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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쓰는 은사를 지닌 선지자, 나훔

 

나훔, 그는 단 세 장, 마흔 일곱 절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사라졌다. 엘고스 사람이란 것 외에는 그에 관한 개인 신상도 밝혀지지 않았다. 비록 짧은 말씀을 기록해 전한 인물이지만 그는 자신이 활동하던 당시 최대의 제국 앗수르의 멸망을 거침없이 선포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기록 목적은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과 국가의 주가 되심을 밝히고, 앗수르로 표현된 불의한 국가와 백성은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먼저, 나훔이 상대해야 했던 대상은 니느웨 곧 앗수르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본문에서 발견하는 단서들로 추정해볼 때, 나훔이 활동한 시대는 아마도 주전 664년(3:8의 노아몬이 멸망한 시기)에서 주전 612년(니느웨 멸망에 대한 예언이 있는데, 그것은 주전 612년에 일어남)일 것이다.

 

이 시기에 나훔이 상대했던 니느웨(앗수르)의 가장 큰 특징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잔혹성이다. 고고학의 도움으로 확인할 수 있는 앗수르의 모습은 잔혹함의 대명사와도 같다. 또 한 가지 특징은 당시 최강의 제국이었다는 점이다. 이미 주전 721년에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사마리아를 초토화시킴으로써 그 힘과 잔혹함을 증명해 낸 초대형 나라가 앗수르지만, 그러한 앗수르를 향해 나훔은 하나님의 소명 앞에 순종해 강력한 심판의 경고를 거침없이 쏟아냈다.

 

오늘날 우리에게 물리적인 전쟁은 없을지라도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나훔과 같은 영적 거장이 되어야 할 사명에 초청받고 있다. 이 시대가 참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상대해야 할 거대한 대상이 아닌가! 나훔이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 담대히 말씀을 선포한 것처럼 우리 모두 더욱 말씀에 붙들리고 말씀을 보여 주어야 할 도전을 받는다.

 

한편, 선지자의 기본적인 임무는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아 그것을 들어야 할 대상에게 하나님을 대신해 전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훔은 조금 독특한 모습을 보이는데, 그것은 바로 첫 구절에 나오는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1:1)는 말씀이다. 이렇게 시작하는 선지서는 나훔밖에 없다. 선지자들이 전하는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누구도 예외가 없지만 나훔은 특이하게도 이렇게 ‘글’이라고 밝힌다. 이에 어울리듯 성경학자들은 나훔이 사용하는 비유의 표현들이 매우 탁월하다고 평가한다. 아마 나훔은 글을 쓰는 은사가 남달랐던 모양이다.

 

 

나훔이라는 인물을 연구하면서 지금 시대와 관련해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해 보았다.

 

첫째는 의사소통 수단과 관련된 것으로서, 인터넷이라는 매체로부터 시작해서 SNS로 발전하더니 마침내 인구의 절반이 훨씬 넘는 수만큼 스마트폰이 보급된 세상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런 세상 한가운데서 살고 있고, 그야말로 누구나 거의 제한 없이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고 나눌 수 있는 시대를 경험하고 있다.

 

둘째는 의사소통 내용과 관련된 것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 가운데 캐내고 또 캐낼 수 있는 이야기, 그러면서도 일시적이고 필요에 따라 약간의 의미를 주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생명에 닿도록 하는 이야기는 사실 하나님에 관한 것밖에 없다. 이렇게 오늘의 우리는 하나님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수단과 내용을 가졌다. 이제 우리 안에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글로 남기고, 그것으로 세상을 섬기는 것에 노력을 기울였으면 좋겠다.

 

나훔서에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나훔의 모습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나훔은 진노와 보복으로 점철된 메시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속마음을 선명하게 보았다. 나훔은 불처럼 쏟아지고, 바위를 깨트리며, 산과 바다를 녹이고 말리시는 것으로 비유되는 그런 하나님의 분노 가운데서도, 마치 깜깜하게 드리워지는 먹구름 사이로 내비치는 햇살 같은 하나님의 속마음을 보았던 것이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1:7).

 

한 가지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다. 이렇게 살벌하고 철저한 니느웨를 향한 심판의 말씀은 아직 실행되지 않고 남아 있다. 그러면서 히스기야를 중심으로 신앙의 개혁과 부흥을 가져온 남유다 백성에게 엄청난 위로와 하나님 안에 있는 승리에 대한 확신을 주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나훔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어떤 무서운 심판에 대한 말씀이 선포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더욱 빛나는 구원과 위로를 확신하게 하는 인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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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잘 경청하는 선지자, 아모스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강같이!”라는 메시지를 선포한 선지자로 유명한 아모스. 1장 1절로 가늠해볼 때, 그는 대략 주전 763년부터 753년 사이에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출신지는 남유다에 속한 드고아였지만, 사역은 북이스라엘에서 이루어졌다.

 

아모스, 그는 자신이 활동한 시대와 어떤 면에서 어울리지 않는 선지자라고 할 수 있다. 크게 두 가지의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당시 북이스라엘에 선지자나 제사장이라는 공적으로 세워진 성직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아모스의 등장은 어울리지 않았다.

 

둘째는 아모스 스스로가 밝혔듯이 그는 분명한 직업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모스의 말씀 선포 사역을 보면서 그를 대적하던 자들과 논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자신에 대해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7:14)라고 밝혔고, 동시에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이미 성직의 조직이 갖춰져 있었고, 아모스는 해야 할 일이 많은 목자요, 농부였기에 그가 말씀을 선포한다는 것, 그것도 심판의 말씀을 선언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어색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듣고 그것을 또 선포하라는 소명 앞에 순종했던 아모스를 통해 우리는 이미 기독교에 대해 널리 알려져 있고, 교회가 곳곳에 세워져 있고, 목회자가 넘쳐나는 시대일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자가 소명자가 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아모스의 소명이 더욱 도전이 되는 이유가 있다. 아모스가 자신의 사역 시기에 대해 ‘지진 전 이 년’(1:1)이라고 하는 것을 두고 학자들은 그가 적어도 2년 이상 활동했겠지만 그리 길게 선지자로서 사역한 것 같지 않다고 한다. 그 이후에는 아마도 원래 하던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일도 돌아갔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아모스는 왜 어쩌면 한시적이었을지도 모르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자신이 해야 할 많은 일과 손해를 감수하면서 심판과 멸망을 전했을까? 왜 환대는커녕 ‘왕을 모반한다’(7:10)는 강력한 저항에 휘말려 억울하기 그지없는 길을 갔을까? 아모스의 행적을 따라가 보면 이 시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커다란 도전을 받게 된다.

 

 

이제 아모스의 사역을 살펴보자.

 

첫째, 그는 거대한 힘의 논리 및 거침없이 횡행하는 힘의 현실을 거슬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무자비함의 극치요 쾌락에 사로잡히게 하는 힘의 세상, 이방 나라들에 대해 아모스는 힘의 논리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말씀을 선포했다(1장).

 

 

둘째, 그는 돈의 힘을 거슬러 선포했다.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8:4, 참조 2:6~7)라는 말씀처럼 당시 이스라엘은 한 마디로 ‘돈의 맛’을 아는 세상이 되었다. 사실 아모스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하며 활동하던 시기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버금갈 정도로 영토를 회복했다. 또 경제적으로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호황을 누리던 시대였다. 그만큼 돈의 힘은 더욱 위력을 발휘했고, 사람들은 돈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던 때였다. 아모스는 이처럼 요즘 식으로 말하면 경제 양극화가 심해진 것을 여과 없이 지적했다.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 찌꺼기 밀을 팔자 하는도다”(8:6).

 

 

셋째, 아모스는 진리를 떠난 관습과 관행 및 생명이 없는 전통과 맞서 싸웠다. 여전히 제사가 드려지고 있었고(5:22) 성직자도 있었지만(7:10), 실제로는 진리를 떠나 있었고 아무런 진정성이 없는 그야말로 관행이요 죽은 전통이 판을 치던 시대였다. 따라서 그는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2:4) 결국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2:7) 세상을 거슬러 그들의 실상을 드러내며 거침없이 말씀을 선포했다.

 

 

이와 같은 사역에서 아모스의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사람됨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하는 대목이 있다. 그는 이러한 선포가 필요한 이스라엘 백성의 본질적인 문제는 ‘여호와 하나님을 찾지 않음’이며(5:8)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임을(8:11)을 알았던 영성의 인물이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 뿐 아니라 그것을 마치 아비의 심정으로 “돌아오라, 돌아오라”고 반복하여 간곡하게 눈물어린 호소를 하는(4:6~11) 긍휼의 영혼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지금도 우리에게 간곡하게 말한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5:6, 참조 5:4, 8).

 

- 날마다 솟는 샘물 박삼열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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