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설교  (Dawn Prayer Meeting Sermon)

십자가 신앙과 부활 신앙


누가복음 24장 25∼35절

무언가를 본다는 건 대단한 일입니다.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기 위해선 잠시 눈을 감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아름다움을 모르는 건 둘째 치고 눈을 감고 움직이면 여기저기 부딪치게 돼 생활하기가 매우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신앙의 영적인 안목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본문엔 영안이 열린 자와 닫힌 자가 나옵니다. 둘의 차이는 큽니다. 닫힌 자에게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길은 슬픔과 죽음, 실의와 좌절의 길입니다. 그러나 생물학적인 눈이 아닌 영적인 눈이 열린 엠마오로 가는 길은 천국, 생명, 기쁨, 희망의 길이었습니다. 그들이 영안으로 무엇을 보았습니까. 그들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닫힌 영안은 세상적인, 자기중심적인 정보만을 제공합니다. 그들의 눈엔 십자가형을 받은 나사렛 목수가 보일 뿐입니다. 하지만, 열린 영안에는 부활한 예수, 모든 말씀을 성취하신 예수, 메시아 예수가 보입니다. 본문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 곁에서 대화하는 것은 영안이 열릴 때나 닫힐 때나 똑같습니다만, 예수님이 보이고 깨달아지는 건 닫힌 영안이 열릴 때에나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일에 깨달음이 있길 바랍니다. 엠마오에서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그들이 본 것, 바로 예수의 다시 사심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 중의 핵심인 부활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목회자 빌리 그레이엄은 “빈 무덤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의 신앙이 생명과 부활과 대속의 신앙이 됩니다.

어느 종교 창시자가 부활했습니까.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우리 주님은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고치시다가, 끝내 주님 스스로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사셨습니다. 그런 이유로 피터슨 스미스는 “인간에게 죽음은 없다. 다만 불신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의 증거가 있을까요. 빈 무덤이 부활의 증거이기도 하지만, 성경 자체가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가 됩니다. 사복음서 안에 쉰여덟 번, 사도행전에 스물두 번, 바울 서신서 안에 육십 번 이상 예수님의 부활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로마 시대의 정치가, 역사가들도 예수님의 사심을 문헌으로 기록한 바 있습니다. 또한 성경의 수많은 인물들이 다투어 예수님의 사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들 모두 다시 사신 예수님을 만났고, 또한 체험했습니다. 이 증거로 인해 많은 기독교인이 박해 가운데서도 기쁘게 순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까. 부활이라는 말은 ‘다시 일어난다’는 말을 기원으로 합니다. 부활의 믿음과 그 신앙으로 우리는 생의 갖가지 좌절과 낙심을 딛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부활의 신앙과 그에 대한 영적인 안목이 우리의 삶을 그대로 패배치 않게, 낙담치 않게, 실망치 않게, 분노치 않게, 격동치 않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을 믿으며 전진하는 우리들은 사건 앞에서도 주님의 섭리를 생각하고, 슬픔을 찬송으로 바꿉니다. 그것을 우리는 욥에게서, 아브라함에게서, 바울에게서, 요한에게서, 빌립에게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성도는 어느 곳에 있던지 감사할 수 있고, 찬송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놀랍고도 감격스러운 사건이 2000여년 전 오늘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일어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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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회설교 / 성경 스타일의 삶 ( Dawn Prayer Meeting Sermon)

사도행전 1710~15

 

극단적인 상황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현대는 극단적 말씀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을 듣지 않을 뿐 아니라,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이라는 무늬만으로 살려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세상엔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복음, 예수님의 진리가 삶의 결론이 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여전히 가치관과 세계관의 변화 없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로 득실거립니다.

 

그러나 이대로는 안 됩니다. 복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예수님만으로 충분한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실제가 되어야 하고, 우리가 갖는 믿음이 부도 맞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믿음이 되어야 하며, 천국과 지옥이 반드시 실제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 내 이름표 달고 나대신 죽으신 예수님처럼 살아가려는 것이 우리의 핵심가치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로만이 아니라, 내 생각과 지식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현장으로 내놔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 스타일의 삶입니다. 성경 스타일의 삶이란 신자이든 비신자이든 우리를 보고 ! 저 사람 성경대로 사네? 스타일이 완전 성경스타일이네?”라고 말하는 삶입니다. 말씀을 항상 적용하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과 실라가 2차 전도여행 중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로 쫓겨 가서 말씀을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다 유대인이며 상당히 영향력도 있고 품위도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그들이 말씀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였고, 이것이 진리라는 결론에 이르자 날마다 성경을 연구했다고 말합니다. 나름 배운 사람들이었고 귀족 출신들이며, 고상하고 품위를 갖춘 사람들이었는데 말씀 앞에서 진지하게 반응하더라는 말입니다.

 

많은 분들이 말씀을 듣지만 믿음도 생기지 않고 자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성경의 단편적 지식들이 머리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뭘 좀 깨닫는가 싶다가도 말씀을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고 듣기 때문에 제자리걸음만 계속합니다. 그러나 베뢰아 사람들은 짧은 시간에 변화됩니다. 말씀을 절대 결론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무엇이 문제였던 것일까요. 알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고, 말씀이 결론이 되지 못하니까 그렇습니다. 진리가 결론이 되게 하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입니다. 결론 났으면 결론으로 삼아야지 토를 달고, 내 상황에 꿰맞추려 하거나 이리 저리 빠져나갈 궁리를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말씀은 영원합니다. 내 형편이 어떠한가를 상관하지 않고 말씀을 결론으로 받아 순종했던 사도바울처럼 사는 삶이 성경스타일의 삶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는 이때까지 우리가 자기 변명을 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고후 12:19)

 

우리의 신앙이 가짜이거나, 말씀이 머리에만 돌고 있거나, 천국과 지옥이 실제가 되지 않으면 망합니다. 에스겔 선지자의 말씀(16:46)처럼 예수 생명 붙잡고 성경스타일로 승리하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래서 신앙과 생활에서 모두 승리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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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희망을 낳습니다

히11:1-6


새해가 밝았습니다. 묵은 해는 지나고 새해가 왔습니다. 새해를 맞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신 것은 “희망”입니다. 세상에 희망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어느 대학의 심리학과에서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두 개의 큰 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 크기가 비슷한 쥐 한 마리씩을 넣었습니다. 예상대로 이들은 열심히 헤엄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두 통은 서로 달랐습니다. 하나는 뚜껑이 닫혀 있고 다른 하나는 뚜껑이 열려 있었습니다. 뚜껑이 닫혀 있는 쥐는 한참 헤엄치다 탈출구가 눈에 보이지 않자 아예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4분만에 죽었습니다. 뚜껑이 열려 있는 쥐는 뚜껑이 열려 있음을 알고 여유있게 움직여 36시간이나 헤엄을 쳤습니다. 문제는 통의 뚜껑이었습니다. 뚜껑이 열리고 닫히고의 차이가 그렇게 큰 차이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연구원들이 이런 결론을 냈습니다. “살고 죽는 것은 희망에 달려 있다. 희망이 있으면 살고 희망이 없으면 죽는다”.

그렇습니다. 희망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살기 때문에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 있기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음식없이는 40일 밖에 살 수 없고, 물이 없이는 8일 밖에 살 수 없고, 공기가 없이는 4분 밖에 살 수 없지만, 희망없이는 단 몇 초도 살지 못한다”. 이렇게 희망이 중요합니다.

작년 가을, 하나님이 새해 우리 교회가 나갈 방향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얼마동안 낑낑대며 기도하는 데 어느 새벽에 저에게 한 단어가 전광석화처럼 떠올랐습니다. 희망이었습니다. 작년 한 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는 한 해였습니다. 세월호로 인해 온 국민이 좌절에 빠지고 경제란, 남북관계의 경색등으로 힘들게 살았습니다. 한국교회도 이런 저런 실수로 비난을 받아 자신감을 잃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기 원하실까? “희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문제는 이 희망이 어디서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다가 어느날 롬15:13을 읽었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여기에 “소망의 하나님”이 번뜩 눈에 띄였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모든 좋은 것은 소망의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기쁨과 평강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안에서” 옵니다. “믿음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믿음이 희망을 낳고 믿음이 희망을 충만케 합니다.

오늘 말씀 히11:1을 보시겠습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오늘 말씀은 희망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히11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1-3절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말합니다. 4-40절은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말합니다. 여기서 실명으로 10명이 나옵니다. 그리고 익명으로 많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1-3절에 나오는 믿음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고 또 하나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믿음은 먼저 바라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믿음의 본질은 바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희망은 믿음안에 있었습니다. 믿으니까 바라는 것입니다. 저희 부모님은 어릴 때부터 저를 많이 믿었습니다. “공부잘하고”, “착하고”, 그래서 희망을 가졌습니다. “윤재는 커서 무엇인가 할거야”. 목사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일반 대학에 가서 법조인이 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제가 부모가 기대한 것만큼 된 것은 아니지만 부모의 기대가 저를 여기까지 인도한 것은 사실입니다. 부모는 저를 믿었고 믿기 때문에 바라셨습니다.

믿음은 또한 보이지 않은 세계에 대한 관심입니다. 1절,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보이는 세계만 본다면 어떻게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믿음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미리 보는 것입니다. 누가 천국을 가 보았습니까? 천국에 가면 돌아올 수도 없습니다. 누가 영생을 보았습니까? 못 보았지만 영생이 있음을 믿습니다. 믿음의 세계는 본질적으로 미지의 세계며 미래의 세계입니다. 믿음은 곧 보이지 않는 미래의 세계에 미리 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 곧 희망입니다.

여러분에게도 믿음이 있습니까? 보이는 환경에서 희망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은 믿음에서 희망이 생기는 것을 믿습니까? 희망의 근원은 믿음입니다. 요14:1을 기억하십니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마음의 근심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방법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문제가 풀립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나님 믿는 것이 희망의 시작입니다. 그러면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합니까? 그것이 오늘 말씀 6절입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크게 세 가지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는 믿음, 두 번째는 하나님은 그를 찾는 자에게 상주신다는 믿음, 그리고 세 번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믿음, 이 믿음이 희망을 낳습니다. 새해 벽두에 희망의 하나님이 믿음안에서 여러분에게 기쁨과 평강을 주며 성령의 능력안에서 희망으로 넘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희망을 낳는 첫 번째 믿음은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는 믿음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이 질문이 왜 중요합니까? 이 질문이 모든 믿음과 희망의 출발이기 때문입니다. 몇 년전 모 기독교 신문에서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그런 조사를 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은 확실히 살아계신다”고 믿는 사람이 64.2%, “살아 계신 것 같은 데 확신할 수는 없다”가 28.9%, 그리고 “잘 모르겠다”가 14.5% 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40% 가까운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살아 계신지 잘 모르겠다. 있는 것 같은 데 확신할 수 없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고 믿습니까?

성경은 먼저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합니다. 3절입니다. 히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우선 가장 쉽게 아는 방법이 자연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연은 우리 눈에 가장 잘 띄기 때문입니다. 작년 여름에 교회학교 어린이들이 시골로 수양회를 다녀왔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산에서 무엇을 보았니?” “별을 보았어요. 밀가루같이 많은 별들을 보았어요”. 그러나 우리 아이들이 보았던 별은 아마도 우주안에 있는 수많은 별들중에 지극히 작은 부분을 보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팔을 벌려 동전 100원짜리를 쳐들면 그 순간 하늘에 떠있는 별 1,500만개가 우리 눈에 가려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은하계는 지구에서 약 2백만 광년 떨어진 안드로메다 성운입니다. 빛이 200만년 달려야 도달할 있는 은하계가 안드로메다 은하계인데 그 은하계가 이 우주에 1천억 개 이상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우주는 얼마나 넓습니까? 그 넓은 우주를 하나님은 손가락하나로 지으셨습니다. 시8: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하나님은 자연속에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 또 하나의 증거는 역사입니다. 제가 작년에 독일통일세미나를 참석하기 위해 독일을 갔습니다. 동서독은 분단된지 45년인 만인 1989년11월에 통일되었습니다. 저는 독일 가기 전에 독일 통일은 어떻게 될만하니까 되었겠지 막연하게 생각하고 갔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독일 통일은 기적이었습니다. 우선 독일을 둘러싼 모든 나라가 통일을 반대했습니다. 영국, 프랑스, 미국, 다 반대했습니다. 반대한 이유는 물론 달랐습니다. 무엇보다 동독은 소련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적어도 소련이 물리력을 동원하면 통일은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때 나타난 사람이 고르바쵸프입니다. 그가 1985년에 공산당 서기장이 되었습니다. 동서독 분단의 최정점에 서기장이 된 것입니다. 그때는 이미 동서독 통일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었고 라이프니찌 교회에서 몇 년씩 통일 기도회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고르바쵸프의 행동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고르바쵸프는 때맞춰 일어난 동구권의 개혁운동을 소련군 탱크가 진압하지 않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전에 베이징에서는 민주화운동을 탱크로 진압했던 중국 공산당과는 대조적이었습니다.

소련이 할 수 있는 것은 무력인데 무력을 포기하는 일은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닙니다. 소련이 스스로 한 일입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도 아무런 진압이 없었습니다. 공산국가로서는 경이로운 일입니다. 누가 시킨 일입니까? 누가 역사를 움직입니까? 독일 통일이 필요할 때 고르바쵸프를 세운 분은 누구입니까? 그래서 통일은 대박이기 전에 신비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통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루터가 종교개혁하다가 실망했습니다. 모든 일이 마음대로 안됩니다. 그래서 낙심해서 누었습니다. 어느날 보니까 아내 카타리나가 상복을 입고 앉아 있습니다. 루터가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아니, 누가 죽었나요?” 카타리나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죽었어요”. 루터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죽다니. 무슨 소리야? 하나님이 왜 죽어?” 부인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죽지 않았다면 당신은 왜 그렇게 실망할 수 있어요?” 그때 루터가 자리에서 일어났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무엇을 두려워 하겠는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데 내가 무엇을 낙심하겠는가?

어떤 큰 교회 목사님이 병들어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는 평생 고생해서 교회를 개척하고 큰 교회로 부흥시켰으나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죽으면 이 교회는 어떻게 됩니까? 모두 뿔뿔히 흩어져 교회도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답니다. “네가 죽는 것이 문제냐? 내가 죽는 것이 문제지”. 그렇습니다. 내가 죽는다고 세상이 달라집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죽는다면 큰 문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죽습니까? 하나님은 죽는 분이 아니잖아요? 다시 히11;6, “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그는 반드시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죽지 않습니다. 영원토록 살아 산자와 죽은 자를 다스립니다. 자연과 역사와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찾는 자에게 상주십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두 번째 믿음은 하나님은 그를 찾는 자에게 반드시 상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문제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언제라도 우리에게 보상을 주십니다. 히11장에는 그렇게 살았던 사람 10명이 등장합니다. 아벨로부터 기생 라합까지 입니다. 이들의 삶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이 모두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과 믿음으로 산 이들을 하나님이 복주셨다는 공통점입니다. 자. 4절, 아벨이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가인은 준비되지 않은 곡식으로 하나님께 예배했지만 아벨은 준비된 제물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아벨의 믿음은 예배로 나타났습니다. 믿음의 예배는 정성과 희생으로 드립니다. 구약의 예배는 동물을 죽여 희생제사로 드렸습니다. 아벨이 그렇게 예배했습니다. 믿음은 예배로 표현되고 고백됩니다. 여러분도 올 한 해 예배로 믿음을 고백하겠습니까? 그렇게 예배드렸을 때 어떤 상급을 받았나요? 4절, 아벨을 “의로운 자”라 부르셨습니다. 믿음의 예배는 우리를 의로운 자로 만듭니다. 5절, 에녹은 어떻습니까? 에녹의 믿음은 천국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 “죽은 후에는 반드시 천국이 있다“. 이 믿음이 에녹으로 하여금 천국에 올라가는 상급을 받게 했습니다. C.S.루이스가 말했습니다. “지상에서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은 모두 천국을 목표했던 사람들이다. 천국을 목표삼으면 지상도 얻게 되지만 지상을 목표삼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올 한 해 에녹처럼 지상보다 천국을 더 목표하며 살겠습니까? 천국을 목표하고 살면 천국과 지상을 같이 얻습니다.

7절에 노아가 나옵니다. 노아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은 언제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노아는 어느날 배를 만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배를 만들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햇빛은 쨍쨍 내려쪼이고 비는 올 기미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순종해서 배를 만듭니다. 그 결과 어떤 상급을 받았습니까? 다 죽었는 데 노아 8식구만 살았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순종했더니 의로운 상속자가 되어 땅에 살아 남은 것입니다. 올 한 해도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겠습니까?

그 후에도 몇 명이 더 있습니다. 아브라함, 사라, 야곱, 모세, 라합, 이들이 믿음으로 살았던 방식은 서로 달랐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산 사람에게 하나님이 상급주신 것은 맞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세계 3대 종교의 조상이라는 명예를 받았습니다. 사라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 다음 해 아들 이삭을 상급으로 받았습니다. 모세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 구원자의 상급을 받았습니다. 라합이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복할 때 모든 식구가 다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 상급을 주십니다. 믿음의 삶은 헛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33절 이하에 이름없이 죽은 수많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들에게도 예외없는 약속과 상급이 주어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희생당했지만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40절에 결론입니다. 히11: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으니”. 언제나 더 좋은 것은 예비하신 하나님, 믿음에는 반드시 대가가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믿음은 공짜가 아니라는 것을 아십니까? 오늘 믿음으로 살면 내일 보상받고, 오늘 고생하고 살면 내일 축복받고, 오늘 기도하고 살면 내일 응답받고, 오늘 손가락질 받고 살면 내일 존경받고 살 것을 믿습니까? 희망은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의 삶은 공짜가 아니기 때문에 희망이 있습니다. 반드시 상급이 있습니다.

독일의 신학자로 위르겐 몰트만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이 1964년에 쓴 고전적인 책이 있습니다. 제목이 “희망의 신학”입니다(사진). 이 책은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희망이라는 것을 밝힌 책입니다. 이 책에 있는 몇 구절을 소개합니다. 묵상할만한 내용들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실로 한계선을 넘어간다는 것, 그것을 초월한다는 것, 탈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이란 현재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한계선을 넘고, 그것을 초월하고, 그것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라는 말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미리 취한 희망 가운데서 십자가에 달린 자의 부활로 말미암아 무너진 그 한계선을 넘어간다는 것을 뜻한다”. 믿음은 현재의 한계선을 뛰어넘는 것이지만 혼자 뛰어넘는 것이 아니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뛰어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부활은 이미 죽음을 뛰어 넘어 영원한 미래로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세계로 가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현재는 육으로 현재를 살아도 우리의 미래는 영은 미래에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희망입니다.

한 마디 더 있습니다. “믿음이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되심을 아는 것이라면 희망은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다. 믿음이 우리에게 영생이 주어졌음을 아는 것이라면 희망은 우리가 영생을 누리며 사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은 희망을 세우고 희망은 믿음을 키운다”. 어떻습니까? 명확하지 않습니까? “믿음은 희망을 세우고 희망은 믿음을 키운다”. “믿음으로 살면 반드시 희망이 있다. 그 이유는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미 죽음을 이기고 현재의 한계선을 뛰어 넘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 반드시 하나님이 상주신다”. 그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살겠습니다.
우리가 믿을 세 번째는 “나는 반드시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살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중심한 삶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가량 방안에 T.V있다고 합시다. “T.V야, 너는 네가 존재하는 이유를 알고 있니?” T.V가 말합니다. “잘 모르겠어. 왜 내가 방에 있는지”.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삼성전자에 갔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당신들이 이 T.V 만든 것이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당신들이 만든 이 T.V가 왜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겠어요?“ 그때 삼성전자 직원들이 말합니다. ”T.V요?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만들었죠. 그런데 그것을 T.V에게 물어보면 어떻게 알겠습니까? 만든 사람에게 물어보셔야지. T.V는 사람들을 기쁘게 할려고 우리가 만들었지요“. 여기서 나오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발병자만 발명품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피조물이 어떻게 자기 존재이유를 알겠어요? 만든 사람이 알지 않겠어요? 잠16:4입니다. “여호아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The Lord has made everything for its own purpose”. 주께서 모든 것을 그 자신의 목적에 맞게 지으시고“. 그렇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이 그 목적에 맞게 지으셨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 분의 목적에 맞게 살도록 지음받았습니다. 희망은 어디서 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에 맞게 살 때 옵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입니다.

그래서 러셀 컬퍼라는 사람이 “당신이 당신이 된 것은”라는 시를 썻습니다.

당신이 당신이 된 것은 이유가 있지요.
당신은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계획의 한 부분이에요.
당신은 소중하고 완벽하고 독특하게 만들어졌으며
하나님은 당신을 그분의 특별한 여자와 남자로 부르고 있죠.

존재의 이유를 추구하는 당신
그러나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부터 손수 당신을 지으신 그분,
그러기에 당신은 그분이 원하는 바로 그 사람이지요.

당신의 부모님도 그분이 선택했어요.
지금 당신이 어떻게 느끼든
하나님의 빈틈없는 계획대로 그들을 선택하사
그들의 손에 주님의 확인 도장을 찍어주신 것이죠.

물론 당신이 당한 고통 견디기 쉽지 않았겠지만
하나님 역시 당신이 마음 상했을 때 눈물 흘리셨어요
하지만 그것을 통해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닮아가고 성장하길 원하셨죠

당신이 당신이 된 것은 이유가 있지요.
주님의 지팡이로 지어진 당신
당신이 사랑받는 당신이 된 이유는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이죠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살겠습니까? 희망은 거기서 옵니다. 저는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게 하겠다며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산 사람중에 강영우 박사를 기억합니다(사진). 그는 일생 믿음으로 산 사람이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때 축구하다 실명한 후 맹아원에서 아내를 만나고, 그 후에 미국에 가서 한국인 최초의 맹인 교육학 박사가 되고 백악관 국가 장애인위원회 차관보로 일하게 된 것은 믿음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생이었습니다. 그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암에 걸렸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미국에서 최고의 의료진에서 치료받고 낫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그는 치료를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최근 여러번 병원에서 검사와 수술, 치료를 받았으나 앞으로 저에게 허락된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이 의료진들의 의견입니다. 여러분들이 저로 인해 슬퍼하시거나 안타까워하지 않으셨으면 하는 것이 저의 작은 바람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누구보다 행복하고 축복받은 삶을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끝까지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렇게 하나둘 주변을 정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할 시간도 허락받았습니다. 한분 한분 찾아 뵙고 인사드려야 하지만, 그렇게 못하는 점,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으로 인해 저의 삶이 더욱 사랑으로 충만하였고 은혜로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가 마지막까지 붙잡았던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고 그 믿음 때문에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가 믿었기 때문에 가진 최고의 희망은 천국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술을 포기하고 하나님 나라를 택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최고의 교훈은 이것입니다. “믿는 자는 희망을 가진 자다. 그리고 최고의 희망은 하나님 자신이다”. 그래서 그가 남긴 마지막 책이 “내 눈엔 희망만 보였다”입니다(사진).

어떻습니까? 새 해 첫 주일, 여러분도 믿으면 희망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믿음은 희망을 낳으며 희망은 또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에게 상주심을 믿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바로 여러분이 믿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올 한 해 우리에게 주신 말씀으로 마치겠습니다. 롬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히11:1-6 2015.1.4(일)
믿음이 희망을 낳습니다
“음식없이는 40일 밖에 살 수 없고, 물이 없이는 8일 밖에 살 수 없고, 공기가 없이는 4분 밖에 살 수 없지만, 희망없이는 단 몇 초도 살지 못한다”.

롬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요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히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네가 죽는 것이 문제냐? 내가 죽는 것이 문제지”.

히11;6, “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하나님은 그를 찾는 자에게 상주십니다.

C.S.루이스, “지상에서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은 모두 천국을 목표했던 사람들이다. 천국을 목표삼으면 지상도 얻게 되지만 지상을 목표삼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히11: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으니”.

위르겐 몰트만, “희망의 신학”(사진).
“믿는다는 것은 실로 한계선을 넘어간다는 것, 그것을 초월한다는 것, 탈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믿는다는 것은 미리 취한 희망 가운데서 십자가에 달린 자의 부활로 말미암아 무너진 그 한계선을 넘어간다는 것을 뜻한다”.

“믿음이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되심을 아는 것이라면 희망은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다. 믿음이 우리에게 영생이 주어졌음을 아는 것이라면 희망은 우리가 영생을 누리며 사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은 희망을 세우고 희망은 믿음을 키운다”.

나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살겠습니다.

”발병자만 발명품을 안다“

잠16:4, “여호아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러셀 컬퍼, “당신이 당신이 된 것은”
당신이 당신이 된 것은 이유가 있지요.
당신은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계획의 한 부분이에요.
당신은 소중하고 완벽하고 독특하게 만들어졌으며
하나님은 당신을 그분의 특별한 여자와 남자로 부르고 있죠.

존재의 이유를 추구하는 당신
그러나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부터 손수 당신을 지으신 그분,
그러기에 당신은 그분이 원하는 바로 그 사람이지요.

당신의 부모님도 그분이 선택했어요.
지금 당신이 어떻게 느끼든
하나님의 빈틈없는 계획대로 그들을 선택하사
그들의 손에 주님의 확인 도장을 찍어주신 것이죠.

물론 당신이 당한 고통 견디기 쉽지 않았겠지만
하나님 역시 당신이 마음 상했을 때 눈물 흘리셨어요
하지만 그것을 통해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닮아가고 성장하길 원하셨죠

당신이 당신이 된 것은 이유가 있지요.
주님의 지팡이로 지어진 당신
당신이 사랑받는 당신이 된 이유는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이죠

강영우 박사(사진).

“내 눈엔 희망만 보였다”(사진).

롬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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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 큰 나무되게 하소서


히11:24-27 
성령님, 큰 나무되게 하소서

오늘은 교회력으로 맥추절이라 합니다. 맥추절은 옛날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보리를 추수하여 하나님께 바친 절기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왜 이 절기가 우리에게 중요할까요? 보리는 해마다 이스라엘에서 거둔 첫 번째 곡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곡식은 밀과 보리가 있지만 그중에 보리는 아무데서나 잘 자랍니다. 우리처럼 좋은 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돌작밭이거나 산 등성이의 비탈진 테라스가 전부인 이스라엘 땅에서는 밀보다 보리가 잘 자랍니다. 보리는 생활력도 강하고 소화도 잘 됩니다. 이 보리가 긴 겨울이 지나면 가장 먼저 익습니다(장재일, 245). 그러면 그 보리를 수확합니다. 보리를 수확하는 장면입니다.(Food, 24). 그리고 그것을 볶아서 13번 체로 곱게 걸러 가루를 만든후 떡을 만듭니다. 그것을 제사장이 하나님께 드립니다(장재일, 247). 이것을 “소제”라고 불렀습니다. 언제나 첫 번째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겨우내 곡식이 없다가 뜨거운 햇빛에 익은 보리를 수확했으니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뿐만 아닙니다. 맥추절을 또한 초실절이라고도 불렀는 데 그 이유는 보리와 함께 난 첫 열매들을 하나님께 바쳤기 때문입니다. 포도, 무화과, 석류, 감람열매, 그 땅에서 처음 익은 곡식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었습니다. 지역마다 먼저 익고 늦게 익은 지역이 있기 때문에 유월절부터 49일동안 자유롭게 수확해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치지 않습니다. 아예 우리는 농경사회에 살지 않습니다. 도시에 삽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절기를 지키는 것입니까? 먹는 열매만 열매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 모두 나무를 심고 열매를 거두는 농부와 같습니다. 우리 자신이 곧 열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열매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도 열매맺는 것입니다. 요15:16,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열매를 맺으라. 그나마 항상 열매맺으라”.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열매맺습니까? 그나마 항상 열매맺고 있습니까? 맥추절, 초실절에 우리가 질문할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는 열매맺고 있는가?” 그 중에서 가장 좋은 열매가 우리 자녀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주제는 이것입니다. 나는 지금 열매맺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 자녀들은 지금 열매맺고 있는가? 열매맺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이 이야기를 할 때 모델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모델이 모세입니다.
 
신구약을 통해서 모세는 가장 큰 나무중의 하나입니다. 400년 동안이나 노예상태로 있던 이스라엘을 해방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위대한 민족지도자요, 애국자였습니다. 또한 기도의 사람이요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그만한 인물이 이스라엘에 없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도 모세같은 인물이 되게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말에 사람을 표현할 때 나무로 비유합니다. 큰 나무, 재목, 동량, 대들보, 거목등이 그것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에서만 봐도 시1편, 시냇가에 심은 나무, 시52편, 감람나무, 시80편, 포도나무. 백향목, 시92편, 종려나무, 다 사람을 표현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 나무, 많은 열매를 기대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렇게 될까요? 큰 나무가 되려면 세 가지 과정이 필요합니다. 뿌리, 성장, 그리고 열매입니다.
 
믿음의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큰 나무가 되는 첫 번째 과정은 뿌리내리기입니다. 뿌리없는 나무는 자랄 수 없습니다. 그나마 물가에 깊히 뿌리를 내려야 큰 나무로 자랄 수 있습니다. 자, 모세를 봅시다. 모세가 큰 나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그의 부모때문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레위인이었습니다. 출2:1절입니다. “레위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었더니.” 2절입니다.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들 석달을 숨겼더니.” 모세의 아버지는 “아므람”이었습니다. 그 뜻은 “찬양을 드립니다”라는 뜻입니다. 어머니는 “요게벳”입니다. 뜻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소서” 라는 뜻입니다. 둘 다 다 믿음의 사람입니다. 아버지는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며 살았고”, 어머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았습니다”. 이것이 모세가 큰 나무가 된 첫 번째 뿌리입니다. 성경은 모세의 부모에 대하여 아무 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만 말합니다. “그들은 믿음의 사람이었다“.좋은 부모는 언제나 좋은 자녀를 낳습니다. 자녀의 문제는 곧 부모의 문제입니다.
 
”삶으로 가르치는 것만 남는다“는 책이 있습니다. 수원중앙침례교회 김장환 목사님의 아들 김요셉 목사의 책입니다. 이 책에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김요셉목사가 어릴 때 미국에 혼자 남아 공부하고 있었답니다. 미국 유학생이 가장 외로운 때는 감사절, 성탄절 휴가때입니다. 미국 사람은 모두 휴가 떠나고 한국학생은 대부분 한국나갑니다. 그런데 한국 못가고 집에 있으면 그렇게 외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탄절 전날 , 자기 한국에 있는 아버지, 어머니가 아들에게 왔습니다. 성탄절이 얼마나 목회자에게 바쁘고 중요한 때입니까? 목회자가 성탄절에 교회 비우고 미국가자 신자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목사님이 성탄절에 교회를 떠날 수 있나요?“ 그때 목사님이 말했답니다. ”교회가 잘못되면 다른 목회자가 대신 할 수 있지만 아들이 잘못되면 아무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김요셉 목사는 그때 부모님이 보여준 것은 삶으로 보여준 사랑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삶으로 보여준 사랑만 자녀에게 남는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부모는 자녀의 뿌리입니다. 하나님을 믿음의 땅에 뿌리내리게 하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부모는 보여준 또 하나의 사랑이 있습니다. 23절입니다. 히11:23, “믿음으로 모세가 태어났을 때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출애굽기에는 이 말을 “준수하다”라는 말을 썻습니다. “아름답다, 준수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토브”입니다. 이 말은 보통은 “좋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평소에 가장 많이 쓰는 말이 세 마디입니다. “샬롬”, 평안의 인사입니다. “바룩 하쉠 아도나이“. 하나님을 축복합니다. 기도입니다. ”토브“, ”좋다“는 말입니다. 그냥 좋다는 것이 아니라 이지만 기대하면서 좋다는 말입니다. 모세가 핏덩어리 모세를 보면서 부모는 좋아했습니다. 다만 핏줄이기 때문이 아니라 기대감 때문입니다. 아들을 낳으면 다 죽이라난 불행한 시대에 모세가 태어난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아들을 통해 반드시 고난의 민족을 위해 큰 일을 하실 것이다”. 이 믿음과 기대가 모세의 부모에게 있었습니다. 그렇게 믿자 부모들은 모세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23절입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태어났을 때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여러분, 큰 인물은 부모의 기대와 믿음에서 온다는 것을 아십니까? 부모가 자기 자녀를 보고 “내 자녀는 잘 될거야” 하고 믿는다면, 그래서 날마다 입버릇처럼 “너는 하나님이 보냈어. 너는 반드시 잘되거야” 한다면 그 자녀는 반드시 잘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저도 아이들을 키우면서 아이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압니다. 목회사역으로 바쁜 저는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는 했습니다. “격려와 비전”입니다. 아들은 초등학교를 외국에서 보냈기 때문에 한자도 모르고 한글도 잘못 썻습니다. 그가 중학교 다닐 때 부모로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동양문화권에 살면서 한자를 모르고 한글도 못쓰면 어떻게 합니까? 한번은 무슨 글 하나를 써 보라고 숙제를 냈습니다. 저녁에 와서 보니 엉망입니다. 고쳐야 할 문장이 너무 많습니다. 고쳐주면서 말했습니다. “그래도 내용은 좋네. 잘썻어. 너는 앞으로 훌륭한 책을 쓸거야”. 그런데 먼 훗날 이 말에 감동받고 신문기자가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리고 이번에 책도 냇습니다. 딸은 어릴 때부터 높은 데를 올라가기를 좋아했습니다. 엄마는 위험하다고 말했지만 저는 그것은 기특히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늘 말했습니다. “높은 데를 올라다니는 것 보니 너는 앞으로 공부를 잘하겠구나”. 이 말이 훗날 학자가 되겠다고 미국에서 공부를 시작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어떤 사람도 처음부터 위대한 인물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누구나 사람은 약하고 작은 어린이로 태어납니다. 그때 그를 하나님께 연결해 주는 사람이 부모입니다. 성경은 부모를 여러 가지로 비유합니다. “부모는 도공이다”. 부모는 자녀라는 도자기를 빚는 도공과 같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정성으로 빚으면 자녀는 튼튼하고 아름다운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부모는 궁수다”. 부모가 자녀의 안고 활을 쏘는 궁수라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가 쏘는대로 날아갑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 어릴 때부터 하나님안에 자신을 심는 믿음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성경이나 역사가 하나님과 세상에 기여한 사람들은 모두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믿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한국교회 통계가 있습니다. 한국교회 신자의 86%가 10대부터 교회 나온 주일학교 출신입니다. 15살 지나서 교회 나왔다는 사람은 14%에 불과합니다. 40세 넘어서 교회 나온 사람은 전체의 4%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이 먹고 예수믿기가 그렇게 어렵습니다. 100명중 4명꼴입니다. 설령 40 이후에 믿는다 해도 그 이전의 삶은 신앙적으로 허송한 것입니다.
 
믿음은 어릴수록 좋습니다. 유명한 성서 주석가 매튜 헨리는 10살 때 하나님 믿었습니다. 유명한 발명가 아이작 와츠는 9살,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 죠나단 에드워드는 7살, 성경학자 아이언사이드는 4살, 초대교회의 유명한 순교자 폴리캅은 9살, 모라비언 교파의 지도자 진젤돌프는 4살, 그리고 유명한 전도가 빌리 그래함은 3살 때 하나님을 믿고 주일학교에 다녔습니다. 성경 잠언 22:6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묘목도 일찍 심어야 잘 늦게 심으면 바람에 흔들리고 병충이 먹어 넘어집니다. 이를수록 좋습니다. 이를수록 오래 몸에 배고 이를수록 오랫동안 습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요즘 미래학으로 사람들에게 한국사회의 미래를 진단하는 데 도움을 주는 학자가 있습니다. 최윤식박사입니다. 그가 쓴 책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앞으로 2030년, 40년이 되면 한국교인은 400만이 되고, 교회학교는 3-40만으로 줄 것이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우선 가장 큰 이유가 저출산이랍니다. 지금같이 한 집에 하나 낳고 결혼 늦게 하고 아예 싱글로 혼자 사는 문화가 계속되면 인구의 감소로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몇 년전 제 아들이 결혼한다고 해서 제가 며느리될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그래, 아이는 몇이나 날거야?“ 놀랍게도 그가 말합니다. ”저는 하나님이 주시는 데까지 낳겟습니다“. 제가 그 자리에서 ”합격” 했습니다. 저출산과 함께 이유가 하나 또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같이 한국교회가, 믿는 가정이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그들이 어른이 된 2030, 40년년대에는 거의 신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와 가정이 할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 우선 생육하고 번성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신앙교육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최근 미국의 빌리 그래함이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요즘 교회와 크리스쳔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빌리 그래함이 한참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세상과 같아지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요즘 가장 큰 문제는 교회가 세상과 같아지려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더 큽니다. 어떤 시인이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적을 만나 보니 적은 다름 아닌 우리였다“. 우리가 바로 교회를 허는 여우라는 말입니다. 초대교회는 교회가 세상과 같아지는 것을 두려워 했는 데 요즘은 교회가 세상과 달라지는 것을 두려워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과 달라지지 않으면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가 요즘 교인들을 세 가지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는 ”유목민 교인“, 옛날에는 신자들이 모교회 의식이 있었는 데 지금은 없답니다. 조금만 수가 틀리면 유목민처럼 교회를 옮깁니다. 또 하나는 조금 어려운 말인데 ”코쿠닝 교인“. 코쿠닝은 누에고치를 가리키는 영어단어랍니다. 누예고치는 좀처럼 속에 있고 나오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요즘 교인들은 힘든 일, 손해볼 일, 희생하는 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꽁꽁 숨어 있습니다. 저희 교회가 광교에 한신교회 세우고 제가 ”가라, 가라, 제발 가라“ 했지만 겨우 두 세 가정 갔습니다. 힘든 일을 안하려고 합니다. 세 번째가 구들장 교인, 겨울에 추울 때 구들장에 군불을 때면 따뜻합니다. 그러면 밖에 안 나옵니다. 편하기 좋아하고 모험하지 않고 피곤한 것 싫어하고 그냥 누었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는 것, 자기를 귀찮게 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 이것이 구들장 교인입니다.
 
이러다 보니 자녀들이 보고 배울 것이 없습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세 가지 반드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첫째 주일날은 반드시 교회가고, 둘째 하나님께 반드시 십일조 드리고, 셋째 하나님께 반드시 기도하고, 이 “반드시”가 없기 때문에 “반듯한” 자녀가 안 생깁니다. 이렇게 나가니 2030년대에 한국에 교회학교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유려가 나온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정말 큰 나무가 되기 원합니까?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뿌리에서 공급받습니다. 믿음은 공급의 문제입니다. 어릴 때부터 에배하는 습관, 기도하는 품성, 섬기는 체질, 몸이 말을 듣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자녀도 살고 한국교회도 삽니다. 시80편에 정말 좋은 말씀이 있습니다. 시80:-10,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주께서 그 앞서 가꾸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하며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여기에 뿌리가 땅에 깊히 박히면 어떻게 된다고 말합니까? 10절,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가지는 백향목같이 바다를 덮으며”. 아, 이 축복, 이것이 하나님이 꿈꾸는 큰 나무입니다. 뿌리를 하나님께 두기를 바랍니다.
 
다음 고난을 이기고 자라야 합니다.
뿌리를 하나님께 내리게 했으면 그 다음은 자라는 일이 남았습니다. 뿌리를 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꾸준히 자라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꾸준히 자랄 때 가장 큰 문제는 인내와 고난입니다. 모세를 볼까요? 히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여기에 중요한 단어가 둘 나옵니다. 24절에 “거절하고”, 25절, “더 좋아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큰 나무로 자라기 위해서는 우리가 거절할 것은 거절하고 좋아할 것은 더 좋아해야 합니다.
 
먼저 무엇을 거절해야 합니까? 24절을 다시 보십시오. 히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거절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공주의 아들을 거절했습니다. 공주의 아들을 거절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애굽은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습니다. 아마도 지금의 미국, 중국, 러시아를 합쳐놓은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모세는 그 나라의 왕자였습니다. 그가 왕자 자리에 있기만 하면 모든 부와 명예, 행복이 보장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거절했겠습니까? 세상적으로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술과 향락에 젖어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오늘 무엇을 거절합니까? 25절에 “죄악의 낙”이란 말이 나옵니다. 죄를 가져오는 재미와 쾌락과 즐거움을 거절합니까? 성경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거절할 것을 거절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 기도하기 위하여 술과 포도주를 거절했습니다. 느헤미아는 무너진 조국을 재건하기 위해 왕의 음식을 거절했습니다. 요셉은 순결하게 살기 위해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거절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울을 미워하는 마음을 거절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해 호의호식을 거절했습니다. 거절할 뿐 아니라 더 좋아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25-26절을 보십시오. 히11:25-26,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는 세상의 쾌락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고난받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신앙은 거절이며 동시에 선택입니다.
 
무명의 시인이 쓴 “올바른 선택을 위한 기도”라는 시가 있습니다. 신앙이 선택임을 깨닫게 합니다. “주 하나님/ 올바른 결단과 선택을 통해 제가 성숙하게 하소서/ 쉬운 일이 아니라 옳은 일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이 아니라 참된 일을/빛나는 일이 아니라 영원한 일을 선택하게 하소서/제가 택하는 모든 것이 마침내 제 자신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쉬운 일보다 올바른 일을, 지금 빛나는 일보다 영원한 일을, 사람들에게 인기있는 일보다 하나님에게 참된 일을 더 좋아해야 합니다. 시인 박노해도 그런 시를 썻습니다. 제목은 ”평화“입니다. ”일상에서 작은 폭력을 거부하며 사는 것/세상과 타인을 비판하듯 내 안을 잘 들여다보는 것/현실에 발을 굳게 딛고 마음의 평화를 키우는 것/경쟁하지 말고 각자 다른 역할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일을 더 잘하는 것만이 아니라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평화를 이루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 실패입니다. 신앙은 실패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실패앞에 당당한 것입니다. 진정한 실패는 잘못해서 넘어진 실패가 아니라 넘어졌는데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영국속담에 이와같은 말이 있다. “잔잔한 바다에서는 좋은 뱃사공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G.허버트도 말했습니다. “폭풍은 참나무가 더욱 깊이 뿌리를 박도록 한다.” 아브라함 링컨이 상원의원 선거에서 낙선했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길이 약간 미끄럽기는 해도 아주 낭떨어지는 아니야.” 그리스도인의 기준은 실패했느냐 성공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했느냐 불순종했느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음으로 실패했지만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성공했습니다. 고난을 이기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열매가 됩시다
고난을 이기고 큰 나무가 되면 어떻게 됩니까?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열매가 주렁 주렁 맺혔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석류입니다(장재일271). 포도입니다(Food, 33). 종려열매입니다(Food, 41). 무화과입니다(Food, 44). 이런 열매들을 거두어 하나님께 바치는 농부들은 얼마나 기뻣겠습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가 맥추절, 초실절을 지키는 이유입니다.
 
이스라엘 순례를 하다보면 매우 덥습니다. 그래서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가 그늘있는 곳으로 갑니다. 너무 더우니까 종려나무나, 무화과나무처럼 키가 크고 잎이 많은 나무를 찾습니다. 그리고 찾으면 그 나무 밑에 앉습니다. 그때 얼마나 시원합니까? 잎이 많고 무성하니 그늘이 있어 시원하죠. 열매가 주렁 주렁 달렸으니 열매를 먹을 수 있어 좋죠. 나무가 있으면 주변이 물이 있으니 시원한 물가에 발을 담글 수 있어서 좋죠. 그래서 그 그 나무밑에 누어 봅니다. 그러면 하늘 높히 솟은 큰 나무가 보입니다. 그 큰 나무가 그늘이 되어 피곤한 나그네를 덮어줍니다. 그 큰 나무를 보면서 생각합니다. “아, 나도 저렇게 큰 나무가 되어야지. 그래야 많은 사람에게 그늘과 열매와 생수를 제공하지”. 그리고 열매를 보며 생각합니다. “아, 저렇게 많은 열매맺기 위해 나무는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많이 기다리고 많이 참고 많이 노력했겠구나“. 그래서 나무에게 말합니다. “나무야, 고맙다. 그동안 네가 흘린 땀방울과 그동안 네가 지불한수고의 대가로 오늘 내가 이렇게 편하게 쉬는구나”.
 
여러분. 우리가 누어 쉬는 큰 나무를 보면서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아, 이 나무의 수고로 내가 오늘 쉬는구나”. 그리고 큰 나무가 되기 위해 얼마나 오래 참고 기다렸는지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불후의 명작 <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가 80번이나 고쳐 썻다고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10년이나 넘게 그렸다고 합니다. 괴테는 <파우스트>를 23세부터 쓰기 시작하여 82세까지 60년에 걸쳐 완성했다고 합니다. 아주 가끔 대나무에 꽃이 핀 것을 봅니다. 그런데 그 꽃 한송이가 적어도 60년, 길게는 120년을 참고 견뎌서 피었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대단합니다. 꽃 한송이가 그냥 피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주인공 모세의 일생도 기다림과 인내의 일생이었습니다. 그는 호렙산에서 떨기나무를 볼 때까지 40년이나 광야에서 양을 쳐야만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시내산에 올랐지만 십계명을 받은 것은 그가 8번이나 힘들게 정상에 올라간 후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 40년 가나안 땅을 행진했습니다. 오랜 기다림과 인내없이 모세같은 인물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모세만 그럴까요?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는 데만 25년 걸렸습니다. 야곱은 하란에서 라헬을 얻기 위해 20년을 일했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흉년을 이기기 위해 14년을 지나야 했습니다. 오랜 기다림, 그것이 큰 나무되는 길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렇게 40년을 지나서 가나안땅에 도착했으나 막상 가나안 땅에는 들어가지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직 눈이 흐리지 아니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는 데 120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가 큰 나무가 되어 많은 열매를 맺었으나 그 모든 영광을 자신에게 돌릴까봐 하나님은 모세를 느보산에서 급하게 데려가셨습니다. 그렇게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모세는 죽자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와 성경은 그리고 모든 백성은 모세가 땀흘려 맺은 열매를 따먹고 평생을 안전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는 사명을 다하고 하나님 나라 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이렇게 살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도 이렇게 살게 하지 않겠습니까?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고 자신이 일생에 걸쳐 맺은 열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삶, 그것이 우리가 큰 나무가 되고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할 이유입니다. 오늘 거룩한 맥추절, 초실절에, 우리 모두 하나님의 열매가 되고 하나님의 나무가 되겠습니까? 오늘 교회학교 주일에 우리의 모든 자녀들, 우리 교회학교 자녀들을 하나님의 큰 나무로 키우겠습니까? 성령님, 우리의 자녀들을 큰 나무 되게 하옵소서. 많은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 이를 위해 자녀들의 뿌리는 하나님의 믿음암에 세워지게 하옵소서. 말씀과 성령으로 양육되고 성장하게 하옵소서. 고난을 이기며 실패앞에 당당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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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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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가?

요한일서 2:21-23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열여덟 살에 왕이 되었습니다. 대학교에 입학하지도 않은 고등학생 나이 일 때 왕이 되었으니 나라를 어떻게 다스리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왕이 된 후 실수하지 않았고 구설수에 오르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여론에 따라 흔들리지도 않았습니다. 신문이나 잡지를 보지 않았지만 그가 판단한 대로 하면 일이 형통하게 이루어져 만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고, 그가 64년간 나라를 통치할 때 영국이 황금시대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나라를 다스릴 때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찬송을 부르면서 쉽게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주시고 그에게 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손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빅토리아 여왕이 64년간 그렇게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형통했던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빅토리아 여왕에게 이렇게 물었답니다. “여왕 폐하, 폐하께서는 하루에 기도를 몇 번 하십니까?” “한 번 합니다.” “신앙 깊은 폐하께서 하루에 한 번밖에 기도를 안 하시다니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면서부터 저녁에 잠들 때까지 계속 기도합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하나님과 동행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혼자 세상을 살지 마시고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며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모든 문제의 해답을 알고 있는 분입니다. 보통 학생이 풀 수 없는 시험 문제를 천재 학생과 함께 풀면 아주 쉽게 풀 수 있는 것처럼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우리의 힘으로는 풀 수 없지만 하나님과 함께 풀면 쉽게 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설교는 아주 기초적인 기독교의 진리를 다루려고 합니다. 오늘 다루는 진리가 아주 기초적인 것이지만 이 진리에 답을 할 수 있어야 참된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진리에 대한 대답이 잘못되었다면 그는 참 기독교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고 할 때 하나님을 믿는다는 표현보다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종교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지만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없습니다. 기독교와 일반 종교의 차이점 중에 가장 두드러진 차이가 이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예수님을 유일한 구세주로 믿습니다.
   사도 요한은 어떤 사람의 영이 하나님께 속한 영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고 말했습니다. 본문 22절에서는 진리에 속하지 못하고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밝힙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거짓말 하는 자입니다. 그는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입니다. 23절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아들에 대한 올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아들이 없는 사람은 그가 아버지 하나님을 찾는다 할지라도 사실은 그에게 아버지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요일 4:1-3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2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영을 다 믿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영을 분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거짓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하나님께 속한 영은 어떤 영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사람의 영입니다. 예수님을 시인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속한 영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은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요일 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하나님께로부터 났다는 말은 거듭났다는 말입니다. 누가 거듭난 사람입니까? 누가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들입니다. 왜 이 시대의 유대교에는 구원이 없을까요? 이미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왜 타종교에 구원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까? 왜 그럴까요? 타 종교는 유일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주장입니다. 그것은 목사들의 주장이 아닙니다. 성경의 주장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가?”입니다. 오늘 설교는 예수님이 유일한 구세주라는 전제 하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 3가지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우리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이 예수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인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선포입니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은 헬라어로 ‘파스’라는 말인데 ‘어떤 자든지 다’라는 의미입니다. 인류 최초의 사람인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이 시대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자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모두가 죄인입니다.
   모든 사람은 두 가지 측면에서 죄인입니다. 첫째는 원죄 때문에 죄인입니다. 원죄란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범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가지고 태어나는 죄책과 부패성을 말합니다. 원죄로 인하여 사람은 지정의(知情意) 전체가 전적으로 부패되었습니다.
   둘째는 자범죄 때문에 죄인입니다. 자범죄는 원죄의 부패성을 가진 모든 사람이 삶 속에서 짓는 죄를 뜻합니다.
   간혹 자기는 이 세상에서 단 한 번도 죄를 범한 일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죄를 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양심을 속이는 말을 하는 것이든지 아니면 자기의 죄를 볼 수 있는 눈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누를 사용해서 세수를 하고 나면 얼굴이 깨끗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현미경으로 보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세군이 얼굴에 붙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현미경으로 보면 깜작 놀랄 만큼 세균이 많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수준에서 보면 자신은 다른 사람들 보다 훨씬 의로운 것 같고 자신에게서는 흠을 찾아볼 수 없는 것 같지만 도덕성이 더 높은 사람의 눈으로 보면 상당히 많은 죄가 보이는 것이고 또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많은 죄를 범한 죄인인 것입니다.
   죄의 가장 무거운 영향력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입니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죄를 범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기 위하여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죄를 없애기 위해서 노력해왔습니다. 고대로부터 인간은 철학으로, 도덕적 행위로, 선행으로, 종교생활로 혹은 수도생활을 통해서 죄를 없애려고 노력했으나 죄의 부패성과 죄책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죄의 부패성과 죄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사람은 누구나 전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의 어떤 노력도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외상값을 갚지 못하면 고기로 대신 갚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기가 썩었다면 썩은 고기로 어떻게 외상값을 갚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썩은 고기를 받고 외상값을 계산해 주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어떤 노력도 하나님을 만족 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죄를 없이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믿는 자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사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이 찔리시고 상하시고 징계를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신 이유는 예수님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가 계산해야 할 죄의 값을 대신 지불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대신 우리 죄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담당하셨다는 말은 우리의 죄의 짐을 대신 짊어지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대속의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담당의 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에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는 능력의 피입니다.
   요일 1:7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의 죄를 없이 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미 7:18,19절을 보면 주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데 우리의 죄를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신다고 말씀합니다.
   물건을 발로 밟는 것은 부수기 위해서입니다. 부순다는 것은 이제 끝낸다, 이제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쓸 것은 발로 밟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돌아보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깊은 바다에 던지신다는 말은 다시는 기억치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류 역사상 제일 깊이 내려간 바다의 깊이가 300m라고 합니다. 그것도 사람을 보호해 주는 특별 장치가 되어 있고 산소와 먹을 것이 있는 우주복 같은 것을 입고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300m를 내려갔다 올라오는데 한 달이 걸렸답니다. 빨리 올라오면 수압에 의해 즉사하기 때문이랍니다. 사람은 301m 바다에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300m의 바다에 던지시는 것이 아닙니다. 깊은 바다에 던지십니다. 사람이 발견한 가장 깊은 바다는 깊이가 약 11km입니다. 300m 깊이에 던진 것도 찾지 못하는데, 11km 깊이의 바닥에 있는 것을 어떻게 찾겠습니까? 그것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의 모든 죄를 발로 밟으시고 깊은 바다, 11km가 더 되는 바다에 던지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해결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2.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는 분이 예수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장로님이 연세가 드셔서 운명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꿈을 꾸다가 그만 천국과 지옥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온 장로님은 놀래서 많은 것을 회개하였습니다. 특히 목사님께 잘못한 것 같아서 목사님을 찾아뵈어 용서를 구하고 그리고 목사님과 화해를 하였습니다. 장로님은 꿈 이야기를 목사님에게 하였더니 잠시 후에 목사님께서 그 장로님을 서재로 부르시고는 심각하게 묻더라는 것입니다. “장로님! 정말 천국이 있기는 있는 것입니까?”    천국에 대한 확신이 없이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는 것은 그의 신앙이 성경적이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 금요일에 말씀드렸던 어느 군목의 죽음입니다. 어느 날 군함이 파선되어 모두가 바다에 빠져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군목은 구명튜브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살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군목이 옆에 있는 죽어 가고 있는 병사를 보고 물었습니다. “자네 예수를 믿는가?”, “아니요.”, “그럼 이 튜브를 자네가 가지게.”, “목사님을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 “나는 예수를 믿네. 나는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가네. 자네는 예수를 안 믿으니까 지금 죽으면 지옥에 가는 거야. 내가 이 구명튜브를 주고 죽을 터이니 자네는 살아나거든 예수 믿고 천국에서 만나세.” 그리고 구명튜브를 던져주고 목사님은 익사하였습니다. 그 병사는 후에 예수를 믿고 자기 대신 죽은 목사님을 평생 그리워하며 살았답니다.
   천국에 대한 확신이 우리를 참된 신자로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천국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천국을 향해 가는 나그네로 이 세상을 살기를 바랍니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이 심판은 계 20장에 나옵니다. 희고 큰 보좌 앞에 앉으신 주님 앞에서 지구상에서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심판을 받습니다. 그 심판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은 불못인 영원한 지옥에 던져집니다. 그리고 심판을 통과한 사람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인 영원한 천국에 들어갑니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이고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입니다.
   계 21:22,23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천국에 하나님이 계시는데 성경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천국에 갈 길도 예수님뿐인 것입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우리를 영원하신 아버지 앞으로 인도하실 분이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실 분이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어린 아이들에게 설교를 하시다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 믿으면 죽어서 천국을 가는데 너희들은 나중에 죽어서 천국을 가고 싶으냐? 아니면 지옥을 가고 싶으냐?”라고 묻자 모든 아이들이 일제히 손을 들고서 “천국을 가고 싶어요!”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너무나 기쁜 마음에 목사님께서 또 다른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럼, 너희가 천국을 갈려면 어떻게 해야 되지?”라고 묻자 한 아이가 번쩍 손을 들었습니다. 목사님은 속으로 틀림없이 이 아이가 “예수님을 믿어야 되요!”라고 말할 것을 기대하면서 그 아이에게 답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자신 있게 손을 든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이렇게 크게 말했다고 합니다. “네, 우리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해요!.” 네 죽어야 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3. 예수님이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성자 소리를 들으실 만큼 존경 받는 삶을 사신 분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훌륭한 목회를 하신 분도 때때로 상처를 받고 아픈 일을 당하셨다고 합니다. 하루는 너무너무 힘이 들어 심방을 마치자마자 돌아와 그대로 쓰러지셨답니다. 아픈 일을 당하여 너무너무 아픈 가슴을 안고 쓰러져 있는데 비몽사몽간에 꿈인지 환상인지, 지친 몸으로 흐느적거리며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걸어가는 자기 모습이 보이더랍니다. 너무 힘들어 가기 싫지만 가야만 할 길이라 걸어가더랍니다. 그런데 곧 앞으로 쓰러지더랍니다. 바로 그때 사람의 손보다 엄청나게 큰 손이 나타나 목사님을 척 받쳐서 세워주더랍니다. 그래서 힘들게 다시 걸어가는데 얼마 가지 못해 또 좌측으로 비틀하고 넘어지려 하니 몸이 땅에 닿기 직전에 또 그 큰 손이 나타나 척 받쳐서 세워주더랍니다. 우측으로 넘어지려 할 때나 좌측으로 넘어지려 할 때나 어김없이 그 큰 손이 나타나 도와주더랍니다. 그렇게 그 길을 끝까지 다 가더랍니다. 그때 목사님이 ‘아, 그 큰 손은 하나님의 손이구나. 내가 이렇게 힘들고 어렵게 목회를 하지만 나 혼자 하는 것이 !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 언제나 나를 도와주시는구나.’라고 깨닫고 힘을 얻어 오랜 세월 동안 승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를 도우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우리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고 이 땅에 40일을 계시다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은 지금 하늘 보좌 우편에서 대표적으로 세 가지 일을 하고 게십니다.
   첫째는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 하고 게십니다.
   롬 8:34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둘째는 우리를 위하여 천국에 거처를 예비하고 계십니다.
   요 14:2,3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셋째는 고난 받는 자들을 응원하고 계십니다.
   행 7:55,56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주님은 하늘 보좌에서 일어나셔서 스데반을 응원하시며 위로하셨습니다.
   주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28:20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가시는데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좀 모순이 있는 말씀 아닙니까? 가시면 함께 하실 수 없는데 가시면서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승천 직전에 모순처럼 들리는 말씀을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오셔서 믿는 자들과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 14: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성령님을 모릅니다. 성령님을 받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성령님을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속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믿는 자 속에 오셔서 무슨 일을 하십니까? 믿음의 사람들을 인도하시고 도와주십니다.
   롬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를 도와주셔서 어떤 결과가 만들어집니까? 두 가지 결과입니다.
   첫째는 성령님은 예수님을 대신해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저는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이 말씀이 너무 좋습니다. 내가 비록 부족해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고, 내가 실수를 했어도 하나님이 도우시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믿음만 확실하면 우리는 어떤 상황을 만나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미국이 낳은 유명한 육상 선수 '칼 루이스' 는 오토바이를 타고 출퇴근을 하였는데, 그 오토바이를 도적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전거를 사서 타고 다녔는데 또 도적을 맞았습니다. 화가 난 그는 “내 다리만큼은 도적질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서 왕복 24km을 매일같이 억지로 참고 달리며 출퇴근을 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세계적인 육상 선수가 되었습니다. 오토바이를 도둑맞고 자전거를 도둑맞는 것은 속상한 일이지만 그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칼루이스는 세계적인 육상선수가 되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화가 화가 아니라 복이 된 경우가 많습니다.
   케몬스 윌슨이라는 미국의 한 남자가 회사에서 해고를 당했습니다. 남자들에게 직장에서 해고를 당했다는 것은 인생의 위기이며 기근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보통 남자들은 이럴 때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해고 시킨 회사와 상사를 원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케몬스 윌슨은 낙심하고 절망하고 원망하는 대신 해고 통지서를 들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해고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여관 사업을 해라. 사람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여관을 만들어 보아라.’라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는 기도 중에 받은 그 감동에 순종해서 작지만 깨끗한 여관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손님이 얼마나 많이 오는지 많은 돈을 벌게 되었고 차츰 여관의 수를 늘리기 시작해서 전 세계에 수많은 호텔을 가지고 있는 재벌이 되었습니다. 그 호텔이 바로 홀리데이인 호텔입니다. 케몬스 윌슨은 인생의 위기 앞에서 자신의 약함을 알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다가 홀리데이인 호텔을 창업하여 재벌이 된 것입니다. 해고를 당해! 도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새 길을 주시는 것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면 예수님은 성령으로 우리를 도우셔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울 이루게 해주시는 분입니다.
   둘째는 성령님은 예수님 대신해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만드십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닮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는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도우셔서 예수님을 닮도록 역사하십니다.
   롬 8: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면 자연스럽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전에는 나쁜 생각을 하고 나쁜 말을 하고 나쁜 행동을 해도 양심에 걸리지 않던 사람이 이제는 나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면 양심에 걸려서 마음이 불편하고 하나님께 죄송한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많이 불편해 집니다. 성령님께서 마음속에서 역사하셔서 죄에 대해서 책망하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렇게 되면 잘못을 회개하게 되고 돌이키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성령님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언행심사가 주님을 닮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까? 세 가지 이유를 나누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이 예수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는 분이 예수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예수님이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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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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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설교 ( Dawn Prayer Meeting Sermon)

 

우리가 기다리는 하나님의 날

베드로후서 3:8-14


 

하나님의 시간대와 우리의 시간대는 다릅니다. 8절에 보니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천년의 시간이 주님에게는 하루처럼 빠르기도 하고, 우리에게는 하루의 시간이 주님에게는 천년처럼 길기도 한 것입니다.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는 다 아시죠? 토끼는 거북이에게 경주에서 져서 화가 잔뜩 난체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토끼에게 달팽이가 나말했습니다. “너 거북이에게 졌다며, 나는 네가 빠른 줄 알았는데 별거 아니네” 그러잖아도 화가 난 토끼는 자신을 무시하는 달팽이의 말에 감정이 폭발해서 발로 달팽이를 차버렸습니다. 달팽이는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까지 날아가버렸습니다. 그리고 토끼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약 1년이 지난 후 누군가가 토끼의 집 문을 두드립니다. 토끼가 문을 열어보니 자신이 1년 전에 발로 찬 달팽이가 서있습니다. 달팽이는 화가 잔뜩 난 얼굴로 토끼를 째려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니가 날 쳤냐?”
   하나님의 시간대와 우리의 시간대는 분명 다릅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약속이 더딘 것처럼 느끼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에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날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10절에서는 그 날을 ‘주의 날’이라고 말합니다. 12절에서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날을 ‘하나님의 날’ 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생활은 ‘주의 날’ 즉 ‘하나님의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모든 것을 그날에 걸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우리가 기다려야 하는 하나님의 날은 어떤 날이고, 하나님의 날을 기다리는 우리는 어떻게 그 날을 기다려야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우리가 기다려야 하는 하나님의 날
   1) 재림의 날이다.
   우리 주님 다시 오십니다. 구름타고 오십니다. 우리는 그 날을 기다리며 사는 것입니다. 자대배치를 받은 이등병이 가족이나 애인의 면회를 기다릴 때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것보다 더욱 간절히 주님의 재림을 사모해야 합니다.
   살전 4:16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주님이 재림하실 때 호령이 있습니다. ‘호령’이라는 말은 ‘부르시는 소리’입니다. 누구를 부르시는 소리일까요? 저와 여러분을, 믿는 우리들을 부르시는 소리입니다. “경훈아~”하고 부르실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장의 소리가 들립니다. 아마 “보라! 신랑이로다”라는 소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온천지가 떠나갈듯 한 나팔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공중으로 이끌림을 받을 것입니다(살전 4:17). 이것을 휴거라고 말합니다. 이 때 우리를 공중으로 모으는 일을 천사들이 합니다(마 24:15). 주님의 재림의 순간은 신랑과 신부가 만나는 시간입니다. 주님은 신랑이시고, 믿는 우리들은 신부입니다.
   우리가 휴거 되어서 공중에서 얼마나 오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 때 지상에서 주님의 재림을 원치 않는 세력들이 군대를 모아 재림하시는 주님을 막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 전쟁이 아마겟돈 전쟁입니다.
   공중에서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공중에서 주를 보게 될 것이고 그 이후로 영원토록 주와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살전 4:17입니다.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는 몇 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육체적인 재림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몸 그대로 재림하십니다. 예수님은 가신 그대로 오십니다. 가실 때 부활체를 입고 가셨으니 오실 때도 부활체로 오실 것입니다.
   둘째는, 가시적인 재림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눈이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계 1:7). 이 세상에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셋째는, 갑작스런 재림입니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시기에 예수님은 갑자기 재림하십니다. 그래서 도적 같이 오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지 못한 때에 갑자기 오는 것입니다.
   넷째는, 영광스러운 재림입니다. 마 25:31입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주님은 영광으로 오셔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십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만나면 서로 ‘마라나타’라고 인사했습니다. ‘마라나타’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로마의 핍박을 견디고 믿음을 지키게 했던 신앙의 비밀이 ‘마라나타’신앙이었습니다. 우리가 주일 낮 예배 시간에 마지막 부르는 찬양이 ‘마라나타’입니다.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며 주님이 속히 오시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부르는 찬양입니다. 제가 그 찬양을 예배 마지막 곡으로 선택한 이유는 여러분의 신앙이 ‘마라나타 신앙’, ‘재림 신앙’으로 무장되기를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2)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날이다.
   두 번째 우리가 기다리는 하나님의 날은 천년 왕국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들은 들림을 받아서 공중에서 주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이 지상세계에 내려오게 됩니다. 이 때 주님은 백마를 타고 오십니다.
   주님은 하늘 군대와 함께 올 것인데 공중에 들림 받은 우리 역시 하늘 군대에 속해서 이 땅에 내려옵니다. 주님을 따르는 하늘 군대도 흰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지상에 내려옵니다. 그리고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와 더불어 전쟁을 합니다. 이 전쟁이 아마겟돈 전쟁입니다. 아마겟돈 전쟁에서 하늘 군대가 승리합니다.
   아마겟돈 전쟁 이후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사로 잡혀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집니다. 또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용 즉 마귀, 사탄을 잡아 결박합니다. 마귀는 잡혀서 무저갱에 들어가게 되고 천년동안 그 곳에 갇혀서 나오지 못합니다.
   슥 14장에 보면, 재림하신 주님이 예루살렘 감람산으로 가십니다. 주님이 감람산에 서시니 감람산 한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서 남과 북으로 쪼개집니다. 그리고 감람산에서 생수가 나와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릅니다.
   마귀가 결박되고 천년 동안이나 마귀가 세상을 미혹하지 못하니 세상에는 평화가 찾아옵니다. 아담과 하와가 마귀의 미혹에 넘어가서 잃어버렸던 에덴동산이 회복되게 합니다.
   짐승의 666표를 받지 않고 믿음을 지킨 우리들은 천년 왕국 기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때는 온 세계의 수도가 예루살렘이 될 것이고 율법이 시온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와서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세상에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 날에는 무기를 녹여서 농기구를 만들 것이고,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고, 어린이가 사자들과 뛰놀고, 독사 굴에 손을 넣고 장난치는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천년 왕국 기간 동안에는 사단을 결박하여 무저갱에 가두었으므로, 재난사고, 흉년, 질병, 전쟁이 없는 지장낙원이 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날을 기다리며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3)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날이다.
   천년이 차게 되면 마귀가 잠간 놓임을 받습니다. 이 때 마귀가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불택자들은 마귀의 유혹을 받아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바다 모래처럼 많은 사람들이 미혹을 받아서 마귀를 따르게 됩니다. 그들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포위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불이 내려서 그들을 태워버립니다. 이 전쟁을 곡과 마곡의 전쟁이라고 합니다.
   곡과 마곡의 전쟁이 끝난 후에 그 유명한 백보좌 심판이 벌어집니다. 이 심판을 백보좌 심판이라고 하는 이유는 심판자께서 크고 흰 보좌에 앉으셔서 죽은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백보좌 심판을 통과하기를 바랍니다. 백보좌 심판을 통과하는 비결은 생명책에 이름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구원 받은 사람들은 백보좌 심판을 이기고 새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심판을 통과하지 못한 자들은 영원한 유황 불못에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영원토록 쉼 없이 괴로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지금 있는 하늘과 땅은 마치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듯이 불타게 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새예루살렘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올 것입니다. 우리는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토록 행복하게 살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눈물도 사망도 저주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생명수 강이 흐르고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주를 섬기며 주의 얼굴을 보고 세세토록 왕 노릇하며 살 것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하나님의 날은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날입니다.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날을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날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날은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날입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날을 어떻게 기다려야 할까요?
 
   1) 주님의 약속 위에 서라.
   주님이 오시기 전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게 됩니다. 적그리스도는 온 세상을 미혹하려고 들 것입니다. 666짐승의 표를 온 세상 사람들에게 받게 하려고 할 것입니다. 짐승의 표를 받으면 그는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고 영원한 불못에 들어갑니다.
   요즘 666 짐승의 표를 ‘베리칩’으로 보는 견해가 강합니다. 미국에서는 2014년부터 모든 국민이 베리칩을 받아야 한다는 법이 통과 되었습니다. 지금은 경제적인 면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 베리칩을 받게 하겠지만 결국은 그것이 모든 사람들을 통제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떠나게 만드는 악한 자들의 도구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짐승의 표가 베리칩이 되었든 다른 방법이 되었든 중요한 것은 우리는 짐승의 표를 받으면 안 되고 마귀의 미혹을 이겨야 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미혹에 넘어가고 배교하는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살전 2:3).
   사람들이 넘어지는 이유는 말씀이 없어서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 열심으로 합니다. 바울은 롬 10:2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열심에 관해서 말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말씀 없는 열심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대학 교수로 있을 때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더군요. 시험을 내보면 기가 막힌 학생들이 있답니다. 어떤 학생은 교수님이 낸 문제는 지우고, 자기가 스스로 문제를 내서 해답을 달았답니다. 그 학생은 정답을 달았습니다. 그런데 성적은 안 나갑니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생각하기를 예수를 잘 믿었다, 잘 섬겼다 해도 그것은 내 기준이라면 내 삶에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들이 내 생각이 아닌 말씀 위에 서서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주의 재림에 관한 약속을 믿지 못해서 실족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말세에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지 않기 때문에 미혹을 받아서 타락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가 가까워질수록 우리들은 더욱 말씀을 가까이 하고 재림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2) 기도에 깨어 있으라.
   10절에 보니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예기치 못할 때 오신다는 말입니다. 도적이 도적질하러 온다고 통보하고 오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도적은 집안사람들이 방심하는 틈을 타서 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려면 영적으로 깨어있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종말에 대한 가르침의 핵심은 “깨어 있으라.”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종말에 일어날 일들을 말씀하신 후에 결론적으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25장에서는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비유를 하신 후에 결론적으로 “그런즉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깨어있는 신앙생활은 기도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마 26:41에 보니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신앙은 잠든 신앙입니다. 기도하는 신앙이 깨어있는 신앙입니다.
   기도생활은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데 크게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생활에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는데도 크게 도움이 됩니다.
   경북 지사를 지내신 장로님의 간증입니다. 이분이 도지사 시절에 강원도에서 산불이 일어나서 강릉에서부터 불이 번져서 경상북도 울진 경계에까지 오게 되었답니다. 일주일 동안 불이 계속 붙었습니다. 나라에서는 많은 회의를 했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장비와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불은 꺼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번져갔습니다. 드디어 그 불길이 경상북도로 넘어왔습니다. 불도 넘어가면 그 지역에 있는 기관장이 인계를 해야 한답니다. 장로님도 강원도에서 내려온 그 불을 인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로님은 내일 아침부터 책임지고 그 불을 잡아야 하기 때문에 밤새워 하나님께 기도를 했답니다. “하나님 불 좀 꺼주세요. 도와주셔서 불을 잡게 해주세요. 불이 울진 원자력 발전소에 붙으면 이 나라를 난리가 납니다. 도와주세요” 장로님이 다음 날 새벽에도 간절히 기도하고 다섯 시에 창문을 여니까 밖이 조용하더랍니다. 그렇게도 강하게 불던 바람이, 끊임없이 불던 바닷바람이 조용하더랍니다. 그래서 직원들에게 “항상 이렇게 바람이 없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아니요. 항상 바람이 부는데 오늘은 이상! 하게 바람이 안 부네요”라고 하더랍니다. 늘 불던 강한 바닷바람이 그날만 잠잠한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장로님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의 응답인줄 믿습니다. 바람이 그치니 일주일 동안 꺾일 것 같지 않았던 불이 아침 열 시 반이 되니 다 꺼졌답니다.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도는 시시한 일이 아닙니다. 기도는 재림을 준비하는 우리들의 생명줄과 같은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에게 생명줄을 던져주면 그 사람은 죽기 살기로 그 줄에 매달려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마지막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죽기 살기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도하면 말세에 일어나는 온갖 미혹을 이기게 되고, 또 생활 속에서 주님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3)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는 첫째, 깨어있는 영성으로 마귀를 대적하기 위함이고, 둘째는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모든 것이 다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를 따라합시다. “모든 일이 드러난다”
   10절에 보니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일이 드러난다는 이 말씀은 어떤 이들에게는 한없는 위로를 주고, 또 다른 이들에게는 한없는 두려움을 줍니다.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는 말씀에 위로받을 사람은 누굴까요? 사람이 알아주든 말든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고 충성, 헌신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들이 드러날 때 아마 “모르시는 줄 알았는데 이것도 아셨네요!”라고 탄성을 지르면서 손뼉을 치며 기뻐할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주님을 만났을 때 주님이 저를 안아 주시면서 “목회하느라고 수고했다. 고생했다”라고 하셨는데 제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주님이 나를 알아주시니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힘이 나는지요.
   “모든 일이 드러나리라”는 말씀에 두려워 할 사람은 누구일까요?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고 어둠의 일을 했던 사람일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아무도 모르는 줄 알고 여태까지 살아왔는데 모든 것이 드러난다면 얼마나 놀랍고,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우리가 완벽하게 숨겨도 주님이 드러내시면 다 드러납니다. 오래 전 제주도로 발령받은 경찰서장이 가족을 서울에 두고 혼자 생활했습니다. 외롭게 지내다 보니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바람이 난 것입니다. 남편의 이상한 행동을 눈치 챈 아내가 닦달하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어느 날 밤에 잠자는 아내의 귀에다 못을 박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고혈압으로 사망한 것처럼 사망진단서를 떼어 장례를 지냈습니다. 감쪽같이 속인 줄 알았지요. 그런데 사정에 의하여 몇 년 후 아내의 무덤을 이장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오빠가 두개골을 수습하다보니까 머리에 큰 못이 박힌 것을 발견했습니다. 결국 살인죄가 발각되어 사형을 당하고 말았답니다.
   히 11:24,25에 보면 모세가 주 앞에 쓰임 받기 전에 먼저 버렸던 것이 있습니다. 먼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버렸습니다. 권력과 명예를 버린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을 버렸습니다. 육체적인 쾌락을 버린 것입니다. 세 번째는 애굽의 모든 보화 즉 재물을 버린 것입니다.
   히 11:26에 보면 모세가 그렇게 좋은 것들을 버린 이유가 나옵니다.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다시 말하면 모세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설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수고한 것들이 다 드러날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의 수고에 상 주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은 점차 더 악해져 갑니다. 전에는 생각도 못했던 범죄들이 지금은 쉽게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전에는 불신자도 부끄러워하던 악하고 음란한 일들을 기독교인들마저도 아무런 부담 없이 행하는 시대입니다.
   말세에는 악한 자들은 계속 악을 행하고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믿음의 편에 있어야지 악한 자들 편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계 22:11을 보면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이 악하고 음란하다고 우리도 악하고 음란한 생활을 하면 안 됩니다. 영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은 세상풍조를 따라가지 않습니다. 세상풍조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장마철에 홍수가 나면 생명이 없는 물체는 물결 따라 떠내려가지만, 생명이 있는 물고기는 물결에 저항하면서 물결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말세가 될 수록 세속주의와 죄악의 물결이 범람하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쾌락과 음란을 따라 살지 말고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4) 하나님의 날이 앞당겨지도록 노력하라.
   본문 12절에 보면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간절히 사모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날이 좀 더 빨리 올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의 날 즉 재림과, 천년왕국과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도록 노력하는 것일까요? 세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① 하나님의 날을 앞당기려면 전도자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빨리 오셨으면 좋겠는데 주님은 너무나 더디 오시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더디 오시는 이유는 무엇일가요? 9절에 보면 답이 나옵니다. 주님은 택하신 자들이 다 회개하고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더디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주님이 빨리 오실 수 있도록 전도자로 살아야 합니다.
   롬 11:25,26을 보면 이방인의 충만한 자의 수가 차면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고 온 이스라엘이 돌아오면 그 때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입니다. 믿는 자의 수가 차야 주님이 오십니다. 그러므로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전도자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전도자의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전도는 능력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씨를 뿌릴 뿐이고 역사는 주님이 하십니다.
   약 50여 년 전에 미국 텍사스에서 석유사업으로 큰 부자가 된 세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들의 이름은 죤 뉴우턴, 루이 웨더포드, 사무엘 프레스톤입니다. 석유산업 호황으로 억만장자가 된 이들은 전세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놀러갔습니다. 그들은 엠배서더 호텔 69층 전체를 예약하고, 첫날 뉴욕 관광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술을 먹고 취한 채로 호텔에 돌아와 보니 일이 생겼습니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것입니다. 프론트 직원은 하룻밤만 2층에서 지내달라고 사정합니다. 그러나 이 세 친구는 술기운에 객기가 생겨 69층까지 걸어 올라가기로 결정합니다. 등산하는 기분으로 걸어올라 가는데, 처음 몇 층은 괜찮았으나 점점 힘들어졌습니다. 마지막 몇 층은 거의 기어 올라가면서 2시간 반 만에 69층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올라와 보니까 프론트에서 방 열쇠를 받지 않은 것입니다. 다시 1층까지 걸어서 내려갈 것을 생각하니 그만 정신이 아찔해지고 고민이 됩니다. 마침 그때 청소하는 흑인 아주머니가 손에 마스터키를 들고, 활짝 웃으면서 객실 문을 열어주며 농담 비슷하게 말합니다. “이곳까� �올라오느라고 많이 고생하셨지만 방 열쇠가 없으면 방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만약 이 마스터키가 없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런데 진짜 마스터키는 예수님이지요.” 방문이 열리고 세 친구는 방으로 들어가서 침대에 누웠습니다. 그런데 존 뉴우턴라는 부자의 머릿속에 ‘예수 그리스도는 마스터키입니다.’라는 흑인 아주머니의 농담이 떠나질 않으면서 어린 시절의 교회생활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존 뉴우턴은 두 친구에게 “예수님은 정말 우리의 마스터키이다”는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두 친구도 그 고백에 동의하고 그날 밤 그들은 눈물로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그 밤에 예수님이 찾아오심으로 그날 이후로 그들은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게 됩니다. 텍사스 제일가는 부자들이 자신의 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평생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기도의 후원자, 재정적 후원자가 됩니다.
   청소부 흑인 아주머니의 가벼운 전도가 그 세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은 것만 아니라 빌리 그래함의 사역에 영향을 미쳤고, 수많은 사람들을 살렸던 것입니다.
   전도는 우리가 하지만 열매는 주님이 맺게 하십니다. 우리가 가볍게 전도를 해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날을 앞당기려면 믿는 우리가 전도자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② 하나님의 날을 앞당기려면 세계선교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언제 재림하실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 되고난 이후입니다. 마 24:14을 보면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처럼 작은 교회를 세계선교에 헌신하게 하시는 것은 재림의 시기를 앞당기시기 위함입니다.
   어떤 비행기가 엔진고장으로 추락하고 있었습니다. 비행기 안에 탄 사람들이 공포와 두려움에 질려서 어쩔 줄 몰라 합니다. 한 사람이 태연스럽게 앉아있는 것을 본 옆 사람이 그 사람의 표정을 살핍니다. “당신 뭐하는 사람이요?”, “나는 목사입니다.”, “그럼 잘 됐습니다. 지금 비행기가 추락하고 있는데 당신이 믿는 하나님께 빨리 기도해서 추락을 모면해 달라고 부탁을 드려보시지요.” 애타게 부탁했습니다. 목사님이 이 사람을 가만히 보더니 “저도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비행기가 떨어지고 안 떨어지고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천국 기획국이나 비서실 소관인데 저는 영업파트에 있기 때문에 도무지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저는 실적만 잘 올리면 됩니다. 당신 예수 믿습니까?”라고 질문하더라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유머 속에 뼈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믿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되는 사람인지 분명히 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타고 있는 비행기가 추락하는 상황에서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 비전교회는 중보기도와 세계선교 그리고 이스라엘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 모두가 헌신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날이 앞당겨질 것입니다.
 
   ③ 하나님의 날을 앞당기려면 이스라엘 선교를 해야 합니다.
   롬 11:25,26을 보면 만물이 주에게로 돌아가기 전에 이방인의 수가 차고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금세기 들어서 이스라엘의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주님의 날이 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믿는 유대인의 수가 2만 명에 불과하지만 롬 11:26 말씀대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는 그날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역사의 종착점에서 이스라엘 구원이라는 마침표를 통해서 세계의 역사를 정리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비전교회가 이스라엘 선교에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시간표가 진행되는데 있어서 우리들이 중요한 사명을 맡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내년에 하게 될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중보기도 사역이 기대가 됩니다. 흥분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격이 되고 또 감사합니다.
   사명의 길은 힘들어도 가야 합니다. 사명의 길을 가면 행복합니다. 인생의 의미는 사명에서 찾는 것입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목숨을 걸만한 사명을 발견하고 하루를 살아도 사명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 다시 오십니다.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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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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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보물창고를 여는 4가지 열쇠

야고보서 1:5-8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어떤 아버지를 만났느냐에 따라서 사는 것이 다릅니다. 가난한 아버지를 만난 자녀는 가난하게 삽니다. 부자 아버지를 만난 자녀는 자기가 가진 것이 없어도 부자로 삽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영적인 고아가 아닙니다. 믿는 사람들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부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하늘의 보물창고를 주셨습니다. 그 창고에는 모든 것이 풍성합니다. 우리는 그 하늘 창고를 열고 그곳에서 필요한 것을 꺼내서 쓰면 됩니다. 다윗은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시 23:1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이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기를 바라시지만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생활 속에는 부족한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이 부족하고, 어떤 사람은 정신적으로 부족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가족관계가 부족하고 또 어떤 사람은 지혜가 부족합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에 부족함이 있고, 어떤 사람은 영적으로 부족합니다.
   참 이상합니다.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이시고 그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부족함이 많은 것일까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보물창고를 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제 아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창고에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 창고는 열쇠가 없이는 아무도 열수 없는 튼튼한 자물쇠로 채워뒀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창고의 열쇠를 제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제 아들이 창고 열쇠를 분실했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 아들을 위한 창고에는 아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열쇠를 분실한 제 아들은 아무것도 쓸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가졌지만 모든 것에 부족한 것입니다.
   고층 아파트에 사는 어떤 사람이 어느 날 너무 피곤한 몸으로 퇴근을 했는데,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서 할 수 없이 22층을 걸어 올라갔습니다. 22층까지 걸어 올라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후유!” 어서 방에 들어가서 샤워하고 따뜻한 음식을 먹은 뒤에 쉬고 싶어 문을 열려고 하니 열쇠가 없었습니다. 그때서야 기억이 났습니다. 혹 손님이 올까봐 아침에 경비실에 열쇠를 맡겼습니다. 그런데 손님이 오지 않았습니다. 밖에 찬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치고 몸은 피곤하지만, 그 문 안에만 들어가면 샤워도 하고 따뜻한 음식도 먹고 따뜻한 방에서 쉴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열쇠가 없으니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보물 창고에는 부족함이 없는 지혜가 있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돈이 있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건강이 있습니다. 엄청난 축복이 쌓여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보물 창고의 열쇠를 분실해서 그 안에 있는 것을 아무것도 쓰지 못하는 불쌍한 성도들이 많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창고에 있는 지혜와 축복을 사용할 수 있도록 열쇠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열쇠를 사용하기만 하면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창고에 있는 풍성한 지혜와 넘치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고를 여는 열쇠 4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자신의 부족을 알아야 합니다(5절).
   5절에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누가 하나님께 구하여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습니까?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것은 은혜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아야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해야 하나님의 풍성한 응답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고 그가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존귀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낮추시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는 기도가 없었습니다. 매달림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도가 처음 나오는 곳이 창4:26입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셋이 에노스를 낳고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하나님을 불렀다는 말은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셋이 왜 에노스를 낳고 기도했을까요? 에노스는 ‘사람’ 이라는 뜻도 있지만 ‘병약한 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셋이 아들을 낳았는데 아들이 약한 것입니다. 아들이 곧 죽을 것 같았습니다. 문제는 아들이 약한데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셋이 그때 비로소 기도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제 아들 모세가 유치원에도 가기 전 일겁니다. 저녁에 감기 기운이 있었는데 자다보니 몸에서 열이 펄펄 나면서 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정없이 우는데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응급실에 쉽게 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돈이 있어야 응급실에라도 가지요. 가진 것이 없으니 어떻게 합니까? 아이는 울다가 경기를 합니다. 눈도 뒤집히고 곧 죽을 것 같은데 제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의 무능함이 원망스러웠습니다. 그 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를 붙잡고 기도하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사태는 시급하고 저는 무능하니 기도가 간절해지더군요. 아이를 붙잡고 간절히 간절히 기도하다보니 아이 몸에서 열이 떨어지고 울음소리도 잦아졌습니다. 제가 그 때 그 사건을 생각하면서 느끼는 것은 내가 부족하니 하나님을 찾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삼손이 힘이 장사일 때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 힘으로 오히려 쾌락에 빠졌습니다. 삼손에 관한 내용이 사사기 13-16장에 나옵니다. 자세히 읽어보면 삼손이 딱 두 번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두 번 다 자기의 무능함을 절감할 때였습니다. 한 번은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고 나니 목이 마르기 시작하는데 물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장사여도 물이 없으면 죽는 것입니다. 삼손이 목말라 죽게 생기니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의 기도를 들으시고 엔학고레라는 샘물이 솟아나게 하셨습니다. 또 한 번은 두 눈이 뽑히고 맷돌을 가는 신세가 되었을 때 조롱거리가 되었을 때 비로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삿 16:28에 보니 이번 한 번만 나를 강하게 하여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삼손이 자기의 부족함을 느낄 때 기도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나의 약함은 하나님의 강함이 나타나는 시작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육체의 가시 때문에 세 번이나 기도하고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에게 나타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제가 40일 금식을 두 번하고 20일도 10일도 금식했던 것은 제게 무슨 영적인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제가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매달린 것입니다. 제가 부족해서 하나님께 매달렸는데 주님은 저에게 넘치는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십시오. 말로만이 아니라 가슴으로 부족함을 인정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보물창고를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풍성함을 알아야 합니다.
   5절에 보니 하나님은 ‘모든 것을 후히 주사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모든 것을 후히 주실 수 있는 풍성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시기만 하면 모든 것을 풍성하게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거지도 하루아침에도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이 없어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재벌도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울산에 사시는 한 여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시장에서 동태 장사를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집을 사랑해서 교회를 짓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할머니가 오시더니 “이것은 내 평생에 모은 동전인데 이 동전을 받고 그 동태 한 짝을 줄 수 있겠소?”라고 하셨습니다. 동전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어머니 같아서 “할머니, 그러지요.”라며 동태 한 상자를 주었습니다. 집에 가서 동전을 헤아리는데 이상한 골동품 같은 것이 있어서 골동품 가게에 가지고 갔더니 그것은 그 당시 600만 원이나 하는 값진 것이었습니다. 거금 600만 원을 받은 집사님은 너무 감사해서 400만 원을 떼어 건축헌금으로 드리고 200만 원을 가지고 ‘하나님,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지요?’라며 기도하는데 환상이 떠올랐습니다. 집사님의 환상 중에 자갈이 반짝반짝 빛나는 자갈밭이 보였습니다. 그때 집사님에게 ‘자갈밭을 사라.’라는 감동이 왔습니다. 이튿날 어떤 아저씨가 와서 “아주머! 니, 땅 하나 사시지요.”라고 하여 따라가 보니 환상 중에 본 그 자갈밭이었습니다. 그래서 200만 원을 주고 그 땅을 샀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두 신사가 와서 그 자갈밭을 천만 원에 팔라고 했습니다. 천만 원에 팔면 팔백만 원이 남으니 당장 팔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집사님은 팔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두 신사가 일억에 팔라고 했습니다. 집사님이 그래도 팔지 않았습니다. 그 땅이 어떤 땅인지 아십니까? 현대 자동차 회사에서 정문으로 내려고 계획한 땅이었습니다. 나중에 집사님이 그 땅을 29억에 팔아서 2억을 헌금하여 그 돈으로 교회를 잘 지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이 27억으로 무엇을 할까요?”라고 기도하다 넓은 땅을 사야겠다는 감동이 와서 넓은 땅을 샀더니 그것이 대 아파트 단지가 되어서 수천억 재벌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에 광야생활을 40년 했습니다. 그들의 광야생활은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신앙적인 원리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①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불기둥구름기둥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②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불기둥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고, 하나님이 세우신 모세를 통해서 인도하셨고, 천사를 통해서 인도하셨습니다. ③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낮에 더위도 밤의 추위도 이스라엘을 넘어뜨릴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변의 어떤 나라도 이스라엘을 쓰러뜨릴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호자이셨기 때문입니다. ④자기 백성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광야는 물도 구할 수 없는 곳입니다. 농사를 지을 수도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셨고, 하늘에서 꿀 썩은 과자 같은 만나를 내려주셔서 양식으로 삼게 하셨습니다.
   민 11장에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니 하늘의 창고를 여시고 메추라기를 보내주셨는데 사방 하룻길에 2규빗이 쌓이게 하셨습니다. 백성들이 나가서 메추라기를 주었는데 적게 거둔 자도 10호멜이었습니다. 1호멜이 227리터이니 1호멜이면 1.5리터 페티병으로 150병 정도 됩니다. 10호멜이면 1.5리터 페티병 1500개이니 얼마나 많은 양입니까? 적게 거둔 자도 10호멜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가 그 당시에 200만-300만명 정도 되었으니 하나님이 얼마나 풍성하신 분입니까?
   저는 제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고 싶어도 제가 가진 것의 한계 때문에 그 한계 이상 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제 주머니 사정을 잘 모릅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풍성하게 주고 싶어 하시는 분인데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모든 것에 풍성하신 분입니다.
   고후 9:8에 보면 하나님은 풍성하신 분이시며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하게 공급하고 싶어 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아는 것이 믿음이고 그 믿음이 하늘의 보물창고를 여는 열쇠입니다.

 

3. 기도해야 합니다(5절).
   5절에 보면 부족함을 느끼는 사람이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은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것은 지혜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금요기도회가 끝난 후 제 차로 최지혜 자매를 집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요즘 직장 생활하는 것을 보니 너무나 힘들어 보입니다. 늘 퇴근시간이 늦더군요. 제 아내가 자매에게 “야근수당 받도록, 월급이 오르도록 기도해라”고 하면서 자기가 직장 문제로 기도했을 때 받았던 응답을 간증했습니다. 제가 소망교회를 개척하고 몇 년 만에 아내가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었습니다. 주의 일에만 전념하려고 직장을 그만두었지만 막상 직장을 그만두고 나니 경제적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교인들은 조금 있었지만 교회에서 제 생활비를 줄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교회를 개척 한 후 3-4년 동안 받은 교회에서 받은 돈이 5만원 이었습니다. 그것도 제가 40일 금식하고 난 후에 보호식을 하기 위해서 받은 돈이었습니다. 제 아내가 직장생활하면서 번 돈은 교회로 다 들어갔고, 최은심 집사님이 저희를 거의 먹여 살렸습니다. 최은심 집사님이 제 아내 눈치를 보고 돈이 필요한 것 같으면 자주 찔러주었습니다. 최집사님이 열심히 도와주었지만 그래도 참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겨울에 구두 밑창 뚫어진 것을 한 달을 신고 다닌 적도 있었습니! 다. 하루는 제 아내가 지나가는 말로 “하나님 회사에 다시 복직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는데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그 말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 날 바로 회사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다시 회사로 돌아와서 일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회사가 외국계 대기업이었는데 그 회사 역사상 처음으로 퇴사자에게 복직 요청을 한 것입니다. 아내는 속으로는 회사의 복직 요청이 기쁘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교회를 개척해서 바빠서 갈 수가 없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회사 윗사람들이 계속 돌아가면서 전화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아내는 회사에 복직이 되었습니다. 회사에서는 아내의 형편을 고려해서 하루에 몇 시간 파트타임으로 일하게 해주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5,6년 전인데 그 당시에는 파격적인 대우로 회사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급료도 시간당 5,200원으로 그 당시에는 엄청난 액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 보너스와 퇴직금을 합한 것 보다 더 풍성하게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제 아내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여러분의 아버지이십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기도에도 풍성하게 응답! 해 주시는 분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이 “기도하라”는 성령의 감동을 받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감동에 순종하셔서 하나님의 기적의 주인공들이 되시고 풍성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기독교는 감동이 중요합니다.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우리들에게 감동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사에 보면 존경할만한 분들이 많습니다. 일제시대에 한국교회의 별과 같은 목사님이 한상동 목사님이십니다. 한상동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1941년 8월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한상동 목사님이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입니다. 심한 고문과 감옥의 나쁜 환경으로 한 목사님은 폐병이 다시 도져 그의 몸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졌고 죽음이 점차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한 목사님은 몸의 고달픔과 괴로움을 느끼며 몸부림치다가 간신히 잠이 들었습니다. 그 때 잠결에 선명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한 목사!”, “예” 한 목사님은 벌떡 일어나 앉았습니다. “기도하라” 성령의 음성이었습니다. 한 목사님은 성령의 음성에 순종했습니다. 가누기 힘든 몸으로 밤늦게 까지 기도했습니다.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3일째 밤에도 기도 후에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맡기고 잤습니다. 한 목사님은 그 날 밤 자다가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보니 파란 잔디밭이 끝없이 펼쳐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잔디밭에 서 있었습니다. 웃옷을 벗은 몸에는 살이 통통하게! 올랐고 팔뚝에 힘이 솟았습니다. 한 목사님은 눈을 뜨고 주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감사합니다. 나에게 건강을 다시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 후 몸에 피로가 없어지고 오후마다 오르던 미열도 없어졌습니다. 기도하라는 성령의 감동에 순종해서 사흘을 기도하다가 목사님의 병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깨끗이 치료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 “기도하라”는 성령의 감동을 받으십시오. 이제 곧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은 전교인이 새벽기도도 하시고, 금식기도도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후히 주시는 하나님은 은혜와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하늘의 보물창고를 여는 열쇠입니다.

 

4. 의심하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6-8절).
   6-8절에 보면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고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물결이 요동하듯이 요동하는 신앙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보물창고를 열수 없습니다.
   어느 사람이 산에 기도하러 갔습니다. 밤새도록 기도합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날이 훤히 밝아오자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되게 안 믿어지네”라고 하더랍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내가 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들으시고 내게 좋은 것을 주신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자기가 구하는 것이 자기에게 실상으로 나타날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의 특징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믿음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구하는 것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것을 상상하며 기대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자녀 교육에 관한 책을 쓰신 류태영 박사님을 아실 것입니다. 그분의 간 증 중에 <바라봄의 법칙>이라는 간증이 있습니다. 류교수님은 정말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초등학교 5학년 때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예수님을 믿으면서 산골 마을의 교회에서 새벽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시골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는 서울에서 다녔는데, 서울에서의 고등학교 시절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된 생활이었습니다. 구두 닦기를 하면서 공부를 하며 매일 새벽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유학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유학이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좋은 것 같아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서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바로 바라봄의 법칙입니다. 류태영 학생은 빌 4:13의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을 확신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한지 10년이 지나면서 어느 나라에 가서 공부할 것인지가 문제였습니다. 그가 기도한 후에 내린 결론은 ‘가난한 농촌을 잘 살게 하는 길이 무엇인지 배우자. 그러기 � ㎸漫��선진 농업국가인 덴마크로 가자’였습니다. 그는 열심히 기도하면서 한국의 농촌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농촌의 현실과 함께 그의 사상을 피력한 글과 덴마크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는 편지를 영어로 완성했습니다. 그러나 그 편지를 누구에게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지가 문제였습니다. “하나님, 나는 배경도 없고 돈도 없습니다. 유일한 배경은 하나님이시며 지도교수는 바로 주님이시오니 길을 가르쳐주십시오.” 그는 고민을 하다가 ‘가장 높은 사람에게 보내라’는 마음의 확신이 들었습니다. 덴마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누구인지도 몰랐던 그는 도서관에 가서 자료를 확인한 결과 프레데릭 황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편지봉투에 적었습니다. [프레데릭 9세 국왕. 코펜하겐. 덴마크] 그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면 반드시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위해 13년 동안이나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왔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에 불가능이 없다.”라고 믿고 그 편지를 우체국에 가서 붙였습니다. 편지를 보내고 기도한지 40일이 지난 어느 날 편지 한 통 날아� 督윱求� 그것은 바로 덴마크의 국왕 보좌관으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할� 섭獰� 또 며칠 후에는 덴마크의 외무성으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왕복 비행기표까지 동봉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시골뜨기 소년에게 해외 유학의 길을 열어 주신 하나님. 당신의 크신 사랑이 넘치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덴마크의 국왕이 구두 닦기 청년을 초청한 것입니다. 그 이후에 덴마크에서 유학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바라봄의 법칙을 이용해서 이스라엘에 가서 공부한 후에 건국대 교수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만, 13년 동안 믿음으로 바라보고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시고 그가 바라본 대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 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믿음대로, 우리의 보는 대로 축복하십니다. 우리의 꿈꾸는 대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두 번째, 믿음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자기가 바라보고 기도하는 것을 입으로 시인합니다. 믿음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대로 해주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긍정의 힘]으로 유명한 미국 조엘 오스틴 목사님의 어머니는 1981년, 몇 주 밖에 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피골이 상접하고 얼굴이 노랗게 되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지만 큰 소리로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집에 돌아와 젊고 행복했던 시절의 사진을 방안에도, 화장실에도, 부엌에도, 거실에 붙여놓고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자기는 건강하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고백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입으로 시인합니다. 하나님은 그가 고백한 대로 병을 씻은 듯이 치유해 주시고 건강한 몸을 주셨습니다.
   옛날 [까르멜 수도원]의 원장은 ‘맨발의 수도사'로도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린이들을 가르칠 때 늘 모자를 벗어서 머리를 숙이고 어린이에게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해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하는 말이 “지금은 어린아이들이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면 이곳에서도 국무총리도 생기고 장군도 생기고 학자도 생겨나고 위대한 실업가도 생겨날 것이니 존경해 마지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믿음의 고백을 한 것입니다. 자기 믿음을 입으로 시인한 것입니다. 과연 까르멜 수도원의 원장이 가르친 제자 중에 세계의 영적 기운을 바꿔 놓은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가 태어났습니다. 맨발의 수도사의 믿음의 고백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고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상상하며 입으로 고백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보물창고의 열쇠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곧 여러분이 바라보는 것, 여러분이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실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물창고는 항상 풍성합니다. 그런데 그 보물창고는 열쇠가 있어야만 열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보물창고를 여는 열쇠를 사용하십시오.
   제 1열쇠 자신의 부족을 아는 것입니다. 제 2열쇠는 하나님의 풍성함을 아는 것입니다. 제3열쇠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제4열쇠는 의심하지 않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생각하시고 입으로 선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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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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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설교] 낙타 무릎 ( Dawn Prayer Meeting Sermon)

낙타 무릎

야고보서 1:5-8 
 

본서를 기록한 사람은 야고보 장로입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으로 뒤늦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습니다. 야고보의 별명이 하나 있었습니다. ‘낙타 무릎’입니다. 얼마나 기도를 오랫동안 했던지 무릎에 굳은살이 배겨서 낙타무릎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에 생긴 별명입니다.
   야고보서의 핵심 주제는 ‘행함 있는 믿음’입니다. 그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낙타 무릎’이라는 별명을 가진 장로답게 기도에 관한 교훈도 잊지 않았습니다.
   기도의 중요성은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 또 강조해도 부족한 것입니다. 그만큼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 중요한 것입니다.
   찰스 하지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기도의 중요성을 맥박에 비유하여 강조했습니다. “기도를 하지 않는 크리스천이나 맥박이 뛰지 않는 사람은 그 존재가 모두 불가능하다” 맥박이 뛰지 않는 사람을 육체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듯이 기도생활을 하지 않는 크리스천은 영적으로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또는 그 사람의 건강이 어떤지 알려고 할 때 먼저 맥박을 잽니다. 마찬가지로 크리스천이 영적으로 살았는지 죽었는지 또는 건강한지 병들었는지를 알아보려면 그의 기도의 맥박이 어떻게 뛰고 있는지 살펴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야고보 장로를 통해서 주시는 기도에 관한 교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설교를 들으시고 기도의 맥박이 멈춘 분들은 기도생활을 시작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의 맥박이 뛰기는 뛰데 병든 사람의 맥박처럼 힘이 없는 사람들은 기도의 불을 받으시고 열정적인 기도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들
   마 16장에 보면 주님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천국열쇠를 주셨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천국열쇠를 받은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천국열쇠를 사용하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은 천국 열쇠를 사용하는 시간입니다.
   5:17,18을 보면 엘리야는 기도로 하늘의 문을 닫기도 했고 열기도 했습니다. 그는 천국열쇠를 사용한 것입니다. 엘리야가 비가 오지 않기를 기도하니 하늘이 닫히고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가 다시 비가 오기를 기도하니 닫힌 하늘의 문이 열리고 하늘이 비를 주었습니다.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기도에도 응답해 주십니다. 엘리야가 기도로 하늘의 문을 여닫았던 것처럼 우리가 기도해도 동일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럼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여시고 주시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1) 기도하는 사람에게 지혜를 주십니다(1:5)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고구마 줄기를 뽑으면 고구마가 줄줄이 올라오는 것처럼 지혜를 얻으면 그 지혜로 인하여 따라오는 것들이 있습니다.
   잠 3:13-18에 보면 지혜를 얻은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지혜의 오른손에는 장수가 있고 왼손에는 부귀가 있습니다. 지혜의 길은 즐거운 길이고 평강한 길입니다.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지혜가 돈이고, 정보가 돈이고, 기도가 돈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돈을 많이 벌수 있습니다. 앞선 정보력이 수입을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돈이 붙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 중에 가장 성공적인 인생을 산 사람은 다윗입니다. 그런데 성경 [사무엘상]에만 “다윗이 지혜롭게 행했다”는 말이 5번이나 나옵니다. 그는 지혜로웠기에 훌륭한 목동이 될 수 있었고, 훌륭한 장군이 될 수 있었고, 훌륭한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 지혜를 얻는 방법이 기도입니다. 1:5을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로 지혜를 얻은 대표적인 사람이 다윗의 아들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아버지를 잘 만나서 왕이 됩니다. 그러나 명장이요 지혜로운 아버지가 다스리던 나라를 젊은 사람이 다스리려니 두렵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기브온 산당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그가 드린 일천번제를 받으시고 그가 구한 것에 응답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꿈속에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십니다. “솔로몬아, 네가 무엇을 구하느냐?”,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 종에게 은혜를 주시사 왕이 되게 하셨는데, 제가 어떻게 이 일을 감당 하겠습니까? 하나님, 저에게 이 일을 감당할 지혜를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기도를 기뻐하셨습니다. “솔로몬, 네가 재물이나 존영이나 원수 멸하는 것이나 장수를 원치 않고, 내가 네게 맡긴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지혜를 구하니 참 귀한 것을 구했구나. 내가 네가 구한 지혜와 지식을 주겠다. 뿐만 아니라 네가 구하지 않은 재물과 존영과 장수도 다 네게 주리라.”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의 지혜가 하늘로부터 솔로몬에게 임했습니다. 그러니 왕의 자리가 부담되지 않고 쉬었습니다. 티끌같이 많은 백성이 적게 보입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라도 척척 해결하고 재판하니, 모든 백성이 깜짝깜짝 놀라며 왕에게 복종합니다. 그러니까 왕권이 견고해지고 나라가 발전합니다.
   역대하 9장을 보면 솔로몬이 마시는 그릇은 다 금이고, 레바논 백향목 궁에서 쓰는 그릇도 다 정금이었습니다. 나라에 금이 돌같이 흔합니다. 또 천하 열왕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듣고 솔로몬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갖가지 귀한 보석을 가지고 찾아옵니다. 솔로몬의 집과 나라는 안에서도 잘 되고 밖에서도 갖다 주니 잘 되었습니다.
   이런 복이 여러분 집에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여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받으시고 고구마 줄기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 하나 때문에 복이 넘치게 따라오길 바랍니다.
 

   2) 기도하는 사람에게 고난을 극복하는 힘을 주십니다(5:13)
   5:13에 보면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복도 넘치도록 받지만 고난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걸 모르기 때문에 고난이 찾아오면 신앙이 흔들리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고후 12:12에 보면 사도의 표 네 가지가 나옵니다.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그 네 가지 표 중에 첫 번째가 ‘모든 참음’입니다.
   골 1:11에 보면 성령이 역사하시면 능력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은혜도 주십니다.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십니다. 견디는 은혜를 주시는 것은 신앙생활에는 어려움도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 중에서 건져주시든지 아니면 고난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미국에 아주 유명했던 가수 중에 케이트 스미스라는 분이 있습니다. 케이트 스미스는 ‘God Bless America’(하나님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라는 노래로 유명한 가수입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믿음으로 살았던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녀가 믿음을 갖게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케이트 스미스는 어느 날 두 친구와 같이 노를 젓는 보트를 타고 놀고 있었습니다. 너무 놀이에 열중 하고 보니 배가 썰물에 밀려 나간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날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해서 노를 저어 보았지만 썰물이 너무 세차게 밀려 나가기 때문에 이 강한 조수를 거슬려 해변으로 도저히 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해변에서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그들은 사람 살려 달라고 소리 쳤지만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케이트 스미스는 두려워 떠는 가운데 두 세 사람이 모여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내용의 성경구절이 생각이 났습니다. 스미스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들아, 무서워할 것 없어. 성경에 두세 사람이 모여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고 하셨어. 우리 여기 세 사람이 있지 않니? 우리 셋이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 주실 것을 나는 믿어. 우리 함께 기도하자” 세 찬구는 머리를 배 밑창에 조아리고 기도하기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살려 주세요. 하나님, 우리는 죽게 되었어요. 어떻게 하면 좋아요. 우리를 살려 주세요. 우리를 도와주세요.” 이 세 친구가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보니 저 멀리서 불빛 하나가 점점 가까이 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배로 인해서 조난당했던 이 세 친구가 안전하게 해변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케이트 스미스는 기도의 응답으로 곤란 중에서 건짐을 받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혹 예기치 못한 고난을 당하면 케이트 스미스처럼 기도하시고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고난에서 건져주시지는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고난당함을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때 우리가 기도하면 고난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복싱경기에서 승리하려면 잘 때리기도 해야 하지만 잘 맞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펀치가 아무리 강해도 맷집이 약하면 지는 것입니다. 상대를 아무리 많이 때려도 상대의 주먹 한 방에 쓰러지면 지는 것입니다. 제가 군대생활을 할 때 복싱 시합이 있었습니다. 제가 키는 작아도 5명을 K.O로 눕히고 결승에 올라갔습니다. 보통 한 게임에서 3,4번씩 상대를 다운시키며 승승장구했습니다. 저는 결승에서도 상대를 눕히고 반드시 우승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결승전 1라운드가 시작되자마자 상대에게 한 방 맞았습니다. 저는 잠간 눈을 감았다가 떴는데 눈을 떠보니 제가 바닥에 누워있고 경기가 끝나고 말았습니다. 제가 상대의 주먹 한방을 견디지 못하고 K.O된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고난을 견디지 못하면 승리할 수 없습니다. 조금 어렵고 문제가 있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작은 시험에도 교회를 옮기고, 작은 고난도 견디지 못하면 그런 사람은 신수성가 하지 못합니다.
   만세운동을 하다가 잡혀 일제의 고문에 방광 파열로 19살의 꽃다운 나이에 옥사한 유관순 열사는 모진 고문에도 신앙을 지켰고 나라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유관순 열사가 그 어린 나이에 모진 고문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공급 받았기 때문입니다. 유관순은 순국하기 직전에 다음과 같은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주의 음성을 들은 이 몸, 나를 버리고 십자가 등에 지고 주를 따라가리라! 주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나의 자취, 어느 지경까지든지 주의 뒤를 따라가리라!” 유관순은 기도로 고난을 이긴 것입니다.
   타스커라는 사람은 “기도는 인간의 문제를 해결한다. 그렇지 못할 때에라도 기도는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켜 그 문제를 대처할 수 있게 해 준다”라고 했습니다.
   길에서 놀던 아이가 넘어져 무릎에서 피가 납니다. 이 아이가 먼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울면서 약을 찾습니까? 의사를 찾습니까? 병원을 찾습니까? 아닙니다. 엄마를 찾습니다. “엄마! 엄마!” 왜 엄마를 찾을 까요? 엄마가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약을 발라 주든지 병원으로 데려가든지 문제를 해결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당했을 때 울면서 엄마를 찾는 어린아이처럼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3) 기도하는 사람에게 치유의 은혜를 주십니다(5:14,15)
   주님은 치유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이 땅에 계실 때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지금도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며 성령의 능력으로 치유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채찍에 맞으셨는데, 그 이유를 사 53:5에서는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들의 건강을 위하여 채찍에 맞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치유의 은혜를 누리는 비결이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5:14,15에 보면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주시지만 우리가 치유의 은혜를 누리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짐승들은 상처가 생기면 그 상처를 햇빛에 노출시킨다고 합니다. 상처가 햇빛을 쪼이면 신기하게도 치료의 속도가 더 빠르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상처 난 짐승들이 햇빛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치유의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치유의 광선이 우리를 건강하게 치유해 줄 것입니다.
   여러분, 차범근 축구 감독 잘 아시죠. 그분에게 유명한 간증이 있습니다. 선수 시절에 그에게 누가 전도했는데 처음에는 시큰둥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봤어요? 보여주면 믿을께요!” 그러자 전도한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공기 보여요? 공기 보여주면 나도 하나님을 보여주지. 공기가 눈에 안 보여도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나중에 느낄 때가 있을 겁니다.” 그러던 중 무릎 부상으로 앓게 되었습니다. 선수 생활을 접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고민 끝에 당시 유명한 한얼산기도원 이천석 목사님을 찾아가 안수기도를 받았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 후 신앙생활 하면서 선수 생활도 잘 하고 지금까지 하나님을 증거 하면서 축구감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약을 쓰고 수술을 하는 것은 사람이 하지만 치료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아도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양천구 신월동에 가면 서안복음병원이라는 병원이 있습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에 신월동에 있는 교회에서 봉사했는데 그 교회 담임목사님 사모님이 그 병원 간호사였기 때문에 가끔 그 병원에 간적이 있습니다. 그 병원 간판에는 [우리는 봉사! 하나님은 치료!]라고 적혀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치유의 은혜를 주십니다.
 

   4) 기도하는 사람에게 땅에 열매를 주십니다(5:18)
   5:18을 보면 엘리야가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열매를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에 열매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열매가 없다면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한 것입니다.
   금년에 교회 텃밭에 고구마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땅이 좋지 않고 거름공급이 잘 되지 않아서 열매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도 고구마 줄기로 반찬을 만들어 먹었기에 그나마 다행입니다.
   고구마 농사는 우리의 주임무가 아닙니다. 과외로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의 가정생활, 작장생활이 고구마 농사처럼 열매가 없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가정생활에 열매를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회생활에 열매를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시대에는 일부다처제였습니다. 한나의 남편 엘가나에게는 또 다른 아내 브닌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브닌나는 자녀가 있는데 한나는 자녀를 낳지 못했습니다. 브닌나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한나를 격동시켰고 그 일로 한나의 마음은 슬펐습니다. 엘가나가 브닌나 보다 한나를 더욱 사랑했지만 한나의 마음의 슬픔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한나는 성전에 올라가 기도합니다. 눈물로 기도합니다. 그녀는 결사적으로 매달려서 기도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한나에게 열매로 사무엘과 또 다른 세 아들과 두 딸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나처럼 자식의 문제는 아니지만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에 열매를 원하시면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열매를 주시는 분입니다.
 

2.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야고보서에는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다양하게 말씀하고 있지만 오늘 저는 세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1) 믿음의 기도(1:6-8; 5:15)
   1:6-8을 보면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의심의 기도를 하면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해야 응답해주십니다.
   히 11:6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는 두 가지 믿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 즉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이 말은 자기가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실 것을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느 사람이 산에 기도하러 갔습니다. 밤새도록 기도합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날이 훤히 밝아오자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되게 안 믿어지네...”라고 하더랍니다. 이런 기도는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믿음의 기도를 하는 사람은 응답을 마음으로 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음으로 응답을 바라봅니다. 믿음의 사람의 마음에는 응답의 그림이 선명하게 있는 것입니다. 현실에는 없지만 그 사람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봅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5만 번 응답 받은 조지 뮬러는 고아원을 운영하면서 기도로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수 없이 많이 경험했습니다. 하루는 먹을 것이 떨어졌습니다. 고아원의 원생들은 엄청나게 많은데 먹을 게 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조지 뮬러는 식사시간이 되니 아이들은 식당에 모읍니다. 그리고 빈접시를 놓고 기도합니다. “주님, 오들도 좋은 아침을 저희들에게 허락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식탁에 빵이 없지만 그의 마음에는 이미 풍성한 빵이 그려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기도를 마치자마자 빵빵 소리가 나면서 시끄럽더랍니다. 나가서 봤더니 빵공장 빵을 실어왔다는 겁니다. 빵공장에 불이 났는데 불은 잡았지만 만들어진 빵을 팔수가 없어서 조지 뮬러의 고아원에 주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어도 믿음으로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지금 현실은 어렵고 힘들어도 믿음의 눈으로 승리를 바라보고, 성공을 바라보고, 건강을 바라보고, 풍성함을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럼 믿음의 기도를 원하십니다.
 

   2) 정욕적이지 않은 순수한 기도(4:2,3)
   4:2,3입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정욕이란 무엇입니까? 다음 절에 보니 ‘세상과 벗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요한1서 2:15-16에서는 세상의 개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입니다.
   존 웨슬리는 육신의 정욕을 ‘재물욕’이고, 안목의 정욕을 ‘성욕’이고, 이생의 자랑을 ‘명예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저는 정욕이란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자기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시는데 나는 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정욕입니다.
   요일 5:14-15에서 기도응답을 받는 원칙을 다음과 같이 표현 했습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기도응답의 비결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주님이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시며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아드리셨습니다. 눅 22:42입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무디는 어떻게 기도하면 좋은가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쳐줍니다.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탄원서를 펼쳐놓고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제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주세요.’ 하나님의 학교에서 배운 가장 귀한 교훈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선택하시도록 맡기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주인과 종의 위치는 분명한 것입니다. 종은 언제나 자기의 뜻이 아닌 주인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도 내 뜻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주종이 바뀐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내 원대로 마시고 하나님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해야 할 성도들이 “하나님의 원대로 마옵시고 내 원대로 해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는 정욕적이지 않은 순수한 기도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어떤 아이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한국의 수도가 서울이 아니라 부산이 되게 해주세요. 제가 오늘 시험 볼 때 한국의 수도는 부산이라고 썼거든요.” 얼마나 귀여운 기도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아이의 기도를 들어주실리 만무합니다.
   기도 응답을 받으려면 자신의 기도를 점검하십시오. 그리고 자기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과 배치된다면 기도를 바꾸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드린다면 그 기도는 반드시 응답될 것입니다.
 

   3) 중보의 기도(5:16)
   5:16에서는 서로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한 기도를 뛰어넘어서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를 드리십시오. 우리는 뜻은 정확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교회가 받은 사명이 많지만 그 중에 대표적인 두 가지가 사명은 중보기도와 선교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중보기도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중보기도의 응답으로 성인오락실 ‘바다이야기’가 사라졌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열리기로 했던 동성애축제가 무산되기도 했습니다. 필리핀 아브라 지역의 30년 된 정권이 바뀌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는데 생각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우리교회가 통합 하여 첫 주일 예배가 끝난 후 점심시간에 어린이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옆 교회 집사님이 자동차를 후진하는데 차 뒤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보지 못했습니다. 아이는 자동차 밑으로 들어갔고 운전자는 차에 뭐가 걸린 것으로 생각했는지 자동차를 앞뒤로 왔다갔다 했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청년은 너무나 놀라서 주저앉아서 울었습니다. 그 청년은 아이가 병원으로 간 후에도 진정을 하지 못하고 한 동안 울었습니다. 그 청년의 이야기로는 차 밑에 깔린 아이의 허리가 뒤로 완전히 젖혀졌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제 마음에는 ‘그 아이가 장애자가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회가 통합하고 첫 번째 주일에 그런 일이 일어났으니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쓰러진 아이를 김기승 집사님이 자동차에 태우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저는 걱정이 많았지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알았던 여러분들도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신기하게도 병원에 실려 간 아이가 어느 한 곳도 이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장애자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단 하루도 병원에 입원하지 않고 건강한 몸으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그 아이를 위하여 기도한 저희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중보기도를 원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아말렉과 전쟁을 했습니다. 여호수아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나가서 아말렉과 싸웠는데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 전쟁에서 가르쳐주는 가장 강력한 교훈은 기도의 힘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전쟁터로 가지 않고 산위로 올라가서 기도했습니다. 그 시간 참으로 신기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모세의 기도의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모세의 기도의 손이 내려오면 아말렉이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아론과 훌의 도움으로 두 손을 계속해서 들고 기도하여 결국 이스라엘이 대승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들에게 기도는 사역을 위한 준비 정도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사역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가장 핵심적인 사역은 기도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기도의 손을 내리는 순간 여러분의 가정, 여러분의 자녀, 여러분의 사업은 아말렉에게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기도의 손을 드는 순간 여러분의 자녀들이 새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의 손을 드는 순간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의 사업은 아말렉을 물리치며 승리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기도하기로 결단하십시오. 기도의 손을 들겠다고 마음을 먹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시간을 기도를 위하여 떼어두십시오. 육체를 쳐서 복종시키시고 기도의 자리로 나오십시오.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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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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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설교] 참된 지혜  ( Dawn Prayer Meeting Sermon)

참된 지혜

야고보서 3:13~18

 

본문에서는 두 가지 지혜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첫째, 14-16절에 보면 “땅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라고 말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개역 성경에서는 세상적, 정욕적, 마귀적 지혜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혜는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지혜입니다.
   사람들이 착하지 않은데 지혜만 있으면 교묘하게 악을 행합니다. 우리나라 보험사와 경찰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한해 6,000억 원의 보험금을 사기꾼들이 타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뻔히 알면서도 단서가 없어서 못 잡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가장 많이 적발된 것은 자동차 보험입니다. 사기 유형으로는 피해액 부풀리기, 진료비 과잉청구, 고의적인 사고 유발 등이 있다고 합니다. 6,000억의 보험금이 빠져나간다면 그만큼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지혜가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인 지혜입니다.
   둘째, 13,17,18절에 보면 위로부터 난 지혜가 있습니다. 이 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입니다. 17,18절에 보면 이 지혜는 사람을 성결하게, 화평하게, 관용하고 양순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가진 사람은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고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모든 행복과 축복과 능력의 참된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여자 성도가 남편이 겉으로는 멀쩡한데 자꾸 아프다고 해서 강남의 유명한 S병원에 찾아갔습니다. 진단 결과 목에 이상이 있다고 빨리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해서 목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 상태가 더 심해졌습니다. 병원에 가서 얘기했더니 수술이 잘 되었다고 했습니다. 할 수 없이 경희의료원에 가서 물리치료를 받고 또 검사를 했습니다. 검사 결과 뇌에 콩알만한 종양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서울대학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를 해보니 역시 뇌종양이라고 했습니다. 수술을 해야 하는데 수술을 해도 10% 밖에는 가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하나님 앞에 3일 금식기도를 드렸습니다. 10% 밖에 가망이 없어도 수술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기도 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설교 중에 예레미야 33장 3절의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붙잡고 기도를 하는데 응답으로 그 병에 대해 알아보라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책을 사서 조사해 보았더니 뇌종양의 종류만 30가지가 넘었습니다. 열심히 읽어보고 남편의 종양의 종류를 찾아봤더니 충으로 된 종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충으로 된 종양은 약으로도 고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의사한테 찾아가 약으로도 고칠 수 있다고 했더니 의사가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책을 보여주고, 약을 구해달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결국 수술을 받지 않고 약을 복용해서 종양을 깨끗하게 치료받았습니다. 이 여집사님은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지혜를 얻어서 남편을 살린 것입니다.
   왕상 3장에 보면 솔로몬은 젊은 나이에 왕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정치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인 지혜가 가득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솔로몬이 젊은 나이에 왕이 되어서 그런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니 걱정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느낀 솔로몬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 기브온 산당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꿈에 나타났습니다. 솔로몬은 꿈에 나타나신 하나님에게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라며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후 솔로몬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부터 난 지혜가 발휘 되어서 나라를 잘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부귀와 영광 장수보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십시오.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지혜가 있으면 모든 것을 다 얻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지 않고 세상 지혜로 욕심과 탐욕에 빠져 있습니다. 골 1:9 말씀에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주시기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위로부터 온 지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위로부터 온 지혜는 무엇을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행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선한 일이 무엇인지 알고 그렇게 살려고 결심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선생님들에게 새해에는 어떻게 살 것인지 자신의 결심들을 한 가지씩 적어오라고 했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선생님들이 제출한 새해의 결심들을 보시고 몇 가지만 골라서 선생님들에게 읽어주었습니다. 그러자 한 선생님이 손을 들더니 “왜 내 것은 읽지 않고 빠뜨리는 것입니까?”라고 고함을 지르며 화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대답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챙기지 못해서 그런 것이니 잠깐 기다려 보십시오” 그러면서 그 선생님이 쓴 것을 찾아 읽어주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러한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금년 한 해 절대로 사소한 일에 화를 내지 않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행해야 합니다. 13절에 보면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라고 말합니까?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이는 자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가진 지혜와 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저는 오늘 본문에서 위로부터 온 하나님의 지혜의 증거를 세 가지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1.선행이 참된 지혜를 가진 증거입니다(13절).
   선행이란 착한 행실을 말합니다. 부디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가 교회와 가정과 사회생활에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선행을 두 가지로 나눠서 생각해 봅시다.
   첫째,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인 선행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보여주신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신앙적인 선행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많은 돈을 벌고 큰 명예와 강력한 권세를 가지는 것보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적인 선행이라는 것은 먼저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그 다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신자의 인생의 목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미국에 4살 난 어떤 어린이가 상속을 받아 백만장자가 된 일이 있습니다. 신문기자가 “그 많은 돈을 가지고 무엇을 하겠느냐?”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 어린이는 어린이다운 대답을 했습니다. “사탕을 사 먹겠습니다” 만약 그 아이가 나이를 먹어도 4살의 정신연령을 가지고 물려받은 유산으로 평생 사탕이나 사먹고 산다면 유산을 물려준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십자가의 사랑으로 자신을 구원해 주시고 보혜사 성령을 통해서 후원해 주시는데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혀서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마음이 답답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하고 싶은 일들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기뻐하고 좋은 일인지, 아니면 고작 사탕이나 사 먹고 싶어 하는 백만장자 아이와 같은 생각인지 한번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둘째, 이웃을 향한 사회적인 선행이 있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 외로운 가정을 돌보는 일, 고아들을 돕는 일, 무지한 자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일, 환자들을 찾아 위문하고 기도해 주는 일, 타락한 자들을 찾아 재 결심시키고, 낙심한 자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권면하는 것들이 사회적인 선입니다.
   우리가 사회적인 선행을 실천해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본능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넣어주셨습니다. 그래서 17절에 위로부터 난 지혜 가운데 긍휼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회적인 선행을 실천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빛을 세상에 반사하는 반사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주님을 보여줘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통해서 주님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선행과 온유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아프리카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 한 기독교인 영국귀족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그 나라의 소년 한 명을 하우스보이로 채용했습니다. 소년은 조용한 가운데 자기의 맡은 일에 충실했습니다. 그래서 영국인 귀족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이 뜻밖에도 영국인 귀족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제가 이 집에서 일한 지 꼭 석 달째 되는 날입니다. 제 마음 속에 뜻한 바가 있어서 이제는 이 집을 떠나야 될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저를 잘 돌보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영국인 귀족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제 막 정이 들려고 하는데 그만 두고 떠난다고 하니까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년을 이렇게 달래었습니다. “얘야, 월급이 적다면 내가 좀 더 올려줄테니 떠나지 말고 여기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안되겠느냐?” 그러자 소년은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돈 때문에 이 집을 떠나려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제가 이 집에 오기 전에 한 가지 결정 못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기독교를 믿어야 할 지 회교를 믿어야 할 지 망설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작정했습니다. 기독교를 믿는 집에 가서 한 3개월 일해 보고, 그 다음 회교를 믿는 집에 가서 또 3개월 일해 보고 난 뒤에 제가 믿을 종교를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3개월 동안 기독교를 믿는 집에서 일했으니까, 이제는 회교를 믿는 집에 가서 일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안녕히 계십시오.” 당찬 소년의 말에 영국인 주인은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만약 그 영국귀족이 믿음으로 잘 살았다면 그 아이가 기독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그 영국귀족이 믿음과 삶이 달랐다면 그 아이는 회교도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세상에 보여주는 귀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도 하고 주님의 영광의 광채를 가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회적인 선행을 실천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은 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 장애의 몸으로 시설을 운영하는 집사님 부부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그분들에게 큰 힘이 되어 드리지 못해서 늘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저는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돕는 자들을 붙여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그분들의 선행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집사님 부부를 바라보고 계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교회가 금년에 새로운 땅을 매입하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복을 받았으니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무료백내장 수술을 하려고 진행 중입니다. 사실 빚도 많은데 그런 일을 하려고 마음을 먹는 것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교회에도 사회적인 선행을 요구하시기에 그 일을 추진 중에 있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선행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전도입니다. 행 10:38에 보면 주님께서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받으시고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주님이 하신 선한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복음을 전파하신 일입니다. 전도가 선한 일이었습니다.
   인간은 몸만 가진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혼이 죽어서 영원한 지옥에 떨어진다면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았던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도와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교회의 심장소리입니다. 전도가 중단된 교회는 심장이 멈춘 교회입니다. 전도가 약해진 교회는 심장이 정상적으로 박동하지 못하는 교회입니다. 이번 해피데이 전도에 모든 성도들이 헌신합시다. 불신자를 예비신자로 작정하고 예비신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만나서 섬기고 영향주고 교회로 모시고 옵시다. 그것만한 선행도 없는 것입니다.

2.온유함이 참된 지혜를 가진 증거입니다(13절).
   참된 지혜의 특징은 단순히 선행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온유함이 나타나야 합니다. 아무리 참되고 선한 행위라도 그것을 실천하는 방법이 강제나 폭력이 되면 안 되고 온유함으로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온유함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첫째, 온유함은 따뜻함입니다.
   동화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어느 몹시 추운 날 밤중에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눈이 나뭇가지 위에 수북하게 쌓였습니다. 날씨가 추우니까 나뭇가지 위에 쌓인 눈이 얼어붙었습니다. 나뭇가지는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축 쳐져 있었습니다. 바람이 그 옆을 지나갔습니다. 나무를 보니까 불쌍했습니다. 그래서 바람은 나무를 불쌍히 여기고, 나뭇가지 위에 쌓인 눈을 털어 주려고 바람을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얼어붙은 눈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람은 더 세차게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급기야 바람을 이기지 못한 나뭇가지들이 “뚝!” 소리를 내면서 부러졌습니다. 그러니까 바람은 나무를 도우려다가 오히려 나무에게 상처를 입히고 만 것입니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해님이 떠올랐습니다. 기진맥진한 바람은 해님에게 하소연했습니다. “해님아, 내가 저 나무들이 불쌍해서 도와주려고 하다가 그만 나뭇가지만 부러뜨리고 말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니?” 해님은 빙긋이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걱정하지마. 내가 도와줄게.” 그러면서 해님은 하늘 높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리고 따스하게 동산을 비추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얼어붙었던 눈들이 녹으면서 물방울이 되어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해님은 바람에게 말했습니다. “바람아, 이제는 네가 나설 차례야. 내가 너를 따뜻하게 비추어 줄 테니까 너는 그저 내 열을 받아서 동산 안을 조용히 지나다니기만 하면 돼. 그러면 쌓인 눈들이 다 녹게 될거야!” 그 말을 듣고 바람은 용기를 얻었습니다. 해님은 따스하게 바람을 비추어 주었습니다. 훈훈해진 바람이 동산 안을 조용히 다니니까, 해님의 말대로 과연 얼어붙었던 모든 눈들이 녹아 내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동산은 본래의 제 모습을 찾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따듯한 눈빛, 따뜻한 말 한 마디가 상처 입은 사람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참된 지혜를 가진 사람은 따듯함으로 사람을 대합니다. 그 따듯함에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삶의 현장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따듯하게 말하는 훈련을 하도록 하십시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있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그런 여인은 돌로 쳐서 죽여야 합니다.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이 이 여인을 예수님 앞에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주님에게 “율법에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돌로 치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주님은 땅 바닥에 글을 쓰신 후에 사람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간음하던 여인을 돌로 치려고 손에 손에 돌을 들고 있던 사람들이 돌을 버리고 돌아갔습니다. 그 때 주님은 그 여인을 향해서 따듯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그 여인은 주님의 따듯한 사랑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후 오직 주님만을 위하여 살게 됩니다. 온유함은 따듯함입니다.
   둘째, 온유함은 부드러움입니다.
   유명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일화가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남아프리카연방의 통합을 위해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아프리카 부족의 추장들 여럿을 초대하여 왕실에서 만찬을 베풀었습니다. 만찬을 베풀기 전, 아프리카 추장들에게 식사법에 대한 교육을 했지만 막상 만찬이 시작되자 눈치를 살피던 추장들이 포크와 나이프를 제쳐놓고 손으로 먹기 시작했습니다. 각료들과 신하들이 긴장한 가운데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여왕이 자신도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손으로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눈치만 보던 분위기가 아주 좋아졌습니다. 모두들 기분 좋게 식사를 마쳤고 회의도 아주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추장들은 여왕이 하는 일은 모두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여왕이 인상을 쓰며 추장들을 나무랐으면 회의가 실패했겠지만, 추장들에게 맞춰줌으로 회의를 성공시킨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부드러움이 추장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든 것입니다.
   잠 25:15에 보면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부드러우면 강한 자에게 질 것 같지만 부드러운 혀가 뼈를 꺾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와이셔츠가 있습니다. 하늘색 와이셔츠인데 굉장히 좋아합니다. 색깔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이 너무나 부드럽습니다. 이제는 낡아서 버려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요즘은 그 옷을 입다보면 올이 빠져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면 가위로 올을 잘라버리고도 입습니다. 부드러우니까 버려야 하는데도 자꾸만 입게 됩니다. 제가 좋아하지 않았던 와이셔츠가 있었습니다. 유명 메이커 옷입니다. 그런데 그 와이셔츠는 목 부분이 부드럽지를 못합니다. 껄끄럽습니다. 그 셔츠를 입고 다니면 목이 불편합니다. 손이 자꾸만 목으로 갑니다. 껄끄러움 때문에 무슨 일을 하면 잘 집중을 못합니다. 기도를 해도 깊이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결국 그 셔츠가 새것이고 유명 메이커이고 또 폼도 나는 옷이었지만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드러운 사람이 사랑을 받습니다. 부드러운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선택을 받는 것입니다. 늘 뻣뻣하고 강한 사람은 피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하고는 만나고 싶지도 않고 대화도 하기 싫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부드러운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잘 훈련된 말처럼 하나님이 고삐를 당기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온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떠나라고 하시면 떠났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면 했고, 하나님이 놓으라고 하시면 놓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부드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3.화평함이 참된 지혜를 가진 증거입니다(17,18절).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피스메이커입니다. 마 5:9절 말씀에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독한 시기와 다툼입니다. 스위스의 철학자 힐티는 “인류최대의 불행은 우리 개인 개인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한다”고 했습니다.
   본문에서는 지혜와 총명이 있는 듯해도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다면 자랑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참된 지혜가 아닙니다. 땅의 지혜, 정욕적인 지혜, 귀신의 지혜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마귀가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려고 합니다. 마귀가 사람의 마음을 장악하려고 할 때 사용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독한 시기와 다툼입니다. 교회 안에 교우나 가족 중에 한 사람 혹은 직장 안에서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생기게 합니다. 그 사람과 대화를 하다보면 짜증이 나고 미워하는 마음도 생기게 합니다.
   생활을 하면서 불편하고, 밉고, 보기 싫고, 상대하기 싫은 사람이 있다면 나의 좁은 마음을 이용해서 마귀가 나를 장악하려고 하는 시도입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이해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하시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상대를 보려고 노력하십시오. 사랑하면 모든 것이 예뻐 보이는 것입니다. 상대의 실수도 예쁘게 봐줄 수 있고 상대의 결정적인 잘못도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영국의 전 노조 위원장이었던 스타길이라는 사람의 연설을 하번 들으면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막 끌어 오른다고 합니다. 그 연설을 듣고 독일의 히틀러가 전 독일을 마귀적인 힘으로 다스릴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독한 시기와 다툼을 내려놓고 화평을 추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람을 미워하면 미움이 한 없이 솟아나옵니다. 마귀가 나의 감정을 건드려서 불편하고, 밉고, 보기 싫고, 상대하기 싫은 사람이 생기게 하거든 물이 계속해서 나오는 수도꼭지를 잠가버리듯이 주의 이름으로 물리치고 사랑하려고 노력하십시오.
   한때는 지하자원이 풍부한 나라가 부자 나라가 되고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기술과 지식이 없으면 선진국이 될 수 없습니다. 나라가 작다고 하더라도 지식과 기술, 지혜가 앞선 나라가 선진국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누가 더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가?’, ‘누가 더 지혜로운 사람인가?’ 하는 것이 성공을 결정하는 요인입니다. 그래서 21세기는 창의력, 즉 지혜의 시대입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가진 기술이나 배경도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혜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이 성공적이고 풍성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전 10:10에서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 1839∼1937)는 “내 사업의 성공비결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지혜다”라고 했습니다. 작은 부자는 자기의 노력과 수고로 이루어지지만, 큰 부자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냇가에 가서 물을 떠오는 것은 사람의 노력으로 되지만, 큰 비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여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유나이티드제약회사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 제약회사 사장인 강덕영 집사님은 한국에서 약을 개발해서 외국에 수출한 첫 번째 회사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국에서 개발한 약을 선진국에 수출하는 데 성공했을까요? 그는 세계 여행을 하며 선진국의 80%가 다 성경을 읽고 하나님을 믿는 나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선진국가에 약을 만들어 팔려면 나도 성경을 알아야겠다. 하나님을 알아야겠다.’ 생각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성경을 읽고 연구해서 약을 만들었습니다.
   G.M.F 다움생식회사 사장, 엄성희라는 권사님은 남편의 사업이 어려워지고 실패해서 재기의 가능성조차 안보이자 아무도 모르게 제주도로 도망을 갔습니다. 제주도에서 세를 얻어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이웃 사람들이 구역예배를 드리자고 했습니다. 억지로 예배에 참석을 했는데 이웃들의 기도를 받고 마음에 평안을 맛보게 되었고 그 이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새벽마다 목욕재개를 하고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경을 읽는데 창세기 1:29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이 말씀이 엄성희 권사님을 사장이 되게 하고, 회사를 세우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은 모든 채소요,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입니다. 그래서 남편과 같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음식’이라는 뜻의 G.M.F(God Made Food)라는 회사 이름을 정하고 무공해 유기농산물만을 사용한 생식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새벽기도를 드리고 회사에서는 8시 30분에 모든 직원들을 모아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회사의 생식이 전국적으로 판매되었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이 지혜의 근본이심을 믿으시고 성경 읽고 기도해서 인생을 변화시키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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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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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새벽 기도회 설교] 십자가 정신 (Special  Dawn Prayer Meeting)

십자가 정신

베드로전서 2:18~25

 

기독교 진리의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기독교에서 십자가가 빠지면 타종교와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기독교를 타종교와 명확한 선을 긋게 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주님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시다가 변화되신 사건을 변화산 사건이라고 합니다. 주님에게서 광채가 나고 주님의 옷은 세상에서 빨래하는 사람들이 희게 할 수 없을 정도로 하얗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주님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대화의 내용이 주님의 별세 즉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실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 만큼 십자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성경을 쥐어짜면 피가 나온다"고 했습니다. 구약에서는 짐승의 피가 흐르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피가 흐릅니다. 구약은 양의 피로 충만하고 신약은 예수님의 피로 충만합니다. 십자가가 성경 진리의 핵심입니다.
   본문은 그 당시 주인의 학대 속에서 고통당하던 종들을 위로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종들이 당하는 고난을 통해서 주님의 고난에 관한 내용을 끄집어내서 주님이 당하신 고난을 말하면서 그 고난이 주는 의미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들여다보며 십자가 정신을 생각 하도록 하겠습니다.    주님의 고난은 믿는 자들에게 본을 보이는 고난입니다. 21절에 보면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고 우리에게 고난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믿는 자들에게 모델이 되셔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십자가의 고난은 피하고 부활의 영광만을 받으려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부활의 영광의 본을 보여주시기 전에 십자가의 고난의 본을 먼저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본을 따라 가기만 하면 세상은 더욱 아름답게 변할 것이며, 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본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은 주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도의 '간디'가 하루는 가장 친한 친구로부터 “왜 너는 예수님을 존경한다고 하면서 믿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간디는 그 친구의 질문에 “만약 예수님을 올바로 따르는 신앙인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을 고려해 보겠다”라고 했답니다. 간디 주변에 있던 그리스도인들 중에 간디에게 주님을 따르는 본을 보여준 사람이 없기 때문에 간디는 기독교인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간디가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하숙집 주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간디에게 전혀 본이 되지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만약 하숙집 주인이 간디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본을 보여주셨다면 간디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것이고 그 결과 인도에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나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중국의 모택동 역시 젊었을 때 미국으로 건너가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는 두 가지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하는데, 하나는 기독교요, 다른 하나는 서구 문물입니다. 그런데 미국에 있는 동안 기독교인들에게 대단히 실망해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공산주의에 빠져서 중국을 공산화 시켰다고 합니다. 그의 주변에도 주님을 따르는 본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주님과 관련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중심으로 몇 그룹의 사람들로 나눠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룟 유다 그룹이 있습니다. 유다는 주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으며, 돈궤를 맡을 정도로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돈에 눈이 어두워 노예의 몸값인 은 삼십에 선생을 판 자입니다. 재물에 눈이 어두워 살고 있다면 가룟 유다 그룹에 속합니다. 여러분도 혹시 세상 재물에 눈이 어두워 예수를 등지고 살지는 않습니까?
   본디오 빌라도 그룹입니다. 빌라도는 세속적인 인기와 명예와 권세를 잃을 것이 두려워서 죄가 없으신 주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세를 지키기 위하여 생명의 주를 못 박은 것입니다. 누구든지 권력에 눈이 어두워 살고 있다면 이 그룹에 속합니다.
   구레네 시몬 그룹입니다. 그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주님을 구경하다가 로마 병정에 의해서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억지로 지고가는 십자가에는 기쁨과 즐거움과 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고 간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때에는 재수 없는 일을 만난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그것이 복이었습니다. 롬 16:13에 보면 구레네 시몬의 가족은 사도 바울이 인정할 정도로 귀한 가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구레네 시몬의 12대 후손이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 대제입니다.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사람입니다. 얼마나 축복된 일입니까?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고 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열매를 주실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 그룹입니다. 평안할 때는 주님을 위하여 목숨이라도 바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고난의 현장에서는 주님을 부인하고 십자가의 현장에는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고난은 회피하고 영광만 추구하는 신앙입니다. 모든 일에 앞장서는 것 같으나 헌신의 자리에는 나타나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사도요한 그룹입니다.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 때문에 십자가의 현장도 떠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목숨이라도 드려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위해서는 죽음도 감수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사도요한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하여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스스로 육체적인 고통을 선택한 분들이 있습니다. 중세의 수도사들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중세의 수도사들에게 영향을 가장 많이 준 사람이 토마스 아켐퍼스입니다. 그가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은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내용은 주로 자신을 너무 믿지 말고 이 세상의 유혹과 위험으로부터 피하라는 것, 자신을 바로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 자신에 대한 계속적인 비판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덕목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라고 말합니다. 그의 영향을 받고 「걸식교단(mendicant order)」이라는 것이 생겨났습니다. 결식교단의 대표적인 인물은 프란시스입니다. 프란시스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따라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는 말씀대로 제자들을 끌고 다니면서 이 집 저 집에서 걸식을 하면서 전도했습니다.
   저는 프란시스 같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삶을 닮으려고 했던 열정은 참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방법에 있어서는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정도 직장도 재산도 버리고 걸식하며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우리가 세상을 떠나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신앙을 지키며 믿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해마다 예루살렘에서는 골고다 언덕으로 가는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라는 길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가장행렬을 합니다. 저는 가장행렬 정도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필리핀에서는 실제로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십자가 처형을 재현합니다. 이런 것은 문제라고 봅니다. 필리핀에서는 고난당할 사람을 선택해서 십자가에 실제로 못을 박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람은 흠이 없는 청년으로 몸에 상처도 없어야 하고, 빚진 것도 없어야 합니다. 필리핀 천주교회는 십자가에 달린 그 청년의 생활을 평생 다 책임져줍니다. 이건 아닙니다. 주님을 본받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21절에 자취라는 말이 나오는데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어린이들이 글씨를 배울 때 점선으로 된 글씨본을 따라서 그대로 글씨의 모양을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또 하나는 본받아야 할 좋은 글씨체라는 뜻이 있습니다. 훌륭한 스승의 글씨체를 보고 영향을 받아서 열심히 노력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새롭게 해석해서 자기체를 만들어냅니다. 여기서 자취를 따라 간다는 말은 전자가 아닌 후자 즉 스승의 글씨체를 보고 영향을 받아서 자기 것을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 16:24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날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고난의 길을 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주님처럼 나무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저는 십자가 정신을 두 가지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십자가 정신이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내 뜻을 내려놓는 정신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 때 이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주님 자신은 십자가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아버지의 뜻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코뚜레를 한 소는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이 있어도 주인이 끄는 대로 끌려갑니다. 코가 아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본받는 생활이 그런 것입니다. 우리도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있어도 내 뜻을 내려놓고 주님이 원하시는 일, 주님이 원하시는 곳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소하고 다른 점은 소는 코뚜레 때문에 억지로 주인이 끄는 대로 끌려갑니다. 소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의지가 없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뜻이 알아지면 예수님처럼 스스로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을 모리아산에서 제물로 드릴 때 어땠겠습니까? 아브라함의 마음이 그것을 원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아들을 죽여 제물로 드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셨기 때문에 자기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의 순종을 보시고 이삭을 죽이지 못하게 하신 것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하셨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이 바로 십자가의 정신을 실천한 것입니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났지만 나 자신이 원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에 갈등할 때가 있습니다. 또 성령께서 감동을 주신 일과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이 다를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내가 원하는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감동을 따라는 것이 십자가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2.십자가 정신이란 타인을 위하여 나를 희생하는 정신입니다.
   주님은 누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까? 첫째는 아버지를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었기에 십자가를 받아드리셨던 것입니다. 둘째는 아버지가 택하신 사람들을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이 범죄 해서 저주 가운데 빠졌는데 그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타인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주님이 타인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는지 본문에서는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첫째, 주님은 믿는 자들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24절).
   24절에 보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변함없는 원칙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의 원칙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자연계와 만물을 사랑하십니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된 사람을 특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부족하고 연약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이 없고 이룬 것이 빈약하고 내 놓을 것이 없어도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몸과 마음과 행동으로 나타내는 직접적인 사랑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한 3: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 4:16)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을 미워하시지 않고 미워하실 수 없다. 이것이 사랑의 원칙입니다.
   하나님에게 또 하나의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공의의 원칙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죄를 가장 싫어하시고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은 죄와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죄 값은 반드시 치러야 합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죄 용서 받는 유일한 하나님의 방법을 계시하셨습니다. 그것은 흠이 없이 깨끗하고 정결한 양을 죽여 피를 뿌림으로 용서받는 것입니다. 성경은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왜 꼭 그렇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사람이 지은 죄로 사람이 죽어야 하는데 대신 양이 피를 흘리고 죽는 것입니다. 양의 생명을 바쳐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때가 되고 절기만 되면 양을 잡았습니다. 한 마리 깨끗한 양에게 지금까지 저지른 내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잡아 피 흘리게 하는 것입니다. 매번 매년 이 일은 제사장에 의해서 반복되고 또 반복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 양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양 한 마리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례요한이 외쳤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바로 그분입니다. 이 어린양의 죽음으로 저와 여러분의 죄와 저주가 벗겨졌고 자유 함과 평화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완전하고 영원한 구원을 위하여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죄인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이고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이 방법만을 고집하십니다. 왜냐하면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달리신 갈보리의 십자가는 나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로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십자가 밑에서 고백되어 지는 모든 죄를 깨끗하게 용서해 주십니다.
   사실 죄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은 모든 문제가 해결 되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문제가 죄로 인하여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문제가 십자가로 해결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보면 모든 문제가 죄로 인하여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은 후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습니까? 영적인 문제, 가정의 문제, 대인관계의 문제, 환경의 문제, 건강의 문제, 죽음의 문제 등등 이런 모든 문제가 죄로 인하여 발생한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십자가에서 해결하신 것입니다.
   노르웨이의 어느 도시 '양의 교회'라는 크고 유명한 교회가 있는데, 이 교회의 종탑 밑에는 한 마리의 양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이 교회의 이름과 종탑 밑에 어린양을 쌔긴 데에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 교회를 처음 세울 때 있었던 일인데, 교회 종탑을 만들게 위해 꽤 높은 곳에서 일을 하던 한 인부가 그만 실수로 발을 잘 못 디디는 바람에 미끄러져 떨어지고 말았답니다. 종탑 아래에는 단단한 아스팔트였기 때문에 떨어지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죽을 것은 뻔한 일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 그 밑을 양치기와 그가 이끄는 한 무리의 양떼들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모여선 사람들이 '저런! 저런!' 하고 있는 동안 그 사람은 지나가든 양떼 위에 '퍽!' 하고 떨어졌습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들었습니다. 모두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수군거리고 있는데 놀랍게도 인부가 아무 대도 다친 곳이 없이 그 자리에서 서서히 일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인부가 일어난 자리 밑에는 불상 하게도 한 마리의 어린양이 죽어 있었습니다. 이에 그 교회의 교인들은 사람의 목숨을 대신하여 죽은 그 어린양을 기념하기 위하여 짓고 있던 교회 이름 '양의 교회'라 하고 종탑 밑에 양을 새겨 넣었다고 합니다.
   교회는 양의 교회입니다. 어린 양되시는 주님이 죽으심으로 교회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둘째, 주님은 믿는 자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24절).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채찍에 맞으셨는데 채찍에 맞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24절에 분명히 말하고 있다. “저가 채찍에 맞으므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시 103:3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대표적인 2가지 은택이 나옵니다. 첫째가 죄 사함의 은택이며, 둘째가 병 고침의 은택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모든 병을 고치시며”
   병 고침은 하나님의 구속사업의 계획안에 들어 있습니다. 마 8:16,17절에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건강에 대한 믿음과 신유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이 채찍에 맞으신 이유가 우리의 나음을 위해서라고 하는데 우리가 병약한 자아상을 가지고 살아가면 안 됩니다.
   나를 대신해서 채찍에 맞으신 주님의 고난의 능력을 믿는다면 우리는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살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대로 역사해주실 것입니다. 94세에 돌아가신 할머니의 간증입니다. 그분은 50살 때 예수님을 영접했는데 예수님을 영혼 구원의 구세주로만 믿지 않고 병을 치료하시는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믿음대로 무병장수 하다가 94세에 세상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이분은 자녀들을 모아놓고 “너희들 지난 40년 동안 내가 아픈 것 보았느냐”, “나는 병 없이 본향에 가련다.” 하시더니 94세에 소천하셨습니다. 그런데 죽던 날 시계를 보시더니 “나는 오늘 10시에 집으로 간다.” 하시더니 9시에 성경 요한계시록 20장, 21장을 읽다가 10시가 되자 “예수님이 계신다. 나는 가야한다. Goodbye!” 하고 손을 흔들더니 의자에 앉은 채로 본향집으로 가셨습니다. 막 11:23절에 보면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병을 고쳐주실 것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손길을 통해서 병든 자들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2007년 1월 이스라엘 선교 갔을 때 일이 생각납니다. 우리 일행은 나사렛 교회에 가서 기도사역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우리가 한국에 돌아온 후에 나사렛 교회 목사님께서 우리의 기도사역을 통해서 C형 간염환자가 고쳐졌다는 이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셋째,주님은 믿는 자들을 더 이상 방황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25절에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알기 전에는 길 잃은 가엾은 양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제는 영혼의 목자 되신 주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에게 큰 위로와 평안과 희망을 주십니다.
   계22:16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주님은 우리의 인생의 나침반이라는 뜻입니다. 나침반이 발명되기 전에 뱃사람들은 별을 보고 길을 찾았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인생의 광명한 새벽별이 되셔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주님은 그 일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시 23:1 에 보면 여호와는 양을 인도하는 목자입니다. 목자이신 주님을 따라가면 방황하지 않습니다. 양은 목자를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길 잃은 양과 같은 우리가 방황하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인생의 방황이 끝납니다. 주님을 어설프게 만나면 믿는 것 같은데도 인생의 방황이 계속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님을 만났습니까? 인생의 방황이 끝났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인생에 방황을 끝내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은 주님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질병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인생의 방황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지신 것처럼 우리도 타인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희생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희생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높이심이 숨어있습니다. 빌 2:5-11을 보면 십자가 희생 뒤에 숨어 있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주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하나님은 주님을 부활시키시고 모든 자들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고 모든 자들로 그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백화점 왕으로 유명한 워너메이커는 자기가 가진 것으로 평생 타인을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분이 종로 2가에 있는 YMCA 건물을 지어준 분입니다. 그가 남을 위한 희생을 희생으로 여기지 않고 살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젊을 때 하루는 장미화원을 잘 가꾼 한 가정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 집의 주인은 그를 자신의 정원으로 데리고 가서 백장미와 흑장미 등 온갖 장미들을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장미꽃들을 꺾어버리기 시작했습니다. 몇 개의 덩굴은 꽃 한 송이만을 남겨두고 모두 가지를 쳐버리기도 하였습니다. 워너 메이커는 “아니, 왜 가지를 모조리 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좋은 장미 덩굴을 만들려면 가지를 쳐내야 합니다. 내가 가지를 쳐서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지를 잘라내 잃는 것이 없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워너 메이커는 그날부터 나누어주는 사업을 시작했고 결국 점점 더 큰 사업체를 갖게 돼 나중에는 미국의 대재벌이 되었습니다.
   남을 위하여 나를 포기하고 희생하는 것은 결코 나를 망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을 복된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도 십자가 정신으로 타인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야 겠습니다.
   오늘은 십자가 정신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십자가 정신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내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이 십자가 정신입니다. 둘째는 남을 위하여 나를 희생하는 정신이 십자가 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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