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묻지 않았던 사울

 

 사무엘하는 사무엘상의 문맥 속에서 읽어야 하고, 또 사무엘하 본문을 묵상함에 있어 왕정시대의 문을 연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을 생각하지 않고는 풍성한 묵상과 바른 이해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짧은 글에서 사울 왕에 대해 다 살필 수 없기 때문에 사전적인 연구는 지양하고, 사무엘하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고 묵상하는 데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각도에서 사울을 다루려고 한다.

 

사무엘하에 언급된 사울에 관련된 직접적인 기록은 그의 죽음에 대한 것이다(삼하 1장). 그리고 이 죽음에 대한 기록만큼이나 중요하게 언급된 내용은 그의 집안 이야기다. 예컨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 대한 본문이다. 이스보셋은 사울의 군사령관 아브넬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오르고, 2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린다(삼하 2:8~10). 이스라엘이 본격적으로 분열되기 이전에 벌써 한 나라 안에 두 왕이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삼하 3:1, 참조 3:6, 10, 5:10)라고 말한다. 결국 본문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아닌 다윗의 왕권이 확립되는 것을 긴 과정으로 설명한다.

 

다윗은 이미 사무엘상 16장 13절에서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지만 그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공적으로 왕으로 세워지는 것은 사무엘하 5장 3절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진다.

 

그리고 계속해서 본문은 다윗이 언약궤를 옮긴 다음(삼하 6장) 7장에 나단이 등장하면서 사실상 다윗의 왕권이 완성되는 것을 보여 준다. 특히 나단 선지자가 대언한 여호와의 말씀(4~17절)은 다윗 왕권의 확립을 언급하는 것을 훨씬 넘어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는 매우 중요한 계시다.

 

본문은 왜 이미 죽은 사울이라는 인물에 대비해 다윗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인가? 이스라엘에서 왕의 등장은 백성들의 요구로 촉발되었으며, 거기에 실제로 불을 붙인 것은 블레셋의 침략이었다(삼상 8:5, 9:16~17). 그런데 이 블레셋의 공격을 막아내는 인물은 사울이 아니라 다윗이었다(삼상 17장). 그리고 다윗은 마침내 사무엘하 5장에서 왕으로 세워지고 블레셋을 잠재운다. 이 과정에서 본문이 그리는 사울과 대비되는 다윗의 특징적인 모습은 ‘여호와께 묻는 것’(삼하 5:19, 23)이다.

 

반면 본문을 따라가면서 발견하게 되는 사울의 가장 특징적인 모습은(특별히 본문이 다윗과 대조시켜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께 묻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곧 불순종을 뜻한다(삼상 15:22). 순종이란 하나님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여기서 물어본다는 것은 삶의 주도권을 자신에게 두지 않고, 물어보는 대상에게 둔다는 의미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을 떠올리면 마음이 애잔해진다. 그가 자신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자기 이해는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삼상 9:21) 하는 것이었다. 또한 백성 중에서 다른 사람보다 어깨 위만큼 컸고,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던(삼상 10:23~24) 그가 백성 앞에서 왕으로 세워질 때 ‘짐 보따리들 사이에 숨어 있던’(삼상 10:22) 모습은 그가 겸손한 자였음을 분명히 말해 준다.

 

사울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체험도 결코 적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영에 크게 감동을 받은 영적 체험도 있었고(삼상 11:6),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고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삼상 24:22, 26:21). 또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던(삼상 24:21, 28:10) 율법의 사람, 이스라엘 왕이었다.

 

하지만 사울을 통해 우리는 과거의 성공했던 경험이 우리의 신앙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고, 또한 지난 시간 엄청난 영적 체험들이 지금의 바른 신앙을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님을 배우게 된다. 나아가 우리 삶의 주권을 진정으로 하나님께 맡긴 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 본문을 붙들고 읽고 묵상하는 것은 순종의 첫 걸음이요, 가장 안전한 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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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바라본 꾸란의 오류와 모순들(2)

 

1. 성경의 변형들

 

1) 남자 갓난아이를 죽이라는 파라오의 칙령: 꾸란은 이스라엘의 남자 갓난아이를 죽이라는 파라오의 명령이 모세의 사역 도중 내려졌다고 말한다. “파라오 백성들의 우두머리들이 말하더라 폐하(파라오)는 모세와 그의 백성들이 지상에 해악을 퍼트려 폐하와 폐하의 신들을 우롱하도록 둘 것입니까?’라고 말하니 그(파라오)가 대답하였더라. ‘그들의 아이가 남아이거든 우리는 살해하여 단지 그들의 여자만 살아남게 하여 그들을 지배할 것이니라”(꾸란 7:127) 그러나 성경은 이 명령이 모세가 태어나기도 전에 내려진 것이라고 말한다(1:16; 2:1-2).

 

2) 이집트에 내린 재앙들: 꾸란은 하나님이 이집트에 내리신 재앙들에 대해서도 성경과 다르게 말한다. 첫째, 10가지 재앙 중 일부만을 언급하고 있다. 둘째, 언급된 일부의 재앙들마저 성경과는 다른 순서로 등장한다. 셋째, 성경에 없는 재앙인 홍수를 언급하고 있다. 아랍어 타와판”(tawafan)은 문자 그대로 홍수를 의미하며, 다른 어떤 뜻도 담고 있지 않다.

 

3) 모세가 내리친 바위와 열두 개의 우물들: 꾸란은 모세가 돌을 치자 열두 개의 우물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이는 열두 지파와 상응하는 수의 우물이었다(꾸란 2:60; 7:160). 그러나 엘림에서 있었던 일을 호렙에서 있었던 일과 섞어 놓은 것이 분명하다. 이스라엘 백성은 먼저 엘림에서 묵었고, 그곳에서 그들은 12개의 우물과 70그루의 야자나무를 발견했다(16:1). 그리고 그들은 신광야에 도착할 때까지 여정을 계속했다. 그곳은 엘림과 시내산 사이에 있는 곳이었다(16:1). 그들은 르비딤에 도착할 때까지 여행을 계속했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그들은 물이 필요했다(17:1). 그들은 목이 말랐고 모세에게 물을 달라고 했다. 모세가 바위를 쳤을 때, 그 바위는 물을 뿜어냈다(17:5-6). 열두 개의 우물은 엘림에 있었고, 바위에서 물이 솟아난 것은 호렙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4) 언약의 궤: 꾸란은 언약궤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다(꾸란 2:248). 먼저 꾸란에는 언약궤 안에 사키나”(Sakinah)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사키나라는 뜻의 아랍어와 같은 의미를 지닌 단어이다. 그러나 이 아랍어 단어는 히브리어 쉐키나”(Shekinah)를 그대로 음역한 것일 뿐이다. “쉐키나”(Shekinah)는 언약궤 위에 분명하게 드러난 하나님 영광의 임재를 일컫는 단어이다. 두 번째로 꾸란은 언약궤가 모세와 아론의 가족들의 유품들도 담고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언약궤는 십계명이 적혀 있는 두 개의 돌판을 담고 있었다(왕상 8:9). 또한 히브리서 94절을 보면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셋째로 꾸란은 언약궤가 천사들에 의해 운반되었다고 말하는데, 이는 성경의 내용과 다르다.

 

3. 꾸란 안에서 모순되는 내용들

 

1) 사람이 어떤 물질에서 창조되었나?: 꾸란은 사람이 어떤 물질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하여 모순이 있다. “알라는 흙에서 너희를 창조하사 정액에서 너희를 재창조하셨으니”(꾸란 35:11) 어떻게 알라가 인간을 먼저 흙으로 만든 후에 정액으로 다시 만든단 말인가? 이 내용은 다음과 같이 변한다: “우리(알라)가 인간을 창조하사 검고 묽은 진흙으로 만드셨고”(꾸란 15:26) 그런데 다른 구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우리(알라)는 그들을 진흙으로부터 창조하였느니라”(꾸란 37:11) 그런데 진흙에서 추가된 다른 구절에는 그분(알라)은 도기를 만들듯 인간을 흙에서 창조하였으며”(꾸란 55:14). 인간이 한 방울의 정액 또는 응혈로 만들어졌다는 내용이 있다(꾸란 16:4). “또한 인간이 물로 만들어졌다.”(꾸란 25:45) 그렇다면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졌는가 아니면 정액으로만 만들어졌는가? 흙으로 만든 다음에 다시 정액을 혼합해서 만들었나? 진흙으로 만들었는가? 아니면 묽은 진흙으로 만들었는가? 아니면 물로 만들어졌는가? 이에 대한 혼란이 꾸란에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2) 이집트의 파라오는 바다에서 익사했나, 아니면 살았나?: 꾸란은 이스라엘 백성을 따라 바다로 간 파라오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에 대해 스스로 모순에 빠져 있다. 어떤 구절들에서는 파라오가 그의 군대와 함께 수장당했다고 말한다(꾸란 17:103; 28:40; 2:50). 반면 어느 한 구절에서는 이상하게도 파라오가 알라에 의해 살았으며, 다른 이들에게 알라를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늘 우리(알라)가 너를 구해 줌으로써 네 이후에 오는 자들에게 예증이 되도록 함이라”(꾸란 10:92) 그러나 사실상 꾸란에 기록된 이 두 가지가 동시에 발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3) 꾸란은 아랍어로만 기록되어 있는가?: 꾸란에는 꾸란이 순수한 아랍어로만 기록되었다고 돼 있다. “한 인간이 그를 가르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그들을 우리(알라)는 알고 있나니 그들은 외래인이 그(무함마드)를 가르친 것이라 하더라 그러나 이것은 순수한 아랍어이라”(꾸란 16:103) “우리(알라)는 꾸란을 아랍어로 계시하나니”(꾸란 12:2)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란은 많은 비()아랍어를 담고 있다(꾸란 16:103; 12:2; 41:44). 여러 예를 들 수 있다: “파라오”(Pharaoh) 이집트어; “아담, 이브”(Adam and Eve) 아카드어; “아브라함”(Abraham) 시리아어; “하루트(Haroot), 마르트(Marroot), 시라트(Sirat), 후르 안인(Huwariyeen), (Jinn), 피르다우스(Firdawa)”모두 페르시아어; “히버(Heber), 투라트(Turat), 게한님(Gehannim)” 모두 히브리어; “인질”(Injeel) 그리스어 등, 아랍어가 아닌 외래어가 이 외에도 꾸란 안에 많이 기록되어 있다.

 

/유해석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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