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2년, 예언자 무함마드는 메카를 정복하고 얼마 되지 않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합니다. 이때 무슬림공동체는 아라비아반도 전체에 확대되어 있었지만 구심점을 잃은 무슬림공동체는 곧 분열될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무함마드의 장인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인 아부 바크르(573 ~ 634.8.23 - ابو بكر الصديق)는 무슬림들에게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합니다. "무함마드만이 사도는 아니며. 많은 사도들이 그 이전에 존재했다. 만일 그가 사망하거나 살해당했다면, 그대들은 발길을 돌려버릴 것인가? 누구든 그의 발꿈치를 돌린다 한들 하느님께 해를 끼치지는 못하리라. 그러나 감사해하는 이에게는 그분께서 즉시 상을 내려 보상하시리라." - 이므람 3:144

 

17세기에 필사된 화려한 장식을 한 <코란>의 모습. 코란은 아부 바크르의 시대에 최초로 수집되기 시작해서 우스만 시대에 완성되었는데, 이시기의 코란 필사본과 오늘날의 것을 비교해 봤을때 전혀 차이가 없다고 한다.

 

이후 이슬람공동체는 그를 '공동체의 봉사자'(خليفة 할리파=칼리프)로 선출하고, 그를 중심으로 다시 단결하기 시작합니다. 아부 바크르 사후 이슬람공동체는 오마르, 우스만, 알리까지 3명의 할리파를 선출하게 되는데, 이 시대를 일컫어 '정통칼리프 시대'(632~661 - الخلفاء الراشدون)라고 부릅니다. 당시 중동의 구도를 비유하면, 두마리의 사자와 호랑이가 - 비잔티움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 - 피터지게 싸우다가 둘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는데 갑자기 웬 하이애나가 - 이슬람제국 - 나타나 기지개 켜고 일어나는 형국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하이애나는 사자와 호랑이를 모두 건드려 손쉽게 승리를 거둡니다. 위의 그림은 정통 칼리프시대의 이슬람군대의 모습으로, 1번 인물은 '후원자,지지자'라는 의미의 안사르 전사(الأنصار)이고, 2번 인물은 무슬림군대와 싸우던 페르시아 기마궁사의 모습인데, 그의 말에는 목재 등자가 달려있습니다. 오늘날 남아있는 유물은 없지만, 등자를 사용했을 가능성은 있어보입니다. 3번 인물은 북아프리카의 유목민족인 베르베르족 전사로 갑옷은 입지 않고 있으며 창과 투석기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9세기경 필사본에 등장하는 비잔티움군대와 이슬람군대의 모습

 

아부 바크르가 이끄는 이슬람군대는 동시대 비잔티움군이나 페르시아군과 비교해 보았을때, 지극히 빈약한 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군대는 거의 대부분이 말과 낙타를 탐으로써 그들의 적이 가지고 있지 않은 뛰어난 기동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비잔티움군이나 페르시아군이나 사막지형에는 익숙하지 않았고, 또한 양측군대가 대부분 전방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남쪽의 방어는 취약한 상태였습니다. 아부 바크르의 군대는 이라크 남부를 통해 먼저 사산조 페르시아를 공격하고, 634년 유능한 족장 칼리드 이븐 알 왈리드(592~642 - خالد بن الوليد)의 군대가 비잔티움,페르시아 연합군을 피라즈에서 대파함에 따라 이라크 정복을 완료합니다. - 오마르의 통치시기인 651년에는 페르시아 제국 전체를 병합하기에 이릅니다. - 이윽고 말머리를 비잔티움제국으로 돌려 634년 9월에는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를 함락시키고, 637년 10월에는 알레포 전투에서의 승리를 통해 시리아 전체를 정복한 뒤, 이어서 654년에는 이집트와 북아프리카, 시칠리아까지 진출하기에 이릅니다.

 

이슬람제국의 무한확장 - 자주색 영역은 무함마드 시대의 영역, 짙은 핑크색 영역은 정통 칼리프시대에 확대된 영토이며 상아색으로 칠해진 영역은 우마이야 왕조시대에 확대된 영역을 나타낸다.

 

세례자 요한의 유골이 안치되어있고, 로마 교황으로써는 최초로 2001년 이슬람사원을 방문한것으로 유명한 시리아 우마이야 모스크의 모습. 715년에 현재 모습으로 완성되었지만 이곳은 그 이전부터 그리스도교도와 무슬림이 함께 공유하던 장소였다.

 

이집트를 정복한 무슬림들이 세운 군사도시 알 푸스타트(الفسطاط)의 유적. 이 도시는 한때 20만명이 거주했던 이집트의 수도였으나 1168년, 십자군의 침공을 우려한 파티마왕조의 재상 샤와르(شاور بن مجير السعدي)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슬람공동체가 그토록 빠른시기에 중동전역에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비잔티움과 페르시아가 긴 소모전으로 국력을 소모한 탓도 있지만, 비잔티움제국의 경우 이집트와 시리아 일대에 퍼져있던 아리우스파와 콥트교등 단성론파를 이단으로 여기며 탄압한 탓도 있었습니다. 단성론파 그리스도교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인정하는 삼위일체론과 예수의 신성성을 부정하는 교리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비잔티움황제가 예수의 대리인임을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와 정면으로 배치되었기 때문에 탄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교의 유일신 사상은 이들 단성론파가 주장하는 바와도 상통하는 바가 있었으며, 또한 무슬림들은 세금만 꼬박꼬박 내는 한 어떤 종교도 믿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으므로 오히려 그들의 정복을 환영하고 협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초기의 민주주의적인 성격을 띄었던 이슬람공통체는 661년, 무와이야(602~680 - معاوية بن أبي سفيان) 가 쿠데타를 일으켜 마지막 정통칼리프 알리를 암살하고 우마이야 왕조를 개창함으로써 비잔티움제국과 같은 신성제국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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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니파학파 the Hanifite

 

법학적 측면에서 자유로운 입장을 취했다. 페르시아인 Abu Hanifa(767 사망)가 이라크에서 창시되었다. 이라크의 상황이 무함메드가 살던 상황과 유사한 경우 쿠란 그대로 적용하고, 다를 경우 유추해서 적용했다. 다른 학파에 비해 인간의 사유가 활동할 수 있는 공간 더 넓게 열어놓았다. 유추에 의한 결정이 일반적 정의에 어긋날 경우 공공이익을 위한 판단 istihsan에서 나오는 '신중한 의견' 또는 '인정된 정의'를 참고로 다시 결정했다. 압바스조, 오스만 터어키가 이들의 입장을 따랐다.

 

말리크 학파 the Malikite

 

메디나에서 말리크 이븐 아나스 Malik ibn Anas(753-795)가 창시했다. 쿠란과 하디스에 의해 법, 의식 해석하고, 애매한 경우 메디나의 '합의된 의견' ijma에 의존했다. 하디스의 정밀한 분석과 엄정한 비판을 통해 신뢰성을 고양시켰다. 해석이 어려운 경우 유추법 사용하고, 이것이 ijma와 상충할 경우 공공이익을 감안하여 결정했다. 이 학파는 보수적 성격을 가졌으며, 꾸란에 배치되는 예언자의 관행을 과감히 배척했다. 현재 북아프리카, 남부 이집트, 동부 아라비아에서 지지되고 잇다.

 

피 학파 the Shafiite

 

법학을 체계화한 학파로, 페르시아 출생 아랍인으로 쿠라이쉬 부족 출신 알-샤피이 al-Shafii가 창시했다. 그는 말리크의 제자로, 독자적인 법률과 전통 관습의 조화로운 절충을 통해 합리적 법학 이론의 토대를 형성했다. 이 학파는 법의 네 근원을 구분한다. 알라의 계시 쿠란, 예언자의 언행 하디스, 법학자들에 의해 표명된 무슬림 공동체의 여론 ijma, 이성에 의한 유추 qiyas가 그것이다. 그중 끼야스 적용에 명백한 규정과 한계를 두었다. 네 근원의 배열에서 이성의 사용을 부차적 요소로 두었다. 쿠란과 하디스에 동등한 권위를 부여했는데, 때로는 하디스에 더 권위를 부여하기도 했다. 불충분한 증거에 기반한 '독자적 해석'도 거부했고 이즈티흐산(선호)을 부정한다. 현재 동부 인도, 북부 이집트(카이로), 동부, 남부 아프리카, 남부 인도에서 지지되고 있다.

 

한발리 학파 the Hanbalite

 

아흐마드 이븐-한발 Ahmad Ibn Hanbal(855 사망)이 창시했다. 그는 알-샤피이의 제자이지만 '독자적 해석'에는 스승보다 더 비타협적인 순수한 전통주의자였다. 꾸란과 예언자의 관행, 즉 순나에 전적으로 의존했으며, 현재까지도 샤리아의 원칙에 가장 충실한 신앙공동체로 지속되고 있다. 끼야스를 샤리아 법원으로 수용하는 문제에 가장 배타적 입장을 취했다. 무타질라파에 반대했는데, 무타질라파가 쿠란의 창조성을 주장할 때, 이에 단호히 맞서 쿠란의 영원성을 주장했다. 첫째는 쿠란, 둘째는 하디스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Hijaz와 사우디아라비아 전역에서지지되고 있다.

 

기타

 

자히르 법학파

4대 법학파에는 들지 못하나 중요한 학파이다. 쿠란의 외면(자히르)적 의미를 강조했다. 법률해석에서 꾸란과 순나의 언어적 의미에 크게 의존한다. 다른 학파의 견해를 전혀 참조하지 않는 고립적 해석태도 견지한다. 그러나 이성, 유추, 유효 istishab, 모방 taqlid 반대한다. 이 학파는 이라크에서 무함마드 이븐 다우드(909 사망)가 창시했고, 이븐 하즘(1064)이 발전시켰다. 이븐 하즘에 의해 유독 스페인에서 성행했다. 후에 신지학적 수피즘의 대가 이븐 아라비(1240)에도 영향을 미쳤다.

 

 

법학파들에 대한 무슬림의 태도

 

마드하브(법학파) 통합을 시도하지 않았다. 이견의 존재는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징표라는 하디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제 법학파 간 차이는 대부분 사소한 것이었다.

 

이즈마

11세기에 마드라사(신학교) 설립하여 네 개 법학파 모두에게 공간을 제공했다. 이즈마(공동체의 합의) 정신에 따랐는데,이즈마는 쿠란, 전승, 유추에 이어 네 번 째 法源이 되었다. 초기 이즈마는 다른 지역의 관례나 전통 받아들여 새로운 방안 모색하는 창조적 역할 했으나, 10세기 말, 11세기 초에 경직화되어 변화 억제 하는 쪽으로 작용했다. 이즈티하드(法源)의 문은 닫혔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 결과 이즈마가 고착되며 적응력울 잃기 시작했다.

 

샤리아(넓은 길, 곧은 길)

 

하느님과 동료 인간에 대한 신자들의 의무조항으로, 이것의 유일한 입법자는 알라이다. 이 샤리아는 법전화된 적이 없다. 그러나 무함마드의 종교적 가르침이 지닌 실천적 면을 형성하며, 또 공동체에 필수적인 것으로서 세세대대로 전수되었다. 종교판사(카디)는 그 이행여부를 감독했고, 무프티는 어떤 행위가 율법에 준하는지 여부에 대한 법률적 소견서(파트와)를 제출했다.

 

피크(통찰)

샤리아를 다루는 학문으로 신학에 바탕을 두고 법을 이해하는 것이다.

샤리아 중 사법적인 부분은 1869년 오스만 제국의 메젤레 속에 법전화되었다. 모든 행위를 다섯 범주로 분류했다. (의무적 행위, 바람직한 혹은 추천할만한 행위, 아무래도 상관없는 행위,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 금지된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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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과 무슬림 ?

Muslim이란 '복종하는 자', '이슬람에 자신을 봉헌하는 자'라는 의미를 갖는다. 한편 Islam'승인하다', '복종하다', '자신을 봉헌하다'는 동사의 부정형에서 파생한 명사로 순종, 복종을 의미한다. 무슬림들은 쿠란을 최종 계시로 인정하고 있으며, 이슬람 종교사의 자료는 Hadith(전승집), 예언자의 전기로 구성된다.

 

무함메드 이전의 아랍 종교

 

인종과 경제적 상황

아랍인은 셈어를 사용하는 족속이 다수이지만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무함메드 당시에 도망해온 유대인들이 아라비아 서부에 자유롭게 거주하고 있었으며, 대상들의 교역로가 발전하고 있었다.

 

종교적 상황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 종교는 원시 셈족의 사막 신앙에서 발전했다. 남부 아라비아는 바빌로니아 종교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아 月神을 중심으로 한 종교의식을 거행했다. 대부분의 아랍인들은 지방신을 숭배했고, 멕카에서는 거의 구분되지 않는 세 여신 숭배가 있었다. 그 신들은 母神 -라트 al-Lat, 운명의 여신 알-마나트 al-Manat, 비너스의 배우자이며 새벽별을 상징하는 알-우즈자 al-Uzza, 이들 모두는 알라의 딸들로 믿어졌다. Allah는 창조자, 지고신으로, 무함메드의 부족 Quraysh가 숭배한 신이다. 이들은 상위신 외에 천사와 여러종류의 靈魔 jinn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천사들은 도덕적으로 완전하고 유익한 존재로 여겨졌고, 영마는 아담보다 2천년 먼저 창조되어 대부분 악의 근원으로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아라비아 전역, 특히 베드윈족 사이에서는 자연 숭배가 보편적이었다.

 

멕카 Mecca

가장 성스러운 신전 중 하나인 Kaba가 있는 곳이었다. 이 안에 있는 거대한 운석이 숭배의 대상이다. 카바 근처의 성스러운 우물 Zamzam(하갈과 이스마엘에 이곳에 왔다는 전설)도 숭배의 대상으로 소순례 Lesser Pilgrimage가 행해졌다. 카바 안에는 일종의 판테온이 구성되어 있었다. 주요 순례지로 멕카가 자리잡고 있었고, 또한 부족간 갈등의 정점이기도 했다.

 

 

예언자 무함메드

 

대략 571년 쿠라이쉬 부족 하심가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출생 이전, 어머니는 6살 때 사망했다. 그후 조부 아브드--무타립 Abd-al-Muttalib과 삼촌 아부 타립 Abu Talib 밑에서 어려운 성장기를 거쳤다. 후발과 알-우즈자를 숭배했고, 영마, 사탄, 길조와 흉조 등을 믿는 아리비아 신앙에 회의를 가졌다. 그의 종교적 변화는 유대교, 기독교의 신관념, 심판, 종교적 삶의 영향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친지 WaraqaUmaiya는 유대교와 기독교에 심취했다. 기독교에 대한 정보는 주로 네스토리우스파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인이 되어서는 15세 연상의 하디자와 결혼 2,3명의 아들 낳았으나 모두 어려서 죽고, 네 딸 중 오직 파티마 Fatima만이 그보다 오래 살았다. 그는 정신적 시련을 거치면서 기독교의 신관과 심판 관념등에 동요했다. 40세깨 메카 주변을 방황하며 명상했다.

 

예언자의 소명

멕카 북쪽 수 마일 떨어진 히라 Hira 산의 동굴에서 명상을 하다가 "권능과 명증의 밤"이라고 부르는 날 신의 사자인 천사로부터 계시를 받았다. 환상이 끝난 후 계시의 전체를 재현했다. 그러나 반신반의하며 고민하여 수개월에 걸쳐 체험을 회의하다 스스로가 알라의 진정한 예언자 nabi 이며 사도 rasul 임을 자각했다.

 

초기활동

설교의 기본 내용은 육체의 부활과 지옥의 불에 대한 예언이었다. 초기계시에서는 신의 단일성보다는 신의 권능과 최후 심판에 대한 언급이 주종을 이루었다. 신이 복수로 나타나기도 했다. 쿠라이쉬 부족 사람들은 신의 단일성에 대해서는 반발하지 않았으나, 무함메드가 예언자라는 주장에는 반발했다. 예언자라면 부족 전체의 지도자를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회정의와 가난한 자에 대한 의무를 강조했다. 추종자들은 소수(초기 4년 동안 불과 40여명)였다. 첫 추종자는 하디자, 양자가 된 노예출신 소년 자이드, 아부 탈립의 아들 알리, 상인 아부 바크르 Abu Bakr얐다. 유일신 교리는 메카의 주된 수입원(순례객)을 위협하는 것이므로 반발을 초래했다. 무함메드의 활동에 대한 부족의 반대자들의 방해가 극심했다. 그는 아부 탈립 사망후 이주 계획를 세웠다. 이주 Hijra6226월에 야트립으로 이주하면서 이루어졌다.

 

메디나의 신정정치

 

야트립으로 이주 후 도시의 통치권 장악 후 마디나트 안-나비(줄여서 메디나, 예언자의 도시)로 개명했다. mosque를 건설했고, 단순하고 새로운 의식을 만들어냈다. 멕카의 대상 공격으로 멕카와 공방전 후 6301월 멕카를 정복했다. 그후 무함메드는 카바 신전의 개혁을 단행해 우상을 파괴하고, 아브라함과 천사들의 그림도 파괴했으며, Zamzam을 정화했다. 이를 통해 그는 아라비아에 대한 정치적, 종교적 지배권을 확보했다.

 

생의 후반기에는 계시의 운문 형식은 줄고 종말론적 경고는 의례나 제도적 문제에 대한 가르침으로 대체되었다. 무슬림들의 삶의 모든 분야를 종교에 의해 규정했다. 비스밀라 "하나님의 이름으로"라는 말로 모든 행위를 시작했고, 하느님 앞에 직접 서므로, 중재자 역할 하는 사제 계급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무함메드는 632년 갑자기 사망하게 된다. 그는 죽기 직전 설교에서 "모든 무슬림은 모든 무슬림과 형제"임을 천명했고, 죽기 전 아부 바크르를 칼리프 caliph(계승자)로 선출했다.

 

이슬람의 신앙과 의식

 

무함메드의 가르침은 그의 사후 이슬람의 신앙 iman 의식, 또는 의무 din의 토대가 되었다. 신앙보다는 의식의 많은 부분이 정형화되는 과정에서 후대의 변화와 영향이 많았다.

 

쿠란과 그 가르침

쿠란은 이슬람의 근본, 낭송, 복창이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하느님의 말씀 그 자체를 의미한다. 쿠란은 하늘나라에 보존되어 있는 서판에 담긴 쿠란의 원본이 드러난 것이다. 오직 정결한 자만이 만지거나 낭송할 수 있다. 무슬림들에게 쿠란은 하느님의 말씀 자체이므로 번역할 수 없는 일이다. 번역하는 경우도 단지 그 책의 의미에 대한 설명, 즉 여러 가지 의미의 해석 중 하나일 따름이다. 쿠란의 문체는 모방이 불가능하다고 믿었고, 이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한다고 여겨졌다. 또한 문장의 배열이나 문자 하나하나의 배치에 있어서조차 신성하고도 불가사의한 신비가 숨겨져 있다고 믿었다.

 

쿠란의 편집은 우스만 시절에 이루어졌는데, 시대순이 아니라 길이순으로 편집되었다. 심판을 강조하는 초기의 단편적 계시가 뒷부분에 수록되었다. 단지 하나의 짧은 기도문만이 일종의 서문으로 채택되어 맨 앞에 배치되었다. 그것은 파티하(開章)로 그리스도교의 주기도문처럼 사용되었다. 114개의 수라에는 소, , 질주자 등 각각 짧은 표제가 붙어 있다. 예를 들어 수라 112는 하느님의 유일성을 주제로 하고, 악으로부터의 보호를 구하는 두 개의 짧은 기도문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어떤 수라, 또는 단 한 개의 소절이라도 낭송하려면 먼저 저주받은 사탄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한 주문과 바스말라를 낭송했다. 바스말라는 "비스밀라힐-라흐마닐-라힘"(자비롭고 자애로운 하느님의 이름으로)으로, 수라 9를 제외한 모든 수라 앞에 놓여 있는 말이다. 우르드어로 비스밀라 카르나는 단순히 '시작하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터키어로 하디 비스밀라는 '시작하자' 라는 의미이다.

 

어떤 수라는 각별한 영험(바라카)가 있다고 여겨졌다. 예를 들면 수라 36(야신)은 죽어가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을 위해 낭송된 것이다. 각각의 쿠란 구절은 아야트(징표,기적)라고 불렸다. 쿠란에 나오는 인간 존재의 위상은 영들이나 천사보다도 우월한 존재였다. 하느님이 '당신의 숨결로부터' 생명의 입김을 아담에게 불어넣었고, 그릴 자신의 대리자(할리파)로 삼고자 했고, 천서들로 하여금 그에게 절을 올리도록 명했다고 한다. 한편 쿠란은 원죄를 부정한다. 인류 최초의 죄는 유전되지 않았고, 인간은 선천적으로 선하나 환경의 영향으로 변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쿠란은 인간과 하느님의 절대적 유대관계를 강조했다. 하느님이 아담의 자녀들을 영예롭게 하고(수라 17/70), 아마나(신탁)를 맡겼다는 것이 그것이다. 한편 쿠란의 세상에 대한 이해는 하느님이 지평선 안(즉 이 세상)과 자신들 속에 놓아둔 징표를 보며 숙고해야 한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후기 수라(메디나에서 계시된 수라)에는 세상사, 일상사, 정치적 문제에 대한 상당한 양의 가르침을 포함했다.

 

언어의 숭고함을 강조했기 때문에 아랍어 이외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에 대한 경시가 있었다. 이 쿠란은 영창조로 낭송되었다. 암송자 암송자 하피즈(모두 암기하고 있는 사람)는 존경받음

 

쿠란의 해석

무함마드 사후 몇 세대 동안은 무슬림들 대부분은 쿠란에 대해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완전히 일치하는 해석은 없었다. 다앙햔 해석의 사실 자체가 쿠란의 초자연적 성격을 증거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느님 자신과 마찬가지로 말씀도 무한한 것이었다.

 

주석 작업은 타바리(935 사망)30권 주석서가 최초의 역작이다. 쟈마흐샤리(1146 사망)는 유명한 주석서를 무타질라파 입장에서 저술했다. 13세기 바이다위 주석서, 15세기 말 잘랄루딘 앗-슈우티 주석서, 19세기 오스만 터키의 엘말리 주석서 널리 사용했다.

 

신비가들은 의미의 참된 핵심에 이르기 위해서는 문자의 장막을 뚫고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장했다. 이러한 노력은 단어의 어근을 캐고 각 표현을 관련지어 보고하는 것이 거의 무한하게 가능한 아랍어의 특성으로 대단히 용이했다.

 

쉬아파, 특히 바티니야 파는 쿠란의 비의적 의미를 강조했다. 쿠란을 읽거나 낭송하는 것은 하느님과의 직접 대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여겨졌다. 하느님은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쿠란 읽는 행위 자체가 성례였다.

 

중세에는 신비수리학적 해석술이 발달했다. 일련의 문자로부터 그 數理値나 조합을 구해 심오한 의미 찾으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그런 목적으로 사용하는 필사본이 다소 후기에 만들어진 것임을 간과했다.

 

현대적 해석으로는 무스타파 알-마자라기의 "어떤 명백한 진리가 계시된 문장과 양립할 경우, 그 문장을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관점, 사이트 아흐마드 칸(1898 사망)의 자연에 드러난 하느님의 役事는 쿠란에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관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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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상식

1) 이슬람의 의미

이슬람(Al-Islam)은 아랍어로 신(알라)에 대한 "복종","순종"을 의미하며,

이슬람을 믿는 신자가 남성일 경우 "무슬림" 이라고 하고 여성일 경우는 "무슬리마" 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이슬람을 회교(回敎)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중국을 통해 이슬람이 전해 지면서

회족들의 종교라는 의미에서 회교로 부르게 되었다.

 

 

2) 꾸란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40세 되던해부터 사망하기까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계시를 받은

(알라)의 말씀으로 이슬람의 경전이다.

꾸란은 암송형태로 전해지다가 무함마드 사후 후계자들에 의해 여러 곳에서 문자화 작업이

시작되었으나 3대 칼리프 시대에 현재의 꾸란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소각하였다.

(알라)의 말씀이 담긴 책이므로 무슬림들은 꾸란을 읽기 전에 몸을 청결히 해여 하며,

꾸란을 읽을 때에는 경건한 자세를 해야하며 음식을 먹거나 남과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꾸란을 읽지 않을 때는 경외의 의미에서 천으로 싸서 가장 높은 곳에 두어야 한다.

 

  

 

 

3) 모스크(Mosque)

에스파냐어 메스키타 및 프랑스어 모스케를 거쳐 영어로 변한 것임.

아랍어로 마스짇은 '이마에 땅에 대고 절하는 곳'을 뜻한다.

회랑(回廊)이 있고, 안뜰에는 청정(淸淨 :우드)의식을 행하는 샘물이나 수도가 있다.

건물 내부에는 메카의 방향(키브라)을 나타내는 벽감(壁龕 :마흐라브)과 설교자(키티브)

위한 단(:민바르)이 있다.

회랑 한쪽에는 1~6개의 탑(마나르)이 솟아 있고, 예배시각이 되면 예배당을 지키는 무아딘이

탑에 올라가 예배를 권유하는 '아잔'을 소리 높여 낭송하다.

 

 

 

 

4) 예배(쌀라)

메카(카바신전) 방향으로 하루 5번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

새벽기도 2, 정오 및 오호, 밤은 4, 일몰은 3번의 절을 하며 기도한다.

- "파즈르(fajr)" : 동트기 전 기도

- "주흐르(dhuhr)" : 정오기도

- "아스르(asr)" : 오후 중반에서 해지기 사이 2-3시 경 드리는 기도

- "마그립(maghrib)" : 해진 직후 드리는 기도

- "이샤(isha)" : 잠자기 전에 드리는 기도

이슬람 기도의 주목적은 자기 정화에 있으며, 무슬림들은 기도를 통해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거치지 않고 직접 알라와 영적 교감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매주 금요일 정오에는 무슬림 신도들이 모두 모스크에 모여 단체 예배를 드린다.

 

5) 청정 의식(우두)

이슬람은 몸과 마음의 청결을 중요시 하며, 신체와 정신의 청결은 꾸란에도 자주 언급되고 있다.

신자들은 기도나 예배 전 이슬람식 간단한 세정(우두)을 한다.

기도 전에 몸을 깨끗이 씻는 의식은 타하라(Taharah)라고 하며, 남여 구역이 분리되어 있다.

- 씻는 순서는 손, , , 얼굴, , 머리, , 발 등이다.

- 물이 없을 경우에는 깨끗한 모래, , 자갈, 돌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6) 이슬람 염주

이슬람인도 신앙심 유지를 위해 염주(Tasbih)를 돌린다.(천주교, 불교와 유사)

알라의 99가지 이름을 따 99개의 염주로 되어 있으나 보통은 33개의 염주3개로 나누어 사용한다.

7) 이슬람 축제

Eid Al-Fitr (금식 종료 기념 명절)

- 이슬람의 금식월인 라마단을 무사히 마친 것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명절

Eid Al-Adha (희생제) : Haji(순례 기간)종료 시점에 시작 이 기간중에 무슬림들은

  선물 및 카드를 교환한다.

 

8) 초생달과 별

이슬람권 많은 나라들이 초생달과 별이 포함된 국기를 사용하고 있으며, 모스크 첨탑 장식에도

활용하고 있어 이슬람의 별과 달은 알라의 권능을 상징하는 증표이기도 한다.

이슬람의 가름침은 초생달과 별처럼 인간은 안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음.

이슬람에서의 초승달과 별의 유래

- 그러나 초승달과 별이 언제부터 이슬람의 상징이 되기 시작했는지 유래가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역사적으로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지금은 이스탄불)을 점령한 1453

당시 비잔틴 제국에 존재하던 초승달 및 별 상징을 오스만제국이 수용하기 시작하면서

이슬람의 상징으로 정착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 고대 아람의 전통적으로 최고의 신인 달신에서 유래 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9) 이슬람 3대 성지

메카(선지자 무함마드의 출생지 - 카바신전 소재지)

메디나(최초의 이슬람 도시, 무함마드의 사망지)

알쿠드스(예루살렘, 무함마드의 승천한 장소)

 

10) 이슬람 복장

이슬람 여성의 hijab(머리를 덮는 베일)은 남성의 유혹을 예방하기 위한 것임.(쿠란 p352)

이슬람 여성들이 입는 검은 옷은 Abaya(아바야)라고 하며, 아프간에서는 부르카,

이란에서는 차도르라고 한다.

 

11) 이슬람과 예술

무함마드는 알라에 대한 믿음과 숭배가 유혹을 받을 수 있다고 보고,

사람이나 동물 그림을 못 그리게 한다. 대신에 기하하적인 다양한 서체 예술이 발달되었다.

음악도 인간은 타락시킨다는 이유로 금지시키고 있다.

 

12) 접대 예절

윗사람들을 매우 공경하고, 찾아오는 손님에 대해서는 극진하게 접대하는 것이 예의이며

미덕으로 간주하고 있다.

속담에 "손님이 찾아오지 않는 집에는 천사도 찾아오지 않는다" 는 말이 있다.

이는 인적이 드믄 사막의 생활환경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이 반갑다는 이유에서뿐만 아니라

종교 예의상 공덕을 많이 쌓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13) 인사

"앗쌀라무 알라이쿰"(평화가 당신에게 있기를)하면

"오 알라이쿰 앗 쌀람"(당신에게도 평화가...)이리고 답한다.

그렇게 답해주지 않으면 인사 받은 사람은 평화만 받고 상대방은 나쁜것과 해가 되는 것을

가져도 된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

무슬림들은 상대방보다 인사를 길게 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므로 다소 짜증나더라도

계속 인사를 받아서 해주는 것이 훨씬 친밀감을 높일 수 있다.

무슬림들은 알라(하나님)외에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지 않고 악수로 대신한다.

보통 무슬림들은 악수 후 친밀한 사이에는 서로 포응을 하기도 한다.

전통적으로는 인사를 하며 오른손 등을 이마에 가져다 댄다.

이슬람 여성에게 악수를 위해 손을 내미는 것은 금기시 되어 있다.

인사할 때 부인 또는 여성가족의 안부는 묻지 않는 것이 좋으며, 가족의 안부는 허용된다.

 

14) 좋은 행위 오른손 사용

무슬림들은 오른손을 악수를 하거나 음식을 먹을 때 그리고 선물을 주고 받을 때 등

좋은 일을 할 때 사용하고, 왼손은 화장실에서 용변 후 씻을 때, 신발을 닦을 때,

그리고 코를 풀 때 사용한다.

물건을 주고 받을 때 악수를 할 때 왼손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큰 실례이다.

심지어 잘 때도 오른쪽으로 자야하며 왼쪽으로 자는 것도 가급적 피하고,

 

손톱을 자를 때 먼저 오른 손 , 왼 손, 오른 발, 왼 발, 순으로 깍으며, 칫솔질도 입안의 오른쪽부터

한다고 할 정도로 오른쪽 우선 문화가 보편화되어 있다.

- 왼손은 사탄과 관련한 부정한 것으로 인식 된다.

 

15) 생리 현상과 관련된 예절

다른 사회와 달리 이슬람권에서는 식사 후에 트림을 하더라도 "비스밀라(알라의 이름으로)"라고만

하면 예의를 벗어난 행위는 아니다.

재채기는 아무데서나 해도 상관없고 재채기를 한 사람에게

"yarhamuk allah"(may Allah have mercy n yu)라고 한다.

하품은 최대한 하지 않도록 하는데 이슬람에서는 하품 할 때 나는 소리 '아아-'

사탄이 자극해서 나는 소리라고 한다.

기도 시간에 방귀를 뀌면 알라가 기도 소리를 듣지 않고 다른 대로 간다고 하여 아주 싫어하므로

무슬림들 앞에서는 삼가야 한다.

 

16) 화장실

화장실에서 중요한 부분을 무슬림에게 보이는 것은 큰 실례이다.

무슬림들은 목욕이나, 수영할 때에도 허리로부터 무릎까지는 가리는데 이는 무함마드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수나,Sunnah)

무슬림들은 대소변 시 메카 방향으로 해서는 안되면, 용변을 보고 씻을 때 오른손을 사용해서도

안 된다.

이슬람권의 공공화장실에는 화장지가 없는 경우가 많으므로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 대부분의 경우 용변 후 물을 사용한다.

17) 손으로 상대방을 가리키는 것

무슬림 사회에서도 좋지 않은 예절로 평가된다.

간혹 무슬림들이 기분 좋을 때나 의견이 똑같을 때, 오른손 바닥을 내미는데

이럴 경우는 손바닥을 쳐주면 된다.

18) 신의 뜻으로(인샤알라)/알라의 덕분에(알 함두릴라)

우리가 무슬림들과 대화할 때, 무슬림들은 승낙 또는 약속의 표시로 '인샤알라"라고 하는데,

그 일이 이루어질지는 알라만이 알고 있다는 뜻이다.

비무슬림들은 이러할 경우 불확실한 약속의 증표라고 간주하고 "인샤알라" 하지 말고 다른 식으로

확신의 말을 해 줄것을 요청하는 데, 진실한 무슬림들에게 이러한 요구는 종교의 대한 모욕감을

주는 매우 불쾌한 행위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반 무슬림들은 대답이 애매하거나 불확실 할때 "인샬라"라고 답한다.

19) 식사 예절

식사전에 손을 씻고

먹거나 마시지 전에 Bismillah(알라의 이름으로)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사탄이 같이 음식을 먹게 된다고 한다)

초대를 받게 되어 식사할 경우 식사 전에 "비스밀라"

"알라 바라카트후"(알라의 이름으로, 알라의 축복이 당신에게)라고 말한다.

식사전에 음식이 반드시 식탁에 놓여 있어야 한다.

반드시 오른손으로 식사(사탄은 왼손으로 식사한다고 한다).

음식이 뜨겁다고 불어서는 안 된다.

손님이 떠날 경우 문까지 배웅하는 것이 좋다.

싫어하는 음식이 있더라도 표내지 않도록 한다.

선물을 줄 경우, 받는 것이 예의이며 주인의 요청이 없을 경우에는 나중에 뜯어 본다.

 

20) 메카(Mecca)의 중요성

무슬림들은 메카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 메카는 선지자 무함마드가 태어나서 알라로부터 계시를 받은 곳으로 매년 이슬람 순례객들이

순례하는 이슬람의 성지이다.

 

메카 방향을 향해 기도(쌀라)를 하고, 메카의 중심에는 카바 신전이 자리하고 있다.

- 종교 생활과 예절, 생활 방식도 메카와 많은 연관이 있다.

 

불결한 것(예를 들어 잠자는 방향, 용변 볼 때)의 자세는 메카로 향해서는 안 된다.

 

21) 기타 예절

여성을 똑바로 주시해서는 안되며, 남성의 과도한 장식은 여성스럽게 보인다고 해서 금한다.

남편 외의 다른 사람들에 보이기 위한 여성의 과도한 장식은 금지되며, 여성은 주로 금, 은을

선호한다.

무슬림 여성들이 때때로 과도한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는 것을 보는데 혹자는 이혼 후의 생활을

대비하기 위해 현금 대신 저장 해 둔 것이라고도 한다.

어른앞에서 꼰 자세로 앉거나 발바닥을 상대방에게 보이는 행위, 침을 뱉는 행위 등은

모두 좋지 않은 행동으로 받아들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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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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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목사님의 무슬림 전도 이야기

 

우리는 무슬림들이 사는 한가운데서 사역하고있다. 1년에 네다섯번씩 학교앞공원에 대형 천막을 치고 집회를 한다. 성탄,부활절 행사와 문화공연 행사, 의료캠프 등이다. 이 모든 행사에는 적게는 700~800, 많게는 1300~1400명의 아이들과 동네 사람들이 모인다. 이렇게 사람들이 모일때 복음을 전할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행사는 오래전부터 시작했고 지금까지 스무번 정도 넘게 집회를 했다. 집회때마다 항상 같은 성경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해왔다.

 

그것은 요한복음 316절과 사도행전 412, 그리고 코란 수라를 인용하면서 같은 설교를 반복했다.

 

두 성경 구절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세상의 구세주로 주셨으며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과 또한 이 세상에 는 어느 누구도 구원 얻을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는 말씀이다.

 

코란 구절은 예수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구절로 몇 년 전부터 코란을 통한 복음 전도의 일환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는 아주 유용해 많은 무슬림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코란 내용에는 첫째 예수는 거룩하다는 것과

둘째 예수는 죽음을 이기는 능력이 있다는 것,

셋째 예수는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나는 이구절을 가지고 설교를 하면서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늘나라로 갈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강조한다.

 

2007년의 일이다. 성탄행사 시작전 무슬림들 앞에서 설교를 했다. 일단 그때는 별 일이 없었다,

그런데 집회가 끝난 다음날 우리 센터에 정통무슬림복장을 한 k씨가 찾아왔다,

나는 처음에 약간 두려웠다. 그는 센터에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나를 만나 자고 했고 나는 그 형제와 대화하기 시작했다.

 

매년 4~5차례 학교앞 공원서 집회 다짜고짜 찾아온 무슬림에 긴장 예수설명하자 "복음을 받아들이겠다

 

그는 집회에 한번도 참석해 본적이 없는 사람이 었다. 그런데 우리가 스피커를 크게 틀어놓고 집회를 해서 공원 근처 자기 집까지 들렸던 모양이다.

그는 나의 설교를 계속 들어왔다고 말하면서 자신 역시 코란을 읽은 사람으로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도대체 그런 내용이 어디에 나오는지 궁금했다고 찾아온 것이었다.

 

놀라웠다. 선교지에 와서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해 서 그랬는지 K씨의 등장에 순간 움찔했었다.

또 무슨 반대를 하려고 그러나 조마조마했었는데 그가 털어놓는 이야기는 신기할 정도였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이사람이 참 선지자와 하나님을 알게 하옵소서'

 

나는 본격적으로 K씨 앞에서 '인질'에 대해 그리고 예수가 누구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물론 성경말씀을 확인하면서 말이다.

 

그는 내말을 듣더니 몇가지 질문을 했다. '복음서는 변질된 책이 아니냐?' '하나님이 어떻게 아들이 있을수 있냐?'

 

는 질문 등이었다.

 

나는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찾아가면서 질문에 답했다. 그는 말씀을 확인하면서 차츰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마지막 설명을 하면서 그에게 복음에 반응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는 복음을 받아들이겠다고 고백햇고 예수를 믿겠다고 말했다.

 

나는 너무 감사해 그의 손을 잡고 기도햇다.

 

나는 이일로 하나님께서는 대중 집회를 통해서도 일하시고 집회에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소리만 듣고도 구원하시는 분임을 경험하게 됬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고 살아갔으면 좋겠다.

 

이 글을 읽고 / 앞으로 계속 잘 이끌어 주셔서 훌률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워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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