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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가족공동체 이해를 통한 선교전략 / 움마 다르 일부다처제 수피즘

 


장훈태-천안대학교 기독교학부 선교학


들어가는 말


2001년 9월 11일 테러 사건 이후 지구촌 사람들은 이슬람1)교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런 관심과 함께 이슬람 관련 방송, 학술세미나, 서적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왜 이런 현상들이 갑자기 일어나는 것일까라는 의구심마저 생긴다.


라민 샤네 교수는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가장 큰 차이중의 하나는 기독교는 성경을 현지어로 번역하지만 이슬람은 꾸란을 현지어로 절대로 번역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는 아랍권의 종교적 근본주의가 세계 각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기독교는 사회의 도덕성이나 사회 참여에 대한 프로그램 또는 마인드보다는 개인적인 신앙차원 즉 종교적 사유화에 더 집중되어 있다. 반면 이슬람은 교회와 국가를 구분하지 않고 양자를 통합시키는 사고 체계를 갖고 있다2)고 지적한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이슬람에 대한 오해를 하거나 이해기 부족하여 혼돈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이슬람에 대한 오해가 있다. 기독교인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을 기독교의 또 하나의 형태라고 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슬람 신앙을 알라와 신자의 개인적인 관계로 보고 있는데 이것이 이슬람에 대한 심각한 오해이다. 우리는 이슬람의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종교의 창시자이자 첫 번째 이슬람 국가의 건국인 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슬람은 정치와 종교를 하나로 본다.3) 정치와 종교의 일치를 통해 그들은 또 하나의 집단을 이루며 전 세계를 이슬람화하려는 전략을 가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스리랑카의 이슬람이다. 스리랑카 무슬림들은 가톨릭계의 중 · 고등학교를 인수한 후 무슬림 학교로 변경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4) 이들은 하나의 종족집단을 형성하여 기독교와 대항하는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우리 선교사들이나 외국 인권단체의 보고를 통하여 우리는 계속 이슬람 국가에서 일어나는 기독교 신자들이 당하는 박해소식을 보면 알 수 있다.5) 이슬람은 종교의 다원화를 거부하고 종교가정치, 사회의 모든 분야를 독점하려고 한다. 이슬람은 영혼구원을 위한 종교 본질보다는 국가와 사회를 강제적이라도 이슬람화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리고 이슬람사회의 종교적 비관용성은 날로 더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이 관용의 종교라는 주장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다. 전호진 박사는 ‘이슬람 원리주의는 자기들 나름대로는 할말이 있을지 모르나 합리성과 정당성을 상실한 극단의 논리이다. 특히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이슬람을 정치 이데올로기화하고 있다. 대부분의 이슬람 사회도 이슬람을 이데올로기로 몰아가고 있다’고 지적한다.6) 이런 지적과 함께 이슬람의 가족제도에 대한 일반적인 특징과 이슬람 공동체의 복음전달, 장애요인과 가능성에 대한 진단을 통하여 복음 전달의 접촉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Ⅰ 이슬람의 가족제도


1.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Ummah)


이슬람은 전 세계 인구 63억의 21%에 해당하는 13억의 무슬림을 가지고 있는데 앞으로 계속 증가할 것이라고 한다.7) 최근 들어 무슬림의 성장속도는 어느 종교보다 빠르다. 이슬람은 96%로 가장 높고, 힌두교는 63%, 기독교는 55.6%이다.8) 특히 무슬림은 서부 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 인도네시아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에 걸쳐 살고 있다. 지난 20세기의 무슬림 성장은 대단했으며, 1900년도에는 12.3%에서 2000년은 21.1%로 성장했다. 이는 대부분 높은 출생률과 이주로 인한 성장이다. 서부 아프리카와 인도네시아, 미국에서는 개종으로 인한 성장률이 가장 높은 추세이다. 이처럼 급성장 하는 이슬람의 원동력은 무엇이며, 이들의 집단적 힘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바로 이슬람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이슬람은 무함마드가 A. D 622년 메디나(Medina: al-Madina, 도시)9)로 피신하면서 기본 생활에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마호메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메디나에 살고 있던 정주자로서 그들을 지원한 안사르(Ansar)와 메카에서 온 자신의 추종자인 ‘무하지룬’(Muhajirun)의 형제를 맺게 함으로10) 한 집안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ummah; 대가족)의11) 주요한 기원이 되었으며 ‘이슬람 형제애’를 이룩하는 기초가 되었다. 메디나의 무슬림 공동체는 단순한 공동체에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국가이며, 그 후의 사건의 경과로 인해서 제국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다. 이슬람 공동체 형성의 또 하나의 원인은 무함마드가 죽기전에 행한 마지막 설교에서 ‘이슬람의 형제애’를 역설하였다고 한다.


이슬람의 잠언에서도 한 무슬림이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무슬림이 아니라고 규정한다. 이란의 혁명가였던 호메이니는 이슬람 혁명에 성공한 후 "우리 이슬람은 다른 정부와 다른 지역에 거주할 지라도 한 가족이다"라고 선언하므로 이란을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었다. 이슬람은 무슬림을 형제애로 묶어주는 공동체를 움마라고 하고 이를 알라 신이 세운 거룩한 기구로 믿는다. 이슬람 사회에서 움마의 구속력과 기본적인 특징은 가정이라는 숭고한 체제 속에서 길러지고 북돋아지는 경건성과 도덕적 행위이다. 이러한 배경을 보면서 가족 구성원들과 그에 딸린 식구들의 권한, 의무, 특권과 관련된 분명하고 상세한 훈계와 지시 사항들이 꾸란과 하디스(hadith) 문서에서 발견된다. 더욱이, 가정 생활의 실질적인 모델은 우리가 사랑하는 선지자의 삶의 형태로 주어진다. 무슬림에서 움마는 사회의 기본단위로서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사회의 기본적인 단위로서 가정은 상호적인 의무가 있다. 개인은 그 자체로 중요치 않고, 사회적인 존재로서 중요하다.12)


이러한 배경에서 무함마드가 형제애와 평등사상을 강조하게 된 원인은 메카에서 13년 동안 신의 계시를 전달받으면서 활동했던 시기를 메카시대라고 한다. 미신을 타파하고 우상숭배를 금지해야 한다는 유일신 유신론 사상13)의 운동을 전개했던 것이 메카에서 그의 주된 임무였다면 메디나에서는 사막에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생존 경쟁으로 인하여 야기된 부족간의 갈등을 치료하고 메카 아주자와 메디나 후원자 및 유대인들 간의 서로 다른 정치적, 종교적 목적을 융화시켜 하나의 공동체(ummah) 즉 이슬람 신앙공동체로 만드는 것이 그의 메디나 사명이었다. 그래서 그는 먼저 형제애 사상을 고취14)시켰다. 이슬람에서 형제애 혹은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한 핏줄을 이어받은 것을 강조할 뿐 아니라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류 모두가 신의 아들이며 딸이라는 것을 내세워 신 앞에서는 인간 모두가 똑같다는 평등사상을 펼쳐 나간다. 그러나 이슬람의 형제애 혹은 평등사상을 보게 되면 남성 중심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모스크 사원을 출입하는 것이나 집안에서의 활동을 보면 남자와 여자의 만남이 허용되지 않을 뿐 아니라 구별되어 있다. 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에서 여성의 위치는 상당히 위축된 상태라고 볼 수 있다.15) 최근 들어 여성 해방운동가들에 의해 무슬림 여성의 활동 범위가 점점 넓어지고 있는 추세이지만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많은 제약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꾸란에 나타난 움마는, 먼저 윤리적 공동체로서 신자들이 선행을 서로 격려하고, 악덕을 미워하며 배제하는 곳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움마는 단순히 신자들이 모이는 종교 공동체가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다. 움마는 정치와 종교가 하나가 되 철저한 신정국가(theocracy)일 뿐 아니라 순수한 종교와 순수한 정치의 분리가 불가능하며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분리가 없다.16) 따라서 움마라는 이슬람의 공동체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정교분리는 상상할 수 없다. 종교와 국가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연합체이며, 이것이 후에 이슬람이 확산되는데 중요한 모체가 되었다.17) 실질적으로 이슬람 사회에서 국가는 신정(神政)일 뿐 아니라 국가를 통치하는 왕이나 대통령은 살아있는 신과도 같다고 믿는다. 이슬람 국가에서 알라, 왕, 국가는 삼위일체일 뿐 아니라 이를 비판하거나 파괴하는 자는 처벌을 받게 될 만큼 종교와 국가는 연합체이고 하나이다. 그러므로 이슬람에서 움마는 대가족일 뿐 아니라 일차적인 집단(움마)인 것이다.18)

 

2. 무슬림 가족과 일반적 특징


독실한 무슬림들에게 이슬람의 제도나 관습은 성스러운 율법으로 성립된 종교적인 정치체제를 의미하였다. 따라서 그 주권의 원천은 신이며 주권자인 칼리프이다. 즉 칼리프의 일차적인 임무는 이슬람을 지탱하고 전파하는데 있다. 그 율법은 신에 의해서 계시된 성스러운 법률이고 공인된 해석자들에 의해서 확충된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무슬림들은 이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단지 신앙과 의식과 종교적인 행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형사적인 문제는 물론 가족제도와 다른 사회에서는 세속적인 권력에 의해서 처리되어야 할 것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볼 때 무슬림의 가족 혹은 이슬람의 넓은 집단 사회 가운데 그 기초가 되는 공동체인 가족을 이해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슬람 사회가 다른 문명사회와 비교해 볼 때 나름대로 특이한 가족제도와 관습을 가지고 있는데, 무슬림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제도들은 율법의 지배를 받는다고 보아야 한다.19) 무슬림 가족은 율법의 기초아래 새로운 가정, 새로운 국가, 새로운 사회조직, 새로운 교리로서 가족을 이끌어간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무슬림은 상호 유대관계를 돈독히 하고 있는 가족 공동체를 이루며 이를 중심으로 하여 활동한다. 그러면서도 가정내부에는 평등한 가족관계가 아닌 전향적인 평등관계를 가지는 경우가 있다. 그럼에도 그들의 가정은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을 뿐 아니라 쉽게 파괴되지 않는다.


무슬림의 가정은 때로는 무미건조해 보일 경우가 있다. 그렇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삶은 은은한 사랑이 배여 있는데 이는 공동체적인 삶의 패턴이 이를 증명하는데, 특히 무슬림들의 주거형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무슬림의 주거 형태의 표본은 다르(dar)라고 불리는 가옥이다. ‘다르’는 크든 작든 대부분의 가옥은 중앙에 위치란 마당, 경우에 따라서는 돔으로 덮인 마당과 연결된 방들을 보게 된다. 혹은 건물(bayt)들로 구성되기도 한다. 가옥들은 그 규모, 방들의 숫자, 분수나 멋지게 꾸민 수도시설, 스투코로 된 조각이나 회화, 기타 개인적인 용도의 시설물의 유무에 따라서 차이가 난다.20) 필자가 무슬림 가정을 방문했을 때 가옥의 구조가 지역이나 국기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보았지만 대부분의 가옥 구조는 비슷했다. 아프리카수단의 경우는 커다란 대지 위에 마당은 중앙에 위치하고 침실과 주방은 별도로 되어 있었다. 이집트의 경우는 시골을 제외하고 도시는 3층집으로 되어 있으면서 남성과 여성의 응접실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러나 개방화된 이슬람 지역(마그레브지역)에서는 공동체 중심으로 중앙에 거실이 있어 모두가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구조화되어 있었다. 집 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싸롱을 중심으로 한 긴 의자는 침대의 역할도 하기 때문에 생활이 편리하고, 가족 공동체간의 결속력을 갖도록 한다. 뿐만 아니라 시부모를 모시는 일로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며, 부모가 귀찮아 자녀를 괄시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대가족으로 한 집에서 함께 거주하며 음식을 나눌 뿐 아니라 명예와 수치까지도 함께 공유한다.

 

1) 결속력이 강한 무슬림 가정


앞에서 무슬림 가정은21) 공동체를 중심으로 성립되었다고 했다. 그 이유는 서구사회의 가정이 선진화가 되어 개인적이면서 핵가족화 되어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무슬림 가정은 결코 개인적이 아닌 결속력이 강한 공동체의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가족공동체의 핵심은 남성 중심이면서 장남의 권위가 매우 높다.22) 무슬림 가족회의에서 의사결정이나 중요한 사항들은 장남의 의사가 상당히 반영된다. 물론 아버지는 모든 면에서 그 가정의 중심 역할을 한다. 한 가정 안에서 가족구성원의 행위나 결정이 독립적일 수 없으며 단절된 ‘너와 나’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무슬림 가정에서 남자가 분가할 경우도 예외가 되지 않는다. 무슬림 가족 공동체로부터 분가한 형제들은 서구사회에 비하여 여전히 깊은 가족적 공동체와 유대관계를 갖고 있으며 경제적으로는 대개 독립을 한다. 그러나 부모와 자녀 사이는 그렇지 않다. 부모와 자녀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신분상 위치나 경제적인 측면에서 한 울타리 안에 있다. 한 예로 자식이 이슬람 율법이나 종교적인 행위에 있어 범법을 행하였을 경우 부모가 모든 것을 책임을 져야 한다. 부모는 자식에 대한 책임이 언제나 뒤따른다는 것을 보여 준다.

 


2) 무슬림 가정에서 부모의 절대적 권위


무슬림 가정에서 부모는 모든 것에 대한 권위가 존중된다. 무슬림 가정에서 부모는 자녀에게 대한 일종의 소유권을 가진다. 무슬림의 부모가 자신의 자녀에게 가혹한 학대를 가해도 다른 사람이 옆에서 간섭을 할 수 없다. 무슬림 사회에게 아동학대라는 용어를 찾기란 어렵다.


만약 자녀가 사회적 신분이나 명예가 있게 되면 전적으로 부모의 공덕으로 돌려진다. 자녀가 잘못하면 그것도 부모의 절대적인 책임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자녀가 많은 부(富)를 가지게 되면 그것도 부모의 부와 다를 바가 없다. 그만큼 부모의 권위는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부모의 절대적인 권위만큼 평온하거나 안정적이지는 못한 것이 무슬림가정의 단점이다. 무슬림 가정에서 아버지의 지배적인 태도 때문에 아내와 자녀들이 자신들의 개인적인 자유를 찾고자 하여 속이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덧붙인다면 아내들은 이 부분에서 많은 비밀을 가지고 있다.23) 그래서 아내나 자녀들이 남편이나 아버지에게 무엇을 말하더라도 다시 그녀의 남편에게 옮겨 말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행동으로 간주된다. 한 여인이 외적으로 사소한 말로 한 가정에 파문을 일으키거나 당신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릴 경우 이혼24)까지 초래한다. 이 같은 환경으로 인해 여성들은 부당한 취급과 법적인 구제책이 없는 결혼 생활에서 종종 정서적인 생존을 위해 교묘한 방법이나 속임수를 쓰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기독교인 아내들은 남편에게 순종하고 따르며 존경할 것을 권면한다.(엡 5:22-33).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순종에 대한 모델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아브라함을 주라고 부르면서 순종"한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은 사라가 원하는 대로 하갈을 아내로 취하기도 했고 또 그녀를 내쫓기도 했다. 아내들의 이슬람적인 순종과 성경적인 순종은 비교할 수 없다. 이슬람적 순종은 외적이고 그만큼 쉽게 할 수 있지만, 곧 모욕과 증오감, 복수심과 기만을 낳기도 한다. 반면에 성경이 말하는 순종은 마음에서 스스로 받아들이고 신뢰와 존경을 주며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며 충실함을 소중히 여긴다. 아무튼 무슬림 사회에서 부모의 권위나 남편의 권위는 절대적이지만 반대로 모순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무슬림 사회의 생활이 성경적인 토대 위에서 기초되었을때 부부관계, 자식과의 관계는 하나님의 사랑을 드려내게 되며, 이는 친구에게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 된다.


3) 무슬림 가족 공동체의 명예심


이슬람 사회에 있어서 한 가정의 명예와 가족 구성원인 개인의 명예는 동일하게 여겨진다.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의 명예는 그 가족의 명예가 되고, 한 사람의 수치는 곧 바로 전체 가족에게 영향을 미친다. 가족 중에 하나가 명예를 더럽혔으면 그는 가정에서 추방되기도 하며 다른 누군가 자기 가족 중 한 사람을 욕되게 한다면 가족 전체 명예를 더럽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순히 한 가족의 문제일 뿐 아니라 넓은 의미의 친족 전체의 문제로까지 비화된다. 그만큼 가족의 역할과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이슬람 사회의 가족의 역할로서 먼저 여성의 위치가 분명하고 투명해야 한다. 여성은 정숙함, 정절, 성적 부도덕이 있어서는 안 된다(수라 33:59; 수라 24:2-10; 24:21-16; 27-33; 수라 4:24). 여성들은 결혼에 있어서도 꾸란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먼저 신앙이 있는 배우자 선택의 중요성을 인식하고(수라 60:10; 수라 2:221; 4:25), 특정 결혼에 대한 금기들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결혼의 금기 사항으로 근친상간이 있다(수라 4:22-27).


4) 무슬림 가정에서 모성(母性)의 중요성


무슬림 사회의 일반적인 상황은 어린이 교육에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무슬림가정은 일부다처제이기 때문에 누가 아버지인가를 어린이에게 밝힌다. 입양에 관한 조항은 있을 수 없다. 이런 가운데 모성의 중요성은 더 강조된다.25) 무슬림들은 자녀를 낳고 기르는 헌신적인 어머니의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뜻을 가진 ‘낙원이 어머니의 발에 있다는 것을 잊어 왔다. 여성 및 무슬림 사회 전체는 이슬람이 성공적인 어머니 상이 무슬림의 종교적 완전성으로 본다는 사실을 망각해 왔다. 유아부터 성인초기의 기간동안 그들이 필요로 할 때 그들 곁에 있어주며 그들을 양육할 때 표현되는 어머니의 애정과 관심은 다른 어떤 것으로 대치될 수 없다’는 것이다.26) Schleifer에 의하면, "무슬림 어머니들은 알라와 가족에 대한 기본적인 의무를 다해 왔을 뿐 아니라 지식을 쌓는 등의 다른 활동들을 성공적으로 추구해 왔다. 무슬림 여성들이 전통적으로 학자, 상인, 공예인, 심지어 비상시에는 군인으로서 활동하는 것은 이슬람의 견지에 상반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샤리아’(Sharia)의 관점에서 이러한 활동들은 의무로서 모든 여인들에게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부차적인것들이다. 여성의 기본적인 역할은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모성은 여성이 이생에서 존경받을 수 있고, 궁극적으로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특별한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27)


무슬림 사회에서 모성의 중요성은 어린이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질서 정연하게 양육 받은 아이들은 몇 가지를 기억하며 일생을 살아야 한다. 어린이는 먼저 ‘너희를 낳아준 자궁을 공경하라’(수라 4:1)는 교육을 받는다. 둘째, 다른 어린이에게 축복하라(수라 16:72). 셋째, 부모를 공경하고, 노인을 보살피라(수라 17:23-24). 넷째, 부모에게 감사하라(수라 31:14). 다섯째, 부모에 대한 친절, 어머니는 그를 낳았다는 것(수라 46:15)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슬람 사회에서 모성은 어린이의 성장과 무슬림 공동체의 정체성과 책임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한 가정의 집단성, 돌봄 집단에 소속하고자 하는 문화적 욕구에 기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또한 사람들의 사회생활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방식의 집단성을 수행하는 의미를 배운다.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이슬람에 기반을 둔 것은 아니지만 족장시대를 거쳐 한 가정의 공동체내의 역할로 인해 강화되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슬람 사회의 모성(母性)의 중요성이 강조됨에도 불구하고 이상과 현실은 항상 별개의 것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매춘 어린이 범죄(형제가 자매를 죽이는 행위), 근친상간, 남색, 여성할례, 여성의 동성연애, 가족 구성원과 여성 세계의 이기심 등이 부정적인 면이다. 그렇다고 모든 면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긍정적인 측면도 있는데, 가족간의 화목, 환대, 사람과의 관계, 행사들의 중요성 강조, 가정의 가치, 어린이와 노안을 돌보는 일 등은 어느 가정보다 강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5) 이슬람 사회의 일부다처제


이슬람에서 무함마드는 일부다처제를 인정한다.28) 사회는 제각기 시대적 상황에 따라 불가피하게 또는 남성의 분별없는 성욕으로 일부다처제가 행해져 왔다. 그러나 오늘날 대다수 국가들은 법률적으로 일부일처제를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꾸란을 실정법의 모체로 삼고 있는 이슬람권에서는 예외가 되고 있다. 물론 꾸란도 일부일처제를 원칙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특수한 환경과 조건하에서는 일부다처가 합법적으로 허용하는 예외규정을 두고 있다.29) 그들은 일부다처제의 뿌리를 아브라함에서 찾는다.30) 이런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무슬림 남자들은 네 명까지의 아내를 둘 수 있다. 이슬람에서 일부다처제를 허용하게 된 것은 첫째, 이슬람 초기에 전쟁의 결과로 인해 양산된 전쟁과부와 고아 특히 자립적인 삶이 어려운 여성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시작되었다. 둘째, 아내의 불치병으로 인하여 정상적인 부부생활이 불가능할 경우이다. 셋째, 가족의 대(代)를 잇고 자신의 이름과 가문을 영속화하기 위해서이다. 한 남성이 네 명의 아내를 두었을 경우 부양할 재정적 능력이 있어야 하지만 그것도 특수한 환경에서만 허용되는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31)


그리고 부인들에 대한 남편의 공정성을 보면, 첫째, 각 부인 소유의 독립가옥을.마련하여 주고, 둘째, 각 부인마다 남자의 낮 시간과 밤 시간을 균등하게 분배하고,셋째, 아침이 되면 각 부인을 찾아가 낮 동안 남편이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일이다.32) 그리고 남편은 네 명의 아내 가운데 어느 하나를 편애하지 말아야 하고, 다른 하나는 네 명의 아내를 항상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 그리고 아내들은 상호간 협력하고 질투하지 말아야 하며 서로 다투거나 질투하게 되면 그것은 이혼 사유가 된다.


아무튼 이슬람 사회에서 한 남성이 네 명의 아내를 둘 수 있다는 것은 남녀간의 차별이라고 볼 수 있다. 이슬람 역사 1400년 동안 ‘동등하게’라는 말의 의미를 한 남자가 모든 아내를 물질적인 면에서 똑같이 취급해야 한다는 것으로 가르쳐 왔다. 만약 그가 한 여자에게 반지나 드레스를 주면 다른 여자에게도 같은 품질의 반지나 드레스를 주어야 한다.33) 동등하게라는 논리에 대해서 이 정순 박사는 부인들 사이의 동등함을 말하는 것이며, 한 남자가 네 명의 부인을 둘 수 있는 것은 남녀의 차별이지 동등이 아니라34)고 지적한다. 오늘날 일부다처제를 법적으로 금하는 나라는 마그레브의 튀니지와 소아시아의 터키이다. 일부다처제를 지키는 나라는 모로코, 레바논, 요르단, 수단 등이다. 국가법에 의해 승인에 의해 일부다처제를 실행하는 나라는 시리아, 이란, 소말리아, 파키스탄, 인도35)등이다.

 


6) 남녀차별과 서구의 문제


우리의 삶의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너무나 순진하다 못해 무신경적이라는 것이다. 서구인들은 자신을 남녀로 구별하여 관계하지 않지만 동양에서의 세계관은 남녀가 구분되어 있다. 이들은 항상 자신이 남자인가 여자인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동양 여인이 한 남자와 대화를 한다고 보면 곤란하다. 한 여성이 남자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한 남자와 대화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적절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게 된다. 심지어는 의도적으로 여성이라는 것에 큰 신경을 쓰면서 유혹을 하게 된다. 이런 현상은 동양의 여성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무슬림 여성들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따라서 남녀간의 차별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슬람 학자 알리 다쉬티에 의하면,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 사회에서는 여자는 독립적인 인격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남자의 소유물이었으며, 여자에 대한 어떠한 가혹스런 대우도 허용된 풍속이었다고 한다. 꾸란 4:34에 ‘남자들은 여자의 관리자이며‥ 반항적인 여자라고 생각되는 자들을 충고하고, 또 여자를 침실로 데려가 때리라고 가르친다’. 꾸란 4:38에 ‘남자는 여자의 보호자’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 역시 남녀의 불평등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슬람법에서는 상속에서도 남녀간의 차이가 있음을 언급한다. 남녀간의 상속액 배분 비율은 2대1의 기준이 보통이다.36)


따라서 이슬람에서 남녀 차별은 여자가 얌전한 체해야 하는 정도가 아니라 어느 성별이 중요하고 힘을 가졌는지 실증하는 것이 된다. 남녀 차별은 가문의 명예와 평판이 매우 밀접한 영향을 주기 때문에 가정은 가족들의 이성 관계를 제한하고 조정하며 통제한다. 이는 남성의 권력을 기초로 해서 아랍인들이 여성을 성 차별하는 기반이 되도록 한다.37) 그 이유는 남녀간의 문제를 사회적인 문제로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대단한 잠재력이 있는 힘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슬람 사회에서 남녀간의 차별은 꾸란에서 전반적으로 여성에 대해 부정적인 영향을 나타내고 있어 그 영향이 오늘날 전 이슬람 세계에 미치고 있다.

 

7) 무슬림 가정에서 여성의 보호


이슬람 사회에서 일부다처제를 허용한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했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일부다처제를 개인의 욕구나 성적인 만족을 위한 것보다는 사회복지 개념으로 해석한다. 꾸란 4:3에 "···한 여성이거나 너희 오른 손이 소유한 것이거늘 그것이···적합한 것이라" 이 구절은 고아의 복지를 위한 조건을 제시하면서 결혼에 대한 규칙을 소개하고 있다. 이 결혼 준칙의 선포한 역사적 배경은 「우후드」 전투시기 이후부터라고 본다. 이 전투에서 무슬림 병사들의 사상자가 발생함으로 무슬림 공동체내에는 많은 고아들과 과부들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이들에 대한 대우는 최선을 다해서 돌보아야 하고 인간의 박애정신과 평등원칙에 의하여 다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38)


예로, 모로코에서 한 젊은 남자는 이슬람의 다섯 기둥을 실행하기 위해 메카에 두 번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들었다.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슬람 준칙을 지키기 위해 메카를 순례한 것이다. 무슬림 법에는 여성은 혼사서 자유롭게 메카를 순례하지 못하며, 항상 남자 친척의 남성이나 인도자의 안내가 있어야만 순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만큼 여성은 남성의 보호가 있어야만 활동할 수 있다. 무슬림 여성이 남성과 동행하거나 여행을 할 수 있다. 해도 여성은 베일(veil)을 착용하고 떠나야 한다. 이슬람 공동체에서 베일은 여성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의상이다. 이는 여성으로 하여금 유혹하는 행동, 꾸밈새, 여성의 정숙함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 착용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예속이 아닌 보호로 간주된다. 오늘날 무슬림 여성해방운동가들에 의해 베일에 대한 규정을 법적으로 폐지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얼마 전 터키의 일부 여성들은 베일을 하지 않고도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는 현재 이슬람의 변화이며 여성해방운동가들의 주장을 허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은 베일은 남성들로부터 보호하는 방패일 뿐 아니라 남성에게는 여성에 대한 유혹을 방어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39)


그러나 꾸란에서 제시하는 여성에 대한 좋은 의도의 규칙이나 방법이 있다. 해도여성에 대한 우대정책은 매우 부정적이다. 실질적으로 이슬람 지역에서 고아원이나 여성을 위한 복지시설은 찾아보기 힘들 뿐 아니라 한 남자에게 고아들과 여성을 관리하도록 허락한 것은 이슬람 전통문학 즉 자힐리야 문화가 그들의 세계관과 문화 안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성에 대한 불이익이 얼마나 강한 것인가는 꾸란 4:3에 "…너희를 부정으로부터 보호하여 주는 보다 적합한 것이라"고 했지만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면 결혼한 여성의 불이익이 내용상에 담겨있는 것을 보게 된다. 한 여성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지 못하거나, 성불능이거나 심한 질병으로 성생활을 할 수 없어 이혼을 할 경우 그 부인은 보호해 줄 보호자를 잃게 된다. 이러한 조건으로 인해 질병에 걸린 부인을 보호하면서 다른 여성을 맞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무슬림 사회의 법이나 준칙을 볼 때 꾸란은 대체적으로 여성들에 대해 부정적이다. 여성의 인권이 존중되지 않는 곳, 여성의 권리가 허용되지 않는 곳이 무슬림 가정의 특성이다.

 

Ⅱ. 이슬람 가족제도에 따른 복음 전달


무슬림의 한 구성원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데 많은 장애물로 이슬람 근본주의와 전통적인 교리, 자할리야의 문화,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요소, 남성 중심의 결혼과 권위 등이 있다. 그들이 기독교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인한 어려움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 감정적, 신학적, 역사적, 문화적인 이유들로 인해 기독교에 대해 뿌리 깊은 거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아프리카 식민주의 시절에 제국주의적인 선교로 인한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 기독교인의 이중적인 삶의 모습, 빛과 소금의 역할로 생활화되지 않은 모습들이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가져온 동기였다. 실제적으로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기독교인이라는 말만 들어도 그들은 대화를 거부하거나 외면해 버리는 현실은 과거 서구선교사들과 잘못된 선교정책, 탄압에 의한 것임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요소들도 있지만 더 실제적인 장애요소는 기독교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가족공동체, 국가, 지역 공동체로부터 강한 압박을 받는다.


1. 무슬림 전통주의적 제도로 인한 복음 전달의 장애요인


오늘의 교회는 선교를 전적으로 배제하는 사고방식과 세계관이 만연해 있다. 선교라는 단어의 의미는 재정의 되고 희석되어 일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의미로 다가온다. 오늘날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것만이 선교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선교는 복음적인 측면과 사회적 측면 사이에 항상 균형을 유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재 어떤 측면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지 우리는 쉽게 발견하게 된다. 과거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던 NGO 활동을 통한 기아대책, 지뢰희생자, 고아 입양 문제를 위해 선교하고 모금하는 것, 성경학교를 세우고 선교사를 후원하는 것, 라디오를 통한 복음전파를 위해 모금하는 것이 선교의 일부분이 되었다. 그러나 한 영혼을 사랑하고 그들을 향한 헌신으로 사역하는 선교사와 교회개척, 선교현장의 교역자들을 돕는 선교 헌금을 모금하는 일은 그렇게도 힘이 든다. 그 이유는 교회와 교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선교의 정의에 대한 혼란과 뒤범벅된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원인이다. 이같은 혼돈은 선교가 우월하다는 생각, 선교는 오래 전에 끝이 났다는 사고가 지배적일 때 일차적인 장애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초 중국에서는 ‘교회가 신자 한사람을 얻을 때마다 나라는 국민 한 사람을 잃는다’라는 유행어가 있을 정도로 아시아의 그리도인들 중에는 신앙을 받아들이기 위해 가족들과 고통스럽게 이별을 해야 했던 사람들이 많았었다.40) 또한 북아프리카에서는 기독교 신앙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믿을 경우경찰의 계속적인 검문과 미행을 받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41) 동아프리카의 경우 그리스도를 신앙으로 전적으로 받아들일 경우 여자의 경우는 남자로부터 버림을 받고 남자의 경우는 여자로부터 버림을 받았다.42) 그만큼 신앙의 자유가 없었다. 오히려 이슬람 사회에서는 다른 종교의 회심의 자유보다는 박해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다. 실제적으로 세계 이슬람 국가들은 타종교 국가를 대상으로 이슬람을 전파하면서 자국 내에서 기독교를 선교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슬람은 평화와 정의를 위해 싸우고 이를 위해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이슬람국가에서 기독교인이 무슬림을 향해 ‘당신은 종교의 자유를 믿는가’라고 질문을 하면 물론 믿는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당신의 아들이 기독교로 개종을 한다면 허용하겠는가’라고 질문하면 ‘나는 그의 목을 자를 것입니다’라는 대답43)을 보면, 기독교인에 대한 이해나 회심의 기회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 무슬림임을 알 수 있다.


이슬람 국가에서 무슬림들은 타종교로 개종하는 것은 죽음과 같다. 무슬림 공동체에서 개인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종교적, 가족적, 사회적으로 불가능하도록 제도화되어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이슬람법은 전통적 사회의 종교적 관습, 법률적인 제도, 경제적 적용제도가 배교자로부터 재산이나 생명을 빼앗는 것도 합법적으로 간주한다. 무슬림들은 작은 공동체 안에 한 사람이라도 배교하게 되면 직장에서의 퇴출과 취업 보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들의 배교는 단순히 개종한다는 말로 쉽게 표현하기에는 많은 문제들이 있는데 공동체 곧 작은 공동체인 가족들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복잡한 문제들이 내포되어 있다. 실제적으로 모로코에서 한 자녀가 기독교로 개종을 했는데 그 여파는 아버지와 그 형제들 그리고 그와 관련된 공동체에 연관되어 고통을 받기도 했다. 어떤 한 사람이 이슬람을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데는 엄청난 희생을 지불해야만 한다. 이처럼 이슬람에서 개종하는 사람은 이슬람 공동체로부터의 소외, 부모, 남편, 아내 등으로부터 심한 핍박, 고통, 추방, 불이익 등의 온갖 불이익을 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 회심하는 사람들이 비록 실제적인 숫자와는 여전히 적지만 어느 때보다 증가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슬람권에서 영적인 필요를 점점 더 느끼고 있고 그들을 위한 기도가 강화되기 때문이다. 실제적으로 이슬람 지역의 형제, 자매들은 기독교의 영적인 부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특히, 성육신, 영생, 구원, 죄 용서 등에 대한 용어들은 이슬람에서 듣지 못한 것들이라 매우 관심이 높다.


샤네 교수는 이슬람권 선교의 가장 장애물 중 또 하나는 바로 정치적 문제라고 지적한다.44) 이슬람 사회에서는 정치적인 배경이나 기반 없는 종교를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기독교 선교사들은 정치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현지에서 정치적인 형태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흐려지고 혼동스럽게 된다.


패트릭 존스톤(Patrick Johnstone)은 이슬람 선교장애 요인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왜곡된 이해와 감정적, 신학적, 역사적, 문화적 이유들이라’고45) 지적한 바 있다. 여기서 실제적인 요소는 기독교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국가와 가족으로부터의 강한 압박과 추방을 받는다. 그러므로 이슬람 사회에서 기독교 근본진리를 믿고 신앙생활하기란 그만큼 힘이 든다. 따라서 무슬림 전통주의적 제도에서는 복음의 커뮤니케이션의 장애가 발생하게 되어 선교의 장애가 된다.

 

2. 무슬림 가족 공동체 따른 선교전략


1) 기독교선교 메시지의 사회적 공적 영역에서의 효과


우리는 이슬람권 선교를 위해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가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복음의 접촉점을 찾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이슬람 사역의 어려움이 계속된다면 기독교 선교 메시지가 사회의 공적 영역에서 효과적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만 되는 것인가의 문제가 남게 된다.


이슬람 지역의 선교사역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독교인들의 주장이 분명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종교가 정치보다 더 위대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종교와 정치는 상호 교차하며 정치 공동체와 도덕적 공동체에 의해 상호 중첩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종교가 정치를 인준하고 영향을 미쳐야지 정치가 종교를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에 의해 인준 받는 정치는 정치적 행위가 기독교 신앙과 신실함의 핵심인 정직성과 책임성의 표준에 도달해야 함을 지도자들이 주장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구속하신 하나님 앞에서 책임감을 느껴야 하고 인간 공동체내에서 상호간 책임을 져야 한다.


2) 복음전달의 효과적인 기회


종교는 인간의 연약함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여 보고자 하는 인간실존의 한계에 대한 몸부림이며, 인간 존재 의미에 대한 회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자기실현의 방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슬람도 인간론이 사람의 자력 구원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볼 때 철학적이면서 이데올로기적이다.


무슬림들이 알라에 대하여 경배하거나 꾸란을 낭송할 때, 알리에 대하여 순종할 때 마음에 평안히 오고 사회전반에 걸쳐 진정한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종교이상의 이슬람교는 단순히 종교 이상의 총체적인 삶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의 주장처럼 이슬람은 신앙의 차원을 넘어선 삶 그 자체이다. 하루에 다섯 번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것들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과연 무슬림들이 이러한 삶에 만족하며, 알라에 대한 순종과 행위가 일치하는가에 대하여 묻는다면 회의적이다. 필자는 무슬림들에 대한 태도에 대하여 의문점을 갖는다.


하나는 그들이 신봉하고 믿는 알라에 대한 신앙이 진실하고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는가? 둘째는 강압적이고, 준칙에 의존하고, 불평등적인 신앙 규범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적용되는가? 셋째, 이슬람은 신앙이라고 보기보다는 정치적이라는 점이 더 강하다는 점이다. 넷째, 어떻게 종교가 삶의 일부가 된 무슬림들의 영혼을 악령이 지배하는 것 등이다. 그리고 무슬림들의 일상적인 삶이 꾸란에서 규정하고 있는 엄격한 신앙 행위에 대한 것이라면 무슬림들의 영은 대부분 샤머니즘으로 불리는 악한 영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46)


이슬람의 무속 신앙적인 요인은 신비주의에 속하는 수피즘과 관련이 있다. 수피는 원래 이슬람의 세속적이며 비금욕적인 성격에 반대하면서 출발했다. 이슬람의 창시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는 극에 달했고, 이미 독신주의에 대한 비난과 영적인 기능을 가진 성직자 제도의 부재 등에 기인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치적 생명의 위치에 대한 예비적인 타협 등은 중동 지역의 사람들에게 세속적인 종교로 이해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슬람 지도자들 가운데 이슬람에 헌신적인 정신을 그들의 일상생활에 바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에게 이슬람은 단순한 외적 의례들의 집합이 아닌 영적인 훈련이었다.47) 수피주의자의 핵심은 수도원적이거나 아니면 지도자를 중심으로 하여 이동하면서 꾸란이나 종교적인 경전을 암송하는 것으로 만남을 가졌고, 이러한 암송은 예배의식 성격을 띄어 일종의 춤과 반복적인 리듬 그리고 경전의 암송을 통한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는 수피지도자들을 신봉할 뿐 아니라 최고의 영적 지도자로 섬기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슬람은 다양한 신앙양태를 가졌음에도 과거나 현재에도 극단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이슬람은 기독교의 가장 무서운 상대가 되어 복음에 대해 너무나 강퍅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슬람 내에 복음의 능력이 강력하게 나타날 것을 믿을 만한 증거들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는데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이슬람에 대한 신뢰성에 대한 의문은 복음전달의 좋은 기회가 된다.48) 최근 이슬람의 과격주의자들에 의한 테러 행위는 국제사회에 큰 파장을 가져다주었다. 파키스탄, 알제리, 이집트, 수단, 아프가니스탄, 이란, 유고슬라비아, 인도네시아와 같은 국가에서 발생하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방화와 테러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지하드’(Jihad)라는 명분을 내세워 야만적이고 환멸을 안겨주는 행동을 보여줌으로 많은 무슬림들이 이슬람에 대한 신뢰성에 의문을 갖게 했다. 1999년 인도네시아의 극단적인 이슬람 신봉자들은 교회와 민간인을 향해 약탈을 감행했고, 자바섬에 위치한 교회들을 파괴하기도 했다. 한 교회의 목사 부부가 교회 건물 안에서 이방 신에게 희생 제물로 드려지는 일도 발생했다. 순교자 부부는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죽었지만 그 결과 범죄자 가운데 한 명이 회심하여 믿음을 갖게 되었다.49)


둘째, 이슬람 지역을 향한 중보 기도가 더욱더 강하게 실행되고 있다. 최근 『모로코여 일어나 빛을 발하라』 라는 소책자는 마그레브에 속한 한 국가를 향한 52주중보기도 책자이다.50) 예수 그리스도에게 철저히 회심을 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숫자가 예수의 초자연적인 계시를 통해서 또는 부인할 수 없는 기적적인 치료를 통해서 신앙을 갖게 되었다. 최근 이슬람 지역에서 개인, 가정들 그리고 한 지역 사회가 예수께 돌아오고 있다. 기도는 선교의 돌파구가 되는 도구이다.


셋째, 이슬람국가의 도시화가 복음 전달의 접촉점이 된다. 도시들은 다민족적, 다인종적, 다언어적, 다종교적이다. 이 도시들은 지구촌의 변화를 만드는 곳이며, 권력의 중심지들이다. 도시들이 움직일 때 전세계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51)


도시화는 도전적인 장소이다. 도시들은 사회적, 종교적, 문화적 차이들로 가득할 뿐 아니라 대립하는 세계관, 가치 체계, 생활양식들이 도시 중심지에 밀접하게 존재하고 있다. 이 동일한 장소들이 자연환경과 인간 생활을 총체적으로 황폐화시키는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세력들을 발산한다. 도시들은 많은 종류의 문제들이 발생하여 매일 다투는 전쟁터와 같다. 이런 측면에서 20세기의 선교 개척지는 시골과 같은 지역으로 이식되었지만 이제는 도시를 미래의 개척지라고 생각하는 전환이 필요하다. 지난 20세기까지는 기독교가 시골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21세기의 기독교는 도시에 중심을 잡고 사역해야 할 것이다.


도시로의 인구 이동은 이슬람 공동체의 영향력과 동일한 대가족 공동체의 영향력에서 좀더 떨어진 환경에 머물게 되기 때문에 무슬림들에게는 복음을 접하기에 훨씬 열린 환경이 된다. 그러므로 이슬람 지역에 대한 선교 전략이나 사역을 계획하는 자들은 도시의 실정을 수용해야 한다. 도시 성장의 이면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구속 목적은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다. 이 엄청난 사람들의 군집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역사에 있어 가장 큰 복음화의 기회들 중 하나를 교회에 제공하게 하신다. 대도시에 밀어닥친 여러 인종들, 족속들, 다양한 인간 집단들은 지역적으로 과거의 어느 때보다 더 접근하기 용이하다. 경우에 따라서 새로운 도시 거주자들이 겪는 변화의 과정들은 그들로 하여금 더 복음을 잘 받아들이게 하기도 한다. 또한 도시화에 따라 공통적으로 발생하는 사회 문제인 가난, 질병, 마약, 매춘, 범죄, 청소년의 일탈행위 등이 도시 한가운데 방치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전도 종족 집단(Unreached People Group)을52) 향한 복음 전달과 도시선교의 기회가 된다.


따라서 세계의 도시화는 선교의 구조로 보아야 할 뿐 아니라 종말론적 구조로도 보아야 한다. 우리 시대의 하나님께서는 지구의 사람들을 서로 더 밀접하게 접촉시키고, 더 많이 서로 영향을 끼치고 의존하여 복음을 듣게 하기 위해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요인들을 통해 결정적인 활동을 하고 계신다.53) 이 활동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구속의 목적을 역사에 진척시킨다. 우리 시대의 표적은 이슬람권 도시이다. 도시를 향한 전 세계적인 이주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기독교 선교의 가장 위대한 무대를 설치하시고 최후의 시간을 위한 무대를 준비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3) 무슬림 선교를 위한 상황화


최근 상황화에 대해 기술한 서적들이 많이 있다.54) 그래서 무슬림을 위해 사역하고자 하는 이들은 숙독하여 지역마다 나름대로의 전략과 개념을 가지고 사역을 추진할 수 있을까를 타진할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 이런 사역을 위해서는 복음을 상황화하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다양한 생각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자신들의 문화 가운데 있는 무슬림에게 나아가기 위해 완전히 무슬림 스타일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55) 이러한 접근 방법은 무슬림들과 동일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슬림은 사회적으로 완전히 독립적으로 될 수 있는 서구인과는 다르게 가족과 공동체와 연루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둘째, 복음을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전해 주려는 타문화 사역자 그룹이 있다. 이들은 문화적으로 현지문화에 장애가 되는 것은 말씀을 전할 때 반드시 제거해야 된다는 것이다. 만약 복음이 전달된다면 현지인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셋째, 상황화에 있어서 우리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코 다른 문화, 언어그룹, 종교적 공동체에 완전히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무슬림 선교를 위한 상황아 사역에 있어서 상황화의 범위를 확장하는 일에 있어 조심해야 한다. 성경에는 상황화에 대한 두 개의 중요한 모델이 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다른 하나는 사도 바울이다. 선교학자들은 예수께서 인간과 동일화하신 행위를 묘사할 때 성육신 사역(Incarnational Ministry)을 사용한다. 예수는 인간이 살아가는 삶을 살았고 죄를 짓지 않으셨다. 죄의 구속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고 죄의 굴레 속으로 구태여 들어가실 필요는 없으셨다. 따라서 예수는 유대사회에서 사회적 위치가 낮은 자들과 비교해서 자신의 위치가 존중받는다고 생각하는 인간들과 문제화 삼으신 것을 본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 배경을 가진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회심자 사이의 통합을 위하여 무척 노력했다. 바울 자신은 이방인 도시에 살았고 나름대로 이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타문화의 말씀 전달자로서 유대인, 이방인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달했다.


그렇다면 이슬람 문화에서 그들을 회심케 하기 위해서는 먼저 관계성을 개발하는 일이다. 관계성에 대한 가치는 복음을 전하는 지도자에게 또한 유익을 가져다준다. 둘째는 무슬림에서 회심한 자들이 겪게 되는 최대의 갈등은 가장 가까운 공동체와 결별하고 고립되어 개인주의적인 서구식 삶의 스타일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기독교 지도자들은 공동체의 존립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만일 무슬림 회심자들을 위한 기독교 공동체가 없다면 그들은 갈등을 겪게 되고 결국은 되돌아서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슬람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먼저 우리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이슬람에 대한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그것은 이슬람에 대한 두려움의 영에 눌리지 않아야 한다. 무슬림을 우리의 적 사단의 종으로 보아서는 결코 안된다. 우리의 적은 수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종으로 만든 이슬람의 영이지 무슬림이 아니다. 그리고 무슬림은 우리의 증오와 미움의 대상이 아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유업으로 나눌 형제로 보아야 한다. 콜린 채프만이말한 것처럼 무슬림들을 대할 때 올바른 자세를 가져야 한다.56)

 

나오는 말


이슬람 역사 1400년 동안은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상대일 뿐 아니라 가장 거대하고 견고한 공동체를 바탕으로 확장을 계속하고 있다. 아랍 지도자 무암마르 가디프는 남아프리카의 이슬람화를 위해 후원을 하고 있다. 이 움직임은 아프리카에서 경제, 문학, 정치적인 연합체를 이루고자하는 이슬람 부흥운동 중의 하나이다.57) 이슬람은 아랍어를 대륙의 주된 공용어로 내걸고, 이슬람 공동체를 통한 세계각국에 무역의 기회를 증진시키려 할 뿐 아니라 모든 수단을 이용하여 개종자를 얻어내려 하고 있다. 새로운 모스국, 이슬람 학교와 대학들이 전 세계에 세워지고 있다.


이제 전 세계는 이슬람의 도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반응을 보일 때가 되었다. 특히 이슬람 선교에 있어서 여러 문제 중 더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신학적인 부분이 아니라 문화적이 부분으로서 이슬람 공동체(Ummah)의 독특성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여기에 작은 공동체인 가족에 대한 부분은 이슬람 선교전략에 중요한 부분이 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슬람의 가족공동체 이해를 통하여 북음의 접촉점에 대한 가능성을 찾아보아야 한다. 그 가능성을 통하여 이슬람 선교를 가능하게 하는 여러 전략들을 활용한다면 이슬람 선교를 위한 모델이 될 것이다. 여기에 대한 가능성으로 먼저 개종자를 돕는 일이다. 회심자가 두 얼굴을 갖는 것이 어쩌면 거의 불가피하고 처음에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회심자가 집에서 자신이 발견한 것을 그룹 사람들에게 말하면 위험성이 따르게 될 것이다. 그런 영적 미숙함에 있는 자들을 살아남도록 도와주고, 언제나 만나서 도울 준비, 성경 공부를 통하여 꾸란의 차이를 설명하고 신앙고백을 하고 따르도록 돕는다.


마지막으로 무슬림을 위해 영적인 세계에서 승리하도록 기도로 뒷받침하는 것이다. 기도는 복음전도의 기본이 된다. 기도 없는 선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영적 전쟁에 있어 승리하고 사랑이 있는 행함을 보여줄 때 무슬림 선교는 가능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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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1 이슬람(Islam)이라는 말은 무슬림들에게는 신에 대해서 신자가 ‘항복한다’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해한다. 그 분사형인 무슬림(Muslim)은 그러한 항복의 행위를 취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무슬림은 어느 다른 존재가 아닌 ‘오로지’신에게 자신을 내맡기는 사람이며, 따라서 다신주의자가 아닌 유일신주의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2 라민 샤네 교수는 예일대학교에 소속되어 있다. 2002년 8월 6일 ‘이슬람 선교를 위한 해법’이란 주제로 홍영기 교수와 대담한 것을 재인용하였다.

3 Bernard Lewis, 『이슬람 1400년』 김호동 억(서울: 까치글방, 2001), 18.

4 필자가 스리랑카 북부지역을 방문했을 때 미션계의 고등학교가 무슬림화 된 곳을 목격했으며, 가톨릭이나 기독교계의 교사들을 추방하고 대신 무슬림 교사로 채용한다는 소식을 접한바 있다(2002.7_8 스리랑카 북부지역 리서치)

5 오픈도어(opendoors) 선교회가 발행하는 기도소식지에 의하면,‘박해받는 교회와 성도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라는 도표가 있다. 기독교 박해 1순위로 사우디아라비아로서 이슬람의 종주국이며, 전세계에 이슬람을 전파하는 선두기지이다. 다음으로 북한, 라오스, 투르크메니스탄, 중국, 베트남, 이란, 몰디브, 남부수단, 코모로제도 등이다.

6 전호진, 『이슬람, 종교인가?』(서울: SFC출판부, 2002), 9. 저자는 본고에서 이슬람을 하나의 종교로 보기보다는 이데올로기로 보고 있다.

7 Patrick Johnstone & Jason Mandryk, Operation World(Carlisle: Paternoster, 2001), 2; 49.

8 이 정순, 『무슬림 여성과 베일』(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2002), 17 재인용

9 메디나는 새로운 신앙과 신도들의 중심지가 되는 ‘도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메디나에서의 계시들은 무슬림 공동체 안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문제들과 관련된 법적 정치적인 사항들을 포함하는 곳이기도 하다. Bernard Lewis, 『이슬람 1400년』 16.

10 이광호, 『세계선교의 새로운 과제』(서울: 예영컴퓨니케이션, 1998), 173.

11 움마와 관련된 것으로 Mahathir Mohamad, Islam & The Muslim ummah, (Hashim Makarnddin: Ma1aysia, 2000), 51-62를 참고하라. 핸드릭 크래머, 『기독교 선교와 타종교』 최정만 역(서울: 기독교 문서선교회, 1995), 244.

12 Affan Seljuq, "The Muslim World League Journa1",/Feb, 1991을 참조함.

13 무함마드가 주장하는 메카에서 유일신론, 유신론 사상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꾸란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으로 그의 신성과(수라 5:19) 십자가 죽음(수라 4:157)에 대한 이중적 부인을 하고 있다.·예수에 대한 긍정적 측면은 예수에 대한 나머지 모든 것들을 언급할 뿐이다. 그리고 예수의 성육신을 부정한다.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할 때 처녀였다(마 1:18-25; 눅 1:26-35). 그러나 꾸란에 보면 무슬림들은 예수님의 기적적인 수태를 받아들인다(수라 3:45-47; 19:21; 21:91)또 중요한 것은 마리아가 꾸란 에 그 이름이 언급된 유일한 여성이라는 것인데, 꾸란은 거기에 대한 참된 설명을 하지 않는다. 왜 임의적인가(수라 3:59)? 다만 마리아는 위대한 여인으로 칭송을 받을 뿐이다.

14 최영길, 『이슬람의 이해』 (서울: 도서출판 신지평,1999), 58-9.

15 Latifa, 『빼앗긴 얼굴』 최은희 역(서울: 이례, 2002)을 참고하기 바란다. 1996년 탈레반 정권이 들어선 아프가니스탄의 여성들에게 권위, 인권이란 찾아 볼 수 없다. 라티파는 탈레반의 광신적인 신앙이 자신의 세계를 어떻게 고통스러울 정도로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희선, "아랍·이슬람 여성에 관한 고찰"-종교적 당위성과 현실- 『선교-문화연구』 2001년 제5·6호(천암: 천안대학교 선교-문화연구소), 51이하를 참조 바란다.

16 전호진, 『종교다원주의와 타종교 선교전략』 (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97), 293.

17 Ibid., 158-60.

18 봅쇼 그랜, 『마침내 드러나다』 이숙희 역(서울: 죠이선교회출판부, 1995), 174.

19 이광호, 『세계선교의 새로운 과제』 185-90.

20 Bernard Lewis, 『이슬람 1400년』 136.

21 Affan Seliuq, "The Muslim World League Journal’’, Jan/Feb,1991을 참고하라. 무슬림 가정의 제도는 이슬람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가정은 신앙의 가르침에 따라 그 구성원들을 교육시키고 훈련시키는 사회의 기본 단위이다.

22 꾸란 2:228에 의하면 ‘남자는 여자보다 상위(上位)에 있고 또 위력(偉力)하여 여자의 보호가 된다’(꾸란 4:34)는 것을 보아 남성 우월주의가 존재하고 있음을 본다. 이슬람에서 여성의위치는 언제나 차별적이다. 상속 액에서도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예배의 참석에서도 구별되어 참여한다. 꾸란 4:34에 ‘남성은 여성의 보호자라 이는 하나님께서 여성들보다 강한 힘을 주었기때문이라 남성은 여성을 그들의 모든 수단으로서 부양하나니 건전한 여성은 헌신으로 남성을 따를것이며 남성이 부재시 남편의 명예와 자신의 순결을 보호할 것이라 순종치 아니하고 단정치 못하다고 생각되는 여성에게는 먼저 충고를 하고 그 다음으로는 잠자리를 같이 하지 말 것이며 셋째로는 가볍게 때려 줄 것이라 그러나 다시 순종할 경우는 그들에게 해로운 어떠한 수단도 강구하지 말라 진실로 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시니라. 『성 꾸란』 최영길 역, (사우디아라비아 파하드 국왕성꾸란 출판청)을 참고바람.

23 크리스틴 말루히, 『미니스커티, 어머니 그리고 모슬렘』 예수 전도단 역(서울: 예수 전도단, 1998), 114 재인용.

24 이슬람 사회에서 이혼은 아주 단순하다. 남편이 아내를 향해 ‘나는 너와 이혼한다’라는 말을 세 번만 되풀이하면 어떤 설명이나 이유 없이 부인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 있다(꾸란 65;1,2).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꾸란 2:229절을 보면 된다. ‘화해를 통한 두 번의 이혼은 허락되나 그 후의 두 당사자는 동등한 조건으로 재결합을 하든지 이혼을 해야되며 너희가 그녀들에게 주었던 지참금을 되돌려 가져오는 것은 허용되지 아니하나…’라고 되어 있다.

이슬람 사회에서 이혼에 대한 것도 다양하다. 먼저 수라 2:226-242에 나타난 것을 보면, 4개월간의 격리의 시간을 가진 뒤 이혼을 할 수 있다. 수라 4:19-21에는 그들의 뜻에 반하여 여성을 재산으로 삼는 것은 금지하고 있으며, 수라4:127-131에는 과부와 고아들을 도울 것을 명하고 있다. 수라 33:49에는 동침하기 전에 이혼하려 할 때에는 ‘이다트’기간(3개월)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수라 58:1-4에는 오래된 이교도들의 이혼제도를 배척하기도 한다.

25 Donna p. Smith, & Andreas Maurer, 『무슬림을 위한 기독교 전도』(South Africa: MeRCSA,1998), 114-265.; Scheifer, Motherhood in Islam 88.; Andreas Maurer, Islam mission seminar (Intercultural Leadership Institute, 2002), 6

26 Andreas Maurer, Islam mission seminar, 7.

27 Ibid.

28 꾸란 4:3에 ‘‘만일 너희가 고아들을 공정하게 대처하여 줄 수 있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면 좋은 여성과 결혼하라 두 번 또는 세 번 또는 네 번도 좋으니라 …너희를 부정으로부터 보호하여 주는 것보다 적합한 것이라".

29 최영길,『이슬람의 이해』 214.

30 이광호, 『세계선교의 새로운 과제』 164.

31 Hammudah Abd al Ati, The Family Structure in Islam(USA: American Trust Publications, 1977), 50-145.

32 최영길, 『이슬람의 이해』 216.

33 존 엘더, 『무슬림을 향한 성경적 접근』 KTM 편집부 역(서울: 도서출판 펴내기, 1992), 86-87.

34 이 정순, 『무슬림 여성과 베일』 34.

35 Ibid.

36 전호진,.『종교다원주의와 타종교 선교전략』 299.; 꾸란 4:11; 남자에게는 여자의 두 배에 달하는 몫이 차려지느니라…둘 이상의 여자가 있을 경우는 유산의 3분의 2를 취하고 여자 하나만 있을 때는 절반을 얻게 되느니라’

37 크리스틴 말루히, 『미니스커트, 어머니 그리고 모슬렘』 59-60.

38 『성 꾸란 』 최영길 역, 130.

39 Anne Cppper, Ishamal My Brother(London: STL Books, I988), 30.; 이정순, 『무슬림 여성과 베일』 36.

40 로버트 슈라이터, 『신학의 토착화』 황애경 역(서울: 가톨릭출판사, 1991), 67.

41 필자가 북아프리카 지역을 방문했을 때 기독교인이 무슬림과 대화를 했다는 이유로 검찰에 소환된 것을 보았다.

42 Ibid., 69.

43 전호진, 『종교다원주의 타종교 선교전략』 296.

44 라민 샤네 교수는 예일대학교에 소속되어 있다. 2002년 8월 6일 ‘이슬람 선교를 위한해법’이란 주제로 홍영기 교수와 대담한 것을 재인용.

45 Patrick Johnstone, The Church Bigger than you think, 이창규, 유병국역(서울: WEC출판부, 1999), 192.

46 박순종,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무슬림과 이슬람교에 대한 인식조사" 『세계선교』 1999

년 봄·여름호/ 통권35호, 115-16.

47 Ibid.,117에서 재인용.

48 최근 이란은 이슬람 혁명 후 개종 변화가 꿈틀대고 있다. 그 이유는 국민염원 외면한 정치에 이슬람교도 의문, 회의가 싹트고 있다. 정부는 기독교 성장에 제동을 걸고 있지만 비밀 가정교회로 복음활동은 지속되고 있다. 수십만 명의 잠재된 개종인구에 비해 사역자수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함태경, "이란 선교역사와 교회현황" 『국민일보 선교편』 2002년 7월 23일.

49 Patrick Johnstone, The Churuh Bigger than you think, 193.

50 이 책자는 순니 이슬람 신봉자들이 99%나 되는 모로코를 향한 기도책자이다. 모로코 신자들과 모로코에 복음을 전하고자 사역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로 시작된 것이 바로 ‘Arise Shine Morocco’(ASM)이다. 이는 모로코와 미전도 종족 그룹, 그리고 모로코 교회들을 위한 기도의 필요성을 전 세계 교회에 알리고 기도를 집중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다.

51 Rogers S. Greenway, "세계도시화와 선교교육" 장훈태역 『선교신학의 21세기 동향』(서울; 이례서원, 2000), 512.

52 E. A. Speiser, The Anchor Bible: Genesis(New York: Doubleday, 1964), 86.

53 Rogers S. Greenway, "세계도시화와 선교교육" 514.

54 정흥호, 『상황화 신학』 서울: 로고스, 1998,: 베반스, 스티브. 『상황화신학』. 최형근 역. 서울: 죠이선교회, 2002.: 부스웰, 제임스 "상황화:이론과 전통, 그 방법."『신학과 선교』, 데이비드J. 헤셀그레이브 편, 93-126. 서울: 엠마오, 1986.;서창원, 『제3세계신학』.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3.; Stephen. Bevans, "Models of Contextual Theologies." Missiology 13, no. 2(April1985); shoki Coe, "Contextualization." InMission Trends No. 3: Third World Theologies, ed. Geraid H. Anderson and T.F. Stransky, 19-24.New york; paulist press, 1976.; bruce C.E.F.leming, Contextualization of Theology: An Evangelical Assessment. Pasadena: William Carey Library, 1980.; Dean S. Gillilrinand, "Principles od the Christian Approach ot an African-Based Islamic Society.: Missiology ;Heideman, Eugene S. "Syncretism, Contextualization, Orthodoxy, and Heresy." Missiology 25, no. I(January 1997): David J.Hesselgrave, and Edward Rommen. Contextualization: Meangs, Methods, and Models. Grand Rapids:Baker Book house, 1989.; Kato, Byang. "The gospl, Cultural Contextualization, and Religious Syncretism." In Let the Earth Hear His Voice, ed. Douglas, J.D. Minneapolis: World Wide Publications, 1975.; Bruce. Nicholls, Contextualization: A theology of Gospel and Culture. Downers Grove: Inter-Varsiry Press, 1979.; Robert J. Schreiter, Constructing Local Theologies. Maryknoll: Orbis books, 1985.

55 로렌드 뮬러, 『모슬렘 선교를 위한 TOOLS』 임하나 역(서울: WEC출판부, 2002), 77.

56 공일주, 『이싸냐 예수냐?』(서울: 죠이선교회출판부, 1997), 169-70.

57 1995년 10월 22일 요한네스 버그의 ‘선이 타임수’에 게재된 내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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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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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선교전략-터키 중심으로

자생적으로 교회가 탄생된 곳도 있다

 

들어가는 말 

미국을 중심으로 여러 서방국가들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였고 테러와의 전쟁이 선포되기 전 많은 세인들의 생각 가운데 '이슬람' 하면 다만 '코란과 칼' 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9.11 무역센터 자살 테러 이후 '코란과 칼' 이라는 이슬람에 대한 선입견 속에서 이제 이슬람은 곧 ‘테러 집단’ 이라는 생각으로 세상 사람들의 생각 속에 새롭게 자리 잡은 것을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이라크 공격이후 서방 국가들은 이제 이라크 공격을 통해 자국이 무엇을 잃었으며, 무엇을 얻었는가에 대하여 나름대로 계산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특별히 이슬람국가 안에서도 온건파와 강경파간의 보이지 않는 부딪힘과 그리고 엇갈린 주장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한 예를 들면 지난 3월 중순 터키를 방문한 요르단 국왕 압둘라 왕은 이제는 온건한 이슬람주의자들이 일어나 이슬람 강경파들에 향해 ‘이 정도면 되지 않았느냐? 코란에는 테러와 관련된 내용들이 없지 않느냐? 라는 목소리를 내야 된다’ 라고 주장하였으며, 또한 지난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인권운동가 ‘시린 에바디’ 여사는 인도네시아에서 열렸던 한 세미나에서 ‘진정한 이슬람은 테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라고 주장을 했다.(2004년 3월 18일 터키 휴리엣트 신문서 발췌) 

이처럼 이슬람 국가 안에서도 이제는 그들이 안고 있는 테러 집단이라는 오명을 씻고 새로운 이미지를 위한 노력을 시도하는 것도 사실이다. 

본인이 사역하고 있는 터키는 전체 국민 98%가 이슬람을 신봉하는 이슬람 국가 중 하나이며, 과거엔 오스만 제국을 건설했던 자부심을 안고 언젠가는 다시 한 번 이러한 꿈을 실현해 보겠다는 욕망과 ‘아타튜르크’ 초대 대통령 및 독립운동가의 정신을 이어가는 군인들의 ‘케말주의’, 그리고 유럽이 접해있는 이유로 인해 유럽 문명 속에 세속적인 문화와 케말주의와 그리고 종교와 정치를 일원화 해보려는 일부 강경 이슬람주의자들이 서로 혼합되어 흘러가는 국가임을 먼저 밝힌다. 

이 논고를 쓰기 전 본인은 이슬람을 위한 전략가도 아니며 또한 이슬람을 연구하는 학자도 아님을 미리 밝히고 다만 중동권에서 사역을 감당하는 한 사역자의 시각으로 특히 비 아랍권인 터키를 중심으로 이슬람에 대한 선교전략을 논할까 한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白戰百勝)이라는 말이 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의 전쟁에서 백 번 다 승리할 수 있다’라는 중국 병법가(兵法家) 손자의 모공 편에 나오는 병법 중에 한 방법이다. 

성경에서도 민수기 13장과 여호수아 2장에서 모세와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말씀에 준하여 모세는 열두 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냈고, 또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여리고 성을 공격 하기 전, 두 명의 정탐꾼을 보내 그곳의 상황을 파악한 사례가 성경에 나오고 있다. 

그러므로 영적 전쟁에서도 여호와의 도우심 속에서 먼저 상대방의 상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라고 생각하기에 비아랍권인 터키의 최근 상황을 먼저 나누기를 원하다.

 

1. 터키 사역자 및 선교활동 변화 비교도 

(1) 연도별 성도 및 선교사 숫자 비교 (2003년도 선교사 통계에서 단기 90명을 제외한 것임) 

연도별 1961년 1971년 1981년 1994년 1998년 2003년 

선교사 수 2명 20명 50명 400명 600명 988명 

현지인 신자수 2명 20명 50명 400명 1121명 2000명 

위 도표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1998년을 기준하여 2003년도까지 선교사의 숫자 및 성도숫자가 급성장하고 있다. 또한 아직 사역자들의 대다수가 대 도시에 거주하고는 있으나 기타 지역 즉 동쪽 및 작은 도시로도 이전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첫째, 글로벌 시대 속에서 커뮤니케이션 정보화 발달로 인한 모든 기술과 지식에 대한 접근이 용이해졌으며 생활수준이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유럽 공동체 가입을 추구하는 가운데 서구 문화 및 생활습관을 닮아가려는 생활방식 속에서 나타나는 유럽화 현상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개인주의, 인권 옹호, 타종교에 대한 터키인의 이해력이 증가하였다. 

끝으로 비아랍권인 터키 현지인들을 택하여 아랍권 무슬림을 향하시는 마지막 시대의 성령의 증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터키 현지인 사역자가 98년도 25명에서 2003년도 47명으로 53%가 성장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 효율적인 선교 전략 및 접근 방법 


본인은 앞에서도 밝힌 것처럼 이슬람 선교 전략가도 아니고 또한 학자도 아니므로 일반적인 상황은 접어두고, 다만 사역자로써의 실질적인 상황을 중심으로 좀 더 효율적인 전략에 대해서 7년 전 바울 선교사 중동지부 대회에서 먼저 밝혔다. 

그 당시 발표한 효율적인 전도 방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가족 중심의 전도: 터키는 철저한 가족 및 장자 중심의 사회이다. 그러므로 한 가정의 가장이 변화가 되면 그 가족의 변화는 어느 나라보다 용이하다. 접촉점을 찾기 위한 방법으로 가족 중심의 모임 및 프로그램의 활성화가 필요하다. (가족 캠프, 부부 및 가족 세미나 등등) 

2) 알레비를 통한 사회적 분위기 조성: 터키 국민의 15-20%가 알레비에 속한다.(시아파) 이들은 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으며 일반 회교사원에는 참여치 않는 가운데 가정에서 스스로 예배를 드리며, 보이지 않는 사회적 불평등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현재 터키 내에서 개종한 현지 신자들 중에 대략 80%가 알레비에 속한 자들이다. 

우선 이들을 향한 선교전략을 통해 사회적 보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이들을 통한 이웃과 친척을 향한 선교전략도 필요한 것 같다. (참조: 알레비란 시아파의 한 분파로써 모하메드의 사위이며 4대 칼리프였던 ‘알리’의 추종자들이다. 이들은 코란 보다는 ‘알리’의 가르침을 더 중요시 여기며, 통치권의 계승문제로 인하여 ‘알리’가 사원에서 칼로 피살당한 이후 이들은 잠이(회교사원)에 참석치 않는다.) 

우리들은 먼저 왜 이토록 이슬람권에서는 가족을 중요시 여기는가에 대해서 이해가 필요하다. 

이에 대해 ‘필 파샬’ 이 지은 ’무슬림 전도의 새로운 방향‘이라는 책에서 ’할레블리언‘의 주장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가족은 큰 집 하나에 살거나 아니면 여러 집이 붙어서 산다. 수입과 지출은 가족의 모든 구성원이 나누지만 제일 웃어른이 담당한다. 재산도 대가족에게 공통으로 소유된다. 서구의 핵가족 특성과 달리, 대가족은 더 많은 안정감이 있고 결속감이 있다. 재정적으로 어려울 때나 몸에 병이 들 때 혹은 누가 죽을 때, 주변에 돌봐줄 가족이 있다. 대가족은 젊은 부부가 아이를 낳거나 요리를 하고 집안일을 할 때 그 방법을 가르쳐주고 도와준다” 

또한 그는 새로운 전략을 위해 다음과 같은 사항도 지적하고 있다. 


“모임의 구성원이 여성들, 아이들, 학생들로만 이루어져 있으면 무슬림전도가 성공적으로 되지 않을 것이다. 무슬림 남성이 전도 활동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신자들은 주변의 친구들이나 친척들 중 여러 명을 그리스도께로 데려올 때까지는 신앙을 공개적으로 나누는 것에 있어서 신중하도록 해야만 한다. 신자를 기존에 속해 있던 공동체에서 빼내는 ‘축출작업’을 멈추어야 한다. 신자들은 자신이 속한 문화에 남아 있어야 한다” 


무슬림 가정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남성위주의 선교전략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본인도 이러한 주장에 적극 동의하며 좀 더 나아가 남성위주뿐만 아니라 가족 중심의 전도 활동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터키는 청장년을 중심으로 한 전도활동과 개종이 활발하며, 본인이 섬기고 있는 가정교회도 가족중심으로 75.8%가 나오고 있으며, 개인적으로는 24.2% 출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무엇보다도 가족중심적인 복음 전도 활동이 중요하다. 

또한 이러한 주장을 보충하기 위한 한 예를 들자면 본인이 사역하고 있는 곳에서 가까운 C라는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어느 날 이름도 모르는 한 사람으로부터 그 마을 A라는 중년이 성경을 받으면서 일이 시작된다. 

A라는 중년은 받은 성경에 관심을 두지 않고 서랍 한 구석에 놓는다. 얼마의 기간이 지난 어느 날 그 중년은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이것, 저것을 찾다가 문득 과거 자신이 받았던 성경을 다시 보게 된다. 그는 다만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손에 쥔 성경을 읽기 시작한다. 

성경을 읽어나가면서 그는 그 곳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영접하며, 끝내는 자신이 안고 있는 새로운 삶 속에서의 기쁨을 먼저 가족과 나누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다. 온 가족이 믿고 그 다음엔 가까운 곳에 함께 사는 친척들에게 전하기 시작한다. 처음엔 많은 핍박과 조롱과 감시가 있었다. 

작은 마을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자신의 생계를 위협하는 일일 것이었다. 그러나 함께 믿음을 공유하고 있는 가족들의 격려 속에 복음 전도는 계속되고, 이젠 마을의 대부분이 기독교로 개종하여 매주 예배를 드리는 마을로 바뀌었다.’ 

이와 같이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서 자생적으로 교회가 탄생된 곳도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의 상황을 정리해보면 먼저 성령의 역사와 증거가 있었으며, 그리고 사회에서 보이지 않게 소외받고 있는 종교집단인 알레비라는 이슬람 한 종파를 믿는 사람들이었으며 그리고 가족 중 장년, 즉 어른이 먼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에 대항하는 여러 가지 반대도 적었으며, 그리고 이웃이 여러 모습으로 핍박을 할 당시에도 가족 구성원끼리 서로 격려하는 믿음의 나눔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가족은 모슬렘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있어서 큰 자산과 같다. 이것은 이슬람사회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얼마 전 터키를 방문하여 세미나를 주최한 ‘정민영’ 사역자도 이슬람권에서 교회개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잇다. 


“이슬람은 공동체가 강한 종교이고, 우리의 일은 제자를 삼는 것 그리고 양육하는 것이다. 교회로 모이면 이슬람권에서 박해 당할 때 공동체적으로 서로 도울 수 있다. 따라서 효과적인 전도사역은 서로 돕고 세워줄 수 있는 믿음의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다. 자신과 같은 사람들(종족, 환경)이 주님을 따르는 것을 보고 좀 더 쉽게 결단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본인은 이슬람권에서의 좀 더 나은 선교 전략 가운데 하나로 가족을 위한 복음 전도 활동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서 전통적인 전도 방식보다는 단체의 전도 방식을 이용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족 중심의 전도 활동을 긍정적으로 이끌고 나가기 위해선 여러 가지 갖추고 준비되어질 사항들이 있다. 

 

1. 가족중심적인 행사 


무슬림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족중심으로 복음 전도 활동을 위해서는 필요한 많은 것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족중심적인 행사가 필요할 것이다. 그에 따른 예로는 부부세미나, 가족 체육대회, 가족 오락 프로그램, 가족 식사초대, 가족이 함께 영화 관람 등등 가족이 함께 동참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개발되어져야 하며 그에 따른 전문가들이 필요하다. 

‘멀리 있는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 라는 격언이 있듯이 사역자들은 우선 주변의 이웃들과 무엇보다도 가깝게 지내야 될 필요가 있다. 그들로부터의 최소한의 신뢰를 얻어야 될 것이다. 자신이 인정하는 친구들에게는 어떠한 것도 아낌없이 주고 보살피는 이들의 풍습과 신앙 속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역자들은 우선 가족 중심의 믿음을 그리고 친구로써의 믿음을 심는 것이 이슬람권에서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빠른 선교 전략일 것이다. 우리들이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이러한 것을 주님은 성육신 삶을 통해서 먼저 우리들에게 보여주시고 실천하셨다. 


2. 사회 고위층을 향한 전략 


다니엘이 바벨론으로 나라를 잃고 포로로 끌려간 시절에, 그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들은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벨론의 여러 총리와 방백들의 음모로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통해 다리오 왕 자신이 바벨론 온 땅과 백성들에게 다니엘이 믿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으라는 조서를 내리는 것처럼 (단6:16-27) 이슬람권의 사회 고위층이 자신의 믿음을 나누는 일은 그 어느 것보다 여파와 효과가 매우 클 것이다. 

물론 다른 사회적 분위기에서도 같이 느끼는 일이지만 특별히 수직적인 생활 방식에 익숙해 있는 이슬람권에서의 고위층의 한 마디는 매우 영향을 주는 일이다. 

그러므로 가족적인 고위층 접근을 통한 선교전략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선 사역자 가족에게도 좀더 여유로운 생활과 문화 생활 등이 필요할 것이다. 


3. 성령의 역사와 증거가 있는 사역적인 전략 


오순절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뜨거운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능력이 나타나고 많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특별히 이슬람권에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한 선교전략도 매우 중요하다. 이들은 아직까지 무속적인 신앙이 혼합되어있는 가운데 무술적인 행위와 점, 그리고 이상한 현상 같은 것에 매우 중요점을 두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증거와 함께 복음 증거는 매우 중요한 전략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씀을 근본으로 하는 믿음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와 증거 전략이 필요하다. 

본인이 사역하고 있는 도시에서도 몇 년 전 유럽 모국가에서 젊은이들이 와서 많은 능력을 행하며 교회를 이루어 나갔다. 그들은 몇 달도 안돼, 상상할 수 없이, 몇 백 명씩 모이는 가운데, 다른 모든 가정교회들이 주춤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의 능력에만 치중하고 말씀에는 소홀히 한 결과, 지금은 아무도 없고 교회마저 문 닫고 이곳을 떠난 사건이 있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와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말씀을 근본으로 하며 함께 병행하는 지혜로움이 필요한 것이다. 

‘한 걸음에 모든 것을 다 이루겠다‘라는 생각은 이슬람권에서의 가장 커다란 실패의 원인이다. 인내하며 그들 편에서 바라다보고 참아주며 격려하며 사랑으로 하나 하나 열매를 맺어 나가는 것이 가장 느린 길인 것 같지만, 바로 이것이 이슬람권에서의 가장 빠른 길이며 가장 안전한 선교전략일 것이다. 

결론 


성경 말씀 가운데 살전1:5절에서 "내가 여러분 가운데 어떻게 살았는가를 여러분이 알 것입니다." 라며 바울은 부모처럼 함께 살면서 섬겼음을 밝히고 있고, 이어서 바울 사도는 6절에서 “주를 본받는 자”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은 무슬림들에게 보여주는 삶을 사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성경 빌4:9절에서 “나를 본 것처럼, 나처럼 하라”는 말씀처럼 무슬림들에게 사역자 자신에게 나타나는 열매와 삶의 본을 권유하며 그리고 추천하며 하늘의 복을 함께 나누는데 있어서 초청이 필요하다. 

바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 및 지도자들을 보고 자신들도 그렇게 했다. 

사역자가 다시 돌아갈 필요가 없을 정도로 본이 되는 삶을 사는 신자들을 만드는 것이 사역자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우리들이 취할 첫 원리인 동시에 가장 빠르고 가장 확실한 전략은 바로 “성경대로 행하자” 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행하는 삶일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선교사들이 다른 접근에 대해 더 관심 갖는 것을 우리들은 자주 보게 된다. 우리들은 좀 더 나은 선교 전략을 위해서, 그리고 선교 열풍 2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뒤돌아볼 여유가 필요하며, 한국교회에서도 중동지역에서 사역하는 사역자들에 대한 인식이 무엇보다도 바뀌어야 되는 가운데 다른 동남아시아 지역보다도 중동에 있는 사역자들에 대한 관심과 격려와 후원이 더 절실히 필요할 때이다. 

지금까지 보여주고 있는 모습처럼 한국교회가 빠른 열매와 유행적인 선교에만 관심을 둔다면, 그리고 어렵다는 이유로 인해 중동을 향한 선교 관심자들이 중동을 계속 회피한다면 지금까지 이루지 못한 어려운 일들이 계속 반복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하나님 나라 완성에 지연을 초래하게 되며 이것에 대한 책임도 우리들 각자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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