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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예배설교 :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

 

 


제목 : 감사하는 자의 복

말씀 : 시107:1~7

1.감사는 현재를 행복하게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가 누굽니까?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굽니까? 그것은 권세나 지식이나 재물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키가 크고, 인물이 훤칠하고, 능력이 많은 사람도 아닙니다. 정말로 행복하고 부유한 사람은 감사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이요, 모든 것을 누리는 사람이요, 그래서 진정한 행복을 아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100여세대가 살고 있는 15평짜리 낡은 아파트 단지가 있다고 칩시다. 여기에 모여사는 사람들은 물론 특별한 경우도 있겠지만 아마도 대부분은 기본 재산도 별로 많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월급도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재산도 월급도 많지 않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천차만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연속극에 나오는 넓고 호화스러운 집과 멋진 청춘남녀들과 그들이 다니는 멋진 직장을 보면서 저 사람들은 무슨 복이 많아서 저렇게 좋은 집에서 좋은 직장을 다니며 너무나 멋지게 생긴 사람들과 사는데 내 꼴은 이게 뭐냐고 탄식하며 원망하며 불만이 가득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집에 들어갈 때마다 감사할 것입니다. 비록 작지만 열심히 일하고 돌아와 안식할 수 있는 이 귀한 보금자리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나를 기다리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음을 감사합니다. 비록 많은 월급은 아니지만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일터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비록 넉넉지는 않지만 우리 가족 먹을 것, 입을 것, 편히 누워 쉴 수 있는 보금자리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엿새동안 힘써 일하고 주일 하루 쉬면서 예배드리고 가족과 함께 하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떻습니까? 똑같이 기본 재산이나 월급도 많지 않고 15평짜리 낡은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전자의 사람은 그나마 그 작은 아파트도 진정으로 소유하지도 누리지도 못하는 그야말로 가난뱅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후자의 사람은 비록 가진 것이 많지는 않지만 모든 것을 소유하고 모든 것을 누릴 줄 아는 부유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 개를 가지고도 백가지를 누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백개를 가지고도 한가지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면 누가 부자입니까?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물론 한 개를 가졌어도 백가지 천가지를 누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백개 천개를 가졌어도 한가지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만가지를 주어도 한가지도 누리지 못하는 가난뱅이인 것입니다.

인터넷의 어떤 사이트에서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내 손에 펜 한 자루 쥘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그 펜으로 그림도 그릴 수 있고, 사랑의 편지도 쓸 수 있으니까요. 내 입으로 말 한마디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그 입으로 사랑의 말을 할 수 있고, 주님을 찬양할 수 있으니까요. 내 발에 신발 한 켤레가 신을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그 신을 신고 집으로도 일터로도 갈 수 있고, 산책도 할 수 있으니까요.

내 귀로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아름다운 음악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위로의 말을 들을 수 있으니까요. 내 코로 향기를 맡을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은은한 꽃향기와 맛있는 음식 냄새와 사랑하는 이의 체취를 느낄 수 있으니까요. 내 곁에 부모형제와 친구가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서로 의지하고 기대고 마음을 털어놓으며 따뜻한 위로의 말도 전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못해도 손에 펜만 한 자루 쥘 수 있어도, 말만 할 수 있어도, 들을 수만 있어도, 걸을 수만 있어도, 냄새만 맡을 수 있어도, 내 곁에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그것만으로 감사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뭔가 가치와 의미와 보람과 기쁨을 찾는데는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이라도 가진 것을 진정으로 누릴 줄 아는 사람의 것입니다. 지식이나 권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 하나라도 감사할 줄 아는 자의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 격언에는 천국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로 가득한 곳이고, 지옥은 불평하는 자들로 가득한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특별히 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없는 거, 모자라 거, 약한 것, 부족한 것 생각하며 원망 불평 낙심 절망하지 말고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살전5:18절에서는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정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이 풍성한 계절을 주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멀쩡한 사지를 주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 자유와 평화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더 많은 것을 달라고 하기전에 먼저 감사함으로 행복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저와 여러분은 감사와 은혜가 충만한 심령으로 기쁨이 충만한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감사는 행복한 미래를 보장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감사는 오늘을 행복하게 할 뿐 아니라 내일의 복을 보장해 주는 가장 확실한 보증수표이기도 합니다. 감사할 때에 지금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지만 감사할 때에 힘도 생기고 지혜도 생기고 용기가 생깁니다. 긍정적 적극적 에너지 넘치게 됩니다.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여유가 생깁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게 됩니다. 그래서 앞길이 열리고 그래서 더 많은 것들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체불만족의 저자 오토다케 히로타다는 태어나면서부터 사지가 없이 머리와 몸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좌절과 원망이 아니라 이런 아들을 주신 것을 감사하며 긍정적으로 열심히 키웠습니다. 그에게 없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을 생각하며 그것을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특수학교에 보내지 않고 일반학교에 보내 정상적인 아이들과 함께 교육을 받게 하고 그들과 함께 농구도 하고 축구도 했습니다. 대학에 가서는 정상적인 학생들보다 더 많은 동아리 활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당히 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선생으로, 잡지사 기자로, 방송사 캐스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이 오토다케의 부모나 오토다케 본인이 없는 것을 생각하며 원망과 불평 속에 있었다면 이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전생에 내가 무슨 죄가 많아서 이런 아들을 주셨습니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왜 이런 꼴로 나를 태어나게 했습니까? 이런 모습으로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왜 남들 다 가지고 있는 팔다리도 내게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원망하고 불평하였다면 이 사람의 삶의 모습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보나마나 저 길거리 한 모퉁이에서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얻어먹는 거지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토다케의 부모나 그 자신이나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불리한 여건보다는 그들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그것을 최대한 활용했을 때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보다도 오히려 더 감사하며 위대한 일을 감당하며 복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가장 강력한 에너지원입니다. 감사는 자신과 가족과 이웃과 하나님께 대하여 만족감을 느끼게 합니다. 자신과 가족과 이웃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름답게 만듭니다. 긍정의 에너지가 넘치게 만듭니다. 사랑과 기쁨과 용기와 자신감을 가져다줍니다. 갈등과 미움과 저주와 불평과 원망 등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없애버립니다. 또한 감사는 정신적, 육체적 긴장을 완화시켜 줍니다. 면역력을 높이고 활력을 주어 육체의 건강을 지켜줍니다. 질병에 잘 걸리지 않게 하고 설령 질병이 와도 감사와 긍정속에 사는 사람은 치료가 잘 됩니다. 마음이 편해지고, 혈압이 떨어지고, 소화를 잘되게 만듭니다.

여러분, 그래서 이런 사람은 잘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잘 되지요, 힘과 의욕이 생기지요, 마음이 편해지고, 육체의 신진대사도 잘 되지요, 옆에 있는 사람도 기쁘게 하지요, 어려움이 와도 낙심절망하지 않고 용기를 가지고 헤쳐 나가지요, 모든 일에 긍정과 적극성과 성실성을 가지고 임하게 되지요, 그러니 어떻게 잘 안되겠습니까?

그래서 유명한 스펄전 목사님은 “별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 하는 사람에게는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해와 달이 필요 없는 영원한 빛을 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시50:23에서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삶을 통하여 자신과 이웃에게 힘과 의욕과 활력과 기쁨을 주고, 매사에 적극성과 긍정과 열심을 가지고, 그래서 하나님과 이웃을 감동시키고 그래서 오늘이 행복하게 하고 내일의 축복이 보장된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감사가 곧 믿음의 척도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감사는 곧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감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말씀 1-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하며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동서남북 사방에서 모아서 구속하여 주신 은혜를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한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심을 믿는다면 마땅히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창조하심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는다면 감사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이렇게 아름다운 존재로, 이렇게 신비한 존재로 창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셔서 우리에게 맡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셔서 우리의 죄과를 죄대로 갚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걸 알고 믿는다면 어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창조, 인도, 거룩, 의, 선, 구원을 믿는데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감사 곧 믿음이요, 믿음이 곧 감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죄는 감사하지 않는 죄이다.”라고 했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자식이 부모의 은혜를 모른다면 어찌 죄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먹고 입고 잠자고 게다가 천국의 은총까지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는다면 이 어찌 죄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감사가 곧 믿음이고, 믿음이 곧 감사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감사할 수 밖에 없고, 믿음이 있는 자도 감사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미 주신 것이 하나님의 은총임을 고백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주실 것에 대한 믿음으로 감사하며 사심으로 더욱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주님과 동행할때에 더욱 은혜와 기쁨이 충만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구원의 은총에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감사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감사할 수 밖에 없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요건들이 있지만 설령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감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을 비롯한 모든 어둠의 권세에서 해방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2절부터 다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무슨 말씀입니까? 한마디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적들 즉 죄와 마귀와 어둠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속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을 때, 우리가 주리고 목마름으로 피곤할 때 우리를 부르셔서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 돌리고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진정 갈 바를 알지 못하던 인생이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가 생명의 길인지, 어디고 천국길인지 천지도 모르고 제멋대로 살던 인생이었습니다. 죄와 무지와 어둠의 세력에 붙잡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치닫던 인생이었습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커녕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을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건져 주신 것입니다. 다만 건져주실 뿐 아니라 우리가 영원히 거할 저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새 예루살렘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는 더 이상 죄와 무지와 마귀와 죽음의 권세에 억눌려 있는 자가 아니라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시민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찌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큰 은혜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요, 나아가 저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된 것은 더할 나위없이 감사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이 은혜를 아는 자는 감사할 수 밖에 없고, 그래서 감사가 곧 믿음입니다. 또한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는 오늘과 내일의 행복을 보장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은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으로 채워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늘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더 많은 것이 있으면 감사하겠다하지 말고 지금 이미 주어진 것에서 감사거리를 찾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행복해지면 감사하겠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행복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혹시 조금 힘든 일이 있어도 거기에 함몰되지 말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놀라우신 은총가운데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충만한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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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예배설교 (추수감사절예배설교) 하나님의 은혜라

 

 

 


제목: 하나님의 은혜라.

성경: 고전 15:9-10

1517년, 마틴 루터가 독일에서 종교개혁을 시작한 이후 그 영향은 곧바로 인근 유럽지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영국에서는 독일에서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난지 약 20년뒤인 1534년부터 종교개혁의 물결이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신교와 구교가 엎치락뒤치락하다가 1558년에 즉위한 엘리자스(Ⅰ세)여왕에 의해 영국국교회제도가 기틀을 잡게 됩니다. 영국국교회는 제도적으로는 로마카톨릭교회를 따르고, 신앙의 내용에 있어서는 개신교를 따르는 신교와 구교의 절충형 형태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영국국교회의 모습에 반대하여 일어나 운동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청교도 운동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과거 로마 카톨릭 교회의 부패한 잔재를 완전히 버리고 루터와 칼빈의 정신을 따라 철저히 영국교회를 개혁하려고 일어났던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개인의 중생과 성화를 중시하며, 가정에서의 기도생활, 사회에서의 엄격한 도덕생활과 절제의 생활로 참다운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들의 이러한 태도는 결국 영국국교회의 탄압을 받게 되어 일부는 국내에서 끝까지 싸우다가 죽기도 하고 다른 일부는 유럽대륙으로 이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그들이 꿈꾸는 신앙의 자유를 누리며, 참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상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102명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 미국을 향하여 출발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1620년 9월 16일의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몇 개월간의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1621년 1월 미국의 동부해안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천신마고 끝에 도착한 그땅에는 그들을 반겨줄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니 반겨주기는커녕 그들은 그해 겨울이 지나기 전에 그러니까 불과 2-3개월동안에 질병과 인디언의 습격을 받아 반수 이상이 죽고 마는 불행을 당하고 맙니다. 그러나 그러한 악조건속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속에서 필사적인 개척자정신을 발휘하여 그 해 가을에는 어느 정도의 농산물을 수확하게 됩니다. 그들은 첫열매를 거두어 들이고 나서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울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며 감사제를 지냈습니다. 이것이 유래가 되어 오늘날 교회에서는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주일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은 온갖 어려움속에서도 수확을 할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던 청교도의 정신을 따라서 지금까지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함께 기쁨을 나누는 절기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바울의 고백은 우리가 무엇 때문에 누구에게 감사해야 하는지를 잘나타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는 바울의 감사의 내용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고백은 자신의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볼때, 걸어온 자취자취 돌아볼 때, 그리고 현재 자기의 위치를 생각해 볼 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것이라고하는 감사와 감격에 벅차 외친 영혼의 고백이었습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이러한 바울의 감사가 우리 모두의 감사가 되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바울은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감사했을까, 왜 우리는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같이 생각해보고자합니다.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애창하는 찬송가 405장의 작시자는 죤.뉴턴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죄라는 죄는 안지어본 죄가 없을 정도로 많은 죄를 지었던 탕자였습니다. 노예상인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후 후에 목사가 되어 자신과 같은 엄청난 죄인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격에 벅차 읊은 시가 바로 저 유명한 “Amazing grace”입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은혜 고마와

나처음 믿은 그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찬양 하리라.”

우리의 지난 세월을 돌아봅시다. 지금 우리의 주위를 둘러 봅시다. 목석이 아니라면, 소나 말과 돼지같은 짐승이 아니라면 우리는 정말 감사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나를 낳아 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이 계시니 감사합니다. 형제자매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가 있습니다. 머리둘 보금자리가 있습니다. 자녀가 있으니 감사합니다. 땀흘려 일할 수 있는 일터가 있습니다. 사시사철 아름다운 계절이 있습니다. 저 눈부신 태양이 있습니다. 맑은 물, 신선한 공기. 그저 감사 감사할 뿐입니다. 미우나 고우나 우리의 이웃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웃이 있다는 것 정말 감사하십시오. 더더구나 사랑하는 주의성도들이 여러분 곁에 있다는 것 정말 감사하십시오. 감사함으로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이 만약 저 무인도에 혼자 살게 되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아마 며칠도 못 살고 미쳐서 죽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우리는 감사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감사의 조건들이 하나하나 모여 오늘의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이땅에 이렇게 서 있는것, 나혼자 가능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참으로 얼마나 많은 다른 사람들의 은혜를 입고 사는 존재인지 모릅니다. 설령 여러분곁에 별로 달갑지 않은 이웃이 있더라도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비 신앙인들과 다른 차원의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감사는 한단계 높은 차원의 감사입니다. 그저 우리가 복받고, 물질적으로 무언가 척척 풀려 나갈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남들처럼 지위가 높지 않다고 해도, 돈이 남들처럼 많지 않다고 해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리의 주위에는 감사해야 할 일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정도로도 우리의 감사의 조건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한단계 더 높은 수준의 감사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속에 나타난 바울의 감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고전 9:19-22에 고백했던 것처럼 때로는 자존심도 다팽개치고 살았습니다. 어리석다고 비웃음을 당하며 살았습니다. 미련하게 살았습니다. 주변도 없고 고집도 없고 속도 없는 무골충과 같이 살았습니다. 억울하게 핍박당하며 살았습니다. 죽을 고비를 몇번이나 넘기며 살았습니다. 왜그랬을까요? 무엇이 그 똑똑했던 바울을 그렇게도 바보로 만들었을까요? 그 이유는 오직 하나, 하나님의 사랑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은총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 그는 “내까짓게 뭔데...”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죽어라고 자기를 포기하고 살았지만 하나님의 고마우심에 비해본다면 억만분의 일도 보답되지 않습니다. 그 은혜와 사랑이 너무너무 고마와 “어떻게 하면 보답하고 살까?”그것만 생각하고 살다보니 “나”라는 존재는 다 죽어 없어지고 주님만 남게 되었습니다. 고후 11:22-27까지 자기의 좋은 조건을 다 열거하면서 그러나 “이까짓게 뭔데...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과 고마우심을 생각하면 이제는 자신이 박살이나고 가루가 된다해도 아무런 여한도 없었습니다. 억만분의 일이든 보답할 수만 있다면 자기 한 몸 불속에라도 던질 각오가 되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왜요? 나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당신의 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우리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망극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 못박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를 살리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버리신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감사찬양하며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는 정말 간사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아서 불평을 할 시간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니 감사할일이 이렇게도 많은데, 감사할 것을 찾아도 다 찾지 못할판에 왜 불평거리를 찾아야 한단 말입니까?

지금 저 밖을 잠시 내다 보십시오. 하늘을 한 번 우러러 보십시오. 저 신비로운 산천을 한 번 둘러 보십시오.돌아보면 볼수록, 생각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것이 없습니다.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오늘날까지 그 신비한 경륜가운데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경이로움을 한 번 보십시오. 저 에머랄드빛 하늘을 창조하신 분은 누구십니까? 저 화창한 봄날을 주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꽁꽁 얼어붙은 땅에 묻혀 있던 그 작은 씨앗하나에 다시금 싹을 틔우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저 신비롭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이 가을의 풍요로운 결실을 주시는 분을 누구십니까? 누가 저 따사로운 태양빛을 주고 계십니까?

여러분께서는 저 대자연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들리십니까?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아니 들을려고 하지 않아도 들려야 합니다. 우리의 지성이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의 이성이 구원받은 이성이라면, 우리의 감성이 구원받은 감성이라면 우리는 한 마리 작은 새의 지저귐을 들으며 거기서 하나님의 찬미소리를 듣습니다. 들녁의 한 작은 들꽃을 보며 거기서 하니님의 신비로운 솜씨를 발견합니다.

탕자가 집을 떠나 허랑방탕할때는 어머니의 사랑을 잘 모릅니다. 고마움도 모릅니다. 밥 한그릇의 소중함도 모릅니다. 그러나 허랑방탕하다가 있는 것을 다 허비하고 돌아왔을 때 그를 맞이하는 따뜻한 어머니의 품에서 탕자는 어머니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허랑방탕할때는 밥은 그냥 밥일뿐이었습니다. 자신이 입고 있는 옷도 그냥 그저 입혀 있는 옷에 불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모든 것을 허비하고 돌아와서 어머니 품에 안겼을 때 그는 어머니의 밥 한 그릇에 눈물겨운 고마움을 알게 됩니다. 어머니가 깨끗하게 빨아 입히는 그 옷을 입으며, 그는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품에 안겼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살때는 저 대자연의 아름다움도 고마움도 제대로 알수 없습니다. 풀 한포기, 꽃 한송이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저 태양이 저 물이 공기가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품에 안긴 사람은 압니다. 구원받은 이성은 거기서 하나님의 찬양소리를 듣습니다. 감사하게 됩니다.

어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그뿐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나라는 존재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입니까? 나보다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보다 윤리적으로 깨끗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보다 점잖고 잘나고 지위 높은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왜 하필이면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와 같은 나를 사랑하십니까? 내가 무엇이 그렇게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이기 당신의 아들을 주십니까? 무엇이 내가 잘한 것이 있다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고귀한 생명을 주신단 말입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슨말을 하겠습니까? 그저 입이 있어 겨우 한마디 할수 있다면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뿐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한마디 뿐이 아니겠습니까?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세계 복음전도대회’가 세계 4,000여명의 대표가 모여서 “성경이 말씀되게 하자”라는 주제를 가지고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틀째 저녁 예배에 특별찬송을 위해 한 맹인 여가수가 안내원의 안내를 받으며 무대 중앙에 올라섰습니다. 그리고는 찬송하기 시작합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못하네

저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위에

죄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하셨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이 맹인 가수가 조용히 찬송을 부르는 동안 4,000여 청중들은 감사의 감동에 젖어 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듯 한사람 한사람씩 감사의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거기 모인 모든 대표들은 감사로 성령의 충만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이 맹인 여가수는 6.25전쟁때 두눈을 잃고 선교사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음악공부를하여 가수가 된 한국인 킴 스윜양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 맹인가수가 가졌던 그런 감사가 있습니까? 우리는 정말 감사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지구상에 왔다간 사람은 수천억이 된다고 합니다. 그 수천억중의 한 사람인 나,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 수천억중의 한 사람에 불과한 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만큼 그렇게 소중한 존재가 아닙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수천억원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여러분에게 있어서 1원이라는게 얼마나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사실 하나님앞에서 우리는 수천억원중에 1원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나 하나쯤 이 세상에서 없어 진다 해도, 세상은 눈하나도 깜짝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로 그런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나를 사랑하셔서 이 아름다운 대 자연을 우리게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 수천억중의 한 사람에 불과한 나를 당신의 자녀로 인치셨다는 말씀입니다. 지옥의 형벌에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수가 있단 말입니까?

한 사형수가 있다고 합시다. 사형날자가 잡혀 이제 철장안에서 죽을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이제는 땅도 하늘도 봄 여름도 부귀 영화 권세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이제 그 사형수에게 있어서는 전혀 무용지물들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특사로 무죄방면되었다고 합시다. 그가 감옥에서 나오는 순간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아마도 엎드려 땅에 입이라도 맞추지 않겠습니까? 하늘을 우러러 보며 환호성을 지르지 않겠습니까? 길가에 피어 있는 꽃은 얼마나 아름다워 보일까요? 그렇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나오는 순간 그에게 펼쳐지는 모든 것에는 이전에는 그가 미쳐 몰랐던 엄청난 의미가 부여 될것것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실 모두가 한 사형수였습니다. 바로 그래서 예수께서 오셨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있어서 세상의 의미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구원받기 전과 구원받은 후에는 모든 것이 다른 의미다 부여됩니다. 아니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전에는 구원받지 못한 이성 때문에 알지 못했던 것을 구원받은 이성의 활동으로 비로소 알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구원받은 이성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이제는 구받은 지성의 눈으로 생각하십시오. 이제는 구원받은 감성의 눈으로 기쁨을 누리십시오. 감사하십시오. 지금까지 여러분의 감사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돈벌었을 때만 감사하는 사람, 돈 잃으면 감사하지 못합니다. 건강하다고만 감사하는 사람, 건강 잃었을 때는 감사하지 못합니다. 성공했다고만 감사하는 사람, 실패하면 감사 못합니다. 내 소원들어주셨다고만 감사하는 사람, 내소원이 안이루질때는 감사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감사는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단순히 풀한포기를 바라보며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한끼의 밥을 먹으면서 진정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 그래서 그 희생을 통하여 나를 살리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승화된 감사를 통하여, 진정한 감사를 통하여 기쁨의 삶을 살수 있습니다. 감격의 삶을 살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은혜를 정말이지 마음속에 깊이 되새기며 진정한 감사와 사랑과 기쁨을 누리는 여러분의 삶이 되어지시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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