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영혼의 동반자/부부주일(벧전3:1-7) 


부부주일(벧전3:1-7) 
                       부부, 영혼의 동반자

오늘은 부부 주일입니다. 어제는 5월 21일, 둘이 하나된다는 뜻의 부부의 날이었습니다. 부부 여러분, 주안에서 행복합니까? 가정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즐거운 나의 집"입니다. 함께 부르겠습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라.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꽃피고 새우는 집 내 집뿐이오. 오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나의 벗 내 집 뿐이라."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가정도 꽃피고 새우는 행복한 집입니까? 아마도 그렇지 못한 가정도 많을 것입니다. 왜 우리의 가정은 행복하지 못할까? 어떤 초등학교 2학년 어린이가 일기를 썻습니다. “나는 엄마가 좋다. 엄마는 나를 예뻐해 준다. 나는 냉장고가 좋다. 냉장고에 가면 먹을 것이 있다. 나는 강아지를 좋아한다. 강아지는 나를 따른다. 그런데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아빠는 자주 볼 수 없다”. 어떻습니까? 가정이 행복하지 못한 것은 바쁜 아빠때문입니까? 

   

한 할머니가 외출하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가 할머니를 납치한 후 할머니 집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마침 며느리가 받았습니다. “여보세요. 어머니를 내가 붙들고 있는 데 돈 천만원 가져 오세요. 그러면 어머니 풀어 주겠소”. 며느리가 말했습니다. “알아서 하세요”. 강도가 말했습니다. “뭐요? 돈 안가져 오겠다는거요? 그러면 어머니 다시 집으로 돌려보낼거요”. 그때 며느리가 다급하게 말했습니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계좌번호가 어떻게 되는데요?” 고부간의 갈등이 가끔 가정의 행복을 깨기도 합니다. 
   

한 부부가 에루살렘에 성지순례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장의사가 말했습니다. “시신을 본국으로 수송할 때는 5천불 듭니다. 그러나 이곳에 매장할 때는 100불 듭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남편이 한참 생각하다 말했습니다. “본국으로 데려 가겠소”. 장의사가 물었습니다. “아니, 왜 그렇소? 여긴 싸고 또 주님께서도 사흘만에 부활했잖소?” 남편이 말했습니다. “바로 그거요. 주님께서도 사흘만에 부활했는 데 우리 아내도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이런 남편 때문에 가정이 행복하지 못합니다. 오늘 부부주일을 만나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주안에서 행복할 수 있을까? 남편이 일찍 들어오고 고부간에 잘 지내고 남편이 좋은 마음을 먹기만 하면 될까? 우리 가정 행복의 가장 중요한 비결은 무엇일까? 오늘 베드로서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가정, 우리의 부부생활을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알 것이 있습니다.      

부부는 영적 관계에 있습니다. 

오늘 베드로의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7절입니다. 벧전3:7, “남편 된 자들아 이와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려 함이라”. 베드로의 이 말가운데 마지막 말이 중요합니다.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려 함이라”. 베드로는 지금 부부간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부관계를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기도” 이야기를 합니다. 기도가 부부관계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왜 베드로는 부부 이야기를 기도 이야기로 마치고 있습니까? 부부는 영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중에서 결혼한 사람은 베드로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고생할 때 그를 치료해준 적이 있습니다. 장모가 있었다는 것은 아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아내와 살아본 경험을 가지고 지금 부부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아내와 살아보니까 부부관계란 다만 밥먹고 사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자식 낳고 자식 키우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부관계는 영적인 관계라는 것입니다. 둘과의 관계가 좋을 때는 기도도 잘 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기도가 잘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베드로의 말에 동의합니까? 여러분도 베드로가 경험한 것과 비슷한 경험을 하고 삽니까?
   

성경이 말하는 부부관계의 신비는 부부는 영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성경 최초의 부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죄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죄가 없을 때 행복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했습니다. 창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은 아담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셨습니다. 하와에게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둘 가운데 있자 둘은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둘 사이에 죄가 들어왔습니다. 죄가 들어오자 둘은 불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죄와 함께 그들속에 들어온 첫 번째는 두려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자 아담이 말했습니다. 창3:10,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죄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게 합니다. 죄는 하나님 피해 숨게 합니다. 두려움과 함께 온 것이 죄책감, 수치감이었습니다. 그들은 죄짓기 이전에도 벌거벗고 살았으나 그것 때문에는 수치감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죄를 짓자 그들은 벌거벗은 것을 알았고 그것이 부끄러워 나무밑으로 숨었습니다. 죄는 자신을 부끄럽게 합니다. 현대인의 문제는 두려움, 죄책감, 수치감입니다. 이것들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사람들은 술과 마약과 수면제에 빠져 삽니다.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약이 수면제입니다. 원인은 죄인데 원인은 치료하지 않고 증상만 가지고 시간을 보냅니다. 

   



죄의 결과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관계가 파괴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 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너 때문이야” 책임을 전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떠난 인간의 사랑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영국의 한 박사가 문화가 다른 사람 5천명을 대상으로 연구했습니다. “가장 순수한 처음 사랑은 얼마나 오래 계속되었습니까?” 평균 18개월에서 30개월이었습니다. 그 뒤에는 기를 쓰고 노력해야 간신히 사랑하고 삽니다. 인간적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처럼 스스로 흐르는 것이 아닙니다. 목숨걸고 노력해야 간신히 살아가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죄를 지은 이후의 인간의 사랑입니다. 죄의 결과는 아담과 하와에게 삶의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하와에게는 해산하는 고통을, 아담에게는 땀흘려 일하는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고통보다 더 큰 것이 의존과 억압입니다. 창3:16절 뒷부분이 중요합니다.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리리라”. 하나님이 하와에게 한 말입니다. 하와가 아담을 원한다는 말은 하와는 남편없이는 못산다는 말입니다. 죄를 지은 이후 하와는 세 가지 이유로 아담을 의존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생계입니다. 남자 없이는 못먹고 삽니다. 둘째는 출산입니다. 남자없이는 애기도 없습니다. 셋째는 무서운 환경입니다. 남자없이는 자연재해도 이길 수 없습니다. 죄를 짓기 이전에도 하와는 아담없이 못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사랑해서 그랬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이후 하와는 약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비극입니다. 여자는 남자를 의존하고 남자는 여자를 억압하고, 창3:16 맨 마지막을 보십시오. “남편은 너를 다스리리라”. 다스린다는 말은 지배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범죄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죄짓기 전에도 아담이 하와보다 힘이 더 셌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아담이 하와를 힘으로 지배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지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억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서정윤이 “사랑한다는 것으로”라는 시를 썻습니다. “새의 날개를 꺽어 너의 곁에 두려 하지 말고 가슴에 작은 보금자리를 만들어 종일 지친 날개를 쉬고 다시 날아갈 힘을 줄 수 있어야 하리라”. 서정윤은 억압하는 사랑, 지배하는 사랑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날개를 꺽어 내 곁에 두는 것이 아니라 그 날개를 접어 쉬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죄를 들어오면 그렇게 안됩니다. 소유해야 하고 억압해야 하고 꺽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타락이 일어났습니다. 어제 오늘 생긴 일이 아닙니다. 아담 이래 죄의 결과로 생긴 일입니다. 요즘 통계를 봐도 그렇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결혼해야 한다. 이혼은 안된다. 결혼생활에 만족한다. 다시 결혼해도 현재의 배우자를 택하겠다”는 편을 택한 것은 여자보다 남자입니다. 이 말은 남자가 결혼이 주는 이익과 필요를 더 많이 받는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여자는 필요해서 결혼은 했으나 결혼을 통해 남자보다 훨씬 더 많은 희생과 고통과 손해를 본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황혼이혼이 늘고 있는 것입니다. 남자를 사랑하되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는 것, 여자를 보호하되 쓸데없이 억압하지 않는 것, 에덴동산에서 그렇게 사랑했는 데 죄가 들어오자 이것이 파괴되었습니다. 
   

죄로 인한 가정파괴는 이것뿐만 아니었습니다. 살인으로 형제가 형제를 죽이기도 합니다. 가인과 아벨입니다. 서로 속이고 미워하고 경쟁하고 싸웁니다. 사라와 하갈, 이스마엘과 이삭, 야곱과 에서를 보십시오. 하루 한 날 편할 날이 없습니다. 죄로 온 비극중 가장 비극이 있습니다. 그것은 근친상간과 성적 부패입니다. 야곱의 아들 유다는 며느리 다말과 관계하여 세라와 베레스를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두 딸과 관계하여 모압과 암몬을 낳습니다. 죄송한 이야기지만 지금 이스라엘은 유다가 낳은 불륜의 자식이요 지금은 요르단은 롯이 낳은 불륜의 자식들입니다. 이스라엘과 요르단만 그렇습니까? 인류가 다 그렇습니다. 한 인류학자가 수천년동안 존속했으나 지금은 사라진 전 세계 큰족속 80개를 연구했습니다. 한때 잘 나가던 이들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왜 사라졌을까 보았더니 답은 성적 타락 때문이었습니다. 성적 타락은 오늘날까지 세계를 파멸시키는 죄의 심판입니다. 그래서 부부관계는 영적인 관계입니다. 하나님 없으면 어떤 부부도 잘못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어떤 부부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죄가 있어서는 누구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벧전3:7을 이제 이해하시겠습니까?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려 함이라”. 부부는 기도하는 관계요 영적 관계에 있습니다. 
   

부부는 함께 구원을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베드로의 말을 이해해야 합니다. 1절입니다. 벧전3:1, “아내들아, 이와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여기서 순종은 헬라어로 “휘포타소메나이”입니다. 이 말은 두 마디로 되어 있는 데 “휘포”, “밑에”, “타소메나이”, “놓다”, 즉 “밑에다 놓는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영적인 관계에 있는 아내가 남편 그 밑에 자기를 내려놓으라고 말합니다. 왜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해야 할까? 이 말처럼 남자들이 좋아하는 말이 없고 이 말처럼 여자들이 부담스러운 말도 없습니다. 남자들은 졸다가도 “아내들이여, 남편들에게 복종하라” 하면 크게 “아멘”합니다. 
   

이것을 실제로 보여준 책이 있습니다 “아내여 항복하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미국의 로라 도일가 쓴 책입니다. 로라 도일은 본래 여성주의자였습니다. 그는 평소에 남자와 여자는 평등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남편과 늘 동등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남편에게 잔소리도 하게 되고 남편의 단점을 지적하고 충고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러면 그럴수록 가정은 행복하지 않았고 남편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남편은 잔소리로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남자에게 지배본능이 있는 것처럼 여자에게는 그것을 두려워하는 본성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여자라는 두려움입니다. 그것을 “마더 콤프렉스”라 부릅니다. 남자에게는 “라이온 킹 컴프렉스”라는 지배본성이 있고 여자에게는 그것에 저항하는 “마더 컴프렉스”가 있어서 이것 때문에 늘 부부가 갈등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한 사람이 내려놓지 않으면 안되는 데 남자가 내려놓기 보다는 여자가 내려놓는 것이 훨씬 쉽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남자는 자기를 내려놓는 것을 자존심으로 여기는 데 여자도 비슷하지만 대신 여자에게는 모성애가 있어서 더 쉽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로라는 가정평화를 위해 자기를 남편밑에 내려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존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을 존중해보니까 남편의 좋은 모습이 나옵니다. 남편에게 대들 때는 무섭더니 내려놓으니까 그렇게 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깨달았습니다. “아, 남자는 존경을 받을 때 좋은 사람이 되는구나”. 그때부터 불평대신에 감사를, 남편을 조종하기보다는 남편의 있는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경제권까지도 남편에게 맡겼더니 훨씬 더 많은 경제적 자유를 누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쓴 책이 “여자여 항복하라”입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입니다. 남자는 절대 잔소리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여자는 사랑받을 때 달라지고 남자는 존경받을 때 달라집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남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존경할 때 훨씬 남편이 더 착한 것을 보고 그렇게 하다 보면 가정도 행복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남자의 지배본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한 진의가 1절에 있습니다. 벧전 3:1 중간,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받게 하려 함이니”. 베드로가 말한 키워드가 “구원”입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좁은 의미의 구원은 죽어서 천국가는 것입니다. 왜 갑니까?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천국에만 계시지 않고 살아있을 때도 계시기 때문에 넓은 의미의 구원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아내들에게 남편에게 복종하라 한 것은 그래야 여자가 살기 좋고 그래야 가정이 평안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내와 남편, 남편과 아내가 하나님안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부부는 영적 관계에 있다”. 

   
여러분, 부부가 영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모시고 하루 하루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보면 사람이 가장 힘들 때가 언제인가 하면 배우자를 잃을 때입니다. 평소에는 늘 옆에 있으니까 그 존재를 모르고 삽니다. 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헤어지면 그것처럼 가슴아픈 것이 없습니다. 사람의 반쪽이 없어진 듯 허전하고 텅빕니다. 누가 아내잃은 남편, 남편잃은 아내의 마음을 알겠습니까? 지금은 가정을 이룬 훌륭한 시인 고은이 옛날 가정이 없을 때 이런 시를 썼습니다. “하루는 뒷산에 산책같더니 어디서 슬피우는 소리가 들리더라. 가까이 가보니 한 노파가 슬피 울고 있는 데 영감죽은 제삿날이라 한다. 영감죽고 신세는 바뀌어 시골을 떠나 서울에 와 입주 가정부가 되었건만 어젯밤 제사를 드려야 하나 주인 아줌마 눈치를 보느라고 드리지 못하고 오늘은 특별 휴가를 맡아 나와 아무도 없는 산에 와서 차릴 음식이 없이 눈물로 제사를 드리고 있다고 하더라. 처음에는 위로하느라고 이말 저말 하다가 나도 내 신세가 서러워 둘이 얼싸안고 실컫 울다가 내려왔다”. 내용 그대로입니다. 시골에서 남편과 함께 살 때는 몰랐는 데 남편 죽고 서울에 올라와 가정부로 일하는 어느 할머니가 남편 죽은 제삿날, 제사도 드릴 수 없어 산에 올라가 눈물로 제사 지냈다는 이야기. 고은이 지나가다 처음에는 위로하다가 자기도 아내없어 처량하여 실컿 부등켜 함께 울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직도 남편과 아내가 있는 여러분, 그래도 감사하지 않아요? 나같이 부족한 사람과 함께 살아주는 그 사람이 고맙지 않아요? 살다 보면 다투고 마음에 안들고 속상하지만 그대로 살아 있어줘서 감사하지 않나요? 가끔 마음이 안들 때 눈을 감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부터 10년, 20년, 30년, 누군가 먼저 죽을 텐데 그때 내가 남아 있을까? 그 사람이 남아 있을까? 그때 남아 있는 자나 떠나는 자 얼마나 슬플까? 그래도 지금 살아 있는 것이 감사하지 않을까? 그래도 지금 살아 있어 줘서 감사하지 않은가? 

   
지금부터 약 4백년전, 조선시대, 남편의 무덤에 애절한 편지를 남긴 한 아내의 편지를 아십니까? 편지를 미투리 짚신에 넣어서 무덤에 묻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 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시더니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시나요 나와 어린 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시나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수 없어요 빨리 당신에게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누구나 부부는 떠날 때 슬픕니다. 너무 너무 외롭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헤어질 때도 슬픈 데 다시 못 만난다고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만나 몇 십년 살다 다시 못 만난다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그래도 부부가 믿으면 이 세상에서 헤어져도 다시 만난다는 소망이 있지 않아요? 그런데 헤어지면 다시 못 만난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그러니 남편의 구원을 위해서, 아내의 구원을 위해서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다시 1절입니다. “아내들아, 이와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남편을 구원받게 해 이땅에서도 행복하게 살고 천국에서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아내가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아내가 구원받아 사나 죽으나 하나님안에서 행복할 수 있다면 남편이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그래서 어느 교회 장로님 부인은 남편이 아직 믿기 전에 남편이 퇴근만 하면 한복으로 갈아 입고 세배를 했답니다. “서방님, 오늘 하루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소녀 절 받으옵소서”. 3개월을 그렇게 했더니 제발 그만하라고 교회 나가겠다고 교회 나와 장로까지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제가 목회한 교회에서의 일입니다. 어느 부인은 자기 남편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중 남편이 술을 많이 먹어 간경화로 입원했습니다. 백방을 노력해서 안 낫는 데 자기가 몰래 간검사를 했답니다. 놀랍게도 자기 간과 남편의 간이 일치합니다. 그래서 남편 몰라 자기 간을 떼어 남편에게 이식했습니다. 남편은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서야 알고 아내 간인줄 알고 눈물로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역시 제가 목회했던 교회 이야기입니다.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아프리카에도 가고 선교도 하는 데 자기 남편, 자기 아내 구원하기 위해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부부는 함께 구원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부부는 서로에 대하여 구원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온 베드로의 말이 무엇입니까? 다시 7절입니다. 벧전3:7, “남편 된 자들아 이와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려 함이라”. 다같이 “소중히 여기라”. 부부는 서로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생명의 유업을 함께 받을 자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함께 간다. 살아 있을 때도 한 방 쓰다가 죽은 뒤에도 한 무덤쓴다. 제 고향 선산에 가면 무덤이 있습니다. 5대조 할아버지부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처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우리 집안을 예수믿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 5대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모든 무덤이 정해져 있습니다. 부모님이 묻힐 곳, 제가 묻힐 곳에 정해져 있습니다. 가끔 그 자리위에 서보면 이상합니다. “내가 죽으면 여기 묻히는구나”. 그런데 모든 무덤이 부부단위로 되어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한 무덤에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볼 때마다 많은 생각을 합니다. “아, 때가 되면 한 무덤으로 들어가는구나. 평소에 싸우지 말고 살아야 겠다”. 

   
여러분, 부부가 풀 것 있으니 미리 푸십시오. 풀지 않으면 무덤에서 싸웁니다. 하나님이 영적인 관계인 부부에게 주시는 최고의 신비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나의 아내, 나의 남편에 대하여 구원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배필”의 의미입니다. 창2:18절입니다. “여호아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여기서 “배필”이란 말을 보통은 “돕는 자, 조력자, helper”로 번역합니다. 그렇습니다. 부부는 일생을 서로 도우며 살아갑니다. 돕고 사는 부부가 행복합니다. 그러나 배필은 다만 “돕는자”가 아닙니다. 히브리어로는 “에셀”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이 “도움”이 “에셀”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말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돕긴 돕는 데 구원자로서 돕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구원자가 되고 아내는 남편의 구원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내가 일방적으로 남편을 돕고 남편은 주인 노릇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를 도와 “구원자”가 되는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구원자로 사는 모델이 있습니다. 예수님입니다. 3:1절에 “이와같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내들아 이와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와같이”가 무엇입니까? 2장 뒷 부분으로 돌아가면 벧전2: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는 아내와 남편과의 영적 관계의 모델을 예수님에게서 찾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누구같이 입니까? 예수님같이 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하나님 아닙니까? 그런데 그 분이 먼저 땅에 내려와서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종이 되다 못해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 말씀에 따라 철저히 순종해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이것이 좋은 아내의 모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 우주를 다스리는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권위를 지배로 쓰지 않았습니다. 섬기고 희생하고 죽었습니다. 이것이 좋은 남편의 모델입니다. 순종하여 받든 아내, 희생으로 사랑한 남편, 그 모델이 예수님입니다. 이것이 “이와같이”입니다. 

여러분, 부부는 서로에 대하여 예수님같은 구원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처럼 대신 죽고 예수님이 자기를 죽여 우리를 살리신 것처럼 서로 살리는 사람, 아프면 몸을 구원하고, 외로우면 마음을 구원하고, 기쁨이 없으면 정신을 구원하고, 아직도 하나님 모르면 하나님믿게 해서 영혼을 구원하는 사람, 그리하여 부부는 영혼의 동반자, 영혼의 친구, 함께 생명을 유업을 나누는 자, 이 세상뿐 아니라 천국까지 함께 갈 사람, 그것이 부부입니다. 그 축복을 모든 가정에서 누리기를바랍니다. 

부부주일(벧전3:1-7) 2011.5.22(일)
부부, 영혼의 동반자

"즐거운 나의 집"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라.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꽃피고 새우는 집 내 집뿐이오. 오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나의 벗 내 집 뿐이라."


부부는 영적 관계에 있습니다. 

벧전3:7, “남편 된 자들아 이와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려 함이라”. 

창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3:10,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3:16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리리라”. 
    

서정윤, “사랑한다는 것으로” 

“새의 날개를 꺽어 

너의 곁에 두려 하지 말고 

가슴에 작은 보금자리를 만들어 

종일 지친 날개를 쉬고 

다시 날아갈 힘을 

줄 수 있어야 하리라”. 

   
부부는 함께 구원을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벧전3:1, “아내들아, 이와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로라 도일, “항복하면 행복하다”

벧전3:1,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받게 하려 함이니”. 

벧전3:1, “아내들아, 이와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부부는 서로에 대하여 구원자가 되어야 합니다. 

벧전3:7, “남편 된 자들아 이와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려 함이라”. 

창2:18, “여호아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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