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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주일낮설교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봅시다 (August Sunday Sermon) 


제목 : 유혹 앞에서

성경 : 마4:1-11

 

1.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요즘에 보면 상대적 빈곤감 또는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절대적으로 보면 즉 실제로는 빈곤한 게 아닌데 많이 가진 자들과 비교하며 상대적으로 가난하게 여기고 박탈감을 느끼면 불평불만을 하게 되고 그래서 자존감도 잃어버리고 진짜로 가난한 자처럼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바보 같은 일입니까? 실상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는데 하필이면 없는 것을 가지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남이 가진 것을 보면서 시기하고 질투하며 가지고 있는 것도 누리지 못하고 진짜로 가난한 자처럼 기쁨을 모르고 산다면 이렇게 어리석은 일이 어딨습니까?

그럼 왜 그렇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꾸 남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월급 200만원도 못 받는데 남이 300만원 500만원 1,000만원 받으니까 저 사람은 무슨 복이 많아서 머리가 좋아서 일류대학 나와 대기업에 들어가고 출세하여 잘먹고 잘사나, 저 사람은 무슨 복이 많아서 부잣집에 태어나서 저렇게 좋은 조건 속에서 온갖 좋은 혜택을 누리며 잘먹고 잘사는데 나는 왜 쎄가 빠지게 일해도 이 모양인가 하면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저항하고 시비를 걸고 그래서 결국 스스로 자존감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그러면 안됩니다. 남이 월급을 1,000만을 받든 1억을 받든, 대궐 같은 집에서 호의호식하며 온갖 사치를 누리든 그런 거 배 아파하지 말고 그냥 하나님 앞에서 믿음 안에서 성실하게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서 누리고 있는 것 자체를 보면 우리는 결코 가난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힘든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나 이 정도면 먹고 살만한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라고 하셨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영원한 영광까지 주셨습니다. 그럼 됐지 자꾸 더 바라고 욕심을 내고 비교하며 원망하고 불평하고 근심하고 걱정하고 그럴 일이 뭐 있습니까? 그러면 그럴수록 행복은 자꾸 도망가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요즘 세상이 그렇지를 못합니다. 완전히 물질만능주의에 빠져서 그저 좋은 집에서 좋은 것 먹으며 좋은 옷 입고 많은 것을 소유하면 행복할 줄 압니다. 그래서 죽어라하고 돈돈돈 경제경제경제하면서 온통 관심의 초점을 돈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 물질적 외형적인 것만 남과 비교하며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너무나 많은 갈등과 상처와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게 바로 마귀사탄의 역사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마치 옛날에 나라에 시끄러운 일이 있으면 소위 북풍이라고하여 작은 일을 크게 부풀리든지 없는 일을 만들든지하여 북한 공산당이 무슨 큰 일을 저지른 것처럼 하여 국민들의 관심의 초점을 그쪽으로 돌리게 함으로 시끄러운 일을 잊어버리게 하려고 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귀사탄이 우리의 관심을 온통 돈에게 두게 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믿음이니 사랑이니 진리니 의니 선이니 이런 것에 눈을 돌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런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잘먹고 잘살면 장땡이라고 여기며 예수님도 안 믿고, 심지어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예수님보다 돈을 좋게 여기게 만들어 자꾸 당장에 눈앞에 보이는 돈을 따라감으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해서 깨어 기도하며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마귀 사탄의 유혹에 속지 말고 진리를 따라 살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엡5:16~18절을 보겠습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여러분, 보세요. 세월이 선하다고 했습니까? 악하다고 했습니까? 악하다고 했습니다. 악한 게 뭡니까? 죄와 무지 속에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저 돈과 명예와 권력과 세상 즐거움에 빠져 사망 길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러니까 우리는 주님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알려면 세상의 것에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올바르게 판단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거짓되고 왜곡된 것들을 물리치고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왜곡된 가치관이 만연된 세상에서 정말 깨어 기도하며 말씀에 귀를 기울임으로 올바른 영성을 가지고 모든 왜곡된 가치관과 유혹을 바르게 분별하고 물리치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까?

2.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왜곡되고 유혹 많은 세상에서 진정한 승리자가 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조건은 오직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하지요.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시기 때문에 오직 예수님 안에 있을 때만이 세상의 모든 죄와 유혹과 왜곡된 가치관과 악한 것들을 올바르게 분별하고 물리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런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는데요,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신 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그 더럽고 추하고 악한 마귀 따위에게 시험을 받을 수 있습니까?

물론 왜 이유가 없겠습니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이 마귀의 권세를 무너뜨리는 분임을 명백히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최초의 인간 아담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이 되었는데 예수님은 사탄의 권세와 유혹을 물리침으로 마귀에게 저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을 살리러 오신 분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함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능동적으로 시험에 임하셔서 사탄을 호통을 쳐서 쫓아내심으로 사탄의 권세룰 물리치고 우리를 구원해 주실 유일한 분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마귀에게 속아 죄와 무지 가운데 빠진 인생은 결코 자기 힘으로는 죄와 사탄의 권세를 이길 수 없습니다. 선이나 진리나 의에 대한 온전한 분별력도 없고, 악을 이길 힘도 없습니다. 자신이건 남이건 죄과 마귀와 지옥의 권세에서 건져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의 지식이나 과학이나 다른 어떤 능력이나 지혜로도 안됩니다. 이 일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으나사나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임으로 그 안에 있으면 안전한 것입니다. 사탄 마귀가 넘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설령 사탄 마귀가 도전해도 주님의 능력으로 이기게 됩니다. 사탄 마귀가 어떻게 교묘하게 유혹하고 시험하고 도전해도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분별하고 물리치게 됩니다. 세상의 왜곡되고 그럴듯한 가치관에 속지도 않고 물질이나 권력이나 명예 따위에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세상의 물결이 아무리 거세게 밀려와도 휩쓸려가지 않습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그런 것들을 이기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위로와 기쁨과 자유와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15:5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든지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서 그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심으로 세상의 모든 죄와 사탄의 권세를 이기고 생명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물질의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가장 먼저 이겨내야 할 시험은 물질의 시험입니다. 사탄은 온갖 방법으로 교묘하게 우리를 유혹하는데 가장 흔한 것이 물질을 통한 유혹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간사한 마귀가 심지어 예수님께도 물질을 가지고 장난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즉 40일 동안이나 금식하여 주리신 예수님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린 배도 채워서 좋고 권능을 보여주면 하나님의 아들임이 증명될 거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그런 수작이 예수님께 통할 리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말을 듣고 사탄을 꾸짖습니다. 마4:4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한마디로 떡 즉 물질이 우리를 지배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물질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좌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 영생복락의 말씀인데 그 말씀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고 썩어 없어질 물질이 지배하면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생명의 길도 진리의 길도 모르고 썩어 없어질 물질만 따라가다가 영원한 멸망길로 가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내가 배가 고프고 힘든 건 사실이지만 너 따위의 말은 들을 수 없다며 사탄의 교묘한 물질적 유혹을 일축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물질은 요긴한 것이긴 하지만 절대로 물질이 내 삶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물질적 가치에 의하여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이 좌우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과 그 말씀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당연히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 세상은 물질지상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사람들의 삶이 믿음이나 사랑이나 진리나 의보다는 물질에 의하여 좌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물질 때문에 싸우고, 때리고 심지어 죽이기도 합니다. 물질 때문에 이웃과 친구와 심지어는 가족 간의 관계가 파괴될 때가 많습니다. 믿는 사람들도 물질 때문에 신앙생활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풍조가 세상을 뒤덮고 있어서 그게 도리어 정상인 것처럼 여겨질 지경입니다. 그러나 물론 말할 것도 없이 그건 속고 있는 것입니다. 껍데기에 인생을 거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 껍데기에 지배당하는 인생은 당연히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세상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 지를 잊지 알고 더욱 깨어 기도하며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며 말씀으로 무장하여 물질보다 오직 주님을 앞세우시기 바랍니다. 물질적 이해관계에 의하여 내 삶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말씀과 믿음과 사랑과 진리와 선과 의의 참된 가치를 앞세우고 주님과 동행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참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명예의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여러분, 마귀는 물질적 시험에 실패하자 이번에는 예수님의 명예욕을 자극시켜며 유혹합니다. 즉 성전 꼭대기로 가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너를 붙들어 다치지 않게 하실 것이고, 그러면 너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웅대접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그런 수작에 넘어갈 분이 아니시죠. 그래서 또 마귀를 꾸짖습니다. 마4:7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내가 너 따위의 말을 듣고 여기서 뛰어 내린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게다가 여기서 뛰어 내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이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사탄 따위의 말을 듣고 뛰어 내린다는 것 자체가 그 말에 순종하는 것이니 수치가 아니겠습니까? 설령 뛰어 내려서 좋은 결과가 있다고 할지라도 마귀의 말에 따라서 행동한다는 것 그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여러분, 우리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한다면 그게 바로 사탄의 말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설령 돈보따리가 생긴다해도 마귀 따위의 말에 순종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마귀의 말에 의해서든 아니면 자기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서든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로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전에서 뛰어 내리는 행위는 하나님의 뜻도 하나님의 방법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적이 있다면 마귀의 말처럼 뛰어내릴 때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면 자신이 영웅이 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런 방법으로 명예를 주지는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방법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갈 때에 명예를 주는 것이지 영웅심리를 가지고 쓸데없이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지켜 줌으로 영웅이 되게 하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게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이 지켜 주실 만한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그렇게 해 주실지 안 해 주실지 한번 테스트해보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무모하게 행동하면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 뜻 안에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말씀에 합당하게 믿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합니다. 이게 올바른 믿음이고 그럴 때 하나님께서 명예와 영광도 아울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기본적으로 먹고 마시는 것을 비롯하여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교회에서나 무엇을 하든 오직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코 영웅심리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하여 무언가를 행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함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 속에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명예도 얻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영적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시험이 실패로 끝나자 마지막으로 사단은 세상의 권세를 가지고 영적으로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높은 산으로 가서 예수님에게 천하만국을 보여주면서 자신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을 모두 주겠다는 것입니다. 즉 그저 눈 한번 질끈 감고 자신에게 절하면 세상만국을 다 주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탄이 그럴만한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지 까짓 게 무슨 그런 권세가 있습니까? 그저 예수님이 지금 40일동안이나 전혀 아무것도 안 잡수시고 약해져 있으니까 이 약해진 틈을 노려 어떻게든 예수님을 넘어트리려고 술수를 쓰고 있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수작이 예수님께 어떻게 씨알머리나 먹히겠습니까? 예수님은 사탄을 향해 호통을 치십니다. 마4:10절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내 지금 비록 힘이 들어도 어딜 감히 나한테 수작을 부리느냐? 오직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실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거늘 어찌 더럽고 추하고 악한 너 따위에게 경배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사탄은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나에게 절하라. 그러면 천하만국 즉 명예와 권세와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온갖 우상을 섬기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돈과 명예와 권세와 세상 즐거움을 미끼로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신은 없다고도 했다가 신은 똑같다고 하면 믿지 말든지 아무거나 적당히 믿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머니가 최고다. 돈과 명예와 권력에 행복이 있다. 그걸 소유하라. 그러면 행복하리라고 하면서 우리를 미혹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 그 길로 갑니다. 자기 생각대로 갑니다. 그저 돈돈돈 경제경제경제 하면서 삽니다. 그게 바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모습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볼때에 보기에도 탐스럽고 먹음직스럽고 먹으면 뭔가 지혜와 생기를 얻을 것처럼 보여 덜커덕 따 먹음으로 죄의 굴레를 뒤집어썼던 것처럼 지금은 더 크고 더 좋은 선악과들이 세상에 널려 있어서 사람들이 그런 것들에게 쉽사리 걸려들어 선악과 따먹으며 죄의 길로,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그 소리에 속으면 안됩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향락이나 세상의 가치관 앞에 무릎을 꿇으면 안됩니다. 그건 죽음의 길입니다. 오직 우리가 경배해야할 분은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뿐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뿐입니다. 세상의 돈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명예나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생명과 기쁨과 은혜를 주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이 모든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특별히 사순절을 보내면서 더욱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묵상함으로 성령의 능력과 지혜를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육체적, 정신적, 영적 시험을 이기고 온전히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능력을 온전히 맛보며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신 생명의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가 갈 수 이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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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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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주일오전예배설교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봅시다 (August Sunday Sermon)

제목 :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봅시다

말씀 : 벧후3:8~13

 

1.인간은 주인이 아닙니다.

여러분,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야 야 야 내 나이가 어때서.... 세월아 비켜라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여기서 사랑이란 물론 하나님 사랑이나 이웃 사랑이 아니라 물론 남녀간의 사랑이겠죠. 물론 뭐 나이가 좀 있다고 너무 나이 타령만하지 말고 열심히 사랑도 하고, 활기차게 살아보자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전 솔직히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을 보면 좀 측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실은 그 내면 속에는 마음은 청춘인데 나이는 속일 수 없어 애석해하는 마음이 내포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억지로 내 나이가 어때서 노래를 하면서 나이를 이겨 보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다는 거죠. 물론 의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자신의 내면에서 자신에게 최면을 걸어 나이를 이겨 보려는 마음이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별 것 아닌 것에 미련을 두고 늙기 싫어서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아 애처롭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혹시 하나님 일 하기에 딱 좋은 나인데 그러면 몰라도.... 또 백세인생이라는 노래가 있더라고요.

육십 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라

칠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할 일이 아직 남아 못 간다고 전해라

팔십 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쓸만해서 못간다고 전해라

구십 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알아서 갈테니 재촉말라 전해라

백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좋은날 좋은 시에 간다고 전해라

여러분, 어떻습니까? 재밌습니까? 그런데 이건 올바른 기독교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재미있는 노래가 아닙니다. 안 그래요? 누구 맘대로 아직 못가고, 누구 맘대로 알아서 가고, 누구 맘대로 좋은 날 좋은 시에 갑니까? 여러분, 이건 완전히 뉴에이지 사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노래입니다. 뉴에이지는 새시대란 뜻인데 좋은 뜻으로 새시대가 아닙니다. 완전히 인본주의적인 새시대입니다. 옛날에는 인간이 무지해서 신의 지배를 받았는데 이제 신에게 속박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우주의 주인으로 인간의 이성과 능력과 지식으로 세상을 지배하며 얼마든지 좋은 세상 만들어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열심히 자기를 갈고 닦으면 고차원적인 세계를 누릴 있는데 그게 구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노래가 바로 이런 사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감히 누구한테 못간다고 전합니까? 한번 훅 불면 끝날 존재가 감히 누구맘대로 가고 싶으면 가고 안가고 싶으면 안갑니까? 물론 그냥 좋은 시절 오래살고 싶은 소망이 담겨져 있는 노래라고 가볍게 치부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이 노래의 가사를 보면 인간이 자기가 주인이 되어 제맘대로 오래오래 세상 것 실컷 즐기며 잘먹고 잘살고 싶은 마음을 노래하고 있는데 그게 바로 뉴에이지적 발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인생은 내 마음대로 왔다가 내 마음대로 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 와서 하나님의 뜻대로 주어진 시간 동안 살다가 언제라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가야할 존재입니다. 눅12:20절 보세요.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또 약4:14절을 보십시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그러니까 인간은 정상적인 수명을 누린다해도 극히 짧은 시간에 불과하고 게다가 지금이라도 부르면 꼼짝없이 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그저 자기 한몸 잘먹고 잘살기 위하여 제아무리 기를 쓰고 모아봤자 하나님이 데려가시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니 단순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심판의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저 자신의 무지하고 왜곡된 생각과 가치관 속에서 자기 육신의 안일함과 평안함과 부귀영화를 위하여 사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지 말고 오직 겸손하게 엎드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바르게 삶으로 여기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고 언제라도 부르시면 할렐루야 찬양하면서 영광의 나라로 가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는 정말 작은 존재요, 세상의 것은 금방 다 썩어지고 없어질 것이요 우리는 곧 하나님 앞에 가야할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과 사랑과 선과 의가운데 주님과 동행함으로 여기서도 진정한 소망과 기쁨가운데 살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주님은 반드시 재림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로 이러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요, 먼저 오늘 8,9절을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니까 세상의 많은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그 짧고 보잘것없는 지식과 생각을 가지고 ‘천국도 없고, 주의 재림도 없다.’ 그러는데 지극히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주님이 반드시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다시 오시는 것만이 아니라 다시 오셔서 모든 인류를 심판하시고 믿음 안에서 의를 따라 산 사람들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시고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진노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때를 바라보며 우리에게 주어진 기간들을 오직 믿음과 선과 진실로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맞을 준비하는 삶을 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다시 오시고, 다시 오실 때 우주의 종말이 옵니다. 그리고 세상을 심판하시고 믿음을 따라 산 사람들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십니다. 그렇지 못한 자들은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영벌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의 그 짧고 무지한 이성과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생각하고 판단하며 이걸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무슨 꾸며낸 이야기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건 순전히 인간이 죄와 무지 가운데 있어서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단순히 인간의 이성과 경험과 지식으로 본다면 천국이나 재림이나 지옥이나 이런 것들은 말도 안됩니다. 도무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게 바로 인간의 이성과 지식의 한계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인간의 이성과 지식과 경험과 과학과 논리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우주의 모든 물질과 경험과 지식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짧은 지식과 경험과 고학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이 말씀하신 천국과 지옥을 판단하려고 한다면 이건 벌레가 사람을 판단하려는 것보다도 더 어리석고 미련한 생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의 시기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예수님이 곧 오실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할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금방 오신다면 말씀을 기록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10년, 20년, 30년, 50년이 지나도 오시지 않자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주님의 말씀을 기록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지가 벌써 2,000년이 지났는데도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신다 오신다 그러더니 벌써 2,000년이 지났는데 봐라 아직도 안 오시지 않느냐? 그런데 재림은 무슨 재림이냐?’ 하면서 조롱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도 역시 인간의 무지몽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오늘 8절 보십시오.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하셨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길어봐야 100년 밖에 살지 못하는 우리로서는 천년이 엄청난 시간이지만 영원하신 하나님께는 순간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기준으로 빨리 오시니, 오시지 않느니 하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알지 못하고 떠들어대는 우매하기 짝이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눈으로 주님의 재림이 지연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상황에 대하여 우리가 또 한가지 생각할 것은 그것은 지연이 아니라 주님이 한 영혼이라도 더 기회를 주시기 위하여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9절 말씀에서 말씀하고 계신 것처럼 더딘 것이 아니라 한 영혼이라도 멸망의 길로 가지 않고 회개하고 구원받도록 기회를 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마냥 기다리고 계시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주님의 때에 주님이 정한 수가 차면 천군천사를 대동하고 큰 나팔소리와 함께 영광 중에 강림하셔서 심판할 자를 심판하고 구원할 자를 구원하십니다. 그날 결국 우주의 종말이 오고 기존의 질서는 완전히 사라지고 신천신지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우리는 모든 고통과 아픔과 슬픔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24:30절에 보면 주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함께 보겠습니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그 짧고 무지하고 한계속에 있는 생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말씀과 은혜와 시간에 초점을 맞추고 주님의 때를 기다리면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 다시 오실 때에 할렐루야 찬앙하며 영광을 돌려 드리고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이 반드시 있을 것을 알고 믿고 살아야 하고 그렇게 주님의 재림과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을 것을 믿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경건한 삶이 있어야 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일단은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당연히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거룩한 나라이기 때문에 그곳에 들어가려면 거룩한 삶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거룩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예수님 믿고 옛 자아가 죽고 거듭나 천국백성이 되면 마땅히 천국백성의 삶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들인데 거듭났다고 하면서 옛 모습 그대로 살아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 믿고 거듭나 생각과 가치관과 목적과 방향이 다른 사람들이 아닙니까? 목적과 방향이 다른데 세상 사람들과 같이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 11절에서 말씀하시 ㄴ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즉 예수님이 오실 것이고 그러면 새 하늘과 새 땅이 건설될 터인데 이것을 알고 믿는다면 거룩하고 경건함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가지 못하면 하나님이 욕을 먹게 되고, 교회가 조롱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우리가 도리어 하나님 나라의 문을 막고 있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거룩하게 아름답게 진실하게 의롭게 살아가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도 세상에서 인정받고 귀히 여김 받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도 저절로 이루어 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12:1절에서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올바른 예배생활 가운데 진실하게 성실하게 의롭게 선을 행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 자신이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귀하게 쓰임 받으며, 주께 영광을 돌려 드리며, 사람들에게도 감동감화를 줌으로 그들을 주님 품으로 인도하는 삶을 살다가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잘했다 칭찬받고 상급 받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동시에 새 하늘과 새 땅에 소망을 두고 사모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사모합니까? 좋은 것을 사모하지 않습니까? 세상에 좋지 않을 것을 바라고 사모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정말로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그야말로 오직 영광과 기쁨과 은혜만이 가득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야말로 지상낙원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거기에 소망을 두고 감사와 기쁨과 희망으로 주님과 동행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12,13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여러분, 정말 당연하지 않습니까? 오직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의 진정하고 완전하고 영원한 소망이요 기쁨이요 행복이 아닙니까? 정말 도대체 세상의 무엇이 우리에게 참되고 영원하고 온전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주겠습니까? 물론 세상에도 그런대로 상대적으로 좋은 것도 있고 사모할 것도 있고 바라볼 것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 행복과 기쁨을 주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정말 별거 아닙니다. 온전한 생명의 기쁨을 주지도 못하고 그나마 잠시잠깐후면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니 그런 걸 바라보며 산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게다가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진정한 소망과 위로와 기쁨과 평안을 주는 곳은 천국을 바라보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말할 것도 없이 그저 세상의 것에 소망이 있고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는 줄 알고 죽자 사자 그것만을 따라가게 됩니다. 그 썩어 없어질 세상의 것들에게 인생을 바치게 되고 세상의 것들의 노예가 되어 참된 행복과 안식도 누리지 못하고 그러다가 결국 영원한 형벌가운데 처하는 불쌍한 인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 그 나라를 향하여 하게 되고, 그러면 자연히 거룩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삶을 향하여 나아가게 됩니다.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어도 얼마든지 이기게 됩니다. 세상 풍조에 휩쓸리지도 않고, 모든 욕심과 욕망과 원망 불평 미움 근심 걱정에서도 벗어나게 됩니다. 물질과 사람과 세상 영광과 명예와 죄로부터 자유하게 되고, 설령 나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조차도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이 땅에서도 천국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다가 진정하고 영원하고 완전한 새 하늘과 새 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자기가 주인공이고 자기가 다 아는 것처럼 자기 생각과 지식과 경험을 따라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댄다고 해도, 자기 마음대로 고집대로 물질주의 이기주의에 빠져 그저 먹고 마시고 즐기며 산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현혹되지 말고 오직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머잖아 오시든지 아니면 내가 먼저 주님 품으로 가든지 이제 곧 우리는 주님 앞에 서게 되고, 그 때에 행한대로 심판받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며 거룩하게 의롭게 진실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혹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세상의 모든 것들은 머잖아 종말을 고하고 완전하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인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진다는 것을 기억하며 그것을 바라보고 소망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소망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그 소망으로 세상의 것에 얽매이지도 말고 진정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를 얻으므로 여기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껏 누리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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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주일낮설교/사랑의 십자가 ( August Sunday Sermon)

제목 : 사랑의 십자가

말씀 : 마27:38-44

 


1.우리의 저주를 대신한 주님의 십자가

 


여러분,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사실은 저주의 상징입니다. 끔찍한 고난의 상징입니다. 그러면 왜 그런 저주받은 십자가가 교회의 상징이 되었습니까? 말할나위없이 우리의 저주를 대신한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지옥의 저주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고전1:18에서는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 즉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시는 것만이 우리를 모든 죄와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건져주는 유일한 능력이요 힘이요 지혜라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무슨 다른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다른 방법이 있다면 예수님인들 왜 십자가를 지고 싶으셨겠습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어떻게 기도하셨습니까?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셨기에 그 저주받은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다른 무슨 방법으로 인류의 죄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돈으로 할까요? 지식으로 할까요? 과학으로 할까요? 윤리도덕으로 할까요? 다른 어떤 방법도 없습니다. 오직 죄없고 흠 없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만 죄를 용서 받을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모릅니다. 아니 자신들이 죄가운데 있다는 사실 조차 모릅니다. 다 자기가 잘나고 똑똑하다고 옳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죄와 무지가운데 있다는 사실은 새까맣게 모르고 천국이 있네 없네, 아무거나 믿으면 좋은 데 가네 마네하며 떠듭니다. 누구 맘대로 그럽니까? 참 안타깝고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요. 그러니 반대로 이 놀라운 생명의 비밀을 알고 믿고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된 우리는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다행이고 얼마나 영광입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나같은 죄인을 위하여 그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려드리며 겸손히 동행할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주님의 영광 나타내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렇게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이 놀라운 은총을 입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2.죄를 미워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의 은총을 받은 우리는 죽을 때까지 감사하고 영광돌리고 찬양해야 하는 것을 말할 것도 없고 동시에 죄를 미워하고 멀리해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 놈의 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옥으로 가고 있습니까? 그 놈의 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아픔과 상처를 받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 놈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그렇게 참혹한 죽음을 당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어떻게 죄를 가까이 할 수 있습니까? 얼마나 죄를 혐오하고 멀리해야 되겠습니까? 정말 그렇잖아요? 그 놈의 죄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지옥가게 되고 지금 여기서도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받게 되고 그래서 주님이 우리가 받을 벌을 대신 받으시려고 그 끔찍하고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는데 어떻게 우리가 그 흉악하기 짝이 없는 죄를 가까이 할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면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은 아닌지 하면서 좀 걱정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끔찍한 죽음을 당하심으로 생명을 얻었는지를 망각하고 마치 구원이 거저 얻어진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구원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지 못하니까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죄에 대하여 무감각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것도 그렇지 않습니까? 거저 얻어진 것은 귀한 줄을 모릅니다. 귀한 줄을 모르면 감사할 줄도 모르고 또 가치 없이 막 써버립니다. 그래서 부자집 자녀들은 돈 귀한 줄 모르고 감사할 줄도 모르고 흔전만전 써버리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우리가 얻은 이 영원한 생명이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주어진 것인지를 알면 절대로 우리가 얻은 구원을 조금이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거나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여 죄를 가까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짜 안 그래요? 여러분, 여러분은 온갖 썩은 냄새와 똥냄새가 풀풀나고 구더기가 들끓는 그런 더럽고 추하고 혐오스러운 곳을 가까이 하겠습니까? 또는 사자가 나를 잡아먹으려고 으르렁거리며 대드는데 그곳으로 가까이 가겠습니까?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도망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죄는 이보다 더 더럽고 악하고 사납고 흉악한 것인데 어찌 그것을 가까이 하겠습니까? 그래서 약4: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사순절 특별히 오늘 고난 주일을 맞이하여 먼저 그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신 주님께 정말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려드리며 동시에 정말 죄를 미워하고 멀리하고 오직 주님을 가까이 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넘쳐나는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의 은총을 기억할 때에 우리가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시기 위하여 온갖 저주와 멸시와 천대와 조롱과 고난을 당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주님이 그토록 원하셨던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그 온갖 저주와 멸시와 천대와 조롱과 고난과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이 사실을 몰랐으면 몰라도 죄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그래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주님이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당하셨는지, 그리고 처절한 고통을 통해서 주신 생명이 얼마나 고귀한 줄 안다면 우리가 어찌 생명의 역사를 위한 일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너무나 끔찍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로마의 병정들이 무지막지하게 휘두르는 채찍에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넘어지고 쓰러지면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셔서 십자가에 손과 발에 대못이 박혀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런 육체적 고난 뿐 아니라 주님은 온갖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당했습니다. ①로마 병정들은 사정없이 때린 후에 가시면류관을 씌우고, 홍포를 입히고, 침을 뱉으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하면서 조롱하고 멸시했습니다. ②유대종교지도자들은 눈을 가리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뺨을 치며 너를 친 자가 누구인지 알아맞혀 보라면서 조롱했습니다. ③불과 며칠전만 해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면서 환호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④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있을 때는 지나가는 사람들은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면서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⑤심지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있는 강도들도 네가 그리스도라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며 모욕했습니다. 이런 참혹하고 끔찍하고 처절한 고통을 통하여 우리 죄가 용서되어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이 놀라운 은혜를 입은 우리는 백번 천번 만번 죽어도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야하지 않습니까? 또 그냥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면서 그 은혜만을 누리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래서 주님이 그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얼마나 처절한 고통을 당하신 것을 안다면 어찌 그냥 편히 앉아 은혜만 누리고 있을 수가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16:24절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정말 백번 죽고 또 죽어도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도 주님의 그 거룩한 생명의 역사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게 주님의 은혜를 덧입은 자의 마땅한 의무이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일이고 우리 자신이 더욱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길입니다.

물론 주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아직도 마귀사탄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죄와 무지 가운데서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이기주의와 인본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라 생명의 역사를 이루는 일에 참여하려면 이러한 모든 마귀사탄의 역사와 세상의 물결을 거슬러 올러가야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을 부인하며 육신의 안일함과 평안함과 즐거움만을 향하여 가던 길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세상의 돈과 명예와 권세와 세상 즐거움보다는 선과 진리와 의를 따르며 주님의 거룩한 역사를 위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과 정열을 받쳐야 합니다. 열심히 모여 깨어 기도하고 말씀 묵상함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을 베풀어야 하고 전도도 해야 하고 거룩한 삶을 영위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역사에 참여한다는 것은 쉽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생명의 은총을 덧입은 자들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그것이 가장 아름답고 복되고 고귀하고 영화로운 삶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고,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자신도 정말 세상이 주지 못하는 참된 기쁨과 은혜와 가치를 누리며 살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정말 복되고 아름답고 고귀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고난주일을 맞이하여 또 오늘 성찬식을 행하면서 우리는 주님의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며 주님이 당하신 그 처절한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며 주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려드리시기 바랍니다. 정말 죄를 멀리하고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며 우리 각자에게 주신 십자가를 기쁨으로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땅위에 생명의 역사를 아름답게 이루어가며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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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주일낮설교/기쁨이 충만한 인생( August Sunday Sermon)

제목 : 기쁨이 충만한 인생

말씀 : 요15:5~11

 

1.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모든 부모들은 한결같이 자녀들이 기쁘고 즐겁고 감사하며 의롭게 선하게 아름답고 복된 가정도 이루고 서로 사랑하며 아껴주며 복되게 살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어떤 부모도 자녀가 슬프게 고통스럽게 원망하고 짜증내고 싸우고 죄짓고 무가치하게 살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시겠습니까? 물어보나마마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이 행복하고 기쁘고 감사하고 선하게 의롭게 아름답게 살기를 바라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여러분들이 그저 자나깨나 내 새끼 잘되고 밝게 기쁘게 감사하며 살기를 바라는 것처럼 우리 하나님도 우리가 정말 늘 기쁘고 즐겁고 감사하며 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구원이 뭡니까? 죄와 무지와 어둠과 슬픔과 고통에서 건져주어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이 뭡니까? 물론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감사와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물론 우리가 모든 죄와 고통과 불안과 미움과 저주 속에서 해방되어 선과 진리와 의 속에서 참된 기쁨과 평안과 은혜의 삶을 살게 해 주시기 위한 것이지요. 이게 주님이 오신 목적이고 이게 천국의 삶이고 이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내는 삶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 믿고 구원받았으면 그 은혜를 누리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선과 진리와 의 가운데 감사하며 기뻐하며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며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천국은 죽어서만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도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여기서의 천국은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이 내 안에 있으면 천국의 모형을 맛보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천국에 근접한 삶을 살아다가 죽어서 완전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진정한 구원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주 말씀드렸지만 예수님께서 눅17:20,21절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천국은 이미 우리 안에 도래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1절 말씀에서는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안에서 맺을 열매는 뭡니까? 물론 생명과 기쁨과 자유와 평안과 사랑 등의 주님이 주시는 온갖 좋은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면 이러한 내가 주는 온갖 좋은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될 것이므로 너희가 생명의 기쁨이 넘치는 복된 삶을 살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16:1절에서는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정말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도말하시고, 무덤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온전히 심령 속에 모셔들이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 지금 여기서도 주님이 주시는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면서 주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

2.온전히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미 앞에서 얼마간 언급이 되었지만 우리가 진정한 기쁨의 삶을 살려면 말할 나위 없이 온전히 예수님을 심령 속에 모셔들이고 예수님 안에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확실히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뭐 지극히 당연한 거 아닙니까? 주님이 누구십니까?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모든 마귀 사탄과 어둠의 세력들 물리쳐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 안에 있으면 그런 은혜들을 누리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안 그래요? 어두운 곳에 있으면 왠지 불안하고 두렵지 않습니까? 반대로 빛 가운데 있으면 마음이 밝아지고 따뜻해지고 편안해지지 않습니까? 따뜻한 곳에 있으면 따뜻하고 추운 곳에 있으면 춥습니다. 상처와 고통과 아픔이 있는 곳에 있으면 마음이 슬퍼지고,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한 곳에 가면 나도 덩달아 마음이 기뻐지지 않습니까? 분위기가 험악하거나 어두침침한 곳에 있으면 두려움이 생기고, 뭔가 음침하고 더러운 곳에 있으면 영혼이 더러워져 집니다. 그러나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곳에 가면 나도 은혜가 넘치게 되고, 깨끗하고 정결한 곳에 가면 마음이 정화가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인생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빛이신 예수님 안에 있으면 어찌 예수님 안에 있는 그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누리기 못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좌우단간 어찌하든지 죽으나사나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약4:8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즉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자꾸 세상의 것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갈리게 하지 말고 어찌하든 하나님을 향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가까이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해 주시면 당연히 하나님안에 있는 그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은 저절로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바로 그런 말씀입니다. 오늘말씀에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은 포도나무이시고 우리는 가지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가지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건 말하나마나 죽으나사나 나무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삽니다. 그래야 영양분을 공급받습니다. 그래야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안 그러면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으나사나 우리의 줄기이신 즉 우리의 근본이며 기초이며 생명의 주권자이시며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로부터 영적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좋은 것들을 충분하게 공급받음으로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고 잎이 싱싱해지고 꽃이 실하게 피고 충실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5,6절에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주님 안에 있으면 주님이 주시는 능력과 지혜로 생명의 풍성한 열매를 맺어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지가 줄기를 떠나면 말할 것도 말라 죽게 되고 그러면 아무 쓸모없어 불태워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으나사나 예수님께 붙어 있어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온전히 예수님께 착 달라붙어서 온전히 주님과 동행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그 생명의 은혜를 풍성하게 받아 누리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 주님께 딱 달라 붙어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건 여러분 7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7절 보겠습니다. “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보세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고, 동시에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그러면 너희가 구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무른 말씀입니까? 내가 너희 안에 거한다면 내 말도 너희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든 원하는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면 주님의 말씀도 당연히 우리 안에 거해야 하고 그러면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게 되고 그러면 주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으나사나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야 하고, 예수님을 모시고 산다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다. 이건 좀 추상적이예요. 예수님이 내 안에 있다는 걸 보여줄 수도 없고, 만져 볼 수도 없고, 예수님의 음성을 직접 들어 볼 수도 없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압니까?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선과 진리와 의와 거룩을 따르고 그러면 그게 바로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으나사나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모든 생각과 판단과 가치와 행동과 삶의 잣대여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 있는 삶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가까이하는 자의 삶이요, 예수님과 동행하는 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럴 때 진정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1:2,3절에서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죽으나사나 주님을 심령속에 온전히 모셔들이고, 주님을 모셔들였으면 더 이상 세상의 헛되고 왜곡된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지 말고 오직 유일한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시며 인생의 유일한 등불이며 기준이며 안내자인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은혜와 기쁨과 평안과 위로가 넘쳐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어떤 은총을 누리게 됩니까?

3.천국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자는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천국은 두가지 천국이 있고, 예수님 믿는 사람은 이 두가지 천국을 동시에 누리게 됩니다.

물론 1차적으로 누릴 천국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입니다. 예수님 믿으면 죄에서 해방되고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마귀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래서 지옥 백성에서 천국백성으로 옮겨집니다. 그래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시급한 문제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천지가 개벽을 해도 이것만은 먼저 얻어놔야 합니다. 그까짓 세상적인 부귀영화 영광 명예 아무리 얻어 놔봤자 별것 아닙니다. 진정한 생명의 은혜도, 영광의 나라도, 진정하고 영원한 자유와 평안과 기쁨과 소망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에게 완전한 생명의 은총을 주십니다. 영광의 나라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예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예수님이 믿고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 다음 두 번째 천국은 지금 여기서 누리는 천국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은혜받고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능력과 지혜와 은혜를 주셔서 세상의 모든 어둠의 세력과 마귀 사탄의 유혹과 시험과 도전을 이기게 하십니다. 세상에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생명과 기쁨과 은혜를 주지 못하는 세상 영광이나 명예나 즐거움으로부터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에게 얽매이지 않게 되고 끌려다니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그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향하여 달려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진정 자유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상황과 환경과 환경에도 얽매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의 권세와 지옥의 권세와 세상의 모든 왜곡되고 추하고 악한 것들에게서 자유하게 되어 지금 여기서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자유와 평안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적인 천국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주님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세상의 것에 소망을 두고 그것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어둠의 권세에 얽매이고 상황과 환경에 얽매이고 온갖 시기와 질투와 욕심 가운데 살면서 아무리 가져도 만족함을 모릅니다. 도리어 싸우고 빼앗고 갈등하고 어떻게든지 더 가지려고 난리를 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러한 세상의 것들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감격과 행복과 가치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다 썩어지고 없어지고 우리를 떠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엄청나고도 영원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정 영원하고 완전한 복과 은혜와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심지어 우리 믿음의 사람들조차도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세상의 것은 대단한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엄청난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세상의 것을 얻으면 다 얻은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세상의 것을 갖지 못하면 아무것도 못 가진 자처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믿음을 얻은 것, 구원을 얻은 것, 이것을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정말 기뻐하지도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영광을 돌려 드리지도 못하고 살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하찮은 것 때문에 걱정과 원망과 불평을 할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 믿음을 팔아먹고 세상의 것을 위하여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닙니다. 그건 정말 너무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실상은 정 반대여야 합니다. 믿음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세상의 별 것 아닌 것, 세상의 대단치 못한 것 그런 것은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것들입니다. 세상의 것들은 예수님 때문에, 믿음 때문에, 구원의 은총 때문에 얼마든지 버려도 좋은 것들입니다. 그게 손해인 것 같지만 손해가 아니고, 그것이 잃은 것 같지만 실상은 모든 것을 얻는 길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별 것 아닌 것 때문에 믿음 안에 있는 것, 대단한 것, 엄청난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껍데기를 위하여 알맹이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썩어 없어질 것을 위하여 영원한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더 나은 것을 위해서라면 덜 나은 것은 버릴 수 있지 않습니까? 더 좋은 것을 위해서는 덜 좋은 것은 포기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덜 좋은 것을 위해서 더 좋은 것을 버린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대단치도 않은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하여 참으로 가치있는 믿음의 행위를 포기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또 세상의 별로 대단치도 않은 것을 좀 잃었다고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생각하며 절망하며 슬퍼하며 원망하며 산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의 별 것 아닌 것을 좀 잃었다고 마치 천국마져 잃어버린 것처럼 탄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의 명예와 돈과 건강과 지식으로 부요하지 않더라도 설령 있는 것마져 빼앗겼다해도 천국을 놓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실제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마16:25,26절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예수님을 위하여 세상의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얻을 것이고, 세상의 것을 위하여 예수님을 포기하는 사람은 결국 모든 것을 잃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결단코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론 여기 누릴 현재적 천국의 은총을 누리기 위한 것들과 세상의 것을 바꾸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정말 예수님을 온전히 모셔들이고, 모셔들였으면 이제는 정말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오직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세상의 별 것 아닌 것들에 끌려다니거나 거기에 함몰되어 현재적인 천국을 누리기 위한 일들을 게을리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주님 안에 진정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며 오직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 진정 생명의 은혜와 기쁨과 능력과 평안이 넘쳐나는 삶이 되실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상황과 환경과 도전과 유혹을 이기고 자유의 평안을 누리시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행복하고 기쁘고 감사하고 은혜가 사랑이 넘치고 생기가 흘러넘치는 복되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생이 되실 것입니다 주의 영광 나타내며 주님 나라 이루어가는 삶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정말 이런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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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셋째주일설교/믿음과 순종과 축복(August Sunday Sermon)


말씀 : 창22:9~14

제목 : 믿음과 순종과 축복

 

1.믿음과 순종과 축복

믿음이 있는 곳에 순종이 있고, 순종이 있는 곳에 축복이 있다. 여러분, 맞는 말입니까? 예, 맞는 말입니다. 안 그래요? 믿음이 있으면 순종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있고말고요. 아니 믿는데 순종이 없을 수 있습니까? 안 그래요? 좋으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을 믿는데 어찌 순종이 없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또 순종이 있는 곳에 축복이 있다. 이것도 마찬가지잖아요. 순종하는 복이 안 오면 그게 이상한 거지요. 능력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축복의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데 어찌 복이 없겠습니까? 여러분, 신28:2절 보세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잖아요. 그러면서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하시면서 오만가지 복을 다 주실 것을 말씀하고 있잖아요. 여러분, 하나님이 뭐 허튼소리 하시는 분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진실로 믿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았던 사람들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론 지금 여기서고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오늘 말씀에 나오는 아브라함인데요, 오늘 말씀은 여러분이 너무 많이 들어서 식상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어떻습니까? 귀가 따갑도록 들었는데 잘 됩니까? 잘 안되지요. 왜요?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만 실상은 그래봤자 얼마나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안 그래요? 이 이야기 들어봤자 몇 번 들었습니까? 한 백번 들었을까요? 그런데 세상에서 정치이야기, 경제이야기,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며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는 몇 번 쯤 들었을까요? 한 천 번 들었을까요? 만 번도 더 들었을걸요. 그러니까 믿음 안에서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는 아무리 많이 해도 세상에서 먹고 입고 잠자고 놀고 하는 이야기의 백분의 일, 천분의 일도 못 듣고 못 보는 거예요. 그러니 잘 안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하지요. 그러면 안 되는 게 당연하다고 가만히 있을 겁니까? 아니죠. 그러므로 더욱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일에 힘써야 하지요. 그래야 조금이라도 기독교적 가치관이 확립되고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그래야 조금이라도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땅의 기름진 축복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인간적으로는 말도 안되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다 읽어드리지 못했지만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삼아 각을 뜨고, 불에 태워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인신제사는 우상숭배자들이 하는 악습으로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일입니다. 게다가 이삭은 하나님께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시고 무려 25년 만에 달랑 하나 주신 약속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장차 큰 민족을 이루고 주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삭을 잡아 불에 태워 번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게 말이나 되느냐 말입니다.

아마도 아브라함도 처음에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게 정말 하나님의 말씀일까? 이삭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자녀가 아닌가? 그것도 아이를 도저히 낳을 수 없는 100세나 되어서 기적적으로 주신 아들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는가? 큰 민족을 이루려면 오히려 더 많은 자식을 주셔야 하는데 겨우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불에 태워 인신제사로 드리라니 내가 늙어서 헛소리를 들었나? 망령이라도 들었나?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아브라함은 인간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고 말도 안되는 명령에 순종합니다. 왜요? 그게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선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는 분명 말도 안되지만 분명 뭔가 하나님의 섭리와 뜻과 계획이 있을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의 이성으로 다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섭리는 언제나 우리 보다 높고 깊어서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이성과 경험과 능력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성적으로 이해가 됩니까? 예수께서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다. 경험적으로 납득이 갑니까? 저 영원한 천국, 이것이 인간의 논리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이성적으로 믿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이성과 과학과 논리를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니 그런 것들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해가 되든 말든 납득이 되든 말든 순종할 것 뿐입니다. 아브라함이 만약 조금이라도 이성이나 논리를 가지고 생각했더라면 절대로 이삭을 바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인신제사를 드리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그런 명령을 내리실 수 있습니까? 어떻게 내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티끌과 같이 많게 해주시겠다고 해놓고 25년 만에 겨우 아들 하나 주어놓고 그걸 도로 달라고 하십니까? 하면서 따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자신의 모든 생각들을 다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선하심과 인도하심을 믿고 순종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취해야 할 태도인 것입니다. 이해가 가든 안가든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와 무지를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높으심과 인도하심과 선하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언제나 내 뜻과 이성과 경험과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잠3:5,6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이해가 되든 말든, 세상의 가치와 같든 다르든, 내 경험과 맞든 안 맞든, 손해가 되든 유익이 되든, 내 생각과 관계없이 인정하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내 모든 생각과 경험과 환경을 떠나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오직 온전한 길이며 진리며 생명이신 예수님의 뜻에 온전히 순복하십시오. 그저 갓난아이와 같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십시오. 그때에 분명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2.온전한 순종

여러분,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지만 말씀에 순종합니다. 창22:3,4절 보세요.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여러분, 이 말씀을 보십시오. 그는 아침 일찍 떠났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솔직히 무언가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것임을 믿었지만 밤새도록 얼마나 고민을 했겠습니까?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아들을 잡아서 번제로 드리라는데 그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날이 밝자마다 곧장 시행에 들어간 것입니다. 아내 사라에게 말도 없이 떠났습니다. 아내에게 말했다가 보나마나 이 양반이 나이가 들더니 드디어 망령이 들었냐고 하면서 핀잔만 들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아내에게 말도 하지 않고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자신도 시간을 지체하다간 아들을 번제로 드릴 자신이 없었기에 마음 변하기 전에, 마귀가 틈타기 전에 떠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즉시 시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시행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일을 뒤로 미루면 안됩니다. 어떤 사람은 계속 나중에 나중에 그럽니다. 이것만 해 놓고, 저것만 해결하고...... 나중에 생활이 안정되면, 나중에 시간 나면, 나중에 할 일 없어지면... 그러나 여러분, 지금 못하는 사람이 나중에 여유 생기면 할 수 있을 것 같죠? 그런 사람은 99%는 여유생기면 놀러 다닙니다. 여유돈 있으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데 쓰게 됩니다. 설령 나중에 한다 해도 지금 못한 것은 죽을 때까지 아니 천국에 가서 까지 못한 것으로 계속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마귀가 장난칩니다. 마음이 변하기 쉽습니다. 방해꾼이 생기기 쉽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길을 떠나 사흘 동안 걸어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걸어갑니다. 여러분, 그 사흘길을 걸어오는 동안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그래서 길을 떠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외아들을 자기 손으로 잡아 불에 태워서 번제로 드려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 마음이 과연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마음을 다잡으며 발걸음은 재촉합니다. 이삭을 잡아 번제로 드릴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천갈래 만갈래 찢어지는 듯 아팠지만 그는 묵묵히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께서 지시한 산 밑에 이르러 종들을 거기 머물라고 하면서 번제에 쓸 나무를 아들의 등에 지우고, 자기는 칼과 불을 들고 산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때 이삭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번제를 드리려면 제물이 있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제물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나무와 불은 있는데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이 말을 듣는 순간 아브라함의 마음이 얼마나 뜨끔했겠습니까? 차마 ‘네가 바로 번제물이다. 하나님께서는 너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단다. 나도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지만 하나님께서 너를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단다. 그러니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구나.’ 차마 이렇게 말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비해 주실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묵묵히 산에 올라 드디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도착하게 되고, 아브라함은 번제를 드릴 준비를 합니다. 장작을 쌓아 올렸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제물을 잡아서 각을 떠서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태워야 할 차례였습니다. 그 번제물은 다름 아닌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떨리는 목소리로 아들에게 말합니다. ‘아들아, 하나님께서 너를 번제로 드리라는구나. 내가 너를 대신해서 번제가 될 수만 있다면, 내가 너를 대신해서 죽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그러나 내가 아닌 너를 요구하시는구나. 그러나 사랑하는 아들아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야. 그러니 순종해야지.’ 하면서 아들을 결박합니다. 그 운명의 순간에 하늘이 무너지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아픔이 몰려 왔습니다. 그러나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떨리는 손으로 아들을 붙잡아 결박하고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죽이려고 눈을 감고 칼을 높이 들어 올렸습니다.

여러분, 그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오.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결박하는 아버지의 심정. 아들을 장작더미위에 올려 놓고 칼을 높이 들어 올린 아버지의 심정,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이삭, 그것도 하나 밖에 없었던 아들 이삭,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해서 결박 당할수만 있다면.... 내가 너를 대신하여 번제물이 될 수만 있다면...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해서 죽을 수만 있다면...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해서 불 태워 질수만 있다면.... 이런 마음으로 이삭 대신 자신이 번제물이 되고 싶었지만 하나님이 요구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이삭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무슨 선한 뜻이 있을 것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이니 거역할 수 없었기에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속에서 도저히 눈뜨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눈을 감고 아들을 향해 칼을 내리치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게 순종입니다. 내 생각과 달라도, 도저히 이해가 안가도, 있을 수 없는 일을 시켜도 그냥 따르는 것이 순종입니다. 아무리 내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이라도 하나님이 필요로 하신다면 그냥 드리는 것이 순종입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순종입니다. 그래서 순종하는 자에게 주님의 은총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믿음이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정이며 하나님께 대한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믿습니까? 주님의 선하심을 믿습니까? 구원자이심을 믿습니까?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상황이 이래요. 형편이 이래요. 저래요. 이래서 곤란해요. 저래서 곤란해요. 그럼 내가 손해봐요. 웃음거리 돼요. 주일날 하루 쉬면 손해가 얼만지 아세요? 아니 이 귀한 걸 달라고요? 그럼 난 어떻게 살라고요? 여러분, 이런 거 다 버리세요. 그냥 믿고 따르세요. 순종하세요. 그게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의 사람에게 주님의 한량없는 은총이 임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순종하는 자에게 임할 복

여러분, 그렇습니다. 순종이 곧 온전한 믿음이기에 순종하는 자에게 주님의 놀라우신 은총이 임합니다.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내리치려고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창22:11,12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삭을 바치라고 하시던 하나님께서 도리어 다급하게 아브라함을 제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너 정말로 이삭을 잡으려는 것이냐? 내가 정말 이삭을 죽여서 번제로 받기를 원하는지 아니냐? 아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네 믿음을 보고 싶었단다. 이제 충분하다. 그 믿음이면 충분하다. 너는 정녕 믿음의 조상이 될 만한 자격이 있다. 그러니 이삭을 풀어주고 내가 너를 위해 준비한 양으로 번제를 드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아들을 풀어주고 옆에 뿔이 나무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있는 양을 가져다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삭이 아닌 양으로 제사를 모두 마쳤을 때 다시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창22:16,1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요구했던 것은 이삭이 아니라 믿음이었습니다. 순종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독자 이삭을 빼앗아가려고 했겠습니까? 왜 말도 안되는 인신제사를 드리라고 했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셨고 그 믿음과 순종이 있는 자에게 임할 하나님의 은총을 그렇게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순종하게 되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순종이 곧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하나님께 대한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곧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하나님의 나의 주인이라는 종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종이 주인에게 따질 수 있습니까? 우매 자가 지혜 자에게 따질 수 있습니까?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왜 그래야 하느냐고 따질 수 있습니까? 죄인이 구세주에게 이러니저러니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믿음과 순종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요, 진정 주님만이 생명의 주님이시오, 구원자시오, 주권자라는 믿음이 있다면 순종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이 곧 믿음이요, 그래서 순종하는 자에게 복이 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러한 순종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때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아도, 현실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워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달라고 하셔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결코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라 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온전히 주인으로 모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순종하실 때에 좋으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께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우리의 모든 생각 지식 경험 이성 가치관 나 내려놓고 순종하심으로 주님께서 채워 주시는 영육간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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