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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이 넘는 노인이 되는 연습  그리스도인의 가정  
 
 

-- 어느 한 미국 할머니 집을 방문하고 나서 --

우리나라 평균 수명이 80대에 접어 들고 있다. 영아 사망, 교통사고 등을 포함해서도 그 정도 수치라니, 이제 우리나라도 본격적인 노인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은 노인이 될 준비를 잘하고 있는가?  이것은 단지 저축을 잘 하여 여생을 편히 보낼 준비를 하라는 질문은 아니다. 노인으로서 정말 존경을 받을 훈련을 제대로 하는가의 문제이다.

우리나라에서 경로사상은 이제 옛말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이것은 미국의 경우에도 특히 그러하다. 노인들은 코메디 프로에서 멸시와 조롱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오히려 노인들로 하여금 스스로 존경을 받을 훈련을 하도록 만들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나이 그 자체가 사람에게서 존경을 받게 하여(대표적으로 존대어), 나이가 들면 자동적으로 존대를 받게 되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젊은 사람들에게서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심을 우러나오게 하는 훈련은 잘 못하는 것 같다.

지난 주 나는 이곳에 사는 룻이라고 하는 독신 할머니를 방문하였다. 내가 미국인 교회 다닐 때, 친절하게 잘 대해 주신 분이다. 이제 나이가 80을 바라 보는 분이시다. 아직, Nursing Home에 갈 정도는 아니지만, 기력이 많이 떨어지셨다. 수퍼마켓에서 만났는데, 소변을 조절하지 못하여 기저귀를 찰 정도이지만 아직까지 스스로 할 수 있다고 하여, 남의 도움을 한사코 거절하셨다.  만남 김에 한 번 방문하고 싶다고 하여, 그 다음날 2시 쯤 갈 것이라고 약속을 잡았다.  그 다음날 1시 45분 쯤 할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 2시 20분 쯤에 오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시간에 맞추어 도착을 하였다. 20분 늦은 이유는 그곳에 도착하여서야 알 수 있었다. 룻 할머니는 머리를 드라이하여 머리를 단정히 가꾸어 놓았고, 옷도 화사한 것으로 갈아 입고, 화장도 진하게 한 후에 우리 가정을 맞을 준비를 한 것이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우리 아이 셋 모두를 위해서 선물을 하나씩 준비 놓았다. 처음, 할머니에 어색하였던 아이들도 선물을 받으니 금새 친해졌다.  큰 딸아이의 생일을 어떻게 알았는지, 케이크와 간단하 다과도 친히 준비해 놓았다. 그리고 그동안 찍어 두었던 우리 아이들의 사진들도 모아서 주었다. 80 먹은 할머니의 집이지만, 우리나라 신혼 방보다 더 깔끔하고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일반적으로 미국에서 70이 넘게 되면, 죽을 준비를 한다. 그 중에 하나는 자기 재산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변호사를 선임하여 유언장을 작성한다. 자식 중에 정말로 필요한 사람이 아니면, 유산을 물려주는 일은 거의 없다. 대부분, 교회, 학교, 사회단체, 장학금 등으로 기부를 한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교회는 나이든 분들의 의견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는다.  교회가 그들에게 잘 대해 주어야, 교회에 기부하는 액수도 많아 질 것이기 때문이다.

룻 할머니를 방문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어떻게 하면, 나이가 들어서도 젊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것인가?   나이든 사람들은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어"라고 폄하할 것이 아니라 왜 존경을 받지 못하는지를 반성할 필요가 있다.  기성 세대들이, 모두 잘 못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도덕성에서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탈법과 편법이 지혜라는 이름으로 정당화 되고, 쓸데없는 권위로 합리적인 의견을 무시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나이든 사람이 왜 존경을 받아야 할까?  나이 자체가 많다는 것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그들의 의견이 왜 경청되어야 할까?  단순히 경험이 많기 때문일까?  중요한 것은 나이가 많다는 자체가 아니라, 나이를 어떻게 먹었느냐일 것이다. 성경적으로 볼 때, 나이 든 사람이 존경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대한 증인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어떻게 인도하셨는가에 대한 증인이다.

룻 할머니의 경우, 기독교 학교에 대해서, 개혁주의 교리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분은 특별히 열심있는 성도는 아니고 그냥 일반적인 성도에 지나지 않았다. 예정과 부활의 확신 속에서 죽음에 대해서 너무나 자연스럽고 즐겁게 이야기하는 모습 속에서 참으로 신앙인으로 마지막을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볼 수 있었다.

한가지 더 예를 들면, 이곳에 있는 은퇴하신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한결같이 느낀 것은, 비록 음성은 약하지만, 젊은 목사들 보다 성경 해석과 주석에 있어서 훨씬 탁월하다 것이다. 한국의 경우, 대부분 은퇴하신 목사들이 설교를 들어 보면, 성경 해석 보다는 자신의 옛날 경험담을 무용담 비슷하게 하는 것과 너무나 비교가 되었다. 나이가 들 수록, 노인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자신의 옛날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보다 깊은 체험과 확신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젊은이들에게 존경심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이제 우리 나라도 노인 사회에 접어 들었다. 아무리 젊었더라도, 어떻게 늙어야 할 지, 어떻게 노년을 보낼 지, 어떻게 하면, 젊은이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살아갈 지를 깊이 있게 생각하며 준비할 때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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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하면 남인가?

 

 

의외로 많은 신자들이 잘 알고 있는 성경구절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중에 하나가 혼인과 이혼에 관한 예수님의 선언이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느니라.” 이 구절을 결혼 식 때 단골로 인용되는 본문이 때문에 모르는 성도들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을까? 이 질문에 처음에는 나눌 수 없다고 확신있게 대답하는 사람들도 점차적으로 나눌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 결론에 도달하는 순간,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 나눌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정말로 나눌 수 없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은 관심에서 사라지고, “어떤 경우에 나눌 수 있는가?”라는 질문만 난무하게 된다--마치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인간적이고 세속적 호기심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들은 “어떤 경우”를 찾아 해맬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이 “어떤 경우”가 음행이나 고의적 유기와 같은 성경적 원인에 한정되지만 나중에는 불치병, 정신병, 폭행, 도박, 우상숭배 등등으로 확대된다. 이것은 교회 역사가 증명한다. 그 결과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이혼의 원인은 ‘불가피한 경우’로 정의되어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실제로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이혼의 원인에 대해서 묻는 경우도 거의 드물다. “오죽 했으면 이혼 했을까?”라는 동정적 심정이 다른 모든 고려들을 앞도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속에서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시느니라(말 2:16)”라는 성경적 메시지를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한국교회가 말라기 3장 16절은 그토록 강조하면서, 말라기 2장 16절에 대해서 침묵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그 만큼 한국교회의 목사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성경본문에 치우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는 근본적인 명제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이 명제에 대해서 동의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혼이 혼인을 나누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이혼으로 나눌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 생각을 받아들이는 순간 신자들은 불신자와 결혼의 본질에 관한 한 아무런 실제적인 차이가 없게 된다. 불신자들도 이혼하면 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성경적 사고와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이혼이나 재혼과 관련하여 의외로 성도들이, 심지어 성경을 많이 아는 목사나 신학 교수들조차 잘 모르는 성경구절이 고린도전서 7장 10-11절 말씀이다.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이것은 이혼과 재혼에 대해서 가르침을 주는 몇 개 되지 않는 성경 구절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우리가 다루는 주제에 관하여 아주 명시적인 가르침을 준다. 첫째, 이혼을 해서는 안 된다. 둘째, 이혼을 할 경우에 두 가지 선택이 있는데, 하나는 독신이고 다른 하나는 전 남편과 다시 화합하는 것이다. 셋째, 재혼은 허락되지 않는다.

 

이 구절에서 적어도 확실한 것은 이혼이 결혼의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이혼이 결혼의 끝이라고 했다면, 사도 바울은 그 배우자에게 독신이나 전배우자와의 재결합을 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혼은 사람이 법적으로 나눈 것이지 하나님이 실재적으로 나눈 것이 아니다. 법적인 분리와 실재적인 분리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바울 사도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이혼은 혼인의 끝이 아니라 전남편과 다시 화해하기를 소망하면서 성령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참고 인내하면서 원수를 사랑하는 연습을 하는 훈련과정의 시작이다. 사람이 보기에는 이혼한 부부가 서로 남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 짝지은 것을 나누지 않았기 때문에 두 부부는 여전히 하나로 묶여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누구든지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라고 선언하셨다. 만약 이혼이 혼인의 끝이라면 왜 이혼한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음행이 될 수 있겠는가? 이혼은 재혼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분명한 가르침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 은연중에 “이혼하면 남”이라는 불신자들의 생각이 성도들을 지배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어떤 경우에 이혼할 수 있는가?”라는 바리새인적인 질문보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는 그리스도의 선언으로 돌아가야 한다. 교회가 “어떤 경우”라는 늪에서 헤어 나와 “끊을 수 없는 언약의 끈(the indissoluble bond of covenant)”이라는 성경적 혼인관을 붙들기를 소망한다. 이제 우리는 혼인을 사람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영적 안목을 갖도록 하자. 이것이 이혼과 재혼이 난무하는 세속화된 한국 사회에서 가정을 바로 세우고 교회를 튼튼하게 하는 길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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