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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기독교 관습

 

 

덴마크의 어느 루터교회는 특이한 관습이 있었다.
교인들이 예배를 끝내고 출구를 향해 나아올 때,
모두가 오른쪽에 있는 흰 벽을 향하여 머리를 숙이고 목례를 했다.
수 백 년을 이어내려 온 관습이었는데,
왜 흰 벽을 향하여 목례를 하고 나오는지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 교회에서 보수 확장공사를 하면서 그 흰 벽을 허물게 되었다.
그런데 벽안에서 성모상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종교개혁 이전에 그 교회가 로마 카톨릭 교회였을 때
교인들은 마리아를 향해 목례를 해 왔던 것이었다.
그러다가 종교개혁 이후, 이 교회가 개신교인 루터 교회가 되면서,
성모상을 지우기 위해 그 위에 벽을 쌓고 회를 발라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교인들은 개신교가 된 이후에도
계속하여 회를 발라 안 보이는 성모를 향해 목례를 했고,
그 관습이 300년이 넘도록 내려왔던 것이다.
이후의 교인들은 왜 목례를 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면서
관습에 따라 목례를 해온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는 지 이유도 모른 체 하는 행동은 없습니까?

40여년 전에 미국에 와서 교회를 갔다가 깜짝 놀란 기억이 있다.
교회 앞 정원에 재떨이가 있었는데 예배 후 목사와 평신도들이 둘러서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기독교가 전파되며 각 나라 특유의 관습이 생겨왔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대표적인 한국 기독교 특유의 관습으로 주초(酒草)에 대한 지나친 죄악시와 새벽기도를 들 수 있다.
성경이 기록되었던 당시 담배가 없었으니 당연이 성경에는 담배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술에 대해서는 술 취하는 것은 방탕한 것(엡 5:18)이라는 직접적인 기록과, 방탕한 또는 타락한 행실과 술 취함이 한 구절에 함께 기록(롬 13:13, 고전 5:11, 갈 5:21, 벧전 4:3 등)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반면에 사도 바울은 만성 위장병을 앓고 있는 디모데에게 포도주를 조금씩 마시라는 권고(딤전 5:23)를 한다.
따라서 취하지 않게 조금 마시는 것은 별 탈이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런가 하면 잠언에는 포도주는 순하게 내려가니 보지도 말라고 엄하게 경고(잠 23:31)하고 있다.
그 다음 구절로 미루어 술의 중독성과 그에 따른 타락을 염려하였다는 생각이다. 여하간 술과 담배는 일시적인 육체의 쾌락을 위하여 추구하는 짓으로 그러한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롬 13:14)에 따라 끊고 절제하여야 한다.
분명한 것은 이 문제로 기독교 교인의 자격이 있다 없다 할 사유가 성경에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술과 담배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즐긴다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가 않다.
기독교가 한국에 전파되었을 때 한국남자 거의 모두가 술과 담배에 찌들어 있었다. 여기서 오는 병폐를 보고 선교사들이 기독교인이 된 증표로 술과 담배를 끊으라고 설득한데에서 이 관습이 시작되었다고 알고 있다.
그래서 한국인 사회에서는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것을 기독교 교인의 상징 중 하나로 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것은 개개인이 자유로이 선택할 일.
사도 바울은 어떤 음식을 먹고 안 먹는 것은 각자의 자유이고, 또 그런 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지만,
그 것을 보고 시험 받을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있다면 그런 자유를 유보하는 것이 아름답다고 가르쳤다 (롬 14: 1-21, 고전 8:1-9).
그러니 굳이 건강에도 좋지 않은 술과 담배를 고집하며 비 신자 또는 초 신자에게 손가락질 받는 것은 아름답지 못한 일이다.

새벽기도는 어떠한가? 성경에는 새벽기도를 하여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전혀 없다.
한국 교회들이 새벽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영적 교통이 이루어 졌고 또한 이를 통하여 교회들이 부흥하였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새벽기도가 본래의 의도와는 변질되기 시작하며 성도들 간에도 갑론을박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새벽기도가 한국교회에 토착화 되었을까?
이리 저리 연구를 해 보았지만 정확한 기록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만 여러 추측이 있을 뿐이다.
그 중 실명을 거론하며 유래를 설명한 것이 1907년경 평양 대 부흥 시에 선도 교도였던 길선주가 기독교로 개종하며 선도의 새벽수행을 도입했다는 설이다.
그런데 일반 성도들이 새벽기도를 쉽게 받아드릴 수 있었던 것은 새벽에 정한수를 떠 놓고 빌던 무속신앙과 불교의 새벽예불 등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토착화 된 새벽기도 참석을 성도들에게 권유하기 위해서 인용하는 성경구절은 마가복음 1장 35절로 예수님께서 새벽에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구절의 앞부분만 강조하고 뒷부분은 슬쩍 넘어가는 것이다.
새벽기도의 강점으로 치는 것 중 하나가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새벽기도를 하기 위해서 준비하고 차 타고 가는 모든 과정들을 생각하면 첫 시간을 드리는 것도 아니고 한적한 마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새벽부터 통성으로 기도하는 성도들도 있으니 한적한 곳도 아니다.
목사들과 이야기 해보면 대부분이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에 가서 8시나 9시경부터 한시간 정도 잠을 잔다고 한다.
그렇지만 평신도들은 새벽기도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서 아침식사하고 다시 일터로 나간다.
이런 저런 이유로 새벽기도의 합리성에 대해서 생각은 많아도 말하지 않는 것이 평신도들이다.
제단 위의 불과 성소의 등잔불이 꺼지지 않도록 항상 관리하는 것이 제사장의 책임(레 6:12-13, 24:3-4) 중 하나인데 현대에는 목사가 새벽제단을 지키는 일로 볼 수 있다. 
새벽기도가 믿음의 크기를 재는 척도가 되어서는 안된다.
새벽기도에 참석하기에 믿음이 깊다고 우쭐거린다면 그 보다 더 우스운 일은 없을 것이다

새벽기도에 못 나간다고 죄지은 것같이 생각할 이유도 없다.

중요한 것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기도했다면 그곳이 교회이던 침대 곁이건 관계가 없다는 생각이다.

교회에 가서 기도해야 더 집중이 된다면 기쁜 마음으로 새벽에 교회에 가서 기도하면 된다. 아무개가 안 나온다고 흉본다면 창피한 일이다.

기도만큼이나 개인적인 일도 없는데 너무 남의 눈을 의식하지 말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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