어졌다.  탐사한 결과 많은 유적지를 발굴 하였는데 그 중에는 거대한 신 바빌로니아 궁전이 있다.  이 궁전의 남쪽에서 신 바빌로니아 신전이 발견되었다.  이 우르의 성역은 대체로 직사각형으로 이루어졌는데, 북서 지역에서는 달신, 난나(Nanna), 아키드어로는 신(Sin)에게 봉사하는 성읍의 주요 신전인 에테메니 구루(E-Temen-ni-guru)가 있다.81)

또한 와이즈만(Donald I.Wiseman)은 1959년 캠벨 몰간 기념 강연에서 이 시대의 바벨론 종교는 가장 조잡한 형태의 다신교이었으며, 적어도 삼천 가지 이상의 수메르(Sumer:유프라테스 하구의 고대 지명)사람의 신들이 있었다고 한다.  유대인의 전통에 의하며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이러한 우상을 사고 팔았으며 이 다신교는 아브라함이 어렸을 때의 가정 환경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것을 버렸다고 하였다.82)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지방 우르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떠났다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큰 결단과 결심이 요구되었는지 알 수 있다.

밀톤(John P.Milton)은 창세기의 소명기사는 땅에 대한 약속, 민족, 위대한 이름, 그리고 물질적인 축복과 같은 세상적인 모습이 제시되어 있다고 하였다.83)

카일(C.F.Keil)은 아브라함의 소명기사를 네가지 축복으로 보았다.  1) 수많은 백성으로 증가됨. 2) 물질적이며 영적인 번영. 3) 그의 이름의 고양 즉, 아브라함이 영예롭고 영광스럼게 됨. 4) 축복의 소유자와 시여자로 임명됨이며, 이는 아브라함이 축복을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대한 축복의 매개체가 되었다는 것이다.84)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명령에는 약속이 부가되어 있다.  아브라함에게 가장 필요하며 고대하였던 후손에 대한 약속과 이에 부응하여 있어야 하는 땅의 약속과 끝으로 아브라함에게 주시고자 하셨던 축복의 약속이 있다.

첫째, 후손에 대한 약속

창 12:2에 의하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라는 말씀이 나온다.  아브라함에게는 지금까지 오랜 결혼 생활을 사라와 하였지만, 그에게 아직도 대를 이어줄 자식이 없었다.  아브라함은 누구에게나 있었던 자식이 없음으로 인간적으로 실망과 실패를 안고 있었다.  이러한 자에게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그의 고민과 부족함을 채워주신다고 언약을 하셨다.

     시편 127:3 - 5에는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시피, 많은 자손은 하나님의 축복된 모습임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85)

     창세기 3:16에도 롯과 헤어져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다시 언약을 상기시키고 있다.  “내가 네 자손으로 당의 티끌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데 네 자손도 세리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그의 자손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셨으며, 그의 통치를 원하는 나라를 건설하시길 바라셨다.  하나님께서는 롯도 엘리에셀도 거부하셨으며, 비록 아브라함의 씨라고 볼 수 있는 이스마엘까지도 부정하시고 창 21:2에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씨라 칭할 것임이니라”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의 목적은 즉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리기 위한데 있다.86)

     둘째, 땅에 대한 약속

후손에 관한 약속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약속이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약속된 땅에 대한 약속으로 창세기 12:1에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속에는 땅에 대한 약속이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  이 명령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갔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재 약속을 받았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12:7).  막연히 보이던 땅에 대한 약속이 확실한 하나님의 언약에서 구체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롯과 헤어져 돌아오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땅에 대한 언약을 구체적으로 하신다.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의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 13:14, 15)

     마이어(F.B.Meyer)는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마치 그의 손에 권리 증서를 쥐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지내기를 바라셨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라”하였다.87)

     창세기 15장에서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의 4대 후에는 차지하리라는 언약은 공식적인 예식에 의해 주어졌고, 17장에서는 그 유업의 영원함을 말씀하셨다.  그후 야곱의 후예들이 애굽에 건너갔다가 거대한 민족이 되어 애굽을 나와서,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그 땅에 정착하게 됨으로 언약이 성취되었다.  신명기 30:19 - 20에 의하면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았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 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복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에서도 여호수아가 강 건너가서 땅을 정복할 때 아브라함의 언약이 이루어진 것이다.  느헤미아 9:7, 8에서도 “주는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그 마음이 주 앞에서 충성됨을 보시고 더불어 언약을 세우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의 땅을 그 씨에게 주리라 하시더니 그 말씀대로 이루셨사오니 주는 의로우심이로소이다”라고 기도함으로 땅에 대한 언약이 이루어졌음을 재확인하였다.

     세째, 복의 근원이 되는 약속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축복의 약속이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내용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영적인 축복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양태의 언급이 창세기 12장 부터 50장 까지 사이에 의미심장하게 제시되어 있다.

창세기 12:2에 기록된 세 구절은 동일한 개념으로 연결되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고 되어 있다.  “이름”에 대한 문제, 즉, “명성”, “신망”, “우월”에 대한 야망이 창세기 6:1 - 4의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우는 전제 군주적인 왕들과 창세기 11:4의 바벨탑을 건축한 자들을 자극했었다.  이제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도 이기적으로 추구하였으나 얻지 못했던 것을 하나님 자신의 독자적인 의도에 의해서 한 인물에게 직접 주시고자 하셨다.88)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 다음에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되어 있다.  아브라함은 구속사에서 위대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을 모든 민족을 위한 복의 근원, 하나님의 은총의 통로로 세우신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고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하리니”했으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해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했다.  아브라함은 단순히 축복의 주체가 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에 대한 축복의 매개체가 되었다.  비처 (Willis J.Beecher)는 이 약속이야말로 “단 하나의 약속의 교리”를 위한 기본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 “이 사건을 성서가 일반화한 것은 이러한 식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셨고, 그를 통하여 온 인류에게, 그리고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영원히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질 약속을 주셨다.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의 원칙이 되시는 분인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하였다.89)

     창세기 22:16 - 18은 언약의 갱신이나 재확인이라 할 수 있다.  12장에서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복을 얻게 할 것이라고 했지만, 22장에서는 희생제로 드려졌고 그러면서도 보존되어 남게 된 약속의 아이인 이삭을 통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했다.  이삭이 아브라함의 축복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다.  아브라합의 순종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형태가 더욱 견고해지고 그 범위가 확대되었다.90)

     “축복의 개념은 창세 때부터 주어지는 중요개념이다.  특별히 족장이야기에서 계속 반복되는 언약에는 선택과 축복이 중요요소로 등장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절대 은총소유”가 될 것을 강조하였다.91)

하나님의 구속사의 현장은 가나안 땅에서 아브라함을 비롯한 그의 후손들에 의해서 이루어 가게 된다.  결국, 그 땅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사가 성취된다.92)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선택을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위”에 속한다고 본다.

 


   B.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

 


야곱의 열 두 아들과 요셉의 두 아들은 애굽의 속박기간 동안 그들이 큰 민족이 되기 까지 번성하였다.  430년의 노예 생활 후에(출 12:40) 야곱의 아들들은 증가하였다.  이제 단순히 한 가족이 아닌 한 민족이 되었다.

대개의 학자들은 모세를 통한 선택사건을 통하여 이스라엘 공동체가 형성되었다고 본다.93) 라지트(G.E.Wright)는 선민 사상이란 출애굽이라고 하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94) 라울리(H.H.Rowley) 역시 출애굽 사건이 모든 구약 사상에 가장 깊은 자국을 남겼다고 본다.95)

허버트(A.G.Herbert)는 구약성서에 있어서 가장 중심되는 것은 출애굽 전승이고, 아브라함과 족장들의 이야기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탄생하기 위한 서론이라고 했다.96)

예언서들을 보면 대개의 경우 출애굽 사건을 통한 이스라엘 선택을 언급했다.  호세아 11:1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 내었거늘”이라 했다.  예레미야도 출애굽을 통한 이스라엘의 선택을 주장한다.  “네 소년때의 우의와 네 결혼 때의 사랑, 곧 씨뿌리지 못하는 땅, 광야에서 어떻게 나를 쫓았음을 내가 너를 위하여 기억하노라”(렘 2:2).  호세아 예레미야와 같은 내용으로 에스겔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땅에서 택했다고 주장했다(겔 20:5).  가장 중요한 귀절을 출애굽기 6:2 - 3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는 여호와로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 하였다.”고 말한다.  따라서 예언서나 모세오경의 귀절들을 출애굽사건이 이스라엘 역사와 신앙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증거한다.  이처럼 출애굽을 통한 구원의 사건에 중점을 두고 증언하는 것은 역사적 과정이 구체적 사건을 통한 선택의 섭리를 말해 주고 있다.97)

선택은 하나님의 은총의 행위이다.  하나님은 구원하시기 위해 연약한 상태에 처해 있는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애굽에서 노예상태로 있는 그들을 구원하셨다.  이스라엘의 선택은 이스라엘 백성이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영광과 주되심을 세상에 나타내게 하려고 그들을 만민으로 부터 구별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열방들에게 그 자신을 나타내시고 이스라엘을 통해 열방들에게 그 자신을 나타내신다(신 4:5 - 8, 35).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현시(Self - disclosure)는 이스라엘의 사명에 대해 하나님께서 요구하실 수 있는 근거가 된다.98)

하나님의 선택 사건은 선택받은 자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즉, 이스라엘의 특이성인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이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즉,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시 135:4).99) 이스라엘의 가치는 이스라엘에 마음을 쏟은 하나님의 사랑과 애정에서 왔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의 소유가 되었다.  후에 신명기에서 이스라엘은 “기업의 소유” 뿐 아니라 “거룩한”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이 귀절들은 항상 “백성”(신 7:6; 14:2; 26:18, 19)이란 개념과 연결되어 있다.100)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만민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신 7:6).  AJV(American Jewish Version)은 “자기 기업의 백성”을 “내 자신의 보화”라고 번역하고 있다.101)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의 소중히 여기는 소유물, 그의 특별한 보화, 그의 참된 소유물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부르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언약에서도 마찬가지이다.102)

가장 중요한 것은 출애굽기 19:5이하의 기록이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여기에는 언약을 지키라는 요구를 내포한 조건이 제시되어 있다.  또한 특별한 소유, 거룩한 백성의 자격을 제사장 나라로 표시하고 있다.  그들의 사명은 열방을 대신해서 제사장직과 왕권의 위치에 있게 되는 것이었다.  선교와 봉사를 통해 인류를 영적으로 통치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있다.  저희가 순종치 아니함으로 넘어지나 그리스도안에서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택하신 족속, 왕같은 제사장, 소유된 백성, 거룩한 나라”라고 부른다.  그 목적은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기이한 빛에 들어가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는 것이다.  즉, 세상에 대한 영적인 사역이 언약의 목표이다.  이사야는 이것을 특별히 강조하여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종으로 부른다.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사 44:1이하).  이 말은 하나님께서 속한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에게 나타날 때를 생각하면서 특별히 강력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동시에 모든 이교적인 것으로 부터 분리해야 할 의무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103) 이스라엘은 단순히 하나님의 축복의 수취인이 되도록 선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도록 선택된 것이다.

언약은 하나님의 자유스러운 은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을 선택하고 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윤리적 의무를 부과 하셨다.  신명기 27:9 - 10은 이러한 내용을 잘 말해주고 있다.  “오늘날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으니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복종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과 규례를 행할지니라.”

시내산 언약은 하나님의 뜻이 외형적으로 기록된 최종 요약이라는 특징이 있다.  족장들은 일반적인 말로써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다.  때때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의 구체적인 면에서 직접 계시를 받았다.  그러나 모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의 총요약이 율법을 돌에다 기록함으로써 뚜렷하게 되었다.

출애굽기 24:1 - 2에는 시내산 언약을 수립함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의 참여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신명기 5:2에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나니”라고 하여 이러한 사실을 재확인하고 있다.  이 때까지 하나님의 선택 그리고 언약 관계는 개인이나 가족과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하나의 국가를 이루는 백성의 참여 하에 언약을 체결하신다.  시내산 언약을 특징짓는 요소는 “언약의 피”라고 할 수 있다.  출 24:8에서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고 하여 언약의 피가 시내산 언약의 특징적인 요소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죽음과 언약은 분명히 연결되어 있다.  새 언약을 세운 그리스도의 죽음은 첫 언약의 파괴로 인한 저주로 부터의 구원을 제공하였다.104)

출애굽기 24:3에는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하며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에게 부과된 언약상의 의무를 준수할 것을 서약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언약의 의무를 위반하고 이해하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그들 위에 하나님의 진노와 벌이 임하게 되었다.

 


   C. 선택의 변천

 


창세기 1 - 11장에서 사람과 더불어 하나님의 길을 조명해 주는 불빛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특별히 창세기 3:15의 경우는 이 사실을 더욱 증명해 준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 원복음 안에서 구원의 전체적인 역사와 질서의 윤곽이 드러나고 그 내막이 줄줄이 풀려나온다.105) 델잇취(Franz Delitzsch)는 이 귀절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스핑크스와 같이 그것은 거룩한 역사의 시작이었다.  이 고대의 예언이 목적하였던 바가 무엇이었는가는 바로 오직 그에 의해서만 그리고 그 안에서, 그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106) 이는 비슷한 설명으로서 리차드슨(Alan Richardson)은 그 성서의 기자가 분명한 메시아적 예언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을 부인하면서도 인정하기를 “아마도 그는 이곳 자기의 비유를 통하여 인류의 궁극적인 구원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죄와 사망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에서 그 실현을 발견함으로써, 그의 아직 구체화 되지 않은 희망을 올바르게 해석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107) 창세기 11장까지는 하나님이 특정민족이나 국가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열국의 하나님임을 기록하고 있다.  성서의 증거에 따르면 특별한 의미에 있어서 거룩한 역사를 형성하고 있는 하나님의 구속의 행위와 약속의 참다운 시작을 표시해 주는 것은 아브라함의 선택사건인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 전에 나오는 이야기는 서론의 성격을 띠고 있다.108) 묄러(Wilhem Möll- er)는 창세기의 의미를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처음 11장까지는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것, 구원 받아야 할 필요성,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의 구원의 사업을 성취하시기 시작하셨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역사가 족장 가족의 역사로 넘어가는 부분에서 누구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서론적인 귀절, 곧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12:3)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 앞에 서게 된다.”109)

비처(Willis J.Beecher)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를 통하여 인류에게 주어질 약속을 선언하셨다는 것, 그리고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 약속의 풀려나감이라는 것, 또 그 약속은 다윗에게서 갱신되었고 모든 선지자에 의해서 전파가 되었다는 것, 언약이 세워진 후 곧 그것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그 이후로 계속 이루어져가고 있었으며 그 언약의 가장 큰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업 속에서 실현되었다는 것, 또 그것의 성취의 과정은 결코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이 약속의 교리는 예언자들이 성서에서 가르친 것을 요약한 것이라고 했다.110)

아브라함의 약속을 특별히 명쾌하게 언급하는 귀절이 시편속에 두군데 있다.  그 하나는 시편 47:9이다.  “열방의 방백들의 모임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라고 한다.  이것은 보편성에 대한 놀랄만한 단언이다.  물론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역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  RSV의 번역은 백성들이 언약 아래의 약속된 축복 속에 아브라함의 하나님에 속한 백성과 동참한다는 선언으로 되어 있다.  이 귀절은 “너와 너의 씨 안에서 땅위의 모든 백성들이 복을 받을 것이다”라는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려 함이니라”(갈 3:14)는 바울의 선언을 예상하고 있다.111)

그 다음 귀절은 시편 105편에 있다.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 행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시 105:1)은 권면에 해당하고 “그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시 105:5)에게 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어서 시편 105:7 - 11인 하나님의 놀라운 사업에 따라 불리워진 영창속에는 민족의 역사뿐만 아니라 족장의 역사로 부터의 선택을 포함하고 있다.112)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도다.  그는 그 언약 곧 천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며 이삭에게 하신 맹세며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영한 언약이라.  이르시기를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의 기업의 지경이 되게 하리라 하셨도다.”

아브라함의 선택사건 이전에는 하나님이 특정민족이나 국가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열국의 하나님임을 기록하고 있으나 아브라함의 선택사건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선택하시는 하나님 즉, 보편주의에서 특수주의로 전환한다.  아브라함의 선택 사건 없이, 광의의 보편주의 없이, 땅위의 열방들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과 종이 될 이스라엘의 선택과 구원을 적절하게 설명할 길이 없다.113)

아브라함의 선택사건은 한 개인의 선택이라는 점에서 모세를 통한 이스라엘의 선택 사건보다도 더 극단적인 특수주의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나 두가지 점에서 궁극적인 보편주의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을 다른 사람들도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 예로 롯의 경우나 하갈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둘째, 아브라함의 선택 때문에 지상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창 12:3; 18:18).114)

구약성서에서의 선택 사건은 처음에는 개인적인 선택115)(Individual Election)으로 이뤄져 나가다가 다음에 민족적 선택(Nat- ional Election)인 모세를 통한 이스라엘 선택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러다가 이스라엘의 배신과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남은자(Remnant)와 메시야 사상에 이르고, 세계 선교와 관련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이른다.116)

 
Ⅴ.아브라함의 선택과

 

                     이스라엘 선택의 관계

  

아브라함의 선택과 모세를 통한 이스라엘의 선택 사건을 연결시켜 주는 귀절은 구약성서에 상당히 많고 또 기술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즉, 출애굽기 1:5에 70인으로서 야곱의 자손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창세기 46:27에 더욱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애굽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두명이니 야곱의 집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명이었더라.” 즉 하나님의 축복 아래서 큰 민족으로 성장한 아브라함의 씨를 지적한다.  애굽에 내려갈 때에(창 12:2) 70인을 하나님의 백성의 전체로 이해한 것과 출애굽기 1:7에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고 묘사된 상황 사이에는 의도적인 대조가 있다.117)  ꃯ명기 저자는 이와 동일한 대조를 명기하고 있다.  “애굽에 내려간 네 열조가 겨우 칠십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셨느니라”(신 10:22).

하나님이 불타는 가시덤불의 현현을 통하여 모세에게 자신을 알리시기를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 3:16)고 한 것은 중요한 내용이다.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라는 지칭은 출애굽기 3장과 4장에서 네 번이나 반복된다(출 3:13, 15, 16, 4:5).118)

출애굽기 6:2 - 9은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강력하게 회상시켜 주고 있다.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하나님이 여기에서 의도하시는 것은 집요하게 과거로 부터 계속 언약의 성취자로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 씨는 이제 이스라엘 백성으로 대표된다.  축복의 약속은 출애굽기 6:7에서 창세기 17:7 - 8의 귀절을 회상하는 언어로 이렇게 반복되고 있다.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복있는 자로서의 부르심은 “너의 하나님”과 “나의 백성”의 관계에 내포되어 있다.119)

라울리(H.H.Rowely)는 아브라함의 선택 사건과 이스라엘의 선택 사건과의 관계를 설명하기를, “이스라엘 백성이 아브라함안에서 선택함을 받고 또한 모세를 통하여 선택함을 받았다”고 했다.120) 야곱은 아브라함 안에서의 선택을 존재라는 낱말로, 그리고 모세를 통한 선택을 행동이라는 낱말로, 설명했다.  즉, 하나님은 아브라함 안에서 선택된 백성의 존재성을 선언하였는가 하면, 모세를 통해서는 그 선택성의 선언이 역사적 과정에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겨져 갔다.121) 이것은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의 선택과 모세를 통한 이스라엘의 선택이 연결되어짐에서 알 수 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언약의 징표로 주어진 것 중에 출애굽 사건이 분명히 예시되고 있다.(창 15:13 - 14).122)

출애굽기의 저자는 족장들과 출애굽기 시기를 직접적으로 연결하였다.  그에게 있어서는 시내산 언약이 신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아브라함 언약의 연장일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애굽과 시내산을 이전 언약의 중단으로 취급하기보다 그들이 요망하는 바는 반복적인 언약을 준수하시는 하나님의 신적인 성실성(God's Divine Loyalty)을 선언한 새로운 기회로 삼는 것이었다.123)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맺으신 시내산 언약은 아브라함을 선택하고 맺으신 언약 관계에 기초를 두고 수립되어졌다는 점에서 연관성이 있다.  즉, 시내산 언약은 먼저 세워진 아브라함과의 언약 관계에 그 근거를 두고 체결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124)

하나님은 족장들과 언약을 맺으셨고,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다.  이 약속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주권적으로 모세 시대에 역사하셨다.  속박된 애굽에서의 구원 사실은 십계명의 기초가 되었는데 (출 20:1), 시내산 언약의 중심을 이루는 십계명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의 성취로 이루어진 출애굽의 구속 역사에 굳건한 기초를 두고 있다.

시내산에서의 언약 수립과 관련해서 모세가 세운 제단은 그 언약이 아브라함 언약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증거를 보여준다.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이 지파대로 열 두 기둥을 세우고”(출 24:4).125) 시내산 이후의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도 아브라함과의 최초의 약속을 중심으로 계속된다.  금송아지 문제에 처했을 때, 모세는 아브라함의 언약의 약속 위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한다.  모세의 간청은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근거로 한다.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영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언약에 대한 성서의 기록을 통하여 볼 때에, 언약 관계의 최종 결론으로서 한 구절이 되풀이 된다.  즉,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언약의 임마누엘 원리(Immanuel Principle)이라 부를 수 있다.126) 이런주제는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과의 관계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이 구절은 아브라함 언약의 표적으로서 할례를 행하는 것과 관련되어 창세기 17:7에 나타난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시내산 언약하에서 이 구절은 뚜렷하게 강조되어 자주 나타난다.  출애굽의 구원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씀하신다(출 6:6, 7).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주제는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거하신다는 말로써 특히 전개된다.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거하신다는 사실은 그 의미가 점점 중요하게 전개된다.  장막의 모양이 성전의 모양으로, 또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 옮겨지며, 성육화된 그리스도의 교회, 성도의 최후의 영광으로 발전된다.127)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주제는 한 사람에 의해 실현됨으로서 절정에 이르게 된다.  장막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이 주제는 완전한 성취를 보게 된다.

아이히로트(Walther Eichrodt)에 의하면 아사야 선지자는 이 독특한 주제를 잘 전개하고 있다.  즉 언약의 핵심은 이스라엘의 메시아 대망과 일치되는 것이다.  이 대망은 자기 자신 속에서 언약의 핵심을 구현하고 동시에 메시아로서 사역을 하는 한 개인에게 초점이 맞추어진다.128) 이는한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목적은 결정적인 완성을 보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하나님 왕국의 머리가 되시며 언약의 실현자이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약속이 이 한사람 속에서 구체화된 사실이 된다.129)

 

Ⅵ.선택의 기능

 

하나님의 선택은 주권자의 자유로운 행위의 표현이며 결코 피택자에게 어떤 의무가 있어서 선택한 것이 아니다.  즉, 하나님 이스라엘에서 보신 어떤 점에 영향을 받아 선택하시는 것처럼 밖으로 부터 동기가 된 것이 아니다.  동기가 없는 자유로운 선택이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에서 선택이라는 말이 이스라엘에서 쓰여질 때마다 수동태로 쓰여진 적이 없이 언제나 능동태로 쓰여졌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의미가 있다.  즉, 이스라엘이 선택받은 백성으로 언급된 곳은 없고 선택하신 백성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다.130)  고린도전서 1:26 - 29에 진술된 하나님의 행동의 원칙은 이스라엘 선택에 대한 신약에서의 병행귀절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또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중요한 이유는 이 땅의 모든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축복을 받기 위함이라.  즉, 하나님은 전 인류의 축복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는 것이다.130)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선택에 근거하여 요구하시는 봉사의 주체이다.  다시 말해서 선택을 통한 봉사가 아닌 봉사를 위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선택이란 근본적으로 하나의 특권이기 보다는 책임이므로 이 책임을 저버리게 되면 선택은 형벌의 이유가 될 수 있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암 3:2)

그러므로 아스라엘 선택으로 부터 민족주의, 혹은 우월 민족이라는 민족 개념을 이끌어내는 것은 구약 성서의 분명한 선언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구약성서는 순수한 혈통, 영토나 문화의 통일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구약 성서가 강조하는 것은 하나의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인 것이다.  이스라엘의 선택은 세상만민에게 하나님을 알리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신 첫 역사이다.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다른 민족들과 분리시켰다.  이스라엘의 전역사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구별이 강조되었으나,  이것은 결코 편애에 대한 구약 성서의 표현이라고는 볼 수 없다.  하나님이 주되심을 온 세상에 알리는 선구자로서 하나님께만 계속 소속하고 다스림을 받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로 해석되어져야 한다.131)

페인(J.Barton Payne)은 이스라엘의 선택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하나님의 인간 선택은 당신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다.” (롬 11:36)

성서의 선택은 이중적인 목적이 있다.  1) 방황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요, 2)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섬기는 데 있다(딤 2:14).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선택은 첫째 수단이다.  즉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 그리스도 이전의 사람들이 구원받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 위함이다.  이 특수주의는 특권과 함께 봉사와 선교의 책임이다.132)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선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잃은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함과 동시에 이스라엘을 통하여 메시야가 오시도록 준비하기 위한 수단이다.

선택은 선택받은 자 속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한 구원을 보장해 주지는 않았다.  이것이 구약에 예시되어 있으며 (왕상 19:18; 시 95:8 - 11; 사 1:9; 10:22, 23) 신약에서 더 분명히 나타나 있다.  “이스라엘에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롬 9:6; 9:7 - 13; 11:7 - 10; 히 4:2 - 7) 하지만 주목해야 할 두가지 중요한 점이 있다.  첫째, 비록 민족 선택이 구원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경시되어서는 안된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헬라인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라”(롬 3:1,2).  이스라엘의 선택은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꺼이 자신의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고, 또한 때가 되면 만민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을 이루시려는 하나의 매개체였다(창 12:3; 22:18).  이러한 맥락에서 그리스도가 오셨다(롬 1:3; 9:5; 갈 4:4).  둘째, 민족 선택을 구원을 위한 특수한 선택과 분리해서 생각해서는 안된다.  민족 선택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언제나 구원에 이르는 선택을 받는 사람들이 있었고 민족선택에 의해 부여된 축복과 특권은 특수한 구원이 나타나 그 구원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 주었다.133)

이스라엘이 그 사명을 마침내 다하지 못하여 실격할 때, 이 백성중에서 백성의 사명을 한 몸에 담당하고서 이를 성취하시는 분이 나타나셨다.  그가 그리스도 예수이시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고(마 1:21)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신데(눅 2:32)동시에 이 분에 의해 만민에 대한 축복이 마침내 확립되었던 것이다(눅 2:31, 32).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시작된 교회는 새로이 이 축복을 전하는 사명을 받는 자이다.134)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이스라엘의 선택적 전통의 상속자이다.  기독교회가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계약을 이스라엘 선택적 사건의 상속자가 되었다.135)

초대교회는 예레미야의 새 언약과 관련시켜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새언약을 받아 들였다(히 8:8 - 12; 고후 3:4 - 6).  사도바울은 또한 ‘남은 자’ 사상의 입장에서 교회를 생각했다(롬 9:6; 9:29).136) 베드로는 신자가 하나님의 특혜를 누리는 특수공동체임을 역설한다.  신자는 택한 자요(벧전 1:1 - 2, 12, 25) 세례로 변화된 자이며(벧전 1:14, 18; 4:3)왕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이다(벧전 2:9).  이것은 신자의 신분을 재확인해 주는 것으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특권과 은혜가 신자공동체인 교회에 주어졌다는 것이다.  교회의 특권에는 책임이 따른다.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이러한 신분상의 우대를 해 주시는 근본목적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기 위함이다.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불신자들과는 다른 가치관과 생활원리로 인하여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로부터 발산되는 광채가 이방사회를 밝힘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 선교적 의무가 부여되었다.  유기적 지체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교회가 집단으로서의 제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지 못할 때 동시에 선교적 기능도 상실 하게 된다.137)

 

 

 

Ⅶ.결   론

 


   

구약성서에 나타난 선택사건들 중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아브라함의 선택과 모세를 통한 이스라엘의 선택을 고찰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라고 명하셨다.  이 명령은 단순히 외형적 혹은 육체적인 구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즉, “가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며 그에게 자신을 전폭적으로 위임하라는 요구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은 약속된 미래의 영광을 위하여 현재의 즐거움을 포기하며 나아간 것이다.

아브라함의 선택에 부가된 언약으로서 후손의 약속, 땅의 약속, 축복의 약속을 살펴보았다.  이 약속들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라고 볼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전체적인 구원의 목적에 관련해서 이 약속들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사건은 하나님의 은총의 행위이다.  하나님은 구원하시기 위해 연약한 상태에 처해 있는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애굽에서 노예상태로 있는 그들을 구원하셨다.  이스라엘의 선택은 이스라엘 백성이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영광과 주되심을 세상에 나타내게 하려고 그들을 만인으로 부터 구별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사 그 자신을 이스라엘에게 나타내시고 이스라엘을 통해 열방들에게 그 자신을 나타내신다.

이처럼 구약에서의 선택 사건은 처음에는 개인적인 선택으로 이루어져 나가다가, 다음에 민족의 선택인 이스라엘의 선택에서 절정을 이룬다.  아브라함의 선택 사건과 이스라엘의 선택 사건은 동일한 하나님의 통일성 있는 선택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안에서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셨다.  즉, 아브라함이 땅의 모든 족속들을 위한 복의 근원이 되게 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제사장 나라가 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세계를 위해서이다.  따라서, 제사장의 역할을 알면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제사장의 엄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과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중재자로서 제사 업무를 수행하는 일이다.  즉, 제사장이란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과 백성을 위한 봉사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제사장 나라로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외의 세계 모든 나라를 위한 제사장적인 봉사의 일을 위해 선택된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기를 자랑하며 하나님을 높이지 않고 불의를 행하므로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해 실격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민족의 사명을 한 몸에 담당하고서 이를 성취하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시작된 교회는 새로이 구원의 역사를 이룩하기 위한 이스라엘 민족의 상속자로 등장했다.

교회는 자기를 사랑하는 일 없이, 자기 위해 사는 일 없이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세상에 쓰이는 때 선민이며, 계속될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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